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토)부터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달리 뷔페 展>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20세기 미술을 화려하게 꽃피운 거장 3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치며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화가들인 샤갈, 달리, 뷔페...
신랑의 낭만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했던 사랑의 화가 샤갈, 그의 결혼행진곡. 시대의 지진 달리, 그의 격정 어린
엇박의 왈츠. 서글픈 직선을 그릴 줄 알았던 뷔페, 그의 신성한 소나타. 그들의 미술관에서는 성대한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그 중에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따뜻한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의 화가, 1910년부터 4년간 파리에서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후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판화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초기 대표작으로는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나와 마을> 등이 있으며 아내 벨라가 죽은 후에는 <그녀>, <야상곡> 등을 그렸다. 1958년 이후로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내면으로부터 드러난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있으며, 현대 작품에서 드물게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샤갈은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뽑으며, 큐비즘(입체파)에 영향을 받았으며 색체의 마술사라 불리는데
입체파가 색채주의의 반등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해 보인다. 샤갈은 향수병에 취해있었다는 점,
전쟁을 2번이나 경험했다는 것, 유대인이라는 점, 또한 유화, 판화, 벽화, 스테인드 글라스, 조각, 도기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다.
밝고 몽환적인 그의 작품들은 예술은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실제 사물을 표현하는 입체파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샤갈은 눈부신 색채로 유쾌하고도 난해한 환상의 세계를 열었다. 비테브스크의 유태인 거주지역과 서커스의 세계, 성서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시적인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이미지를 결합한 것이었으며
그 구성을 지배하는 것은 정교한 기하학과 화려한 색체였다.
마을과 나
화가의 오묘한 이중성을 표현하고 있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은 줄로 묶인 동물이 상징하고 있는
러시아의 마을에 대한 추억을 그리고 있다
아폴리네르에게 경의를 표함
한 몸을 이룬 남녀 커플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채색된 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불가사이한 구성은
들로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그는 7개의 손가락(이디시어로 '손이 빠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음)
이 그림은 그가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꼽고 있다
삶과 사회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전파하는 샤갈의 작품들에서는 긍정적인 이 진지한 낙천주의는 서로를 껴안는
신랑과 신부, 순종적인 말, 웃음을 머금은 새의 테마가 반복됨으로써 드러난다.
샤갈은 무수한 색채를 이용해 이 주제들을 표현한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관람자는 하나의 그림으로부터 모든 색채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체험한다. 그의 색깔들은 네온사인이 아니라 무지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샤갈의
작품은 유화에마저도 풍부한 음색으로 마음을 희망으로 촉촉이 적시는 예술의 소유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 부
산 책
생 일
비테브스크를 떠나다
환상, 아름다움이 스치는 샤갈의 작품들은 색체의 강렬함이 뒤섞여 꿈속을 헤매듯 아름답게 다가온다. 샤갈이 빚어내는 그
따뜻한 온기 속에서 그의 아내 벨라를 떠올린다. 샤갈에게 운명이자 전부였던 연인, 유대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민층
거리에서 자랐던 샤갈, 그런 그에게 부유한 유대인의 자녀이자 명문 교육까지 받은 벨라가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벨라에게 좋다거나 나쁘다는 대답을 듣기 전에는 그림이나 판화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샤갈의 그림에서는 아내 벨라와의 행복한 삶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많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 ‘검정색 장갑을 낀
내 약혼녀의 초상’등 샤갈은 벨라와의 아름다운 시간들을 그림으로 담았다.
샤갈에게 있어 세상의 빛이었던 벨라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그림에 나타난다. 그녀가 죽은 후 샤갈의 그림에서는
슬픈 푸른빛이 감도는 작품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푸른빛 슬픔 속에 한줄기 빛이 되어 등장하는 여인, 다름 아닌 벨라였다.
에펠탑의 신랑신부
에덴동산으로 날아가는 것을 뜻하는 연인들을 태운 수탉, 파리의 자유로운 햇빛이 솜처럼 부드럽고
감각적인 색조로 그려져 있어 이 작품의 시적인 상징성을 고양시켜 준다
격정적이었다가 때로는 차분하고 아름답게, 또 천진스럽게 적어내는 샤걀의 그림들은 독특하고 신비롭다. 그것은 마치
자유로운 어린아이의 일기장 같다.
샤갈은 2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십자가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1944년 사랑하는 아내 벨라의 죽음을
통해서 가족의 장례를 치른 후 잠시 침묵의 세월을 보낸 후 지중해 시기는 샤갈에게 새로운 예술적 힘을 주었다.
지중해의 밝은 빛과 아름다운 풍경의 색깔이 그의 작품에 스며들기 시작하였고 “춤”에서 지중해의 극단적 아름다움과
조요함이 극에 달한다.
기쁨의 찬가를 춤으로 표현한다. 그의 춤에는 시적인 에스프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다.
백색의 그리스도 수난도
그리스도는 상아색의 넓은 공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는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길게 뻗어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미약함이다. 그리스도의 연민이 퍼져나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이
끌어안으려고 한다.
오르페우스
죽은 아내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 지하세계까지 내려간 남자. 이승으로 가기 전까지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잃고 그리워하다가 죽게 되는 슬픈 전설
20 세기 전체가 그의 작품에 수용되고 작품가운데 현대적인 사고의 규칙이나 코드 그리고 예술적인 독재의 요소를 넘어서면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고집했다. 자기 시대를 예술로 형상화 할 줄 알았던 화가 샤갈은 아방갸르드의 물결 속에
큐비즘이나 극사실주의, 우월주의등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가운데 새로운 사고를 얻을 줄도 알았다.
현대 예술의 한 가운데에서 많은 예술 사조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한 유파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샤갈은 눈부신 색채로 시적인 호소력을 담아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그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의 선조격으로 숭상되기도 하지만, 샤갈은 자신의 작품이 비이성적인 꿈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의
추억들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회화에서 꼴라쥬로 세라믹으로 모자이크로 무대의 상과 무대 장식으로 그리고 문학 작품의 삽화로 그리고 건축의 장식이나 오페라의 천장으로 그리고 대성당의 색유리창으로 그의 예술을 토탈 아트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다.
부채를 든 신부
누워있는 시인
술을 마시는 군인
세 개의 촛불
노란 십자가
비테프스크 위에서
녹색 바이올린 연주자
달이 뜬 러시아 마을
여름날 오후의 밀밭
흰 깃이 달린 옷을 입은 벨라
마지막 태양빛을 받으며 천상의 세계 앞에서 그가 지닌 모든 불꽃이 빛을 발한다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입 밖에 낸다면......
진실된 예술은 사랑안에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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