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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아시아 도시의 도전과 미래(4)
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地圖力)과 아시아를 말하다
김이재 (경인교육대학교)
지도력(地圖力)은 지도를 읽고 활용하는 역량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당대 최강국은 모두 지도 강국이었고, 세계사를 주도한 영웅들 중에는 지도광(狂)이 많았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기업들, 월마트, 삼성, 대우, 현대, 동원, 스타벅스, 구글, 넷플릭스, 현대카드, 배달의 민족 등 기업들의 성공 배경에는 지도력(地圖力)이 깔려 있다. 공간정보 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경쟁력 있는 연결성 확보가 중요한 시대에 25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젊은 스마트폰 사용자가 많은 동남아‧남아시아는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지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중심적인 세계지도에 갇혀 새로운 기회를 보지 못한 한국기업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지 못했고, 한국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지리적 문해력 부족으로 실효성이 떨어졌다. 커넥토그래피 혁명에 올라탄 BTS의 성공 방정식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세계사를 주도한 영웅들의 지도력(地圖力) : 당대 최강국은 모두 지도 강국이었다.
지도는 단순히 지형을 나타낸 그림이 아니라 목적에 따라 정보를 선별하고 효율적으로 담아낸 지식의 총체다. 18~19세기 제국주의의 문을 연 첨병은 지도였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지구촌 곳곳을 누벼 만들어 낸 ‘지리상의 발견’과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지도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그리스‧로마 제국, 이슬람 및 몽골 제국,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당대 최강국은 모두 최신 정보를 수집해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지리 강국이기도 했다.
지도력(地圖力; Mapping Power)은 ‘지도를 잘 읽고 낯선 곳에서 방향·동선을 결정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지도력(地圖力)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글로벌 이슈를 분석”하고, “공간을 세계·지역·국가·도시 등 다양한 스케일에서 줌업-줌다운하며 큰 그림(Big Picture)”을 그리고, 일상생활 세계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창의성”과 “지리적 상상력”까지 기를 수 있다. 또한 지도력(地圖力)은 생생한 현장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고 활용하는 능력, 나아가 ICT 기술을 활용해 공간 빅데이터를 처리·분석·체계화하는 지리정보과학(GIScience)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지도력(地圖力)을 갖춘 지도자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혼란 속에서도 생존의 길을 잘 찾지 않을까?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해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수상,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영웅들 중에는 지도광(狂)이 많았다. 정치·경제·환경 변수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무역 강국의 위상을 유지하려면 앞으로 지도자를 뽑을 때 역사관뿐 아니라 지도력(地圖力)도 검증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세계적인 투자가나 대기업 총수 중에는 지도를 즐겨보는 이들이 많다. 백만장자의 첫 번째 직업으로 신문 배달부가 많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토머스 에디슨, 샘 월튼, 워런 버핏, 스티브 잡스, 마이클 델 뿐 아니라 대우 김우중 전 회장, 롯데 신격호 회장 역시 어린 시절 신문 배달을 하며 지도력(地圖力)을 길렀다. ‘지도력(地圖力)은 국력(國力)’이고 지리학을 초등학교 때부터 필수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기업인과 각 분야 리더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지도력(地圖力)은 지도자(指導者)의 필수 자질”이라는 소신은 확신이 되어 간다.
4차 산업혁명‧ESG 경영 시대에 더 중요해진 지도력(地圖力)
코로나19에도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한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기업들, 모든 매장을 ‘AI 팩토리’로 변신시킨 월마트, 국토개발 지도를 활용하고 점포 개발팀을 가동시킨 스타벅스 코리아, 조선소도 없이 지도를 보여주며 선박을 수주한 현대의 정주영, ‘한국의 김기스칸’으로 불린 대우의 김우중, 동원 그룹 창업자의 거꾸로 세계지도 …. 수 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의 성공 사례 밑바탕에는 지도력(地圖力)이 깔려 있다. 디즈니와 맞장뜨는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 우뚝 선 넷플릭스의 창업주인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 역시 지도력(地圖力)의 달인이었다. DVD 대여업에서 시작한 넷플릭스는 미국의 우편 배달 시스템에 근거해 유통센터의 입지를 결정하는 등 지도를 활용한 공간 전략을 통해 빠르게 사세를 확장했다. 이후에도 ‘고충 지도’를 만들어 조치가 필요한 현장을 즉시 파악하고 글로벌 확장 전략 수립 과정에서도 ‘문화 지도’를 도입했다.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며 모든 규칙은 과감히 없앴지만 다양한 지도를 활용해 변신에 성공한 넷플릭스의 비밀 병기는 결국 지도가 아니었을까?
