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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4)】 "메시아는 내속에서 발견해 낸 생명" 信天함석헌
메시아는 내속에서 발견해 낸 생명
“내가 아니다.” 한다든지, 그렇게도 안하고, 어떻게 늘 그렇지 않아요? 저 사마리아 여인보고 말할 때도 그렇고, “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줄 줄 압니다.” 야,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다.”(요한4:25~26) 그런 정도로, 또 소경을 고쳐준 다음에도 “네가 그리스도를 믿나?” 하니까. “아유, 거 누군지 가르쳐 주세요. 그럼 나 믿겠습니다.” “지금 너하고 말하는 자가 그 사람이다.”(요한9:35~37) 그러니까 “내가기다.” 분명히 말하지 않아요?
차라리 “내다.” 그러면 더 알아듣기 쉬운 거 같은데. 그렇겐 말 안 해요. 그럼 “아니라” 한 것도 아니고, 그럼 그건 왜 그러냐? 그건 문제가 본래 성질상 그래요. “내가기다.” 그래도 거짓말이 되고 “내가 아니다.” 해도 거짓말이 되고, 그건 말로 할 수 없는 거 아녜요? 그런데 본래 참 자리라는 건 다 그렇지 않아요?
저번에도 그랬습니다만, “내가 아버지다, 내가 아버지다” 하는 건 아마 의붓아비지 진짜 아버지 같으면 안 그럴 거다. 진짜 아버지 같으면 아버지라 말로 안 그래,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아버지 노릇하는 데가 중요한 일이지. “아버지다, 내가 아버지다” 그러는 데가, 정말 아버지 노릇을 하면 애가 저절로 그땐 그 아버지라 부르게 될 거예요.
그런데 고아를 기계적으로 데려다 놓고 내가 저것들 아비노릇을 해야겠는데, 너무 급해서, 네게도 아비노릇을 해주면 저절로 그러겠는 걸, 처음부터 날 아버지라 그래야 된다, 그러는 게 그 너무 형식적인, 그러니까 예수님 그러지 않아요.
양과 목자에게 비겼습니다만, 양에 대해서 목자노릇을 해주면, 목자 노릇을 하니까 양이 알아듣지 않아요? 그러면 그만인 거지. 거기다 “내가 목자다, 기다,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명한 말씀 안했어요. 뭐라고 말로, 말로 발표할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원인이 참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친구 지간에도 “나는 네 친구다.” 친구로서 해주면 그만이지. “나는 네 친구다.” 뭘 그러겠어요. 우리 자신의 일에 비추어보면 잘 알지 않아요? 하여간 그랬는데, 이들은 그것 때문에 바꿔 놓고 구하는 사람들, 자기네 욕심 잔뜩 있고, 그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사람한테 갈려고 그러니까, 그렇게 해가지고는 진리를 모른다고. 사뭇 그렇게 해가지곤 모르는 법이야. 그러니까 자꾸 속게만 마련이고, 어느 뭣에 눈에 가려워지게 마련이야.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을 안 해줘. 왜 그런가 하니, 아무 때나 나셨기에, 진리는 제 속에서 열려서, 속이 열려서 아는 거지. 밖에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게 중요한 거. 한 마디로 요게 중요한 겁니다. 메시아는 내속에서 내가 발견해낸 생명인 거지, 메시아라서 “내가기다.” 그렇게 해서 내 승리를 요구하게끔 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뭐, 메시아라고 해도 좋고 진리라 해도 좋아, 하나님 해도 좋습니다마는….
내속에서 내가 알아보게 되는, 그러면 하시는 일은 하시는 게 자기의 일이 있을 거예요. 그것대로 하면, 자기는 자기 속에서, 자기 열심으로 찾는 게 있어야 하지. 언제든지 이건 저기서 누가 다 돼가지고 메시아라 하면, 기성품이 다 돼가지고 나한테 와서 이럭하면, 내가 그때 시녀 같다, 그건 그렇게 가지고도, 밖에서 와도 그 승인이 될 리가 없어. 그렇게 하는 게 와서 “기다.” 하면 협잡꾼이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 일으켜진 거고. 그렇기 때문에 몰라본 거고.
