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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지 못한 자들에게 다가 오는 유혹
벧후 2:12-22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ㄱ)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12-22 / 거짓 교사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가리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마치 체포당하고 사형을 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서운 힘을 비웃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든 악마와 지옥의 세력들과 함께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3) 그것은 그 거짓 교사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입니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악한 쾌락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직한 체하며 여러분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 끼어 들더라도 한편으로는 더러운 죄를 저지름으로써 여러분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을 불명예스럽고 얼룩지게 할 뿐입니다. 14) 죄에 물든 그들의 눈은 어떤 여자이든지 음탕하게만 봅니다. 그들의 음란한 행위는 아무리 해봐도 한이 차지 않고 들떠 있는 여자들을 유혹하는 놀음에만 정신을 쏟습니다. 탐욕을 채우는 데 숙달해 있다가 결국은 자기 몸을 망치고 말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15) 다른 길을 벗어난 그들은 부정한 수단으로 돈을 얻기를 좋아한 브올의 아들 발람처럼 배회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나 발람은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그의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17) 이런 거짓 교사들은 말라버린 우물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 인간들입니다. 입으로 약속은 많이 하지만 어느 한가지도 실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치 폭풍에 밀려 가는 구름처럼 안정성이 없습니다. 그들이 갈 곳은 영원히 어두운 암흑의 구덩이입니다. 18) 그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들이 지은 죄와 유혹에 빠진 일들을 자랑삼아 늘어놓습니다. 이제 겨우 이런 악한 생활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에게 욕정을 미끼로 삼아 그들을 다시 죄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19)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나쁜 짓을 하는 게 어때?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하란 말이야. 그게 자유란 것이니까.' 이 거짓 교사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면서 그들 자신은 죄와 멸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20) 만일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 세상의 악한 생활에서 빠져 나왔던 사람이 다시 과거의 죄된 생활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상태는 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21) 그리스도를 알았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거룩한 계명에 등을 돌릴 정도라면 차라리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22) 잠언의 ㄱ) `개는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는 아무리 씻어 주어도 다시 진탕에 뒹군다'는 말은 죄 가운 데로 되돌아간 자들에게 꼭 들어 맞는 말입니다. (ㄱ. 잠26:11)
본문은 거짓 선지자의 특징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주며, 이들을 향한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12-16) 거짓 교사들의 내면과 삶의 행태를 베드로는 무서운 용어를 써서 말합니다.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은 영원한 삶에는 전혀 뜻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의 특징과 행동을 소개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발람을 들고 있습니다(15).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은 복 받은 백성이기에 저주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귀의 입을 통해 책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발람을 거짓 교사의 한 모습으로 소개하면서 그들의 특징과 행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17-22) 베드로는 이어서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물 없는 샘입니다. 샘에 물이 없으면 샘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람 부는 대로 밀려다니는 안개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둠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어둠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입니다(딤후 3:5). 이들은 열매 없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들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런 거짓 교사들을 멸망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한 때는 복음 공동체 안에서 회원이기도 했고, 리더이기도 했던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의 해악은 복음의 진리를 전혀 접하지 못한 자들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0-21).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해악의 문제점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속담을 인용합니다(22). 토한 것을 다시 먹을 바에야 토하지 말았어야 하며, 씻은 몸을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누울 바에야 씻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이 다시 죄 속으로 되돌아간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적용: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영적 분별력이 있습니까?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와 살지만, 물을 서서히 데우는 찬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조만간 직면할 위험을 인지하지 못해 결국 죽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 한 자들은 무지하고 교만하여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때와 장소에 상관하지 않으며 음란하고 탐욕스러워 발람과 같이 불의한 삯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거짓 선생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
벧후 2장 10~16절 / 이정선목사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세계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 사람의 크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알고 경험한 세계만 전부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보면 우습지요. 어느 여름밤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당에 나와서 하늘의 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에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이 셀 수도 없는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별들을 보면서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영감, 하늘에 별들이 참 많지요? 백 개도 더 될 것 같아요.’ 할머니가 아는 가장 큰 수가 100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별들이 백 개도 더 되는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십 개도 더 되겠구만.’ 할아버지가 아는 가장 큰 수는 50인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해도 역시 한계를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줄 알았는데,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게 마련이고, 우스갯말로 세계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경험하고 아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은 멋모르고 날뜁니다. 그게 무슨 꼴인가 하면, 별이 백 개도 더 되겠다는 말에 펄쩍 뛰면서 오십 개도 더 된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만큼 악행을 일삼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 그랬는지를 베드로가 아주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했습니다. 여기서 영광 있는 자들은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 거짓교사들에 대해서 어떤 자들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천사들까지 비방했던 자들이라면 아마도 영지주의자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지주의는 초월적인 지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초월적인 지식은 감추어져 있어서 아무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지식을 깨달은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되겠습니까? 요즘도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7:53, 갈 3:19). 물론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율법을 가지고 와서 모세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천사가 전해준 것으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천사의 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 초월적인 지식에 도달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천사들은 저급한 지식인 율법이나 전해주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를 우습게 알고 비방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천사를 영광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천사를 만난 적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헤롯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천사가 그를 구출했지 않습니까?(행 12:7) 그때 베드로는 천사가 얼마나 영광 있는 존재인가를 보았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니 옥중에 광채가 가득했어요. 그리고 천사가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니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문도 잠겼고 파수꾼들도 지키고 있었지만, 천사를 따라가니 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인간이 무슨 재주로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까? 천사는 인간과 동급이 아니에요. 그래서 영광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교사들은 천사들을 자기들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비방했단 말이에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라도 분수가 있지요. 