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주머니들 외 9편
마경덕
골목길을 등지고 돌아앉은 그 집
닫힌 작은 창문 하나, 그 너머가 궁금했다
창을 두드리다 돌아서는 저녁 햇살의 꼬리를 밟은 적이 있다
기웃거리던 내 호기심이 창틈에 끼인 적도 있다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간유리 창은
햇살 한 줌 꽂을 수 없는 쓸모없는 바지 뒷주머니 같았다
흘낏 그 길을 지나쳐오면 그 집은
내 생각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길가 플라스틱 통에 흰 냉이꽃이 한 움큼 필 무렵 문득
집의 얼굴이 궁금했다
이 집에 누가 사나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난 몰라요
닫힌 창 너머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얕은 뒷주머니였다
그렇다면 꽃이 지기 전, 뒷골목 얽힌 골목을 돌아돌아 그 집을 만나러 가리라
오늘도 먼지 낀 그 창을 무심히 지나왔다
어느새 냉이꽃이 두 번이나 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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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바쁘게 살다 보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기억이 있다. 마주치면 아, 그랬지 하면서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는 허름한 약속이 있다. 약간의 아쉬움도 오래 묵히면 아린 그리움이 된다. 그런 쓸쓸함은 나에게 시를 쓰게 한다.
정규직
빨간 플라스틱 물통
십 년 넘게 화장실 한 귀퉁이가 그의 자리다
물을 반쯤 담고 벽에 붙은 수도꼭지만 올려다본다
어쩌다 쏟아지는 수도꼭지의 말을 살뜰히 챙긴다
수도가 사라지면 물통은 어디로 갈까
지하방 여자는 늘 변기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물로도 씻기지 않는 그 냄새에 나는 진저리를 친다
“제발 담배 피우지 마세요”
공용화장실 벽에 경고를 붙여도 막무가내 달려드는 악취는 정규직이다
마주치면 상냥한 그녀
꼬박꼬박 예의가 바르다
내가 일층에 세들기 전부터 그녀는 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물통과 수도꼭지처럼 담배에 꽉 물린 그녀도 정규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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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마당이 있는 감나무집 뒤꼍에 세들었다. 그 집의 고요를 빌려서 나는 시를 쓴다.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냄새가 자꾸만 나를 밀어낸다. 그녀와 함께 쓰는 공동화장실 빨간 물통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한발도 나갈 수 없는 물통은 다행일까, 라고 생각해본다. 오래도록 지하방에 사는 골초인 그녀, 내가 사랑하는 고요만큼 담배도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지붕
창을 넘어오는 빗소리, 어둠에 숨은 밤비를 소리로 읽는다. 지붕 아래 누워 밤새 빗소리에 젖는 일은 단잠과 바꿔도 참 좋은 일
모과나무 첫 태에 맺힌 시퍼런 모과 한 알, 서툰 어미가 두 손을 움켜쥐는 밤. 빗물에 고개가 무거운 옥상의 풋대추도 노랗게 물든 살구도 자다 깨어 빗물에 얼굴을 닦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뿌리째 뽑힌 텃밭 달개비도 기운 차려 보랏빛 꽃을 내밀겠다. 첩의 입술 같은 붉은 능소화는 길바닥에 속엣말을 흥건히 쏟아놓겠다.
투둑투둑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비의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 사방으로 빗물 튀는 소리.
피를 수혈받는 밤
젖어야 사는 것들은 지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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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빗소리가 좋다. 한밤중 거실에 누워 듣는 가지런한 빗소리는 더욱 좋다. 옥상 모과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무화과나무는 나보다 더 비를 좋아한다. 올해는 능소화가 미친 듯이 붉었다. 비를 맞고 첩의 입술처럼 붉어졌다. 지붕이 없는 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향해 걸어간다.