그러니 아주 그전에도 안타까워서, 말 안 해준 거고, 안타까운 거 같지만, 말 안 해주는 데가 거기가 참인데, 왜 그런가 하니, 아무 때가서도 말해야 되는 거 아니라, 네 마음이 열려서 알아봐야 되는데, 알아보면 되는데, 곧 여기 선 자리에, 곧 메시아가 언제든지 그래. 난 그러게 “너와 말하는 내가 그로다.” 하는 게, “너와 말한다.” 하는데, 예수가 “내가 너와 말하고 있잖아? 내가기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메시아에 대해선 태도가 옳게만 되고 보면, 어디에서든지 메시아, 방안에 있어도 만나는 거. 길거리에 나가서도 만나는 거. 밖에서도 만나는 거.
어느 시간에만 만나는 거 아니라, 어느 곳에 가야되는 거 아니라, 방금 저기, 저기 있는 곳에, 나 있는 그곳에, 내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그러니까 와있다면 언제부터, 벌써부터 와 있는 거. 안 온다면 영원히 안 오는 거. 열리지 않으면 영원히 안 오는 거. 열렸으면 벌써 언제부터 와있는 거. 시시각각으로 오는 거. 이제 고건 이론적으로 그렇습니다만, 현실에 부족한 우리로 하면 어떤가 하니 늘 출입이 있습니다. 들고 나고 가 있습니다.
만일 요렇게, 고 어느 때, 우리가 늘 온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엔 마음이 우리도 깨끗한데 갈 수…. 고런 땐 알아봐요. 하지만 지나가면 그만 또 어두워져요. 그러면 우리는 고 경험은 있습니다. 그걸 미루어 보고나면 알 수 있지 않아요? 그래 이들이 찾긴 또 찾지만, 찾는 그 태도가 잘못됐는데, 잘못된 고점을 가르쳐 주자는 게 예수님의 목적이야. 그러기 때문에 그 하늘나라 거를, “땅의 거를 말해도 네가 모르니 하늘나라 거를 말하면 어떻게 알겠냐?” 하늘나라의 거를 직접 말 안 해요.
자기 스스로 깨지기 전에는 못 깨친다
왜 그런가 하니, 해도 몰라. 하면 점점 더 몰라. 그런 말씀이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않는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마태 7:9) 개가 천하다든지 돼지가 뭐 해서 그래 주지 않는다는 것 아니라, 그 정도를 봐서 알아볼 수 있는데다 주지 말이야. 알아볼 수 없는 데 주면 몰라도, 보고 주는 나만 도리어 손해를 받는다. 비유로 해. 그러니까 마음의 열린 그 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제자들이 알아듣는 제자들이, 외따로 있을 땐, 그땐 직접 말을 해요.
그러니까 “이제는 비유로 말씀 안 하시고 우리에겐 그대로 말씀하시니 참 좋습니다.” 그걸 알아듣는, 그건 벌써 다 열린 사람들이야. 마음이 열리지 못 한사람은 문을, 마음이 열리도록 해요.
마음은 가서 강제로 열지도 못하거니와 열라하지 않아요. 그건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마음이 열릴 때까지, 그게 그 방법이 이제 비유로 자꾸 그래서, “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마음으로 깨달을까 두려워한다.”(요한12:40) “점점 더 모르게 말한다.”그런 말이 있습니다. 있는 대로 도리어 말해주면 몰라. 반동이 생겨 모르니까, 그 사랑이 있으니까, 진리는 진리의 법칙대로, 진리는 진리에, 참은 참에, 수단도 참에 의해서 주게 생겼지. 참을 가져다가 거짓방법으론 줄 수가 없잖아요? 거짓방법으로 하면 벌써 참이, 참이 안 되니까,
그래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얼른 보기엔 아주 잔혹한 거 같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 하지. 사람을 못살게 이렇게 긴 것처럼, 아닌 것처럼 왜 이렇게 이러나? 그 점이 안타까워요. 그렇지만 고점 깨뜨리자, 깨뜨리자는 게 그러한 태도…. 모호한 태도 같지만, 그대로 무슨… 그래 거기 설명을 들어봐요.