삼성은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 때부터 해외 현지법인의 정보 수집을 강조하는 등 지도력을 중시해온 기업이다. 신사업 개척을 위해 도쿄와 실리콘밸리에 정보센터를 설립한 삼성은 10년이 넘는 조사와 연구를 거쳐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1984년 독자적으로 반도체 개발을 성공시킨 후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는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탁월한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일찍이 ‘공간 마케팅’에 눈을 뜬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도 지도력의 중요성을 잘 아는 기업인이다. 직원들이 어떤 풍경을 보고 일하는지 세심하게 관찰했고, ‘인사이트 트립’ 제도를 도입해 직원들에게 1주일 동안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기회를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니콘 기업 ‘배달의 민족’ 성공 신화에도 지도가 있었다. 군대에서 항공사진을 수합해 디지털 지도 만드는 작업을 하며 지도력을 기른 김봉진 대표는 대동여지도 프로젝트를 통해 배달업체 공간정보를 서울 중심부에서 전국으로 확장해 나갔다. 배민은 사무실을 세 번 이사했는데, 그때마다 김대표가 실내 공간을 직접 디자인하고 인테리어 공사까지 담당했다. 그는 직원들의 지리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롯데월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학교 운동장 스탠드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창밖의 풍경과 사무 공간이 구성원의 사고방식 및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트 하나가 없어서 자동차 생산라인 전체가 멈추는 세상에서 정확한 최신 세계지도는 기업 전략 수립 과정에 필수적인 기초 자료다. 실제로 각 기업이 처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한 장의 지도는 탄소중립시대의 나침반이자 ESG 경영의 지표가 된다. 각종 전염병이 수시로 창궐하고 강대국간 패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공급망(Supply Chain)을 유지하려면 예상 가능한 모든 변수를 지도에 표시해야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년에 달력을 보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지도를 펼치는 자가 앞으로 100년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고 이어령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지도력(地圖力)에 우리의 미래가 달린 셈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플랫폼 기업이 놓친 한 가지: 손정의가 활용한 스마트폰 사용자 세계지도 vs 네이버‧삼성이 의존한 19세기 서구중심 세계지도
네비게이션이 발달해 더 이상 지도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지도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공간정보는 여전히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 변수다. 빅데이터 중에서도 공간 빅데이터는 자율주행, 인공지능 및 다양한 융복합 기술의 기초가 된다. 디지털 지도와 GIS 데이터를 조금 손질하면 디지털 혁신을 가속화하고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강력한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세계적인 기업 구글의 성공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구글이 초격차 기업으로 급부상한 계기는 2005년 구글맵을 출시하면서다. 야후, 넷스케이프 등 경쟁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구글은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검색어의 1/4이 지도, 공간정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키홀’이라는 중소기업을 인수해 개발한 디지털 지도를 무료로 나눠주는 전략으로 경쟁사를 순식간에 압도해 버린다. 구글맵 혁명을 시작으로 우버, 에어비앤비, 포켓몬고 등이 연달아 탄생했고, 실리콘밸리에서의 창업과 혁신도 가속화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지도력(地圖力)은 더 중요해졌다.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멘토였던 요시카와 료조는 “이제 마케팅은 지정학적 제조업으로 진화했다. 선진국 중심의 판에 박힌 시장조사 보고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제 3세계 현장으로 달려가 현지인의 문화와 소비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2014년 무렵 손정의 회장은 중국 알리바바에 이어 한국‧인도‧동남아의 유망한 스타트업을 발굴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쿠팡, 그랩 등 아시아 각국의 대표적 플랫폼 기업을 연달아 탄생시키며 ‘유니콘 아버지’로 불리는 손정의는 아시아의 IT 지도를 새롭게 그렸다. ‘나는 한계에 부딪치면 손자병법을 읽고 세계지도를 펼친다’는 손정의 회장은 중국‧인도‧동남아 지역의 스마트폰 사용자 수를 표현한 최신 지도(그림 1)에 근거해 사업 전략을 수립한 듯하다.
