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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하게 할 이단
벧후 2:1-11
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1-11 / [거짓 예언자와 거짓 교사:유1:4-13]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교묘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자기들을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마저도 대항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순식간에 휩쓸어 버릴 무서운 최후뿐입니다. 2) 그들은 성적인 범죄도 나쁠 것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을 악한 가르침으로 현혹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훈이 오히려 비방을 받게 할 것입니다. 3) 이런 거짓 교사들은 탐욕에 가득 차서 여러분에게서 돈을 빼앗아가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정죄하셨으므로 그들은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일지라도 죄를 저질렀을 때는 가차없이 지옥으로 던져 심판의 날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 5) 또한 하나님께서는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도 노아의 일곱 식구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용서해 주시지 않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사는 세상을 큰 홍수로 멸망시켜 버리셨습니다. 6) 그후에 또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시고 땅 위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다 후세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7-8) 그러나 주께서는 롯을 소돔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인 그는 날마다 소돔 사람들의 끔찍스런 악행을 보고 몹시 마음 아파하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9) 이와 같이 주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을 여러 가지 유혹에서 구원하여 주시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날까지 계속적으로 벌을 내리십니다. 10) 하나님께서는 악한 욕망에 빠져 있는 자들과 영광을 받은 이들을 비웃는 자들을 특히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자아도취에 빠져 영광스런 천사들에 대해 함부로 지껄여 댑니다. 11) 그러나 하늘에서 주님을 모시고 있는 천사들은 이런 거짓 교사들보다 몇 배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 앞에서 그들을 헐뜯어 고발하지 않습니다.
교회사에 있어 어느 시대에나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구속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1-3)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멸망케 할 이단을 끌어들이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이단들이 얼마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깨어 있어야 하고, 이단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켜내야 합니다. 이단의 포교방식은 호색입니다(2). 호색은 성적인 음란함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친 방탕함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음란한 길, 방탕한 길,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게 해서, 경건한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또한 그들은 탐심으로 지어낸 말로 성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미혹합니다. 이단의 최종목적은 교인들의 구원이나 신앙성장이 아니고, 성도들을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것입니다. 종말의 예언을 지어내고 두렵게 만들어서 거짓 교리를 지어내서 자기 야망을 사명으로 내세우면서 일을 벌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탄은 말은 지어내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거짓 선지자의 거짓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을 향한 심판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들의 멸망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3).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4-11)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 영원한 심판 가운데 가두셨습니다(4).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무섭고 단호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에 대한 사례로 노아 때의 물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을 언급합니다(5-6). 노아의 방주와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구원받은 자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이단에 한 번 빠지면 구원받기가 아주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단에 빠지면 노아의 가족과 롯의 두 딸처럼 구원받는 사람도 있지만 숫자가 매우 적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 이단에 빠졌다 돌아오더라도 후유증이 큽니다. 이단의 가치관을 배우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소돔 성에서 살았던 영향으로 성적인 죄의식이 약했던 롯의 두 딸은 결국 아버지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며 모압과 벤암미를 낳았고, 이 사건은 후에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시작됩니다.
적용: 거짓 선지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성도를 미혹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말이 많을수록 실속이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별거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만들며 포장하기 위한 것이지요. 주절주절하는 만큼 실언 또한 늘어납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은 단지 잘 모르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음란과 탐욕, 우상 숭배로 이끄는 자들이며, 사람들을 자신의 이득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탐심을 가지고 자신이 지어낸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진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임팩트 있는 한마디가 중언부언한 수백 마디를 눌러버리는 힘이 담기듯이 그 열매가 진실 되고 진리에 있는가, 거룩 위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 설 교 >
노아와 롯의 도전
벧후 2장 4~8절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세상 이고 많은 사람이 세상 편에 사는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하나님 의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 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은 소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소수인 그리스도인의 중요성 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또한 얼마나 큰지 말로 다할 수가 없 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 권고는 오늘도 그때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다행히 도 사도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을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뛰어나게 두드러진 두 사람 노아와 롯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 람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가 홍수 이전의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종 교적,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아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 해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하자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 정도로 끔찍한 상태에 노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죄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고 결국 노아의 홍수라는 심판으로 이르게 하는 그러한 세상의 사악함에 직면하여 이 사람 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함께 지켜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롯과 평원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롯의 이야기 를 읽으면서 성경이 얼마나 너그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창 세기에서 우리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롯 은 그 들판이 기름지고 물이 넉넉해서 그곳에 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이 더 풍 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거기서 살고 싶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 리도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어느 정도는 롯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롯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 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 기 18장과 19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도덕적 타락,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불결과 추악함 속에 살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러한 세상에서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두 천사 가 소돔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 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진정으 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듣기 싫어해도 말해주어야 합니다. 정말 영혼의 구원을 원한다면 우리는 거리낌없이 불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된것이지만 그래도 도구로 쓰이는 천사들이 책임 있게 일했습니다. 일 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고 천사들 이 말했습니다.
