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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 태조 누르하치 (1559 ~ 1626. 9. 30)
중국 청나라의 창건자, 초대 황제(재위 1616~1626).
성 애신각라.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 나중에는 고황제. 묘호 태조. 만주의 무순 동쪽 혼하, 흥경 분지의 한 곳에 위치한 건주여진의 한 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소자하 상류에 최초의 성인 싱징라오청을 구축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여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 1613년에는 우라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1616년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 연호를 천명이라 하였다. 그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으로 옮겼다.
후금의 성립은 명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명의 무순을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청하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명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무순 관외의 사르프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였고, 1621년에는 원동을 공략하여 요하 이동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요양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심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명의 영원성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4월 몽고의 파림부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그가 확립한 청조의 기초 위에 그의 아들들이 그 대업을 완수하였다.
제 2 대 - 태종 홍타이지 (1592 ~ 1643)
청나라의 제 2 대 황제(재위 1626∼1643).
이름 홍타이지. 시호 문황제. 태조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4대왕의 한 사람인 두이치 베이레라 불렸다.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커서 중망을 얻고 있었으므로, 1626년 태조가 죽자 후금국의 칸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천총이라 개원하였다. 즉위 당시에는 명나라와 교전상태에 있었으므로 국사다난하였으나, 만주인과 한인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뒤 외정에 나섰다.
1635년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의 옥새를 얻은 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이라 고치고, 숭덕이라 개원하였다. 1637년에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을 침공하였으며, 중국 본토에도 종종 침입하였으나, 중국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문관·육부의 설치 등 조직정비에 힘썼고, 청나라의 기초확립에 공적이 컸다. 심양 북릉에 묻혔다.
제 3 대 - 순치제 애신각라복림 (1638 ~ 1661)
청나라의 제 3 대 황제.
묘호 세조. 휘 복림. 시호 장황제. 태종의 제9자. 연호를 순치로 정하였으므로 순치제라 한다. 태종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제왕회의에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는 겨우 6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 도르곤(누르하치의 제14자)과 정친왕 지르하란(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가치의 제6자)이 보정왕이 되었다. 1644년 북경에 입성하여 중국 지배의 막을 열었는데 이는 거의 도르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653년 도르곤이 사망하자 친정을 펴고 도르곤을 추벌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왕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억제를 꾀하였다. 1659년 영명왕을 운남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다만 한인공신 오삼계 등 이른바 3번 세력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의 해결은 다음 강희제의 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정치체제를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의 폐정을 바로잡아 인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제 4 대 - 강희제 애신각라현엽 (1654. 5. 4 ~ 1722. 12. 20)
중국 청나라의 제 4 대 황제(재위 1661∼1722).
이름 현엽. 시호 인황제. 묘호 성조. 연호 강희.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건륭제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로 4명의 만주 기인이 보정대신이 되어 집정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을 맡았던 운남의 평서왕 오삼계, 광동의 평남왕 상가희, 복건의 정남왕 경계무와 그 아들 정충의 삼번왕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하고, 조운을 정비하며, 황하강의 치수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애혼성)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 준가르부의 갈단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에서 갈단군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2월 20일 병사하였다.
제 5 대 - 옹정제 애신각라윤진 (1678. 12. 13 ~ 1735. 10. 8)
청나라 제 5 대 황제(재위 1722∼1735).
성명 애신각라 윤진. 묘호 세종. 시호 헌제.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윤당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융과다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이라는 친전장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로 주비(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운남·귀주·광서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청해·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제 6 대 - 건륭제 애신각라홍력 (1711. 9. 25 ~ 1799. 2. 7)
중국 청나라 제 6 대 황제(재위 1735∼95).
이름 홍력. 시호 순황제. 묘호 고종.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이고 황후는 부찰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한인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 평정(1749), 대·소금천 평정(1776), 타이완(1788)·미얀마(1778)·베트남(1789)·네팔(1790·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 6회, 동순 5회, 서순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과 내순, 천수연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 만주인·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가 편집되고 《명사》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도 활발하였다.
제 7 대 - 가경제 애신각라옹염 (1760 ~ 1820)
중국 청나라 제 7 대 황제(재위 1796~1820).
이름은 영염이었으나 후에 옹염으로 고쳤다. 묘호는 인종. 건륭제의 열다섯째 아들이다. 건륭제 생존 중인 1796년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으나 태상황제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1799년 태상황제의 사망으로 친정을 폈다. 친정 즉시 권세를 부리던 건륭제의 총신 화신을 자살하게 하고 호북·사천·섬서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백련교의 난에 직접 대처하였다.