게임의 규칙이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오히려 ‘없는 게 메리트’가 된다. 립프로그(Leapfrog) 현상은 ‘열악한 환경에서 더 높이 뛰는 개구리’처럼 ‘저개발국에서 오히려 더 빠르고 과감한 디지털 혁신’을 의미한다. 전화가 없던 중국 오지의 농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전자 상거래가 급증한다. 은행 계좌가 없던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스마트폰이 주어지면 금융과 IT가 융합된 핀테크 경제가 확 열린다. 아시아에서 플랫폼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한국 IT 기업들은 미얀마‧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 등 사업 환경은 열악하지만 디지털 혁신이 빠른 국가보다는 성장이 정체된 선진국 시장에 안주했다. 네이버(라인)를 비롯한 한국기업은 19세기 유럽의 항해용 세계지도, 고위도 면적인 지나치게 확대된 서구중심적 세계지도(그림 2)에 의존해 사업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실제로 손정의 회장이 답답한 일본 시장을 떠나 다른 아시아 저개발국으로 눈을 돌릴 때 네이버 이해진 의장은 일본시장에 집중했다.
그림 1. 스마트폰 사용자 수를 표현한 카르토그램 세계지도
출처: 김이재(2021). 「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 쌤앤파커스
그림 2. 고위도 지역 면적이 부풀려진 19세기 대영제국의 항해용 세계지도
출처: 김이재(2021). 「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 쌤앤파커스
2014년 무렵 삼성은 세계 4위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의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남아의 급성장하는 플랫폼 경제와 창업 생태계의 변화에 둔감했던 삼성은 스마트폰의 시장 점유율과 신기술 개발에만 집중했다. 만약 삼성이 고젝과 같은 현지 스타트업을 초창기 인수하거나 삼성페이를 비롯해 다양한 서비스 앱을 개발해 제공하면 어땠을까? 인도네시아 뿐 아니라 동남아 플랫폼 시장을 선점하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IT‧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듯해서 두고 두고 아쉽다. 급변하는 게임의 규칙을 읽어내지 못한 삼성은 2022년 중국산 저가 스마트폰과의 경쟁에 밀려 동남아에서 고전 중이다.
이스라엘은 800만 명 가량의 인구에 한반도의 1/10에 불과한 충청도와 비슷한 면적의 소국이다. 그러나 ‘실리콘 와디’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는 미국의 실리콘밸리, 중국의 선전과 함께 세계 3대 스타트업 중심지로 꼽힌다. 이스라엘 벤처투자그룹 요즈마를 이끌었던 이갈 에를리히 회장은 한국에서 스타트업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경제‧기술적 측면이 아닌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한다. “한국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그들은 여지없이 내게 성공 ‘공식’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마치 전기 장치의 작동 설명서처럼 체계적인 단계 목록이 존재한다고 믿는 듯하다”며 답답해 했다. 특히 실패자에 대해 낙인을 찍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문화와 함께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수능에 길들여진 학생들을 양산하는 한국식 교육을 문제로 지적했다.
특히 요즈마 전 회장은 “한국의 유망한 기술 벤처 기업들은 세계로 나가면 아름다운 백조가 될 수 있는데 한국의 작은 시장 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나아가 “만일 싸이월드 창업자가 지도를 펼치고 사업 초기부터 세계로 진출했다면 페이스북은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실제로 1999년 국내에서 선보여 인기를 끌었던 싸이월드는 페이스북의 전신, 가상화폐 도토리는 블록체인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전 세계 콘텐츠 공장이 된 유튜브보다 판교에 있는 판도라 TV가 창업이 빨랐고, 한국의 네이버는 미국 구글보다 1년 앞서 설립되었다. 그는 한국의 창업가들에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나라의 문화와 업무를 경험하고 실패를 대하는 느긋한 태도를 몸에 익혀라. 그것이 세계 시장의 문을 열고 창업가 정신을 육성할 수 있는 열쇠”라며 지도를 펼치고 과감하게 세계로 나아갈 것을 조언한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기업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나 영국‧독일‧일본 등 선진국에만 주목했지만, 진짜 큰 사업의 기회는 동남아‧인도 등 저개발국에 숨겨져 있었다. 열정, 기술력, 순발력, 성실성을 겸비한 우수한 인재를 보유하고 다양하고 기발한 서비스 개발 능력까지 겸비한 한국 IT 기업들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19세기 유럽의 부정확한 세계지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최신 데이터를 반영한 정확한 세계지도에 기초해 립프로그(Leapfrog)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저개발국에 초점을 맞춘 공간 전략을 다시 수립할 때다.