이 말에 얼마나 강력하고 열렬한 사랑이 비치고 있습니까? 리챠드 박스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마치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로 버려두면 얼마 안 있어서 그 불 속에 빠 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도 그냥 말로만 그리로 그냥 가면 불이 있을 텐데요. 그 불은 아주 뜨거울 걸요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로 가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리로 가면 안돼요. 죽어요. 어서 이리 오 세요 하면서 잡아당기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긴급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찰스 스펄젼은 그의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들이세요. 이 말 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천사들은 사람들의 손을 붙들고 있습 니다. 두 천사가 가진 손은 넷뿐입니다. 천사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 손 하나가 해당되었습니다. 천사들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 그리고 두 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 네 사람의 네 손이 전부입니다. 남은 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 다. 우리도 두 손을 가졌으니까 이 두 손으로 어두운 세상에 있는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하는 데 쓰시기를 바랍니다. 롯과 그의 식구들은 소돔성을 빨리 떠나라고 하는 천사들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왜 지체했습니 까? 롯은 그 도성 안팎에 많은 재산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돔성을 떠나는 것을 지체한 것 같 습니다. 아마 롯의 가축과 양떼들이 소돔의 기름진 초원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우리의 영혼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말 세상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도 롯의 아내는 육적인 애정 때문에 지체한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는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떠나지 아니하려는 사위 들도 있었습니다. 출가시킬 준비도 잘 해놓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큼 떠나가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롯의 딸들은 왜 지체했을까요? 약혼자가 있는데 저희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 기며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약혼한 사람을 뒤에 두고 혼자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롯의 딸들이 소돔성을 떠나는 것을 지체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를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겠느냐? 아니면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겠느냐? 고 말입니다. 우리 앞에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죄만은 포기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죄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 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하는데도 그 호소가 들리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죄에서 떠나기를 지체합니까? 성 어거스틴도 회개하기 전에는 죄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 은 하고 그것이 옳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조금만 더 있다가 떠나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왜 우 리가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지체합니까? 게을러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떠나야지, 끊어야지 하면 서 오늘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아직 회개하지 않은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사람은 성경을 다 믿는다고 말하며 지옥이 분명히 있는데 자기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합 니다. 구원도 있는 것을 믿고 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까지 다 믿습니다.
그 러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니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청년들은 시간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을는지 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연세가 40, 50 지나신 분은 제 말씀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나이 60이 지나면 해마다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70이 지나면 달마다 달라진다고 합니다. 80이 넘으면 날마 다 달라진다고 합니다. 지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믿으면 살고, 신뢰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긴급합니다. 죄악의 자리를 떠나야만 삽니다. 그리고 롯이 구원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의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습 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효력 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 응 답받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 는 신 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소돔성이 심히 악하기는 했 지만 그 중에 의인 몇이라도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최악의 곳에서 최선의 것을 희망했습니 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용기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소돔성에 의인 50명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의인의 숫자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보를 재촉했습니다. 나중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 요. 아브라함이 간청을 그만둘 때까지 하나님은 양보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기도 를 끝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 다. 그런데 구원얻은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소 돔과 고모라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마는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롯의 가정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행하는데, 오직 한두 사람만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하나 님 앞에서 참되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가족 중에 오직 혼자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같이 따라가는 것이 쉽습니다. 주 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다수 가운데 소수로 서 있는 사람이 받는 시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노 아가 그랬습니다. 노아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빈정거림을 당하고 조소를 받았습니까? 그 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모두 멸하기로 작정하실 정도로 세상이 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여 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악했을 때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 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다 고 했습니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노아가 산 시대는 한마디로 패역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세대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산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의 날,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날에 오래 참고 기다렸으나 사 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다가 멸망당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습 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늙은이의 망령으로만 여겼습니다. 노아와 그 당시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 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 처럼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위해 살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 안을 애써 하나님을 위해 살았으나 그와 그의 일곱 식구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 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노아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 아 장차 멸망할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불쌍히 여겼을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 의 가정을 동정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늙은이의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옛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 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 고 했습니다. 우 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축복받은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는 가정입니 다. 창세기 7장 7절 말씀에 보면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 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노아의 가정은 홍수가 나서 집에 물이 들어올 때 방주에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비도 오기 전, 날이 흐리지도 않은 맑은 날인데, 하나님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에 그저 순종함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웃었을것입니다. 아니 저 미친 것들 좀 보게. 저 큰 배 안으로 들어가는 좀 보게, 왜 저러지? 늙은이는 망령이라 치더라도 그 자식들은 왜 저러지? 젊은 것들이 이성도 없 나? 그것도 부전자전인가? 하면서 빈정댔을 것입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게 노아 영감님이 말하던 홍수의 시작인가? 그러나 대 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사람이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해 나는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는 것이지 비오는 게 오늘 처음인가? 하면서 반박했을 것입니다. 장대비가 이틀 사 흘 나흘 계속 오니까 이건 큰 장마구먼 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물이 점점 불어서 집에까지 들 어오니까 이것은 홍수라고 하면서 언덕으로 피했을 것입니다.
