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엉킨 기억과 시간의 실타래를 풀다
플로리앙 젤러 감독의 <더 파더>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무너진다
어느 날 갑자기 시간과 기억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시간의 순차성이 무시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흔히 치매라고 부르는 알츠하이머는 일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무너뜨리고 마는 무서운 질병이다. 질환을 앓고 있는 본인보다 그 상대를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한다. 상대는 시간과 기억을 바로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본인은 낯선 얼굴과 태도로 일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무너지고 만다. 가장 비참한 것은 혈연관계가 뒤틀려진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가족 사이의 관계이면 더욱 더 허망해진다. 그를 대하는 상대는 사랑의 감정이 충일한데 이쪽은 이미 감정이 증발되어 낯선 타인으로 존재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의 순차성이 뒤틀려 버리고 기억이 수시로 뒤바뀐다.
현재의 관계성이 무너지고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그 과거의 끝에는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모두 다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아늑한 모성의 기억만은 또렷하다.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평안의 휴식을 찾는다.
이 영화의 원작은 희곡이다. 감독인 플로리앙 젤러는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희곡 작가이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영화 데뷔작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잘 나가는 40대의 소설가인 플로리앙 젤러는 2014년에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여 몰리에르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원작인 희곡은 국립극장에서도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원작자인 플로리앙 젤러가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기립 박수를 받은 것은 물론, 그 기세를 몰아 아카데미 영화제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안소니 홉킨스), 여우조연상(올리비아 콜맨), 각본상(플로리앙 젤러) 등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시간 의 흐름 속에서 기억이 쇠락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안소니 홉킨스가 남우주연상을, 자신의 동명 희곡을 스크린에 옮긴 감독 플로리랑 젤러가 갹색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출연진 또한 화려하다. <양들의 침묵>에서 섬뜩한 연기를 펼친 안소니 홉킨스가 아버지 역을, 그리고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영국의 배우 올리비아 콜맨이 딸 역을 맡아 개성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 영화는 입체적인 서사 구조가 없이 아버지와 딸의 일상적 풍경을 통해 무너진 관계성 속의 애증을 담담하게 펼치고 있다. 기존의 알츠하이머를 다룬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안소니 홉킨스 분)의 시점으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영화들은 가족들의 시점으로 치매 환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영화는 치매 환자의 시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가끔 서사를 뒤따르는 데 있어서 논리적인 혼란을 겪기도 한다.
가족들의 시점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경우에는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논리적인 인과의 법칙을 따르지만,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되면 다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이 개입되기 때문에 논리적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많다. 딸의 집으로 옮겨 왔는데에도 자신의 집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사위인 폴의 존재와 현재 위치에 대한 기억의 뒤틀림이나, 딸이 5년 전에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장면들이 바로 그렇다.
공간과 시간의 카오스, 인간의 품위를 덮치다
이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는 아주 함축적인 상징을 드러내고 있다. 큰딸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이 장을 보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오페라 음악이 흐른다. 처연하고 애절한 아리아는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이 첫 대목에서 공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시간이 그 순차적인 질서를 잃어버린 채 뒤죽박죽 뒤엉키는 아버지의 의식 상태를 단적으로 요약해서 보여준다.
