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현재 속도 120km. 습관적으로 밟는 속도다.
새벽 3시를 넘긴 시각이라 주행차량들이 별로 없다 보니 직선도로에서는 130을 넘길 때도 있다.
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긴장하여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발은 가속 페달에서 늦춰지지를 않는다.
한강대교 구간을 통과 중이다. 앞으로 5분 안에 강남에 진입해야 한다. 3차선에 주행하는 차량을 지나치기 위해 방어운전으로 경적을 누르려는 순간, 차량이 느닷없이 2차선으로 방향을 튼다. 경적을 길게 울리며 1차선으로 급히 변경하니
3차선으로 다시 들어간다. 지나치며 힐끗 쳐다봤지만 짙은 썬팅이라 운전자 구분이 안 된다.
거리 여유가 있었기에 크게 놀래지는 않았으나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이 ...
자판기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니 쌉싸름한 온기가 퍼지며 조금은 편해지는 거 같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방화동에서 강남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20여km를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아까 같은 일이 발생하면 잠시 쉬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급차선 변경으로 인한 사고 상황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120킬로를 넘는 속도로 달리다 추돌하게 되면 다음 일은 불 보듯 빤한 일.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과속 하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달려야만 속이 후련하다.
대형트럭이 옆에만 와도 겁이 났었는데 불과 2년 여 사이에 참 많이도 변한 거 같다. 시간을 단축시켜 몇 푼 더 벌자는 생각도 있으나 무언가 모를 갑갑함으로 인해 속도를 자꾸만 높이게 된다. 뭐라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안에 쌓인 그 무엇.
“차 운행합니까?” 말쑥한 양복 차림의 남성이다. 전해지는 이미지가 직장인인 거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잠시 쉬고 싶었지만 손님도 드문 시간인지라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다. “네, 타세요.” 아쉬움에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운전석에 앉았다.
잔잔한 여운 없이 마시다 보니 커피를 마신 거 같지가 않다. 강남으로 복귀해서 다시 한 잔 마셔야 할 거 같다.
분당까지 간다고 한다. 올림픽대로를 타다가 수서~분당 간 도시고속화 도로를 접속하면 강남으로 복귀하기까지 30분 잡고 이만오천 원 가량 수입금이 추가된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장거리 손님 연결이 잘되는 편이다.
가속페달을 깊이 밟으며 달리는데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달리는 속도가 남자 이상이네요.” “아~네, 그래도 안전하게 운행하니 염려마세요.” 웃음 섞인 목소리로 여유롭게 말을 받고 있다.
종종 듣는 얘기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었다. 여성스러움은 하나도 안 보인다는 말로 들렸었다.
아니, 몇 푼 더 벌기위해 위험을 무릅쓴 이 상황이 더 가슴을 찔렀었는지도 모른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현재 속도 120km. 조금만 더 가면 수서~분당 간 도시고속화 도로에 진입한다.
이제부터 10분 남짓에 손님을 내려놓고 다시 강남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금 더 깊이 가속페달을 밟는데 운전을 잘한다며 말을 붙여온다. 가벼운 웃음으로 응대했다. 그 잘난 거스름돈이라도 팁으로 받으려면 냉랭하게 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말을 받아주면 이거저거 물어오기에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애매한 짧은 웃음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차창을 조금 여니 11월의 차가운 공기가 스쳐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댄다.
몹시 거슬리는 소음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은 압박감이 덜어지는 거 같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밀폐된 공간에서 남자 승객과 단 둘이 함께 한다는 것이 때론 알지 못할 부담스러움을 전하다.
내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 같기도 하고 무언가 편치 않은 억눌림이 있다. 전방을 주시하며 달리는데 앞에서 주행하던 차들이 갑자기 브레이크등을 밝히며 속도를 줄인다.
나도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내리막길이다 보니 옆 차선으로 길게 늘어선 붉은 행렬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고의 신비를 담은 검붉은 용암이 장엄하게 흐르는 거 같다.
조금만 더 가면 성남으로 빠지는 곳이 있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 여기서 멈추면 꼼짝 없이 제자리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사고 난 건가요?” “글쎄요, 왜 그러지?” 모든 차선의 차량들이 일체 진행을 못하고 서있다. 교통방송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 손님 연결이 잘 돼서 다행이다 했는데 막판에 어그러지는 건지 ...