물이 언덕을 넘으니까 큰 홍수라 고 하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이 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노아의 가정은 어떠했습니까?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족 가운데 아직 구원의 반열 에 동참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있습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아내가 있습니까? 부모님이 계십니까? 자녀가 있습니까? 눈물로 기도합시다. 낙심하지 말고,포기하지 말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많습니다만, 가장 긴급한 것은 내 가정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홍수 속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두드러지게 구 별되는 사람입니다. 노아와 롯은 둘 다 그들의 시대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경향과는 다른 방법 으로 두드러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초대 감리교인들을 어떻 게 보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그들이 다르게 산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욕하 는 뜻으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 Methodist 라고 불렀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인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고 믿는다면 만일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영 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견디어 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 지 아니한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터툴리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매우 유능하고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그리스도인을 보고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은 다음부터는 세상 사람들 과 같이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투기장에 있는 사자에게 던져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세요. 그들에게는 틀림없 이 무엇인가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킨다면 그 믿음 안에는 틀림없이 무엇인 가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 생명까지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터툴리안은 말 했습니다. 그에게 감명을 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개종하게 된 이유 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견디고 있습니까? 청교도들처럼 견디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세상과 우리 사이를 거의 구별할 수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는 세상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고 하지만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과 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드러지고 구별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두드러지고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은 잘못된 의미입니다. 다시 말 하면 오직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지방 정치, 국가 정치, 세계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구별되었다는 것은 수도승이나 은둔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아도 롯도 그런 의미에서 구별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 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 고 또 가지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 고 야고보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사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 고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대제사장 의 기도가 있는데,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 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 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 니까? 분명히 그 가르침은 우리가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행위에 영향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는 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사용한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 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 면 이라고 말했습니다. 얽매이고 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언제나 타협하는 것, 세상이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그것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 라 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이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의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것에 오 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것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우리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한 세상 때문에 고통받고 염려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 기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롯도 고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 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8 절)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상태를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 이렇게 된 데 대 해 한탄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 비참을 품어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신의 성품에 참 예해야 하는데 술 취하고, 부도덕하고, 추악한 세상적인 농담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 때문에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대해 반감을 품어야 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 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간섭해 주실 것을 간청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처럼 하나님을 배반하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런 것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애타게 하며, 괴롭힙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런 세상에 의를 전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죄로 인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 의 위험을 깨닫고 그 위험에서 빠져 나오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 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대한 충성스러운 자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와 롯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노아와 롯이 살던 시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이 너무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구별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이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자 신을 해치며 파멸해가고 있는 영혼을 위해 슬퍼하고 있습니까? 책임을 느끼고 위하여 기도하며 참된 부흥과 신앙적인 각성이 일어나기를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까? 노아와 롯이 오늘의 그리스 도인인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벧후 2장 4~10절 / 이정선목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까지라도 다 건져내서 천국에 들여보내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말 그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도 합니다. 토론할 때도 그렇습니다. 한 쪽에서 주장을 하면 대단히 설득적이고 타당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반론을 듣기 전까지만 그렇습니다. 반론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면 처음에 들었던 주장이 타당하지 않게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은 크게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자비한 심판자이고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타이틀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반대하기 위해 그런 이유를 갖다 대면서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침범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침범을 당했는데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허허 너털웃음이나 웃고만 계시면, 전능하시고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세계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도 하나님이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참으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선을 다해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거나 지옥에 던져 넣지 말고 다 구원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와 이치를 망각한 억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기를 배반하고 죄악에 빠진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내놓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영원한 심판에 처해져야 할 인간을 구원하셨어요. 여기서 누가 구원을 받는 것인지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기 뜻대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능자이시고 주권자이신 분이 자기 뜻대로 못하신다면 말이 안 되지요. 어쨌든 그렇게 사랑과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데까지 나간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심판을 안 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3절에서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심판이 분명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심판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신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타락한 천사들 때문에 지옥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지옥도 없었겠지요. 감옥을 먼저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죄 짓기를 기다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죄를 지으니까 감옥을 만들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왼편의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들 역시 원래 범죄한 천사들 때문에 만들어진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용서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시거나 또는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신 적도 없습니다. 천사는 한번 타락하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하게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 유다서에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범죄한 천사들, 즉 마귀와 그의 졸개 귀신들은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들이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창세 이래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지옥의 어두움에 결박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속한 자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그들이 영광스러운 하늘의 군대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그들을 지옥에 묶어 두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늘로 복귀할 수도 없고, 어디 다른 데로 도망쳐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옥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 어디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마귀와 귀신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후에는 더 이상 활동할 무대도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신 대상은 옛 세상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신 것을 말하는데, 인류는 노아 이전의 인류와 노아 이후의 인류로 나뉩니다.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인간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로부터 인류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노아 이전의 세상을 옛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은 사람들의 죄악으로 가득했습니다(창 6:5).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그 안의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이 사람들의 죄악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그때 거기에 노아가 있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한 것이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는 홍수를 내리셨단 말이에요.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거기에서 구원받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특징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과 의를 전파하는 자로 명백하게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과 자비의 대상이 그렇게 갈립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들을 멸망하기로 정하신 것은 그들이 무법한 자들로 음란한 행실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 때는 홍수로 심판하셨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처럼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것을 자연현상으로 해석한다면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산이 폭발해서 도시를 덮치면 화산재에 묻히게 됩니다. AD 79년에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폼페이 시가 6-7미터의 화산재로 완전히 매몰되었습니다. 멀쩡한 도시 하나가 한순간에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때는 공교롭게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타이투스가 로마의 황제로 재임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1,500년이 넘도록 땅속에 묻혀 있던 도시가 18세기부터 발굴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도시의 3/4이 세상에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도 그런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하신 것은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을 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롯입니다. 베드로는 롯을 의인이라 칭하면서,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면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 즉 고통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 가운데서 의를 전파했던 노아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이라는 대비가 공식처럼 일치합니다.