“내가 이미 말했는데 너희가 듣지 않는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거 한다. 그러나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10:25~26)
그럼 양으로 될 사람이 따로 뽑혀있습니까? 이래서 이렇게 하면, 미리 선택론이, 옛날의 예정론이 나와요. 예정이란 깊은 의미로 하면 예정이 있는 줄 압니다만, 적어도 형식적인 말로하면 어폐가 있어. 잘못이 생기는 거야. 아주 144,000으로 뽑은 사람이 있어서, 그 다음의 건 멸망하는 걸로.
어제도 들었습니다만, 아주 가까운 친구데, 아주 가까운 친구데, 나도 둘이 가까운 줄 알아요. 가까운 친구사인데, 와도 밥도 안 먹고 간다는 거예요. 왜 그 사람, 저 박 장로교에 속해있는 사람이라서,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하고는 같이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게 그 자기네들 참, 아주 어딘지 철저하게 옳은 것을 행한다는 마음에서 하지만, 그게 분명히 걸리는 데가 있어요. 그 걸린 데가, 그거 자기가 스스로 깨지기 전에는, 못 깨치거든, 아버지도 못 깨치고, 예수님도 뭐 할 수 없지. 제가 아는 건 못 깨칩니다. 그러니까 “성신을 거역하는 자는 용서 못 한다”(마태 12:31) 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굳어지려면 자꾸 더 굳어지는 거고…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딱 미리부터 뽑아둬. 요 자식은 구원 얻은 자식, 요 자식은 구원 못 얻을 자식,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게? 뭐 할라고 미리부터 구원 못 얻을 걸 미리 만들어놓고 연극을 한단 말인가? 그러 거는, 그런 형식노름에 빠져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거는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나? 안 열리나? 하는 거를 믿으라고 하는 거를 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거지.
내편으로 한단 땐 뭔고 하니, 내 죄가, 내 이 죄가, 이거 성경에 용서 받을 죄 있고, 용서 못 받는 죄가 있다는데, 내 지은 죄가 용서 못 받을 죄나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은 그건 죽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상태가 벌써 죽은 건데, 마음으로 하면 성경에선 몰라. 용서받을 죄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좌우간 그냥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 졸라대고 살려달라고. 그래야 하지만, 이 세상일이라면 아마 안 그럴 거예요.
다 사형선고 했다고 해도 “아이고, 어떻게 살려주소. 어떻게 별수가 없겠습니까?” 하고 대들지. 사형선고가 있다면 할 수 없지. 그러고 말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서로 문이 하나이어서, 이쪽과 저쪽이 되나? 나냐? 너냐? 하는 걸 따라서, 마음이 달라지는 증겁니다.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내말 알아들으려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주석이라면 요한복음 1장 처음에 있는 말인데,
“빛이 세상에 왔어도 안 받는다.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받질 않는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준다.”(요한1:9~12) 그럭하면 그거는 하나님의 자녀란다고 보통 사람들을 말하는 거 아니야. 인간적인 의지에서 난 것은 인간 정욕으로 난 것도 아니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난 것도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를 가서 놓고 여기를 갔다 비교를 해 양과 목자의 관계.
