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을 본 지선 씨는 미련을 버리는 대신 그를 계속해서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지선 씨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고, 조심스럽다가 능청스럽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지선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선 씨여서 나는 지선 씨가 영원히 해파리가 아닌 지선 씨로 남게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동시에 나는 이 일을 더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미선이는 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찔렀다.
"엄마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넌 나랑 달라. 그애의 딸이잖아.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야."
할머니는 조용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밝은 밤>, 최은영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눈부신 안부>, 백수린
거기는 낮이겠네, 여긴 밤이고, 니가 볼 땐 어제야.
있잖아.
니가 미국에 간 뒤로는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겠어. 내가 늘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서 그랬나 봐. 넌 어느새 저만큼, 미래에 가 있는데. 인생에도 시차라는 게 있을 거고, 오늘 니가 말한 건 우리 사이에 그만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과거의 목소리는 여기까지만 듣는 걸로 해. 어머니한테 잘하고. 안녕.
<초급 한국어>, 문지혁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
<탱크>, 김희재
“사랑은 학대에 불과합니다. 인간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바로... ”
"바로?"
”...좋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종의 기원담>, 김보영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
그 집에서 한 밤을 자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당신은 희영의 여린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몫>, 최은영
그날따라 다른 아이들처럼 송영달의 턱 장애를 놀렸거나 아니면 평소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놀림받는 송영달을 감싸 주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자신이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일로 날카롭게 깎은 연필을 들고 동급생의 눈을 찌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 일은 송영달이 자신의 본능과 욕구가 무언지 알아보기도 전에 본성을 누르고 죽은 듯이 살게 추동하는 최초의 기억이 되었다.
<고독사 워크숍>, 박지영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첫댓글 헉 너무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