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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 안록산(安祿山, 755년)의 난(亂)
또한 이 시기 아사나종례가 안록산군을 갑작스럽게 이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사나종례는 안록산군에 소속되어있던 돌궐족의 추장으로써 돌궐족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7월 22일, 아사나종례가 자신을 따르는 돌궐 기병 5천여 명과 마필 2천여 필을 훔처 삭방군 쪽으로 이탈한 것이다. 아사나종례의 의도는 삭방군 변방의 구성부와 알더스 고원에 당이 사민(徙民) 시켰던 돌궐, 동라 등 여러 이민족들을 선동해 봉기시키고, 이들을 지휘해 당의 변방지역을 장악하고 유력한 대외 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궐 제2제국이 멸망한 후 회흘이 아직 북방 초원지대의 패권을 잡기 이전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또한 당에게는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이었다. 당숙종은 삭방진, 안서4진, 하서진 등 서북쪽 일대의 번진들을 주축으로 삼아 군을 재건하고 또한 이민족 사역군 및 지원군을 받아들여 군을 증강시키고 있었는데, 아사나종례의 의도가 성공할 경우 서북 쪽 번진지역의 군대를 동원하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이민족 병사들도 그 수가 크게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숙종은 9월, 곽자의,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아사나종례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복고회은의 아들인 복고빈이 동라에게 패해 사로잡혔다 탈출해 돌아오자 자기손으로 처형할 정도로 군기를 다잡은 복고회은의 활약으로 아사나종례가 이끌던 동라-돌궐집단은 격파되었으며, 12월 회흘의 지원병력까지 인수한 곽자의가 다시 한 번 유림하 북쪽에서 동라를 필두로 하는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을 다시 한 번 격파, 참수 3만에 포로 1만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고 영무로 귀환한다.
또한 강남지역에서는 영왕 이린이 분리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은근슬쩍 세력을 확대하려는 기도가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장안이 함락되고 하북이 다시 사사명의 손에 들어가며 하남지역에서도 안록산의 세력이 확대되고 서북쪽 변방에는 아사나종례의 동라-돌궐집단의 발호가 일어나는 데다 강남에서는 영왕 이린이 다른 생각을 가지자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한 후의 전황은 결코 좋지 못했다. 이에 당숙종은 이를 한 번에 뒤집으려는 도박수를 두게 된다. 756년 10월 방관의 지휘하에 병력을 편성, 장안을 탈환하려 시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방관은 이 시대에 이름이 상당히 잘 알려진 문사로, 청담을 즐기며 빈객을 좋아하고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원활히 유지해 그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9월 말에 당숙종이 황제임을 인정하는 조서와 옥새를 들고 합류하자 바로 재상직에 임명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관(房琯)이란 인물의 실상은 꽤 한심했다. 빈객을 잘 끌어들이고 인맥을 유지하여 명성을 얻었을 뿐 군사적, 행정적 재능은 전혀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던 것.(...) 9월에 합류한 이후 그 명성으로 인해 당숙종의 신임을 얻자 때마침 조정에 입사한 북해태수 하란진명이 방관에 대해 저거 순 왕연(王衍) 같은 놈임이라고 평할 정도였던 것. 참고로 왕연은 청담사상가(淸淡思想家)로, 영가의 난으로 서진의 멸망을 가져온 주역 중 하나다.
10월, 이 방관은 스스로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겠다면서 당숙종에게 청을 올리고, 당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절ㆍ초토사경검방어포장양관절도등사(뜻은 ‘서경을 불러 토벌하고 포관과 장(동)관 두 관문을 방어하는 병마사 및 절도사’가 되겠다.(권중달 교수님의 주석))직을 제수한다. 이에 방관은 자신을 보좌할 참모들을 자신이 뽑겠다고 나서 어사중승 등경산, 호부시랑 이읍, 급사중 유질을 참모로 삼았다. 문제는, 방관이나 방관이 뽑은 참모들이나 죄다 백면서생에 불과한 인물들이었다는 것. 당숙종도 이게 염려되었는지 병부상서 왕사례로 하여금 방관을 돕도록 했으나 방관은 숙장인 왕사례의 도움을 깨끗하게 무시한 듯싶다.
