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계속돼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춥습니다. 아픈 곳은 없는데 입맛이 없고 쓸쓸합니다. 카톡이나 전화를 하면 더 심란하고 고독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에스더의 장점은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고 평점 심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비보다 한 수 위입니다. 역대급 '낯섦'을 경험한 이후 거울 앞에 선 느낌입니다. 에예공! 니 엄마 반응이 궁금해!
-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입니다. 그는 미국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핵 무기를 개발하는 이론 기술 분야 최고 책임자 역할을 맡아 아인슈타인 외 6000명의 연구원을 이끌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인물입니다. 이들이 개발한 핵폭탄은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내게 했지만 이때 핵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접한 오펜하이머는 핵 무기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
미국은 1950년부터 당시 소련을 상대로 다시 핵폭탄을 투여하는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해요.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원자력위원회 자문위원회 의장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소폭탄 연구를 방해했어요. 하지만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반핵 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던 오펜하이머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1954년 4~5월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19번의 비밀회의를 걸쳐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을 철회합니다.
-
이후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 됐고 그의 경력을 끝낸 사건이 됩니다. 미국의 과학 영웅이었던 그는 여생을 처량하게 보내다 1967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2014년 당시 미국 오바마 정부는 비밀 청문회에서 기밀 해제된 수백 쪽에 달하는 문서를 공개하며 오펜하이머가 결코 국가에 불충 성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기밀 해제된 문서를 연구한 역사학자들과 핵 전문가들은 이 문서가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고 되레 무죄를 입증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
영화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오펜하이머 역은 킬리언 머피가 맡았습니다. 원자탄 개발의 두 인물 중 아인슈타인은 작곡가, 오펜하이머는 지휘자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인터스텔라, 테넷 등을 보고 놀란에 대해 많이 실망한 상태였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이번 영화에도 과학 이야기가 들어가 있어서 우려를 많이 했었는데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
내가 FS 영화를 싫어하는데 공부하는 느낌으로 본 영화치고는 월척입니다. 놀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출연했는데 누구 하나 버릴 것 없이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킬리언 머피,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제이슨 클락, 게리 올드먼, 라미 말렉…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요. 그중 가장 돋보였던 인물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입니다. 아직 로다주를 보면 아이언 맨이 바로 떠오릅니다.
-
오펜하이머에서는 아이언 맨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스트로스 그 자체가 되어서 명연기를 펼쳤습니다. 로다주의 연기력은 후반부로 갈수록 빛을 발하는데 오펜하이머에게 열등감을 드러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그의 연기력이 최고조에 오른 장면이었습니다. 여러 영화적인 연출 또한 최상급이었는데요. 불필요한 노출이라는 지적이 있었던 플로렌스 퓨의 노출 장면은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오펜하이머의 심정이 스크린 너머로도 매우 잘 전달이 되었다고 봅니다. 트리니티 실험 때 폭탄이 터지는 장면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굉음이나 화려한 시각적 효과보다 적막이 흐르면서 숨소리만 들리고 엄청난 밝기의 빛을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비추는 연출은 왜 놀란이 고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던 대목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이후 사람들 앞에서 오펜하이머가 연설을 하는 장면 또한 압권이었습니다.
-
고조되는 분위기, 광기 어린 사람들의 모습, 대중이 듣고 싶던 말을 하는 오펜하이머의 대사와 이에 대조되는 면으로 고뇌에 빠진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에 맞은 듯 열 화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놀란 아니면 현시대에 누가 이런 연출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정말 감탄하면서 보았습니다. 에예공! 아비가 이번엔 영화 평을 위한 글이 아닌 오펜 하우어 vs 아인슈타인(1879-1955)의 인물 차이를 살펴보고 싶었다. 물론 영화 한 편으로 인물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
둘 다 탁월한 과학자였지만 심지어 파트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이름도 명예도 아인슈타인과 하늘땅 차이를 벌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 두 사람이 핵무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 말고, 핵무기의 사용 경과를 보고 앞으로 일어날 우려 상황을 타개하고자 누가 더 노력했냐는 것이다. 사실 난 세계 평화에 큰 관심은 없고 누가 행복 지수가 높은 생을 살았는가 궁금할 뿐이다. 에예공! 아비는 '길고 오래 살기'로 그리 작정했다. '위험하게 조심해서'와 함께 가훈으로 가즈아.