우리가 롯을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겠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은 의인은 아니었어요.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해서 떠난 세상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성에서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워낙 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욕심을 따라 소돔까지 왔지만, 그 사람들의 죄악에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돔을 심판해야 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멸망당해야 할 죄인에는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안 된다고 간청했던 것 아닙니까? (창 18:23)
소돔 사람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롯의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어떻습니까? 그저 무덤덤합니까? 아니면 고통이라고 표현할 만큼 심령이 상합니까? 롯이 소돔에서 그들의 불법과 죄악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가 했던 것은 심령이 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심령이 상하는 것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악에 대하여 심령이 상하는 것은 의에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법과 죄악 때문에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흘린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대표적인 것들이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과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이 사건들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심판의 대상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였고, 불법과 죄악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습니다. 그 사건들에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결코 그러한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교회에 거짓된 가르침과 이단사상을 가만히 들여오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하나님이 몰라서 심판을 안 하신다거나 잊어버리고 심판을 빼먹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짓 선생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십니다. 온 세상을 쓸어버렸던 홍수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신 것을 보세요.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도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하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경건한 자를 건지실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가 크게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건지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을 신자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꾀임과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끝까지 진리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경건한 의인들을 건지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과도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이 이루어진 세상도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악인들이 승승장구하고 죄악 가운데 사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평안하게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의인이 핍박을 당하고 정직한 자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러한 고민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러나 하나님은 뒤틀어진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거짓 선생들,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쏟아질 것입니다. 범죄한 천사들을 심판하시고, 죄악된 세상에 홍수를 내리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반면에 그 불법과 죄악 가운데서 심령이 상하며 하나님의 의를 전파한 의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7-28)
교회사랑 , 진리수호
(이단으로부터 교회와 가정을 지키라)
벧후 2장 1~9절 / 오정호목사
우리나라 6.25 전쟁 때 참전한 네덜란드군이 북한군 및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후퇴하여 강원도 횡성교회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네덜란드 장병들은 국군 복장을 한 북한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 있던 네덜란드군은 나무판자로 만든 예배당안에서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전사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아군 복장으로 접근하여 예배당을 무차별 사격한 것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대적한 야만적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때의 전사자들을 포함한 117명의 네덜란드군은 지금 부산 대연동의 U.N 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정전후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된 네덜란드 장병들은 전우들이 묻혀있는 묘지의 흙을 탄약통에 담고 갔습니다.(횡성교회 90년사 P.122) 이와 비슷한 양상들이 이단과의 영적인 전투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30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전성시화를 위한, 이단퇴치를 위한 연합집회에서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집회를 방해하는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 한국교회에서 배척받는 그들은 집회참석 스티커까지 교묘하게 도용 복사하여 자신들을 성도로 위장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의 폐해는 무엇인가? 이단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이단(異端)이란 무엇입니까?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하이레시스"( )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하이레시스"는 "멸망케 하는 의견들, 거짓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흩어져있던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미리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중에도 거짓선생들이 있으리라"(1절a). 구약시대에는 거짓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었고, 신약시대에는 거짓선생의 모습으로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활동 범위는 "민간에"(among the people) 또는 "너희 중"(교회안)입니다. 이단들은 교회밖이나 안이나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1절b) 이단들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사신(구원하신) 주님을 부인하다 결국 멸망당하는 적그리스도(敵基督/Anti-Christ)입니다.
Ⅱ. 그러면 이단의 영향력은 어떤 폐해(弊害)로 나타납니까?
북한군이 국군의 옷을 입고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살금살금 접근한 것처럼 이단들도 "가만히"(비밀스럽게, 은밀하게) 접근하여(1절, 유다서1:4) "지은 말"(3절)로 영혼을 빼앗아갑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추종하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왜곡된 말,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교묘히 배합한 말, 진리에서 떠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사도행전20:30). 이단은 아군의 옷을 입고 접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장해제 하도록 만들고 영적인 경계를 풀어놓게 만듭니다. 그후 자기들의 할 일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단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이단은 신앙을 무너뜨립니다(1절).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1절b). 신앙의 핵심은 주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 도리이자, 기초중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단은 주님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무게중심을 주님에서 세상의 다른 이론으로, 교주앞으로 옮겨놓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신앙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인데 이단은 믿음의 세계를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둘째, 이단은 윤리를 무너뜨립니다(2절).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2절). 많은 사람들이 환호한다고 해서 신뢰를 주면 안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사람의 투표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정에 들어오면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의 질서가 깨뜨려집니다. 부부가 갈라지고, 부모와 자녀간에 불협화음이 발생합니다. 이단에 물든 사람은 이단의 교주나 가까운 사람의 말만 듣습니다. 건전한 지역교회의 목회자의 권면을 결코 듣지 않습니다. 위험한 종교 집단에서는 자신들의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부모와 형제를 경멸하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이래 정통교회는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에게 높은 도덕적 표준과 성적인 순결을 요구합니다. 지난번 이단퇴치 연합집회에서 그들은 집회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심지어 교회 기물을 파괴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보여주었습니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마련된 교회를 깨뜨리는 행동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반대한다는 불변의 증거가 됩니다.
위험한 이단의 술책은 일반적으로 ①그리스도로부터 다른 대상에게로 사람들의 신뢰와 관심을 옮겨 놓는다. ②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람의 말로 대치한다 ③건전한 지도력에서 독재로 사람들을 억합한다. ④믿음에서 가정(假定)으로 사람들의 마음으로 옮겨놓는다. ⑤거룩(분리)으로부터 격리로 집단자체가 반사회적이 된다. 이단은 기성교회들을 훼방하며 도전하며, 정죄한다. 오직 자기집단에만 구원과 진리가 있다고 세뇌시킨다. 그들의 교회공부를 은밀하게 전파한다. ⑥구원에서 속임수로 나아가게 한다. 그들의 충성의 대상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집단에 대한 충성에 있는 것이다.(Martin R. De Hann Ⅱ. 어떻게 이단 종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나? "What About Those Dangerous Religious Groups?")
셋째, 이단은 경제문제를 일으킵니다(3절).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3절). 1992년 10월 28일 휴거소동을 일으켰던 다미선교회 교주 자신은 큰 집으로 이사했으며 미리 달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이단은 불순한 동기가 있고 투명성이 없어 재정적인 스캔들을 몰고 다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가리켜 "흉악한 이리"(Savage Wolf)로 규정하였습니다.(행20:29) 예수님께서도 친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라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Ravenous wolf) 정죄하였습니다.(마7:15)
이단의 결말은 스스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1절b). 그들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스스로 달려가기에 끊임없이 멸망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3절). 이단들은 범죄한 천사들처럼(4절), 노아시대 불순종한 사람들처럼(5절), 유황불 가운데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6절) 멸망당합니다. 이런 모든 성경의 교훈을 종합하면 이들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를 주님께로 이끌고 주님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사람들을 붙잡아 매어 점점 주님을 떠나게 만들고, 세속으로 빠지게 만들어 함께 멸망하게 만듭니다.