“엄마, 나 책 사야하는데 ..." 집을 나설 때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말을 꺼내며 내 표정을 살폈다.
쾌활하게 행동하던 아이였었는데 언제부턴가 돈 들어 갈 일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핀다.
아이 앞에서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는데도 어려운 사정을 어느 정도 알아 챈 거 같다.
아이 하나 기를 못 세워 주는 지금의 상황.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리고 밝게 웃었다. “어구~, 이쁜 우리 강아지. 알았어, 엄마가 내일 사줄게.” 언제까지나 안 그런 척 할 수만은 없는 일. 차라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게 웃으며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었다.
“택시운전 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기분 좋게 들릴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말이다. 짧게 웃으며 응대했지만 지금 그 말은 나에게 서글픔으로 다가올 뿐이다. 오늘 당장 딸아이 책을 사줘야 하는데 꼼짝 않고 차가 멈춰있으니 속만 탄다.
어제 신장 투석하고 남편 퇴원시키느라 돈을 다 썼기에 오늘 벌어서 책도 사주고 찬거리도 사야 한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니 답답하기만 하다. 차가 서있어도 요금은 올라가지만 시간 대비 주행요금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타는 속을 달래려 운전석 차창을 다 내렸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얼굴을 스쳐도 초조함으로 상기된 얼굴은 식을 줄을 모른다. 폐 깊은 곳 모든 상심이 저절로 코를 통해 밀려나온다.
“오늘 영업은 잘되셨나요?" 그런대로 됐었는데 끝이 안 좋다고 했더니 자기 얘기 좀 들어달란다.
이상하게 생각 말라며 오늘 수입은 자신이 보충해 줄 테니 자문 좀 해달라고 한다.
그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실어 날랐지만 대부분 이런 얘기를 꺼내는 속내는 다 빤하다.
갖가지 형태로 접근하여 어찌해볼까 하는 속셈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 서있으니 얘기를 들어줘도 손해 볼 거는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왠지 신뢰감으로 다가와 얘기한다며 서두를 꺼낸다.
주행 중이 아니라 시끄럽지도 않은데 무슨 큰 비밀이라도 새 나가는 듯 창문을 올려달란다.
속에서 흥, 하는 콧소리가 날카로운데 들리는지 모르겠다. 주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갑갑함이 있어 얘기한단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많은 39.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중견 기업체 차장이다.
승진도 빨리한 편이라 이제는 부장승진을 기다린다고 한다.
묻지도 않은 신상을 자세히 말하는 게 과시를 하는 건지 믿음을 주겠다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직장에 얽매이면서도 나름으로 낙서를 즐기다 보니 틈틈이 컴에 접속해 블로그(blog) 활동을 한다 했다.
블로그 활동을 하며 흐름을 같이하는 공간들을 드나들던 중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집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여인.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블로그에 올리는 감성적인 글들에 끌려 자주 댓글을 남기다보니 가까워졌단다. 그렇고 그런 얘기일 거라 예상했지만 블로그 얘기가 나오며 내 귀도 솔깃해졌다. 결코, 나와도 무관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거추장스런 짐만 될 뿐. 존재의 의미만으로 진정 행복을 줄 수 있는가.
과연, 이 버거운 숨을 이어가는 것이 아내와 딸아이를 위하는 길인가 ...' 남편의 긴 글을 읽어가는 동안 심장 뛰는 소리에 머릿속 전체가 울렸다.
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 밖으로 새 나갈 것만 같았다. 숨 또한 어찌 못할 겨움으로 거칠게 소리 내며 뿜어졌다.
그건 한 인간의 처절한 독백이었고 울부짖음이었다.
사치스런 갈등이 아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한 인간의 비애 담긴 독백이었다. 글을 읽으며 눈물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이제껏 사는 동안 그렇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현재 상황이 마음 편할 리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막다른 길에서 고통스러워하는지는 몰랐었다.
