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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캘리그라피, 밀양 문인화, 밀양서각, 밀양시낭송,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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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을 맞는 내년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12인이 독립운동사 전공학자 등으로 구성된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위원회’의 심의와 관련 기관의 검증을 거쳐 최종 결정됐다. 선정된 12인의 독립운동가 중 밀양출신의 독립운동가 황상규 선생이 2015년 1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또 한 번 밀양 독립운동사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 이 달의 독립 운동가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92년부터 매년 열두 명 이상의 독립 운동가를 각 월별로 지정하여 발표하고,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 행사와 전시회 등의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번 황상규 선생의 ‘이 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은 지난 6월 3일 사단법인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국가보훈처에 선생에 대한 선정의뢰 공문을 발송하면서 시작됐다.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됨에 따라 2015년 1월 22일 오후2시 서울 효창원 백범기념관에서 대구대학교 김영범 교수의 ‘백민 황상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의 재조명’이라는 강연이 개최된다. 또 1월 한 달 동안 서대문형무소 야외전시장과 천안 독립기념관 전시장에서 백민 황상규 선생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각급 기관에 황상규 선생에 관한 포스트가 약10,000부 배포된다. 전국적으로 황상규 선생의 공훈을 선양하는 계기를 맞아 밀양인의 뜨거운 관심이 증폭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선생에 대한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뜻을 품다 상동고명학원, 마산창신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청년학도들에게 독립과 애국정신을 배양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고명학원에서는 ‘동국사략’이란 역사교재를 저술하여 교육시키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20세 전후의 밀양지방 청년들이 조직한 일합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외견상 친목단체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항일투쟁단체였다. 핵심인물은 황상규를 비롯하여 김대지, 윤치형, 안곽, 이각, 명도석 등 이었다.
⊙독립운동의 길을 향해 만주에서 밀양출신으로 대종교를 봉교하며 교육사업을 펼치고 있던 윤세복의 도움으로 서일, 유동열, 김좌진 등과 북로군정서 대종교계 독립 무장부대를 조직하고 재무총책에 임명되어 군자금모집에 주력하였다. 1918년 10월에 작성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사람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녕지역 관리인 양인보를 설득하여 창녕군에서 받아드린 동척소작료 1년분을 몽땅 받아서 임시정부에 헌금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의열단 창단과 옥고 1920년 5월 13일 의열단의 제1차 의거인 ‘밀양폭탄사건’에 곽재기 등과 함께 직접 참여하였다가 1920년 6월 서울에서 체포되어 1921년 7월 7년형을 받고 긴 옥고를 치르게 된다. 동지들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백절불굴의 의지로 자기의 혀를 스스로 깨물어 끝내 자백하지 않음에 따라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초유의 백지기소 사건으로 기록되는 유명한 화제를 남겼다.
⊙고향 밀양 땅에서 1927년 10월 밀양청년회 위원장, 12월에는 신간회 밀양지회장, 1928년 3월에는 밀양협동조합위원을 지냈으며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상임위원회 서기장 등을 맡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다음날 김병노, 허헌, 조병옥 등과 같이 이를 지도하였다. 이후 밀양에서 노동야학원과 여자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생을 마치다 슬하에 장남 용암, 이남 태철, 삼남 만용, 장녀 계수, 이녀 기화 등 3남2녀의 자녀를 남겼다. 폭압적인 일제하에서도 어렵게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 밀양읍 지동에 있는 선영에 안장됐다. 그의 장례식은 안병희를 위원장으로 선정해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는데 국내외에서 운집한 조문객들이 무려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백민추모사업회 그 사업회의 취지문은 ‘백민 황상규 열사는 조국독립을 위하여 항일투쟁의 거룩한 역사를 민족적 유산으로 남기신 독립선구자이시다. 우리 민족은 광복 30주년을 맞은 오늘에도 국토가 양단된 채 통일조국을 염원하면서 비운과 역경에서 신음하거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어찌 열사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으며 나아가 열사를 영원히 추모하는 우리 겨레의 도표이시기에 더욱이 향토의 영광으로 여기 뜻을 모은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위대한 독립선구자 백민 황상규 열사의 숭고한 민족적 정의감과 진지한 동포애와 강렬한 자주 애국정신을 받들어 후손만대에 영명으로 삼으려는 심정에서 모름지기 본사업의 근본 취지를 삼고 애국 선배제현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도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로 끝을 맺었다.
박영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