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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벧후 3:14-18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4-18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렇게 닥쳐올 일과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죄를 멀리하고 모든 사람과 늘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그리하여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쁘게 맞아 드리십시오. 15-16) 주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시간을 주고 계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의 많은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러 있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이것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하여 바울의 편지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멸망뿐입니다. 17)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미리 경고해 둡니다. 이러한 악한 자들의 속임수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18) 오직 영적으로 성장하여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영광이 지금이나 또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오래 참으시는 주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게 될지를 기억하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힘쓸 일(14) 주의 날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는 성도는 자신을 죄악에서 구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마 5:3-10).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님과 나 사이의 평강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15-16) 거짓 선생들은 구원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을 주의 약속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만, 사실 그것은 주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니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근거가 ‘주의 오래 참으심’에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관점을 배우고 배운 대로 적용할 때에 생기는 확신입니다. 말씀을 겸손히 배우고 배운대로 행하면, 내 안에 구원의 관점이 뿌리내림으로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삼가고 자라가라(17-18) 성도의 성화는 잘못된 것을 조심하는 것으로 되지 않고, 은혜와 지식에서 진보하는 것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거룩하게 되려면, 거짓을 삼가고 참된 것에서 자라 가는 두 가지 일을 함께 힘써야 합니다. 하나를 이미 알았다고 높은 마음을 품으면 삼갈 줄 모르다가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을 아는 지식에 깊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영적 성장만을 추구하며 새로운 것만 좇아간다면 스스로 무법자가 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거짓과 악을 피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거짓과 악을 삼가는 길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는 길입니다.
적용: 당신이 요즘 겪고 있는 관계나 재정, 질병 등 어려움 속에서 깨달아야 할 당신 짐과 흠은 무엇입니까?(14) 믿음의 공동체에서 당신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이 굳세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16) 지금 내가 삼가야 할 거짓과 악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고자 당신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17-18)
이솝우화에 여우에게 속은 까마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까마귀가 고깃덩이를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여우가 그것을 빼앗고자 감언이설로 까마귀를 현혹하여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하자 우쭐해진 까마귀가 “까악, 까악”하자 입에 문 고깃덩이를 떨어뜨려 여우가 들고 도망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믿음이라는 고깃덩이를 꼭 물고 있어도 불안, 의심 등의 방해물들이 당신을 꾀어낼 것입니다. 관건은 어떤 방해를 받아도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주님의 날은 반드시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을 준비하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4-18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정직과 거짓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정직하게 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짓을 좇아내는 용기가 정직을 낳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귀한 벼루를 몰래 사용하다가 그만 깨뜨렸습니다. 그 벼루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벼루였습니다. 이것을 본 하인은 어린 안중근이 아버지께 매 맞을 것을 염려하여 자기가 깨뜨렸다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싫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어린 안중근은 아버지로부터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하며 하인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야. 비록 종아리가 아프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라고 하면서. 걱정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린 안중근의 어른스런 태도에 하인은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정직했던 안중근은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정직한 사람이 커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잘못을 거짓말로 모면한 일은 없습니까?
아주 혼란한 세상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이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초대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칭송은커녕 욕만 먹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이번 정부 들어 고위직에 추천된 사람들이 온갖 비리로 지탄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받도록 살아가고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성도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얻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 기억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썼던 당시에는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만물이 영원토록 존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창조된 것을 믿으며 또한 세상의 종말을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약속의 말씀을 믿고 종말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과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요한이 고백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요한의 고백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믿음은 주님의 재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았던 주님의 재림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백성들이 모두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주의 재림이 막연히 늦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도적이 오는 것 같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야말로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게 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바라보고 또한 사모할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화를 내고 욕하고 비방합니다. 라가라는 말은 남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욕설로서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란 뜻의 아람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한 욕설이 아닌 쌍소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말을 흔히 하지는 않습니까? “너는 안 돼”부터 시작해서 “너 같은 게 살아서 뭐하냐?”고 하는 말까지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가 평강을 원하지만 우리의 보통 하는 말로써 벌써 평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놈,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놈”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쌍소리조차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정도로 우리의 심성이 악으로 물들어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우리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을 쉽게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의 평강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신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이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은혜 아래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는 나 자신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그 얼굴조차 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알거니와 내 안에 여전히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시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보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셨는데 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참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임금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받은바 구원이 바로 그렇게 값비싼 구원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어주실 정도로 비싼 값을 주고 허락해 주신 구원입니다.
주님의 목숨과 바꾼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작은 것에도 용서와 관용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런 상대방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게 어떤 직접적인 손해가 끼쳐졌다면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손해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속상한 나머지 외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의 평안이 먼저 사라집니다. 내 마음이 먼저 불편합니다.
내 마음의 불편은 내 삶의 불편과 육신의 불편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짧은 세상입니다. 어차피 잠시 지나다 떠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물론 살아가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왕이면 풍성하게 누리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족한 줄을 알면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고 항상 부족하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공동이었습니다. 방 하나를 두고도 온 가족이 다 둘러 앉아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혼자서만 방을 쓰려고 합니다. 물건도 내 것 네 것을 구분할 정도입니다. 이왕 물건을 써도 명품이어야 하고 비싼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명품들이 가장 많이 팔리는 상점들이 다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명품을 쓴다고 해서 내가 명품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부족해도 좋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내일 일까지 오늘 끌어안고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날의 고통은 그 날로 족하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이 오늘까지 나를 참아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십시오. 나는 온전한 자입니까? 나는 그렇게는 안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누구에게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흠도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 같이 상대방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입니다. 오래 참고 용납하기를 힘쓰고 서로 손을 먼저 내밀어 상대방을 붙들어주는 푸근한 세상,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알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되고 몰라도 좋은 것은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이단이 어떻고 삼단이 어떻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단을 잘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눅 2:42에는 어릴 적의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처럼 우리 역시 지혜도 자라고 키도 자라야 합니다. 물론 어른이 되신 분들은 더 이상 키는 안 자라겠지만 지혜와 지식에 관해서는 죽는 날까지 더 자라야 됩니다. 한데 우리는 쉽게 포기하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배우기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히나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입니다. 날마다 내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이런 나도 사랑하여 주시고 은혜로 세워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부터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고대광실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왕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왕으로 오신 이가 보잘 것 없는 외양간에서 나셨습니다. 구유가 침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목숨을 위하여 애굽까지 피난하셔야 했습니다. 애굽에 사시던 그 곳도 보잘 것 없는 깡촌에 토굴과 같은 곳이 주님이 어릴 적 사시던 곳이었습니다. 얼마 후 헤롯이 죽은 다음 다시 돌아온 어린 예수가 자란 곳이 어딥니까?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시골 골짜기입니다. 가장 대우받지 못하는 목수의 아들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바로 우리 모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낮고 천한 자라도 주님의 은혜 아래 예외가 없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스스로 서로를 이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결코 그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도 주님께서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한 마디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주면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나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게 되더란 말입니다. 내가 너무도 힘들 때 나의 위로가 되신 주님을 기억하게 될 때 나도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는 것이요 내가 깊은 수렁의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수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경험을 전해주며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가라는 것은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요 동시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깨우쳐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수없이 자기들만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제자들 앞에서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앉을까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섬김을 받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그 예수님은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 내어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목숨까지도 내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우리가 못할 일이 어디
사실 우리 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그 마음이 그렇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지 누구나 다 높여줘서 싫다는 사람 있습디까? 높임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데 예수님은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알고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야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1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1등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받을 칭찬도 없어요. 오히려 그가 1등을 못하면 욕을 먹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1등을 못했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친구인들 제대로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더 올라갈 자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꼴등은 어떻습니까? 더 이상 떨어질 자리가 없습니다. 꼴지만 벗어나도 잘 했다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데 그 사람이 정말 잘 한 것입니까? 당연히 잘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은 1등도 하고 그러는데 너는 만날 뒤에서만 머무냐?” 그럼 1등은 다 명품 인생입니까? 그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1등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명문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명품 인생을 사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론 명품 인생이 되면 좋겠죠.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 이루는 명품이라면 그것이 주님 앞에 서는 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나를 위해서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그 일이 더 쉬워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 자체로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요 동시에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안에 새로운 삶의 창조능력이 있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고후 5:17의 말씀처럼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빚어주십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자가 누구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치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주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오늘도 내 안에 계셔서 나의 능력이 되시고 치료자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게 하셔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되는 표적을 오늘도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힘써 알아가고 느끼고 그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이런 은혜의 손길을 펼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 이웃과 함께 하던 그 끈끈한 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함께 나누려고 하던 그 훈훈한 마음들을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권면처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음에서 떨어질까 삼가고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감으로 하늘 영광이 주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넘쳐 임하심으로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는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끈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알아 우리 역시 오래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길, 형통의 길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계절 따라 오가는 철새와 같이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를 잘 지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길이길이 자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자리를 지킬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스스로를 성장시켰음을 알게 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수 1:8~9은 말씀합니다.