봄이 일하는 보리밭가에 앉아
신월리 바닷가
끝없는 그 보리밭
봄이 먼저 취직한
삼월의 보리밭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가
멸치 떼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건너온
봄이 일하는
보리밭가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녹색의 갯바람에 젖는 봄의 눈부신 머릿결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실업失業의 봄
그 보리밭이
나는 가장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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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기억의 절반을 여수 신월리 보리밭에 두고 왔다. 가도 가도 끝없는 신월리 그 푸른 보리밭에 사춘기의 아픔을 묻어두고 왔다. 가끔은 멸치 비늘처럼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를 보며 보리밭가에 앉아 하모니카도 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보리밭에 먼저 취직한 봄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그저
냄비는 냄비, 물은 물일뿐입니다
예민한 양은 냄비는
한 방울 두 방울 수면으로 기포를 끌어올립니다
물의 껍질이 톡톡 벗겨지고 있습니다
맥박이 뛰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격렬해집니다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물의 탈피는
기화氣化, 아니 우화입니다
물은 날개를 달고 증기는 천장까지 날아오릅니다
건조하고 까칠한 실내 공기가 촉촉하고 말랑해집니다
한 바가지 물이
반 컵으로 졸았습니다
냄비는 바짝 수위를 낮추고
물의 입자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증발합니다
이곳을 탈출해 구름이 되려는 물의 체위는 순항입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완벽하게 존재를 지우고 하늘의 품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탈피를 마친 물은 냄비를 버리고
곧 절정에 오를 수 있습니다
털썩, 물이 주저앉습니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고
까무러친 냄비에
날개가 부러진 물이 둥둥 떠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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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가스 불을 켜면 냄비가 달아오르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한다. 내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 냄비를 박차고 나와 주방 천장까지 오르다가 열린 창문으로 탈출해버린다. 날개가 부러져 미처 탈출하지 못한 물은 억울한 눈빛으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소란한 아침들
믹서는 폭력적이다
터치 한 번에 자세가 돌변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급회전에
레몬 사과 당근 사각얼음 뼈가 으스러진다
딸기의 살은 붉습니까
아니오
레몬은 노란 피를 가졌습니까
아니오
오답뿐인 일상
빙하를 갈아 만든 냉커피에 졸음의 꼬리가 잘리고
지친 세포가 눈을 뜬다
무지근한 아침
자극적인 발언은 밥상에 올리지 마세요
한마디 경고음에 분노가 휘몰아치고,
이웃한 거리에서
기아와 전쟁과 뼈도 못 추릴 죽음이 뒤섞인다
드론이 날고 미사일이 무차별 아파트를 폭격한다
국경을 넘어 난민이 떼로 몰려온다
빙산이 무너져도 테이크아웃은 늘어만 가고
줄지어 식탁까지 날아오는
기괴하고 불안한 세상의 아침들
ON
굶주릴수록 믹서는 난폭해진다
OFF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동작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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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믹서는 사납다. 버튼 하나로도 뼈째 갈아버린다. 버튼 하나로 드론이 날고 전쟁은 이어지고 뼈도 못 추리는 시신이 늘어난다. 지구는 점점 난폭해지고 쉽게 무너지고 아침 뉴스는 불안함을 식탁까지 친절하게 배달해준다.
피로 세운 집
그의 조상은 칼을 만들고 후손들은
그 칼로 피를 보며 살았다
증조부는 소를 잡는 백정이었지만
한때는 칼잡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대를 이어 피로 밥을 먹었지만 그는
한 번도 ‘피로 세운 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 풋살구가 맺힐 무렵
동네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어도 그의 식구들은 기름이 잘잘 흘렀다
고기 맛을 본 아이들은 염치없이 그의 집을 기웃거렸다
퉁명스런 그의 아비는 도마에 널브러진 자투리 고기를 그러모아
적선하듯 던져주었다
세상이 바뀌고
그 친구는 도축사로 손자는 발골사가 되어 능숙한 새김질로 집을 일으켰다
어느 청년은
‘우리 집은 피로 세운 집’이라고 까발리며 스스로 집을 무너뜨렸다
입을 열자 피비린내가 흥건했다
온몸에 시뻘건 핏물이 얼룩져 있었다
도축장 앞에서 네 발로 뻗대던 짐승들은 모두 피의 집으로 들어가고,
두 발로 짐승처럼 살아온 사람은
핏구덩이에서 나오겠다고 죽을힘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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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한 청년이 자신의 겉옷으로 희생자 묘비를 닦으며 사죄를 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하지 못한 죄를 대신 안간힘으로 참회하며 큰절을 올렸다. ‘피로 세운 집’에서 나오겠다고 용기를 낸 그 모습이 모처럼 사람 같았다.
