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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98. [역경의 열매] 김신웅 (1-25) 간질병 총각과 결혼할래요… “미쳤냐, 꽃다운 나이에”
양반가 부잣집 18세 처녀였던 어머니 부모 만류에도 뇌전증 아버지와 혼인
수의사로 재직하며 38년간 청송교도소 재소자들을 돌봐온 경북 청송 진보교회 김신웅 원로장로(왼쪽)와 박혜심 권사 부부가 2019년 마산의 한 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경북 청도의 부잣집에 믿음 좋은 18세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옆집에서 혼례식이 열렸다.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이웃집에 살던 처녀는 담장 너머 혼례식을 구경했다. 주례자가 “신랑 입장!”을 외치자 30살의 신랑은 예복을 입은 채 하객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신랑의 외모는 모든 하객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씩씩하게 걸어오던 신랑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거품을 문 채 ‘꽈당’ 넘어져 버렸다. 신랑이 될 사람은 당시 ‘간질병’으로 불리던 뇌전증 환자였다. “속았다”는 소리와 함께 “빨리 끌어내”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랑이 될 뻔했던 그 남자는 친구들에게 업혀 동네 밖으로 사라졌다.
하객들은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신부 측 부모는 신랑 측 어머니에게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담 너머로 혼례식을 구경하던 처녀 역시 충격이 컸지만, 불현듯 이런 결심을 했다. “간질병으로 소문난 저 노총각이랑 결혼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지, 내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절대로 결혼할 수 없을 게 분명해. 평생 보살피고 사랑해줘야겠다. 저 총각이랑 결혼해야겠어!”
처녀는 개성 마씨 양반집 가문의 부잣집 처녀였다. 그 남자는 유복자로 태어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산양 서너 마리의 젖을 짜 겨우 생업을 이끌어가는 가난하고 초라한 청상과부의 외아들이었다.
결혼을 결심한 처녀는 부모에게 자기 생각을 말씀드렸다. 딸의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미쳤냐. 꽃다운 18세 나이에 어디 열두 살이나 연상인 지랄병 환자에게 시집을 가겠단 말이냐”라며 어르고 달래다 협박까지 해봤지만, 처녀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그 처녀에게 강하게 엄습한 것이다. 마침내 딸은 간질병 환자인 그 노총각과 결혼을 했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실제 이야기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머니의 긍휼이 아들인 내게 그대로 전수된 것이라고 말이다. 부족한 내게 사람들은 ‘청송의 천사’ 혹은 ‘재소자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내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부담스러운 별명이다. 하지만 부족한 내가 수십 년간 감호소의 죄수들을 위해 살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긍휼의 은사가 조금이나마 전이돼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정말 긍휼의 여인이었다. 아버지에게뿐 아니라 만나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긍휼을 몸소 선보이다 가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귀한 신앙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존중히 여겨질 일이 있다면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의 신앙과 성품은 자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다.
약력=1940년 경북 청도 출생, 경북대 수의학과 졸업. 청송제1감호소 교화위원, 청송제2감호소 종교위원, 청송교도소 교화위원, 대구보호관찰소 보호위원, 대구지검 범죄예방위원 역임. 교정대상 및 국민훈장목련장 수상. 현 청송제3감호소 교화위원.
* [역경의 열매] 김신웅 (1) 간질병 총각과 결혼할래요… "미쳤냐, 꽃다운 나이에"
* [역경의 열매] 김신웅 (2) 신앙 좋은 어머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사랑 독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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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신웅 (2) 신앙 좋은 어머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사랑 독차지
4대 독자로 출생, 어려운 이웃에 늘 베푸시는 어머니와 새벽마다 기도 함께한 아버지 기억나
김신웅 장로(뒷줄 왼쪽 첫 번째)가 부모님(첫째 줄 중앙) 및 3남 3녀 형제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나는 1940년 10월 9일 경북 청도군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3남 3녀 중 장남이어서 태어날 때는 4대 독자였다. 당시 외가에도 외증조할머니와 외할머니, 이모와 누나 모두 여자들뿐이었다. 나는 ‘귀한 아들’로 불리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나이가 12살이나 많고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면서도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4살 때쯤 뇌전증 발작을 두어 번 더 겪으신 뒤로 다시는 발병된 적이 없을 정도로 완치됐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경산으로 이사를 했다. 신앙이 좋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는 38살 젊은 나이에 경산교회 장로가 됐다. 아버지는 정 장로님이란 분의 철공소에서 근무했는데 장로님이 소천하신 뒤 우리는 다시 경주 건천으로 이사를 했다. 무일푼이었던 아버지는 귀한 동업자를 만나 건천제재소를 경영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고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이 된 것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를 떠올려보면 늘 베풀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여동생이 학교에 갈 때면 매일같이 도시락을 몇 개씩 더 챙겨주셨다. 아프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여분의 도시락이었다. 어려운 목회자 가정에는 쌀과 땔감을, 가난에 찌든 교인들 가정에는 음식과 물질을 나누며 사랑을 베푸시곤 했다. 오전 예배가 끝나면 오갈 데 없는 교회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쌀과 김치는 넉넉하게 퍼주셨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아버지는 새벽이면 나를 깨워 기도의 제단을 쌓게 하셨다. 새벽 예배를 마치면 단석산 아래 작은 동산으로 나를 다시 데리고 올라가 또 기도를 시키셨다.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손을 들고 이렇게 기도하게 하셨다. “햇빛같이 살게 하옵소서. 햇빛같이 살게 하옵소서.”
나는 무산중학교와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 채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찍 집을 나서려던 나를 아버지가 부르셨다. “신웅아, 오늘은 출발하지 말고 내일 가거라.” 이유인즉 지난 밤 불길한 꿈을 꾸셨다고 했다.
꿈에서 아버지는 새벽 기도를 하러 갔다. 교회 종이 울려서 종각 밑으로 가는데 갑자기 종 추가 떨어졌다. 달려가 보니 어떤 사람이 머리에 추를 맞고 쓰려져 새카맣게 타서 죽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나였다고 했다.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한참 뒤 새까맣게 탄 피부에 새살이 돋아나며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오늘 출발하면 사고가 날 것 같으니 내일 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 꿈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내 미래의 삶이 곤혹한 인생의 태풍으로 쓰러져 신음하다 다시 살아나는 형국이 되겠구나”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3) 수의사 일 싫어 투기 사업… 실패하고 길바닥 전전
축산학과 없어 어쩔 수 없이 수의학 선택, 노숙자 신세로 절망… 초등교사와 결혼
김신웅 장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64년 경북대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쓰고 수의학과 동기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60년 나는 경북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키우던 염소가 몇 개월 만에 수십 마리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 축산업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 경북에는 축산학과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공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간신히 이수 학점을 채우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도 수의사로 일하지 않고 큰 사업을 하고 싶었다. 주변 사람의 권유로 투기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재산도 모자라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헤어날 길 없는 참담한 삶의 연속이었다. 돈도 잃고 삶의 의욕도 떨어진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길바닥에서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
낙심과 절망으로 가득 찬 피폐한 삶이었다. 무료급식소에서 주는 점심 한 끼로 끼니를 때웠다. 이마저도 시간을 놓치는 날에는 온종일 굶어야 했다. 기차역 대합실 의자와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몸을 뉘고 잠을 잤다. 아버지의 꿈에서 죽어가던 내 모습이 현실화되는 것 같아 더 큰 절망에 빠졌다.
몇 개월이 흘렀을까. 내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더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경남 함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동물병원을 개설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내도 만났다. 부농 집안의 딸이었던 아내는 함양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었다. 캄캄한 터널 같은 절망의 동굴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아내였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게 아닐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아내를 만난 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됐다.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예비하신 것처럼 나를 위해 아내를 예비해주신 하나님이 너무나 감사했다.
개업한 동물병원은 잘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병원을 폐업하고 대구로 이사했다. 직장도 없이 어렵게 신혼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경북 청송군에 근무하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웅아, 내가 근무하는 이곳에 동물병원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와서 개업하고 살지 않을래.” 나는 무작정 이불 한 채만 달랑 들고 아내와 함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청송군 진보면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눈 앞에 펼쳐진 시골 전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청송이란 이름에 걸맞게 빽빽한 소나무 숲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또다시 실패를 경험하지는 않을까. 나도 나지만 나만 믿고 시집온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복잡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려하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는 아내와 함께 작은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씨 좋은 김동철 목사님을 만나 청송에서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4) “교도소 관련된 일 하지 말라” 아내 이혼 경고
동물 도살 검사비 문제로 감옥살이, 아내 덕분에 석방… 기도로 부채 해결
김신웅 장로(왼쪽)가 1967년 박혜심 권사와 결혼식을 올리며 사진을 찍었다.
