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밤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뭘 찍을까를 고민하면서 "사진의 아름다움- G.페스케" 라는 책을 읽고 있었지.
언듯 배가 고픈기분이 들길래 책상 스탠드 아래 있는 은빛 손목시계를 봤더니 2시였어. 새벽 2시.
이미 마루와 부억을 비롯해서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10층 아파트의 여섯번째층... 그러니까 우리집은 내 방 창문으로 은은히 새어나오는 스탠드 불빛 빼고는 고요한 어둠의 둥지였다 이거야.
그나저나 한 밤중에 잠도 안자고 있다가 배가 고픈데 어쩔까나......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먹을만한 것은 보이지 않더군. 다만 2시에 보는 냉장고 조명등은 상당히 "타락천사"틱 하더구만.
이윽고 나는 내 방 의자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짙은 베이지색 반 코트를 걸치고- 내가 당시 입고 있던 검은 박스 티와 면바지로는 아무리 날씨가 풀렸다지만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으므로-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지. 그리고 양말은 신지 않은채로 검은 구두를 신었고...
열쇠를 들고 집밖으로 나오기까지는 얼마걸리지 않았어.
2시가 조금 넘은 복도는 충분히 추웠고, 엘리베이터는 낮에는 들을 수 없었던 굉음으로 도착을 알렸지. 아파트 밖에 나가보니 상당히 어둡더군. 코트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아파트단지에서 가까운 24시간 편의점으로 갔어. 가는 길은 드문드문 켜져있는, 지상에서 상당히 높이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주황색 가로등이 두세게 있을 뿐이었고. 아무도 없었지. 그야말로 도시의 차가움 이랄까... 하지만 정말 찍고싶은 길이었어.
ㄱ자로 꺽이는 길을 지나서 24시간 편의점에 다다르자,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형광등 빛에- 어째서 24시간 편의점들은 사방이 유리인지.. 게다가 1년 365일 24시간 영업이니 개점직후부터 폐점할때까진 절대로 형광등끄는 스위치를 누를 필요도 없겠지. - 정신이 환해졌어.
들어가자 1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한명 있더군. 카운터에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잡지를 보고있었는데 내가 들어오자 얼굴을 한번 쓱 보더니 일어나더군. " 웬만하면 빨리 사서 나가주라구 형씨.." 라는 표정이었어.
기분 드러웠지만 내가 뭐 저딴 놈하고 역길인연도 아니고 해서 얼른 먹을만한걸 사서 나가려고 골라보고 있는데, 아 글쎄 놈이 듣고있는건 라디오가 아니었어. 노래였는데... 일본노래. 문제는 그게 HIDE 의 음악이였다는 거지.
HIDE 라고하자면 뭐 길게 말할필요 없이 한마디로 말해주지.
HIDE는 내게 있어 "고등학교의 신" 이었던 존재라는 거야.
뭐... 중요한 인물이라는거지. 이미 죽어버렸지만.
여하튼 그래서 나는 그 놈을 다시 보게 되었어. 아니, 내가 그놈을 다시보게되었다는 것. 그건 나도 몰르고 있었어. 얼마후 계산할때 내가 놈에게 말을 걸때 까지는.
놈이 삼각김밥 3개와 커피우유, 육포와 새우깡 을 바코드로 찍느라 부스럭 거리고 있는걸 보면서... 내가 말을 했어.
"한밤중에 히데(HIDE)라니.. 좋아하나 보죠?"
놈은 별 말없이 바코드만 찍는가 하더니, 곧 아까 보던 잡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저기 나온 애가 히데잖아요. 음악 하세요? "
표정이 단숨에 변하는 놈을 보니 상당히 심심했나 보더라구.
얼마동안 얘기를 하다 알게 된 건데 녀석은 음악을 하는 애였어. 이름은 "이백" 성은 몰라. 이백이 놈은 20살. 대학엔 안 갔고. 여자친구는 은평구 어디에 사는데 대학다닌데. 교회다니면서 드럼을 배워서 무슨 밴드를 하고있다더구만.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4시더군. 김밥과 우유등은 벌써 먹어치운지 오래고. 졸리기도 하고 몸도 으슬으슬 했지만 새벽 4시에 24시간 편의점에서 예술인과 함께라니. 사진기를 들고올껄- 하는 생각이 났어.
