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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 승리하는 믿음을 위하여 (요4:19-24)
아버지와 아들이 뜨거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사막을 몇 날 며칠을 헤매다가 아들이 먼저 절망하며 “아버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죽음뿐인 것 같아요. 더 고생하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겠어요.”라고 하자 아버지 역시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들을 격려하며 “틀림없이 마을이 나타날 거야. 아들아, 조금만 힘을 내렴.”
그러고는 다시 길을 가는데 이들 앞에 무덤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아들은 다시 주저앉으며 “보세요. 아버지. 무덤이 있는 걸 보니 저 사람도 사막을 헤매다 죽은 것이 분명해요.”
그러나 아버진 아들을 향해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들아, 무덤이 있다는 건 가까운 곳에 이 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표시 아니겠니?”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절망과 희망은 늘 같이 다닙니다. 단지 사람들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절망하기도 하고 희망을 품기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평탄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문제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태도는 앞에 놓인 사건이나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이혼율은 세 가정 당 한 가정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가정의 경우에는 50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더하여 매 주일 부부가 함께 교회를 나가는 가정의 경우는 1,105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의 삶은 그만큼 안전해진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서두의 사막 예화에서는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절망과 희망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 하버드 보고서 예화에서는 믿음으로 상황을 보게 되면 절망도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믿음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린 ‘믿음’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믿음’은 ‘믿는 마음.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볼 때 믿음이 ‘믿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걸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마음만 있으면 그게 믿음인 걸까요?
사전적인 정의에서 믿음의 또 다른 의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다고 여기는 바!’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아멘’입니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이 무어라 하시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그 말씀을 그렇다고 여기는 ‘아멘의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으려면 우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에 대해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도 승리하는,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하나님이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은 다름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약속의 말씀을 듣고 또한 읽어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렇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곧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한 겁니다. 성경 말씀을 들어야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만 많이 알면 믿음이 좋은 줄로 오해하여 나는 열 번 읽었다느니, 나는 백 독을 했다느니 하며 성경 읽은 횟수를 자랑합니다.
분명,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은 ‘승리하는 믿음의 시작’이지 ‘승리하는 믿음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완성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완성하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현실이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되고, 주위 일들이 안 좋게 돌아가고, 하는 일마다 힘든 상황만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무조건 우린 하나님 편에 서야 함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문젠데, 내가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편’이란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편이란 말 또한 사전에 보면 ‘여러 무리로 나눈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이라고 할 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 아닌 편’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 아닌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려면.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뿐입니다.
이때도 예배라고 하면 사람들은 교회에서의 예배만을 생각하는데, 예배의 본뜻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드려져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23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렇게’가 ‘어떻게’인가를 보니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영이시니 우리도 삶 속에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나님이 영이시면 하나님과 같은 편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영이 죽은 사람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자력으로는 영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고, 오셔서 해주신 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까지의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으며, 동시에 우리의 미래 즉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서 영의 능력이 회복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증거이며 이 말은 역으로 우리에게서 성령님이 역사하시게 하려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주여!”라는 이름을 얼마나 부르며 살고 계시나요?
이젠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주여!”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엄청난 고백인지를.
고린도전서 12:3절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여!”라고 할 때면 우리 속에서는 이미 성령의 역사가 발동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디서든, 속으로든 소리 내서든 “주여!”라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로마서 8:26~28절에 기록된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에게서 되어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시편 118:6절에서 다윗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 가난이 내게 어찌할꼬.”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 실패가 내게 어찌할꼬.”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 고난이나 괴롬이 내게 어찌할꼬.”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 원수나 적들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주여!”라는 이 한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계획한 일에 차질이 생길 때 또는 마음은 원이로되 그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 때라도 우리가 할 일은 “주여!”라는 이 한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의 믿음이 담겨 있는 것이고,
“주여!”라는 이 한마디가 우리의 기도가 되는 것이고,
“주여!”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셔서 나를 위해 싸우시고, 도우시고,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도 이기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으로만이 아니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걸 말하는 걸까요?
사실 성경에서 ‘진리’라고 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예배드리라는 말인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으로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여러분 각자가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세요.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까요?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시는 걸까요?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은 예배하라 하시는 걸까요?
모두 다 우리를 위해서이고, 나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내게도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배 역시도 성경 읽기나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예배하라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얼 해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려 드려야 기뻐하시고, 안 그러면 서운해하시면서 벌을 줄까 말까를 고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 의식에 참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주일에 예배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을 재충전하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어 주일 이후의 한 주간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려 드리기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울이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탈취물 중에서 좋은 것들을 따로 숨겨 두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이때 사울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좋은 것을 따로 구별한 것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런데 이때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순종이고, 수양의 기름보다 순종하는 것”이라고.
당시의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잘하는 것이고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복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예배드리는 것에서부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된 예배 곧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가 아닌가를 알려면 우리에게 ‘순종이 있는가, 없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일에 예배드렸다는 것으로만 할 일 다했다는 식으로 방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참석에 순종했다면 주일 이외의 날들에도 모든 분야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고자 하면 매 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매일매일의 예배드리는 믿음이란 곧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의 사전적인 의미의 두 번째가 ‘그렇다고 여기는 바.’라고 했는데, 무얼 그렇다고 해야 한다고 했었나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해주시겠다고 또는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그렇다고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나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으로 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여긴다.’고 함은 다른 말로 하면 ‘맞다고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이 다 맞다고 여긴다면 그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로만 맞다고 할 게 아니라, 정말 맞다고 여긴다면 ‘맞다고 믿는 대로 순종’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은 단순히 예배 의식에 참여하라는 정도의 교훈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배가 순종이고 순종이 곧 예배이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고자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도 예배 참석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순종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주일을 성수했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했기에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득이해서 주일성수를 못 했다 할지라도 오직 순종만이 우리를 승리하는 믿음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두에서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 했다면, ‘읽은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으로 믿음의 완성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그렇다고 여기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예배는 그런 믿음과 순종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행동입니다.
인생의 복은 그렇게 예배함으로써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믿음으로 인생을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말씀에 순종하기를 더욱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로 믿는다고 할지라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시작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다 해도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늘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매 순간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셔서 우리의 순종으로 인해 기쁘신 하나님이 우리가 믿음 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들을 다 받으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