커가는 것.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지킬 때 얻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피곤하다고 속상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번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오늘도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은혜가 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려면
베드로후서 3:14-18
베드로 사도는 이 두 번째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그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과정 그 이후에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갔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것을 간곡히 다시 설명하고 또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모양도, 그 성장의 과정도 다양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만 알아도 교회에서 일관된 신앙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한다는 것에서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렇듯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아주 다양하지만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출애굽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백성이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종살이를 하는 단계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 곧 물세례이자 홍해를 건너는 과정이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정이라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무관하다 여기고 자기의 의를 좇아 살지만 그들의 그 의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듯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는 도화지가 된다.
그렇게 홍해를 건넌, 물세례를 받은 여정을 지나면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광야에서의 삶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는 신호와 보호 아래에서만 삶이 유지되고 방향을 진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법도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길가다가 볼 수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지만 그들이 아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육신이 바라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바뀐 여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늘 ‘무엇을 할까?(Do)’, 하는 것과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래 있어야 육신이 생존할 수 있고,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진행해야 자신의 길도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서의 의와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에게 물어보고, 그 목사들은 그것에 답하거나 그 질문을 받는 권위를 얻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또 기도하여 영발을 강화하는 등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가진 숨겨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게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을 탐구하는 목적이다.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이며, 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고,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그것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혹은 그것으로 안 되면 죽어 천국에 가서 세상의 성공 기준과 같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얻으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을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자랑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이라고 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심히 경계하는 신앙의 여정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성도들이야 그런 과정을 지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베드로 서신이 기록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밝힘으로서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어떠함을 알게 하여 고백하도록 함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기록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교회에 다니다가 다시 이전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베드로 사도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바라던 것을 동일하게 바라고, 그 바라는 것을 위하여 이전에 숭배하던 것에 하던 행동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바라는 의와 선함과 소망이 동일한 상태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늘 육신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순교를 앞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기를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구분하려면 그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기가 그 속에 있는 상태로 다른 것을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기 고집에 빠지면 남의 말은 고사하고 자기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서 충분히 자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가나안의 여정이 있다. 이는 마지막이 아니라 사실은 시작이다. 이 가나안에서의 삶을 위하여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온 것이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구원이 목적이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같은 것이다.
신앙의 마지막 아니 본격적인 시작인 가나안 땅의 여정은 밟는 모든 땅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이요 생명의 여정이다. 땅을 밟으러 다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고 오직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가고 서며 머무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기 안에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표현해낼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밖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안에 그것에 대한 가치와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그 일에 대하여 인지하고 옳다고 여기는 대로 고집하게 된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좋은 예이다.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귀한 줄로 모르면 그냥 돌덩이와 같이 여기듯,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그 생명이, 그 생명의 의와 비밀이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교회도, 기도도, 성경도 모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취급한다.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면 그 추구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모두 종속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복락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의지하는 신들 중에서 급이 다른 능력자로 의지하라고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전한 것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나 바울 사도나 모두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고자 한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 혹은 그와 유사한 종교(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인간의 종교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들을 보면 교리의 조금만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서로 안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안에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둘 서로 안에 하나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는 고사하고 주장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서로가 같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보는데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난무하고, 이를 바로하기 위하여 다시 더 신학으로 연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경을 동일한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들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온전히 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독수리를 피하는 것은 독수리의 종류와 습성과 피하는 법을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본성이 되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해본들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데 왜 그러겠는가? 가나안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던가?
그러므로 성경이 풀리려면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 보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오고, 그 들어온 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의 안목과 가치관과 삶이 되어 살아가다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그것으로 보게 되는 그 여정과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니 성령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풀리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아니면 교황 아니라 교황 할애비라도 다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자기 육신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 자라가는 구원
벧후 3:14-18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는 넘어졌다 일어섰다의 연속이었다. 열심도 많았지만 실수도 많았다. 그는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 행동이 더 앞섰다. 기질로 말한다면 다혈질이다. 행동하고 후회하는 일이 많다. 실수도 많고 굴곡도 많았다.
*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나로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러나 물위를 걷자 말자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빠져 허우적거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코믹하다.
*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혼자 나서서 대답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이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또 나선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100점과 빵점 사이를 오고 갔다.
* 변화산에서 주님의 용모가 변하자 베드로는 너무 흥분을 해서 천막 짓고 여기서 아예 살자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오버다.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 행동을 종종 했다.
* 십자가를 지시기 전,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자 다들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말린다. 그때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당장 그러면 아예 목욕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얼마나 징그러운가?
*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기도하자 하면 졸고 깨어 있으라 하면 졸던 그가 나중에 하산을 할 때 제사장들의 무리가 오자 갑자기 칼을 휘둘러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말고의 귀에 붙여 주셔야 했다. 베드로는 칼을 써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책망을 받는다.
*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그만 여자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고 떠난다.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고 만다. 이 정도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제자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순간이 많았다. 핵심적인 특징은 불안정함이다. UP & DOWN이 심하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다. 주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 주셨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다. 게바는 아람어다. 게바의 헬라어가 베드로다. 베드로는 반석이다.
무엇을 느끼는가? 그에게 안 어울리는 이름이다.
왜 늘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그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을까?
지금은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언젠가 변화될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다. 예수를 믿으면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 된다.
* 베드로 후서를 통해 베드로의 놀라운 변화가 비쳐진다.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노사도로서 실수와 허물이 많았던 과거의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성도들을 향해서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원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이란 외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보지는 않지만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설 것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안에는 종말론적인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이 있다. 우리의 마지막은 어떤 장면일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 날 어떤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는가? 아마도 동일하게 갖는 생각은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 아닐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수는 없다. 베드로는 높은 수준을 기대하고 있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오점, 결함들이 많은가?
*17절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는 여기 “굳센 데서 떨어질 까 삼가라”고 하고 있다. 베드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는 과거에 굳세게 서 있지 못했다. 늘 흔들렸다. 제자로서의 그의 삶은 요동을 쳤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1: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영적 여정의 길을 걷고 있다. 긴 여정이다.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고 위험하다. 여정은 출발이 있고 끝 지점이 있다. 우리는 지금 도상에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넘어지고 추락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나도”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든다. 여행을 해보면 알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복병이 많다.
영적 여정에서 길을 잃을 수도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순례의 길에 늘 기억해야 하는 단어는 “삼가라” 마지막 골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늘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방심하는 순간 넘어진다. 자동차 사고가 주로 집 근처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집 근처는 익숙하기 때문에 방심하다가 사고를 낸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실족한다. 신앙의 여정은 늘 도전이고 시험이다. 한때는 잘 했다가 나중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다. 무엇이든지 갈수록 더 좋아져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한때의 신앙으로 만족하면 안된다. 왕년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은혜 생활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한다.
끝까지 잘해야 한다. 마지막 성적표가 중요하다. 군인도 마지막 계급장이 중요하다. 군 장성을 지냈는데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사람도 있다. 졸업할 때 마지막 성적표가 중요하다. 베드로 후서 마지막 장을 읽다 보면 마지막 성적표 생각이 든다. 영적 여정에는 늘 긴장감이 있다.
* 하나님을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동사가 나온다.
“자라가라”는 동사다. 왜 자라가라고 하고 있을까?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영적 성장을 강조한다. “자라가라” 신앙의 대명제다. 본문에서 “자라남, grow”을 놓치면 안된다. 자라난다는 것은 생명의 특성이다. 생명에 있어 자라남은 절대적인 것이다.
자라남을 생각하기 전에 전제해야 하는 것이 있다. 자라남 이전에 출생이 우선된다.
태어남이 없으면 자라남은 불가능하다. 생명의 탄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영적 출생이 있었는가?
거듭남(Rebirth), 중생(born again)회심 사건을 점검해야 한다.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자가 아니다. 태어나지 않았는데 성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영적 성장은 영적 태어남을 근거한다. 영적 출생을 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이전 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영적인 성장은 다른 것이다. 신자의 삶이란 불신자 보다 좀 더 나은 삶이 목표가 아니다.
베드로의 표현대로라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약간의 보수나 개조가 아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변화다.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이어야 한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왜 지난날 베드로가 불안정한 삶을 살았는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않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목표는 성장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는가?
성화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백성다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함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딜렘마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순간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다. 소위 성장 멈춤병이다. 신앙이 앞으로 나가기보다 뒤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세상과 구별됨이 아니라 세상을 닮아갈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큰 주제다. 신앙생활에서 계속 물어야 한다. 성장의 속도, 성장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드러나야 할 공통점은 자라나고 있어야 한다. 좀 늦게 자랄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자라고 있는가? 자라지 않는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생명은 자란다. 기계나 물건은 자라지 않는다. 생명 안에 성장의 힘이 들어 있다. 성장이 없다면 다른 말로는 생명 없음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상이다. 성장의 갈망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의 근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가만히 있으면 뒤로 밀려가는 힘에 지배를 받는다. “전심전력하여” 변화를 위한 노력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변질된다. 사람이 변질되지 얼마나 쉬운가?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들이 늘 작동되고 있다. 잠시라도 그냥 두면 죄성이 올라온다.
우리는 언제든지 악하고 게으르고 무지함에 빠질 수 있다.
성장을 위해 구체적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성장은 공짜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한 부분들을 극복하기 위해 영적 훈련을 해야 한다..
이전의 삶 그대로 살고자 하는 관성이 있다. 그 관성의 틀을 깨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지속적으로 밀려오는 유혹들과 싸워야 한다.
성장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방치된 영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을 해보라.