청송에서 나는 동물병원을 개업했다. 공수의사로도 일했다. 공수의사는 군의 가축 방역을 맡아 가축 질병 검진이나 전염병 예방백신 접종, 구제역 차단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나는 소와 돼지를 도살할 때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한 번은 동업자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죄명은 뇌물수수. 당시 국가에서는 무료검사를 시행했다. 군 축산계는 이와 달리 개업한 수의사들이 동물 도살 검사에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는 것을 참작해 검사비로 소는 5000원, 돼지는 3000원씩 징수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검사비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업자가 나를 고발했다. 구속당한 나를 위해 아내는 동분서주했다. 청송군뿐 아니라 경북의 각 군에서도 일정한 검사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검사에게 알렸다. 아내의 노력에 나는 석방될 수 있었다.
1982년 8월을 나는 잊지 못한다. 또다시 큰 빚을 졌다. 2개월 안에 그 많은 부채를 해결되지 못하면 가족들과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주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서원이 담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절대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던 큰 빚을 주변의 도움으로 하루아침에 해결됐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 제 인생을 걸고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금식하면서 기도하던 어느 주일이었다. 청송교도소 제1감호소 복지 담당 지정수 주임이 대뜸 나를 찾아와 마태복음 25장 31~40절을 읽어보라고 했다.
“김신웅 집사님, 천국에 가시면 이 말씀을 갖고 심판하실 터인데 집사님은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그의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지 주임를 찾아가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 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감호생들 중에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45명의 교육생이 있는데, 한 사람당 2500원씩만 지원해주시면 한 달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작은 가축병원을 경영하는 수의사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이행하겠노라고 약속한 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평소 궁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던 아내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라 나와 딸 둘이 함께 생활하는 한 집의 가장이에요. 이 신문도 못 봤어요.” 그러면서 조선일보 사회면을 펼쳤다. 죄수가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보살펴주고 친하게 지낸 교도관의 집을 찾아가 일가족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그들을 돕다가 오히려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으니 제발 이 일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래도 이 일을 감행한다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5) 공부의 길 열어 준 우리 부부에 감사의 눈물 글썽
“엄마, 아빠 일 도와주세요” 딸 말에… 아내, 성령 임재 느끼고 교정 선교 허락
김신웅 장로가 1998년 청송교도소에서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인성교육 강의를 하고 있다.
교정선교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라 생각한 나는 계속 아내를 설득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유치원생인 둘째 딸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교회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엄마도 아빠 하시는 일 도와주세요.” 아내는 딸이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성령께서 아이의 입술을 통해 자신에게 경고하신 줄 알고 순종하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감호소를 방문했다. 교무과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현황을 설명 듣고 한 달분(45명)의 교육비를 냈다. 자매결연을 한 5명의 명단도 받았다. 새벽 기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일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일주일 후 아내와 함께 자매결연자들을 만나러 갔다. 교무과 직원의 안내로 들어서는 5명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폭력 전과 10범의 박영수(가명)는 세상 불만을 한몸에 지닌 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왔고, 우람한 체구지만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전과 7범의 전민수(가명), 절도 10범 정일홍(가명), 기술 절도 8범 김희범(가명), 같은 죄명의 8범 김용태(가명)가 있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왜 갇힌 자를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학력을 물었더니 박영수만 고등학교 중퇴이고 대부분 무학력자들이었다. 내게 보내오는 편지가 대필이란 직감이 스쳐 갔다. 나는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쓰지 않은 편지에 대해서는 답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교무계장에게 이들 전원을 교육생에 편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초등부 교육에 들어간 이들은 처음엔 글자인지 그림인지 분간하기 힘든 편지를 보내왔다. 날이 갈수록 밑받침이 거의 없던 그들의 편지가 조금씩 격식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한글과 숫자를 깨우칠 수 있도록 공부의 길을 열어준 우리 부부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전민수 형제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전했더니 청송감호소까지 가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비를 속이려 한다는 꾸지람이 가득 담긴 답장을 받았다며 보여줬다.
그는 출소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이 합격증을 품에 넣고 다니면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꺼내 보면서 내 인생의 길잡이로 삼겠습니다.” 그 뒤로 그가 광주에서 작은 건설업체의 감독이 돼 열심히 살고 있다는 반가운 회신을 받았다.
자매결연자 5명 중 2명이 다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나는 이 형제들을 통해 그들이 범죄를 하게 되는 데에는 무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6) 출소한 교육생들 변화된 삶 보며 힘든 사역에도 보람
달걀 장사하며 신학교 다니는 젊은 내외, 학원 강사 된 교육생 등 찾아와 감사 인사
청송제2보호감호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가 1993년 졸업 검정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을 당시 김신웅 장로가 격려회를 열어 축하해 주는 모습.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진보장학회를 설립해 지원을 이어갔다. 교육생들은 검정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는 등 기쁨을 안겨줬다. 전원 합격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해도 있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작업복 차림의 낯선 청년 한 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출소한 지 1년 된 그는 대형 화물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는데 “집사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내 도움으로 한글을 깨우쳤고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에도 합격해 운전면허시험까지 치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하루는 젊은 내외가 찾아왔다. 2년 전 출소한 교육생이었다. 낮에는 달걀 장사를 하고 밤에는 신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공부해서 어디다 써먹겠느냐며 여러 번 포기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던 우리 내외의 사랑 앞에 눈물을 머금고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 부부의 밝고 아름다운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김형태(가명·40)씨는 교육생들의 영어를 개인지도 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출소 후 우리 집에서 앞날을 걱정하며 며칠을 지냈다. 마침 서울에 있는 A학원에서 총무 겸 학원 관리인을 구한다는 소식에 취직을 시켜줬다.
그는 학원에서 틈나는 대로 강의를 청강했고 강사들로부터 영어 실력을 인정받았다. 어느 날 영어 강사가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휴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학원장은 그에게 대타로 강의를 해보라고 했다. 특유의 능변과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그는 수강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어엿한 학원 강사가 된 그는 150만원의 월급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휴일에는 청송까지 내려와 교육생들에게 노트와 볼펜, 교재 등을 구매해 주고 영어 특강도 했다. 그는 후배 교육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 40입니다. 이 나이에 공부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었지만, 슬기롭게 잘 극복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지 마시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우리 내외에겐 그날처럼 기쁜 날이 없었다. 한때 나는 청송감호소를 드나들며 ‘이 끝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보람 있는 일일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종종 들었다. 특별히 믿었던 형제들이 다시 교도소에 들어와 얼굴을 내밀며 “집사님, 죄송합니다” “형님 또 들어왔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일 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이 일을 꼭 해야만 합니까. 정말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섬김과 희생의 길이지만, 감동적인 변화의 열매들이 있었기에 낙심하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7) 소문난 문제수 “장로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교도관들도 두려워하는 재소자와 상담… 마음의 문 열고 자신 살아온 삶 털어놔
김신웅 장로(왼쪽에서 두번째)가 1991년 경북 진보교회 장로 장립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청송교도소에는 네 곳의 교정 시설이 있다. 그중 제2교도소는 전국 교도소에서 최고 문제수들만 차출해 수용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는 박길후 과장이 나를 찾아왔다. “장명한(가명)이라는 재소자가 있는데 장로님이 꼭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소문으로 분노 조절이 안 되는 문제수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나는 그와 만남을 꺼렸다. 그런데도 박 과장은 “그 사람이 장로님을 지목했으니 꼭 만나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제2교도소로 갔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길래 교도관들도 두려워할까.’
상담실로 들어서자 한 젊은 청년이 7명의 교도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내 앞에 앉았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는 머리와 목에 칼로 그은 끔찍한 흉터 자국을 내 앞에 들이대며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듯 신고식을 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런 사람한테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가진 모든 결점을 이야기하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나를 소개했다. “나는 교정 선교하는 진보교회 장로입니다. 부족하고 단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심각한 천식 환자여서 말을 많이 하면 숨이 차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가 쌓여서 힘든 날에는 누워서 지내야 합니다. 동물 분비물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데 동물병원도 경영하고 있죠. 연약하고 힘이 없어서 게으르고 나태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가진 악습과 나약함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도 내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내 이야기를 들은 명한이도 마음의 문이 열린 듯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기 자랑과 무용담, 조직의 보스들도 자기를 두려워한다는 이야기 등 상담은 한 시간 동안 계속됐다.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서다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장로인데 오늘 하나님 이야기를 한 번도 못 했네요. 우리 기도하고 헤어집시다.”
