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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장 9-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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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에 이단 중에는, 예수님이 보통 인간보다는 훨씬 뛰어난 분이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은 아니다 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주장들을 타파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기가 쓴 편지에서 유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구원자) 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모든 교회들이 고백하도록 주지 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빌립보서 2장 11절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이렇게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님(헬-퀴리오스, 히-아도나이, 영-Lord)’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중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찬미를 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참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신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고백입니다.
제가 기도마무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하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그리스도(구원자), 한 분이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고백하고, 높여 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주인)으로 대접해 드리고 가장 지극한 정성으로 높여 드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불쌍히 여겨 주시는 시선을 받고, 그로 인해 회복과 고침의 은혜를”을 받게 됩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후에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라틴어로는 “키리에 엘레 이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는 간절한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을 보시는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시와 마을,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실 때,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6)라고 하셨습니다. 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실 때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막 8:2)라고 하셨습니다. 나인성에서 독자를 잃은 한 과부를 보시고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오라버니가 죽은 것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 현장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과 무리들의 입에서도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이 많았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을 하였는데도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8)라고 외쳤고, 가나안 출신의 한 여자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외쳤고, 나병 환자 열 명은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라고 합창을 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들의 외침(곧 기도)은 다 응답되어, 모든 사람이 치유 받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신약 성경 중의 기도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이 다른 어떤 기도의 모습보다도 큰 감동의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을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기도의 내용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11절 앞부분에, 바리새인이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따로 섰다는 말일까요? 이들은 사람이 많이 통행하는 거리에서, 눈에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도 팔을 벌려 하늘을 보고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겁니다. 이들의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기도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자신들이 얼마나 기도에 열심을 내는 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마디로 1인 기도 쇼를 한 것입니다.
기도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있다고 기도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면서, 다는 사람을 무작정 비교하고 판단, 정죄, 무시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부각 시키고 있습니다. 9절에 예수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본인들이 착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 조차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믿음 좋다고 착각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잘 소통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다른 유대인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함부로 다른 사람까지 멸시하는 태도를 감히 기도문에 담아 하나님께 고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무엇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하고 거짓된 위선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5, 6절에서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던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은 다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접 받기를 즐겨했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당연시 했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치 자기들만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고, 장애인들과 병에 걸린 사람들은 다 죄 때문(조상이나 자기 자신의 죄)에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몰아부쳤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눈 도움을 주지 않고 동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회당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율법을 낭독하고, 금식하고 기도 할 때는 사람이 많은 곳 서서 큰 소리로 자랑하듯이 했습니다. 그들이 의롭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상과 체면을 위해서, 자리보전을 위해서, 뒤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보여주기 식의 종교행위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왜곡된 외식주의자로 변질 된 주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시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불편하고, 뒤처지는 사람들, 즉 나보다 못 가지고, 봇 배우고, 덜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큰 허물이 있어도 용서해 주고 개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을 먼저 배려해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슬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평안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표현으로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웃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딱딱한 기준과 원칙만을 내세웠기에 점점 외식하는 거짓 믿음, 거짓 의인 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믿음이고 그 믿음을 유지, 상승시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예수님과 같이 그들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 많아 하시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많~이 받으시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바리새인과는 다르게 세리는 어떻게 기도 했는지 13절을 함께 읽겠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아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세리의 자세를 보시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대로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자신이 진정 죄인이고, 연약한 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자신의 모든 행위들을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설 때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세리는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죄송해서,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다 알고계시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감히 눈을 들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통회하는 자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록에는 없지만 가슴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통곡 할 때 떨군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무엇을 잘했다, 못했다, 무엇을 해 달라, 이런 요구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기도만 드렸을 뿐입니다. 세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도 구원자가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이 세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 하시고 두 사람에 대해 평가 하시기를, 대로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한 바리새인이 의인이 아니라, 눈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하십니다. 뭇 사람들에게 칭찬하고 존경 받았던 바리새인이 믿음이 있는 의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민족 반역자요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인간 이라고 저주 받았던 세리가 믿음이 굳센 의인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경기에서는 이긴 자가 승리자 이지만, 신앙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세리는 승리자이고 바리새인은 패배자입니다.
예수님이 추가로 말씀 하시기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낮아지고, 연약하고, 다 버리고, 죽어야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역설을 거부하고 높아지려고만 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을 의식해서는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체면과 자리를 생각하다가는 외식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제자 마태도 세리였습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다른 죄인들(아마도 저주 받았다고 여겨지는 병자들, 혹은 율법을 어긴 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라고 묻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각자가 병자이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한 시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잊으면 회개를 안 하게 되고, 회개를 안 하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들처럼 믿음 좋은 의인이라는 나만의 착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뭐가 우선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 곧 종교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긍휼함, 곧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고 참회하는데 온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기도 했던 세리의 심정으로, 병자를 부르러 오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사랑의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영혼의 구원을 간구하는데 온 마음과 힘을 다하는 00교회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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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믿음 없음과 순종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희들이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사랑과 용서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