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칼슘우유와 스크류바
"1500원 입니다."
오늘도 소녀는 어김없이 우유를 사갔다.
내가 이 편의점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지도 어느 덧 두달째.
얼굴이 유난히 희고 뽀얀 소녀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항상 4시쯤이 되면 나타나
1000ml의 우유를 고칼슘우유로만 사간다.
행여 고칼슘우유가 없는 날이면 투덜거리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머금고 다른 우유를 집어드는
소녀의 마음속에선 아마도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았다.
문을 열까말까 하다가 열고, 이 우유를 집어들까말까 하다가 집어들고,
계산대로 갈까말까 하다가 이내 나에게 와 계산을 한다.
이런 경우는 2번밖에 없었지만 소녀의 행동은 꼭 관찰하지 않아도 마음이 드러나있었다.
키가 180이 넘는 난 소녀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없었다.
소녀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아담한 키에 유난히도 교복이 잘 어울려 또래 애들과 편의점 길을 그냥 지나칠때도
소녀는 항상 내 눈에 들어온다.
하얀얼굴과 아담한 키. 항상 우유를 사가는데 왜 키는 160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그리고 왜 항상 우유만 사가는 것일까?
목소리도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나의 마음과는 달리 입은 내 뜻대로 되지않았다.
그냥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으며 "1500원 입니다." 라는 말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소녀는 아무말도 하지않는다. 두달동안 매일 봐오면서 소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계산해달라는 말이나 얼마냐는 물음도, 안녕히계세요나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었다.
그냥 1500원만 내밀고 갈 뿐이였다.
이런 소녀의 태도는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루했다.
그러니 난 얼른 소녀에 대해 알아가야만 한다.
나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호기심을 풀기 위해.
오늘은 꼭 말을 건내리라 라고 마음다짐을 하고 4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4시가 조금 넘자 마음은 초조해진다. 평소와 다른 느낌.
이런 느낌으론 오늘도 말을 못 건낼것만 같다.
내 눈은 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분명히 예쁠거야. 그 아이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잖아. 순수할거야.
하얀얼굴과 아담한 키에 딱 맞는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거야.'
기다리던 소녀가 편의점 문을 열며 들어왔다. 오늘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연신 조잘댄다.
까만 머리에 하얀얼굴이 가려져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예뻤다. 조금 높은 톤에 귀엽고도 차분한 목소리.
소녀의 미소도 처음보았다. 소녀의 웃음소리도 처음들어보았다.
그러나 내가 바라던건 이게 아니였다.
소녀의 목소리를 듣게됬다는 건 좋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
이런식으로 소녀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는 사실에 난 실망 한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해 웃는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소녀가 나에게 들려주는 목소리가 듣고싶었다.
나에게 보이는 미소가 보고싶었다. 나를 보며 나 때문에 웃는 모습이 너무 보고싶었다.
소녀는 나에게 다가와 고칼슘우유를 내밀었고 나는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으며 바코드를 찍었
다.
"1500원 입니다."
소녀는 내게 1500원을 내밀었다.
소녀의 통화속에 내 목소리는 묻혀져버린듯하다.
소녀가 나가고 답답한 마음과 정리안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아니, 솔직히 내가 언제 앉았는지 기억조차 나지않는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는 것밖엔.
그 소녀는 뭐지. 나는 소녀의 목소리가, 미소가, 웃음소리가 모두 내게 향하길 바라고있다.
이젠 소녀의 눈물이 궁금해진다. 소녀의 슬픈얼굴이 보고싶어진다.
소녀의 토라진 얼굴도, 놀란 얼굴도 모든게 궁금해진다. 보고싶어진다.
오늘 소녀의 통화하는 모습은 내 마음을 혼돈시켰다. 하지만 이젠 알 수 있다.
소녀의 목소리가 듣고싶었던 내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였음을.
두달동안 한결같이 봐왔던 소녀의 다른면을 보고싶다.
그리고 소녀의 모든게 나만을 향했으면 좋겠다.
이같은 결론에 적잖게 당황한건 나 자신이였다.
아무래도 난 소녀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내일은 꼭 소녀에게 말을 걸리라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가 내일 와서 사갈 고칼슘우유를 정리했다.
아무렇지않던 내 마음은 4시가 다가오자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때문에 내가 원래 소녀를 좋아했던건지, 아니면 어제부터 갑자기 좋아하게된건지
도무지 종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후자는 아닌듯 싶다.
4시가 좀 지나자 소녀가 들어왔다. 문만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하던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해버렸다.