우리 두 사람은 시멘트 바닥에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어린 양이 하나님을 꼭 만나서 새롭게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상담실을 나와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교도관을 따라가던 명한이가 갑자기 뒤돌아서 뛰어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7명의 교도관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내 앞으로 온 명한이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장로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요?”
그날 오후 박길후 과장이 찾아와 “명한이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라고 물었다. 내가 “은혜 많이 받았다던데요”라고 말하자 박 과장은 정색했다. “장로님도 이제 교도소에 그만 오실 때가 됐네요. 교도소에 왔다 갔다 하시더니 이제 사기꾼이 다 되셨군요. 장로님,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교도소에 출근해서 확인해보면 될 거 아이가.”
***[역경의 열매] 김신웅 (8) 교도소 최악질 재소자에서 ‘하나님의 종’ 목사로
상담 후 옥중서 주님 만나 성경 열독… 출소하고 가족들 앞에 잘못 사죄
김신웅 장로(맨 왼쪽)가 2000년쯤 청송교도소에서 재소자들과 예배를 드린 뒤 교도관, 사랑의교회 교정선교부 성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튿날 저녁에 박길후 과장을 수요 예배에서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그래 명한이가 뭐라 카더노.” 박 과장은 “장로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명한이가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그날부터 성경을 보고 있습디다”라고 말했다.
두 달이 지나 명한이는 출소했다. 출소하는 날 교도소 정문을 지키고 있던 교도관은 명한이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저 사람 석 달 안에 여기 다시 안 돌아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거요.”
석 달이 지났다. 명한이 소식이 궁금했다. 출소자 한 분과 함께 새벽에 그의 집을 찾았다. 보고 싶은 마음에 새벽에 불쑥 찾아간 터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출소한 명한이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섭섭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소란을 피웠다고 했다. 옛날 같으면 밥상을 뒤집고 욕도 하면서 집을 뛰쳐 나왔을 텐데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했다.
옥중에 예수님을 만난 명한이는 가족들 앞에서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행동에 너무 놀란 아버지는 “내가 믿는 부처는 복은 주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없다. 만약 네가 변해서 새사람이 되면 내 손으로 저 불상을 다 버리고 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했다.
그 후 명한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원을 찾았다. 40일 금식 기도도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종종 무너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다. 상당 기간 암환자들의 마지막을 지키는 호스피스 봉사도 했다. 교도관이 석 달 안에 교도소에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했건만 어느새 2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지난해 4월 명한이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직 교도관 과장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더니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새사람이 됐다.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이 위대한 주의 종으로 변화된 것처럼 청송교도소 블랙리스트 1호 꼴통 재소자이자 악질 독종 죄수였던 명한이가 하나님의 종이 됐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명한이의 목사 안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문득 교도소에서 명한이와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설교자의 설교가 끝난 뒤 갑자기 사회자가 내게 격려사를 시켰다. 얼떨결에 강대상 앞으로 나간 나는 명한이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한 그대로 털어놨다. 꼭 필요한 주의 종이 돼 달라고 부탁한 뒤 격려사를 마쳤다.
교화 사역을 해오면서 나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해왔다.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명한이처럼 믿을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9) 신장 공여 수술 앞두고 찾아와 “장로님, 감사해요”
신원보증 보증해 준 출소자 감호소에서 사형수로 영혼 구원 꿈꾼 뒤 주님 믿고 회개하다 신장 기증키로
김신웅 장로(맨 왼쪽)가 1999년쯤 청송교도소 제2감호소 내 교회를 방문한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과 크리스천 배우들, 재소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재소자들이 출소하는 날이면 교도소 정문 앞에는 가족들이 모여 출소자를 초조히 기다린다. 나도 그들 옆에서 출소자들을 배웅한다. 징역 보따리를 들고 버스에 오르다가 나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 잘살아 보겠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출소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다.
출소 하루 전날 내가 챙겨다 준 출소복이 몸에 꼭 맞는다며 기뻐하는 여성 출소자까지 챙겨 보내고 막 돌아서는데 짧은 머리에 마른 체형의 40대 형제가 느닷없이 “내 차에 타도 되느냐”고 물었다. 출소자는 맞는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에 출소한 김동수(가명)라고 했다.
며칠 후 신장이식 공여자로 수술할 예정인데 그 전에 나를 만나고 싶어 청송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2년 전 출소에 필요한 신원보증과 취업 보증을 해준 기억이 떠올랐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그는 이런 간증을 들려줬다. 4년 전 감호소에서 예수를 전혀 알지 못했을 때 꿈을 꿨는데 사형수가 돼 있었다고 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사형장에 갔는데 목을 거는 밧줄이 눈앞에 일렁이고 있었다. “아, 이제 나는 죽는구나” 공포 속에 떨면서 밧줄 앞에 섰는데 자신의 영혼이 갑자기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기의 육신은 목에 밧줄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자신은 숨이 멎지도 죽지도 않았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라고 고함치며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꿈에서 깼다고 했다.
꿈을 꾼 뒤 그는 계속 죄를 짓고 살다가는 사형수밖에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예수를 믿기로 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중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펴낸 ‘나에게도 드릴 것이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기로 하나님께 서원했다.
2년 뒤 출소한 그는 장기기증 신청도 하고 검사도 했지만 두려움이 밀려와 병원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그렇게 또 2년이 지난 어느 주일, 이태희 성복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뒤 신장 공여자가 됐다.
병원에 가기 전 자신의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 1000만원을 불우이웃에게 써달라며 교회에 헌금도 했다. 신장 공여 후에는 장애인선교회에 들어가 지체장애인들의 손과 발이 돼 일생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장로님, 언젠간 천국에 갈 텐데 비록 제가 타락한 삶을 살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다가 왔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당당히 보고 드릴 수 있는 삶을 살기로 했어요. 장로님, 감사해요.”
그의 생각과 행실이 너무나 대견하고 고마웠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참회가 우선이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사랑을 베푸는 넉넉함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동수씨 때문에 감사함이 넘쳤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0) 비 새는 낡은 집 말끔히 수리해 준 출소자 형제들
우리집 방문했다 비 새는 걸 본 후 출소자들 모여 집수리하기로 합의
출소자 형제들이 1996년 비가 새고 낡은 김신웅 장로의 기와집을 수리하고 있다.
1996년의 일이다. 두 달 전 출소한 이명석(가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그에게 물었다. “너 왜 그래.” “장로님, 밖에도 비가 오고 방안에도 비가 옵니다.”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니 방 한쪽에 비가 고여서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빗방울이 똑딱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명석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수리를 하고 사시지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사십니까.”
나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몇 번을 고쳐도 워낙 낡은 기와집이라 이제는 포기하고 산다.” 그리고는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다가 빗소리를 듣노라면 음악 소리 못지않으니 비가 새지 않는 안쪽에서 편안하게 자면 된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새벽 기도를 위해 맞춰놓은 자명종 소리에 깨어 일어났는데 그때까지도 명석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제 비도 그쳤으니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라.”
새벽 기도회를 다녀온 뒤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명석이는 서울로 떠났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왕진을 다녀오니 낯선 봉고차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집안은 이사하는 집을 방불케 했다. 장롱과 책장 등 가구가 마당에 놓여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봤더니 10여명의 출소자 형제들이 대청소를 한 뒤 기둥과 지붕에 페인트칠하면서 비 새는 곳을 수리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장로님, 얘기 들었습니다. 비가 새는 집에서 주무신다고 해서 저희가 한마음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날 서울로 올라간 명석이는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출소자 형제들에게 일일이 연락했다. ‘비가 오는 안방에 태연히 잠을 주무시는 장로님이 너무 딱하니 시간을 내서 집수리해드리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빠듯한 일상이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장로님을 비 새는 집에서 살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합의하고 만사를 제쳐두고 내려온 것이다.
