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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사사명(史思明, ?∼761년)의 난
안사의 난 중 사사명이 안록산에 이어 일으킨 반란. 안록산의 난에서 이어진다.
안록산의 난이 먼저 일어났고 사사명은 원래 안록산의 부하였다보니, 간단히 소개하는 경우 안록산의 난에 포함해서 서술되기도 한다.
사사명은 안록산이 가장 신임하던 부장으로서, 반란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별동대의 지휘를 맡을 정도였다. 그런 사사명이지만 757년 안록산이 그 아들 안경서에게 사망하고 당의 반격으로 인해 하북으로 쫓겨나자 더이상 연에 희망을 걸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기다 안경서가 사사명의 세력이 자신보다 더 강성한 것을 시기해 그 전력을 흡수하려 시도하자 사사명은 결국 장악하고 있던 13개 군과 8만여 병력을 이끌고 당 조정에 항복한다. 당숙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사사명에게 귀의왕, 범양절도사직을 내리고 안경서 토벌에 동참할 것을 명했으며, 사사명은 이에 따라 하북에 남아있던 안경서 세력권을 제압했다. 사사명까지 당에 귀부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북의 군현들은 대부분 당에 항복해 공로가 적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사사명과 오랫동안 싸운 이광필을 필두로 해서 당 조정 내에는 사사명의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고, 이광필과 신하들이 당숙종에게 사사명을 신뢰할수 없으니 제거하자고 건의한다. 당숙종 또한 사사명 제거에 동의하여 뒷공작을 벌였으나 사사명에게 발각되자 분노한 사사명은 이광필을 제거할 것을 당 조정에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당숙종과 조정은 곽자의와 함께 안록산의 난 진압의 양대 공로자인 이광필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고, 여기다 안록산에게 항복했던 대신들에 대해 엄벌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사명은 758년, 13만 병력을 모아 범양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당숙종은 소식을 듣고 놀라며 조정에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때 당의 주력군은 업성에서 안경서를 포위해 완전 진압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기에 사사명의 재반란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진압군 지휘관 중 한 명인 하남절도사 최광의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위주까지 북진해 보았지만 11월에 사사명에게 격파당한다. 이에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3. 759년
3.1. 사사명의 남하와 이광필의 대응
3.1.1. 상주 안양하 전투
759년 초, 당군은 업성의 안경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에 안경서는 필사적으로 사사명에게 구원요청을 했고, 위주에서 충분히 후방을 다졌다 생각한 사사명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업성 근교로 남하, 당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한다. 이에 당군을 지휘하던 9명의 절도사들은 날짜를 정해 안양하 북쪽에서 진을 치고 사사명과 일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때 당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처 60만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고, 이 군대를 지휘하는 곽자의, 이광필, 왕사례, 노경, 허숙기 등은 모두 내전에서 실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유능한 장수들이었다. 반면 사사명군은 총병력이 13만이었으니 단순히 생각하면 당이 질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군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9명의 절도사들을 총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지휘통제가 제각각이었던 셈. 거기다 총병력이 60만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당군이 처음에 진압군으로 편성한 것은 20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중 2/3은 전력을 딱히 기대하기 힘든 투항병, 단련병, 의병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진압군의 장비류에서도 나타나는데, 전투마가 1만 필, 갑옷과 병장기가 10만 벌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의 수량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60만이라는 대병력의 장비라기엔 많이 부족한 수량이다. 즉, 당군의 상당수 병력은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것. 훈련도나 장비 등을 볼때 당군과 사사명군의 전력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전투 결과는 당의 대패. 이광필, 왕사례, 허숙기, 노경이 지휘하는 당군 본대는 사사명의 맹공에 의해 붕괴되었고, 후방에 있던 곽자의가 황급히 달려나왔으나 기세를 탄 사사명의 급습에 의해 제대로 전열을 구축하지도 못하고 밀려났다. 결국 곽자의마저도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삭방군만을 건져 철수, 하양교(河陽橋)를 다시 끊고 낙양 방위에 나섰으며 지휘를 맡았던 다른 절도사들 또한 자신의 직속군만을 건져 임지로 돌아간다. 사사명의 남진을 저지할 병력이 사라진 것이다.