미·중 패권이 충돌하는 전장, 아시아에서 한국의 입지와 진로: 지도력으로 보는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전략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신남방정책은 큰 방향에서는 옳았더라도 구체적인 각론에서는 부족함이 많았기에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 실제로 신남방정책 추진 과정에서 인도‧동남아 지역에 대한 낮은 이해도와 정부의 성급한 정책으로 여러 오해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신남방정책 수립을 주도한 한 청와대 고위 인사가 “불행하면 아세안 가라”는 발언으로 국민적 반감을 샀지만, 이는 국민들의 지리적 문해력 부족에 기인한 오해에 불과하다.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는 상담‧항우울증제 못지않게 행복한 공간일 수 있다’는 뇌과학‧심리학 분야 최신 연구 결과를 적용한다면, 행복 지수가 높고 경제 성장도 빠른 동남아는 여러 한계에 부딪쳐 힘들어하는 한국인들에게 행복과 희망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며칠 후 ‘한국인이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 순위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상위를 차지했다는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결국 신남방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싱가포르‧말레이시아가 동남아에 속한다는 단순한 지리적 사실을 몰라서 야기된, ‘웃픈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사전 행사로 화제를 모은 ‘아세안 커피’ 이벤트 역시 좋은 취지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안타까운 사례다. 커피 트럭을 전국 각지로 보내 아세안 커피를 시음하게 하는 행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인기를 끌었다. 외교부는 성공적인 홍보 이벤트로 자체 평가했지만 동남아 국가 입장을 고려한다면 실패한 행사일 수 있다. 동남아 각 국가에서 생산된 ‘고급 스페셜티 커피’를 블렌딩해 ‘싸구려 커피’로 전락시켰으니,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동남아 커피의 브랜드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린 황당한 사고였던 셈이다. 현장을 잘 아는 지역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동남아 각국의 싱글 오리진 커피 생산지를 지도에 표시하고 청정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커피 문화 유산을 함께 설명했다면 고급 커피 중심지로서 동남아의 위상을 높이고 동남아에 대한 한국인의 뿌리깊은 편견을 완화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보 행사 참여자 수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한 담당자의 무지와 ‘아세안 통합’만을 강조하고 싶었던 외교 전문가의 과욕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인도‧동남아와의 협력 관계를 미‧일‧중‧러 4강 수준으로 격상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외교적 구상에도 불구하고 한국 방송과 언론, 학계의 뿌리깊은 서구중심주의는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KBS의 간판 국제 시사 프로그램 <세계는 지금>에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방송된 국가의 빈도수를 분석해 보니 미국(20.9%), 유럽(17.6%), 중국(14.1%), 일본(7.5%) 편중 현상은 변화가 없었다. 신남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지만 <세계는 지금> 방송된 10위권에 신남방 국가는 전혀 없으니 <서구는 지금>이라고 프로그램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국 방송에서 서구 강대국 중심의 보도와 편견을 강화하는 방송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2021년 7월 MBC는 도쿄올림픽 개막식 중계방송을 하며 큰 사고를 쳤다. 아이티, 인도네시아 등 20여 개 국가를 잘못 소개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해 국제적 지탄을 받았다. MBC 사장이 사과한 이후에도 25억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동남아‧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공영방송의 홀대 현상은 변함이 없고 한국 언론의 제 3세계에 대한 편견과 오류는 계속 방치되고 있다.