형제들은 3일간 함께 숙식하면서 불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우리 집을 새집처럼 말끔히 단장해놓고 생업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고마워서 점심이나 사 먹으라고 서너 푼이 든 봉투를 건네자 외려 정색을 하고 섭섭해하며 도로 봉투를 던져놓고 봉고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환갑을 앞두고도 내 소유의 땅 한 평이 없고 모아둔 돈도 한 푼 없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느냐’고 ‘인생 헛살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줄 만했다.
하지만 이날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듯했다. 3일간 그들이 땀 흘리며 쓸고 닦은 깨끗하고 튼튼한 집 창문을 통해 눈 부신 햇살이 방안 가득히 쏟아져 들어왔다. 마음이 너무나 흐뭇하고 하나님께 감사한 하루였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1) ‘눈에 병뚜껑 낀’ 사회자 행동… 주님의 일 위해 인내
출소자와 간증프로그램 출연, 진행자 무례함 참으며 마치자 간증 듣고 찾아온 권사님들 지금껏 후원
김신웅 장로(오른쪽)와 최성애 권사가 2000년 서울의 한 교회에 함께 초대받아 기도하고 있다. 올해 97세가 된 최 권사는 지금까지도 교정 사역에 기도와 물질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27년 전 출소자 형제와 함께 기독교 방송국 간증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남녀 진행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어쩐지 남자 사회자의 눈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의 양쪽 눈에 병뚜껑을 끼웠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출소자 형제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장로님, 갑시다. 시골 교회에서 온 이름 없는 분이라고 저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갑시다. 장로님”이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인터뷰는 마치고 가자”라며 그를 다독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여성 진행자가 그에게 ‘눈에 병뚜껑은 왜 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날 잠을 못 자서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감기지 않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병뚜껑을 꼈다’고 했다.
출소자 형제는 한사코 일어서자고 했지만, 나는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서야 일어섰다. 방송국을 나오는데 그때야 비로소 화가 치밀어올랐다. 방명록에 이름을 작성해야 해야 했지만, 그것도 하지 않은 채 청송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 굴욕을 참으면서까지 인터뷰를 해야 했나.’ ‘같이 간 출소자 형제의 말대로 중간에 나와버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출소자 형제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자존심도 배알도 없는 바보인가.’ ‘아무리 그래도 나도 남잔데 그런 굴욕을 참고 인터뷰를 하다니’ 후회스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대낮에 웬 7명의 할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찾아오셨느냐’고 물었더니 대구제일교회 권사들인데 기독교 방송에서 내 간증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이 교회 여성선교회는 그동안 헌금을 모아 미국 하와이에 있는 작은 교회에 30만원씩 보냈다. 이제는 자립해서 더는 안 보내도 돼서 필요한 다른 곳에 물질을 흘려보내기 위해 기도하던 중 내 간증을 듣게 됐다.
그날 교정사역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시던 권사님들은 지금까지 27년간 교정 사역에 기도로 물질로 후원해오셨다. 교정 사역을 위해 기도해오던 승용차도 그분들이 마련해주셨다. 지금까지 그분들이 보내주신 액수를 합산해보니 1억원에 가까운 거금이었다.
당시 69~71세였던 권사님들은 대부분 소천하셨지만, 95세의 허경희 권사님과 97세인 최성애 권사님은 지금까지도 나와 교정선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신다. 그분들의 뒤를 이어 대구제일교회 제1여전도회에서도 계속 지원해주고 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이 교정선교회의 일이다. 이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날 남자 사회자의 무례한 행동에 내가 화를 내 인터뷰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기적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소중한 교훈도 깨달았다. 분노와 혈기와 성냄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이요, 겸손과 관용과 인내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첩경이라는 교훈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2) 아내와 새 삶 꿈꾸던 청년… 이젠 복수의 꿈만
교도소 드나들다 한 여성 만나 혼인, 신혼집 마련하려 범죄… 다시 감옥행
김신웅 장로가 1996년 청송 제2교도소에서 재소자와 상담을 마친 뒤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다.
수많은 만남 중에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얼굴들, 지울 수 없는 가슴 아픈 이름들이 있다.
엄성수 담당으로부터 김영진(가명)을 소개받았다. 그는 아내와 처가 모든 식구에게 날마다 독설이 가득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끝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에게 보복하겠다”라고 써서 온 식구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가 엄성수 담당에게 쓴 편지에도 암울한 심정이 드러났다.
“저는 이곳에서 가슴에 한을 담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고 싶어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하루라도 빨리 죽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 자신의 무능함에 통곡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과 사별한 저는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살아왔습니다. 4년간 형을 살고 88년 교도소를 출소하며 두 번 다시 징역살이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형님의 일을 도와주던 중 한 여성을 만났고, 6개월 만에 혼인 신고를 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원의 사글셋방이었습니다. 아내는 ‘결혼식 전에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요구했습니다. 형편도 안되고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처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렵게 얻은 아내와 가정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혼자 끙끙 앓기만 했습니다. 고민 끝에 아내를 위해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으로 범죄를 계획했고 결국 체포됐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내게 닥칠 일보다 아내가 더 걱정됐습니다.”
그 후 영진이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면회를 온 아내에게 “긴 세월 기다리지 말고 새출발하라”고 했다. 아내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아내가 돌아간 뒤 장인과 처형만 느닷없이 면회를 왔다.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혼고소장을 불쑥 내밀었다. 빈말이라도 아프거나 힘들진 않은지 먼저 묻고, 여동생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했으면 순순히 받아들였을 텐데 이혼고소장부터 불쑥 내미는 순간 증오의 대상이 됐다.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영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사랑, 관심밖에 없었다. 틈나는 대로 그를 불러 상담하며 기도했다. 그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
“부디 예수를 믿어라. 믿음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와 이해가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가슴 속에 깊이 파묻힌 그 증오의 씨앗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진심으로 처가 식구들을 용서해라.”
몇 개월 후 출소를 하루 앞둔 영진이를 만났다. 기쁨에 들떠 있는 그를 보면서 “출소하면 우리 집에 꼭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출소 버스를 타는 그의 뒤통수에 “꼭 들렀다가 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날 꼼짝하지 않고 집에서 기다렸지만, 영진이는 우리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3) 보복하려 만난 처형에게 “용서할 테니 잘 사시오”
출소 하루 만에 아내 집 알아내 처가에 전화해 만나자 협박, 겁먹은 처형 보자 눈물 왈칵 쏟아져
김신웅 장로가 재소자들을 상담하며 기도해 주기 위해 38년간 매일 방문하고 있는 청송 제1감호소.
다음 날부터 나는 신문 사회면과 9시 뉴스를 빠지지 않고 시청했다. 혹시라도 영진이가 보복 살인을 하거나 상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출소 후에 그런 일을 벌이는 재소자들이 있었다. 혹시나 영진이의 뉴스가 나오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매일 신문을 챙겨 읽어봤지만, 다행히 그런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날마다 “영진이가 사랑의 사람이 돼 그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신앙인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며칠 후 영진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대학노트 앞뒤로 5장이나 빼곡히 채워진 편지였다. 그의 편지를 읽은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체험했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영진이는 출소하는 날 우리 집에 들러 나를 만나고 가면 증오의 세월 5년이 무산될까 싶어 그대로 서울로 올라갔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내와 처가 식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 만에 아내의 거주지를 알아냈다. 밤 12시에 처가에 전화했다. “나는 어제 교도소에서 나왔다. 만나자.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전화를 받은 처형은 덜덜 떠는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영진이에게 처형은 아내보다 더 미운 상대였다. 5년간 감옥에서 품어온 한을 풀 수 있는 시간이 왔다고 생각한 그는 복수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약속된 다방으로 갔다. 다방에 먼저 도착해 처형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다방 문이 열렸다. 처형이 혼자 들어와 영진이 앞에 앉았다. 너무나 초라한 행색이었다. 얼굴은 또 어찌나 초췌한지 그런 처형을 마주하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공포에 질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처형에게 영진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송감호소 감방에 있을 때 성경이란 책을 보니까 사랑이란 게 있던데, 그 사랑은 용서가 반드시 따른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나도 그 말씀처럼 당신네를 용서할 테니 마음 편히 잘 사시오.”