영적으로 발버둥을 쳐야 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
가장 무서운 증상은 성장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는 상태다. 더 자라고 싶은 열망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영적인 갈망이 없어져 버리면 자랄 기회가 없다. 그것은 매우 중증 상태다.
신앙의 건강을 테스트 해보라. “지금 내 안에 성장의 욕구가 있는가?” “영적 성장의 의지가 있는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의지가 없는데 노력할 리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그냥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이전과 같이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거룩한 열망이다.
먹고 사는 일상에 쫓기는 삶을 살다 보면 영적인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을 때가 많다.
영적인 부분은 방치한 상태로 두면 금세 뒤죽박죽이 된다. 무너지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 영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 영적 갈급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의 성장, 한때의 성장으로 끝나면 안된다. 건축을 하는 현장에 가 보면 멋있는 조감도를 세워놓았다. 언젠가 멋진 건물이 지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지금은 먼지를 날리고, 어지럽지만 언젠가는 멋진 건물이 설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짓다가 부도가 나서 오랫동안 방치 된 건물을 보면 귀신이 나올 것 같다. 흉물이다. 우리의 영혼도 그와 같다. 방치되고 가꾸지 않고, 성장하지 않은 영혼의 상태는 상상에 맡긴다. 밭도 비슷하다. 그대로 두면 못 쓰게 된다.
금방 잡초가 생긴다. 돌보지 않고 버려진 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계속 기경을 하고 옥토가 되게 해야 한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자신의 영혼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베드로는 그의 신앙이 자라지 않을 때 그것이 얼마나 주변을 힘들게 했는가?
주님의 일을 얼마나 그르치게 하고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냈었는가?
* 영적 성장에 중요한 요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➊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도 베드로는 낙심해 있었다.
부활의 주님을 보았지만 더 이상 따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너무 비참하게 무너졌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고 디베랴로 떠났다.
사실상 상황 끝이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하기도 부끄럽고 계속 따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 것이다.
세상의 스토리 라면 여기에서 끝난다. 그러나 2막이 시작된다. 2막은 주님의 은혜다.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다시 찾아와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추적이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중요하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산다. 영적 성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계발이나 자기 관리와 다르다. 죄성을 가진 우리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만으로는 부정적이다. 안된다. 그냥 죄의 힘에 끌려 다니다가 살다 간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더 나빠진다.
우리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심기워져 있다. 성령이 우리안에 있는 그 씨를 자라게 할 때 성장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의 자리에는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내미시는 은혜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붙잡는 것이다.
베드로가 지난 날을 회고해 보면서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들쑥날쑥한데 하나님은 일정하시다. 언제나 신실하시다. 변함이 없이 다가오시는 은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다면 소망이 없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는 우리는 다르다.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완성의 자리까지 데리고 가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은혜안에서 자라게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힘들지만 순종하게 하는 힘도 은혜의 힘이다. 내가 하려고 하기 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➋ 18절을 다시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왜 베드로가 지난 날 그렇게 많은 실수를 했는가? 그가 제자로 따라 다녔지만 주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주님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왜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도상에서 제자로서 부인을 했는가?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전도를 할 때 예수를 전하는 것을 부끄럽다면 아직 주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백성됨의 자랑과 기쁨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영의 눈이 뜨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어떻게 이전에 그처럼 사랑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을까? 주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주어진 배부름이 그렇게 하게 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는가? 다니엘이 어떻게 사자굴의 위협도 두려워 하지 않았는가? 그런 담대함들이 그저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은 안다는 것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알지어다”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신선하고 리얼한 체험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험의 발전이 일어나야 한다.
호세아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다. 여기 안다는 것은 깊은 교제를 통해 경험적으로 아는 앎을 말한다. 종교적 격식을 갖춘 형식적인 예배나 기도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신앙이 미궁에 빠지거나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깊어지지 않으면 신앙은 맴돌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뿌리다. 뿌리가 없으면 자랄 수 없다. 하나님을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라.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나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가장 큰 주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이 크신 분이다. 하나님, 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혹자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놀라움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그때 우리안에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영적 여정에서 한 순간도 관심이 식어지지 않아야 할 주제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이다. 신앙의 테크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열심이 주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 혹은 문제들을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삼는 것이 최상이다.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들이 쌓여갈 때 그것이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성경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더 깊이 만나는 경험들을 하라.
*베드로는 주님 앞에 서는 날이 가까워 왔다. 그렇게 요동치던 인생이 어느 순간 성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오순절 사건 이후 급속도로 변화를 입었다. 일등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던 그가 겸손해졌다.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흔들렸던 그가 이제는 굳게 세워진 모습이다. 아름다운 종착점을 보여 준 베드로의 모습이다.
주님이 기대하신 대로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세워 졌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순교함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지켰다.
여러분, 승리는 우리의 손에 의해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영적 성장을 위해 멈추지 않는 노력을 계속 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계속 자라가야 한다. 언젠가 완성된 그 날이 올 것을 바라보며 믿음 안에 굳건히 서 있고 계속 성장하는 신앙이 되라. 영적 여정의 끝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포기하지 말라.
신앙의 끝 지점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은 한 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조금씩 자라남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신앙의 기쁨은 바로 그 변화에 관한 것이다.
때로는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도 그것으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절망은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망가지고 없어지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절망을 전제한 삶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목표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것이다. 갈수록 향기롭고, 매력적이고, 흠모할 만한 것들이 우리안에서 흘러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빚어질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성장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더딜지라도 낙심하지 말라.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다시 시작하라. 자라가야 한다. 멈추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더 나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그 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라.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7-18 / 조정의 목사
여러분이 만일 유언을 쓴다면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죽는다면 나에게 맡겨진 자녀들에게, 청년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쓰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에는 베드로의 그런 유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 여기서 ‘장막을 벗는다’는 것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19).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베드로는 9개월 간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매를 심하게 맡고 그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그의 죽음 직전에 쓰인 유언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기록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이 편지는 베드로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직간접적으로 돌봤던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쓴 가장 큰 목적은 그들 중에 있는 거짓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중에도”(2:1) 교회 밖에 여러 이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거짓교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2:1) 이 편지는 그러한 다급함을 담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교사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색과 탐심, 정욕, 교만, 비방, 불의, 속임, 의심, 탐욕, 자랑 등의 죄를 언급하는데 바로 거짓교사의 특징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강림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그러한 태도는 방탕한 삶을 양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삶과 교리를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 정리하고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랑으로 저의 설교를 듣고 계실 것입니다. 주 안에 한 형제 자매이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가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사랑을 받았고 그 아들이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랑, 성령의 돌보심을 받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 베드로는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는 당부는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2)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하려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일마다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정확하고 확실한 진리를 전파할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아는 지식이 정말 내 것이 되도록, 그 아는 대로 살 수 있도록 계속 말씀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신 6).
그 당부의 첫 번째는, “삼가하라”입니다.
이것은 ‘주의하라’, ‘조심하라’입니다. 자신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한 당부입니다.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위협하는 많은 것들에서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무법한 자들(거짓교사)의 미혹함에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미혹합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주의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삶은 불의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성도를 미혹되게 만듭니다. 믿는 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을 했는데, 담당선생님이 일찍 귀가하신 날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있습니다. 저마다 규칙을 어기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고 있다면 그런 유혹이 덜하겠지만 한 명 한 명 사라져 결국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9)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실 정도로 악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롯은 의인이었지만 악한 사람들로 인해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생각이 곧 법인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섞여 살다보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륜이나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불법 다운로드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속이는 것, 분노하고 짜증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교리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당시에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이단사상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권위를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들이 무엇일까요? 계시에 대한 가르침(성경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서 감동을 주실 수 있는 분인가,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를 통해 감동을 주실 수 있는가)에서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리적인 부분도 바로 서야 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와 상관없이 나의 깨달음에 의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려고 노력하는 행동들도 있습니다. 베리칩과 제3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유럽이 하나가 되는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때와 시는 자기의 권한에 두셨고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음모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적으로 구원은 확정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점진적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혼, 몸, 삶의 순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적인 교리도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내면의 영혼은 의로운 사람이 되는데 육체는 죄에 찌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교리도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 하나, 기복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승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예배하는 신앙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계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 교리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데 성도들은 이 교리들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교사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진리를 분명히 알고 그 가운데 서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저는 요즘 아내의 건강을 챙기다보니 계속 유기농 음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먹는데 내 영혼의 문제에 이만큼 신경 쓰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영양소가 몸으로 퍼져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영혼에 들어가는 음식들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해로운 음식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진리가 아닌 가르침들은 신앙을 병들게 하고 삶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당부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이런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보고 듣고 읽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해로운 것이 섞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봐서 순전한 것인지 진리인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당부는 “자라가라”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앞의 당부가 ‘수비’라면 이 당부는 ‘공격’입니다. 우리가 주의하면 삼가고 덜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비만 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주의하고 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공격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20살인데 갓난아기의 모습이라면 정상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지 10, 20년이 되어도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도 자라가는 것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은혜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말씀만이 거짓이 전혀 없는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모습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격입니다. 영적인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할 때 유일한 공격무기가 바로 성령의 검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당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이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것은 지상대명령이라고 알려진 명령입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사도들은 말씀대로 제자를 삼아 가르쳤고 말씀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또다른 제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항상 떠나지 않겠다하신 분이 약속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동일한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입술과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당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들도 잘못 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한마음교회
지난 주일에 김영우 황보미좌 가정이 아들 요한이가 백일이라고 떡을 내고 그 동안 기도해 주신 성도들의 기도에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목양실에 오셔서 잠시 교제했었는데 두 분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결혼 6년만에 낳은 아들이 엄마 아빠도 알아보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낳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개역)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성장을 멈추어 버리면 그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기쁨이 큰 것만큼 슬픔과 고통도 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낳은 아들입니까?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생활에 참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 베드로후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네 가지 “힘쓰라, 여기라, 삼가라, 자라가라”는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간추려 보면 세 가지 권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세 가지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I. 흠이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14)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도덕적 영적 순결을 나타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힘쓰라는 말은 1장에서도 세 번이나 나온 단어입니다(5,10,15). 그만큼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라, 부지런히 온갖 노력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22장 20절을 보면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하자가 있는 것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7, 개역)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벧전 1:19).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덮어 주시고 앙털같이 희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오점을 남기고 허물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쓰지 않으면 죄악된 습관과 타락한 본성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만나기 전에 부끄러움이 없는 거룩한 자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정결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인 경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돌아보는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또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은 유익하지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은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마음에 참된 평안한 마음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허물과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흠 없는 자로 설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을 자백하고 주짐의 보혈로써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참된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늘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으로 이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II.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15-17)
15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단자들은 주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을 꼬투리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개역)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주님께서 일절 오래 참으시는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는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서 주의 오래 참으심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참고 계시는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자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진리는 바울의 편지에도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그 편지들 중에는 알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무식한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입니다. ‘굳세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을 가리킵니다.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심령들은 미혹받기 쉽습니다. 가끔 영적으로 귀가 얇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신앙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벧후 1장 19절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에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샛별처럼 떠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에 뿌리 내리는 신앙이 가장 확실한 신앙입니다.