Ⅲ. 이단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독교 역사 2000년을 지나는 가운데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주의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가정중심, 목회자 중심(손가락 다섯개로 구성된 것을 연결시키십시오)"으로 살면 이단으로부터 가정과 교회를 올바로 지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단의 유혹을 쉽게 받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① 말씀의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이단의 유혹에 잘 빠집니다. 영적 영양실조, 진리의 결핍증에 걸린 사람은 평소에 성경을 읽지도 않고, 소그룹과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하지도 않고, 자기의 고집을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단들이 조용히 접근해서 유혹할 때 끌려가기 쉽습니다.
② 애정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이단의 유혹에 잘 빠집니다. 교회 성도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사랑의 격려가 넘쳐야 하며(히브리서10:24)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서로 무관심하거나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을 느끼겠습니까? 사랑에 갈급한 사람들에게 이단들이 외형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그 몸과 마음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단들의 폐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내가 먼저 진리 가운데 서야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교회의 공적집회를 존중하십시오. 내게 맡겨진 진리를 성실함으로 수호하십시오!
둘째, 영적인 튼튼한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남녀전도회, 찬양대, 교사, 다양한 봉사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훈련받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나누는 영적인 튼튼한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의 영혼과 가정을 든든히 세웁니다.
셋째, 정보를 제공받아야합니다. 초대교회의 이단사상들이 이후에도 옷만 갈아입고 계속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선교현장에도 이단들이 먼저 뛰어가서 선교현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형형색색의 많은 거짓선지자가 나오기 때문에(요한일서4:1) 우리는 최근의 정보를 입수해야합니다.
성경을 개인적으로 연구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합니다.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인터넷, 책 등을 통해 좋은 정보들을 연구해야합니다.
넷째, 믿음의 진리로 힘써 싸워야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1:3b)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세(守勢)적인 자세가 아니라 이제는 공세(攻勢)적인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5:4). 믿음의 강건한 능력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이단과 거짓교사가 활동하는 현실세계를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네덜란드 군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에 국군 복장을 하고 살금살금 접근한 북한군처럼 영적인 전투현장에서도 겉과 속이 다른 이단들은 교회와 가정에 살며시 들어와 우리의 신앙과 윤리를 무너뜨리려 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먼저 지역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서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가정중심, 목회자중심"으로 살아갑시다. 모든 형제 교회와 영적인 튼튼한 관계로 연합하여 믿음의 진리로 힘써 싸웁시다. 우리 각자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주님 주시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순수하고 견고하게 지켜갑시다.
새로남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교회사랑, 진리수호의 십자가의 전사로 힘차게 전진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건강한 교회를 위하여!
우리자녀들의 신앙의 계승을 위하여!
대전의 성시화를 위하여!
거짓 선지자의 교훈
벧후 2장 1~3절 / 박조준목사
오늘 읽은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은 성경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최 후의 심판과 재난과 파멸에 대해서 모든 성경 중에서 이 베드로후서 2장이 가장 잘 나타내고 있 습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를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지난 장에서 주님께서 이제 노인 된 그에게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는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떠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서 여 기에서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고서 여기서 그들 에게 미래를 대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주는 메시지는 말하자면 경고입니다. 그는 이미 그의 편지에서 그들이 서 있는 큰 진리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견고한 진리에 대해 그들에게 상기시킨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상기시키고 나서 이제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 성경 의 매우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방법입니다.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비시킬 때 신약 성경은 언제 어 디서나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신약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믿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신약 성경만큼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하는 책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 약 성경만큼 인생에 대해 그렇게 비관적이고 의기소침하게 진술한 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 러분이 신약 성경 어디나 펴 읽어 보십시오. 어디서나 위기의식과 심판에 대한 생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은 막강한 두 세력 사이의 무서운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 것들은 둘 다 영적인 세력입니다. 한편은 하나님과 그의 군대요, 다른 한편은 사단 곧 마귀와 그의 군대입니다. 이 두 세력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성경은 이 투쟁에서 승리하 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이 투쟁을 잊어버리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일제히 반대하는 악한 세력과 군대 들 때문에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위험한 곳이며, 그들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지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 그리스 도인들이여, 경계하고, 살펴보고, 주의하고, 경성하고,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 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빈틈없이 무장해야 합니다.그래야 결코 불시에 기습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기습하려는 악한 군대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우리 에게 가장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 악의 군대는 우리를 다루는 방법에서 거의 끝없는 변화를 구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그들 자신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안내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거짓 선지자로서 우리 가운데 나타날 때가 가장 교활하고 위험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구약 성경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 2장 1절을 보세요.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상황 입니다. 초대교회에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일도 역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을 명백히 알아두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운 세상의 상황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 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위험은 거짓 선지자나 거 짓 선생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은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지만 사단의 사자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알 아야 한다고 한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충고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보 세요.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인가 보세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해주고 있습니까? 먼저 부정적인 면을 보면, 선지자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과 거짓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잘못된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것은 무엇이나 옳다 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 다. 우리가 20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살던 사람들이 알 수 없었던 어떤 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면 이것은 억측입니다. 여러분,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신약 성경의 역사 철학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 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압니다. 성경의 대답은 인류가 타락한 이래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피상적인 변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변화라고 할 수는 없 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옷을 입고, 다른 방법으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는 피상적인 것들을 말하지 아니하고 인생에 관한 인간의 문제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점들을 대처하는 데 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와 재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 히 같습니다. 마귀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말라고 유혹하고 있 습니다. 그것은 인류 타락 이후에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오늘날 핵심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 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을 시험하는 방법 중에 다른 하나는 그 가르침이 인기가 있으면 그것은 틀림없이 옳은 것이라고 가정하는 잘못입니다. 오늘 말씀 2절에 뭐랬어요? 여럿이 저희 호색하 는 것을 좇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너희 가운데 일어나서 군중의 인기를 끌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 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성경을 믿는 사람은 한 사 람도 없습니다. 교양있고 교육받은 사람은 아무도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저 교회 밖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군중은 언제나 옳기 때문에 기독교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당연한 것 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주장은 유치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 입니다. 이 말은 세계 역사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맞는 말입니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의 홍수를 기억하시지요?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노아의 전하는 말을 믿지 않고, 심지어 노아를 도와 방주를 짓는 일을 하는 사람까지도 이제 홍수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 다. 이들은 다 잘못되었고 오직 노아의 가족 여덟 사람만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구원받은 사람 은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이 그것을 말하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입니 까?