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 6 누가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2. 진노를 감당하랴 ( 1: 6-8 )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불을 쏟는 것 같으며 그 앞에서는 바위들도 깨어진다.
그 진노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피조물인 인생은 그 앞에 설 자가 없고 하나님의 그 두려운 진노를 감당할 자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모든 악인은 다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며 그를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지만, 범람한 물로 니느웨를 진멸하시고 앗수르 사람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다.
나 1: 6 누가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 도다 )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신학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므로 이렇게 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이것이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니다.
강조점을 두다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이지 잘못되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 자체에도 이러한 문제가 확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니느웨에 대한 저주 신학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표현이 때로는 잔인스럽고 어떤 때는 수치스럽거나 어떤 때는 고상한 시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니느웨 성은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결론이다.
피의 도성이 될 것이다.
강포와 늑탈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 도시는 살육 당한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게 될 것이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시체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며 너희는 떨리는 무릎이 서로 부딪칠 것이며 허리가 아프고 공허하고 황무하며 낮이 빛을 잃을 것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저주로 나타나고 있는가?
요나서와 나훔서가 이렇게 대조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문제인가?
같은 니느웨 대상을 놓고 요나서는 구원을 선포하고 나훔은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26m이었고 성벽 위로 전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성 주변에 너비 24m 깊이 15m의 방어용 연못이 있었다. 원래는 이방 도시였으나 복음이 전해져서 새로워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니느웨의 악독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 앞서 요나를 보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게 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의 의도를 미리 알려주신다.
요나의 말씀 선포를 듣고 니느웨에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다. 강도 높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니느웨의 아닷 니라니(Adad-Nirari)라는 왕 때(BC 808-783) 개혁운동을 한 기록이 있다.
그 뒤의 일들과 연관해서 보면 이 개혁운동이 요나의 말씀 선포 때문에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요나의 전도로 인한 니느웨의 변화는 오해 가지 못했다.
요나와 나훔 사이에는 백오십 년 정도의 시차의 사이가 있다. 그 사이에 니느웨는 도로 흉악한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서 니느웨는 니느웨 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앗수르 제국 전체를 의미한다.
니느웨는 대단히 강포한 나라가 되어 북 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멸망시켰다.
히스기야 왕이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릴 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많은 괴로움을 주었다.
나훔서 3장 1절을 보면 니느웨 성에서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않았으며, 살인과 음행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니느웨는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는 일을 했다.
그야말로 악의 도성이었다. 니느웨 성의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훔서는 묘사가 아주 생생한 것이 특징이다.
나훔서에 대한 주석들을 보면 나훔서는 복수를 말하고, 저주를 말하고, 증오에 가득 차 있고, 성경답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나훔서는 묘사가 생생하고 표현이 분명해서 아주 선명한 메시지를 준다. 문학성이 대단히 높은 성경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2]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나훔 선지자는 그 옛날을 기억하였다.
니느웨가 아무리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노아가 내린 저주가 창세기 9장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너희가 다 저주받을 일만 하고 있다.
더군다나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이 있고 예수님도 그 혈통 가운데 있는데, 태초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결정적으로 괴롭히는 니느웨 너희는 마침내 저주를 받아 참혹한 심판의 현장이 될 것이다.
그 백성들을 오래 전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려고 선지자 한 사람을 보냈는데 요나라는 사람이다.
요나가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서 선포한지 100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니느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니느웨 거리에 예배당이 가득하게 건축되어져야 하고 니느웨 군중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요나가 와서 구원을 선포한지 100년이 지난 지금은 옛날과 똑같아졌다.
아무 죄도 없는 셈의 후손들을 끝없이 와서 괴롭히고 마침내는 자유와 나라까지 다 빼앗아 버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너희는 망한다. 망하게 되어 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끝이 내일의 처음입니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가 내일을 결정합니다.
오늘 바쁜 일을 미루면 더 바쁜 내일이 되고, 오늘 바쁜 일을 처리하면
여유로운 내일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생각들, 마음들을 가지고 보내도록해요.
꽃길만 걸으시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인공으로 출발하시는 하루 되세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