관군을 격파한 사사명은 일단 업에 입성했는데, 안경서는 사사명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착각했으나 당연히 거짓이었고 사사명에게 처형된다. 그다음 사사명은 안경서의 남은 세력을 모두 흡수한 다음 자신은 범양으로 돌아가고 휘하 병력을 하북에 풀어 후방 다지기에 들어간다. 이는 이전 안록산의 난 당시 하북에서 안록산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났고, 자신도 이들 때문에 한때 진격로와 퇴각로가 막혀서 고생한 것을 기억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3.2. 곽자의의 퇴진과 이광필의 대두
상주에서 관군의 참패가 전해지자 동경(낙양)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당 조정은 상주 패배의 책임과 대책마련을 위해 부심한다. 우선 곽자의를 동기ㆍ산동ㆍ하남제도원수이자 권지동경유수로, 하서절도사 내진을 행섬주자사이자 섬ㆍ괵ㆍ회주절도사로 충임, 허숙기를 활ㆍ변등칠주 절도사로 삼고 시여주자사 유전을 활주자사ㆍ활ㆍ변등칠주 절도부사로 임명했으며, 노경을 진ㆍ정ㆍ박 절도사로 충임하나 노경은 상주에서의 패전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군대가 가장 추태를 부렸다는 이유로 자살.(...) 거기다 실상 상주 패전의 가장 책임이 큰 인물인 어조은이 곽자의를 참소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곽자의 또한 자신의 군권을 내려놓고 장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당 조정이 이렇게 속편하게 당시 최고 위상을 자랑하던 곽자의를 뒤로 뺄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맞먹는 인물인 이광필이 존재했기 때문. 759년 7월. 당숙종은 이광필로 하여금 삭방절도사ㆍ병마원수를 맡겨 곽자의가 지휘하던 삭방군을 인수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이전까지 이광필이 맡고 있었던 하동절도사직은 왕사례가 맡도록 한다.
이광필은 하동의 기병 500여 기를 이끌고 밤중에 삭방군의 군영에 들어가 이를 인수하는데, 곽자의가 워낙에 군심을 사로잡고 있었던지라 삭방군이 이광필의 명령에 반항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이에 이광필은 그에게 가장 반항하던 좌상병마사 장용제를 잡아다 처형해 버리는 강경책으로 군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7월 7일, 당 조정은 조왕 이계를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이광필을 보좌로 붙이는 지휘부를 편성해 사사명 세력 평정을 위한 총사령부를 구성한다. 여기에 당숙종은 삭방군의 군심을 달래기 위해 이시기 삭방절도부사ㆍ전중감이었던 복고회은에게 태상경을 겸임하도록 하고 대녕군왕직을 제수한다. 당시 복고회은이 군왕직을 받은 것은 곽자의, 이광필보다도 빨랐다.
8월 29일, 당숙종은 이광필에게 유주장사ㆍ하북절도사등사직을 더한다. 이는 하북을 평정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상주의 패배로 인한 피해가 컸기에 당장은 공허한 말로 들릴 뿐이었던 것도 사실.
3.3. 사사명의 칭제
759년 4월, 사사명은 스스로 대연황제를 칭한다. 안록산의 연 세력을 완전히 흡수한 그는 이러한 칭제를 통해 안록산의 뒤를 잇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당장 안록산 또한 스스로를 대연황제라 칭했고, 사사명은 안록산을 '태상황'으로 모셨다. 또한 그는 아들인 사조의를 회왕으로, 주지(周摯)를 재상으로, 이귀인을 장군으로 삼고 범양의 이름을 고처 연경이라 했으며 모든 주를 군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3.4. 사사명의 남하와 낙양의 포기
759년 9월, 사사명은 총애하는 아들인 사조청에게 범양을 지키게끔 하고 상주에서의 승리 이후 자신에게 복속시켰던 모든 하북의 태수들에게 군사 3천씩을 거느리고 자신을 따라 하남을 향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안진경의 패배 이후 하북의 당 세력은 이미 뿌리뽑힌 상태였고, 하북 지역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태수들은 사사명에게 복종했기에 이 명령은 충실히 시행되었다.