방관은 군(전후 사정으로 볼 때 6∼7만은 되는 듯싶다. 꽤 대규모 군대다.)을 정석적으로 3군으로 나눠 양희문, 유귀철, 이광진(이광필의 동생)에게 맡겨 진격한다. 11월 20일 즈음에 함양에서 안록산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방관 이양반이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옛 병법을 따르겠다면서 우마차 2천승을 준비해 내세우자 안록산군은 간단히 그 우마차를 불태워 소들을 폭주하게 만들어 당군을 대패시킨다. 첫 전투에서 사상자가 4만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방관은 23일에 남은 군을 추스려 다시 한 번 도전했으나 간단히 박살이 나고 양희문, 유귀철은 안록산군에 항복한다. 이에 당숙종은 매우 분노했고 방관을 계속 재상직에 남겨는 놓았지만 실상이 드러난 이 인간을 더 이상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후 방관은 정신 못 차리고 정국을 다시 주도해 보려고 하나 당숙종은 다시는 그를 쓰지 않았다. 이는 간신히 재건되던 당 중앙군 전력을 다시 한 번 약화시켜 후에 이민족 병력, 특히 회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낳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 해에 당은 북해절도사, 상당절도사, 흥평절도사직을 설치했다. 이러한 내지절도사의 설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남양절도사, 하남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관내절도사,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경기절도사, 동기절도사, 청밀절도사, 상당절도사 등 대부분의 지방이 절도사들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며, 기존의 지방행정체계는 절도사들의 번진체계에 흡수되어 버린다. 이는 안사의 난 진압 이후에도 복고회은의 난, 사진의 난, 주자-이회광의 난 등으로 대표되는 당 중후기의 연속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근본 요인이 된다. 또한 과도하게 늘어난 절도사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군사력은 당의 재정상황을 심각하게 압박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증세는 결국 당의 멸망을 가져오는 황소의 난(黃巢之亂)이 일어난 근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개원∼천보 연간 동안 강화된 당의 군사력에 의해 억눌러져 있던 토번은 위융, 신위, 정융, 선위, 제승, 천성 등의 군진과 석보성, 백곡성, 조과성 등 당에 의해 빼앗겼던 요충지를 공략해 빼앗는다.
방관의 삽질로 인한 실패까지 이어지자 당숙종은 이필에게 ‘정말 안록산의 난을 진압할 수는 있겠는가?’하고 조언을 청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황은 안 좋은 것뿐이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이에 이필은 ‘2년 안에 평정 할 수 있사옵니다. 염려 놓으시오소서’하는 답변을 한다. 이후 이필은 추후 전략에 대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역적의 날랜 장수는 사사명(史思明)ㆍ안수충(安守忠)ㆍ전건진(田乾眞)ㆍ장충지ㆍ아사나승경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지금 만일 이광필로 하여금 태원으로부터 정형으로 나오도록 하고 곽자의로 하여금 풍익으로부터 하동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사사명과 장충지는 감히 범양과 상산을 떠나지 못하고 안수충과 전건진은 감히 장안을 떠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두 군대가 그들의 네 장수를 잡아매면 안록산을 좇는 사람은 오직 아사나승경뿐입니다.
바라건대 곽자의에게 칙서를 내려서 화음을 빼앗아 양경의 통로를 항상 통하게 만들고 폐하께서는 징발한 군대를 가지고 부풍에 주둔하여 곽자의ㆍ이광필과 더불어 서로 나아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면 저들이 머리 쪽을 구원하면 그들의 꼬리를 치고, 꼬리쪽을 구원하면 그들의 머리를 처서 역적으로 하여금 수 천리를 오고 가게 하면 분명 피곤하게 되지만 우리는 항상 편안한 상태에서 지처 있는 군대를 기다리는 격입니다.
역적이 도착하면 그 칼끝을 피하고, 물러나면 그 틈을 탈 것이며,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길을 막지도 않습니다. 다가오는 봄에 다시 건녕왕 이담에게 명령하여 범양절도대사로 삼아 나란히 요새지대의 북쪽으로 나아가 이광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에서 기각의 형태로 범양을 빼앗아 역적의 소굴을 뒤엎어 버리게 합니다. 역적은 물러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고 남아있더라도 편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 한 후에 대군이 사방에서 합쳐져서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게 됩니다.”
황상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이를 정리하자면 ‘곽자의와 당숙종 자신은 양경 일대의 교통로를, 이광필은 태원에서 하북으로 나아가 안록산군을 묶어놓은 다음 치고 빠지기로 힘을 빼고, 다음해(757년) 봄에 일단 근거지인 범양부터 공략한 다음에 압박한다.’는 것이다. 이는 추후 당의 대대적인 반격 당시 범양 공략보다 양경 탈환부터 우선시한 숙종에 의해 전략이 수정되지만 당의 안록산의 난 진압의 기본 방침이 되어 이광필에 의한 태원 방어 성공과 이후 하북 압박, 곽자의의 장안-낙양 축선 교통로 위협 등의 작전이 수행되게 된다.
안록산의 공세가 한참 진행되던 중 안록산이 거병 이후 앓던 안질이 악화되어 맹인 수준까지 떨어졌고, 또한 등창을 앓으면서 주변 사람에게 포악하게 행하기 시작하면서 안사의 난은 전환점을 밟게 된다.