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여기서도 우리는 똑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 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편에 서 있었습니다. 롯과 그의 딸들만이 구원받았습 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남은 자의 교회를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 그러니까 대중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단지 소수의 남은 자만이 진리를 고수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가슴 아픈 일은 군중의 인기를 진리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머릿수를 세는 것으로 영적인 진실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머릿수를 세는 것은 가르침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려내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인기와 사람의 수로 진실을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증은 없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세요. 거짓 선지자들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세상에 있었을까요? 이스 라엘 밖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민간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거짓 선생들 도 있었을 것입니 다. 거짓 선생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을까요? 교회 밖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오늘 주신 말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20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을 볼 것입니 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꼭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편지에 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에서 그들 사이에 있을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 습니다.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파한다고 해서 그 메시지가 진실이라는 보증은 없습니다. 교회 안의 거 짓 신앙 고백자, 거짓 그리스도인이 있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리스도 인이 아니므로 거짓 메시지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도가 이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늘 교회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분열도 아니고, 교파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교회가 거짓 메시지를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고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거짓 선생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언제나 거짓 선생이 있습니다. 어느 건전한 교단에서 전한 것이라고 해서 틀림없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뛰어난 사람 이라고 해서 그가 꼭 진실한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거짓 선생이고 거짓 선지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전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은 거짓 선지자에게 이끌려갈 가능성이 가장 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거 짓 선지자를 시험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라 고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 의 특징이 모두 성경에 나타나 있고 성경은 한결같이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들의 특징을 보세요. 교회사를 통하여 그것들을 보세요. 그 유형은 다양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 로 그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약속도 역시 거짓입니다. 그는 전혀 선지자가 아닙니다. 앞 장에서 진실한 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 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 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메시지를 받고 감동하고 그 사 실을 말함으로써 그대로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여러분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말 하고, 자신의 사상을 공교히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는 실제 권위가 없고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자신의 이론이나 사상을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선지자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거짓 선지자는 자신이 생 각하기에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것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에게는 진실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이 무엇 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을 것이고 저희가 탐 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그 말이 아무리 능하고 부드러워도 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을 것이라 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 는 결코 비난하지 않고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 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욕심이 너무 많아 항상 인기를 갈망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는 지은 말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는 결코 우리에게 자신이 죄인 이거나 잃어버린 자라고 생각하게끔 하지 않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속에 있는 죄를 미워하게 하 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가 어지간한 상황에 있기만 하면 우리에게 훌 륭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꾸며낸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시험하는 더욱더 진지한 방법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은 자기들을 사신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오직 그를 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자기들을 사신 주님을 부인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급되지만 주 그리스도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무 시함으로 주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중심에 놓고 지극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음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지 않다 면 그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혀 모시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또 거짓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위대한 선생과 훌륭한 모본으로 생각함으로 그를 부인하고 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 의 거룩한 인격의 영광과 충만함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즉 그분이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 라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주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아주 심하게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과업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정죄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다시 말 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에게 가는 유일한 길인 것을 부인함으로 그들 자신들이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에 그들의 죄를 짊어짐으로써만 구원 받을 수 있었던 절망적이고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그러니까 십자가의 핵심적인 의미를 부인함으 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간에 갈보리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 가르침 의 중심점이 아니면 그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속 죄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소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이 며 거짓 선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은 그들의 삶이 거짓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고, 진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진실한 삶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 럿이 저희의 호색하는 것 을 좇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저희의 음탕한 길 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거짓 생활로 나타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복음주의자들이 개인적인 체험은 적절히 다루어 왔지만 인간의 윤리적인 면을 다루지 아니하고 사회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자 들은 인간 개인을 회심시키는 일을 했지만 민족과 사회를 실제로 향상시키지 못했다는 평을 들 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소위 사회 윤리적인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제나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도덕과 악이 팽만한 요즈음의 사회상태를 살펴 보세요. 메시지가 잘못되면 생활도 언제나 잘못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인생관은 비록 윤리를 전파한다고 해도 잘못된 생활과 낮은 차원의 윤리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나면 생명력과 능력과 활력이 부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항상 거짓 교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때의 홍수를 기억하시지요?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이 어떠했었습니까? 불경건과 방종과 도덕적인 혼란이 있 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상은 너무나 끔찍한 일들로 가득 차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 켰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세상을 그런 지경으로 이끌고 갔나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타락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아갈 방법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법 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모독했고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이름과 생각과 제 안을 저버렸습니다. 일찍이 심판의 방법으로 홍수가 일어나 세상이 그 지경이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기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일이나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된 불법이 홍수를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경우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 다.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그 끔찍한 도덕적인 오염과 그 도시의 생활의 추 함과 부패의 모든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원인은 똑같 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율법을 떠나 그들 자신의 욕망 과 육욕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보나, 초대교회 때의 경우를 보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나 언제나 똑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는 어떻습 니까? 