관객 1
기대했던 연극표는 매진되고
모처럼 주머니에 담아온 오후는 휴지처럼 구겨졌다
쓸모없는 시간 한 토막을 대학로 어딘가에 버려야 했다
골목골목을 지나 외딴 소극장
눅눅한 공기를 밀치고 가파른 계단 끝에 닿으니
흐릿한 불빛 아래 객석은 텅 비었고
무대는 호젓했다
장내를 쓱 훑어보던 키 작은 남자는 검은 커튼 속으로 사라지고
관객은 혼자였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연극은 무사할까
긴 대사와 짙은 분장이 서성거리는 무대 뒤편
무명 배우들의 초조한 눈빛이 떠오르고
왠지 모를 쓸쓸함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은 우리의 시간 너머로 넘어가
웅크려 앉았다가, 식어가는 심장을 가동시켜
잠시 이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것인데,
연극 같은, 연극이 아닌,
이 비극으로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까
한 사람을 위해, 가라앉은 무대를 안간힘으로 들어올리는 연기는
극한의 노동일 것이다
관객 1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객 2인 그림자가 내 뒤를 따라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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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한 연극배우가 말했다. 한두 명 손님이 들 때면 힘이 쭉 빠진다고 했다. 눈치 빠른 관객은 스스로 나가거나 눈치 없는 관객이 끝까지 앉아있으면 양해를 구해 내보낸다고 한다. 연극 같은, 연극이 아닌, 비극은 버틸 힘이 없다. 예술은 극한의 노동으로 살아남는다.
책들의 귀
책의 귀는 삼각형,
귀퉁이가 접히는 순간 책의 귀가 태어나네
주차표시 같은 도그지어*
졸음이 책속으로 뛰어들면 귀가 축 처지는 책
킁킁거리며 손가락을 따라가던 책은 그만 행간에 주저앉네
순순히 귀를 내주고
충견처럼 그 페이지를 지켰지만 해가 가도
끊어진 독서는 이어지지 않고 책의 심장에 먼지만 끼었네
귀 접힌 자리마다 쫑 메리 해피 도꾸 누렁이…
쥐약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눈빛이 생각나 눈에 든 문장에 밑줄을 긋네
쫑긋, 귀를 추켜들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가랑이에 바르르 눈치를 밀어 넣던 비굴한 이름들
흘러내린 두 귀를 실로 묶다가 본드를 발라본 적 있네
셰퍼드처럼 진돗개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못한
아비도 모르는 개들은
마루 밑 신발짝이나 물어뜯다가 복날에 하나 둘 사라졌네
순한 책의 귀,
녀석도 잡견이네 침을 묻혀도 짖지 않고 책장을 찢어도 물지 않네 누군가의 손짓을 따라가 집을 잃은 책들은
귀를 펴고 또 다른 주인을 섬기거나, 귀를 접고 헤어진 주인을 그리워하거나
*도그지어(dog's ear) : 책장을 접어놓은 부분이 강아지 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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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책을 읽다가 가끔 한쪽 귀를 접어두기도 한다. 그리고는 한참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세모로 접힌 그 책의 귀는 마치 ‘개의 귀’를 닮아 우리 집에서 키우던 잡견 도꾸가 생각났다. 복날 사라져버린 귀가 접힌 그 개는 겁이 많고 참 순했다. 책도 순해서 찢거나 오래 버려두어도 짖지 않는다.
골목의 입
한때 입이 열 개가 넘었다
밤새 불어난 소문이 구석진 골목길 평상에
아침밥처럼 차려졌다
싱거운 소문도 이곳에 오면 소금이 뿌려지고
입 하나를 건너갈수록 점점 간이 세서
골목의 며느리들은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기도 했다
매번 뒤꿈치를 따라오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애먼 길로 돌아가던 동네 골목길
목련나무집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나팔꽃이 입을 다물어도
해거름까지 둘러앉은 잡다한 이야기로 하루치 명을 이어 붙이던
그토록 걸쭉한 입담들
입으로 쓴 동네 내력이 두툼한 소설책 몇 권이었다
골목의 입이 하나둘 사라졌다
담을 넘던 박장대소와 커다란 양푼에 버무려진 열무김치와
너나없이 달려들던 숟가락과
얼음을 띄운 커피믹스도 기운을 잃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을비에 젖은 어둑한 골목
우산을 쓰고 문 앞에 홀로 앉은 노인,
무슨 일인지 뼈가 시리도록 그날 밤을 깔고 앉아있었다
끝내 낡은 장롱과 눈에 익은 방석은 대문 밖으로 밀려나고
골목은 마지막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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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한때 골목은 활기가 넘쳤다. 빨랫줄엔 하얀 기저귀가 펄럭이고 아이들 웃음이 아침 햇살처럼 눈부셨다. 울음이 골목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하였다. 노인들은 평상에 모여 박장대소하며 지루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은 자라서 골목을 버리고 새 아파트로 이사 가고 휠체어는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수다스러운 골목의 입이 사라졌다. 더듬거리던 지팡이도 보이지 않는다.
[출처] 모던포엠 12월호 시와시작 / 허름한 주머니 외 9편|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