영진이도 자신이 한 말을 내뱉고 깜짝 놀랐다.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겁에 질린 처형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한 그는 일어서서 다방 밖으로 뛰쳐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영진이는 생각에 빠졌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용서해줄 수 있었단 말인가.’ 답을 찾다 보니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김신웅 장로와 엄성수 담당이 부족한 나를 위해 한 눈물 어린 기도와 사랑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날 영진이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맘으로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렇다. 갇힌 자, 상처 입은 자, 한 맺힌 자, 증오와 복수에 불타는 자, 그들을 변화시키는 최선의 처방은 사랑이다. 다함이 없는 끊임 없는 사랑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4) 30㎏ 나무 십자가 지고 참회의 길 오른 형제들
죄 뉘우치고 출소 후 신앙 확인하려 청송에서 서울까지 400㎞ 길 걸어 현재 노인 시설서 궂은일 하며 봉사
1999년 7월 청송감호소를 출소한 두 형제가 30㎏의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차도를 걷고 있다. 경북 청송에서 최종 목적지 경기도 고양 벽제까지 총 400㎞의 여정이었다.
1999년, 김영수는 7년의 형을 마치고 청송감호소를 출소했다. 그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봉사하며 살겠다는 각오로 동료 출소자 한명호(가명) 형제와 함께 길이 3m, 무게 30kg의 나무 십자가를 지고 청송에서 서울까지 장장 400㎞의 거리를 걸으며 참회의 여정에 오르겠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계획에 그들을 아는 지인들과 나는 완강히 반대했다. 진정한 참회는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지 일회적 고통은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무엇보다 오랜 감호소 생활로 두 사람의 체력도 양호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면의 신앙을 재확인하려 한다는 두 사람의 말에 승복했다. 참회의 노정을 통해 자신들뿐 아니라 동료들도 변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담겨있었다.
총 400㎞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나무 십자가와 옷가지 등 30여㎏을 짊어지고 걸어야 했다. 첫걸음부터 온몸을 적시는 장맛비가 내렸다. 안동, 문경, 음성, 이천, 서울 등을 거쳐 최종 목적지는 경기도 고양 벽제의 장애인 보호시설인 금빛사랑교회였다.
두 사람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여정을 이어갔다. 십자가 행진에는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됐다. 문경쯤에 도착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발바닥이 찢어져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옷을 꿰매는 바늘로 얼기설기 찢어진 살을 대충 꿰매고는 또 행진을 이어갔다.
체력적 한계에 다다른 두 사람은 하루에 40㎞씩만 걸으며 쉬어가기로 했다. 나는 이들이 거쳐 가는 길목에 있는 큰 교회마다 전화를 했다. “출소자 두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거쳐 가는 길인데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당회나 제직회 결정 없이 마음대로 재워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서울 남산에 올라가면 십자가의 불빛은 하늘의 별만큼 많이 반짝이고 있는데 ‘과연 그 많은 교회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는 곳은 얼마나 될까’ 의심스러웠다.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뉜 곳은 길가와 여인숙, 작은 개척교회였다.
고통과 괴로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주변을 지나가던 차량 운전자들이 물과 음료, 음식을 건네며 격려했다. 안동대학교 입구부터 따라오며 취재한 MBC와 KBS 등 방송사의 도움도 이들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 공헌을 했다.
십자가 행진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영수 형제는 청송군 진보면에 소재한 무의탁노인 시설에서 하루 한 번씩 노인들을 목욕시키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궂은일을 하며 살아갔다. 그의 변화된 삶을 볼 때 진정 참회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십자가 행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것같이 이들에게도 목이 탈 때 물을 주시고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심을 절감했다. 세밀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낀 ‘십자가 행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5) “하나님 검정고시 비용 없어요”… 길바닥에 돈뭉치가
경찰서 갖다 주니 “일단 보관하세요” 덕분에 재소자들 무사히 시험 치러
김신웅 장로(왼쪽)가 1991년 12월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국산업인력공단 대강당에서 열린 ‘제1회 바르게살기 국민대상 시상식’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 장로는 같은 해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고 2001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나는 1982년부터 교정 선교를 시작했다. 재소자들의 교육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교육은 교도관들이 했지만, 나와 아내는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재비는 물론 간식을 챙기며 재소자들을 격려했다. 시험을 치러 가는 경비도 우리 내외가 담당했다.
어느 날이었다. 당장 내일 재소자들이 검정고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안동에 가야 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나와 아내는 “하나님, 20만원이 필요합니다. 빌리지 않고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저녁 아내는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갔다. 가는 길에 땅에 떨어진 돈 20만원을 발견했다. 아내는 때마침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교정장학회 총무에게 “경찰서에 갖다 주라”며 돈을 건넸다. 경찰은 총무에게 “전화번호 기록하고 돈은 가져가세요. 혹시 주인이 찾아오면 전화할 테니 그때 가져오세요”라고 했다.
총무는 돈을 들고 다시 우리 내외를 찾아왔다. 그는 “내일 시험 치러 가는 재소자들의 경비를 이 돈으로 쓰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면 그때 갚아줬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32년이 지나도 그 돈은 임자가 없는지 연락이 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교도소 분류과장이 찾아왔다. 그는 “교도소 분류시스템을 변경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장로님밖에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무조건 내가 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에 나갔다. “주님, 200만원이 필요합니다. 꼭 주셔야 합니다”라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환상이 보였다. 신문에 ‘국민대상’ 수상자를 뽑는다는 광고가 적힌 환상이었다. 그곳엔 ‘네 사람을 선정한다’고 쓰여있었다. 환상 속에서도 나는 ‘주님, 저는 해당할 수 없으니 딴 것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럴수록 ‘국민대상’ 광고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누군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다 “장로님, 어디 갔다 오십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남동생의 친구였다. 국민일보 신문지국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신문 배달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오토바이 뒤에는 국민일보가 실려 있었다.
문득 기도하다 본 환상이 생각났다. 신문을 펼쳐보니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에서 ‘제1회 바르게살기 국민대상’을 뽑는다는 광고가 실려 있었다. 당시 교정공무원이었던 박효진 장로에게 추천서를 부탁해 접수를 마쳤다.
얼마 후 나는 장애인 재활에 힘써온 목사님, 고아들을 도와온 우체국 집배원, 양로원과 보육원을 찾아다니며 소외된 이들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이발사와 함께 ‘바르게 살기 국민대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교도관 분류과장이 내게 부탁한 200만원이었다. 하나님은 특별히 갇힌 자들에게 사랑을 나누기 위한 나의 기도에 한 번도 외면하시지 않고 기적처럼 들어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6) 신출귀몰 신창원, 도피행각 중 내 글 읽고는…
신창원, 재소자와 에피소드 담긴 소책자 본 후 “다시 감옥 간다면 꼭 만나봐야지” 생각
1999년 11월 5일 부산지방법원 103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한 신창원. 국민일보DB
강도치사죄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1997년 1월,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죄수가 있다. 그 당시 어린애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른 신창원이다.
그는 2년 넘게 신출귀몰 도피 행각을 벌였다. 매일 매스컴의 화제의 인물로 등장하던 신창원은 99년 7월 마침내 붙잡혔다. 신창원에게는 22년 6개월의 형이 추가됐다.
나와 신창원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에 우연한 만남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뤄진 필연이다. 나와 창원이와의 만남은 그중 작은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감옥을 탈출해 도피 중이던 어느 날 밤, 창원이는 어떤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 집안 사람들이 잠들지 않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깨어 있으면 도둑질이 어렵기 때문에 그들이 잠들길 기다리며 집 앞에 있는 우체통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환한 달빛이 우체통을 비췄다. 마침 무료하던 차에 우체통 안에 우편물들을 꺼내서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편지도 몇 통 있었다. 그 가운데 작은 묶음의 한 문서에 눈길이 쏠렸다.
“이건 뭐지. 편지도 아니고 겉표지에 글이 적혀 있네. 분명 사람이 손으로 쓴 글씨인데 어쩜 이리도 예쁘게 잘 썼을까. 마치 자로 잰 듯이 줄도 비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기계로 쓴 것 같네. 저런 글씨로 썼다면 분명 내용도 좋을 거야.”
그것은 ‘월간 찬미’라는 소책자였다. 창원이는 그 문서를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6페이지쯤 넘겼을까. ‘감호소’ ‘출소자’ 등 그의 눈에 아주 익숙한 두 단어가 들어왔다. 그 글의 제목은 “장로님, 장로님, 우리 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이 교회의 중직이란 건 창원이도 알고 있었다.
