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4장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1-21)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축복의 날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런데 14장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여호와의 날은,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고 말하고, 2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벌어질 일들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고, 그로 인해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은 약탈되고, 부녀는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은 절반이나 사로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아예 몰락을 당하다는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로서, 희망의 날이 아니라 절망의 날이며, 기쁨의 날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의 날로 다가오는 것이, 선지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왜 이렇게 대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던 민족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과 규례를 따라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마치 이방인들이 당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자들처럼 대하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들을 참된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큰소리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자신들을 위한 종교생활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여호와의 날에 비극적인 일이 있을 것임을 선포함으로써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에 있을 비극적인 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만약 이 일들이 장차 예루살렘에 있을 역사적인 일로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장차 겪어야 할 사건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내용들은 오늘 우리와는 관계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되어질 일이라면, 우리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본문의 내용에 대해 무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에, 그처럼 비극적인 일을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현재의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예루살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존의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된 예루살렘을 세우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2절 끝에 보면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으로,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잡혀가는 비극적인 일을 겪지만, 남은 백성이 있어서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 남은 백성들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존의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시고, 참된 예루살렘을 세우신다면, 참된 예루살렘은 기존의 예루살렘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이 어떤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어진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은 남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지탱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이들이 힘이 있어서, 이방 민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고 승리하여, 자신을 지킨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남은 백성은 어떻게 해서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3절에서 이런 말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방나라를 모아, 예루살렘을 치게 하시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치심으로써, 남은 백성을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은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가서 싸우심으로써, 끊어짐을 면하게 된 사람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남은 자라고 말합니다.
13:7-9절에 보면, 남은 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9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들으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남은 자가 부르는 부름에만 응답하시겠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고 있고, 따라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만이 참되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끊어짐을 당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단과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에만 모든 소망을 두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에, 남은 자의 부름만 들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끊어짐을 당하지 않게 된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세력과 싸우심으로 인한 승리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모두 하나님에게서 찾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자기 육신을 더 채우기 위해서 부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자와 남은 자에 해당되지 않는 자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의 그 의미는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7-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는데, 그 날에 낮도 밤도 아닌 빛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낮도 밤도 아닌 빛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빛과는 다른 차원의 빛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 있는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 동해로 서해로 흐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동해와 서해는 바다를 의미하고, 성경에서 바다는 곧 죽음의 세상을 비유합니다,
이것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란,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에 없는 빛이 세상에 있어서, 어둠을 비추게 되는 그 날을 의미하고, 또한 죽음과 저주의 세상에 생수가 흘러들어서, 생명이 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그 날입니다. 빛이 되시고 생수가 되신 예수님이, 죽음과 저주의 세상에 오신 그 날이,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는 날이고, 우리를 평안히 서게 하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저주에서 건짐 받는 자가 있게 되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끊어지지 않게 하신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 남은 자는 자신이 어떻게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을 존재하게 한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사랑만 의지합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에, 손에 쥐어진 것으로 사랑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과 연단에서도,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만을 높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남기신, 참된 예루살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남은 자는 이방 나라 가운데서도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마다 여호와께 올라와 경배하고, 초막절을 지킨다고 합니다.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지금의 풍성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확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게 된 것을, 풍성함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없는 자가 초막절을 지키지 않은 이방인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명에 속한 남은 자를 세우심으로, 저주에 속한 자가 누구이고, 생명에 속한 자가 누구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은, 나중에 임할 심판의 날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시는, 하루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가 곧 나의 생명이심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의 날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