그 다음 사사명은 영호창을 여양으로, 사조의를 백고로, 주지를 호랑으로 보내 황하를 건너게끔 하고 그 자신은 복양에서 황하를 건넜으며, 변주에서 모두 모이게끔 했다. 이는 황하를 건넌 후 낙양의 서쪽 지역인 하남을 제압한 후에 서진해 낙양을 탈취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방어책임을 맡은 것은 당연히 이광필이었다. 곽자의를 대체한 후 그는 황하 연안의 여러 군영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사사명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사명군의 집결지인 변주로 달려가 변ㆍ활 절도사인 허숙기에게 15일만 지키면 지원군을 끌고오겠다고 약속해 1차 저지 시도를 한다.
그러나 허숙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사명에게 항복해 버리고 사사명은 그런 그를 중서령에 임명함과 동시에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으며, 비록 저지되었지만 남덕신ㆍ양포ㆍ유종간ㆍ전신공 등 여러 장수들을 서쪽, 남쪽으로 파견해 강ㆍ회 지역까지 제압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사명은 하남 평정이 대충 마무리되자 그대로 서진, 낙양에 육박한다.
허숙기의 때이른 배신과 항복으로 인해 하남에서의 저지에 실패한 이광필 또한 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광필은 이미 낙양은 지킬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지 오래였다. 대신 그는 오히려 군을 이끌고 북상해 하북, 업성 근방인 하양(河陽)으로 군을 이동시켜 사사명의 배후지라 할 수 있는 하북을 위협하는 전략을 구상한다.
이광필은 무리를 정비하여 천천히 나아가서 낙양에 도착하여 유수 위척에게 말하였다.
"도적들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오는데, 승리는 병사를 어루만지는 것에 있으니, 성급한 싸움은 이롭지 않습니다. 낙성은 지켜낼 수가 없는데, 공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위척은 섬주에 병사들을 머무르게 하고 동관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험요한 곳을 점거하고 그들의 예봉을 꺾도록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광필이 말하였다.
"두 적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 진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후퇴하는 것을 꺼리는데, 지금 연고도 없이 500리의 땅을 내버리면 도적들의 세력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하양으로 군대를 이동하여 북쪽으로는 택로와 연결하여 유리하면 전진하여 빼앗고, 불리하면 물러나 지키면서 겉과 속이 서로 응하게 하여 도적들에게 감히 서쪽으로 나아가서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원숭이의 긴 팔 같은 형세라 하겠습니다. 무릇 조정에서 예의를 분별하는 데에는 저 이광필이 공보다 못하지만, 군대의 일을 논한다면 공께서 저 이광필보다 못할 것입니다."
위척은 응답하지 않았다. 판관 위손이 말하였다.
"동경은 황제의 집이 있는 곳인데, 시중(이광필)께서는 어찌하여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광필이 말하였다.
"그곳을 지키려면 사수ㆍ악령ㆍ용문에 모두 응당 병력을 배치하여야 하는데, 그대는 병마판관이니 이를 지킬 수 있는가?"
마침내 이광필은 첩서를 동경유수 위척에게 보내어 동경의 관속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서 도오간으로 들어가도록 하였고, 하남윤 이약유에게도 첩서를 보내어 이민들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서 도적들을 피하게 하라고 하여 그 성을 텅 비워놓았다. -자치통감
이광필이 낙양을 비우고 하양으로 들어가자 사사명은 9월 27일 낙양을 점령한다. 그러나 막상 들어왔을때 낙양 대부분이 비워져 사실상 얻을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필이 하양에서 하북으로 진격해 사사명의 배후를 찌를 것이 우려되어 결국 사사명은 궁궐에는 들어가지 않고 백마사 남쪽에 군을 주둔시킨 후 하양의 황하 이남지역에 월성을 쌓아 이광필과 대치국면에 들어간다.
사사명은 하북, 하남을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낙양까지 점령했으나 그 기세는 안록산의 그것만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광필이 하양을 거점으로 삼고 이를 통해 사사명의 측후방을 위협하는 위치를 선점했기 때문.
당시 하양(河陽)은 이때의 전황구도상 최고의 요충지로 손꼽을 만한 지역으로, 하북의 중심인 업성 근처, 황하 이북지역에 위치하면서도 동시에 하양교, 석교를 통해 황하 이남, 그중에서도 낙양으로도 바로 통할 수 있는, 사실상 낙양과 하북 사이에 박힌 쐐기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 서북쪽으로 택로지역을 통해 당의 손에 있는 하동, 삭방지역에서 지속적인 지원까지도 가능한 지역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사사명의 입장에서는 전력을 다해 하양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고, 전 병력을 이끌고 하양에 접근한다. 물론 이광필 또한 이를 예상한터라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방위에 나선다.
