새롭게 들은 "공자왈 맹자왈 ..." : 곡부(曲阜)의 인상
<趙 斗 英>
지난 5월초 프로와 아마츄어들이산동성(山東省)의 공자와 맹자의 고향 곡부(曲阜)와 추(芻),
그리고 "태산이 높다하되..."의 그 태산(泰山)을 다녀왔다. 가 본 분들에게는 쑥스럽지만,
몇가지 깨닫고 느낀것이 있어 미쳐 가보지못한 분들을 위해 이 보고문을 쓴다.
그 곳은 뜻밖에도 서울과 가까웠다. 직항비행기로 1시간 반에 산동성 성도(省都) 제남(齊南)에 닿았고, 거기서 20킬로 내려가니 태산이요, 다시 25킬로 더 가니 곡부요, 또 10킬로 거리에 추가 있었다. 정확히 서울서 제주 서귀포에 닿는 시간에 30분만 더 보태면 곡부였다. 서울서 동경 시내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짧았다. 이렇게 가까운 고장인줄은 미쳐 몰랐다. 옛날 인천에서 많이 본 화교들 덕택이었는가, 사람들도 낯설지 않았다. 중국 남쪽지방이나 대만에 가면 흔히 보는 치아가 꺼멓게 썩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상한 향료냄새도 거리나 시내에서 풍기지 않았다. 게다가 곳곳에 짜장면 간판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곡부의 공자유적(孔子遺蹟)은 으리으리하였다. 나는 곡부가 한적한 시골이고, 공자유적도 별 것이 없었는데다 그나마 문화혁명때 다 때려 부셔서 없는 것으로 지례 짐작했었다. 그러나 곡부는 인구 30만의 逾돕첨?길도 넓고 고층건물도 많았다. 최근 20년만에 3만 인구가 그렇게 늘었다 했다. 유적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가 공부(孔府)였다. 이는 공자가 살았다는 집을 중심으로 넓혀 만든 것이다. 몇백년에서 천년이 넘는 향나무가 좌우 넉 줄 아득히 서있는 큰 길에는 천여년 묵은 돌 보도가 깔렸으며, 이 길을 십여분 걸어들어가니 정문이 나왔다. 그 안에는 북경 자금성에 버금가는 터에 누각과 전각 역시 수없이 많았고, 열 두 대문을 거쳐 가는데 그 대문마다가 단순한 대문이 아니라 목조 고층건물이었다. 모두가 몇백년에서 2천년이 된 건물이다.
도서관 건물도 있었다. 목조 삼층인데, 1층의 높이만도 현대식 건물 4층 높이다. 중심인 대성전 (大成殿)은 좌우 50메터, 전후 25메터, 높이 25메터로서 일본 나라(奈良)에서 본 동대사(東大寺)나 서대사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2천년 짜리 목조건물이다. 이것이 석축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자금성 황제궁 본각과 같은 크기라 한다.
유적의 두번째 부분은 공묘(孔廟)다. 이는 공자 사당을 모신 곳인데, 건물수와 크기는 공부 보다 적지만 그래도 상상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세번째 부분이 공림(孔林)으로, 공자의 무덤이 있는 숲이다. 숲은 약 75만 평이다. 서울 한양골프장의 두 배 크기다. 그 속에는 공자 후손의 무덤 십만 여 개가 함께 있어 다닐 때는 마차를 이용한다. 중국 역대 왕조(王朝)마다 경쟁적으로 추모비를 세웠는데, 송나라에서 시작해 청나라 대로 내려오면서 그 크기가 확확 커졌다.