동물원 주변에서는 개를 못 키웁니다. 호랑이가 으르릉 소리를 한번만 내도 개들은 혼비백산한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태어나서 하루밖에 되지 않은 강아지가 호랑이인지 나무토막인지 모르고 막 달려든다면, 그 꼴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거짓교사들이 천사들을 비방하는 것이 바로 그런 모습 아니겠습니까? 정말 같잖아서 말도 안 나오는 형국입니다.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천사들을 막 비방했단 말이에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아요?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렇게 영광 있고 큰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함부로 비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높으시고 능력 많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마귀와 다투면서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유 9). 최종판결을 내리실 분은 따로 계십니다. 비록 마귀가 잘못했지만, 천사가 나서서 그를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할 수 없단 말이에요. 큰 능력을 가진 천사장이 그렇다면 하물며 어떻게 인간이 함부로 천사를 그렇게 비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교사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막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오십까지밖에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천이나 만을 말한다고 비방하는 꼴입니다. 조그마한 자기 세계에 갇혀서, 그 작은 세계 아닌 것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뭘 알고 그럽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압니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해보기를 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 밖의 세계, 즉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유다서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0). 베드로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요.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짐승들 중에 가장 지능이 높은 것은 돌고래라고 합니다. 돌고래 쇼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합니다. 또 사람과의 유대감도 꽤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짐승을 길들이고 가르친다 해도 짐승과 인간은 급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천사와 인간이 종류가 다른 것처럼, 인간과 짐승은 종류가 다르단 말이에요. 짐승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합니까? 그저 본능에 의해 살아가지요.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만드신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은 구원을 받는다거나 하나님과 교제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본능대로 살다가 잡혀 죽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거짓교사들이 하는 짓이 딱 그 짐승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는 짓이 멸망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중적인 표현으로서 멸망의 확실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반드시 멸망한다는 말이지요.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심은대로 거둔다는 뜻입니다. 불의를 저지른 대가로 불의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누가 낮부터 술을 마시고 취해 있으면 뭔가 제대로 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낮에 즐기고 놉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게 그들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쾌락만을 추구하고 탐욕에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점과 흠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순결하고 거룩해야 할 교회에 얼룩이 묻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섞여 있으면서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보세요.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함께 연회하는 것은 같이 어울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속임수로 즐기고 놉니다. 여기서 속임수라는 것은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같이 어울리고 놀면 그냥 놀기만 합니까? 예를 들어 어떤 이단에 속한 사람이 식사초대를 했다면, 같이 밥 먹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목적은 따로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그렇게 작용합니다. 자꾸 선물도 사다주고, 이사할 때 와서 도와주기도 하고, 같이 놀러가자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렇게 호색하는 사람들이었지요(2절). 이방종교의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같이 어울리며 이런 행동과 습성을 지속하면, 이 사람들이 쫓겨나야 하는데, 오히려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물들게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거예요.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간판을 걸고 있는 이단들이 많지만, 우리가 그들을 기독교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어머니를 믿는 집단도 있고, 제2의 구세주를 받드는 집단도 있습니다. 이단 연구를 해보면 기가 막히기도 하겠지만, 재미있기도 하겠어요. 어디서 그런 기발한 생각들을 만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교회 안에서 함께 어울리며 이들이 하는 일은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께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것은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흔들리는 사람들을 붙잡아주고 튼튼하게 세워주는 일입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입니다. 베드로가 돌보고 굳게 해주어야 할 형제들이에요. 그런데 이 거짓교사들이 와서 연약한 영혼들을 유혹하여 이단으로 끌어가니 늙은 베드로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봄이 되면 사과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꽃이 핍니다. 그렇게 피어난 꽃 하나가 나중에 사과 하나입니다. 그런데 때 아닌 태풍이 불어서 꽃들이 떨어져버리면 그해 농사 망하는 것입니다. 새로 믿어서 이제 막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된 신자들에게 거짓된 교리를 가르쳐서 멸망의 길로 끌어가는 짓을 하는 것이 이 거짓교사들의 일입니다.
또한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무엇이든지 훈련을 많이 하면 숙달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훈련을 하려고 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기도의 훈련 많이 해야지요. 사랑하는 훈련도 많이 해야 합니다. 퍼팅 훈련을 많이 하면 타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훈련은 유익한 결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도둑질 훈련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짓말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서 맨날 거짓말 훈련만 시키면 뭐가 되겠어요? 이 거짓교사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 즉 탐욕으로 훈련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껏 탐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살겠어요? 탐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겠어요? 탐욕이 몸에 배어서 습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양으로 사는 그들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저주의 자식들입니다. 저주 받을 자들, 저주 아래 있는 자들, 저주 가운데 사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탐욕을 따라가서 파멸에 이른 사람의 예가 발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에 이르렀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발락이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하는데 가도 될까요?’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그랬으면 끝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모압 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며 다시 요청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분명히 가지 말라는 것인데, 돈을 많이 준다고 하니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또 하나님께 가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잖아요? 베드로는 이런 발람의 행동을 불의의 삯을 사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발람의 요청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허락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발람을 구원하실 것이라면 끝까지 못 가게 하셨을 것입니다. 가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너 가서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이것을 허락받았다고 좋아라 하면 안 됩니다.
가는 길에 천사가 칼을 들고 발람을 죽이려고 다가왔습니다. 그게 나귀의 눈에는 보이는데 발람의 눈에는 안 보였습니다. 타락하게 되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겠어요? 엉뚱한 데로만 가는 거지요. 그런데 나귀가 천사를 보고 피하는 바람에 발람이 살았어요. 그것도 모르고 발람은 나귀를 때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서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귀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나귀는 짐승 아닙니까? 앞에서 짐승은 이성도 없고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것이라고 했는데, 발람은 그 짐승보다 못한 선지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랬어요? 돈 좋아하다가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마음보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돈을 따라가는 발람의 행동을 미친 행동이라고 지적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그렇게 모압 왕의 계획은 틀어졌지만, 그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이 망하게 하는 방법을 알았어요. 그 비밀을 모압 왕에게 팔았습니다. 그 비밀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절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로 이만 사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발람을 잡아 죽입니다.