아이가 컴퓨터에 접속하는 상황들을 살피려, 컴퓨터 화면 상단 주소록에 남겨진 흔적들을 살피던 중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블로그. 그곳에는 남편의 가쁜 신음소리가 녹음된 듯 생생하게 그대로 담겨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메일을 주고받다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고 몇 차례 만나서 식사도 같이 하였다고 한다. 글에 관한 이야기와 살아가는 얘기들을 나누며 오랜 친구처럼 좋은 시간을 보냈다 했다. 그렇게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긴 메일 한 통을 받았단다. 좋은 시간들이었지만 홀로된 자신의 모습이 비교되며 마음이 편치 않아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 같다는 내용.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지만 이해해 달라는 말뿐이었다 한다. “꼭 그래야만 마음 편할 수 있었을까요?” 남편 생각과 겹치며 귀로 들려오는 얘기. 갑자기 안에서 묘한 꿈틀거림이 인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백미러로 쳐다보니 처음과 달리 멀끔한 인상이 얄밉게만 보인다. 모든 거 다 갖춘 당신은 즐기는 마음이겠으나 상대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그렇게 몰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다 꼭 다문 입술에 가로막혀 어쩔 줄을 모른다. 달리 생각 할 수도 있겠으나 부글대는 마음은 아마도 남편의 상황과 비교되며 그랬을 것이다. 남편은 건축자재상을 운영했었다. 성격도 좋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거래처는 늘어나며 잘됐었다. 그게 문제였다. 욕심을 내며 좀 더 큰 거래처를 찾던 중 왠만큼 알려진 중견 건설하청업체에 자재를 납품하게 되었었다. 모든 것이 순풍 만난 돛배처럼 보였으나 몰아치는 폭풍우로 전복되기에는 1년도 채 걸리지를 않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건설업체의 부도. 그리고 하청업체와 납품업체들의 줄 이은 연쇄 부도.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남은 건 빚더미와 남편의 건강 악화 뿐. 그런 일만 없었다면 남편도 당신 이상으로 인생을 여유롭게 즐길 사람이라는 생각이 밀려들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토해진다. 그렇다고 생각 그대로 말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속만 답답하다. 그 잘난 놈의 돈 몇 푼 ... 얘기를 다 듣고 나면 나름으로 뭐라 얘기를 해줘야 할 텐데 얘기를 들으면서도 속이 편치 않으니 뭐라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럽기까지 하다. 백미러로 다시 쳐다보니 볼수록 더 얄밉게 생겼다. “혹, 살을 맞대신 적 있나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질문에 아차, 하는 ... “네? 아~, 그건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하하~” 슬며시 빠져나갈 게 뻔한 질문을 괜히 했다는 자책이 들었지만 속을 좀 더 파헤쳐보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궁금증은 결코 아니다. 남편과 비교되는 이 사람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며 나름으로 위안을 삼고 싶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 내 속 시원하게 속물 취급하며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러고 싶어도 그것만으로는 내 속이 풀리지가 않을 거 같았다. “이런 질문 뭐하지만 ... 댁에서 별다른 문제는 없는 거 같은데 왜 만나신 거지요?” 궁지로 몰아넣어야만 직성이 풀릴 거 같은 생각에 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시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랄까요? 그렇게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 “원죄라 ... 본인에 대한 답이 아닌 포괄적인 말이네요.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제 자신에 국한된 부끄러운 변명이겠지요. 다만, 이 한가지만은 말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쾌락이 아닌 마음 깊이 자리한 사람으로, 어찌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인연으로 받아들여졌다는 ... 결코 정당성을 부여받지는 못하겠지만요.” 주변 불빛에 드러난 어둑한 모습이지만 백미러에 담긴 표정은 얼핏 보기에도 진지한 듯 보였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어조 또한 각 개인의 파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차분하게 이어지는 어조가 인간적인 갈등 담긴 진솔한 독백의 리듬으로 들려왔다. 몇 마디가 오가며 아주 파렴치한 인간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죄라는 말이 나오며나도 모르게 숨이 깊어진다. 원죄 ... 사람으로 태어난 원죄.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신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며 걸음 하는 나날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망정 그 근원을 벗어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나 또한, 결코 자유롭다 못할 ...