그곳서 묵은 호텔이름은 궐리빈사(闕里賓舍)다. 대궐 동네에 있는 호텔이다. 사실 이 호텔은
공부(孔府) 높은 돌담 옆에 있는데, 경관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2층으로만 된 여러개 건물이 연결되게 짛은 것이다. 말이 삼성급(三星級)이지 모든 것이 특급인 시설이었다. 호텔 내 간이극장에서는 고유악기로 중국 고대음악을 연주하는 쇼단이 있어 화려한 고대악사 의상과 음악, 그리고 고전무용을 보여주었다. 손님석은 총 50석에 나오는 인원은 20여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곡부대학 예술학부 교수와 학생들이라 했다. 중국 타처에서 본 연예단과는 급이 틀렸다. 그런데 값은 중국돈 50원이니 우리 돈 7천원 꼴이다. 호텔 정문에는 크게 '한국 孔孟家鄕探訪團
환영'이라는 프라카드가 걸려 있었고, 점심과 저녁에는 그곳 시장(市長)이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학자 몇몇만 다녀갔지 한국에서 대규모 단체가 전세비행기를 타고 온 것은 처음이어서 그렇다 했다.
공자가 태어난 동네도 가 보았다. 황량한 산 기슭이다. 이구산(尼丘山)인데, 그 옆에는 오래 된 서원이 서 있다. 2천년이 넘었다 하는데, 그때부터 규모가 우리 것과는 달랐다. 우리의 독립기념관보다 약간 더 큰 규모의 공자연구원은 5년전에 짛기 시작해 지금도 짛고 있었다. 맹자의 유적은 공자 경우보다 적었다. 일부러 층을 만들어 규모를 항상 공자 것보다 적게 만들었다 했다. 다녀오는 길에 중국 最古書院인 수사(洙泗)서원을 들러 보았다. 우리 도산서원만한 규모다. 세계최고의 대학인 셈이다. 공맹유적의 단청(丹靑)은 아름다웠다. 현대적인 감각에서도 무척 세련된 색이다. 파랑색이 기조를 이루고 노랑색이 철저히 배제된 것으로, 집사람은 댓뜸 "지중해 색이네!"라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유학(儒學)이란 원래 이런 고차원적인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틈틈이 일행중의 전문가들이 나와 현장에서 즉석해설을 해주었다. 동양철학이나 유학과 교수들이다. 유교라면 위궤양에 걸린듯한 신경질적인 늙은이나 떠들 것 같았는데, 나서는 사람마다 티샤쓰를 입은 해맑은 젊은 학자로 거의 다가 국내박사에 서양박사다. 하바드박사도 있었다. 그러니 분위기가 좋았다. 이제는 유교공부도 저런 사람들이 하는구나 하고 감탄이 나오면서 가슴이 뿌듯해왔다. 인상에 남았던 말 하나만 여기서 하자 ... "지금까지는 중국문명이 하나로 간주되어왔는데, 근래 나오는 증거로 보면 세 갈래의 중국문명이 있었다. 하나가 황하유역, 산동성, 요동반도, 한반도를 반원형으로 연결하며 가운데에 황해와 발해만이 들어있는 지역의 문명으로 이를 동북부 문명이라 한다. 두번째가 양자강 상류인 한구, 중경,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있었던 중부문명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중국남부의 문명이다. 그런데 그중 발달된 것이 동북부문명인데, 여기에는 한국인 조상이 끼어 있어 그 기여도가 무척 컸다...우리는 그져 큰 중국의 변두리에 붙어 충실한 변방으로서의 역할만 해왔다고 알았지만, 사실은 중국 최고문명의 발전에 3분의 1 정도의 비중을 갖고 기여해 온 사람들의 자손이다...그래서 여러분은 이 산동성 사람들을 보아도 거의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마치 오랜 친구나 동네사람들을 오래만에 만나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왜 진작 이를 몰랐던가 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이 전문가가 하는 말이 "내 말은 요지음 나오는 발굴품에서 증명된 학문적인 의미이고, 중국학자들은 좀 전부터 이를 알면서 국제정치관계로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쪽에서는 금년도 봄에야 [한국학보]에 첫 정식논문으로 실었다"라는 것이다. 역시 오기는 잘 했다!