발람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 거짓교사들의 하는 짓이 발람이 했던 것과 똑같다는 말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자들을 유혹해서 파멸로 끌고 가는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불의의 삯을 추구하는 자들로 발람의 후예들입니다. 결국 그들도 발람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신자들이 발람과 같은 거짓교사들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늘 정신을 차리고 진리 안에서 올바른 지식을 쌓아가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적 승리
벧후 2장 12~22절 / 이상호목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다 이겨도 영적 싸움에서 지면 패배하는 것이요 다른 싸움에서 진다할지라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면 영원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를 믿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싸움에 이기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대적은 사람이 아니라 사단이며, 인간의 대적은 많은 것이 아니라 사단 하나입니다. 사단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참 승리요, 영원한 승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내 힘이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짓고 거짓말하고 남을 해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단이 나를 유혹하여 죄짓게 하고 사단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나쁜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마귀를 알아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귀가 하는 일과 이러한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첫째, 죄를 짓게 합니다. 크든지 작든지 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 사단이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죄로 얽어 묶어서 성장을 방해하고 우리 몸의 활동을 가로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경우에는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마귀는 영적인 생활을 방해합니다. 예수를 못 믿게 하고, 은혜를 못 받게 하고, 교회를 못 가게하고,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다 마귀의 방해 때문입니다.
셋째, 마귀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합니다. 마귀는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의복이나 맛있는 음식 등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넷째, 마귀는 불의를 행하게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강퍅하고 악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다섯째, 마귀는 더러운 길로 유혹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여섯째, 마귀는 우리를 불화하게 합니다. 만나면 싫어지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일곱째, 마귀는 우리에게 질병과 실패와 사고와 재난을 가져다줍니다.
여덟째, 마귀는 우리를 범죄하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받게 합니다.
이러한 마귀와 싸워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착하고 선하면 마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1) 마귀를 이기는 힘은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2) 교회입니다. 교회는 피난처요 도피성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게 해줍니다.
3)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강한 무기요 능력입니다.
4)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요 마귀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습니다.
5)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은 신령한 힘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권능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신앙의 기본이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영적으로 지는 것은 멸망입니다. 더욱 철저히 영적으로 무장하여 영원한 승리를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2:17-22
[찬송가]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베드로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종교를 밀거래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없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지략이 뛰어나고 진실하게 보이지만, 사실 머리는 텅 비어 있고 허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해답과 소망을 준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과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들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선포하는 척하지만, 신자들과 같은 언어, 다른 사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얻은 듯이 행동하지만, 썩어질 것들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들은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장차 올 진노의 날에 받을 심판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17-19)]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한 말로 묘사합니다.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베드로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거짓된 동기와 그에 따른 삶의 허망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첫째, ‘물 없는 샘’인 그들은 뭔가 신선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영적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서 선생들은 종종 갈증을 풀어주는 샘에 비유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비극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의 영적 갈증을 풀어주시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4:13-14; 7:37-38).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물 없는 샘’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이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제보다 더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치 영적 복어처럼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자신을 부풀렸습니다.
둘째,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인 그들은 우레와 같은 주장과 번득이는 호소로 사람들을 속이지만,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안개만 가져왔습니다. 눈에 보이지만 막상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그들의 가르침은 실질적 내용이 없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사라지는 안개 같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 앞에는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모든 악한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을 상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약 3:1).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자들입니다. 또 자신뿐 아니라 자신을 좇는 사람들에게도 신령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막 11:12-14)’와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영혼의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이제는 깨어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분별하고, 믿음을 굳게 하므로 그들과 맞서야 합니다.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허탄한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부각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들의 교활한 본성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은 즉시 간파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결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 외양은 멋진 옷으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보다 더 진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거만하고 과장된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묘한 주장과 왜곡된 진리로 어수룩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이제 막 회심한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집중적으로 유혹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무리 중에서 가장 약한 동물을 먹이로 삼는 육식 동물처럼 그들은 교회 내에서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먹잇감으로 노립니다.
그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수단은 음란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막 회심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길을 따르면 전혀 변화될 필요가 없으며, 양쪽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 호소합니다.
여기서 ‘음란으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소돔 사람들의 ‘음란한 행실(벧후 2:7)’이라고 말할 때의 음란과 같은 단어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그릇된 행위에서 겨우 피한 사람들에게 음란을 버릴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싸한 설교와 달콤한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내 귀를 즐겁게 하고,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거짓 교훈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자유를 약속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을 멸망의 종으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유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에게 자유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죄에서 자유롭고, 진리에 구속받지 않으며, 현세나 내세에 미칠 여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증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우리는 그 가운데 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자유의 교리를 정체불명의 괴상한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그들은 ‘싸구려 은혜’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셨고(요 8:34), 바울이 사용했던(롬 6:16) 말로 결론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말은 패배한 군대를 승리한 군대의 종으로 사슬에 매어 놓는 풍습을 말합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면, 분명 죄와 그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20-22)]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후에 그 길에서 돌이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버린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운명에 주목합니다.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베드로는 얼핏 보기에는 진짜 같은데 실제로는 진짜 지폐 속에 섞여 있는 위조지폐 같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잠깐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말과 행실에서 정체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합니다. 또 그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머리로는 알지만, 그 진리로 마음과 몸이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보다 형편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다른 길을 택하였다는 것은, 최선의 것을 알면서도 최악의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해야 할 일을 충분히 인식하였음에도 죄를 범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지식이 그들 자신에게 정죄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귀신 들린 사람의 운명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마 12:43-45)에서 귀신 하나가 나갔으나 결국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사람의 모습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최후입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까? 거룩한 척, 경건한 척하면서 자신과 남을 속이며 살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함으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배반하는 것보다 진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둘 사이를 비교하는 것이지, 이 둘을 선택 사항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지가 배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지만, 진리를 거부한 사람은 바로 잡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경험해봐서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또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어렵지만, 자신이 진리를 다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다 아는 듯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끝내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눅 6:39).