성경은 더러는 우리가 알기에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입니다. 억지로 푼다는 말은 ‘왜곡하여 해석하다’, ‘비틀어 풀다’는 뜻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은 편지를 쓴 바울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것을 다 무시해 버립니다. 자기들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이단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가장 성경적인 진리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성경구절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뽑아내어 완벽하게 짝을 맞추어 놓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앞뒤가 잘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또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부분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신천지에서는 무료 신학원을 세워서 진리를 알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서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44,000명의 성도들의 반열에 들어가야 한다고 미혹합니다. 자기들의 교회에 들어온 144,000명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 2,000년 동안 믿은 성도들은 다 어떻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가지고 모든 성경말씀은 비유로 해석하고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주신 사건도 비유로 해석하여 다섯 명의 삯군 목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비유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이며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비유적으로,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숭이 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구절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어려운 구절을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묻어 두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말씀들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어릴 때에는 젖을 먹어야 합니다. 딱딱한 음식을 주면 소화를 못 시켜서 배탈이 납니다. 이처럼 어려운 구절이 나오면 나의 신앙이 좀 더 성장한 후에는 깨닫게 되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은혜를 받으면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을 굳게 붙잡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개역)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새번역에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무법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이단의 특징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무법한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있는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1:12).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서 세운 신앙은 가장 확실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또 이단자의 80%는 말세론을 들고 나옵니다. 이들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들고 나옵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은 수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이 상징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런 원칙들을 무시하고 상징들을 바로 자신들의 교주와 교리와 접목을 시킵니다.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처럼,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성경을 100% 확인하고 깨닫고 있는 것처럼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이용해서 성경을 인간의 머리로 억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마귀가 역사하여 사단을 섬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마귀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합니다. 인간적인 본성을 자극해서 세상을 사랑하도록 유혹합니다.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도록 유혹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은혜를 남용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방탕하게 살도록 살도록 합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로 유혹합니다. 또 우리가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그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또 전도를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도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해야 하고, 한 집도 빼 놓으면 그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가가호호방문하여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국 중요한 교단에서 이단으로 결정한 여러 단체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교 장로회 합동총회가 이단으로 결정한 관련 교회 및 단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교,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나운몽, 박태선, 동방교, 한국복음신보, 통일교 문선명, 김기동 베뢰아, 신천지 무료신학원(이만희), 할렐루야 기도원(김계화), 류광수, 이재록, 유복종, 빈야드운동, 말씀보존학회 등입니다. 또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이 이단으로 결정한 교회 및 단체는 더 많습니다. 위에 언급한 이단 외에도 권신찬(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 소천섭(구원파), 이선아(밤빌리아추수꾼), 박윤식(대성교회), 박명호(엘리야복음선교원), 이장림(다미선교회), 이초석(한국예루살렘교회), 서달석(강서중앙교회), 황판금, 이옥희(태백기도원), 이단옹호, 기독교 세계 부흥선교 협의회, 기독교 총회 선교연합회, 세계부흥클럽, 성신클럽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을 분별하고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III.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8)
18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이 말씀은 베드로후서의 결론이요 마지막 축도입니다. 우리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영적으로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떼를 쓰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철이 들어가는 것을 성숙했다고 합니다. 성숙해지려면 초보 신앙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구원받은 것 하나로 만족하고 거기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성장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직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안에서 자라가라고 했고, 다른 하나나는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첫째,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은혜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값없이 받는 첫 번째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이 은혜는 가장 기본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개정)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자란다로 그랬습니까? 복음 듣고 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우리 안에서 은혜가 자라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일 뿐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에서 계속하여 성장하여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더 은혜가 넘치는 신앙으로 자라가야 하고, 금년보다 내년에는 더욱 은혜에 넘치는 신앙으로 자라야 합니다.
구원 받은 것은 은혜 받는 생활의 시작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나에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자녀들도 어릴 때는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달라집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어머니의 노래’ 어떻게 부릅니까? 그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멜로디를 따가 웃으면서, 장난치면서 부릅니다. 그러나 4-50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를 때 그 가사가 가슴에 부딪혀 옵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하면 눈물이 고여옵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숙해 진다는 말은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이처럼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데 비례합니다.
둘째로 저를 아는 지식에 자라 가야 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지식은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알아가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부부가 결혼을 하면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함으로 서로를 알아갑니다. 맨날 부부싸움만 하는 부부는 서로를 모릅니다. 한이불을 덮고 자도 서로를 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안다는 말은 참으로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름만 알아도 안다고 합니다. 조금 알아도 안다, 많이 알아도 안다고 합니다. 처녀 총각시절에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압니다. 어느 정도 알고 신뢰가 생기면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처녀 총각 시절에 안다고 하는 것은 조금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 서로 사랑하면서 계속 알아갑니다. 저는 올해 35주년 기념일을 보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내를 잘 몰라서 섭섭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존재는 서로 사랑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분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만하면 예수를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은 일정한 기간이 있어 입학과 졸업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것은 시작은 있으나 졸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지만 우리의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 성경에 증거된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확실한 그리스도이시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면 성경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바로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의 단일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바로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호세아 4:6절 다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무관심하면 하나님도 무관심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으면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 자녀를 잊기를 원하십니까? 기억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 늘 기억해주셔야 됩니다. “Because you have ignored the law of your God, I also will ignore your children.”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 무시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자녀들 Ignore해버리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공부를 겸손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생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가장 고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상식, 과학적 지식, 철학적 지식, 종교적 지식들도 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대소변이라는 말인데 배설하고 나면 후련하고 시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8절에도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결론적으로 우리가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힘쓰라, 삼가라,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프랑크푸르트 우리교회
거의 10여년을 강해를 해 왔는데요, 매번 한 권의 책을 마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마무리를 하게 될 베드로후서는 다른 책보다 더 그런 것 같아요. 이 좋은 말씀을 왜 이렇게밖에 전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커요. 그래서 오늘 마지막 강해를 준비하면서 온 마음을 쏟았어요. 여러분과 함께 제가 본문 속에서 경험한 마지막 말씀의 은혜가 나누어지면 좋겠어요.
힘쓰라,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의 결론에 가깝습니다. 이 편지를 쓴 이유는 3:1절에서 이미 말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일깨워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 기억의 이유는 마지막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거였구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그걸 오늘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서 알려주는데요, 세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명령하고 권면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제 오늘 베드로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세 개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천둥 같이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이면 좋겠어요. 함께 진실하게 말씀 앞에 서보지요.
먼저 앞의 두 개가 14절의 “힘쓰라”와 17절의 “삼가라”입니다.
먼저 힘쓰라는 가르침을 볼게요. 무엇을 힘쓰냐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거예요.
이 점도 없고 흠도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편지에 이미 두 번이나 나왔어요. 베드로전서 1:19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실 때, 그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하신 분이셨다는 거예요. 그게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본질이셨어요.
그리고, 또 이 표현이 베드로후서 2:13절에 등장을 하는 데요, 여기에서는 거짓선생들을 표현할 때, 아예 그들을 “점과 흠”이라고 지칭을 해요.
완전히 구분한 거죠. 예수님은 점과 흠이 없으시고, 거짓선생들은 점과 흠 자체구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바보 같고 아무리 몰라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너무 분명하잖아요.
여러분 “힘쓴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아직 부족하니까, 아직 해야 하니까 힘쓰는 거죠. 노력하는 거예요. 우리가 소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태도가 흠과 점이 없기를 힘쓰는 거예요.
