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주식을 오늘 팔아서 입금은 월요일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개장 일이 3.2일 이래요.ㅠㅠ 괜찮아요?(예주)" "okay" "내일 11시까지 오셔용 엄마가 예주 꽃다발 살 테니 아빠는 언니 꽃다발 사시래요. ㅋㅋㅋㅋ(예주)" " ㅎㅎ굿 아이디어" "ㅎㅎ 내일 뵈어요. 언니는 학위 복 색깔 검정입니다. 내일 학교 곳곳에서 단과 대학 별로 졸업식을 하는 거리서 복잡할 게예요. 미대 졸업식은 '젬마 홀'이고 지하 1층에 있어요. 아마 안내 붙어있을 건대 모르겠으면 연락 주세요. 나는 10시 반에 학교로 갈 거예요. 전화 잘 가지고 있을게요. 오면 전화해 주세요(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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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오늘 늦잠을 잤어요. 9시 기상을 하려고 했는데 10시 30분에 일어나서 10시 40분 꽃 집 도착. 꽃 집에 오면 텐션이 살짝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주문도 안 했는데 뭔 일로 파란 장미가 있어서 초이스를 했고 만 임자가 있답니다. 왜 꽃 집에 오면 장미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씩씩한 놈 독수리 5형제를 갑옷을 입힐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물 주머니 없이 화이트로 백업하고 가지를 길게 커팅 했더니 존재감 뿜뿜 입니다. 11월 달에 6.000원 하던 장미 한 송이에 만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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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모르면 전화 행~ 차 막혀서 걷는 게 나을 거야(에스더)" "아빠 12시 도착이예용?(예주)" "나는 따뜻한 행사장 벤치에 앉아 스탠바이 하고 있다. 날씨가 추우니까 택시를 타고 학교 안까지 들어오시라" "어디냐? 밥 먹으러 어디로 갈 거냐?" " 밥 먹는 거 곱장 집 어때? (에스더)" " 좋아요. 졸업생은 지하로 내려가라고 하니 에스더는 곧장 행사장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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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입니다. 드디어 부녀 상봉을 했어요. 남의 학교에 응원 온 것인데 올백 탓인지 내 딸이 연극원 졸업생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어요, 패션 감각은 예주가 아비를 닮은 것 같아요. 예주야! 한예종을 접수 하자구나. 행사장(이어령 홀)이 꽉 차서 소극장으로 들어갔어요. 여기도 만 원입니다. 좌석 3개가 나왔다며 안내할 때까지 예주가 자리 배치를 해주는 이유를 몰랐어요. 이게 뭘까요? 나 참. 도저히 애들 엄마를 원-샷으로 찍을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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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지 않으려고 몇 번을 시도해 봤지만 한 뼘 각도가 십 리나 되는 것 같았어요. 촌 놈, 내외하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가.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pg.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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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좀 서먹 서먹하더라도 두 분이 같이 있어요. 난 언니 사진 찍으러 갈래요(예주)" "안돼, 나도 갈 거야. 예주가 행사장에 들어갔고 담배 한 개비를 길게 피웠어요. 염병, 날씨는 왜 이리 추운 것이여! 내가 원정 도박 온 것도 아닌데 이 낯섦은 뭘까요? "나 보고 있어?(에스더)" "아빠 ㅋㅋㅋ 이거 상 다 받으려면 오래 걸리겠다. 천천히 만나요. 아니 한 명씩 안 주나봐ㅠㅠ 언니 데리고 아까 있었던 소 극장으로 갈 테니까 거기에서 만나요(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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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터울인 에예공이 같은 날 학부 졸업 식(2025.2.21.fri)을 했습니다. 예주는 전 학년 장학금을 받았고, 에스더는 자기가 벌어서 졸업을 했으니 부모는 학비를 몽땅 면제받은 셈입니다. 장하다. 그리고 고맙다. 사실 이 따위 졸업식은 처음입니다. 재수 없는 말 한 번 할게요, 에예공이 초딩 때 둘 다 전교 회장을 했어요. 아비는 잘난 딸내미 덕에 육성 회장을 두 번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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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본부 석이 아닌 자리에 엑스트라로 서성거리는 것도 어색하고 에예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졸업식이 낯설고 이상합니다. 허걱. 창피해서 패스. 포토 타임입니다. 요새는 스냅 사진을 찍지 않고 사진사도 없습니다. 교정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고 메주가 학사 가운을 가져와서 사진만 100을 넘게 찍은 것 같아요. 시 어미죽고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환장할 만큼 좋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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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예주-엄마-아빠 이렇게 완전 체가 뭉친 것은 효창 운동장 사생 대회(용산구청장 배) 이후 처음 있는 일(20년)인 것 같네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만 감이 교차합니다. 기사 양반이 가스펠을 틀어 놔서 예배당 가는 줄 알았어요.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아! 꿈이면 안 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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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식구가 다 왔네(곱창집 이모)" "아니 우리 집 사정을 다 아나 봐요(나)" 맥주 3병 곱창 4인분-공깃밥 4개를 싹싹 다 긁어먹고 올 때까지 애들 엄마와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았어요. 무슨 시추에이션일까요? 아내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치고 왜 내가 이런 스탠스를 취하고 있을까요? 원망, 미움, 후회, 바램, 기대 따윈 진작 다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 낯섦과 공포의 정체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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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고 내가 더 이상 경험해 보지 않은 것도 없다고 믿었는데 이게 뭐슨 일입니까?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g.492)" 니미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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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도 꼴깍 샜지만 퇴근한 예주를 4시간 남짓을 태워 수다를 떤다. 디자인을 어떻게 드로잉 북처럼 쓸 지로 생각해서 눈치 볼게 많은 일상의 불편함, 오르는 금리와 시대의 우울, 원인 불명의 공포에 대응하는 각자의 RE 액션,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 여자 인생 얘기, 엄마 아빠 얘기. 예술 대학과 우리의 예술 얘기 그렇게 서로 새롭게 써 논 비밀 일기를 꺼내 해부하고 조립하고 재해석한다. 