표1 , KBS <세계는 지금>이 2019~2022년 보도한 국가별 순위
no | 국가명 | 2019 | 2020 | 2021 | 2022 | 누적 | 지역구분 | 빈도 백분율 |
1 | 미국 | 34 | 55 | 45 | 34 | 168 | 중앙 및 북아메리카 | 20.9% |
2 | 중국 | 26 | 30 | 30 | 27 | 113 | 극동 아시아 | 14.1% |
3 | 일본 | 11 | 16 | 16 | 17 | 60 | 극동 아시아 | 7.5% |
4 | 우크라이나 | 4 | 1 | 34 | 39 | 유럽 | 4.9% | |
5 | 러시아 | 3 | 5 | 4 | 20 | 32 | 유럽 | 4.0% |
6 | 프랑스 | 4 | 10 | 14 | 3 | 31 | 유럽 | 3.9% |
7 | 브라질 | 2 | 9 | 7 | 8 | 26 | 남아메리카 | 3.2% |
8 | 아프가니스탄 | 2 | 16 | 3 | 21 | 서남 및 중앙아시아 | 2.6% | |
9 | 영국 | 3 | 1 | 9 | 8 | 21 | 유럽 | 2.6% |
10 | 독일 | 1 | 9 | 4 | 4 | 18 | 유럽 | 2.2% |
출처: 김이재(2022). 한국사진지리학회지
“전쟁은 최고의 지리 교사”라는 서양 속담을 입증하듯 최근 국제적으로 지리학 및 지정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듯하다. 스타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가 최근 낸 책 제목에도 ‘경제’ 대신 ‘지리’가 들어갈 정도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미국은 2022년 5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출범을 계기로 한‧일‧호주 뿐 아니라 인도‧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인도‧태평양(Indo-Pacific)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2022년 11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프놈펜에서 아세안 정상들과 조우하고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이은 외교 행사에서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로 아세안을 강조했지만, 캄보디아를 콜롬비아로 발음하는 등 실수를 반복해 외교적 노력에 빛이 바랬다. 평소 말실수가 잦은 고령의 대통령이었기에 다들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원래부터 미국은 지리 문맹 지도자가 많은 나라로 악명 높다. 미국의 화려한 외교적 수사와는 별개로 미국이 주도하는 IPEF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우세한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이 의욕만큼 동남아‧남아시아 지역에서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은 한국에게는 오히려 주도적으로 인도‧태평양 외교 전략을 펼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중‧일‧러등 강대국의 관점에서만 국제 정세를 조망할 뿐 실제 인도·태평양 지역의 실제 현장을 잘 모르는 전문가들에게 지리적 상상력이 적용된 창의적 외교 정책 수립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같다. ‘IPEF에 인도‧동남아 등 신남방정책 주요 국가들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고, 미국에게도 동남아가 IPEF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지역’으로 중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인도‧태평양(Indo-Pacific) 전략에서 ‘인도(Indo)’라는 신조어를 기존 ‘인도(India)’라는 국가명과 혼동하는 지리문맹 전문가도 있을 정도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칼리만탄(보르네오) 섬의 위치를 지도에서 찾지 못하거나 싱가포르‧부르네이 같은 부국이 동남아(ASEAN)에 속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대학생‧학자들도 많다. 신남방정책을 심화‧확대하는 한국판 인도‧태평양 외교 전략을 수립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초기 단계에서 동남아‧남아시아의 문화‧언어‧종교에 정통한 베테랑 지역전문가를 참여시켜 시행 착오는 줄이고 성공 확률은 높이면 좋겠다.