짧고 검은 스포츠 머리의 이백이 놈은 어떻게든 퇴근시간까지 나를 붙잡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슬슬 편의점 분위기에 익숙해 짐에따라 HIDE의 노래보다는 냉장고 돌아가는 윙~ 하는소리가 더 잘 들리더라구. 그래서 다음에 온다고 말하고서는 나왔어.
여전히 어두운 밤길을 걷는건 올때와 마찬가지 였지만 한밤의 친구덕분에 그런지 몰라도 기분은 좋았어. 아까 들었던 HIDE 노래를 부르면서 집에 왔지.
다음날인 6일.
이번엔 고의적으로 잠을 안자기위해 버텼어. 인터넷의 여러가지 사진들이 큰 도움이 되었지. 이런저런- 음란성이 농후한 사진들 말야. 2시가 되길 기다렸지만 시간이 정말 더럽게 안 가더군. 1시반쯤 집을 나와서 편의점으로 갔어. 놈은 내가 분명 어제 오겠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린듯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
어제와는 다른 잡지를 보면서 다른 음악을 듣고있었지. 이것저것 유통기한 지난것들을 먹으면서 말이야.
내가 들어오자 그냥 손님대하듯 대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그냥 손님이기로 했어. 이것저것 사고는 카운터로 갔지. 삑삑대는 바코드음 속에서 이백이 놈이 말하더라고.
"안녕하셨어요? "
"예. 안녕했습니다. 근데 왜 존대말하냐 너? "
" .... 그냥. 뭐~ "
그래서 다시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지.
내가 옛날부터 편의점에 가지고 있었던 호의라던가~ 편의점의 장점들도 말야.
그런데 한 3시 가 막 끝나갈 무렵....그러니까 약 4시.
어떤 남자가 들어왔어. 한눈에 봐도 아까 밖에 BMW 세우던 사람이란걸 알수있었지. 아까는 BMW가 왔길래 잠깐 보다가 이백이가 뭘 물어보길래 대답하느라고 사람은 못봤었거든.
머리카락이 죽이더만. 서태지 머리였어. 예전에 나의 머리와 사뭇 비슷한(?)머리를 가진 그 남자. 나이는 한 30대 초반정도. 일반적인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그때 슬쩍 유리밖으로는 BMW 안에서 여자가 보이더군.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어. 은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선글라스도 쓰고 있었는데 그걸 벗자 상당히 일본- 인 같은 얼굴이더라구.
난 딱보면 일본인 인지 아닌지 알수 있는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 남자는 한국사람이었어. 좀 잘생겼는데 식염수와 콘돔을 사더니 카운터로 왔어. 그리곤 이런 걸 묻는거야.
" 어제 혹시 HIDE의 음악을 틀지 않았었나요?"
그래서 대답했지. "예" 라고.
내가 보기엔 아무문제가 없었단 말이지. 내가 오기 전에 그러니까~
어제밤에 내가 오기전인 2시 20분의 전에 이남자가 왔다 갔나보다. 이 남자도 히데를 아는건가? 뭐 이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거지.
근데 이남자가 계산을 하고 나가자 이백이 놈이 이상한 소릴 하더라구.
저 남자는 어제 오지 않았다는 거지. 처음 봤다는거야.
그리고 히데의 노래는 내가 가자마자 다른걸로 바꿨대. 원래는 바꿀려고 했었는데 내가 있어서 안 바꾼거래나 뭐래나.
그러면서 이백이 놈이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잖겠어...?
그래서 "뭐 밖에서 들렸나보지 안그래? .." 하고는 넘어가려는데..
아까 그 남자가 다시 들오네.
그래서 마침 잘됐다... 물어볼려구 하는데 남자가 먼저 말을 했어.
"제 말좀 들어주시겠습니까? "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남자는 자기 말을 시작했어.