누가 그 예수의 양이고 누가 아니냐? 예수님의 편으로 하면 누굴 편애해? 누군 오고 누군 오지 말라고, 미리 작정한 거 아닌 거예요. 자기 말을 알아듣나? 안 듣나? 이쪽에서 메시아지만 말이야. 아까 얘기대로, 메시아기 때문에, 진리기 때문에 강제하지 않아. 억지라는 게 없지 않아? 할 만큼 다해,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지, 목숨을 버리지만 양은 양 터에서 또 할 거 해야하지. 이렇게 상대적인 거지.
이 유대사람들의 생각은 자기는 할 걸 아무 것도 안하고, 메시아가 와서 모든 걸 다해주고 그러는 신앙은, 지금은 몰라. 가톨릭은 모르겠습니다만, 신교에도 그런 신앙이 상당히 뿌리박고 있잖아요?
그건 산 관련이 못되고 죽은 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는 것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데는 말하지만, 그저 전세 버스를 내다가 거기다 모두 쳐 박아 주고, 거저 실어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거 은혜라는 걸, 나 자꾸 하는 말입니다만, 은혜라는 걸 너무 강조하는, 은혜가 그런 은혜가 어디 있겠어요? 정말 은혜는 내가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해줘.
사람인 다음에는, 내 마음이 열려서 그 아들 노릇하는 거, 아들 노릇하는 거예요. 아들은 물건이 아니에요. 물건 같으면, 이쪽에 있는 거 “얘, 안방에 와 있거라.” 잡아 쳐서 안방에 갖다놓으면, 자기 책상 밑에 갖다 놓으면 내 물건이지만,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야, 아버지한테 있어야 돼. 아버지한테 있어야 돼.” 뭐 열흘이 되던 스무날이 되던 타일러서, 제가 들어오길 기다리지. 끌어서 “이 자식아, 여기서 못나간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부자지간이 다 끊어져.
그러니 벌써 그만두게 되는 인연이지 않아요? 그래 그렇게 아니한다, 그래 난 늘 하는 말이,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시려면 길가에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 그러지만, 날더러 말한다면, 길가의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 안 만드는 데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운 데다, 만드시려면 벌써 만들었지. 그러나 능력으로 하면 그러는 하나님은 안 만든다, 왜 그런가 하니, 그건 아들이 아니에요. 돌로 만드는, 돌로써 아브라함 자손이 될 수 있나? 말을 해줘서, 깨달아서, 제 마음에서 우러나서, “아 그렇지.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그래야 아브라함, 그렇게 되기를 기다려. 싹이 날려면, 나기를 기다리고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물을 주고 기다리는 거지. 급해서 쪼개놓고 어서 싹이 나오라고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나님 그렇게는 안한다, 그게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다. 그래서 돋아나기가 참 어려워요. 참 어려워요. 이게 우러나서도 싹이, 아귀가 트려면, 그런 점을 몰라서.
그래 난 내양이요, 내양이요, 아니요 하는 여긴, 마르틴 부버 말한 대로 하면, 아이 앤드 다우(I and Thou)의 관계로 말한 건데. 그런데 똑 같은 건데, 사람인데도 나하고 둘 사이 관계, 아이 엔 다우(I and Thou) 관계도 될 수 있고, 아이 엔 잇(I and It)의 관계도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말로 부부지간이라고 하죠. 부부지간이라 한데도, 참 부부 관계는 아이 엔 다우(I and Thou)다, 나와 너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라면 말을 나와 너라 하지. 나 따로 너 따로 가 아니에요. 네가 넌지, 네가 난지, 모르고 부부의 한 살림, 사랑이 있을 뿐이지.