이때 하양은 상주에서의 패배 이후 곽자의가 이쪽으로 철수하면서 성을 증축해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성이 쌓여 있었으며, 강 한가운데에는 모래섬이 있었다. 각각 남성, 북성, 중단이라 불렸다고 한다.
사사명과 이광필의 햐양에서의 격전은 초전부터 상당히 화려했다. 역사상 기록을 찾기 힘든 일기토도 이 시기에 나온다.
사사명은 군대를 이끌고 하양을 공격하는데 용맹한 장수인 유룡선으로 하여금 성 아래까지 가서 도전하도록 하였다. 유룡선은 용감함만을 믿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말 갈기 위에 얹어서 오만스럽게 이광필을 욕하였다. 이광필이 제장들을 뒤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누가 저 자를 잡을 수 있겠는가?"
복고회은이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광필이 말하였다.
"이것은 대장이 할 바가 아니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비장 백효덕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광필이 그를 불러서 물어보니, 백효덕은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중략)
유룡선은 그가 혼자 오는 것을 보고는 그를 대단히 쉽게 여겼다. 점점 가까이 오자 곧 움직이려 하는데, 백효덕이 손을 흔들면서 그에게 보이는데 마치 와서 대적하지 않으려는 사람 같아서 유룡선은 헤아릴 수가 없어서 멈추었다. 그와 10보 떨어지자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더니, 유룡선은 오만하고 모욕하는 태도가 처음과 같았다. 백효덕은 말을 오랫동안 휴식시키고서 이어서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도적놈이 나를 알겠는가?"
유룡선이 말하였다.
"누구냐?"
말하였다.
"나는 백효덕이다."
유룡선이 말하였다.
"이건 무슨 개돼지냐?"
백효덕은 크게 호통을 치고, 창을 움직이면서 말을 뛰게 하여 그를 쳤다. 성 위에서 북소리와 함성을 내자 50기가 잇달아 앞으로 나아갔다. 유룡선은 화살을 쏘지도 못한 채 제방 위에서 빙빙 돌았다. 백효덕이 추격하여 따라잡아 그의 목을 베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 자치통감
뭔가 소설같지만 이건 엄연히 자치통감에 박혀있는, 하양성 공방전의 첫 시작이다. 또한 사사명의 난 당시의 유명한 에피소드인 '암말 500여 필을 활용한 군마 탈취'도 이때의 일이다.
사사명은 좋은 말 1천여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날마다 황하의 남쪽 강물에 말들을 목욕시키면서 말들을 순환시키는 일을 쉬지 않아서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광필은 군대 안에서 암말을 찾아서 500필을 얻자, 그 중에서 망아지를 성 안에 잡아매어 놓았다. 사사명의 말들이 물가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그것들을 모두 내어놓으니, 말들이 울기를 그치지 않았고 사사명의 말들은 모두 물에 떠서 황하를 건너지, 한꺼번에 그것들을 몰아서 성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자치통감
이광필의 이러한 대응에 거듭 피해를 입은 사사명은 황하에 전선을 늘여세우고 이를 하양성 가운데로 내려보내 남성과 북성을 잇는 부교를 태우기 위한 화공을 시도했으나, 이광필이 중단의 섬에서 이를 철차(쇠로 만든 쇠스랑 같은 고정기구)로 붙잡아 놓고 투석기를 동원해 전선들을 격침시켜 또다시 실패한다.
이에 사사명은 하양성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 대신 하양성으로 들어가는 군량수송로를 끊고자 하청으로 이동한다. 이에 이광필 또한 야수도에 진을 치고 이를 막아선다. 그러자 사사명은 야습을 시도하나, 이광필에게 읽혀서 오히려 장수들이 투항하는 손해를 입고 만다.
사사명이 이일월에게 말하였다.
"이광필은 성에 의지하여 싸우는 것이 장기인데, 지금 나와서 들판에 있으니 이는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너는 철기를 데리고 밤에 건너가서 나를 위하여 그를 잡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
이일월이 50의 기병을 거느리고 새벽에 목책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옹희호는 참호로 막혀 있어서 병사들을 휴식시키니, 그들은 시를 읊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서로 보고 있었다. 이일월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사공께서는 계시느냐?"
