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73) / 스페인
라스 메둘라스(Las Medulas; 1997)
라스 메둘라스는 카스티야-레온 자치 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Castile-Leon], 레온 주[Province of Leon]에 속한다. 1세기에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페인 북서 지역에서 수력(水力) 기술을 사용해 금광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2세기가 지난 후, 로마인들은 채굴과 관련된 경관을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났다. 그 후 이렇다 할 산업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농업용으로 쓰이는 가파른 산허리와 광활한 지대 도처에 고대의 뛰어난 기술의 놀라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자취가 남아 있다.
라스 메둘라스 금광 지역은 로마의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또한 산업 및 주거 공간을 포함해 고대 경관의 모든 요소들을 놀라운 수준으로 잘 보존하고 있다. 이곳은 지금은 사라진 문명이 과거에 어떤 과학 기술적인 방법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어떤 방식으로 일했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를 제공하는데 당시 수력을 응용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이 확인됐다. 인간의 극단적인 개입과 외래 식물군의 유입 같은 자연의 작용에 의해 독창적인 문화 경관이 형성되었고, 그 경관은 로마 시대 이후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라스 메둘라스 지역의 충적토 금광은 철기시대 말부터 소규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방어지[Castros]의 유적과 묘지들, 금 부장품 등에서 이와 관련된 정황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 북서부는 로마가 마지막으로 정복한 지역이었다. 시기적으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군대의 활동이 있었던 기원전 29년부터 기원전 19년 사이였다. 이후 약 1세기 동안 로마 군대가 직접 이 지역을 통치했다.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곳과 비교하면 로마화가 덜 이루어진 곳이었다. 당시에 로마의 도시 중심부들이 지어졌고, 로마식 도로 체계가 정비됐다. 이곳의 인구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곳의 토착민들은 방어가 용이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부족 영토 내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세기 후반 이후, 금을 비롯한 철광 같은 광물 자원을 개발할 목적으로 이곳에 로마식 새 주거지들이 조성됐다. 이와 동시에 금을 추출해내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로마 시대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채굴 작업이 이뤄졌다. 더 오래되고 전통적인 원로원 지역들과는 다르게, 로마의 통치 아래 채광된 모든 광물 자원은 황제의 세습 재산으로 귀속되었고 로마의 재정으로 관리했다. 광산 지역은 로마 제국의 영토로 선포된 아스투리아(Asturia)와 칼레시에(Callaeciae)의 북서쪽 군사 지역을 포함한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Hispania Citerior) 지방에 속했다. 처음에는 총독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다 1세기 70년대에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황제의 개혁이 있은 후부터 로마의 행정 장관인 아스투리에 에 칼시에(Asturiae et Calhciae)가 직접 통치했고, 그 아래 직책으로 광물 자원 관리자인 프로쿠라토레스 메탈로룸(Procuratores Metallorum)이 여러 광산들의 개별적인 운용을 책임졌다. 웨일즈(Wales) 같은 로마의 다른 광산 지역과 다르게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었다. 이들은 로마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광산 일을 해왔다. 광부들의 주거지는 도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의 관료들이나 부하들이 살았던 주거지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수력을 이용해 댐과 수로, 도로들을 건설하는 엔지니어링 작업은 로마의 군대가 맡았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주요 철광 생산지였던 잉글랜드 남동부의 윌드(Weald) 지방을 포함해 다른 로마 식민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졌다. 군대는 평화를 유지하고 로마 관료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을 했으며, 아울러 식민지 수도에서 바다 건너 로마로 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의 안전 확보도 책임졌다. 로마 7군단[Legio VII Gemina]이 영구적으로 레온(Leon) 지방에 주둔했고, 부속 부대들은 광산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다양한 규모의 요새에 주둔했다. 이후 2세기에 로마 화폐 체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대 로마의 금화인 아우레우스(aureus)는 가치가 하락하였고 적어도 스페인 광산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안겼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 황제는 아우레우스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위기를 맞았던 스페인의 광산들은 금 생산을 재개했다. 이 사실은 아스투리아와 칼레시아가 독립권을 가진 주(州)인 히스파니아 노바 시테리오 안토니니아나(Hispania Nova Citerior Antoniniana)로 격상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주와 광산 지역의 경제 회복기는 아주 짧았다. 그 후 고고학적 기록에서 보이듯 광물 자원이 급격하게 고갈되면서 금 생산은 3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내에 종말을 맞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라스 메둘라스의 고고 유적(ZAM)은 광산들뿐만 아니라 채광 과정에서 생긴 선광(選鑛) 부스러기들이 쌓여 있는 넓은 지역들로 이뤄져 있다. 또한 이곳에는 채광에 필요한 방대한 물을 모으기 위해 만든 댐들과 그 물을 광산으로 옮기던 복잡한 수로들이 있다. 당시 거주지의 모습은 토착 거주민들과 로마의 관료들, 군대를 포함한 지원 인력들이 살았던 마을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로마의 주요 도로 중 하나로 이어지는 도로와 채광 작업에 쓰였던 작은 길들이 있다. 샘물, 빗물, 눈을 녹인 물이 큰 댐에 저장되었고, 이물은 중력을 이용한 수로들로 구성된 우물 시스템을 통해 멀리 있는 광산까지 흘러갔다. 금이 매장된 역암 층과 겹쳐 있는 일반 지층을 수직으로 잘라 수 미터 깊이의 갱도를 파고 막힌 봇물이 갑자기 열리면 방대한 양의 물이 이 수로를 통해 밀려들다가 막힌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때 수압에 의해 바위가 깨져 물에 씻겨 나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선광 지역이 형성된다. 이 작업이 라스 메둘라스의 작업지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장관을 이루던 이러한 채광 작업은 이곳의 여러 지역들을 천천히 옮겨 다니며 이뤄졌다. 수로와 도랑의 흔적이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남아 있는데 최소 100㎞ 길이에 달한다. |
첫댓글 지진 때문인 줄 알았는데 광산 개발을 위한 수압으로 인해 지형이 변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