작년 가을 무렵,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비가 와서 일찍 귀가들을 했는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속을 태우며 다니던 중 논현동에서 탑승한 승객. 신사동까지 가는 손님이었다. 삼천 원 정도의 거리다. 세상을 온통 물속에 잠기게 할 양으로 거칠게 퍼붓는 빗속을 주행하는데 진로를 변경하라 했다. 속이 답답해서 그러니 신호 안 걸리는 강변도로나 올림픽대로를 타고 달리라는 말. 백미러로 쳐다보니 말썽을 일으킬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구간은 말해달라고 하니,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그만 달리라고 할 때까지 계속 달리라 했다. 손님도 없는데 잘됐다 생각하며 5분 정도를 달리는데 여의도 선착장으로 가달라고 했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요금은 만 이천 원가량 나왔는데 이만 원을 건네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 했다.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겠느냐 물으니 옅은 미소와 함께 짧은 대답을 남긴 채 내렸다. 선착장 끝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며 내뿜는 담배연기.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자신만의 퍼포먼스로 흩어졌다. 무슨 사연일까, 라는 궁금증과 함께 번지는 연민.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담배를 다 피웠는데도 그대로 빗속에 서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많이 젖었을 거란 생각까지 들 상황이었다. 상향등을 깜박거려 어서 오라는 사인을 보내고 싶었으나 마음만 그럴 뿐.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걸어오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차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차에 타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짓는 희미한 미소가 회색 안개로 백미러에 그득 담겼다. "저 ... 이거 ..." 잠시 비를 터는 듯 하드니 말끝을 흐리며 건네는 십만 원 권 수표 두 장. "이게 뭐지요?" “그냥 ... 술 한잔 같이 하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며 두 사람 다 요란한 빗소리만을 귀에 담아야 했다.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끊고 맺는 편이었으나 그 때는 정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긍정도 그 어떠한 부정도. 돈은 둘째 문제였다. 돈을 떠난 그 어떤 미세한 떨림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 안에 쌓였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꿈틀거리는 거 같았다. 숨소리도 멈춘 듯한 차 안의 정적과 힘찬 빗줄기의 절묘한 앙상블. 그 화음을 깨트려서는 절대 안 되기라도 하는 듯이 차조차도 숨죽이며 빗속을 조용히 미끄러져 갔다.
“홀로된 것이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될까요?” 백미러로 쳐다보지는 않았으나 숨을 깊이 내쉬며 이어지는 말에는 안타까움 섞인 아쉬움이 가득했다. 남편과 비교되며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며, 무조건 깎아내리려 하기 보다는 이해시키고 보다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진지하게 얘기를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다른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만 짧게 말씀드릴게요. 서로가 좋은 느낌으로 만났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을 다 갖춘 선생님과의 만남이 상대방에게는 겨웠을지도 몰라요. 그 어떤 문제보다도 혼자라는 상황이 크게 작용했을 거예요.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선생님은 즐기는 것이고 상대방은 선생님께 전념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면 본인에게는 서글픈 일이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꼭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지 ...” 또 다시 숨을 길게 내쉬며 말끝을 흐린다. 속마음은 어떠한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상심에 가까운 느낌으로 전달된다. 20여분동안 꼼짝 않던 차량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성남 나들목으로 차들이 빠지는 거 같다. “아무래도 성남으로 빠져서 가야 같네요.” “네,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런데, 제 얘기만 한 거 같은데 본인 얘기도 좀 하시지요?” 별로 흥미 있는 얘기꺼리가 없다며 웃음으로 말을 받았지만 어찌 할 얘기가 없을까. 속에 쌓인 얘기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얘기를 꺼내자면 눈물부터 흐를지도 모르기에 그 어느 것도 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성남시내로 들어서니 늦은 시간이라 차들이 별로 없기에 가속페달을 깊이 밟으며 달렸다. 도시고속화 도로에서 지체한 시간이 20여분. 성남시내로 우회하며 지체되는 시간까지 총 30분 정도 허비되는 건데 얼마나 돈을 더 얹어줄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승객이 사람이 아닌 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기본요금인 천구백 원짜리. 서글픈 일이지만 그 어느 누구라도 돈 계산이 먼저 앞설 뿐이다. 