“교회 장로님과 감호소, 출소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몹시도 궁금했던 그는 길지 않은 글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곳엔 재소자의 결혼식 날 아침에 있었던 우리 가족이 겪은 작은 에피소드가 적혀 있었다. 사위인 김상신이 쓴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창원이는 교도소에 있을 때 먼발치에서 봤던 내 얼굴을 떠올렸다. 재소자들의 교화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만일 잡혀서 다시 감옥에 간다면 이 글의 주인공인 김신웅 장로님을 개인적으로 꼭 만나봐야겠다.”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거기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글을 읽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연히 일어난 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작은 기적이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7) “등록금 없이 학교는 뭐하러 와”… 마음 속 악마 꿈틀
초등 담임의 말 어린 신창원에 비수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 계기 돼
1999년 7월 16일 전남 순천의 모 주택에서 재검거된 신창원, 경북 청송교도소에 수용된 그는 김신웅 장로에게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 연합뉴스
신창원은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그에게는 지독한 가난도 고통이었지만, 어머니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내를 잃고 직장도 없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주 술 심부름을 시켰다. 돈도 주지 않고 술을 받아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선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도적질이 내키지 않았던 창원이는 어머니 무덤가를 찾아 홀로 잠들곤 했다. 캄캄한 밤에 무덤가에서 혼자 잠을 잔다는 건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는 어릴 때부터 겁이 없는 대담한 아이였다.
그가 범죄자가 된 결정적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은 일이었다.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내지 못한 그에게 담임선생님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 새끼야, 등록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그 말을 듣는 순간 창원이는 마음속에서 악마가 태어나고 있음을 느꼈고 어둠을 품게 됐다고 고백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출도 일삼았다. 결국, 중학교에 진학한 지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했다. 생활고에 남의 밭과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기 시작한 그는 범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창원이에게 직접 들은 일화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다짜고짜 집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창원이는 이유도 모른 채 승려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창원이의 아버지를 만난 승려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내게 맡기시오. 그러면 커서 덕이 많은 큰스님이 될 것이오. 그러지 않고 당신이 이 아이를 키우면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도둑놈이 될 것이오.”
세월이 흘러 창원이는 결과적으로 그 승려가 예언한 대로 됐다. 훗날 창원이 아버지를 만나 물었다. “그때 왜 창원이를 승려한테 맡기지 않으셨나요.” 창원이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들 가운데 창원이가 제일 마음이 착해서지요. 그놈은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낙네가 있으면 30리 먼 거리라도 대신 들고 갖다 줄 정도로 인정이 많은 놈이에요.”
만일 그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양육 받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자주 상상해본다. 살인하지 않았고 도망을 좀 잘 다녔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아 교도소에 갇혀 평생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하루속히 그의 정상이 참작돼 자유의 몸이 돼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런 아쉬움을 표현할 때면 창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교도소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겠냐고 한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국가나 교도관, 사람을 죽인 후배에 대한 불평이라도 늘어놓을 법한데 걱정해주는 나를 되레 위로할 정도로 마음이 넓은 녀석이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8) “죄송합니다” 메모 남기고 극단적 선택 시도한 신창원
평소와 다름없이 순찰하던 교도관 어떤 강력한 힘에 끌려 다시 살피다 ‘꺽꺽’ 숨넘어가는 모습 보고 구조
2011년 8월 18일 새벽,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신창원이 안동병원 응급실로 옮겨지고 있다. 뉴시스
2011년 8월 18일 새벽 4시, 경북북부제1교도소 독방에 있던 신창원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당시 순찰을 하던 담당 교도관이 그를 발견해 119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안동병원으로 급히 후송했다.
신창원의 방에선 “죄송합니다”라고 쓴 메모가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발작과 저산소증으로 한때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날 저녁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모든 매스컴이 이 사건을 다룰 정도로 창원이에 관한 관심은 대단했다.
신창원이 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는지에 관한 대중의 궁금증이 증폭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창원이가 왜 그랬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아마도 사건 한 달 전 팔순을 맞은 부친의 사망 소식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뿐이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창원이를 만나 물었다. “창원아, 니 그때 와 그랬노.” 창원이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창원이에게 “그때 너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컸던지 TV뉴스에서 5분 간격으로 네가 병원에서 뭐 하고 있는지 보도했을 정도였다”고 말을 건네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창원이가 그때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선 나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사건이 있던 날, 창원이를 발견한 담당 교도관이 들려준 이야기를 대신 전할까 한다. 창원이가 자살 시도를 한날, 교도관은 재소자들의 방을 순찰 중이었다. 창원이의 방을 살펴본 후 다음 재소자의 방을 살펴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자기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는 “어떤 힘에 강하게 끌려서 조금 전에 지나온 신창원의 방앞으로 다시 오게 됐는데, 방안을 들여다보니 ‘꺽꺽’ 하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신창원이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교도관은 다급하게 119 구급대에 전화했고, 병원에 옮겨진 신창원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교도관은 “장로님,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지나쳤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상황을 떠올려보면 지금도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날 근무자는 저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저를 잡아끈 힘이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교도관이 창원이의 방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교도관을 강하게 잡아당긴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창원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선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사건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사건 이후 신앙 안에서 변화돼가는 창원의 모습을 볼 때 내 해석과 판단이 달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예측 불가능하고 상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끄심은 참으로 놀랍다. 이 위대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금 뜨거운 마음으로 헌신과 순종의 마음을 새롭게 다짐해본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19) “태어나 처음으로 선한 꿈 꾸게 해주신 우리 장로님”
자서전 출간에 축하 글 보내온 신창원 “나의 영적 아버지 장로님, 사랑합니다”
김신웅 장로가 최근 경북 청송의 한 카페에서 지난 7월 발간한 ‘날마다 교도소로 출근하는 수의사’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는 신창원과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도 실려있다.
나는 35년 교정 선교의 역사가 담긴 ‘날마다 교도소로 출근하는 수의사’ 책을 지난 7월 발간했다. 신창원은 나의 자서전 출간을 축하하며 글을 보내왔다. 그 글의 전문을 공개한다.
“1982년 청송교도소가 들어서던 해부터 함께하셨던 장로님은 청송의 역사이자 산 증인이다. ‘작은 예수님’ ‘갇힌 자들의 아버지’ 수형자들은 장로님을 이렇게 부른다.
빗물이 새는 낡고 자그마한 가축병원의 생업보다는 늘 수형자들을 먼저 생각하셨다. 수입이라곤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빈약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 수형자를 위해 내놓으셨다. 그리고 당신은 수형자들이 출소하면서 버리고 간 옷가지와 신발 등을 세탁해 입곤 하셨다.
자력으로 사회생활이 곤란한 출소자들이 종종 장로님께 도움을 청해온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당신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서 송금하시는 장로님, 퍼주기만 하는 장로님을 보고 숨은 재력가인 줄 착각한 출소자들이 한밤중에 복면을 쓰고 흉기를 소지한 채 집으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고, 이와 유사한 일들이 반복됐지만, 수형자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으셨다.
한 달에 한 번 주어지는 장로님과의 상담이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는 출소자의 전화를 받은 장로님이 급하게 일어섰다. ‘창원아, 미안하다. 녀석을 구명하기 위해 지금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내가 물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는데 장로님은 그가 밉지도 않으세요.’ 당신은 이렇게 답하셨다. ‘나도 인간인데 왜 밉지 않겠니. 그렇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녀석을 도와주겠니. 녀석에겐 아무도 없는데.’
잘못된 마음을 지닌 수형자와 출소자들에게 수없이 속고 배신을 당하면서도 허허 웃으시며 그들마저 한결같은 마음으로 품에 안으시는 장로님, 난 이런 장로님이 눈물겹도록 좋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너무도 닮으셨기 때문이다.
2001년 6월 장로님과 자매결연을 하고 16년 동안 함께하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장로님을 멘토로 모시고 싶어서 부탁을 드려 성사된 만남이었다. 18년을 독방에 격리된 채 살아오면서 독방이라는 특수한 환경적 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정서적 부작용을 극한까지 겪으면서 여러 번 힘겨운 고비를 만났다. 그때마다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서 나와 함께해주신 장로님, 이런 장로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신 예수님, 당신을 그토록 배신하고 상처를 준 이들마저도 잃지 않으려고 품에 안으시는 장로님,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열매가 당신을 작은 예수님이 되게 하였고, 눈물겨운 사랑의 역사를 만들었다.
