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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를 감싼 밀감의 껍질처럼
갓 쌓인 눈냄새가 우리를 덮어쌌다 살며시
그 차이의 질감이 매혹적이었다, 라면 잘못된 걸까
너무나 달콤해서 연인 외엔 모르는 안온한 빛과 설향
내 혀와 이가 맞닿자 서로가 긴밀해졌다
아, 세상이 높직한 하늘 밑 온통 떨고
아잇적 보드득 밟아 본 티끌 없는 흰 것만치
더러 낙차 크게 내 가슴가로 빠지는, 눈발들 보네
맞붙는 몫만이 내 것이라는 이중창에 곤두선 귀로 붙잡혀있네
단번에 내 세상을 흔들고도 유리창은 물끄러미 바라만보네
그가 몹시 좋아, 나로 하여금 일생이 거두어지기만을 갈망하라고
멸하여지는 눈이 내 사랑만 같아서
외듯 내 입술에서 건져 올리는 혼잣말 하나씩은 네 입술,
하나씩은 네 콧망울, 사랑의 넝마주이,
한데 포갠 둘씩은 눈빛 묻은 이 미치광이 눈발들아……
흩날리는 흰 선에 몸 묶여온 내게, 보다 진눈깨비인
특히나 희어지려 사랑의 백문을 묻는 날
본 척 않고 외마디대답 않는 눈이여
돌아올 수 없는 일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시야와 옷매무시
이틀 허기가 져 살얼음 낀 정경에서 귤정과 내가 났네
나 혼자 헤쳐나오지 못해 어느덧 유리에서의 갇혀짐,
이 빛의 술렁임, 그리하여 열에 떠 펄얼펄펄펄-
예나 이제나 강단 없이 더 얼마를 추워 떨려
내가 가진 숨마저 너 있는 겨울로 들어가 버리겠네
자신의 윤곽을 무너뜨리며
서로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
김윤이, 사랑에 대한 변론
꼬리를 잘라내고 전진하는 도마뱀처럼
생은 뚝뚝 끊기며 간다
어떤 미련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끊어내고
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럼이 없나
한 몸의 사랑을 떠나보내듯 나를 떠나 보내고
한 몸의 기억이 잊히듯 나를 지우고
한 내가 썩고 또 한 내가 문드러지는 동안
잘라낸 마디마다 파문같은 골이 진다
이 흉터들은 영혼에 대한 몸의 조공일까
거을을 보면 몸을 바꾼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언가 잘려나간 자리만 가만가만 만져보는 것이다
심장이 꽃처럼 한 잎 한 잎 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단단히 아프진 않을텐데
몸을 갈아입으면 또 한 마음이 자라느라
저리는 곳이 많다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쳐지는지
수억 광년 살다 터져버리는 별들은 모르지
흉터가 무늬가 되는 이 긴긴 시간동안
난 또 어떤 사랑을 하려
어떤 벌을 받으려
몇 겹의 생을 빌려 입는 것일까
/
정영, 몇 겹의 사랑
이리와 앉아. 무릎 사이로 머리카락 너머로 눈썹 아래 어디로든 네가 올 수 있어.
이상하지. 밀려나 있어도, 다시 돌아갈 곳 없어도 이리 불안하지 않다는 건 말이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너의 뒷목, 내 손등을 스치듯 지나는 너의 몸. 마치 다른 세상 같아서 눈물나.
이 저녁이 오기까지 난 아주 오래 걸었고 지쳐 쓰러질 것 같았어.
오래된 책들의 붉은 그림자에 먼지가 쌓여 있는 방. 먼지조차 고요히 잠들어 있는 방.
내려갈 사다리는 가파르고, 불빛은 나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되지.
네 몸 어디에 나를 주어도 아프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둥근 불빛이 어둔 구석에 자꾸만 몸 부딪혀간다.
바깥은 어둡고, 창문에서 자란 늙은 나무 한 그루 말없이 저녁을 맞고 있을 때 들리던 노랫소리 같은.
참 따뜻하구나, 버려진 것들아. 여기서 몸 뒹굴면 이 불빛,
때로는 갓난아기 같아서 가만히 알아주면 맨살을 환히 드러낸다.
끝내 부치지 못했지만 버릴 수도 없었던 몇 장의 엽서 같은,
귀퉁이가 닳아서 구겨져가던 한시절이 고스란히 살아서 불 밝히는 이 집은 누구인가.
막 어둠에서 건져올렸던 말들도 이제는 죽은 생선처럼 이 저녁을 떠다니지만.
어둠이 깊으니 불빛이 더 따뜻하구나. 까마득히 내가 지워진들 어떠랴.
저 작고 오래된 낡은 의자처럼 어둠 한 켠을 지킬 수 있다면. 물속처럼 깊은 방에서 불빛이 핀다.
/
이승희, 다락방의 불빛을 사랑했지
사랑하는 자는 하나의 장소를 만나고, 다른 계절로 떠나야 한다.
그 사람의 계절은 보다 짧거나 더 강렬하거나 더 느릴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문장에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생을 통해 하나의 계절을 지킬 수는 없다.