그런데 벌써 뭐 “요새 뭐 이러지?” 그렇게 되면 그건 벌써 “저 사람이 내 아내지, 저 사람이 내 남편이지.” 그런다면 그건 벌써 남편이라는 건 it이지.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Thou 가 너가 인격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참부부의 관계라면 그건 I and Thou 야. 나와 너의 관계, 산 관계 서로 살아있는 그 관계 속에 있어,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 고렇게 있다가 곧 그다음 순간에 I and it, 내게 한 대상으로, 생각의 대상이 돼. 객관이 되고, 객관이 되면 물건이지. 사람은 몸은 사람이지만 그것은 인격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부의 살림 속에서도 실지. 우리가 정말 참 아내와 남편노릇을 하는 시간이 몇 시간 있나? 대부분의 시간은 I and it 이지. 그러니까 늘 밤낮 불만이지. 왜 요새 내개 이렇게 해주지? 왜 이렇게 해주지? 그러는 건 벌써 아이 앤드 다우(I and Thou) 의 관계가 끊어졌기로, I and Thou 관계가 있고, I and Thou 속에 산다면, 곱게 보일 일도 있고, 밉게 뵈도, 곱고 밉고의 판단이 있을 리가 없어요. 잘했나? 못 했나가 있을 리가 없어. 그건 벌써 잘한다, 못한다, 믿겠다, 못 믿겠다, 뭐 어쩌고 하면 벌써 I and it 이지 말이야. 관련이, 뭐 산 관련이 못되고 죽었습니다. 죽은 겁니다. 식어버린 거니까, 그 점부터 고칠 생각을 해야, 그 다음에야 어떻게 보이나가 올 거지. 그 생각이 돌아가지 않고 내 벌써 판단의 대상으로, 지식의 대상으로, 감정의 대상으로 된 다음엔 그건 물건이지. 살아 있는 게 될 수가 없어요.
새로운 신앙이란 어떤 것이냐?
양과 목자라고 하면 “내가 저를 알고 저가 나를 안다.” 둘이 있지 않아요? 양인지 목자인지, 비유가 그렇지만, 그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너는 왜 나와의 관계에 그렇게 못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기네 속에 모시는 신이 따로 있어요. 그 신은 무슨 신이냐, 그러면 욕심이라는 신이예요. 우리의 요구 다 만족을 시켜주는 게 메시아지. 딱 그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안 돼. 아, 어디 가서 저 예수라는 사람이 그거 될까? 또 저 사람이 될까? 여기저기 고르긴 고르지만, 이 속에 있는 그 우상은 거두어치우는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걸 고 말을 열심히 듣고 “선생님 좋습니다.” 그래도, 그것만은 달라질 리가 없습니다. 그거 어느 겉에서 하는 말이지. 속에 들어갈 리가 없어! 그래 내 좀 안 된 말입니다만, 어떤 땐 이럽니다.
“약혼을 한 사람하고는 나는 서서 말도 안한다.” 왜 그런가 하니,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부부 집에 와도 괜찮아요. 약혼하고 연애하는 사람은 저가 잔뜩 해서, 다른 게 눈에 들어갈 새가 없어. 그 사람이 예배할 시간에 와 앉아도 연애하려고 와 앉았지. 본래 예배 보러 온 거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보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요.
하나님이 따로 있어요. 저 속에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사람 뭐하려고 만나냐?(웃음) 그러니까 그렇지 않다면 물론 대개 요 그래. 그런데, 비유로 하면 그렇단 말인데, 그럼 예수님이 “너가 내 양이 아니다” 하는 건, 사람을 본래 그 망할 물건으로 예정을 해 놓아서 그런 게 아니라, 너가 네게 대하는 태도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예수냐? 아니냐? 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진리라 할 때, 진리 아니라할 때, 진리를 어디라 너가 보냐? 무엇이 진리냐? 우리의 모든 요구를 만족을 시켜주는 것이 진리냐? 그런 게 아니야. 진리는 진리 그자체로서, 내가 나를 전부 드려 받치는 데가 거기가 진리지. 나 위해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야. 내가 진리를 위해 있게끔 마련이지.
태도가 그렇게 다른 건데, 그러니까 이들이 그래, “너는 아마 내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다.” 내양은 그래서 고 아래 있는 “내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양을 알고 내양은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을 것이다.”(요한10:26~28) 하는 것은, 내용을 말하면 새로운 메시아 관을, 새로운 메시아 관을, 새로운 신앙이 어떤 거냐를 제시한 거라 볼 수 있어요.
