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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 7 여호와는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 나 1: 8 범람하는 물
나 1: 7 여호와는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
앞 구절에서 진노의 하나님을 말한 반면에 본 절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을 묘사하여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는 심판으로 멸망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1]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 아도나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부사로 해석되어 '야훼는...질...'(공동번역), '주는 확실한...'(NEB)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2) '토브'가 '아도나이'와 함께 완전한 주술 구조를 갖고 있는 점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을 지지하는 견해 이다.
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바람직한데, 그 이유는 본 절의 내용이 앞뒤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속성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야훼는 선하시다'(Yahweh is good, JB), '주는 선하시다'(The Lord is good, RSV, NASB)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나님 구원의 속성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창조와 구원과 심판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잘못된 것을 구원하시며 잘못 가는 현장을 심판하신다. 언제나 그렇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선택 백성을 괴롭히면 하나님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는 점을 성경의 증거로 우리가 말할 수 있다.
나훔 예언자는 니느웨의 처참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그러한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죗값은 너희들의 멸망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사역자를 선택하시는데 최초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예수님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선언하셨다. 또 성경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 외에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다 무시해 버린다. 아브라함부터 계산하여 그가 열국의 아비라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면서 최초의 사역자 약속을 하였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왜 가라고 합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줄 터인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포해 주셨다.
역사에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가 생기면 그 나라는 망한다.
북한을 보면 6·25동란 이전에 2300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 하나도 없다. 지금 봉수 교회, 칠골 교회는 전시용이므로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자발적인 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국가가 정책적으로 세운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 없애버렸다. 교회를 어렵게 하면 굶어 죽는다. 인류의 역사는 그래왔다.
나 1: 8 범람하는 물 -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
다시 한번 앞 구절과 상반되는 여호와의 속성을 제시하여 극명하게 대조적인 속성을 제시한다.
‘범람하는 물’ 은 파사와 메대와 아라비아와 바벨론 군대가 홍수처럼 밀려와 니느웨를 쓸어버리는 군대의 침략을 말한다.
500년 도읍지, 그렇게 교만하고 자랑스러운 니느웨가 이 연합 군대의 침범으로 인하여 쓸려 버리고 말 것이다.
1]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그곳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코마'를 70인 역에서는 '베카마이브', 즉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로 번역하였고, 어떤 학자는 '반대자'의 의미로 본다(J.Barr.Driver).
이런 견해를 따른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진멸한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메코마'를 지시대명사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비록 '그곳'이 어디인지 문맥상으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아마도 '앗수르의 신전'이라든가 5절에 나오는 '세계'를 가리킬 것으로 보인다.
혹은, 나훔 선지자가 선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니느웨나 그들이 섬기는 여신 이쉬타르(Ishtar)를 가리킬 수도 있다(J. D. W. Watts).
우리는 나훔서의 메시지를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장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를 “우리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고 바꿔 읽어보자.
요나 때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했다. 이것은 사십 일의 유예기간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훔서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임박한 멸망이 선포되고 있다.
나훔서가 기록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성경학자들은 니느웨가 멸망한 기원전 612년 바로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했지만 나훔서의 예언이 너무 긴박하기 때문에 ‘니느웨는 이 예언이 선포되고 곧 멸망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한다.
나훔서 1장 2-7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품은 때에 따라서, 또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첫째,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절을 보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이 말씀은 십계명에도 나온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임을 알려준다.
나훔을 흔히 ‘복수의 예언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언자의 별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성품들 가운데 하나를 잘 말해 주는 별명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는 분이다. 오늘 나는, 우리는, 이 나라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시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이다.
나훔서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첫 번째 성품 앞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다.
3절 앞부분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성경은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34장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민수기 14장 18절에도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15장 15절에서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 때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어서 이제까지 참으셨다. 계속해서 참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노할 것은 노하시고, 벌할 것은 벌하시는 분이다.
출애굽기 34장 7절에는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민수기 14장 18절 뒤에도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계속된다.
셋째, 하나님은 권능이 크시다.
3절을 보면 여호와는 권능이 크다고 하시고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하였고 4절과 5절도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나훔이 ‘니느웨는 곧 망한다!’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심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니느웨는 견고해서 누구도 니느웨를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612년 바벨론의 나보폴라살(Nabopolassar)과 메데의 카악사레스(Cyaxares) 연합군이 니느웨를 침공할 때 티그리스 강의 흐름을 바꿔서 물이 범람하게 해서 니느웨를 점령했다.
8절을 보면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대로 되었다.
3장 17절에는 니느웨를 향해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었듯이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에 멸망당해 1845년 발굴되기까지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권능이 크신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다. 이 사실 앞에 나를 비춰보고 우리를 비춰보고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비춰보기 바란다.
넷째,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이다.
6절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온순한 분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다. 홍수로 심판하실 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의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진노하실 때는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신 악인들을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처벌하신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훔서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네 가지를 살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성품 앞에서 나를 비춰보고, 우리를 비춰보고, 특별히 한국의 현실을 비춰볼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아모스서 7장에는 다림줄의 환상이 나온다. 다림줄은 ‘담이 제대로 되었나?’ 추를 달아 재는 줄이다.
8장에는 아모스가 여름실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여름실과는 ‘끝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상태가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 제2의 요나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 이렇게 선포해야 한다.
나훔서에는 보복, 분노, 심판, 원수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있어서 성경의 이단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훔서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귀한 성경이다.
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민족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요나의 특징은 성경에서 가장 간단한 메시지를 던진 예언자라는 점이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요나의 메시지 핵심이다.
소돔 성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 당했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한국의 의인 열 명으로 살아야 한다.
의인의 삶을 보여야 한다.
2]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하나님은 대적 자들을 물로 쓸고 불로 태우고 그리고 흔적도 없이 처치하실 것이다.
그 도시는 역사 위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며 그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니느웨 성의 역사적 유물은 대형 박물관에 몇 조각 남아 있을 뿐이며 역사상에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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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