초대교회에서 배교는 특별히 끔찍한 죄로 간주 되었습니다. 즉 세례를 받고 나서 믿음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배교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시는 하나님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진리를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앞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이라고 묘사했던 베드로는 이제 그들을 개나 돼지에 비유합니다. 베드로 시대에 개는 떼지어 다니는 불결하고 포악한 야생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키우는 애완동물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 돼지는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잠언 26장 11절을 인용하면서 진리에 등을 돌린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와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그들을 방금 몸을 씻고도 진흙탕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 그곳에서 뒹구는 돼지 같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엇을 토해내었든 혹은 자기 밖에서 무엇을 씻어냈든 간에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피땀 흘려 기도하신 후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개, 돼지와 같이 자신이 토하였던 것과 자신이 빠져나온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닙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기억하며 아름답고 견고한 영적 성숙을 이루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교훈을 줌과 동시에 우리 자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 되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그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귀와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거짓 교훈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며, 참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지폐 속에 섞여 있는 위조지폐같이 자신과 남을 속여서는 안 되며,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개, 돼지와 같이 옛 생활의 더러움으로 회귀해서는 안 되며, 날마다 아름답고 견고한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9월의 첫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은 다름 아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서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벽에 우리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온전히 돌이키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영혼의 잠에서 깨어 우리가 있어야 할 기도의 자리를 지킴으로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영혼의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 내 귀를 즐겁게 하고,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그럴싸한 설교와 달콤한 가르침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왜 진리의 말씀보다 그런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까?
3. 거룩한 척, 경건한 척하면서 자신과 남을 속이는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4. 개, 돼지와 같이 자신이 토하였던 것과 자신이 빠져나온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닙니까? 내가 끊어내야 할 옛 생활의 더러움은 무엇입니까?
저주의 자식
벧후 2:12-22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이야기 중에 이솝 우화가 있습니다. 이 이솝 우화 가운데에 파리와 불나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파리가 날아다니다 맛이 있는 꿀을 발견했습니다. 꿀단지의 주변을 돌면서 조심조심 그 꿀을 맛보다가 결국은 조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깊이 한복판에 뛰어 들어가 그 날개가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힘을 쓰면 쓸수록 그 꿀 속에 더 깊이 파묻혀 갑니다. 그때 불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서 “야 이 녀석아. 음식을 그렇게 탐욕스럽게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너무 돼지처럼 먹기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빠져서 결국 죽지 않니!” 그렇게 비난을 하는 나비 앞에서 파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이 점점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촛불이 켜졌습니다. 이 불나비가 촛불 주변을 빙빙 돕니다. 그 색깔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가까이 나갑니다. 더 잘 보려고 가까이 가다가 결국은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아직도 죽지 않은 채 있던 파리가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니 저는 더 바보구만. 한 번에 타 죽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탐욕을 좇아 사는 인생, 쾌락을 좇아 사는 인생이 어떻게 스스로 멸망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우화입니다. 성경도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생에게 이러한 무서운 결과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결국은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에 젖어있는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이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먼저 쾌락주의로 이끄는 저주의 자식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노래 가운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젊고 늙고가 없습니다. 아주 노는데 정신들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 놀 틈이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자리만 있어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좁은 단칸방에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좋았습니다.
그저 바라는 바는 남부럽지 않게 살 수만 있다면 무슨 고생을 해도 좋았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공부하고 싶다는 자식을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공부냐고 하면서 야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다는 형제자매를 위해서 다른 형제자매가 공장을 다니면서 그 학비를 마련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것들만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부보다 컴퓨터 게임이 더 재미있는데요? 휴대폰만 손에 들었다 하면 그 안에 게임을 다운 받아놓고 게임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 게임들이 우리의 마음을 아주 나쁘게 만드는 그런 게임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들도 나름대로 미쳐 돌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에 목을 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에 목을 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기에 목을 맵니다. 요즘 연예인이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딴따라라고 해서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연예인들이 요새 말로 대세입니다. 심지어 K-Pop의 열기가 온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래 K-Pop 가수들의 공연은 자기들 나라에도 와서 해 달라고 여러 나라에서 데모까지 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게임도 좋고 운동도 좋고 노는 것도 좋고 돈도 좋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냐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즐겁게 세상을 산다고 해도 마지막 우리의 가는 길이 지옥 불 속이라면 그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믿어서 엉뚱한 길로 가다가 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주고 싶어 하고 또한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서툴러요. 한 마디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사랑은 받기에 앞서서 먼저 주는 것이 복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유익하도록 배려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잠깐의 기쁨이 아닌 잠깐의 즐거움이 아닌 두고두고 기쁘고 즐겁도록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된 자들은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또 달라고만 합니다. 언제 주셨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네가 먼저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안 되면 자기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심한 욕을 퍼붓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기를 들고 폭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들을 향해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마땅해, 나 같은 건 쓰레기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아니 그게 누구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를 행해서 보배라고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그런 나를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악한 마귀는 이렇듯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립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돼지를 왜 키웁니까? 더럽고 냄새나고 힘도 들고 사료 값에 뭐에 뭐에 돈도 많이 드는데 왜 돼지를 키워요?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돼지가 고민하는 것 봤습니까?