아버지는 간병인 안젤라가 벌써 세 번째 자신의 시계를 훔쳤다고 딸에게 투정을 부린다. 심지어 욕설까지 하고 신체적 위협을 가했다고 과정해서 표현한다. 그리고 딸이 사랑하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이곳 런던을 떠나 곧 파리로 가게 될 것이라는 대화 내용을 자신의 개인적인 환상 장면으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뒤이어 어둠에 잠식되어 있는 거실을 비롯한 방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는 곧 아버지의 의식이 활기를 잃고 침잠의 늪으로 빠져드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시간의 순차적 기억과 인물에 대한 관계성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간병인의 이름과 모습이 엇바뀌고, 시간의 기억과 그 시간 속의 인물에 대한 기억의 관계성이 뒤엉키게 된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에도, 지금 자신은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옮긴 딸의 집 거실에서 이혼한 딸의 전 남편을 발견한다. 거기서 자신만의 화법으로 장면을 조작하여 받아들인다. 사위가 자신의 집이라고 우기자 아버지는 자신은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며 버틴다. 딸에게 네 남편이 있다고 얘기하자, 딸은 현장으로 와 확인하지만 아무도 없다. 거실로 함께 돌아와 남편의 부재가 확인되자 관객은 비로소 그것이 곧 아버지의 기억이 조작해낸 환상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을 그 당시에 고정된 현재적 시간으로 기억하려고 한다. 새로 온 간병인 로라에게 어디서 본 적이 있다고 얘기하는가 하면, 사고로 죽은 둘째 딸 루시가 그렸다는 그림을 가리켜 보이며 요즘은 왜 연락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큰딸이 자신을 어딘가로 보낸 뒤, 이 집을 차지하려 한다고 경계심을 보이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뒤엉킴은 물론 자신의 것에 대한 소유욕 역시 강하게 나타난다. 현재 큰딸의 남편인 사위에게,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자네 것이 맞느냐며 재차 확인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시계를 산 영수증도 보관하고 있느냐며 집착한다. 아버지의 이러한 망상은 반어적인 역설로 표현되기도 한다. 큰딸 앤이 잠자고 있는 아버지의 목을 누르는 장면이다. 그것 역시 아버지의 무의식 속에서 표출된 망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곧 다른 장면에서 딸이 잠자는 아버지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의 무의식적 망상이 빚어낸 피해망상으로 확인된다. 피해망상은 점점 더 극에 치닫게 되는데, 현재의 사위와 다투는 장면이 단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사위가 아버지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딸을 고생시킬 것이냐며 뺨을 때리는 극적인 장면으로 조작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쇠락해 가고, 행동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방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곧이어 멈춘다든가, 큰딸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이 떨어져 깨진다든가, 어느 날 갑자기 혼자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다든가, 아버지가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장면에서 한 소년이 비닐봉지로 장난을 치는 장면 등이 바로 그렇다.
이 영화는 시간 속에서 기억을 잃고, 공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해지며, 장소와 인물의 관계성이 단절되고, 자신의 옷도 재제로 입지 못할 정도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심지어는 무의식적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어가는 과정을 처연하도록 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보여주고는 있지만 절제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상징적 은유로 제시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늙어갈 것인가를 아프게 묻고 있다.
결국은 영원불멸의 모성으로 회귀한다
지금까지의 지리멸렬한 의식의 혼돈을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결국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야 할 하나의 구원처를 제시하고 있다. 여느 날과 달리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 집안 곳곳을 둘러본다. 어느 방의 문을 열어보니, 사고로 죽은 둘째 딸이 인공호흡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다. 간호사 캐서린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와 아침 인사를 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은 비로소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시퀀스에서도 시간의 순차성을 무시한 뒤틀린 기억이 아버지를 괴롭힌다. 사고로 죽은 둘째 딸은 물론, 큰딸과 이혼했던 사위가 남자 간호사 역할로 그의 방에 들려 캐서린과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그는 질문 공세를 시작한다. 저 남자는 누구이며, 또 그쪽은 누구이며, 결국 ‘나는 누구지?’하는 의혹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울먹이며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시면 좋겠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간호사의 품에 안겨 “염마가 보고 싶어. 여기서 나갈래.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라는 짧은 몇 마디의 말을 단속적으로 뱉어내며,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며 보채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캐서린 간호사가 그에게 속삭이는 몇 마디의 말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녀는 “화창한 날씨는 오래 안 가잖아요? 아가야 괜찮아.”라고, 어느새 간호사에서 어린 날 그의 어머니로 돌아가 그의 두려움을 안온한 모성으로 어루만져 준다. 그럴 때 카메라는 수평 이동을 하며 바깥의 정원을 비춘다. 정원의 나무들이 짙은 녹음을 드러내며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하다 페이드아웃 되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요양병원 입구 광장 한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 작품은 아주 상징적이다. 머리 윗부분이 없는 철제 두상 조각이 깊은 고뇌에 빠진 표정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다. 그 모습은, 곧 기억의 쇠락과 소멸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품위에 대한 연민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어, 관객에게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면서 이런 아버지와 같은 경우를 맞닥뜨린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하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암묵적으로 던지고 있다.
치매는 후천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 등 여러 영역의 인지 기능이 감소하여 일상생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평소에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통의 단절일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며 손을 잡고 사랑의 감정을 보내고 싶은데, 상대방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견지해 오고 있던 인간적 품위를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더 파더>는 그런 점에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화의 큰딸 앤처럼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사랑의 연대감을 보여야 한다는 윤리적 태도를 이 영화는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끝내 회귀할 곳은 영원불변의 모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덤으로 얹어주고 있다.
(계간『문장』2021년 여름호)
첫댓글 영화의 장면 장면을 그림 그리듯
보여주시네요.
몰입되는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