힘든 일 할지라도 화목한 가정을 꾸릴 거 같다 하기에 가볍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아린 통증이 밀려든다. 그런대로 밝은 성격이기에 힘든 나날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었는데 요즘은 자꾸 가라앉는 거 같다. 남편의 글들을 읽고 난 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라며 기운을 돋워주려 애썼지만 그리 밝은 표정을 볼 수가 없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 그것은 블로그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 상황 설정을 하여 남편 블로그에 자주 댓글을 남겼다. 댓글 란은 열어놨으나 답 글을 전혀 달지를 않았다. 답 글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게 비공개로 계속 댓글을 남겼었다. 서로 의지하며 힘을 내자는 내용의 댓글. 그렇게 2개월가량 지났을 때 처음으로 남편의 답 글이 올려졌다. 힘을 내겠다는 말과 함께 알게 되어 반갑다는 말. 그 후로 자주 오가며 글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도 했었는데 거기에는 의외의 웃음 섞인 답 글이 적혀있었다.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고 더구나 이성이다 보니 나름의 마음을 열 수도 있을 거라 이해했었다. 그렇게라도 마음 안정을 찾는 남편에 마음이 놓였었다. 하지만, 웃음 섞인 답 글이 이어질수록 가슴 한켠 싸한 기운이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렇게 애썼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인데 ... 오늘도 택시 운행하기 전 피시방에 들러, 벌레 먹어 숭숭 구멍 난 낙엽들이 바람에 흩어지며 가슴을 더 아리게 한다는 글을 남겼다. 마무리는 웃음 섞인 밝은 내용으로 했다. 어떤 답 글이 올라올지 무척 궁금하다. "그대로 받아들여야겠지요?" “네? 아 네, 아무래도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지금은 전혀 연락을 주고받지 않나요?” “네, 블로그 상에서만 좋은 친구로 지내자 하더군요. 부디, 좋은 인연 만나서 편안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네 ..." 상대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받아들인다 해도 어찌 아쉬움이 없을까. 긴 숨을 내쉬며 하는 나직한 말에는 허탈감이 배어있었다. 가정과 직장 그 어느 것에도 문제가 없는 사람의 그리움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 사람의 내면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진심어린 상대에 대한 기원이라면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렸다. 시내구간을 통과할 때 신호에 걸리면 엄청 오래 걸리는 거 같은 느낌이다. 사고로 시간을 흘리다 보니 조급한 마음이 더 하다. 강남으로 다시 복귀하면 4시가 넘을 텐데 손님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속력을 내며 달리는데 굵은 빗줄기가 갑자기 쏟아진다. 가을 끝 무렵에 내리는 비 치고는 제법 거칠게 내린다. 얼마 되지 않아서 앞서가는 차량의 물보라가 흩어지며 분위기를 연출한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무대장치가 순식간에 바뀐 거 같다. 그 분위기에 맞추려는 듯 교통방송에서 ‘조항조’ 의 ‘거짓말’이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사랑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 돌아온다던 그 말도 거짓말 ... 세상에 모든 거짓말 다 해놓고 ...' 노래 가사는 여자에게 더 파고들 내용이지만 남자들도 술 생각이 날만큼 귀를 적시는 리듬이다. 젖은 듯 힘없이 부르는 가수의 음색이 가슴을 한층 더 촉촉하게 한다. 차창에 부딪치며 흩어지는 빗방울과 장단이라도 맞추려는 듯 노래반주가 출렁이며 넘실댄다. 약간의 어색함이 있었는데 볼륨을 좀 높여 달라 해서 약간 크게 했더니 한결 나아지는 거 같다. 왠지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며 말을 하기에 노래 잘 부르나보다고 말을 받았다. 흐르는 노래 때문에 조금은 편안해져서인지 자연스럽게 나도 말을 잇고 있다. 와이퍼도 함께 하는 듯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거린다. “저기서 잠시만 세워주세요.” 호프집 옆에 커피 자판기가 있으니 잠시 세워 달라고 한다. 집은 이번 사거리 지나서 바로인데 커피 한 잔 하고 들어가고 싶다며 내 것도 한 잔 뽑아 온단다. 차를 세우며 나는 됐다고 했는데도 비를 맞으며 기어이 두 잔을 가져온다. 아까 커피를 마시다 말았기도 했지만 호의 섞인 행동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나온 요금에 얼마를 더 얹어줄지 계산이 앞서는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깊어지는 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블랙으로 가져왔다며 건네는 커피 향이 그런대로 괜찮다. 빗줄기가 뿌리는 날 차 안에서 마시는 커피는 향이 더 짙게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따스하게 전해지는 온기는 또 다른 것도 전하는 모양이다. 알 수 없는 묘한 흐름도 함께 ...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본인 얘기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좀 밉네요. 하하~" "정말, 별 얘기꺼리가 없어요. 죄송해요." 장난스레 하는 말이지만 불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백미러로 보이는 웃는 표정도 아까와는 다른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얘기를 나누는 사이 보이지 않는 파장이 어느 정도 겹친 것일까? 