실제로 점과 흠이 아예 없다는 건 우리에게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힘쓰라는 거구요, 힘쓰라는 것은 여전히 모자른다는 것을 전제해요. 그러니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일상에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된 것들은 심판에 직면하게 될 거구요, 흠 없고 점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심판의 주권자가 되실 거예요. 그 가운데에 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라는 뜻이에요.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르게 설명하면요, 이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돌아서야 하고, 우리의 선택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제가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이제 베드로후서를 마무리하면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의 매주 참 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서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것들을 선택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유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하고, 스스로 불의로 얻는 삯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장 흔한 것은 점점 더 세상에 익숙해 지다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점점 더 세상에 빠지는 경우일 거예요.
유혹에 넘어가는 것, 불의를 스스로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익숙해져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그것도 옳은 것은 아니에요. 솔직하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결단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러려면 세상에서 손해를 볼테니까요. 여전히 세상이 먼저인 거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알아요. 작은 거 하나 바꾸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뜻은요, 우리가 이미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는 뜻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요, 하나 바꾸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그건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래서 “힘쓰라”는 거예요. 언제까지 못 들은 척, 나는 아닌 척, 안 해도 괜찮은 듯,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힘쓰라” 흠과 점이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삼가라, 미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그 다음 권면은 “삼가라”에요.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바울이 여기에 나오는지는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요. 가장 선의로, 가장 오늘 본문의 의미에 맞게 해석해 볼게요. 바울도 재림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편지에서 언급을 했어요. 당시 초대교회는 박해가 심했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가르친 것도 고통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 소망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그 소망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바울은 은혜만을 강조했으니, 은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고, 삶은 외면하면서 바울을 핑계 삼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잖아요.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 사람들을 16절에는 이렇게 표현해요. “무식한 자들”이다, “굳세지 못한 자들”이다. 무식한 자들은 진짜 무식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왜곡하는 사람들이구요, 굳세지 못한 자들은 왜곡하는 자들에게 넘어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오해를 한 게 아니에요. 왜곡한 거예요. 오해는 잘 몰라서이지만, 왜곡은 의도적인 거예요. 이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해요. “억지로 푼다”는 것은요, “밧줄을 꼬다, 팔다리를 잡아 늘리는 고문을 하다” 이런 뜻이에요. 일부러 꼬고, 고문을 해서 상태를 변형시키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모르는 거예요, 악한 거죠.
그런데요, 저는 우리가 이런 모습을 닮아 있다는 게, 이 악함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있는데도 모른다는 게, 모르는 척 한다는 게 너무 속이 상해요. 마음이 아파요. 이런 교회도 많고, 이런 교인들도 많아요. 이단도 그렇고, 이단의 행태를 가진 사람들도 그렇고, 보통의 신자라는 사람들도 의도적으로 말씀을 비틀어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몰라서가 아니라 아는 데도 그래요. 이 “억지로 푼다”가 다른 사본에는 “교묘하게 풀다”로 쓰여진 것도 있어요. 이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삼가라는 거예요. 거짓된 것에 미혹되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질까 하는 염려를 가지고 “삼가라”는 거예요. 여러분, 삼가라는 단어는요, 그냥 뭘 해라라는 명령보다는 염려하는 마음과 따뜻함이 더 크게 묻어 있는 단어에요.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거구요. 간절함에 더 가까운 단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잘못된 것에 빠지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그것만 안하면 너무 좋을 텐데 하는 조바심이 있어요. 그러면 빠져들지 말고 삼가라고 자꾸 말하게 되잖아요. 가족 중 누군가 이단에 빠져 들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오늘 베드로는 우리가 이단에게 미혹되어 빠져들게 될까봐, 그래서 예수로부터 멀어질까봐,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신앙마저 놓치게 될까봐, 그러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게 “삼가라”는 권면이에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제가 이 마지막 베드로후서를 돌아보면서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면서 가장 깊이 느껴진 게, 예수와 함께 가장 먼저 공생애를 시작했던 사람이, 그 예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3년이나 함께 숨을 쉬며 호흡했던 사람이, 때로는 넘어지고 예수를 부인하고, 결국 통곡하며 돌아오기도 한 사람이, 그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고 디베랴 바닷가까지 찾아오셔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이렇게 간절하게 염려하면서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실한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동적인가 하는 거예요. “삼가라”는 말에는 그 간절함과 따뜻함이 있어요.
자라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응답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요, ‘오직’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마지막 권면대로 자라가는 거예요.
이제 몰랐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이제 미혹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겁니다. 수많은 왜곡과 허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 모든 끈질긴 유혹에서 돌아서는 겁니다.
우리는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기회가 주어졌어요. 김만종 목사가 베드로후서를 하는 내내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못 들은 척했고, 알면서도 머물기를 원했고, 바꾸는데 힘쓰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주님이 아무리 감동하셔도, 나는 세상 자리에 있었던 거죠.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세상 핑계는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십자가의 은혜로 서 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핑계가 아니라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진실하고 커진다면, 유혹에 쉽게 넘어서고 욕망으로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정도면 괜찮다는 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머뭇거리는 것도 응답이 아닙니다. 그건 자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신앙에는 제자리가 없습니다. 제자리에 있겠다고 하는 건 퇴보하는 거예요. 참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은 날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돼요.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것들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자라가야”합니다. 영적 성장통을 겪어야 해요. 주님의 은혜에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해요.
오늘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요. 베드로가 사랑하는 자들, 그들은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이기도 해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베드로는 더 간절한 거예요.
유퀴즈온더블록이라는 프로에 SG 워너비라는 가수 그룹이 나왔어요.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시공간을 초월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 질문에 멤버 중에 이석훈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바르게 살아라” 그렇게 유언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가서 이야기를 할 때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잘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잖아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야 해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너무 무너지고 절망 앞에 선 것 같은 지금 이 시간, 이 시대, 지금이 우리 한국교회가 주님께로 돌아서고, 주님께로 자라가야 하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을 때는 점점 더 악해가고, 결국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는데, 바벨론 포로기의 그 고통 속에서, 절망 속에서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들이 본 것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아니라, 2,000km나 떨어져 있는 초라하게 무너진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포로라는 절망의 자리가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고, 또 조금만 버티면 그 제국 안에서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세상적 욕망도 아닌, 먼 곳 예루살렘을 소망으로 품었고, 그 마음에서 그들은 신약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어요. 그들이 품은 것은 결국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어요.
저는 지금이 우리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 살아갈 그때라고 믿어요. 저는 초대교회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그들의 삶을 보고 계셨고,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그 마음을 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보고 알고 듣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만 남았다고 믿어요.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옳은 것에 힘쓰고, 악한 것이나 욕망을 삼가고, 주께로 주께로 발돋음 하듯 자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제 머뭇거리지 마십시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서고, 그분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신윤식 목사
사도가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신자에게 고난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의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를 불렀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 불러 내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있던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이고 어둠이 아닙니까? 그곳에서 불러내었다는 것은 신자는 더 이상 세상과 관계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보지만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그네일 수밖에 없고, 나그네로 살기에 고난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성취하실 말씀을 조롱합니다. 지금까지 재림이 없었다는 이유로 재림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3:5절에서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물로 세상을 심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을 부인하면서 세상에 집착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재림이 연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모두 회개하고 멸망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없는 삶을 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흠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설사 그 행동에는 흠이 없다고 해도 마음은 언제나 흠과 점으로 가득찬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사도는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앞에서 흠있고 점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12-13절을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거짓 선생들을 점과 흠있는 자로 말합니다. 즉 점과 흠있는 것은 거짓 선생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사고방식은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긴다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점있고 흠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강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채우고,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데서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존재도 없는 상태를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강은 세상의 연락을 기뻐하는 마음으로는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천국을 소망하라는 말은 하면서도 왜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천국을 말하면서 세상에서의 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영혼도 잘되게 하시고 육신도 잘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면 사도들은 영혼은 구원받았으나 육신은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3: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앙은 천국 하나만을 바라보는 것이지 천국과 세상을 동시에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조차도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약속하신 것처럼 억지로 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16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경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굳센 마음으로 서 있지를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결국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지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가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며 편지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존의 상식과는 전혀 상반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은 한 성령 아래 있다면 사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진리와 상관없는 인간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만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본다면 이해 못할 내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심정으로 사도의 말을 대한다면 모든 말이 진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며, 내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나를 자랑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문이며 사명임을 안다면 사도의 모든 말은 생명의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사도의 결론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많이 알아가는, 즉 머리에 지식이 쌓여 간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항상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이유를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경건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정직과 거짓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정직하게 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짓을 좇아내는 용기가 정직을 낳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귀한 벼루를 몰래 사용하다가 그만 깨뜨렸습니다. 그 벼루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벼루였습니다. 이것을 본 하인은 어린 안중근이 아버지께 매 맞을 것을 염려하여 자기가 깨뜨렸다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싫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어린 안중근은 아버지로부터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하며 하인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야. 비록 종아리가 아프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라고 하면서. 걱정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린 안중근의 어른스런 태도에 하인은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정직했던 안중근은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정직한 사람이 커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잘못을 거짓말로 모면한 일은 없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장 14~18절 / 이정선목사(타우랑가한인교회)
우리가 흔히 자녀들을 야단칠 때 ‘너 왜 그렇게 생각이 없냐?’ 이런 말을 씁니다. 생각이 없으면 옳은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사려 깊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앞뒤 상황을 좀 더 살폈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생각이 짧아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경기를 예측해서 사업 운영을 합니다. 앞으로 경기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망하는 일들을 종종 봅니다. 이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면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생각 있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질서가 붕괴되고 소멸될 것입니다. 수명이 다 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결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하지 못한 모든 더러운 것들이 함께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신자들은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악된 세상과 함께 멸망하도록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도록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신자의 삶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다는 것은 거룩함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베드로는 2장 13절에서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을 점과 흠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거룩함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거룩하지 못한 특정한 사람들을 빗대어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베드로가 2장에서 점과 흠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거짓 선생들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이단을 끌어들이고 진리를 왜곡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꾀임에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빠진 사람들은 주 앞에서 점과 흠을 가진 사람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이단이 없을 때가 없었지만, 지금도 이단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특히 신천지라는 집단의 행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악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신자들을 속여서 거짓된 진리를 따르게 하는 죄악이 얼마나 크고 그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엄중할 것인지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한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반대로 잘 믿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끌고 갔으니 하늘에서는 얼마나 큰 슬픔과 하나님의 진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 대한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벧후 2:4).