마찬가지로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들이 거꾸로 교회를 향해서 욕을 합니다. 별별 소리를 다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뭐하고 정말 귀를 열고 듣기 힘들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 소리를 해댑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모습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것이랍니다. 이성 없는 짐승 같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없으니 그저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만 유익하면 됩니다. 자기만 좋으면 됩니다. 안 좋은 일에는 그저 나만 아니면 되고 좋은 일에는 그저 나만 되면 되는 그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남을 속여 먹습니다. 남을 속여서 자기 배를 채웁니다. 그런데 그래서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그것 가져다 노름하느라 다 날리고 술독에 빠져서 살고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마치 집 떠난 탕자처럼 어느 날인가 문득 돌아보니 쫄딱 망한 거지꼴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부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즐겼습니다. 그 집 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면서 나는 저 거지와 같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런 거지를 내 집 문 앞에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만 해도 내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자인지 모른다고 자부합니다. 맞다고 당신이 너그러우니까 저 거지를 집 앞에 그냥 놔두는 거지 보통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다고 사람들이 맞장구를 칩니다. 하지만 나중 결과가 어떻습니까? 결국 지옥 불 속이 아닙니까? 결국 쫄딱 망한 거지꼴이 아닙니까?
그래도 나만 하니까 그런 거라고 어줍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나만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듯 그렇게 우리를 치신다면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사랑을 하는데도 바르지 못한 사랑을 합니다. 이게 오늘날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아내를 둡니다. 분명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라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그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이 되어서 온갖 추잡한 글과 그림과 영화가 사방에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는 연속극이라는 것도 불륜과 부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툭하면 이혼이고 뭐 이혼하는 것을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데 우리가 결혼할 때 뭐라고 약속했습니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사랑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결국은 음심과 탐욕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의 자식들이 교회를 좀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본 모습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도 망하게 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쾌락주의는 쉽게 말하면 좀더 재미있고 신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재미있게 살고 신나게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쾌락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쾌락만 위해서 즐거움만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쾌락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만 즐거운 것이 아닌 다 함께 즐겁고 다 함께 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 즐겁자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데 자기만을 위해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자들이 있기에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주셨는데 저주의 자식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의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상관없습니다. 그게 사회의 독버섯과 같은 존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이요 그러기에 저주의 자식입니다. 이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속이고 또 속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죽음의 길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도 불로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죽는 길인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나라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어야 될 줄 압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웃는 자요 진짜 하늘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미디안 광야에 유명한 점쟁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네 점쟁이들 특히 무당들을 보면 신내림 굿이라고 해서 소위 귀신들려 무당이 되고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그들은 나름대로 신당을 차려놓고 날마다 귀신을 위하며 살아갑니다. 사울 왕이 찾아갔던 여자 점쟁이처럼 미디안 광야에 사는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고 하는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에게 발락 왕이 보낸 신하들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와서 하는 말이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점쟁이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갈까요 말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시죠. 그래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많은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고 청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연히 안 되죠. 그래 안 된다고 돌려보냅니다. 그랬더니 더 많은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다시 부탁을 합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한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 나귀를 타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한데 나귀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꾸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옆걸음만 합니다. 아무리 앞으로 가게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래 지팡이로 때렸더니 나귀가 하는 말이 “왜 때려요?” 합니다. 아니 나귀가 말을 해요. “네가 말을 안 듣고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때리는 거 아냐? 왜 말을 안 들어? 만약 내가 칼을 가졌다면 너 벌써 죽었어.” “아니 지금까지 내가 말을 안 들은 적이 있었어요?” “아니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눈을 밝혀주시는데 보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가 말하기를 “나귀가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내 칼에 죽었어.” 그제야 발람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엎드렸지만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 있어서 발락의 신하들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니 돈은 받았겠다. 그러니 그들에게 꾀를 하나 알려주는데 여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남자들과 사귀도록 만들면 자연히 그들이 망하게 될 거라는 겁니다.
정말 세상에 더러운 것 중의 하나가 돈입니다. 사실은 돈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돈을 더럽게 쓰는 사람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주 하나같이 돈돈돈 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습니까? 발람이 돈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 죽는 줄 모르고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다가 결국 전쟁에 휘말려 죽게 되니 그 돈이 다 뭐란 말입니까? 한데 오늘 우리들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이색적인 방석을 보았습니다. 만 원짜리 돈 모양이 가득하게 인쇄된 방석이었습니다. 처음엔 촌스럽게 왜 돈 문양을 넣었나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돈방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함께 갔던 사람들과 한 바탕 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돈방석에 앉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돈벼락이나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 돼.” “어떻게 해서든지 돈 많이 벌어야 돼!” 하며 애를 씁니다. 아이들에게도 “너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라. 그것이 사는 길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은 우리네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은 삶의 도구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에 이끌려 그 지배를 받고 사는 듯 보입니다. 돈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갑니다. 돈이 일을 시키면 군소리 못하고 합니다. 돈 앞에서는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무릎을 꿇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을, 그것도 가족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짜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명석한 두뇌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아름다운 옷과 액세서리는 살 수 있지만, 훌륭한 인격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좋은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는 할 수 있지만, 교양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과 영생은 살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돈을 지배하는 능력과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돈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돈에서 자유롭기에는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까? 아니 사실은 우리가 가진 것에 비해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능력만큼이 아닌 남들 하는 것만큼 하려고 하기에 더 그렇습니다.