커피를 마시며 웃음 섞인 말을 주고받는 지금,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아닌 낯익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이제는 약간의 긴장까지 더해지는 거 같다. 아니, 긴장이라기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좀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거절의 결정은 이미 내려놓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떠한 뜻을 비쳐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절할 것이라는 결정을 준비해놓고도 상대방이 속내 꺼내 놓기를 바라는 이 유치찬란한 이기심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 주 토요일에 대전 내려갈 일이 있다며 그날 운행하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차를 몰고 가면 피곤해서 열차를 이용할까 했는데 마침 잘 됐다며 내 차를 이용하고 싶다 한다. 내 차가 아닌 나와 함께 내려가고 싶다는 뜻일 확률이 높다. 원하는 말을 들은 것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또 무얼까? 마치, 어떤 기대를 져 버린 거 같은 ... “핸드폰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폰 번호를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전날 연락하겠노라고 명함을 달라 했다. 명함과 함께 십만 원 권 수표 한 장을 건넨다. 비가 가늘어진 거 같다며 여기서 내려 걸어가겠다 한다. 시간이 지체되다 보니 나온 요금은 삼 만 팔천 원이다. 얼마를 거슬러 줘야할지 몰라 일단 돈을 세는데 다 받으란다. 돈도 별로 없지만 자기 얘기를 들어준 고마움의 표시라 했다. 너무 많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이번 금요일에 꼭 연락을 달라고 한다. 연락하겠노라 대답했다. 문을 열고 내리는데 남성 특유의 향이 콧속으로 파고든다. 저절로 숨이 깊게 들이쉬어졌다. 뇌세포 깊숙이 향이 담기는 거 같다. 잠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출발하여 옆을 지나치는데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
강남으로 다시 복귀하기위해 수서~분당 간 고속화도로를 달리고 있다. 오늘 수입도 괜찮고 해서 기분은 좋은데 또 다른 복잡함으로 머릿속이 어수선하다. 계기판 하단에 놓인 명함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수입을 생각하면 당연히 대전에 가야하겠으나 지금 무엇 때문에 머리가 아픈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떠한 생각으로 내 차를 이용하겠다는 지는 정확히 모른다. 설사, 다른 생각으로 그런다 치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하면 되는데 뭐를 주저하는 건지.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나 자신도 어찌 못할 흔들림이 있을까봐 두려운 건 아닐까?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은 한동안 나를 짓눌렀었다. 남편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을 정도로 죄책감과 자괴감에 힘들어 해야 했다. 나 자신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다며 남편 탓으로 돌려보려고도 했었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마음을 편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내 자신을 괴롭히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아직도 여러 혼란이 뒤섞이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기까지 하다. 답답함에 차창을 절반정도 내리니 찬 공기가 밀려들며 시원스럽다. 속 깊은 곳까지 청량해지는 거 같다. 속도계를 보니 120에 가깝다. 노면도 젖었고 굴곡진 구간이라 위험하다는 생각에 급히 발을 옮겨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그래, 그런지도 모른다. 식지 않는 내 안의 뜨거운 열기를 나 혼자 어찌 못해 무의식적으로 가속페달을 깊이 밟는지도 모른다. 결코, 시간 단축시키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 못할 내 안에 뭉친 뜨거움으로 인하여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을 밟아대는 지도 모른다. 대전으로 내려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높이니 'Tammy Wynette'의 'stand by your man'이 흐르며 바람소리와 섞여 조화를 이룬다.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진정 그를 사랑한다면 곁에 머물며 두 팔로 감싸 안아주라는, 메시지도 좋고 편안함을 전하는 곡이다. 곡을 제대로 들으려 차창을 올리고 볼륨을 더 높였다. 들을수록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노래다. 곡이 끝나고 이어지는 진행자의 멘트. 진정한 사랑은 믿음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 나도 모르게 숨이 몰아쉬어지며 입술이 일자로 굳게 물린다. 또 다시 머릿속이 어지럽다. 어찌 해야 할지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편할 거 같았다. 숨을 깊이 들이다 짧게 끊으며 왼 손으로 명함을 집었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후, 차창을 내리고 밖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명함. 손가락에는 아직도 힘이 들어가 있다. 무언가 모를 미련으로 선뜻 놓지 못하는 거 같다. 손가락에 힘을 서서히 빼니 명함이 순식간에 손을 벗어난다. 창을 올리고 가속 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높아지는 가속 음이 웅장한 리듬으로 무척이나 힘차게 들려온다.