그러면 사람들을 거짓된 진리로 끌고 간 거짓 선생들만 잘못입니까? 그들만 심판을 받을 것입니까? 끌려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까? 그들 역시 주 앞에서 점과 흠을 가진 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추궁에 아담은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이지요. 그렇다고 아담이 책임을 면했습니까? 오히려 선악과를 먹은 범죄의 대표자로 아담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와 역시 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다고 변명했지만, 자기도 먹고 남편까지 먹게 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미혹을 받았다 할지라도 최종적인 결정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넘어가면 자기들 역시 그들과 같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 앞에 설 때 점과 흠이 있는 자들로 나타나지 않도록, 다시 말해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진리를 떠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주 앞에 설 때 평강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내가 평안한 상태에서 주 앞에 선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도록 번역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평화 가운데 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니 아무런 트러블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로 만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점과 흠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긴장 속에서 또는 전쟁으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쓰라는 단어를 영어성경들은 be diligent, do your best, make every effor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악된 성품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한눈을 팔면 거룩함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노력이 끊임없이 행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make every effort,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룩함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함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분의 의로 우리에게 옷 입히시고,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우리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책임과 역할은 그 의로움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에 힘입어 구원받았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주셨으니 다 끝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깨끗한 옷이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지요. 주의 오래 참으심을 조급하게 생각해서 섣불리 잘못된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해야 하고, 아직 건강할 동안에 봉사해야 하고, 재물이 있을 때 구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주어진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기회로 삼는다면,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 될 것이고,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더 살다가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행동이 되겠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와 바울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인데, 갑자기 나타난 바울이 교회와 복음을 확산시키는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분리주의 사상이 큰 장애가 되고 있었는데,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들이닥치니까 황급히 자리를 피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이방인을 받아들여야 할 교회의 방향성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없을 때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이닥치니까 안 그런 척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와 바울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이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 박해의 선봉장이던 사울이 회심하고 전도자로 변한 것을 가장 먼저 인정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갈 1:18, 2:9). 또 바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보고하고 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지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 모임에 참석했던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주장에 동의하였고, 그 모임의 의장이었던 야고보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두 위대한 사도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지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과 같은 동료 사도라고 인정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 중에서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바울을 인정합니다.
바울이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당시 바울의 편지들은 여러 교회들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바울의 편지들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들은 그냥 자기 생각을 쓴 것이 아니라 받은 지혜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들을 다른 성경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명하신 것을 진리의 내용과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들을 거기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편지에서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는데, 이런 일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지금까지 말한 내용들, 더 나아가 첫 번째 편지에 썼던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부활, 세상의 종말과 심판, 믿는 자들을 위한 하늘의 교회 등, 기독교의 교리 전반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학문도 깊이 들어가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다 박사가 아니고 다 선생이 될 수 없지요. 하물며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인간에게 설명하는 것이 성경인데, 그것이 다 쉽기만 하겠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은 너무 차이가 큽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일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성경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무식하게 억지로 해석을 하다 보면 당연히 엉터리 해석이 나오겠지요.
선생들의 교훈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알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풀어서 엉터리 해석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해석이 매우 그럴 듯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성으로 풀었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에 들어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신화적인 요소라고 해서 제거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인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또 엉터리 해석에 사람들이 미혹되는 이유는 너무나 황당무계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의 특징인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혹세무민이라고 해야겠군요. 이단에서 하는 얘기들은 너무 그럴 듯하고 솔깃하거나 또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가 많습니다. 그래도 솔깃한 얘기에 넘어간 사람들은 이해라도 되지만,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얘기에 넘어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매우 유능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미혹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굳센 데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병균이 없는 곳으로만 피해 다녀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병균이 침투해 들어와도 병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고 거짓 선생들의 꾀임이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를 받아 경험한 사람이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행동할 때, 그 은혜는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은혜 안에서 자란다는 것은 믿음과 경건한 삶이 더욱 성숙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이 좀처럼 자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는데, 그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골프를 할 때 어떻게 스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대로 실습을 해보지 않으면 실전에서 실력이 늘겠습니까? 믿음은 행함입니다. make every effort, 이 행함으로 통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목적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알아야 속지 않습니다. 또 알아야 행할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요.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면서 그 진리로 인하여 어떠한 거짓이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몰라서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별별 이단들이 횡행하고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 베드로가 이 거짓 선생들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리고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신자들에 대해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신자들을 향하여 뜨거운 가슴으로 권면하고 경고했던 베드로 사도의 절규가 오늘 이단들의 공격과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는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 명심하고 진리 위에 굳게 서서 한결같이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자라 가라
벧후 3:14-18 / 조정헌목사(평온교회)
우리가 아이들을 길러보면 철이 든 아이가 있고, 철이 덜 든 아이가 있습니다. 철이 덜 든 아이는 항상 자기 생각만 하고 뭐든지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집안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뭐든지 사달라고 조르거나 먹고 싶다고 떼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자라 철이 들고 의젓해지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들이 달라집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성도들도 있고, 덜 성숙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덜 성숙한 성도들은 매사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께 ‘늘 주세요.’ 라는 기도만 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시집 장가 잘 가게 해주세요.” “취직 잘 되게 해주세요.” 한마디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베드로후서를 살펴보면서 한 때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심오한 말씀을 기록했을까! 매우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신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베드로후서의 가장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17절 말씀에 보시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또, 18절 말씀에 보시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안정된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안정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항상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6:3에도 보시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믿음이 좋았으면 지금도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안정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서 좋은 믿음, 건강한 믿음, 성숙한 믿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다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생동감이 있어야 하고, 또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균형을 잘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는 안정된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 여기에서 ‘낙심’이라고 하는 단어는 영어성경에 보면 ‘졸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시험이나 유혹에 넘어지거나 쓰러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해주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 우리에게 낙심이 찾아오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낙심을 물리치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삶을 우리에게 강조해주신 것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6:9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낙심이고, 또 하나는 피곤함입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잘 물리칠 때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4에도 보시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또 10:38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뒤로 후퇴하거나 물러선다면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을 때는 그들의 신앙이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오랜 광야생활로 심신이 피곤해지고, 목이 마르고, 고기를 먹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우상 앞에 절을 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견고한 신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견고한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경 주석학자인 헨드릭슨은 요한계시록을 “넉넉히 이기는 자”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견고한 신앙을 잘 유지해야 될 것임을 베드로후서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교훈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 안에 거짓교사들 즉 이단들의 미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죄의 성품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인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신앙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 세상이 그런 우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견고한 신앙을 계속 유지하라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가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인 용기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용기를 내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인간적인 용기나 배짱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이 바로 베드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가실 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땅에 떨어뜨린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이것은 용기나 배짱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을 향해서 다 주님을 배반해도 자기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와 배짱이 없으면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인간적인 용기나 배짱에 있어서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가 결국에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런 용기와 배짱은 사라져버리고 작은 계집종의 말에 겁을 먹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적인 용기와 배짱을 가진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이런 아픔을 경험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것들에 호소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것인가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더 견고해지기 위해서 오늘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신앙의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15절과 16절에 보시면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쓴 편지도 그렇고... 바울이 쓴 편지도 영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가지고 모든 시험들을 잘 극복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주는 최고의 길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의 삶을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들의 삶은 별로 아름답지가 못합니다.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세상의 유혹 앞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여 즉 말씀을 날마다 읽고 듣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 ‘후탁성경’을 가지고 나오신 분은 안계십니까? ‘후탁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하도 안 읽으니까 먼지가 쌓여서 입으로 ‘후’ 불고 남아 있는 먼지를 손으로 ‘탁탁’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성도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만 잘 읽어도 삶의 문제가 거의 해결이 됩니다.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는 직접 시험해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인생의 모든 답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스님이 시주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손에 주발을 들고 여러 사람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주발을 톡톡치면서 염불을 외웠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신실한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문 앞에 오랫 동안 서서 시주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신실한 성도는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이렇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주기 전에는 절대로 안가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러자 그 성도가 한술을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그러면서 스님이 들고 온 바구니에 쌀과 성경책을 한권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사찰로 돌아온 스님이 성경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펴는 순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매우 거창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님의 마음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꼭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시다면 저를 한 번 만나주십시오.”라고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놈아! 네 발밑에 있는 독사도 보지 못하면서 나를 보려고 하느냐!” 이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깨보니 정말로 자기 발밑에 독사가 물려고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늘 16절 말씀에 보면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성경해석에 대해서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함부로 대하거나 적당하게 건성으로 읽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성경은 항상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다 읽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말씀에 포함시키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비추어서 나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견고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견고한 신앙을 가지면 어떤 시험이 찾아와도 쉽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신앙이 자라가는 은혜를 누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꼭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촉구하고 있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얼마든지 영적인 시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가야 할까요? 2가지 중요한 요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이 자라려면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본문 15절에 보십시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잘 참는 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심한 박해가 있을 때에 카타콤이라고 하는 지하동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끝까지 참았습니다.