어쨌든 누가 뭘 한다 싶으면 나도 그걸 해야 됩니다. 누가 뭐 좋은 것은 가지고 있다 하면 나도 그것을 가져야 합니다. 남들이 뭘 배운다 하면 나도 그걸 배우고 싶어 합니다. 내가 그걸 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우리네는 지난 세월 지나오면서 체면 문화가 아주 우리 몸과 생각에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냉수만 마시고도 이를 쑤셔야 됩니다.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짝퉁도 유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가짜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시한다고요? 좀 무시를 당한들 어떻습니까?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 매여 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돈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요즘은 좀 힘든 일은 또 안 하려고 합니다. 그저 쉽게 쉽게 돈을 벌려고만 합니다. 한데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누구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지만 사실 황금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하지 황금이 있다면 어찌 황금을 돌 같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모든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석이라는 것 결국 돌덩어리 아닙니까? 조금 더 반짝거린다고 해서 별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금반지도 그렇습니다. 금반지 끼고 있다고 더 달라 보인답니까? 그거 그냥 무시해버리면 됩니다. 그래 돈이 많으면 더 달라질 것은 또 무엇입니까? 좋은 음식도 하루 이틀 아닙니까? 뭐 비싼 옷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 또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보기에 좋고 촉감도 좋겠죠.
그런데 좋은 옷은 또 그러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를 않습니까? 망가질까봐 더러워질까봐 함부로 행동도 못합니다. 그래서 돈은 나를 위해서보다 남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가난한 자 그리고 주의 사자들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거기에 진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는 가운데서 나누는 것도 정말 사람을 복되고 덕스럽게 만들지만 내가 나눌 것이 있기 위해서 수고한다고 할 때 그 수고는 결코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 아닌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줍니다.
발람이 왜 망하고 말았습니까? 돈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 길을 막는데도 그 길로 가기를 고집했습니다. 왜요? 돈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보다 중요한 것은 돈을 어떻게 벌고 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버는 목적도 분명해야 하고 돈을 버는 과정도 옳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돈을 사용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하지만 돈이 있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이 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마치 개가 자기가 먹다가 토해 놓은 것을 다시 집어 먹는 것과 같고 깨끗이 청소해 놓은 우리를 다시 지저분하게 사용하는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돈에 매여 사는 인생이 아닌 돈을 활용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험에 직면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처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물리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혹에 깊이 끌려 들어가기 전에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악과 함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롬13:14 말씀은 우리들에게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래의 예화는 시험을 다루는 두 가지의 길을 보여 주는데. 한 방법은 패배의 길로 인도하고, 다른 방법은 승리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한 소년이 그의 어머니에게, 친구들과 같이 공을 가지고 놀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승낙을 하면서, 놀이터로 가는 도중에 있는 연못에서는 절대로 수영을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집을 나설 때 만약을 생각하여 수영복을 가지고 갔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연못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소년이 무엇을 하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수영복을 미리 가지고 감으로써 시험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소년은, “제가 수박밭 근처를 지날 때 입에서 침이 솟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저는 그곳을 외면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대조적인 태도입니까? 이 소년의 행동은 바울 사도가 젊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 10:13을 보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이 찾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준비하십니다. 그렇지만 피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데 활용하며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 저주의 자식들을 바로 분별하여 날마다 우리의 가진 모든 재물과 기회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
베드로후서 2:12-22 / 도상원 목사
오늘 말씀에 나오는 거짓 선생에 대한 것은 우리 식으로 하면 이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누구인가? 12절 말씀에 보면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이성 없는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일을 비방하고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와 함께 세상의 종말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이 마지막 때에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이 세상의 가치들이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잡혀 죽게 될 것인데 그것도 모르면서, 마치 사냥꾼이 노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동물처럼 여기 좋은 것이 많으니 이리로 오라고 이끄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이단들이 사람들을 속인 결과가 극에 달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힘과 권력이 사람에게 집중되고, 추종자들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성적인 타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4절) 신천지가 요즘 한국에서 난리라고 합니다. 신천지가 14만 4천명이 되면 이만희 교주가 죽지 않고 같이 들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전도를 하도 잘해서 14만 4천명이 넘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요즘에 통계 발표를 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CBS 에서 8부작으로 이들의 이단성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전국적으로 젊은 청년들을 모아서 방송국 본사 앞에 모여 전면전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왜 나쁘냐 하면, 가정을 끊게 합니다. 자기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게 하고 기존 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파괴하려고 연구합니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고 탐욕에 따라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넘어가게 되는 거에요. 이들이 확신이 없으면 넘어지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신앙을 잘 지키도록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발람은 돈을 받고 모압 왕을 위해 축복과 격려의 예언을 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그가 길을 나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크게 노하셨고, 그가 탄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멈춰선 후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 못하는 나귀를 시키셔서 예언자의 미친 행동을 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의 삯을 받은 발람과 같이 세상의 가치와 자기의 욕망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물이 없는 샘이고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17절), 광풍에 사라져버려 실체가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캄캄한 어둠, 심판, 종말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18절). 19절 말씀은 제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그들에게는 자유를 줄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믿는 자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0절 이후에 보면,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빠진 사람들이 누구와 같으냐?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안에 믿음이 굳세지 못한 영혼들, 그리고 우리 안에 물 없는 샘과 같은 혹은 광풍에 부는 안개와 같은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광고를 통해서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실체는 없지만, 참 고급 이단이 있습니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사탄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활동하다가 상대방이 영적 세력의 본질을 알게 되면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 세력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사탄의 계략에 계속 빠져 있게 되지요.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서 뭔지 모르지만 쫓겨다니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이 세대 가운데 악한 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세력입니다. 생각이 굳세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치, 세상의 세계관을 자꾸 집어넣습니다. 어차피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이기적인 개인주의 혹은 뭐 다른 게 없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태도들도 이에 속합니다.