남겨진 전 생애를 통하여 본받고 싶은 분이다. 태어나서 처음 선한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신 분, 혈육의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나의 영적 아버지 김신웅 장로님, 정말 사랑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20) “말씀 속에 살고 싶다”던 대도 조세형…
기독인으로 변화된 삶 사는가 싶더니 별명에 걸맞지 않게 좀도둑질로 또 수감
김신웅 장로(왼쪽)와 조세형(오른쪽 두 번째)이 2000년쯤 지방의 한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마친 뒤 당회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교정 선교 38년 동안 많은 재소자와 출소자들을 만났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있다. 대도 조세형과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다.
조세형은 30~40대에 부유층 집을 골라 물건을 훔친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린 인물이다. 1983년 재판 중 탈주했다가 붙잡혀 15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출소 후 기독교인으로 변화돼 새 삶을 사는 듯했던 그는 2001년 일본 도쿄에서 다시 절도 행각을 벌이다 체포돼 일본에서 3년 6개월을 복역했다. 이후 조세형의 행보는 ‘대도’와 거리가 멀었다. 계속된 절도로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출소하기를 반복했다.
조세형과는 청송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첫인상은 꽤 좋았다. 생각보다 미남이었다. 미소를 머금고 반갑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에 나의 고정관념이 단숨에 깨졌다.
그에게 “성경을 읽느냐”고 물으니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 속에 살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닿는 대로 그를 만났다. 세월이 흘러 그는 출소했다.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제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많은 사람이 확신했다. 그는 교정 선교를 위한 사무실도 열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전국 교회를 다니며 간증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했다.
어느 겨울, 지방의 교회에서 함께 간증한 뒤 그와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됐다.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내가 입고 간 내복의 무릎 부위가 많이 헤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장로님” 하고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 이튿날 청송으로 내려왔다.
며칠 후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급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서울로 달려간 내게 “오늘 하루는 장로님과 같이 식사도 하고 옷도 사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우리 주변에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위해 영혼 구원의 손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 시간에 웬 쓸데없는 소리냐”고 질책하곤 청송으로 내려왔다.
하루는 그가 “중국인이 그린 고가의 그림”이라며 내게 선물을 했다. 집에 걸어둔 그 그림은 볼 때마다 참 멋있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아내가 “저것도 훔친 것 아닐까”라고 말해 웃은 적이 있다. 훗날 그는 “그건 훔친 거 아니에요. 어찌 형님한테 훔친 물건을 선물해드릴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농담처럼 묻긴 했지만,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해진 건 사실이다.
지난해 81세가 된 조세형이 대도란 별명에 걸맞지 않게 좀도둑질을 하다가 16번째로 구속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음이 아팠다. 그를 보면서 사람에게 박혀 있는 습관은 고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오늘도 나는 교도소에서 후회하며 통탄하고 있을 조세형을 위해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21) 두 딸, 갈 곳 없는 출소자 집에서 재워도 기꺼이 반겨
부모와 한 방 쓰며 불평 안해… 재학 중 결혼하겠다는 둘째의 남친, 보육원 아이들 보듬는 심성 보고 승낙
김신웅 장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95년 둘째 딸 진희(왼쪽에서 두 번째)씨의 계명대 졸업식에 참석해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38년간 교정선교를 해오면서 아내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두 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간절하다. 자식들이 아빠를 잘 만나야 하는데, 나는 자식들보다 재소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왔다.
딸들이 한창 예민한 10대 사춘기 소녀 시절, 갈 곳 없는 출소자들을 며칠씩이나 딸들 방에서 재워 보내곤 했다. 평범한 남자와도 한집에 같이 살기 힘들 텐데 감옥에서 출소한 재소자들을 자기들 방에 재우며 한 집에서 생활하게 했으니 그런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들은 자기네 방을 재소자들에게 내어준 채 부모와 함께 한방에서 자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출소자들을 ‘하나님 나라에선 제일 귀한 손님들’이라며 환한 웃음으로 반겼고, 우리 부부보다 먼저 “제일 좋은 이불을 꺼내주라”고 챙길 정도로 착한 아이들이었다.
성인이 된 두 딸은 공부하느라 안동과 대구에 각각 흩어져 살았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딸들에게 반찬 한 번 장만해서 갖다 주질 못했다. 뒷바라지에 소홀했던 우리에게 딸들은 불평 한 번 한 적 없었다.
내가 1991년 ‘제1회 바르게살기 국민대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을 때도 딸들은 축하보다 “그러면 천국 가서 받을 상이 어디 있느냐”며 못마땅해 했다. 나보다 더 나은 신앙의 모습을 가진 딸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둘째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음악학원을 운영하는 딸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대구로 향했다. 음악학원에 들어서자 남자친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몇 대의 피아노와 연습하는 학원생들이 보였다.
오후 3시쯤 됐을까. 옷을 초라하게 입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돼 보이는 학생 4명이 들어섰다. 학원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실컷 놀던 아이들은 학원에서 나눠주는 빵과 우유를 갖고 돌아갔다.
강사 선생님께 물으니 “인근에 있는 보육원 아이들인데 학교를 마치면 마땅히 놀 데가 없어서 원장이 학원으로 불러 놀게 하고, 갈 때는 꼭 빵과 우유를 손에 들려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것이 일상이 돼 있는 딸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허락했다.
두 달 후, 청첩장을 갖고 온 딸이 “100장을 인쇄했는데, 50장은 아빠가 사용하시라”며 건넸다. 당시 교도소 사역이 분주해 주변 경조사를 챙기지 못한 형편이라 50장을 어디다 줘야 하나 고민하며 망연자실했다.
마침 그때 제1감호소에 근무하는 유승만 장로가 찾아와 “장로님,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딸 아이가 청첩장 50장을 줬는데, 교회는 광고만 하면 되고 쓸 데가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장로님 그 청첩장 내게 주세요”하고는 가지고 갔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22) 결혼식 하객 걱정에 기도… 1000석 넓은 교회 꽉 차
교정 사역하느라 주위 경조사 못 챙겨… 전국 흩어졌던 출소자·교도관들 참석
김신웅 장로(맨 왼쪽)가 2017년 1월 마산의 한 카페에서 아내 박혜심 권사, 둘째 사위 박상신 교장, 딸 진희씨와 함께 밝게 웃고 있다.
결혼식 당일 아침, 작은딸이 자취하는 방에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부조는 얼마가 되든지 좋은데 제발 하객들이나 가득 채워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를 마친 뒤 큰딸은 나에게 “무슨 기도를 그렇게 하시느냐”며 핀잔을 줬다.
결혼식 시간이 돼 식장으로 향했다. 대구 동부교회는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였다. 10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교회였다. 딸의 결혼식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로님의 자제분 결혼식이 진행됐다. 150여명의 하객이 왔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교정 사역하느라 저는 주변의 경조사를 챙기지 못해 우리는 150명보다 훨씬 적게 모일 텐데요.’
결혼식이 진행됐다. 신부를 데리고 입장을 한 뒤 혼주석에 앉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텅 빈 결혼식장을 바라보기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주례 목사님이 “혼주는 일어서서 결혼식에 참석한 분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인사를 시키는 목사님 말씀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뜨고 뒤를 돌아 인사하려는 순간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100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좌우 양쪽으로 한 줄씩만 비어있고 하객으로 꽉 차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객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봤다. 전국으로 흩어졌던 출소자들과 교도관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력하나마 주의 일을 감당하며 교정선교의 일선에 있는 저를 위한 하나님의 소리 없는 박수로 알고 이제부터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갇힌 자와 풀린 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결심했다.
감사하게도 나의 두 사위도 자기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첫째 사위 이승익은 내과 의사다. 그는 마산역에서 노숙하는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잠을 잘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고 금요일마다 모여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둘째 사위 김상신 교장은 방황하는 학생들을 음악으로 치유하는 대안학교를 세웠다.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기도와 말씀, 음악으로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변화돼 가는 모습을 보며 큰 보람을 느낀다.