소녀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준다.
오늘은 통화를 하지도 않는다. 이제 말을 걸 수 있다.
소녀는 고칼슘우유를 들고 내게 다가와 계산대에 내밀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1500원을 꺼내 우유 옆으로 내밀었다.
바코드를 찍었다. 말을 건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녀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만 했지, 무슨 말을 건낼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기회는 항상 있겠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는 일.
난 또 그 지루한면서 진정이 되지 않는 초조한 내 마음을 경험하긴 싫다.
"얼굴이 참 하얗네요."
"네?"
나의 물음은 내가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의 '1500원 입니다.' 라는 말도 아닐뿐더러 '왜 항상 우유를 사가는거에요?" 라는
식상한 말도 아니고 '얼굴이 참 하얗네요'라니.
소녀의 놀란 얼굴을 보았다. 한마디였지만 높은음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 아니에요."
취소하고싶다는 생각에 아니라는 말을 내뱉었다. 기분이 나빠졌을까?
소녀는 생각하는 얼굴을 지었다.
"자주 들어요, 얼굴이 하얗다는 말."
무시할거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소녀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녀는 우유를 집어들곤 편의점 한편에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마련 해 둔 곳을 향했
다.
바로 나가지 않는 소녀가 의아했지만 더 오래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안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초조하고 떨린다.
소녀는 의자에 앉아 1000ml짜리 고칼슘 우유를 트고는 한모금 마셨다.
소녀가 우유마시는 모습을 보고 난 할말이 생각났다.
"우유를 많이 마셔서 그런가. 살이 우유처럼 하얀것 같아요."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였지만 이렇게 튀어나와버렸다.
소녀는 나의 말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소녀에게 말을 건낼 땐 두번 세번 생각해보고 건내야겠다.
"오빠는 맨날 스크류바먹죠! 그러니까 입술이 그렇게 빨갛지."
소녀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 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소녀의 토라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스크류바라고 하면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는 아이스크림.
난 내 입술이 빨간것에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여태 스크류바에 얽힌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멍해있던 나는 순간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엉뚱하고 귀여운 소녀이다. 좋아할수밖에 없는 아이.
그런 나의 모습에 소녀는 자신의 복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맘에 안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소녀도 미소를 지으며 웃기 시작했다.
"제 말이 좀 어이없기는 한것 같지만 오빠 말도 만만치 않았어요."
날 오빠라 불러준다. 아깐 스크류바라는 말 때문에 놀라서 오빠라는 말은 제껴버렸지만.
기쁘다. 날 오빠라 불러주고, 이제 소녀의 미소는 나를 향한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소녀는 모두 날 향해 행동해주었다.
나는 오늘도 소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이젠 소녀를 더 이상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소녀의 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엉뚱하고 귀여운 행동, 예쁜 목소리.
이 모든 것을 상상하며 즐겁게 기다린다.
4시가 지나가고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와 난 눈이 마주쳤고 아무말 없이 서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소녀는 고칼슘 우유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코너로 가더니 스크류바 두개를 집어든다.
내게 스크류바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고칼슘우유와 스크류바를 들고 계산대 위해 놓는다.
"2500원 입니다."
소녀는 왼쪽손으로 2500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른족손으론 스크류바 하나를 내민다.
난 웃으며 받아들었다.
소녀도 웃으며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갔고 의자에 앉아 스크류바를 먹는다.
소녀는 이제 고칼슘 우유만 사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도 않는다. 고개를 들어서 날 바라봐준다.
또 계산을 하면 가버리지도 않는다.
내 아르바이트시간이 끝날 6시까지 날 기다려준다.
훗날 난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왜 항상 고칼슘 우유만 샀었던거야?"
"오빠가 키가 크잖아요. 그래서 키 크려고요! 어울리려면 키커야죠."
충분히 날 놀래킬 수 있는 말이였다.
난 이래서 소녀를 좋아하게 됐나보다.
비록 키는 별로 크지 못했지만 소녀는 나와 충분히 어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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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웃기는삐에로] 고칼슘우유와 스크류바
웃기는삐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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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06 01:4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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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재밌네요...-0-... 부럽, 부럽 .- 0-a
넘 부럽네요.. 나도 편의점에서 우유만 사먹을까??ㅋㅋ
둘이 가상캐릭으로하면 정말 잘어울리는 커플이 나올거같아요오;ㅎ
재 밌 다 ㅜ ㅜ . . . . . . . . . . . . 여자애 . . . . . . 캐릭터로 보고싶어 ㅜ0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