적어도 250년 동안 동굴 속에 숨어서 살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퇴보하거나 성장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가 복음화가 되었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욥도 고난을 당할 때 잘 참았더니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참고 인내할 때에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성장을 합니다.
17절에 보시면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라고 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건강도 잘 지켜야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랑도 잘 지켜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솝 우화에도 보면 갈가마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갈가마귀 한 마리가 동료들하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옮겨갔는데 자기들과 소리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갈가마귀에게로 돌아왔는데 배신자라고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못하고 저리도 못하고 결국 들가마귀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뭐든지 제자리에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성도도 자기 자리를 잘 지킬 때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귀하게 여기고, 바울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릇도 제자리에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머니도 어머니의 자리를 지킬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자리를 지킬 때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성장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성장은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희는 계속 자라가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은 우리에게 필수입니다. 성장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불신이고, 외적으로는 세상과 짝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절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모이는 일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모이기를 폐한다고 했습니다. 히 10:25절에 보시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엡 5:18에 보시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질도 많으면 좋겠죠. 지식도 많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령충만함을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고, 말씀이 생각나게 해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고, 전도에 대한 능력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반드시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딤후 4:7-8에 보시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소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해줍니다.
네 번째로, 말씀을 자꾸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읽고 듣는 단계가 있습니다. 듣고 깨닫는 단계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결과로 축복을 누리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 라고 간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200장에 보면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벧전 2:2에서도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씀했고, 오늘 18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성장에 대한 갈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42:1에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슴은 목마름을 잘 참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이 마르면 어디서 물소리가 들리고 물 냄새가 나면 뿔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가시나무에 몸이 찢겨도 물을 향해 달음박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갈급함입니다.
영적인 성장에 대한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장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길 원하십니까? 그런데 그것은 성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고 있을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영적인 성장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산천초목이 싱그럽게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 성장하는 신앙
벧후 3장 14~18절 / 이상호목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되는 축복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면 일평생 수고한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마지막에는 멸망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인생은 일평생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가 마지막에는 멸망받게 됩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자유함도 있고, 평안도 있고, 삶의 보람도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얻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축복의 인생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힘써서 믿음의 분량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분량을 키우기 위해서 힘써야 할 삶의 자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영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고민을 하게 되고 때로는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서 일일이 대답하지 않고 너희의 믿음이 장성해지면 그런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받게 되며, 자연히 모든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문제를 영적인 성장을 통하여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때그때 해결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요19:30)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서2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고 어리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점점 자라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잘 자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14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게 되도록 성화되는 것입니다(14절). 그리스도인 역시 인간입니다. 죄악 중에서 출생한 인간이고, 모친이 죄 중에 잉태한 죄인입니다(시 51:4).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라고 선고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인격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이 자라나는 것은 어린아이가 성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순간에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인격, 삶의 자세, 모든 것을 닮으려고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더욱 자라가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15절)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줄 여기라"고 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하는 것이 바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참는 것이 성장하는 길입니다.
욥도 고난을 당할 때 참고 인내했습니다. 인내함으로써 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문제는 싸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불화만 증폭시키게 됩니다. 누군가가 한사람이 참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고비를 넘기면 그 가정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욥과 같이 잘 참고 인내할 때 성장하고 은혜를 받을 줄 믿습니다.
셋째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굳게 설 때 성장합니다. (17절)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했습니다. 미혹을 받아 치우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굳센 믿음으로 제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진입니다. 성장입니다. 좋은 것은 관리만 잘해도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무법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 이들은 거짓된 이단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이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을 따라가다가는 신앙에 큰 손실을 가져옵니다. 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또 새로운 것을 찾아서 자꾸 자리를 옮겨도 안됩니다. 습관이 됩니다.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길, 형통의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계절 따라 오가는 철새와 같이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를 잘 지켜 길이길이 자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리를 지킬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스스로를 성장시켰음을 알게 됩니다.
커가는 것.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지킬 때 얻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네째로, 나를 얽메고 있는 것을 끊어버릴 때 자라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얽메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무언가에 얽메이고서는 전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라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 잘못된 생각과 생활을 벗어버릴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 음란함, 거짓과 불의, 교만, 시기와 질투, 이러한 악한 마음들이 자라가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되면 단호히 버리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잘라버리면 그만큼 더욱 자라갈 줄로 믿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끊어버리면 앞으로 전진하고 자라 가는 삶, 또한 주님의 축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다섯째로, 최선을 다해 열심을 다하는 것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열심을 다해 땀흘려 최선을 다하여 노력 할 때에 신앙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 출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할 때 신앙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장하고 자라갈 때 아름답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멋이 있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부지런하고 활기 있는 성도들이 복된 가정, 복된 사업을 이룰 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열심을 다할 때 이 민족의 장래가 열리고 교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전진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라 가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마음에 새 성전이 세워져 가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한 정도만큼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숙과 성장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는 것에 비례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분량만큼 자신은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되고, 주변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앞장서서 열심히 사업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이 되어 금년 한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과 신앙이 계속 자라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벧후 3장 14~18절 / 최건호목사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면인 자라나는 은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천적인 명령으로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의 진보와 발전을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명령입니다. 자라나거나 성숙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병에 걸려있거나 영적인 어려움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이 말씀을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진보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벧후 3:18)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실 때,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회개하라고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라고 할 때에도, 사랑하라고 할 때에도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19:19)
둘째,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합니다.(막 9:23) 믿어야만 영생을 얻습니다. 믿어야만 기도가 응답됩니다. 믿음을 가지라고 할 때도 하나님은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 믿음은 영적으로 변하고 성장합니다. 성장이란 생명의 지속을 말합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자라가라”(벧후 3:18) 우리의 영적 성장은 무한한 성장입니다. 이러한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로는 첫째, 하나님의 일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입니다. 특히 기도 생활에 게을러질 때 영적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우리는 좀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 앞에 게으르지 말고 기도와 예배 생활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둘째,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요 15장) 하나님의 일에 우리 모두는 적은 일이든 큰일이든 좋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수단과 내 경험과 힘으로 열매를 거둘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있어서 노력할 때 하나님의 더 큰 은해가 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벧후 3:16,17) 신앙생활은 환경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하지 못한 신앙은 실수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가까이 왔다가도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지식과 진리를 따라서 모든 일을 주님 뜻대로, 주님을 중심으로 해야합니다. 우리는 무법한 생활이나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타락한 사람들과 같이 잘못된 목표와 잘못된 환경을 따라서 흘러가지 말고,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온전하신 겸손, 온전한 인내, 온전한 사랑, 온전한 능력을 의지하고 예수만 바라 볼 때 풍랑 속에서도 바다를 거니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크고 놀라운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장해야 할 이유
벧후 3장 14~18절 / 오정호목사
바울 당시 에베소(Ephesus)는 상업이 번성했던 무역항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아데미(Artemis/디아나(Diana)로 불리는 그리이스의 여신으로 맹수와 달(月)의 신이며, 가정의 수호신이다. 로마의 여신 다이아나와 같다. 에베소에서 고대 풍요의 신으로 숭배되었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인식되는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사도행전 19:24-41의 기술대로 아데미 숭배사건과 관련이 있다. 우상숭배를 깨뜨리기 위한 사도 바울의 시도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귀감이 된다.)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영적으로 혼란한 곳이기도 했습니다(참고, 사도행전 19:21~41). 이곳에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품격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면서 에베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론(敎會論)에는 아주 영적인 신비함과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정의 주인이기도 하시기에 가정에서의 아내와 남편의 관계,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교차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뉴스위크지(2005. 1월)에 따르면 90세 이상을 건강하게 산 사람들의 비결을 소개하였습니다.
1.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는 수치(몸무게, 혈당 등)를 기억한다.
2. 목적이 분명한 운동을 한다.
3. 사실을 직시하고 수용한다.
4. 높은 수준의 인간관계와 삶의 열정을 유지한다.
교회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게 해주고, 우리가 자원해서 봉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은 가정의 건강과 직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영적인 선봉장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생활에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교회 사랑이 왜 인생 성공의 열쇠가 되는지 그 몇 가지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건강한 교회생활은 건강한 가정생활의 기초를 제공합니다(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22-23절). 행복한 가정생활은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비결과 원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3가지 원리가 필요합니다(3M).