공자의 초상화도 보고, 공자의 조각으로 된 모습도 보았다. 이 역시 상상과는 달랐다. 영양실조의 말라빠진 늙은이가 아니라 고대로마의 전차(戰車)같은 마차를 모는 근육질의 전사(戰士)모습이었다. 또 그가 주장한 육예(六禮)중에는 말타기와 창던지기고 들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아는 꽁생원 선비가 아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어딘지 공자의 사상이 충효만 강조되어 선량한 백성으로서 상전만 잘 모시는 것으로 변형되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늦게 나는 道가 튼 것이다.
태산(泰山)에도 올라가 보았다. 어디서곤 지평선이 보이는 산동반도가 대륙에 오면서 처음 맞는 산이 태산인데, 평야지대에 뾰죽한 이 산이 솟아 있으니 높다고들 할 만 하다. 그러나 고작 1555메터가 아닌가. 이파(弛派), 심산(心山), 일산(一山), 후소(珝韶)라면 코방구를 뀌면서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할 이 산을 '태산'이라 불렀으니! 나는 물론 버스타고 중턱에, 그리고 케불카로 정상까지 맏바로 올라갔다. 내려다 보이는 마을 태산시(泰山市)에는 도교(道敎)의 한 본산으로 어마어마한 유적이 곡부 못지않게 있었다. 거기서 나는 태산 산신령이 앉아있는 송축영사(宋祝靈舍)를 갔었다. 역시 자금성 황제전 버금가는 목조 건축물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 때문에 곡부에 간 것이 아니다. 나는 공자를 대하는 초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가도 아니다. 단, 인연이 있었다. 26년전에 쓴 내 박사논문이 '공자의 孝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이었다. 그 당시까지 나온 공자의 우리 말 전기(傳記)를 모두 읽고 그를 정신과의사 입장에서 인간으로서 이해를 도모하고, 그가 왜 孝를 강조했는가를 그의 유년시대에 연결시켜 분석했던 것이다.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공자를 칭찬한 것인데, 문외한으로서는 무의식에 대한 개념이 없어 고얀 놈으로 보기 딱 좋은 것이었다. 논문심사때는 심지어 강직하기로 소문난 당시 대학원장 국사학과 韓모교수까지 곁다리로 앉아 있었었다. 신기했던지 이 논문이 마스콤을 탔고, 그러자 내게는 국내 孔氏가문의 항의편지가 쇄도했고, 드디어 국회 본회의에서 어느 의원이 "국가공무원인 국립대교수가 국가에서 받은 연구비로 쓴 것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아우성을 쳐 나는 문교장관, 서울대총장, 의대학장 순서를 밟아 내려온 문책에 답변을 하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국회에서 장관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해 답변 하겠다 해서 우선 급한 불은 껐다. 그리고 구성된 위원회로 성균관대 유(儒)학과장 유승국교수를 필두로 대법관, 신문사 논설위원, 변호사 한 명씩이 있었다. 다행히 柳교수의 '학문상의 전문가적 견해'라는 판정을 받아 나는 禍를 면했다. 고마우셨던 분인데, 지금껏 대면인사도 못드리고 있다. 마음속만으로 감사의 정을 지니고 있는 어려운 경우다. 그때도 나는 어렴풋하게 지금 내가 곡부에서 보고 온 공자像과 비슷한 인상을 지녔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건망증이 생겼다. 젊어 그랬던가, 논문내용은 어설프고 투박했지만 아이디아만은 참신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학교에는 휴일을 낀 하루 공식휴가를 내고 다녀 온 것이다.
공자왈 맹자왈...이제 나는 좀 더 자신있게 공자와 유교를 대할 수 있게되어 기쁘다. 그들은
가까운 데에 있다.
첫댓글 겸산의 박식함에 새삼 감탄하오. 중국의 Qufu 취푸 까지 나들이 하고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