신남방정책에 대한 언론과 전문가의 뒷받침이 부족한 가운데 한국 공교육에서 동남아 홀대는 고질적이다. 정부가 아무리 신남방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해도 평범한 국민들의 신남방 지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지속된다면 정책의 실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적 교류가 활발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인 동남아(ASEAN) 비중이 사회과 교과서 내용의 1%대에 그쳐 심지어 해방 직후보다도 낮다. 한국 학계‧교육계 전반에서 미국의 영향이 지대하다 보니 국가교육과정, 특히 사회과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세계 인구의 10%에 불과한 서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동남아에 대한 편견은 없애겠다고 시작된 다문화 교육마저 이론에 치중해 서구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다 보니, 커리큘럼과 교육자료에서 동남아‧제 3세계에 대한 편견은 그대로인 안타까운 상황이다. 피상적인 부티크 다문화 정책의 부작용으로 이제 학교 현장에서는 ‘다문화 낙인’ 현상까지 나타난다. 악순환이 무한 반복되는 상황에서 작은 변화라도 도모하려면 국가 교육과정의 대대적 혁신과 대국민 지리적 문해력 교육이 시급해 보인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커넥토그래피 혁명에 올라탄 BTS의 성공 방정식
커넥토그래피(Connectography)는 ‘지리(Geography)’와 ‘연결(Connect)’을 합친 신조어다. ‘커넥토그래피 혁명’의 저자인 파라그 카나는 ‘지리가 운명’인 시대를 넘어 이제는 ‘연결성이 운명’인 시대라고 역설한다. 커넥토그래피 혁명의 시대에는 경쟁력 있는 연결성을 많이 보유한 자가 승자가 된다. 융·복합이 핵심인 4차 산업혁명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기차역 플랫폼처럼 외부와 다양한 연결성을 확보한 기업이 생존에 유리하다. 네이버‧카카오 등 한국의 대표 플랫폼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머물며 서비스 개발 경쟁에 치중하다 보니 한국의 IT 산업 생태계가 갈라파고스 섬처럼 고립되어 간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커넥토그래피 혁명에 올라타 큰 성공을 거둔 희망적 사례는 BTS다.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이제는 비틀스를 뛰어넘는 전설적 그룹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미약했다. 2012년 결성된 신인 그룹으로 공중파 방송 무대에 출연할 기회가 적었던 BTS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초창기부터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튜브에 개설된 방탄 채널을 통해서 BTS는 공식 공연뿐 아니라 안무 연습 장면, 백 스테이지 영상 등을 실시간으로 계속 올리며 글로벌 팬들에게 서비스했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매일 수많은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에 소소한 일상을 포스팅해온 BTS에게는 특히 전파 속도가 빠른 트위터가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BTS를 위한 온라인 투표를 장려하는 해시태그는 순식간에 51억 7200만 트윗을 만들어내 기네스 세계 신기록에 올랐는데 세계 인구의 70%에 달하는 트윗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결과다.
열정적이며 결속력 강한 팬클럽, 아미(ARMY)는 BTS 제국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디지털 원어민’으로 불리는 10대 초·중반의 소년·소녀가 중심이었던 BTS의 아미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한국이나 미국이 아니다.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아미 1위 국가 필리핀에 이어 3위에서 6위까지는 인도네시아·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가 차지했으니, BTS에게는 동남아가 글로벌 스타로 도약하는 발판이자 핵심 전략 지역이었던 셈이다. 콘텐츠–네트워크–플랫폼–디바이스가 결합된 완벽한 모바일 생태계를 구축해 성공한 BTS의 성공 방정식은 커넥토그래피 혁명의 시대, 한국 정부와 기업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다.
매켄지 글로벌연구소는 상품·서비스·금융·사람·데이터 분야의 모든 흐름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연결성 높은 나라로 싱가포르(1위)·네덜란드(2위)·미국(3위)을 꼽았다. 전체 16위를 차지한 한국은 상품(8위)·서비스(12위) 분야는 앞서 있지만, 금융(28위)·데이터(44위)·사람(50위) 분야의 글로벌 연결성은 낮은 편이다. 서울 역시 뉴욕·런던·홍콩·도쿄·싱가포르·두바이 등 다른 글로벌 도시에 비해 연계성이 많이 떨어진다. 반면 메카 성지 순례가 연중 계속되고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사람의 연결성 분야에서 2위를 차지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조 지리적 상상력 강국으로 최근 네옴시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림3. IT 창업 및 커넥토그래피 중심지를 표현한 세계지도
출처: 김이재(2021). 「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 쌤앤파커스
21세기 외교는 전통적인 국방, 안보의 영역을 넘어 기술, 경제,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어 가는 중이다. 국경에 갇힌 평면적 사고, 서구중심주의로 왜곡된 엉터리 세계지도로는 고차방정식으로 진화해가는 국제 이슈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IT 기술자나 빅데이터 전문가 못지않게 현장에 강한 지리학자, 베테랑 해외지역 연구자의 전문성이 빛을 발하기 좋은 환경이다. 정부뿐 아니라 개인, 기업, 도시도 최신 데이터가 담긴 세계지도를 펼치고 상생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를 잘 찾고 틈새를 공략하는 지리적 상상력이 중요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니콘 기업이 연달아 탄생하고 세계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전체 인구가 25억 명에 달하고 유‧소년층 비중이 높은 동남아‧남아시아에 주목해야 커넥토그래피 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동남아가 아무리 망해도 굶어죽지 않는 이유 [신과대화: 김이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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