여기 “내양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영원한 생명이 뭔지 그들이 알았을 리가 없어요. 영원한 세계, 이건 적어도 신약전체지만, 이 적어도 요한복음은 많이 여러 번 읽어야, 예수가 말씀하는 이 영원한 생명이 뭔지 알아. 영원한 생명이란 거저, 거저 죽지 않고 거저 아주 오래오래 오래 산다하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가지고는 아마 전연 모를 겁니다. 낙제하고 말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요한복음의 영원한 생명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양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게 아까 말씀드린 거 대조해 생각해야 알아. 너희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아가 오기만 하면, 그저 적군도 다 물러가고, 우리나라가 그저 세계의 제일가는 나라가 되고, 먹을 것 입을 것 풍성하고, 흉년도 아니 들고, 그런 게 다 되는 줄로 알지만, 내가 양에게 주는 건, “나는 영원한 생명”, 그걸 이렇게 대조를 시켜 놓아야, 이제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혼토록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내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 그게 직접으로는 대답을 아니 하면서 자기네들의 가지고 있는 신앙과 대조해서, 이렇게 깨달으라고 해. 내양에다가 영원한 생명을, “너는 아마 내양이 아닌지 몰라.” 그래 그러는 데는 어떻게든 깨우쳐서, 자기네 우리로 끌자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양에게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날 위해 울지 말고 널 위해 울라”
“그들을 내손에 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왜? 하나님이 내게다 주신, 나하고의 그런, 양과 목자의 관계는 뭐로 성립이 되나? 하나님이 성립시킨다면, 그게 진리자체가, 생명 자체가, 진리가, 제가 성립시켜. 그러니까 예수님 편에서도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하지만, 사실은 양을 위해 버리는 거 아니야. 이제 쉽게 알아듣기 쉽게 번역을 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이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여기는 아버지가 무엇보다 위대하신 아버지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누가22:42) 하는 것이 양을 위해 죽는 걸로 나타난 거고, 양편으로 보면 그 사람이, 저 사람이 고아서 따라가는 거 아니야. 또 것도 역시 하나님을 위한다고, 진리를 위한다고 하니까, 본바닥이 하나 되는 데서 만나게 돼요.
겉으로 나타나면 하나는 목자라고 하고, 하나는 양이라고 그러지만, 그 이 만나는 거는 어딘가 하면, 가슴속에서 만나. 예수의 가슴속이자 우리의 가슴속, 가슴이란 말도 안 된 말입니다만, 아까 외적에 대해서 내적이라고 했는데, 그 근본바탕 되는 델, 거기가 하나님이라 하는 거. 생명이라 하는 거.
이제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만, 거길 가면 둘이 아니고 하나 되는 곳이야.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누구냐? 했어.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 속에서 빼앗을 거, 너희들이 세상적으로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지만, 그 메시아라 하는 거기서 또 다른 사람 빼앗아 가는 수가 있을는지도 몰라. 너희가 예전에 메시아라고 믿었던 사람들 있지? 그랬다가 그 사람에게 속았지? 그것도 망하고 다른 것한테 또 정복당하고 그런 일도 있지. 하지만, 이건 그런 거 아니야.
왜? 하나님은 절대자시니까 누구보다도 강해! “내손에 있는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 말이 이제 마지막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그 말에 아주 낙제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화가 나서 돌로 들어 치려고, 돌로 들어 치려고 하려는 태도도 또 마땅한 태도예요.