오늘의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 때에 있었던 상황으로 즉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자, 그런데 거짓 교훈은 미묘한 데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 라 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거짓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나는 거 짓 선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전에 들었던 것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와는 반대로 가만히, 아주 미묘한 방법으로 들어옵니다. 알지 못하 게, 느끼지 못하게 들어옵니다. 그들은 복음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복음을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식으로 들어옵니 다. 그들은 용어의 의미를 달리함으로 이단의 독이 가만히 스며들어 오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진실성이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라 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능력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역사하는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공허한 말뿐이며 오직 타락과 절망으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교훈 을 피해야 합니다. 왜요? 그것들은 우리를 멸망케 하는 이단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리가 악평을 듣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 성경을 가 지고 다른 이들의 신앙을 손상시킨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훌륭한 교훈으로 받아들이게 한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악평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이단을 피하기 위하여 아주 조심해 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진리에 확신을 가집시다.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에 의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견고히 서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경건 생활
벧후 2장 1~11절 / 이상호목사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나타나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 걸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 유명한 경건주의자였던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유명한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라고 하는 책에서 경건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의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그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는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경건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으로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경건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 시대적인 분위기 :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
사도 베드로는 당시에 성도들이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에 성도들은 로마 통치하에서 무서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 때문에 많은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이 잠시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종교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 신앙생활 체계에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게 될 새로운 세계(내세관)를 부정하므로 삶에서 도덕성이 해이해지게 되고, 역사 가운데 어떻게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에 따라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 때 세상의 사람들과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다른 말로 하면 믿어도 어떤 확실한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때로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하여 회의를 가져오게 되어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까지 나타나 성도들의 삶을 미혹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1-3을 보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의 교회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민간에도 일어났고, 교회 안에도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백성들을 미혹하는 사이비 집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민간에 유행하는 대표적인 사이비 종교는 문선명의 통일교이나 일본의 오옴 진리교 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은 여호와의 증인을 위시하여 몰몬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단은 교회가 공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됩니다. 더 크고 위험한 문제는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입니다.
베드로 당시에 교회 안에 있었던 거짓 선생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베드로는 몇 가지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데,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자기들을 사신 주님"은 문자 그대로 바꾸면 "자기들을 값을 주고 사신 주님"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로 바꾸면 "자기들을 구속해 주신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 조금 어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구속받은 신자들이 이단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하신 참된 신자들은 타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신자들이 믿는 교리를 배우고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믿지 못하여 다시 교회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대한 묘사가 베드로후서 2:20-21에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이 말씀을 볼 때 교회 안에 들어왔다가 구속하신 주님에 대하여 듣고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도 타락할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얼마든지 타락하고 사탄의 자녀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는 절대로 타락할 수 없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교회간판을 걸고 교회처럼 동일하게 예배드리고, 예수님의 이름도 부르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우리가 섬기고 있고 성경이 말하는 주님과 동일한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은 신자가 자가 되는 것은 넓고 편안한 길이며 모든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만 가르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렵고 힘든 생활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매력적이고 신기한 사건이 날마다 일어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만 가르치고 신자로서 당하는 고난과 힘든 부분, 그리고 신자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적인 부분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에 이상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생활을 세상에서의 축복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해 지고, 돈을 많이 벌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가게 되고,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이러한 점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만 신자라고 살아야 할 무거운 책임과 그로 인하여 받게 될 불이익과 고난도 있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의 특성을 설명하시는 산상보훈의 말씀에서 신자의 길을 "좁고 험한 길"(마7:13-14)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과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부분은 말하지 않고 쉽고 좋은 것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리내용은 항상 모호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들은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여 다른 문으로 들어가도 나름대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나 모하메트나 우상을 섬겨도 구원을 얻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특징은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지 절대 진리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을 종교에 적용한 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른 자의 삶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이 왜 거짓 진리를 가르칠까요? 그 이유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벧후2:3)라는 말씀 가운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의 탐심 때문에 자기들이 지어낸 말을 퍼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용하여 그들의 돈주머니를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2:17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는 카페이류오우(ՊՐՇՋՅՕՙ)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돈을 목적으로 파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들이 지어낸 잘못된 교리를 따르게 될까요? 마이클 벤트리는 그 요인 중에 하나를 거짓 선지자들의 달변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대개 언변이 좋고 자기 주장들을 거침없이 내세웁니다. 그들은 청중의 귀를 모을 수 있는 달변과 지식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들의 삶을 복잡하지 않고 편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을 자세히 공부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기도할 필요도 없고, 교회에 열심히 다닐 필요도 없으며, 지옥과 천국도 모호하게 가르쳐서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의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벧후2: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호색'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색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만 헬라어 성경에 아셀게이아(֢ՓՅՋՃՅՉՁ)라는 말인데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욕심을 말합니다. 이 말은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돈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쾌락을 위해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NIV성경이 "부끄러운 길"(shameful ways)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성적인 범죄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잘못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베드로후서 2:10 상반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육체'라는 표현은 '죄인의 본성을 가진 인간'(the sinful nature, NIV)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잘못된 정욕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요한1서 2:16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욕"이라는 말은 과도한 욕구나 애착 또는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애착을 가져야 하고, 간절하게 열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에 애착을 가지며, 간절하게 열망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본문에는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악한 본성에 따라 더러운 욕심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가 이 말을 풀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육신에 따라 사는 더러운 정욕이란 감각에 지배되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며 탐식하며, 사치에 빠지고, 쾌락의 노예가 되며, 도덕적인 면에서 느슨하고 욕정적이며, 재산을 사용하는데 이기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되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충족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삶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으면 경건한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경건주의자였던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만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의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는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정신과 세상의 방식과는 분명 다른 정신이 깃들고 다른 방식의 신실하고 정직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이 녹아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행과 삶의 기품을 보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3. 경건한 생활을 해야할 이유