말하였다.
"밤에 가셨다."
"병사들은 몇 명인가?"
말하였다.
"천 명이다."
"장수는 누구인가?"
말하였다.
"옹희호이다."
이일월은 한참동안 말없이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하에게 말하였다.
“지금 이광필을 놓치고 옹희호만 잡아가지고 돌아가면 우리가 죽는 것은 분명하니 투항하는 것만 못하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옹희호는 그와 함께 이광필을 찾아뵈니, 이광필은 후하게 그를 대우하고 관직에 임명하여 심복으로 삼았다. 고정휘가 그 소식을 듣고 역시 투항하였다. - 신당서, 자치통감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본 사사명은 하양으로 돌아와 재차 공격을 시도한다. 이에 이광필은 이포옥에게 남성을 맡기고 자신은 중단과 북성을 맡아 적을 방어한다.
하양성으로 다시 돌아온 사사명은 자신이 세운 재상인 주지로 하여금 중단과 북성을, 그 자신은 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에 이광필은 이포옥을 남성으로 보내 3일만 지켜라고 명령하고, 스스로는 10월 12일부터 시작된 주지의 공격을 중단에서 방어해낸다.
중단의 공격에 실패한 주지는 북성쪽으로 자신이 지휘하는 전 병력을 집중시키고, 이광필은 이에 맞서 자신이 이끄는 본대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선다.
이광필이 제장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이 멀리서 나의 기를 보면 나가 싸우는데, 내가 기를 느리게 흔들면 너희들이 임의로 유리한 것을 골라 싸우라는 것이고, 내가 급히 기를 흔들며 세 번 땅에 닿게 하면 모든 병사들은 일제히 들어가야 하는데, 죽기 살기로 하고 조금이라도 물러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또 짧은 칼을 가죽신 안에 두며 말했다.
"전투는 위험한 일이고 나는 나라의 삼공이므로 적의 손에 죽을 수 없는데, 만약 싸우다 불리해지면 여러분은 앞에서 적에게 죽고, 나는 여기서 스스로 목을 베어 여러분에게 혼자 죽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제장이 나가 싸우는데, 잠시 후 학정옥이 달아나 돌아왔다. 이광필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말했다.
"학정옥이 물러나면 우리 일이 위험해진다."
좌우에 명해 학정옥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학정옥이 말했다.
"말이 화살을 맞은 것이지 감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사자가 달려와 보고했다. 이광필은 말을 바꾸어주도록 그를 보내었다.
복고회은과 그 아들 개부의동삼사 복고창이 조금 물러나자, 이광필이 또 명령하여 그들의 머리를 베라고 했다. 복고회은 부자는 사자가 칼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뒤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결판을 내려 했다.
이광필이 연달아 그의 기를 흔들자, 제장들은 일제히 죽기를 한하고 전진했고, 고함소리가 천지를 움직이자, 적병은 크게 무너졌는데, 참수한 것이 1천여 급, 잡은 것이 500이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 자치통감
이광필의 진짜 이름이 E광필이 아니었을까 싶은 전투 독전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전투로 인해 주지는 패배했고, 남성을 공격하던 사사명 또한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면서 하양에서의 격전은 이광필의 승리로 끝났다.
사사명은 이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 하양성에서 이광필이 버티고 있는 한 서진하면 배후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 따라서 이 전투는 사실상 사사명의 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당의 통치가 느슨해지고 토번이 계속 당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오자 현재의 사천성에 있던 공주, 간주, 미주, 융주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강초원이라는 인물이 8월에 별도의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규모는 매우 작아 거의 도적떼 수준으로, 얼마 안 가 토벌되었다.
또한 동평장사로써, 1년 전에 어사중승 시절 소금 전매제를 건의, 실행했던 제오기가 건원증보와 쌍중륭변전을 통화시켜 통화량을 크게 늘리자 위조화폐가 대규모로 증가해 화폐가치가 급하락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오기를 충주장사로 좌천시켰으며, 제오기를 추천했던 하란진명도 어사대부에서 파면되어 진주 원외사마로 좌천되었다. 거기다 제오기에 대해 원망을 가진 사람이 많아 제오기는 결국 계락에 걸려들어 결국 다음해 1월에 아예 관직에서 제명되고 유배되고 만다.