아까 안타깝다고 하는 태도가 옳았던 것처럼 이것도 옳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저 자식 제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 가만둬?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그런다,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다시 생각을 하면, 그게 알고도, 자기네 열심이 있기는 있지만, 모르고 그러니까, 참 깨닫지 못하고 하는 열심이, 열심이 도리어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깨치기 위해 야, “내가 내 뜻대로 하자는 거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선한 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해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했는데, 뭣 때문에 나를 돌로 때리려고 그러느냐? 우리가 옳은 일했다고 그러는 거 아니요? 당신이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사람이면서도 하나님과 자리를 같이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그러니까 그러는 거요. 하나님에 대해 모욕을 하니까, 우리가 그래 그러우.”
이것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저 자신이 하나님을 모욕을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 면목을 구하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내는 것 같지만, 고걸 속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에 관해서, 분노 하는 거 아니야. 지금도 다 그러지 않아요.? 전쟁을 왜하냐? “우리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 “세계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놈들이기 때문에 죄 없는, 진리에 반대하는 놈들은 죽여도 좋다.” 그래 가톨릭에서도 전쟁을 하라고 하고, 루터도 칼빈도 다 어느 “필요할 때는 전쟁을 해도 괜찮다.” 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렇게, 만일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인정할진대 하나님이 뭐냐? 하나님은 절대자라. 그보다 더 강한 이가 없고, 그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없고, 정말 하나님이란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걱정 안 해도 스스로 자기가 자기 면목 위주 해 가고, 뭐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을 한다고? 하나님이라면 모욕을 받을 리도 없고, 하나님이 모욕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 자기가 할 거지, 나 같은 게 있어서 하나님의 면목을 구해줄려고 그래야만 되리만큼, 그따위 존재가 하나님이 될 리 있어요? 걱정을 안 해도 괜찮아요. 하나님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우리가 우리 기독교 때문에, 우리기독교가 입힌 손상을 봐요. 야, “날 위해 울지 말고 널 위해 울어라”(누가23:28) 그게 다 진리를 밖에 두냐? 겉에 두냐? 그 태도에 다른 거.
유교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주자가 훌륭한 줄 다 알죠? 그런데 주자는 암만 그래도 이렇게 이 뭐라 할까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존중을 하기 때문에, 수단이라 하는 데는, 그런 데를 많이 생각을 하는 분이예요. 그런데 장횡거(張橫渠)가 그랬나? 그 이는 장횡거 인지, 육구연(陸九淵)인지, 그거 잘 모르겠어요. 아마 장횡거, 그 이는 좀 사상이 다릇습니다.
우리 기독교로 말하면, 이렇게 성령 편을 존중하는 이, 속의 깨달음을 존중하는 이, 다른 데, 주자가 지금으로 말하면 큰 도장이 있어서 수백 명, 삼백 명 사람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하는데, 장횡거가 찾아 갔나 그랬어요. 와서 말을 좀 해달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 제목을 뭐로 얘기 했나하니, “고지학자위기(古之學者爲己), 금지학자위인(今之學者爲人)이로다.” “옛날사람은 자기 위해서 공부를 하더니, 요새 사람은 남을 위해서 공부를 해.” 이거 사회공헌이요, 국가 위하는 거요, 유교를 위해서, 순왕지도(順王之道)를 위해서, 그러는 게 다 위인(爲人)이에요. 그것도 열심인 것 같지만, 그게 아니야. 사실 여기가 다 내 자신의 문젠데…
그래 그 얘기를 하니까, 주자가 옆에 섰다가 어쩌나 그러는지, 유월달인데, 땀이 나서 부채질을 했다는 거야. 속이 뜨끈뜨끈 부끄러워서 말이야.(웃음) 주자의 태도가 어딘지, 거기 가책이 돼서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마는, 참을 말할 때, 종교가 여기 속에 구원하는 거지. 그러니, 채 뭔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기독교 위해 열심을 내는 거,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낸다고 하는 게, 가짜? 진짜? 그러지. 정말 참 애국자가, 어느 애국이라는 소리 내본 적이,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일 찐데 그럴 리가 없어요?
겉의 구원이냐? 속의 구원이냐?