"그러니까 어제 밤에.. 저는 이상한 걸 보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지나 집에 가는중.... 시간은 아마 저녁 9시쯤.. 이었던거 같은데. 이곳을 지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엄청 깜깜한 곳인데, 어제 그곳을 가다가 뭔가 물체같은게 있는걸 봤습니다. 정말 깜깜했는데도 그곳에 뭔가가 살아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구요. 문제는 그게 저를 따라 왔다는 겁니다. 지금도 저 차안에 따라와 있다구요!! "
"잠깐만. 근데요 여긴 왜 오신거에요? "
남자가 졸라 긴 말을 할거 같았는지 말을 끊고 이백이가 물었어.
그 남자가 다시 평범한 말투로 말했지.
"어제 밤엔 왔을때는 아무것도 안 묻더니만.. 오늘은 알고 싶은겁니까? 그렇다면 얘기해 드리죠. 뭐 어려울것도 없으니. "
남자는 몸을 돌려 편의점 문쪽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자신의 차를 향해서 소리쳤어.
"야!! 일루 와봐!!"
"....."
"빨리 와봐!!"
"....."
여자가 말하는 소리는 작아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투덜거린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구.
곧 여자는 차 밖으로 나와서 남자에게로 왔어. 남자는 여자를 들어오게 하고 자신은 여자의 뒤를 따라왔어.
남자는 말을 하면서 여자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어.
그러나 그말은 아까 했던말의 대답이 아니었어. 전혀다른 얘기였다구.
" 우리가 하는 사업이 위험하다는건 얘도 알고있어요. 그렇지? "
"응."
" 그런데도 우리가 BMW같은 걸 몰 수 있는건 그런 위험을 즐긴다는 얘기죠. 크하하~ 않그래?"
"응.그래"
.....
한참 말하는 남자와 여자를 보고 조금 있다가 이백이가 말을 끊고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어.
" 여보세요. 뭐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용건 없으시면 가보시죠."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하고 싶다는 듯 웅얼 거렸지만 나 역시 이백이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자 포기하고 나가는 듯 했어.
그러나 남자는 문을 나가기 전 말을 했지.
" 내일 다시 찾아 오겠습니다. 만약 내가 필요하다면 길건너 공중전화에서 기다리세요. 반드시 그렇게 될껍니다. "
"병신~"
그가 나가자 이백이가 병신이라고 했어.
나역시 몇가지 말로 맞장구를 쳤지. 미친놈 같았거든. 그런 미친놈이 BMW를 굴린다는 것과 옆에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는게 내게는 상당히 열받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지.
얼마후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난 집에 왔어.
다음날 내가 이백이 놈한테 찾아 갔을때 놈은 약간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어.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놈은 갈수록 그 남자만을 기다렸어.
예측컨데 놈은 그 남자의 대답을 궁금해 하는 것 같더라구.
그깟 미친 놈이 말한걸 궁금해 하다니.. 뭐 열심히 뜯어 말리고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 하지만 이백이가 참~ 바보 같아 보였어.
그러던 어느날.
이백이 놈은 기다리다 못해 그 남자가 알려준 공중전화로 가겠다고 했어.
그 날 이후로 이백이 놈은 보이질 않았지.
한 일주일쯤 지났나... 24시간 편의점에 가봤더니 여자애가 있었어.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그 BMW 에 타고있던 그 여자였지.
그땐 상당히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지금보니 완전 애 였더군.
그날 새벽 2시.
혹시라고 이백이가 있나 해서 편의점엘 갔더니 아까 그 애가 계속하고 있었단말이야.
'뭐야 얜? 설마 24시간 내내 하는겨? '
이라는 생각에 몇마디 말을 건네 봤는데. 놀랍게도 자기는 이백이 여자친구라고 하더군.
은평구에 살고 명재대학다니는... 그 여자친구라고 말야.
그래서 난 그럼 그날 그 남자는 뭐냐고, BMW 는 뭐 냐고 물어봤지만 모른다고만 했어.
쓰벌- 머리만 아픈것 같아서 그냥 말하다 말고 집에 가려는데 길에 가로등이 하나가 꺼져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