계절이란 기억과 시간에 대한 단념의 이름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건 그들이 통과한 계절들의 이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돌아킬 수 없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
/
이광호, 사랑의 미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이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
도종환, 귀가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있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온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둥근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
허수경, 수박
네가 좋아하면 그걸로 됐어
이미 죽은 것이니까
토끼의 심장을 손에 쥐고선 자두처럼 한입 베어 무는 싱거움
모르는 낱말 없는 사전을 들고
다 아는 듯 말하지도 못하는 자랑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열렬하게 실패하는 꿈을 꾸고 싶어
목줄이 힘줄로 팽팽해지는 착각
연습은 이것으로 끝내 볼게
캐치볼을 끝낸 아이들이 잃어버린 공이 되어
바람을 조금씩 빼앗기기 전에
고백은 자꾸 쉬워지고
살면서 기억하게 된 거절들이 매표소에서 편도 기차표를 발권해
어디론가 떠나가게 되면서 돌아오는
내가 싫어 부메랑을 던지면
밀렵을 두려워하는
사냥꾼의 눈동자를 볼 수 있어
그 속에 이름 없는 꽃밭을 일구고
씨앗이 저지른 향기들을 무심코 사랑하게 되자
사서함 속에 넘쳐 나는 빈 엽서들
누가 몰래 쓰고 간 내 이름은
사랑 받으면서 이미 죽어버린 것
알비노를 앓는 토끼 두 눈에 그제야 맛있어 보이는 심장
먹음직스럽게 숨을 쉴 때마다
예뻐지고 위험해지는 나는 너의 악취미
/
서윤후, 취미기술
두 개의 프라이팬을 나눠 들고 우리는 유통기한이 짧은 계절들을 조리했지
올리브유에 젖은 당근과 파프리카를 뒤집을 때마다
상큼함과 고소함 사이에는 마드리드의 폭염이 지글거렸고
배낭 여행자처럼 웅크린 버섯들이 브로콜리 그늘 아래로 줄지어 갔네
우리가 헤어질 겨울에서 헤엄쳐 온 메로 한 마리가 당신의 프라이팬을 사랑했고
그 위로 폭설이 내렸지
생선과 채소를 같이 구우면 안 되는 것은 달과 태양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만큼 자명해서
당신은 달을, 나는 태양을 이용하기로 합의했네
오레가노, 로즈마리, 바질, 페페로치노는 도시 이름이 아니지만
우리는 거기에 혀와 코를 번갈아 투숙시키며 짜고 매운 감정들을 낭비했어
밤의 그을음을 따라 왼쪽으로, 아침의 꽃잎들을 좆아
오른쪽으로 당신과 나는 각각 원을 그리며 접시 위에 노을을 쏟아 부었네
두 개의 프라이팬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면 우리는 하나의 접시 위에서 몸을 포갰지
먹고 마시며 사라져버릴 것들을 사랑하느라
백설탕 엎질러진 선반에 우글거리는 개미들마저 음악으로 들렸네
접시에 담긴 개기일식 속으로 빚은 치즈처럼 늘어져 내렸고
요리는 일종의 여행이라고 당신이 말했고 나는 주방이 야간열차 같다고 대답했어
솥이 끓는 소리로 기차가 달리고 도마 위를 걸어오는 구두굽 소리가 점점 커지면
무뚝뚝한 검표원을 닮은 오븐이 고기와 채소들을 회수해 가니까
향신료들이 세운 도시를 지나 냉동육이 드라이아이스로 빛나는 겨울을 향해 우리는 떠났어
새로운 요리를 시작하겠다는 얘기지
당신의 혀가 가장 예민해질 때, 겨울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고 지난 계절은 싱크대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이 맛있는 냄새를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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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키친 트래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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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것을 찾으려 몸을 웅크리면
어느새 나의 것이었던 것들은 멀리 사라지고
애달픔을 느낄새도 없이 죽은 것이 밀려오는 이 계절
영원을 위해 나는 왜 찰나를 허비하는지
w.우주연합
첫댓글 허수경 시인님의 시는 만나는 것마다 좋네요 누가 왜냐고 물어보면 정확하게 대답하진 못하겠는데 그냥 내려읽다보면 마음이 좀 쿡쿡 아프고 그 아픈게 어쩐지 좋은거 같아요 오늘도 좋은 시들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보내세요!
시를 만난다는 말씀 너무 좋네요.이 찰나의 계절에 잠시나마 시선이 머물수 있어서 기쁩니다:)
좋은 글 좋은 시 항상 감사합니다..^^
글에 대한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항상이라는 부분만 수정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래 봐주셨다면 우선 친목성 댓글은 수정해주세요.)글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저는 좋아하는 것을 알려드리는게 즐거울따름입니다. 메말라가는 문학에 대한 관심도는 동의합니다만,그 관심이 사그러지지만 않는다면 언제고 글은,은은해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으리라 믿습니다.따뜻한 시선으로 글들을 바라봐주세요 잊혀지지않도록.저는 잊혀지지않도록 글을 손에 눈에 건네드릴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많이 지쳤는데 힘이 되네요
금세 지치는 날이 많아요.저는 요즘 저를 사랑해주는 반려동물들과 제가 애정하는 문장들을 보며 힘을 얻곤 합니다.잠시나마 모
힘을 얻으셨다면 좋겠네요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음이 저리는 문장이 많네요. 좋은 말을 만나면 너무 행복한데 제가 요즘 지쳤는지 글들이 많이 저려오네요ㅠㅠ ㅎㅎ 새벽감성때문에 더 그런가ㅠㅜ 좋은 글 감사해요 줌님 !
가뿐하게 일어나셨나요? 저리는 문장들보다 벅찬 문장들로 지친 맘과 일상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기를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