-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과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지휘자의 면모가 강한 CEO와 같은 훌륭한 리더였다고 하더라. 하지만 아인슈타인, 파인만과 같은 과학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해서 비운의 과학자라고 하는 시각이 있어요. 반면 아인슈타인은 골방에 틀어박혀서 연구하는 연구자의 이미지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본인의 고집이 세고 권력욕 같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말년에 중력과 전자기력의 원자 수준에서의 대통합 이론을 만든다고 시간을 보낼 때 본인도 '이 길이 아닌가 봐'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네요.
-
일종의 매몰비용을 극복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오펜하이머는 사람들과 유대하는 것을 중시했어요. 어찌 보면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향악단이 없이 지휘자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업하는 것을 중시했어요. 그래서 정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권력욕도 있었던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인의 정치색에 대한 미국 내의 의심을 받고 권력에서 멀어졌을 때 가장 힘들어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차이점은 불명확하고, 모호하며,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오펜 하미어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찾고자 노력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 다 유대인입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고자 했는데 오펜 하이며는 미국인이고자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세상에 양자역학(현대물리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
그래서 "양자역학은 '왜 그렇지? " 물음으로는 해답을 얻을 수 없고, 그냥 닥치고 계산하면 원하는 답을 얻을 것이라고 하더이다. 하지만 이 양자역학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오히려 더 명확합니다. 아마도 삶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면서 양자역학의 핵심적 개념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획득하려면 행동하고 선택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잃을 것이다." "포기는 용기 있는 행위다. 그것은 보편적인 욕망을 (망설임과 후회 없이) 희생시킬 때에 비로소 가능하기에 위대하다."
-
'양자 역학'이 이과이고 분령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딱 떨어지지 않아 속상합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양자 역학)은 이 시대의 대안인데 이미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가 '힘의 의지'-'유물론'-'무의식'을 통해 예견된 사조라는 겁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이후 인간-지구-신 중심의 중세 신학이 무너지면서 데카르트-뉴턴-칸트의 이성주의 시대를 엽니다. 지나놓고 보니 합리성-과학-경험을 거쳐오면서 '미시세계'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었고 '불확정성'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양자역학'을 현실화 시켰습니다. 에예공! 아인슈타인과 양자 역학이 만나는 지점이야.
-
이성(주체)에서 보는 것(관찰자)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는 어디로 튈지 모른답니다. 인간의 욕망, 감정이 부지불식간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양자 물리학의 중요한 키워드가 '보는 자 관점' 이 되었고 양자역학은 뉴턴을 넘어 아인슈타인에 이르게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사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는 움직인다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이제부터 보는 건 해석이며 현실입니다. 이곳도 양자 역학이 철학과 만나는 지점 같구나.
-
에예공! 이 시점(보는 것)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체를 인식하려는 목표에 더 멀어졌다는지 모른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언어만큼만(제한적)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보는 것의 목표가 바른'인식'을 위함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를 위해 구조주의 소쉬르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보는 자(관찰자)가 중요해지면서 움직이는 관찰자와 정지된 관찰자까지 나아간 것 같아요. 그래서 '존재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19세기 철학 사유의 핵심은 이원론-실체론-중심주의였는데 이것을 일원론-환상-모든 것은 관계다가 되었어요. 천재 니체는 이미 150년 전에 ‘상승을 추구하는 힘의 의지’를 설파했고 그의 새끼 데리다는 '생성'으로 해석합니다. 더 이상 神 중심이 아닌 것도 좋고 '힘의 의지'가 작동하는 우주도 멋지고, 씨줄과 낱줄로 연결된 '관계 세계'에서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발상도 놀랍습니다. '변화'와 ‘일원론'은 죽은 플라톤이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닙니까?
2025.2.24.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