떡 10개 중 2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는 질문에 어떤 아이가 2개라고 답했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먹는 게 남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세상의 가치가 소비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고 선택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씁니다. 내가 무엇을 볼 것이냐, 무엇을 가질 것이냐 등 소비하는 순간에 나 자신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삶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 보다 어떤 물건을 얼마 만큼 시간을 들여서 좋은 것을 사느냐에 대한 마음가짐이 있어요.
이것이 현대 소비사회가 주장하는 이단성입니다. 거기에 빠져서 그게 자유라고 생각하며 살게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마음대로 하고 즐길 것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냐? 주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누려야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하나님을 멀리 하며 영적인 근간이 없으면서 누리는 자유는 물 없는 샘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관계 속에서 참된 영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며 주님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이 아니면 모든 것들은 물 없는 샘이고 헛된 자유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굳건하게 세상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지지 아니하는 이단성을 이기게 할 수 있는 삶의 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예전에는 은혜 받는 것,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 말씀 공부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거룩한 것들을 사모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힘들어요. 그래서 이제 내 마음의 관심은 세상적인 것, 조금 쉬는 것, 노는 것, 건강 지키는 것에만 있어요. 물론 그것들을 지켜야 되지만 그것에만 관심이 있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관심의 전환이 생각의 전환이고, 관심의 전환이 세계관의 전환이에요.
기도를 사모하게 되고 주님의 전 앞에 나가는 것을 사모하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말씀을 보게 되는 것, 이것이 관심이 되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거룩함을 이어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 분야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모으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누릴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 가운데 남은 것은 영적인 열매가 아닌 세속적인 열매가 되겠지요.
원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로 요즘에는 마지막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까 너무나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예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전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극심한 혼돈이 앞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때에 교회는 희망이 될 것인데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으로부터 옵니다. 세상과 과감하게 다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런 것에 관심을 두고 나아가며 점점 더 말씀으로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생각이 말씀에 근거해 있는가?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해주셔서 말씀과 기도, 예배와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벧후 2:20-22
베드로 후서의 저작 의도
베드로후서의 이 구절도 앞선 글 히브리서 10:26-27처럼 언뜻 보면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고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여서 지면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비참한 나중 형편을 이스라엘의 속담에 비유함으로써 그런 뜻을 더욱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수신자가 누구이며, 저작 당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교회가 외부로부터 겪는 핍박에 대해 위로하고 믿음으로 이겨내라 권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서는 교회 내부의 거짓 교사로 인해 분열되고 특별히 도덕적 타락에 빠져 배교하는 일에 대한 경고가 주제입니다.
이 서신에 어떤 지역이나 교회 이름 대신 저자인 베드로로 가름하는 이유는 수신자가 특정하게 제한되지 않고 여러 지역의 모든 신자들이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전서1:1에서 사도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밝혔습니다. 후서도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신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당시 그 지역의 여러 교회가 공통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 서신은 순교 직전 네로 통치의 말기인 AD 66-67년경에 저작된 것으로 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지 한 세대가 채 지나기 전부터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사도가 경고한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합니다.
늦어진 재림
주님의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사도들마저도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한 세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십자가 사건의 직접 목격자들도 많이 죽어 없어졌고 주님의 재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제일 먼저 재림을 대비하라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비난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16)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신속한 재림은 사도들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 사도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자신의 직접적인 목격체험을 들어 반박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천국에서 불러 내려서 대화를 나누는 신령한 모습을 보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1:17,18) 이어서 “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말라”(20,21절)고 합니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오역하여 그릇되게 가르친다고 지적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은 없고 세상만사는 단순히 합리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선동했습니다. 재림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안락과 쾌락을 즐겨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더 이상 정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자유롭고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교인들도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라고 독려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기승을 부리던 영지주의 이단이 이미 교회마다 침투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원을 두는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믿습니다. 물질로 이뤄진 육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부터 악한 데서 나온 것이니까 아무 문제 삼을 것 없으며 영혼만 깨끗하게 유지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아무리 방탕해도 죄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라고 강변합니다. 영혼의 자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바로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것이 그들이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가르치고 실현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정반대 편에서 훼방 대적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이런 가르침에 대해 경고 정죄하며 교인들더러 참 진리인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후서의 2장 전체는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폐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2:2)
‘저희’는 거짓 선생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호색을 하고 있으면서 교인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도 즉,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구원의 길이 훼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교인들이 참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 선생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참 복음을 알면 주님을 좇아서 세상의 멸시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고 이단에 넘어간 자들이니까 덩달아서 호색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10절)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육체를 따라서 - 영지주의 주장대로 육체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특별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배짱 좋게 자기들 고집대로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과 그 모임인 교회를 훼방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3,14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행한 불의의 대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낮에 연락을 취합니다. 향락은 주로 밤에 취하나 아무 염치가 없기에 낮에 온갖 타락을 담대하게 행하는 점과 흠 – 큰 죄를 범합니다. 거기다 너희와 함께 행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런 짓거리를 예사로 행합니다. 쉬지 않고 음행을 행하면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유혹하여 함께 탐욕으로 빠트리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정죄합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18,19절)
거짓교사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합니다. 자기들처럼 방탕하게 즐기는 것이 오히려 율법의 구속과 육체의 욕심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자랑합니다.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 즉,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지만 그런 방탕한 생활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초보 단계의 신자들을 집요하게 음란으로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겨우 피한 자들도 다시 그들 꾐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에 진 사탄의 종으로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