그러면 우리는 왜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따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할까요?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지만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는 형벌 가운데 두어 심판날까지 고통을 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숙지시키기 위하여 역사적인 실례를 들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베드로후서 2:4-8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번역성경에는 표현이 안되어 있지만 원문은 확실한 사실을 말하는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여기에 역사상 확실하게 일어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면(지키게 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이고, 두 번째로는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면(내리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이며, 세 번째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면(건지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 주님의 재림 때까지 가두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노아를 포함한 그의 가족 여덟 명만 구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도 그 성의 음란함과 부도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인 10명이라도 있으면 구원해 주실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10명은커녕 롯과 그의 두 딸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일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노아시대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을 멸망시키시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이렇게 심판하신다고 하는 분명한 본보기(시범 케이스)로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심판의 때를 알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실례로 들면서 결론적으로 베드로후서 2:9-10 상반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도 헬라어 성경에 따라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모든 시험에서 건지시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의 본성에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산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 심판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도 심판을 받지만, 동시에 마지막날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최후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경건하게 살아야 할 중요성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편하고, 안락한 신앙생활을 약속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축복받은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경건하게 사는 삶이 어렵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이고, 많은 제약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육체의 본성을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살지 말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온 역사와 우주와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경건하게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살아왔던 부분들이 있음을 주 앞에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편하고 안락한 삶을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건하게 생활하게 하옵소서.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의 불경건한 일로 심판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세상 영광 좇아가는 자
베드로후서 2:1-11
<세상 영광 좇아가는 자>
오늘 본문은 거짓 선생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거짓 선생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영광을 모르기에 세상 영광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구약 성경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그것처럼 베드로 때 거짓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은 참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됩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멸망하게 할 이단'이라 말합니다. 가만히 은밀하게 들어와서 사람들을 무너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우 위험한 이단입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말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로 부인하면 거짓 선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럴듯하게 말하는데 실제로는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부인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의 말도 분별해야 하지만 그들의 행동도 잘 살펴야 합니다.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벧후 2:2) '호색'과 말씀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윤리와 성품이 거짓된 사람들은 결코 바른 선생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씀을 전한다 하여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말씀을 전하기는 하는데 성품이 거짓되어 결국은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듯하게 전하여 말씀에 조금 진보가 있는 것 같으나 일 보 전진하고 십 보를 후퇴하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짓 선생을 통해 복음이 일 보 전진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전진한 것에 비례하여 후퇴가 일어날 것이니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거짓 선생은 왜 그렇게 말과 행동이 따로일까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3) 그들은 '탐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하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영광(어둠)을 좇아갑니다. 탐심으로 가득하여 땅의 영광을 얻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고 교회와 믿음을 이용합니다.
거짓 선생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선생에 속으면 그들의 탐심에 이용만 당하고 끝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이용 당함으로 오히려 자신과 이웃에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막힐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거짓 선생들이 있습니다. 지어낸 말로 탐심과 부당한 이익을 채우는 이들을 경계하십시오.
2. 거짓 선생의 심판
땅의 영광은 죄로 가득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아보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영광에 대해 탐심이 가득합니다. 땅의 영광을 더 얻기 위해 경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의 영광은 영광이 아니라 어둠입니다. 죄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땅의 영광이 잠시는 좋으나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 얻지 못한 것만 못하게 될 것입니다.
땅의 영광을 좇아가다 심판받은 것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천사라도 그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영광의 자리를 떠나 지옥(헬, 타르타로)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최종적인 곳이 아니라 임시적인 곳을 의미합니다. '어두운 구덩이'는 제한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아마 지구에서 활동하는 영역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들은 사람처럼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어서 노아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신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이 '무법하고 음란한 행실'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경건하지 아니한 모습'에 대해 이후에 사람들이 경계를 삼도록 심판하셨습니다.
모든 죄악과 거짓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2:9) 하나님께서 하늘 영광을 바라보며 경건을 찾는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세상 영광을 바라보며 불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심판하십니다.
세상은 참 요지경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더 출세하여 진짜 선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벧후 2:10) 거짓 선생들은 '정욕'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욕심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자랑합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당돌하고 자긍합니다. 대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돈 있으니 권력을 휘두릅니다.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영광 있는 자'는 '천사'를 의미하는데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 둘 다 해석 가능합니다. 그들은 천사마저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11) 심지어 선한 천사도 악한 천사에 대해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항상 예의주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이 자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데 실제로는 악한 영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악한 영의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의 더욱더 큰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 영광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노예 근성입니다. 많은 거짓 선생들이 세상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정욕과 탐심으로 세상 영광만을 좇아갑니다. 물불 안 가리고 세상 영광을 좇아가니 그러한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영광을 위해 세상 나쁜 짓을 다 하면서 세상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한 거짓 선생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속는 것도 죄입니다.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또한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말은 참이어도 성품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들은 이단입니다.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그러한 이단들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비방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거짓 선생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바른 선생을 따라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