특히 안록산의 폐첩인 단씨가 안경은이라는 아들을 낳자 기존의 후계자였던 장남 안경서를 대신해 안경은을 세우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에 안경서가 반발하면서 757년 1월, 안록산은 안경서에 의해 피살당한다. 이는 당의 반격의 실마리가 된다.
안록산의 군재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지휘경험, 그리고 반란 이전 3개 절도사직을 역임하면서 그 수하들에게 가진 유무형의 권위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안경서에게는 안록산이 가진 경험과 권위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기에 그저 수하 제장들에게 후하게 베푸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통제하려 시도할 수밖엔 없었다.
이에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여러 장수들은 슬슬 안경서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안록산의 본래 근거지인 범양 일대를 사실상 총괄하던 사사명은 후에는 안경서보다도 세력이 더 커지게 된다.
안록산은 아들에게 비참하게 죽었으나, 세력 자체는 아직도 매우 강성했다. 이 시기의 주요 격전지역은 하동지역으로 당은 이필이 입안한 전략에 따라 곽자의, 이광필이라는, 이때 당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두 장군을 전면에 내세워 서쪽으로는 태원을 지켜내 하북의 사사명을 견제하고 남쪽으로는 양경일대를 위협하고자 시도하고, 안록산의 연군 또한 하동지역을 장악하고 당의 후방인 삭방, 하서, 북정지역까지 나아가고자 시도하여 두 세력의 최고 장군들이 맞부딪치는 전장이 된다.
특히 연의 주 목표는 3경 중 하나인 태원이었다. 757년 1월, 사사명은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 등 자신의 지휘 하의 장수들과 병력 10만을 끌어모아 태원으로 진격, 이광필과 격돌한다.
이미 지난해(756년) 8월 이광필은 호부상서에 임명되어 재상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으며, 또한 동시에 북도(태원)유수로 임명되어 다시 한 번 태원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삭방군 병력을 주축으로 하는 정예병력은 대부분 영무에 그대로 남긴 채로 경성과 하간의 병력 5천여 명을 이끌고 가야만 했다. 하북성 출신 병사들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병사들은 그 출신이 안진경의 하북의병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756년 안진경이 사사명에 의해 참패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 그 질은 사사명이 이끄는 병사들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태원에 도착한 후 기존의 태원 방위군과 주변지역 병사들을 끌어 모았지만 그 규모는 채 1만이 되지 못했을 뿐더러 상당수가 임시로 징집한 단결병이라 질도 떨어졌다. 거기다 상산까지 진작에 사사명에게 함락된 상태였기 때문에 태원을 외곽에서 방위하는 요새지인 태행 8경은 이미 방어거점이 되지 못했다. 이에 사사명은 태원을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후 삭방과 하, 농지역을 공격해 영무의 당숙종을 관중의 안록산군과 협공할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광필은 여기서 다시 한 번 태원을 지켜내었다. 미리 태원의 백성들을 동원해 벽돌을 수십만 장 만들어 놓았다가 상황에 맞게 이를 사용하여 방어시설을 보수했고 성 밖에 참호를 깊게 파놓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태원 내에서 특기가 있는 사람을 모집해 상황에 맞게 활용하였다고 하며, 태원 밖으로 비밀 땅굴을 만들어 적을 기습하고 공성무기를 끌어들여 파손시키고 야습까지 감행하는 등 이광필의 슬기로운 수비가 빛을 발했다고 한다. 여기에 곽자의-이광필군이 영무로 들어가면서 후방에 남겨놓았던 일부 부장들이 후방에서 게릴라를 펼쳐 공성무기를 파괴하기도 했다. 결국 사사명은 1개월 동안의 공성전 기간 중 전사자만 1만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이후 안록산의 죽음이 전해지자 사사명은 범양으로 귀환, 채희덕 등이 남아 태원 공략을 계속한다.
이후 이광필은 타이밍을 노리다가 결사대를 이끌고 채희덕군의 본진을 급습, 자치통감에 의하면 7만여 명을 참살하고 태원의 포위를 푼다. 채희덕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숨어들었다. 이에 안경서는 사사명을 범양절도사로 삼고 항양군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규천왕으로 책봉한다. 우정개로 하여금 안양군의 업무를 담당시키고 장충지를 상산태수 겸 단련사로 삼아 정형을 계속 유지하게끔 한다. 이는 위에서 제안된 이필의 전략대로 이광필이 태원을 수비하는 데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북지역의 안경서세력을 압박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곽자의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인 ‘양경의 교통로 압박, 제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막중한 업무에 대한 보상차원인지 곽자의는 영무에 이광필과 같이 삭방군을 이끌고 합류했을 때 삭방절도사직에 더해 무부(병부)상서ㆍ영무장사직을 겸하여 마찬가지로 재상직에 올랐다. 이때에 곽자의는 하동이 양경 사이에 있기에 이 지역을 빼앗으면 양경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1월 28일, 비밀리에 하동으로 접근한다.