1802년경 난이 평정되었으나, 광동·복건·절강 등 남동해안에서 채견을 중심으로 한 난이 일어났고, 1813년 천리교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중 1부대가 북경의 궁성에 난입하였다. 또 회족·먀오족 등의 반란이 일어났고, 한편 외국세력도 아편을 들여오는 등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경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의 시대였다.
제 8 대 - 고광제 애신각라민녕 (1782 ~ 1850)
중국 청나라의 제 8 대 황제.
휘는 민녕. 연호에 의해 도광제라고도 일컬어진다. 인종의 둘째 아들로, 1820년에 즉위하였다. 그 무렵은 서양 자본주의국의 외압이 두드러져 국내가 어지러웠으나, 그는 치세에 힘썼다. 이슬람 교도의 반란(1825∼1828)을 진압하고 재정에 힘썼으나, 1839년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1842년 난징조약이 맺어지고, 서양의 힘은 청나라의 조정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내정에 있어 조운의 폐해와 지방관리의 쇄신, 소금의 사매를 금하여 재원을 지키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체제는 허물어져, 1850년 그가 죽은 뒤 반 년도 안 되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시문에 조예가 깊어, 《양정서옥전집》 40권을 비롯한 많은 시문집을 남겼다.
제 9 대 - 함풍제 애신각라혁저 (1831. 7. 17 ~ 1861. 8. 22)
청나라 제 9 대 황제(재위 1850~1861).
시호 현황제. 묘호 문종. 도광제의 제4자. 즉위 직후에 홍수전이 광서에서 거병하여 태평천국을 선언하였고, 이어 염당의 반란, 나아가 북방에서 러시아의 진출이 시작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하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점령하였으나, 만주인 관료는 당파싸움 등 이기적 행위에 몰두하여 무력 또한 약체화되었다. 이에 대영단으로 만주인을 물리치고 증국번·좌종당 등의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 중인 1856년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무력진출을 개시하여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다시 1860년에는 동 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프랑스군이 북경에 칩입하자 열하의 이궁으로 피난, 다음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제를 대신하여 동생 공친왕이 교섭을 맡아 톈진조약의 비준·교환과 베이징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때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이 개설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의 공사가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면서, 구미 세력의 중국 진출이 강화되었다.
제 10 대 - 동치제 애신각라재순 (1856. 4. 27 ~ 1874. 1. 12)
중국 청나라의 제 10 대 황제(1861~1874).
이름 재순. 시호 의황제. 묘호 목종. 9대 함풍제의 독자로서 어머니는 서태후이다. 유조에 따라 5세에 즉위하였으나 18세 때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처음에는 동태후·서태후 두 여인에 의해서, 후에는 서태후에게 실권이 장악된 채 통치되었다. 1873년 공식적으로 동태후와 서태후에 의한 섭정은 끝났으나 실질적으로는 서태후에 의해 집정되었으며, 실제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평천국의 난과 이슬람교도의 반란 등이 평정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자강의 촉진을 도모하는 등 내치·외교상의 안정이 회복되고 공친왕이나 한인 관료 밑에 국세가 일시적으로 만회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칭한다.
제 11 대 - 광서제 애신각라재첨 (1871. 8. 14 ~ 1908. 11. 18)
청나라의 제 11 대 황제(재위 1874∼1908).
휘 재첨. 묘호 덕종. 시호 경황제. 도광제의 제7자 순현친왕 혁현의 아들.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황제로, 사실상의 정권은 서태후가 장악하여 평생 동안 서태후의 전횡에 시달렸다. 치세하는 동안 이리사건 및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서구열강과의 관계로 가장 다사다난한 시대였다.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책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변법을 시작하였다.
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변법파의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고, 황제는 궁중에 유폐되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 열강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하자, 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서안으로 피하였는데, 그러한 탈출의 혼란을 틈타서 서태후는 황제가 사랑한 진비를 죽였다. 1901년 화약이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에 죽었고, 다음 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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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대 - 푸이 (1906. 2. 7 ~ 1967. 10. 17)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면서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해 세운 만주국의 왕.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의 아들. 1908년 3세로 애신각라가의 제 12 대 황제가 되어 선통제라 하였으나,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퇴위하였다. 1924년 풍옥상에게 쫓겨 북경을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에 피하였으며, 나중에 톈진의 일본 조계에 한거하였다. 만주사변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만주국을 집정, 1934년 왕이 되었다.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945년에 만주국이 붕괴됨으로써 퇴위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롭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되어 수감되었다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을 출판하였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북경 남서쪽 하북성 역현에 있는 청나라 황릉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되었다. 한편, 그의 저서 《나의 전반생》이 감독 B.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