그리고 20-22절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럼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명확한 구분이 없어 약간 모호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 가능성뿐입니다. 이 2장 전체가 거짓교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저희’라는 대명사로 지칭했기에 우선적인 가능성은 거짓교사들입니다. 또 20-22절 본문이 2장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므로 거짓 선생의 꾐에 넘어가 부화뇌동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에게도 함께 경고한 셈입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하니까 마치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타락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의 더러운 삶을 피하려고 예수를 믿어보려 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표현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진리와 대조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궁극적 지식(gnosis)을 알면자유로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진리는 육체가 행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방종하게 쾌락을 추구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드를 알면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고 했습니다. 단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31절) 우선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임을 믿고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에 거(居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원과 심판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런 소망을 품고 항상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 신자는 가장 먼저 지옥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여 죄의 노예 됨에서 풀려나고 성령의 법에 따라 거룩하게 살도록 보호 인도해줍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처럼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을 덧입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있기에 세상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은 물론 죄악의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초기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하여서 참 복음만이 진리이자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고 변증합니다. 그와 동시에 거짓 선생들의 진리와 자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지적 경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더러움에 다시 얽매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들어왔으나 곧바로 이전의 방탕했던 음행과 향락에 다시 빠진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선동과 유혹에 넘어간 믿음이 연약한, 정확히 말해 참 믿음이 생성되지도 않은 구원 밖의 교인들입니다. 베드로의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는 표현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려고 믿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다시 그 더러움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음행 방탕 향락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본문의 ‘저희’는 다시 강조하지만 거짓 선생과 그들과 함께 방탕에 빠진 자들로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구원 얻은 신자가 때때로 윤리적 죄에 넘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과는 상관없는 불신자, 이방인, 이단들을 말합니다. 본문에 이어서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3:2-5)
먼저 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친 복음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말세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주의 재림은 없고 창조 때부터 자연 법칙대로 굴러간다고 속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창조 자체도 ‘부러’ - 의도적으로 잊으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재림이 없으면 음행과 쾌락을 추구한 삶에 대한 심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리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의식과 언행을 행해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멸망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마지막에 전래 속담을 첨부한 까닭은 그들은 처음부터 개와 돼지였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의 부정한 동물의 대표로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의미로 비유했습니다. 개와 돼지가 양이나 소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래 놀던 더러운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신자의 구원 취소와는 전혀 무관하며 교회에 가만히 침투한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주는 경고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입니다.
굳세지 못한 자들에게 다가오는 유혹
벧후 2:12-22 / 조상수 목사
‘팔랑귀’는 “줏대가 없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잘 흔들리는 성질이나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귀가 얇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죠. 귀가 얇은 사람의 특징은 고집은 있으나 철학이 없는 사람입니다. 철학이 없다 보니 독선에 빠지기 쉽고, 사람들이 가까이하기에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죠. 반대로 철학이 있는 사람은 자기 고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약점을 고쳐가고 장점을 키워가는 모습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에 관한 분명한 방향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단과 거짓 교사의 가르침과 말에 대해서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단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야 하는데, 잘못을 알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없다 보니 자기주장과 생각을 내세우게 되고,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쉽게 휩쓸리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의 정체를 숨김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베드로가 누군가를 흉보는 듯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험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단점을 말한다는 것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는듯합니다. 하나는 조심하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험담하는 것입니다. 조심과 험담의 기준을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모호함이 있을 땐 말씀을 찾아 자신만의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합니다(12절). 베드로의 언급은 거짓 교사들이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경험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열매가 없기에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 성숙하고, 도덕적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인 성화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거듭남으로 인해 이전의 모습과 완전히 변한 사람이 뒤섞여 있기에 어떤 사람이 진짜 변화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의 특징을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면서 이것을 가진 사람은 분명 거짓 교사(거짓 그리스도인)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거짓 교사의 특징은 ‘탐욕’을 기본으로 합니다. 13~16절까지의 말씀을 종합하면, 거짓 교사는 불의한 삯을 가지려 노력하고(13절), 탐욕으로 연단(훈련)된 사람입니다(14절). 탐욕의 모습은 발람의 모습과 같고(15절), 미친 선지자 그 자체였습니다(16절). 구약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바로 ‘대가(돈, 물질, 삯)’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가 3장 11절에서는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경고가 없고 잘 될 것이라는 무한 긍정만 이야기하는 설교는 분명 거짓 선지자의 말과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대결을 벌였던 거짓 선지자 하나냐를 기억하십시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말과 듣기 좋아하는 말, 잘 될 거라고 예언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렘 28:15~17).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 택한 자들까지도 미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11; 막 13:22). 종합하면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재물을 아끼지만, 다른 사람의 재물을 착취하려 하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불의의 삯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간지럽히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자신을 비워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세가 항상 준비되어야 하며(빌 2:5~8). 탐욕을 버림으로써 사치와 방탕에서 멀어져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과 선한 양심, 그리고 선한 행실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비워내지 못한다면 ‘저주의 자식(14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말로는 못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이루어 내는 것은 하나도 없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17~19절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앞, 뒤가 다르고 속과 겉이 다른 사람 그 자체로 등장합니다. ‘물 없는 샘(17절)’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목이 마를 때 물 없는 샘을 만나면 화가 납니다. 물이 있는 척만 했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습니다. 진짜 영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하여 말씀을 삶으로 옮겨가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든 그리스도인은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17절)”와 같이 세상 풍조(風潮)에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어 하나님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는 썩어짐과 허무함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가 말씀을 통해 공급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언어와 행위, 선택의 순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결한 지혜로 시작되고 열매 맺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을 향해 ‘개, 돼지(22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욕설과 같은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듣기 거북한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경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한 백성이자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말과 행위에 휘둘리는 것만큼 슬픈 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끊임없이 외치고 외칩니다. 사람과 말씀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회복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라고 말이죠. 우리의 감정, 인간적인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보다 앞서게 되면 죄악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주님의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 말씀을 앞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생각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악함을 물리쳐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