이때 하동은 앞서 동관을 함락시킨 후 북진하여 하동지역의 절반을 장악한 최건우가 지키고 있었는데, 곽자의는 몰래 사람을 보내 하동에 남아 항복했던 당의 관리들을 다시 회유하는 공작을 수행. 2월 11일에 이를 통해 한 번에 하동을 함락시켰다. 최건우는 성 북쪽의 병사들을 동원해 저지에 나섰지만 곽자의에 의해 4천여 명이 전사, 5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맛보았으며 안읍으로 철수하자 곽자의는 빠르게 따라붙었다. 여기에 안읍의 거주민들 또한 곧바로 곽자의에 협조, 최건우군이 성에 반쯤 들어왔을 때 냉큼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온 병력들을 학살한 다음 곽자의에게 귀부했다. 운 좋게도 안읍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던 최건우는 백령경으로 도주하면서 하동지역은 완전히 곽자의에 의해 평정된다.
이후 곽자의는 2월 22일, 그의 아들인 곽간과 병마사 이소광, 복고회은 대장 왕조를 파견해 동관을 처서 함락시키고 수비병력 중 5백여 명을 참살하나 안경서가 급하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동관을 공격하자 병사 1만여 명과 이소광, 왕조가 전사하고 곽간과 복고회은만이 간신히 황하를 다시 넘어 살아 돌아오는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3월 23일, 안경서군의 관서절도사인 안수충이 기병 2만을 이끌고 하동을 공격하자 곽자의는 이를 격파해 참수 8천, 포로 5천이라는 승리를 거두어 하동지역의 장악을 공고히 한다.
이 시기에 상당에서는 채희덕이 태원에서의 참패 이후 상당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상당절도사 정천리에게 거듭 패했다. 정천리는 안록산의 난 발발 이전 금오장군을 하고 있다가 상당으로 가서 지역 민병을 모았다. 그러나 9월 2일에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교전하다가 철수하던 중에 다리가 무너져 사로잡히게 된다. 이후 그는 낙양으로 이송돼 억류되어 있다가 안경서가 낙양을 탈출할 때 살해당한다.
하동지역에 비해 하남, 남하지역은 상대적으로 전란이 비켜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수양(誰陽, 하남성 상구시)을 지켜낸 장순, 남양(南陽, 하남성 등주시)을 수비한 노경이 연의 침공을 막아서는 방패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경이 남양을 수비하기 시작한 것은 756년 5월부터였다. 전진하여 목책을 세웠다가 무령순, 필사침의 공세에 패배해 남양성으로 들어가 수비하기 시작했던 것. 이후 무령순, 필사침, 전승사 등의 공세에서 남하지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경은 필사적으로 남양을 수비한다. 그리고 이 방어전는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계속된다.
747년 4월, 남양에는 식량이 고갈되었다.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쥐 한마리 가격이 동전 수백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당숙종은 환관장군 조일승을 파견해 남양성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군의 포위망이 강고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가긴 힘든 상황. 양양태수 위중서는 조일승이 연군에 의해 피살당할까 두려워 보내지 않았다.
이때에 하북에서 사사명에게 패해 남하지역으로 와 있었던 안진경이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막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조언이 가능한 것은 안진경은 4월 즈음에는 영무로 가기 때문에 조일승은 4월 이전에 양양에 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위중서는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기병 10기를 호위병력으로 붙인 조일승은 연군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남양에 도착해 이들을 격려한 후 양앙으로 되돌아온다. 이때에 남양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 조일승은 호위병력 1천여 명을 붙여 양양에서 식량을 가져와 당장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경은 더 이상은 남양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4월 15일에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남양을 탈출, 양양으로 철수한다. 이에 전승사는 노경을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고 한다.
남양의 함락 이후 연 세력은 남하지역 또한 공격하고자 했으나 노경이 요충지를 잡고 잘 수비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수비전은 수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서는 윤자기를 변주자사ㆍ하남절도사로 삼고 하남지역까지 제압할 것을 명령했고, 1월 25일 윤자기는 규주(하북성 회내현)와 단주(북경시 밀운현)의 단결병들, 그리고 동라와 해족 출신 이민족 병사들을 합처 13만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 수양으로 진격한다. 이에 수양태수 허원이 영릉으로 물러나 있던 장순에게 도움을 청하자 장순은 자신이 이끌던 병력 3천여 명과 함께 수양으로 이동, 허원이 지휘하던 병력 3천 800여 명과 이를 합친다. 이 7천여밖엔 안 되는 병력으로 장순은 다시 한 번 뛰어난 수성전 능력을 선보여 16일 동안 윤자기군의 장교 60여 명을 생포하고 2만여에 달하는 피해를 안겨주어 철수시켰다. 이를 통해 당의 영역에 남아있던 하남지역은 또 한 번 지켜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