사사명은 하북, 하남 일대를 장악하고 낙양에 걸터 앉아서, 이광필은 하양을 기점으로 하동 및 섬주지역을 방어하고 하북, 하남을 노리는 형국으로 서로 대치한다. 1월에 사사명이 이귀인으로 하여금 철기 5천으로 섬주를 공격하게 파견하자 신책병마사 위백옥이 격파하고 2월에 이광필이 회주를 공격하자 사사명이 이를 요격하는 등 서로 주고받는 형국이 지속된 것. 이 과정에서 이광필은 태위 겸 중서령 직위를 받으며 그 위세를 더하게 된다. 이 당시 이광필은 태위, 중서령, 천하병마부수, 지제절도행영, 삭방절도사, 시중, 사공직을 모두 겸임한다. 이는 후의 곽자의가 누린 것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다.
또한 이 틈을 타서 당항족이 변경을 침략하면서 경기지역을 압박하자 빈ㆍ녕등주 절도사의 관할구역을 나누어 부방ㆍ단연지역을 '위북절도'로 명명하고 상여규에게 빈녕절도사직을, 두면에게 부방절도사직을 내린 후 한가롭게 지내던 곽자의에게 이를 장안에 머물면서 이를 관장하게끔 한다. 이는 곽자의가 이시기에 누린 높은 위엄과 명성을 빌리기 위함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1년 내내 지속되었고, 하양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크고작은 교전이 이어진다.
사사명이 비록 낙양을 점령하고 그 기세가 한창 강성하긴 했으나 사실 안록산의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왜냐면 기본적인 지지기반도 협소하고 군사력도 적었다. 물론 피해 자체는 만만치 않았지만 이는 장안으로 돌진하는 데 집중했던 안록산과 일단 거점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한 사사명의 차이로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사사명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는 물론 60만이 한큐에 날라간 상주 안양하 전투의 참패 때문이기도 하고, 안록산의 난 시기에 이미 당의 힘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이는 간신 이보국의 전횡과 내지절도사들의 전횡 때문이기도 하다.
이보국은 당숙종이 태자 시절부터 따르던 환관으로, 분조를 세우고 영무에서 황위에 오르는 것을 주도하는 등의 공적을 세워 신임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보국은 건녕왕 이담을 참소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전중성의 장관으로 황제의 의복, 음식, 거주, 출행 등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기에 고작해야 종 3품의 관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으로 대우받은 전중감이란 직책을 역임하면서 군사관련 인사를 대부분 주관하며 그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에 당현종과 당숙종 사이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이보국의 권세는 더욱 커진다. 사실 처음부터 당숙종은 당현종에게 어느정도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숙종은 정식으로 황제위에 오른 것이 아닌, 영무에서 자의적으로 즉위하고 당현종이 나중에야 이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즉, 만약 당현종이 후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바로 반역죄로 몰릴만한 행동이었던 것. 이로 인해 당숙종은 어떻게 해서든 장안을 탈환하고 당현종을 모셔오는데 노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비록 상황으로 물러났지만 당현종의 영향력은 여전히 매우 컸다. 거기다 천보 연간 양귀비에게 빠져 이림보, 양국충 등에게 정치를 상당부분 위임할 정도로 무기력해졌던 당현종은 양귀비가 죽은 후 오히려 의욕이 살아난 게 아닌가 싶은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는 장안, 낙양을 수복한 다음 안록산에게 붙었던 대신들을 처벌할 때에 확연히 나타난다.
이에 당숙종 및 당숙종 옹립파들은 당현종이 복귀해서 자신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한다. 과감한 정변을 통해 위황후나 태평공주를 제압했던 일이나 개원 말엽에 당숙종 이전에 태자로 내정되었던 황태자 및 그 형제들을 죽게 했던 당현종의 전적을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타당한 우려라 할 수 있다. 거기다 당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후 흥경궁에 거주하면서 그 일대의 주민들과 가깝게 교류하면서 지내자 불안감은 더더욱 커진다. 이때에 대한 자치통감 기록을 찾아보면 '실제로 흥경궁 내의 장경루에 당현종이 올라갈 때마다 지나가던 부로들이 왕왕 우러러보며 절을 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상황은 항상 장경루 아래에 음식을 준비해놓고 이것을 그들에게 하사하였고, 또 일찍이 장군 곽영예 등을 불러서 장경루에 올라오도록 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흥경궁은 당현종이 왕이었던 시절에 머물면서 정변을 성사시켰던 장소라는 상징성을 지닌 곳인 데다 당현종에게 이런 호의적인 민심은 당숙종 및 당숙종 옹립파에게는 적지 않은 불안요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보국은 이 틈을 노렸다. 당숙종으로 하여금 당현종을 유폐시키게끔 충동질하고, 이것을 자신의 큰 공적으로 삼아 권세를 굳히려 한 것이다.