아이 책 사줄 생각에 차가운 새벽공기가 상큼하기까지 하다. 오랜만에 피자도 한 판 시켜줄까 하는 생각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날마다 이랬으면 참 좋으련만. 여하튼, 오늘은 발걸음도 가볍고 기분 좋은 날이다. 곧바로 집으로 들어갈까 했으나 남편이 올렸을 답 글이 궁금하여 그냥 들어갈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위장했다 해도 10년이란 세월을 함께한 사람인데 컴 속에서 주고받는 글들은 야릇한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는 듯도 하고 알 수 없는 일렁임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와 비례한 상실감도 있지만 ...
5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몇 사람이 컴 앞에 앉아있다. 그 중에 얼핏 옆모습이 30대로 보이는 여성도 한 명 있다. 나까지 여성이 두 명. 무슨 일로 이 시간까지 컴 앞에 앉아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컴을 켜는데 부팅 속도가 무척 느리다. 아니, 그만큼 내 마음이 급한 것이라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남편 블로그 주소를 입력하고 엔터. 블로그 화면이 열리는 짧은 시간에도 가슴이 잔잔하지만은 않다. 긴장이랄 거 까지는 없지만 올려진 답 글이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다. 답 글 달린 페이지를 열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벌레 먹어 숭숭 구멍난 낙엽들 ... 그 말씀에 속 깊은 곳 붉은 핏덩이가 울컥 토해지는군요. 전생에 무슨 업을 남겼길래 이런 고통에 휩싸여야 하는지, 과연 이 힘겨운 시간들의 끝은 올 것인지 ... 좋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다 좋습니다. 저 감히 이런 말씀드려봅니다. 만나 뵙고 싶습니다. 보기 흉한 몰골이겠으나 더 이상 문드러지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하고 싶습니다. 부디, 마주하고 서로 위로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만을 ...’ 답 글을 읽는 순간 갑자기 윙, 하는 이명이 울린다.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띵하기까지 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를 않는다. 글자들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모든 것이 뿌옇기만 하다. 분명,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어딘지 모를 아주 깊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피곤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깊이를 전혀 알 수 없는 아주 깊은 곳으로 한없이 꺼져가는 거 같다. 오히려 편안하기조차 하다. 어디선가 울림이 전해진다. 희미하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깊은 울림. 내 심장 박동인 듯도 하고, 그 어느 먼 기억 속의 빛조차 필요 없었던 아늑한 공간에서 들었을 거 같기도 한 울림소리. 너무도 평온한 울림이다. 그 평온에 온 몸을 맡기려는 순간, 얼굴을 스치는 바람 한줄기. 바람에 실려 왔을까?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중 삼중으로 겹치며 웅웅거린다.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랄까요?" 원죄 ... 원죄 ... 원죄 ... <終>
[당선소감]
폐 속 깊숙이 숨을 몰아쉬어본다. 이제껏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들로 숨 거칠던 나날들. 열심히 주어진 대로 달려왔건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로 늘 허전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주어진 역할과 의무만으로 명을 다한다면 너무도 허망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랬다. 촌음으로 스쳐가는 세상과 인연을 다하는 날, 위안의 미소 한자락쯤은 자신에게 남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고 뾰족한 산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야 하겠으나 남겨진 나의 생 모두를 쏟아 조금의 후회도 없는 길을 걸어볼 것이다.
부족한 사람에게 손길을 건네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저 높은 곳에서 미소 짓고 계실 아버님께 이 기쁨을 바친다.
[프로필] 고려대학교 수학과 중퇴 현 KCU 한국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신입학 |
첫댓글 멋진 아줌마에게 박수를......
짝짝짝 ... 힘찬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