종교를, 진리를 정말로 위하는 사람일 찐대, 진리 위해 그런다하고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진리가 없어질 것처럼, 그러진 아마 아닐 겁니다.
아닐 건데, 다 세상은 어떤가 하니, 이런 사이비(似而非) 열심 때문에 잘못되지 않아요? 그럼 말이 “당신이 하나님을 모욕을 해 그런다.” 그러지만 사실은 뭔고 하니, 제가 모욕을, 제 속이 건드려져, 제 속에 모시고 있던 그 그걸 건드리기 때문에, 그래서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해부를 해보면 말이야.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따지고 들어가면 뭐냐 그러면, 당파주의입니다. 당파주의! 교회주의라 해도 좋고, 진리 그 자체를 위하는 사람 같으면, 설혹 반대되는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해도, 감정을 내서 그러지 않아. 왜? 감정을 가지고 진리가 옹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진리는, 진리는 자체대로 스스로 자기를 옹호를 하겠지. 내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천 사람이 달려들더라도, 까딱이 없는 게 하나님이다, 진리자체다, 그 점을 믿고 있는데, 밉다고 해서 그 사람 “저놈의 자식을 죽어버려야 된다.” 그래 왜? 공산주의자 죽여 버려야 된다 하는 사람은, 결코 데모크라시(democracy)가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공산주의자 죽이면, 죽이는 그 자리에서 벌써 데모크라시 정신이 없어졌는데, 어디 되나요?
그러니까 데모크라시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데모크라시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일수록, 공산주의 자식들 모조리 죽여 버리려든다고 그래. 그런가? 안 그런가? 보세요. 세상이 정치에도 그렇고, 종교에도 그렇고, 이러니까 이게 어렵습니다.
이러고 이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면목을 내는 것처럼, “이 자식아, 네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하니까 그런다.”그러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님에 모욕이 아니라, 자기가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서, 제가 감히 누구를, 자기네 믿는, 이때까지 믿던 그 종교의 이 기반이 흔들흔들 하니까, 거기에 불안을 느껴서, 그래 그러는 거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뭐라 그랬지? 성경을 읽어도 요렇게 추궁해 읽지 못할 꺼다.” 이건 시편에 있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고 했다.” 그러한 말이 기록되어있지 않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도 신이라” 하는데, 하물며 말씀을 받은 정도가 아니야. 직접 하나님한테 직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걸 자기가 체험을 해서 아들이라 하는 명령을 듣고, 그렇게 하고 그 사람이 자길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데, 그게 뭐야? 내가 성경에도 없는, 너 성경에 근거를 구해도 있는 말이지 없는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도 하나님이라”고 그랬으면, 하나님의 본뜻이 자기의 뜻대로 하는 사람을 대면,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을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요한14:10~11)
글쎄, 나 믿지 않는 것은 좋다. 내 한 일 그대로를 솔직하게 네가, 이게 허심탄회하게 너 속에 둘이 갈라져 가지고, 너 이미 있는 선입견을 딱 지키려고 그러고, 놓지 않으려고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빈 마음을 가지고 해봐. 그러면 인정할 터이니, 그걸 인정한다면 내가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모를 리가 있냐? 그러면서 알려주는 거, 그러니까 다시 돌로 치려고 그랬다, 아주 문제가 완전히 결렬이 된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대로 이름을 지어 그렇게 한다면, 겉의 구원이냐? 속의 구원이냐? 이들이 메시아에 대한 열심히 있기는 있어? 기성종교에 대해서 충성을 하기는 했어도, 그 정도라는 게, 내 이렇게 생활화된, 혹은 나 자신 내 몸에 붙은 종교가 아니라, 어딘지 거리가 있어. 나하고도, 내 살아가는 모든 것을 많이 복이라고 그러는데, 나 자신이 아니고 나 살아가는 수단에 대한 만족이니까, 그런 거니까, 나 자신 하고도 거리가 있어. (녹음4, 3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