"상황께서 흥경궁에 계시면서, 날마다 외부인들과 교통하고 있으며 진현례와 고력사가 폐하께 불리하도록 꾀합니다. 지금 금군의 장사들은 모두 영무에서 공훈을 세운 사람들인데, 모두 몸을 뒤척이면서 불안해하고 있고, 신은 환히 깨닫고는 있으나 해결할 수는 없어서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성황(현종)께서 자비롭고 어진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시겠는가?"
대답하였다.
"상황께서는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그 여러 소인배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천하의 주인이 되시니, 마땅히 사직의 큰 계획을 만들어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때에 반란을 없애야지, 어찌 필부들의 효도만을 주창할 수 있겠습니까. 또 흥경궁은 황궁 밖 민가와 서로 섞여있고, 담이 얕아서 들여다보이므로 지존께서 거주하시기에 마땅한 곳이 아닙니다. 대궐 안은 깊고 경비도 삼엄한 데다가 받들어서 영접하여 그곳에 거주하시게 한다면 그곳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또 소인배들이 성청을 헷갈리게 하는 것을 막고 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상황께서는 만세의 안녕을 누리게 되고, 폐하께서는 삼조의 즐거움이 생기니, 어찌 무슨 손해될 일이 있겠습니까?" - 자치통감
당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이보국의 권력은 황실까지 압박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했으며, 황제라면 모를까 상황인 당현종의 처지를 압박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 결국 이보국은 당현종의 호위병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자신의 영향력 하의 금군들을 움직여 압박하여 당현종의 측근들인 고력사, 왕승은, 진현례, 여선원, 옥진공주 등을 당현종에게서 떼어내 귀양보내거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게 한 다음 당현종의 거주지를 서내의 감로전으로 옮기게 한다. 이는 사실상의 유폐나 다름없었다.
이에 형부상서 안진경을 필두로 하는 조정의 백관들이 이보국의 처사에 분노하며 상황(현종)을 문안하게 해달라 하자 이보국은 곧바로 안진경을 좌천시켜 봉주지역의 장사로 보내버려 입을 막는다.
당숙종 또한 이러한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보국을 숙청해 정국을 되돌릴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이미 이보국은 황제인 당숙종마저도 함부로 터치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가졌으며, 특히 군대의 인사를 관장하면서 군권을 장악해버린데 대해 당숙종은 두려움마저 느끼고 이를 처내지 못했다고 한다.
4.2.2. 내지절도사들의 전횡
당 조정 내에서 이보국이 횡포를 부려댔다면, 조정 밖에서는 내지절도사들의 횡포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당시 이들 내지절도사들은 안록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그리고 사사명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으나, 문제는 그들이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자신의 강역을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고,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이는 당 조정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다. 내지절도사를 임명하면서 자금과 병력을 준 것이 아니라 대신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어 해당 지역을 통치하면서 그 지역을 기반으로 군대를 조직해서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 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소모시키면 평시에도 반발을 살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난세에 폐허가 된 지역에서 아무 지원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내보낸 꼴이니 그 과정이 대체 어땠겠는가? 온갖 고생을 겪어가며 휘하 병력을 만들어 낸 내지절도사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병과 그 근거지를 지키면 족할 뿐, 공연히 '남의 땅'에 들어가 금쪽같은 병력을 까먹고 싶지 않았던 것.