말해보고 깨닫고 말하면서 정돈한다. 아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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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좋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되니 자매의 토크 시너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한 바퀴 더 돌고 싶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겨우 그녀를 배웅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고요하다. 그녀가 와서 멈춰둔 남은 빨래를 마저 돌리고 기다리기 심심해서 냉장고를 열었다. 한구석 정체불명의 소시지 볶음 요리와 계란 김밥을 꺼내 연다. 비린(부패한) 냄새에 찡그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묵묵히 가지런히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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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 담아 버리고 오는데 엄마 말이 생각난다.(이상하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엄마 생각이 종종 나곤 한다.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 이 일을 시키는 이유일까.)‘시기를 놓치다‘ ‘시기가 적절하다’ 같은 말이 있다. 엄마가 살아보니 시기란 게 중요했던 거다. 엄마는 근래에 정말 중요한 담론을 농담처럼 툭 던져 버린다. 시기란 시기는 다 놓쳐가며 늦깎이 대학생, 늦은 공부, 늦은 경제관념에 허덕이는 나에게 이제 와서 시기라니, 엄마는 아직도 나를 모르나 싶다가 혹 이게 엄마 말대로 중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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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보니 소시지 볶음이 먼저다. 김밥은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거다. 그 시기란 게 가늠하기 쉽지 않고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괜히 음식의 유통기한을 살펴본다. 오래도록 상하지 않는 냉동식품도 있지만 한순간에 상해버린 김밥이 있지 않은가. 상한 음식이야 버리면 그만이지만 새삼스럽게 상한 김밥 생각을 해 보았다. 비단 결혼에 국한된 얘긴 아니고 예술가를 지망하는 딸내미는 확실히 오-노-다. (2022.11.5.sat.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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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생각해 자질구레한 일상을 보내온 큰 딸내미가 속 깊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아요. 이런 유의 글. 이태원 참사로 스크래치를 받았을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언니는 필시 예주 아비의 DNA를 가졌을 것입니다. 살아보니 기쁨은 그냥 넘겨도 되는데 슬픔은 반드시 누군가 후시딘을 발라 주는 것이 필요하더이다. 아빠가 상경해서 꽃 한 송이 놓고 온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일상의 불편함, 오르는 금리와 시대의 우울, 불청객처럼 습격해 오는 공포에 대응하는 방법,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 등등 아빠도 동일하게 같은 하늘 아래서 매일매일 부닥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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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줬으니 우리 공주들이 넉넉히 지지고 볶으면서 중년이 되어갈 것입니다. 아비가 볼 때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란 문장을 보면서 입이 해벌 죽 벌어집니다. 어데서 주서 들은 바로는 인디언들은 여성 한 명이 500명의 아이들을 케어한다고 합디다. 무슨 말이냐면 여성은 원래 용량이 남성보다 커서 가족들만 케어하는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고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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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중년의 여성들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길이 없어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쓸데없는 오지랖(걱정과 잔소리)을 떤다는 것이니 재미있지 않나요? 자녀 입장에서 효도하는 것은 어머니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혼을 하고도 씩씩하게 사는 이유 중에 두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는 직장을 지금도 다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잔소리를 해서 키운 딸내미들이 둘 다 명문대를 다니고 자신이 볼 때도 이 사회에 ‘핵 인 싸’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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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아비도 행복합니다. ‘때’와 관련해 아비의 의견도 밝힙니다. 세상에 늦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르고 빠른 것보다 늦더라도 방향이 맞아야 하고 느릿느릿 가더라도 과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다행히 두 딸내미들은 소신을 가지고 인생을 주관적으로 산다고 믿습니다. 해서 공부가 좋으면 공부를 할 것이고 결혼이 더 좋으면 결혼을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데릴사위를 열열이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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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딸내미들이 인생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이 버킷리스트 1번이기 때문에 지금 결혼을 한다고 해도 올 하트를 줄 것이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동지 애를 발휘할 것입니다. 진짜 솔직히 말하면 남자랑 행복하게 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걸 깨달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변수가 있고 역 기능과 순 기능이 함께 있다는 걸 기억하시라. 예컨대 이놈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설마 약속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건 바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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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명리학에서 나왔는데 우주의 기운이 움직이기 때문에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한 다고 해요. 그걸 가지고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둥 실망을 하면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믿지 말고 내 지성과 경험을 믿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결국 ‘지성의 사유'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닐까?
2025.2.22.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