섬기고 베푸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른다. 그곳에선 아름다운 꽃이 피고 향기가 난다. 내 어머니의 긍휼함이 내게 대물림되더니 이젠 내 자식과 사위들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음을 본다. 이런 사랑이 손주들까지 계속 대물림될 것들을 기대하는 내 마음은 참 기쁘고 감사하다. 한 사람이 뿌린 신앙의 씨앗이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오래전 천국으로 가신 내 어머니가 오늘따라 몹시도 그립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23)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 아내 박혜심 권사
나누고 섬기는 가정서 자라난 아내, 사회 약자 섬기고 38년 교정사역 동역자로 함께 걸어와
박혜심 권사(왼쪽)가 2006년 10워 28일 서울지방교정청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남편 김신웅 장로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20살 때부터 기관지 천식을 앓아온 환자다. 38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왔다. 그때마다 아내는 물심양면 정성껏 나를 돌봐 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은 바로 아내 박혜심 권사다.
나는 6남매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셨다. 나와 아내가 오 남매 동생들을 다 결혼시켰다.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 큰일들을 잘 치러냈다.
처가는 소문난 부자였다. 밥 굶는 거지들이 아침저녁 동냥하러 처가 앞에 몰려왔다. 장인은 직접 이발기를 들고 이발도 해주고, 집 앞에 거지들을 부엌의 따뜻한 불 앞으로 데려와 음식을 대접했다. 할머니들이나 장애인들이 오면 안방을 내주고 밥상을 차려서 배부르게 실컷 먹도록 했다.
그때는 거지들이 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살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장인과 장모는 명절이나 눈비가 오는 날이면 국과 밥을 한 솥씩 지어서 머슴들의 지게에 지워 그들의 움막으로 보내주곤 했다.
나누고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난 아내도 돈을 모으는 일보다는 나누는 일에 익숙했다. 자신도 거지들을 보면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그들을 데려와 씻기고 먹여서 보내곤 했다. 아내는 교정선교뿐 아니라 청송군 여성봉사회 회장으로 12년간 청송군 8개 면의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 가정을 섬겼다. 생일잔치는 물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찾아 불철주야 섬겨온 대단한 여장부다.
한번은 아내가 심하게 아팠는데, 당시 이의근 경북도지사의 사모가 직접 우리 집까지 문병을 와서 위로해줬다. 아내가 교정사역에 함께 했듯이 나도 늘 아내가 가는 곳에 동행했다. 운전사로만 따라다닌 것 같은데 그해 나는 경북도지사가 주는 외조상을 받았다. 사람들이 축하를 하며 “내조상은 들어봤는데 외조상은 처음 듣는다”며 놀리곤 했다.
38년 교정사역에 아내 박혜심 권사가 있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내가 없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교정사역을 시작할 즈음 동물병원과 우리 가정집은 한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12년간 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대문을 닫아 본 적이 없다. 출소자들이 자정이나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불시에 우리 집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그들을 안방으로 들여 따뜻한 밥을 지어 음식을 대접했다. 아내가 겪어온 어려움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술에 취해 우리 집에 들어온 출소자가 욕설과 난동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그들을 달래며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내가 가는 이 길에 동역자로 함께 걸어왔다.
이런 아내 덕분에 나는 2001년 법의 날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아내는 2006년 10월 27일 국무총리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장로 (24) 아내의 숨은 내조 통해 겸손·감사·자족 배워
38년간 교정사역에 동역자로 함께해온 김신웅 장로(왼쪽)와 박해심 권사 부부가 2017년 1월 마산의 바닷가 길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다.
38년간 교정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눈물 어린 내조 덕이었다. 아내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매결연을 한 재소자가 출소할 때면 그에게 입힐 털옷을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다.
사회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찬 김영일(가명)이라는 재소자가 있었다. 그는 내 아내가 떠준 스웨터로 새사람이 됐다. 아내가 그에게 털조끼를 짜 입히려고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출소 명령이 떨어졌다. 그가 출소하기 전에 털조끼를 완성하기 위해 아내는 관절염으로 통증이 심한 손이었는데도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아내는 출소하는 날 털조끼를 들고 뛰어가서 그에게 입혀줬다.
영일이는 퉁퉁 부은 아내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범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이 손을 생각하겠노라”며 다짐하고 떠났다. 그는 현재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며 출소자까지 돕는 어엿한 시민이 됐다.
아내는 부족한 살림에도 재소자 교육생들에게 학용품과 교재를 지원했다. 수시로 그들을 찾아가 상담했고,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위로회를 열어줬다. 출소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입히며 취업도 알선해줬다. 1년에 두 번 검정고시 시험날이면 도시락을 100여개씩 싸야 했지만, 한 번도 불평 없이 감당했다.
나는 이런 아내를 통해 겸손과 감사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미국에 간증 집회하러 갔을 때 일이다. 규모가 제법 큰 장애인 교회에서 간증하고 사례비로 300달러를 받았다. 교회를 나와 목적지로 향하던 중 사례비 봉투가 없는 것 같아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장애우분들을 보니까 사례비를 받을 수 없어 도로 헌금하고 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누군가가 대접을 하겠다고 초대를 해도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면 으레 아내가 먼저 계산을 해서 대접하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출한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면 집에 데려와서 큰 플라스틱 용기에 물을 담아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후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홀로 사시는 무의탁 할아버지들의 빨래와 반찬을 해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분들이 입원하면 병원까지 찾아가 목욕을 시켜드렸다.
나보고 ‘청송의 천사’라고 칭찬하는 이들이 많다.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진 아내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명을 혼자 감당해낼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교정선교를 하면서 수용자들이 출소 후 가정을 꾸리는 것을 본다. 그 가정이 모두 화목하고 평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로 이해하고 함께 고난을 같이 하고자 할 때 가정은 유지된다. 서로의 욕심과 이기심을 따라 살아가면 가정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나는 새롭게 출발하는 출소자들에게도 겸손과 감사와 자족하는 법을 배우도록 늘 권면한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아내 박혜심 권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김신웅 (25·끝) 사랑하는 형제님들, 주님 은총 언제나 함께하기를
재소자 출신 가난한 전도사 위해 황금 열쇠 내놓은 출소자처럼 나누는 믿음의 삶이 진정한 성공
김신웅 장로가 지난 3일 출소자들에게 자필로 작성해 보낸 편지의 일부.
사랑하는 형제님들에게,
38년 동안 청송 교정시설에서 교정위원으로 갇힌 자와 풀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김신웅 장로입니다. 국민일보를 통해 나의 안부를 전하며 여러분의 축복된 삶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전국이 경색됐지만, 말씀 안에서 거듭난 여러분들과 하나님은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만난 수많은 형제 가운데 한 분의 사연을 전할까 합니다.
20여년 전, 출소한 지 3년 된 김명식(가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에게 은색 상자에 든 ‘행운의 열쇠’를 내밀며 “전남 작은 마을의 시골교회에서 사역하는 출소자 전도사님의 신학대학원 학비를 걱정하는 장로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아내와 의논 끝에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인 이 ‘행운의 열쇠’를 팔아서 그분의 학비에 보탬이 되고자 가져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행운의 열쇠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던 나는 “이것만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가 살아가는 데 불필요한 물건이 바로 이 금붙이입니다. 어디를 가도 이것이 집 안에 있으니 불안하고, 혹시 도둑이나 맞지나 않을까 매번 열쇠함을 열어보는 것 때문에 언젠가는 치워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도사님에게는 학비가 충당돼서 좋고, 저는 물질의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는 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기어코 행운의 열쇠를 손에 쥐여주고 갔습니다.
가난한 출소자 전도사의 학업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황금의 열쇠를 받아들고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장 기증자입니다. 출소 후 ‘내 인생의 새 출발은 한 생명을 구하는 선한 삶이 함께해야 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죽어가는 신부전증 환자에게 자신의 한쪽 신장을 기증했습니다. 금 10돈의 행운의 열쇠는 바로 명식이의 신장기증을 기념하며 장기기증본부에서 준 기념품이었습니다.
이 사연을 들은 명문교회 이덕진 목사님은 깊이 감동하고 “그것을 팔면 38만원밖에 안되니 내가 50만원에 사서 부흥회를 다닐 때 그 열쇠를 보이면서 간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전남의 조 전도사에게 그 돈의 내역을 설명하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목사가 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손을 움켜쥐고 이 땅에 손님처럼 와서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의 손이 커가며 물질의 욕심도 커지고 힘이 세질수록 권세의 욕심도 커집니다. 성공 속에 두 손이 부끄럽지 않고 우리의 손이 다시는 주님의 손을 못 박지 않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사랑을 나누며 믿음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교정선교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출소자를 만나며 좌절하고 실망하면서도 한 번씩 소낙비처럼 내리는 이런 감동 때문에 나는 또 일어섭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청송에서 김신웅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