이러한 문제의 대표적인 예가 760년 11월부터 761년 1월까지 벌어진 유전의 반란. 유전은 송주자사이자 영회서절도부사로써 강ㆍ회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요참설이 나돌기 시작하는데다 때마침 절도사 왕중승이 그를 죄주기를 청하자 유전을 회남동ㆍ강남서ㆍ절서 삼도절도사로 삼고 올려보내면서 몰래 회남동도절도사였던 등경산과 이환에게 유전을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유전은 이를 눈치채고는 오히려 이환을 방심시켜 그의 부절을 얻어낸 다음 곧바로 격문을 돌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전의 반란은 사실 작은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었으나, 인망이 있었던 유전에 대해 각지의 군대가 독자적으로 호응하거나 호응할 것을 계획하면서 강ㆍ회지역의 혼란이 커졌다. 물론 유전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이는 군권을 가진 절도사 한명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정도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고, 또한 호응 정도에 따라서는 사소한 일이 크게 커질 수 있다는 데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다 내지절도사들이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지방의 세수를 그들의 군대에만 투입하자 당 조정으로 들어가는 세수가 부족해졌고, 그에 따라 토벌군의 핵심이 되어야 할 금군 및 중앙군들이 대부분 간판만 내건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물자와 자금까지 부족해졌는데 그 이유는 수나라 시절에 만든 대운하가 진작에 활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전략하면서 강남의 물자를 장강을 통해 형북까지 거슬러 올라오게 한 다음 거기서 많은 인력을 동원해 옮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전의 당에는 여러 금군이 존재했으나, 이때 이후에는 사실상 신책군만이 의미있는 군대로써 존재하게 되며, 이 신책군의 군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당헌종 이후의 환관들의 횡포 또한 이 신책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이루어진다.
당의 중앙과 지방방위력이 급감하면서 토번의 침략활동은 계속되었다. 거기다 토번 외에도 여러 이민족들이 거듭 공격해와 당의 영토 상실은 가속화된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곽자의를 다시 일선으로 내보내 이러한 이민족들을 막게끔 한다.
상황이 위급했던 759년의 사사명의 공세를 이광필의 활약을 통해 막아내고, 이후 한해에 걸처 대치국면을 유지하면서 전력을 증강한 당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특히 이때에 누군가가 "낙양에 있는 장사(반란군 병졸)는 모두 연인인데 오래 수자리를 서서 고양에 돌아갈 생각을 하여 위아래가 마음이 떨어져 있으니 이를 치면 격파할 수 있읍니다."는 건의를 했고, 섬주 관군용사 어조은이 이를 믿고 당숙종에게 건의하여 이광필로 하여금 낙양을 수복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전선에서 군을 총지휘하던 이광필의 판단은 달랐다. 이광필은 이에 대해 "도적들의 칼끝은 아직도 예리하니, 아직 가볍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고 주문을 올리며 아직 때가 이름을 고했다.
하지만 예상 외의 공격 동조자가 나타난다. 바로 복고회은이 공격론에 가담한 것이다. 사실 복고회은은 이전부터 이광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기다 이광필이 엄하게 군율을 세우자 이광필을 꺼리게 되었는데, 이때에 어조은의 공격론에 동조하여 조정에 낙양을 탈환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조정에서 거듭 공격명령이 내려왔고, 견딜수가 없었던 이광필은 하양을 이포옥에게 맡긴 후 낙양을 공격한다. 이때에 어조은의 신책군과 신책절도사 위백옥 또한 이광필과 합류해 진격했다.
2월 23일, 낙양성 북쪽 망산까지 전진한 당군 수뇌부는 여기서 다시한번 논쟁이 벌어진다. 어느곳에 진지를 세울 것인가를 가지고 이광필과 복고회은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이광필은 방어에 유리한 험지를, 복고회은은 공격에 유리한 평야에 진을 치자고 했던 것. 원칙적으로 하북절도사등사이자 천하병마부원수인 이광필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어조은과 손을 잡고 이에 반대했으며, 이로 인해 당군은 진영을 확정짓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동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사사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군의 진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틈을 타 공세를 가한 것. 이에 당은 패배하여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군사물자와 병기들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이광필과 복고회은은 황하를 건너 문희(산서성 문희현)로 몸을 피했고 어조은과 이백옥은 섬주로 달아났다. 하양 방위를 맡았던 이포옥 또한 하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후 이광필은 표문을 올려 그 자신에게 패전 책임이 있으니 벼슬을 깎아 달라 요청했고, 당 조정은 이광필을 개부의동삼사ㆍ시중, 하중절도사로 벼슬을 깎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