① 주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Master). 한 가정에 주인의식이 없으면 그 가정은 혼란에 빠집니다. 건강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려도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 알아주시면 그 가정은 성공입니다.
② 가정에 대한 목적과 사명이 분명해야 합니다(Mission). 가정과 결혼에 대한 목적과 사명이 분명한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예배하고 높이는 것(Praise the Lord and raise the people)과 사람을 세우는(Build up)일” 입니다. 이 원리는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③ 좋은 배우자 혹은 동역자를 만나야 합니다(Mate).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관계(人間關係)에 달려있습니다. 교회에서의 관계는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까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이 건강하게 되려면, 먼저 교회를 사랑함으로 교회와 더불어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속한 주의 백성들을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따라서 교회를 성실하게 세우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건강한 가정생활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둘째, 교회생활을 통하여 계속적인 사랑을 공급받습니다(25~29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25절). 가정은 교회를 통해 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내어 드리는 사랑, 추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28절). 부부간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아내를 존중하는 것은 훈련되어야 하고 우선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야 됩니다.
사랑 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가정은 하숙집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을 공급 받지 못한 인생은 사랑의 파산자(破産者)로 나타날 뿐입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27절).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기에 이로써 우리는 사랑을 압니다(요일 3:16). 천상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사랑을 우리는 가슴에 새기고 공급 받을 때 부부관계가 원활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 학력 지수가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 가정을 사랑할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모든 사랑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음으로 우리 영혼이 정함을 받고 우리의 모자라는 사랑을 주님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공급받을 때 건강한 가정생활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가정은 하숙집일 뿐입니다. 사랑은 건강한 가정의 표지입니다. 여러분 가족의 사랑지수는 얼마입니까?
셋째, 교회에의 거룩한 소속감은 가정생활의 안정으로 열매맺습니다(30~33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30~31절). 소속에 대한 욕구는 인간 모두의 욕구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안전의 욕구, 자존심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와 함께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건강에 기여하려면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칼빈(Calvin)은 "하나님의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통해 안전과 육신에 대한 필요를 공급받듯 영혼의 만나를 공급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교회에 소속되어 주님을 예배하며 섬길 때에 가능합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고, 주님을 사랑할 때 그 가정과 자녀를 반드시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사랑은 건강하고 성공적인 개인과 가정의 열쇠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적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그 건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사람을 세우는 것에 교회의 관심의 초점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사명은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이 갈등과 어려움을 겪는 요즘, 우리 자신이 가정의 역할 모범으로 쓰임 받아서 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축복된 교회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생활은 건강한 가정생활의 기초가 됨을 확신합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의 기도와 말씀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공급받아 건강한 가정생활을 도모합시다. 교회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함으로 교회의 건강에 기여할 뿐 아니라 인생 성공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
벧후 3장 17~18절 / 이삼규목사
저는 얼마 전에 모 TV 방송국에서 제작하여 방영한 "인체의 신비"라는 녹화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외국에서 제작한 것인데 아이가 임신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엄마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전도자는 아이가 엄마의 태에서 어떻게 자라는가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이제 그 신비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결합하여 수많은 세포분열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자라나게 되고 3개월만 되어도 약 10cm 정도 자랍니다. 그래서 임신기간이 차면 엄마의 뱃속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태아의 놀라운 성장을 보게 됩니다.
엊그제 우리는 식목일을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다 나무를 심었습니다. 왜 나무를 심습니까? 울창하게 자라서 우리 인간들에게 좋은 선물을 안겨주기를 소원하여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영적인 생명도 출생으로부터 자라나야 할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우리 예수님의 어릴 때 모습을 보면 그분이 어떻게 성장하였는가를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해 줍니다.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생명은 자라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의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것 같으나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양분을 공급받으면 자라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영적인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마디씩 말도 하고 걸음마도 해야 키우는 부모는 더욱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아이가 예쁘다고 항상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예쁜 것은 고사하고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 격론으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매우 일관성 있게 그리고 건강하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우리가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사도 베드로는 자기 일생의 경험에 비추어 신앙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첫째로 은혜란 단어를 씁니다. 그 다음에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은혜와 지식' 두개의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신앙 즉 영적 생명이 바르게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라납니다.
우리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단어가 있다면 바로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본질적 메시지가 바로 '은혜'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영국에서 한번은 세계적이 종교학회가 모여 회의가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종교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종교들을 비교하고, 포럼을 갖고, 패널 토의를 했습니다. 학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연구한 자기 종교들의 특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기독교 차례가 왔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이 묻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학자가 말하기를 아마도 그것은 '성육신'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독특성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반론을 제시하기를 물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들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마는,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났다'는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없지 않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에 있지 않겠느냐?' 부활신앙도 기독교의 독특성이죠. 그러나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 평신도 신학자요 문학가였든 유명한 씨에스 루이스 교수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대답은 의외로 쉬었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은혜입니다." '은혜' 이 말 앞에 모두가 다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은혜가 뭡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호의 또는 사랑을 말합니다. 죄를 범한 인간,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선한 행동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최대의 선물이라는 것은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에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인 요소임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이루어집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구나"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는 신앙은 절대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골로새 성도들이 어떻게 자라났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열매를 맺고 자라나야 합니다. 언제부터 자란다고 했습니까? 복음 듣고 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자라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 하나님 사랑이 놀랍구나,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다니, 참 놀랍구나!' 이 은혜를 깨달은 순간부터 열매를 맺고 너희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말씀합니다.
지난번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즐겨 부른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송가 405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소위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가를 누가 지었습니까? 노예상이었던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이 은혜 받고 나서 그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여서 지은 찬송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더욱 사모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랍니다.
두 번째 필요한 중요한 요소는 주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자라 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부 관계가 성숙하다' 라고 말할 때, 부부관계가 성숙하다 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서로를 깊이 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혼부부들은 달콤한 신혼의 꿈을 꾸며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일이나 갑니까?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지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집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는 눈에 콩깍지가 끼어 결혼을 하지만 결혼이란 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막상 살아보니 맞지 않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요. 결혼하기 전에 아는 것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진짜는 살아봐야 서로를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4-5년 정도는 서로를 알아 가는 적응기간입니다.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를 깊이 알게 됩니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 가를 척척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부를 성숙한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아가고, 아내가 남편을 깊이 알아갑니다. 알아 가면서 더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였을 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베드로는 항상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자기가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것처럼 교만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진정 예수님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말년에 주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후서 1장2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찌어다." 베드로가 어떤 단어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8절을 봅시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기에 게으르지 맙시다. 예수님을 부지런히 알아 가십시오. 베드로가 힘써 무슨 단어를 강조했습니까?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건 기초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는 방편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1)우리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말씀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바로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의 단일초점, 유일한 주제, 핵심 결국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알면 누구를 압니까? 예수님을 압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체험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기까지 이 기록된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싶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읽으십시오. 정말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함으로 예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야한다는 것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젊은 부부들은 내가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잘 안다고 전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잘 모릅니다.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충분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하다 보면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하나 하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새벽에 권사님이 치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런데 밤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정전이 되어 온통 깜깜하였습니다. 마침 초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권사님이 나오셔서 종도 치시고 준비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잠시 묵상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종아! 전기불만 없어도 얼마나 답답하고 깜깜하냐? 만일 영혼이 비치는 빛이 없다면 그 답답함이 오죽하겠느냐?" 그래서 제가 주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맞습니다. 전기불만 안 들어와도 이렇게 답답한데 영혼의 햇빛이신 주님이 안 계신다면 살맛이 나겠습니까!"
기도는 이와 같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경험을 말합니다. 머리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또는 지식으로 아는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희 집사람에 대해서 잘 아시지요. 그러나 같이 살아본 저보다는 모르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지식은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같이 살아 보니까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직접 경험함으로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까? 그는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시면서 직접 넣어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 도마는 어떤 행동을 취하였습니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위하여 순교까지 당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십니까?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누구보다 주님을 깊이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은 영적인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빌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거듭난 사실을 확증하게 됩니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3)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4)미혹에 끌려 굳센데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벧후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한 번 진단해 보십시오. 자라나는 신앙입니까? 영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장의 계절 4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산천초목이 싱그럽게 자라나듯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라가라!
벧후 3장 18절 / 안창국목사
우리는 지난주부터 신앙의 네 단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면 서서히 그 신체와 인격이 자라가듯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데에 있어서 몇 개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저는 그 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신앙의 네 단계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1단계/ 거듭남의 단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 속에 거하는 단계
2단계/ 성장의 단계(은혜의 단계)-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부모의 사랑과 관심 가운데 자라가듯 말씀과 기도를 통해 훈련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도 경험하고 말씀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가고 기도의 깊이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단계입니다. 이 기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단계/ 사역의 단계(일꾼의 단계)- 영혼을 살찌운 채 가만히 있으면 영적 비만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이제 성장의 단계를 넘어서서 사역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 성품의 단계(인격의 단계)- 이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단계입니다. 목회자도 사역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올라가야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은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단계입니다. 즉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단계 두 번째 단계인 성장의 단계에 대해 나누고자합니다.
모든 신앙생활은 어느 단계에 있느냐와 관계없이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이 성장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모든 성장이 완전하게 이루어져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장의 단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걸친 단계입니다. 이 성장은 주님께서 다시 오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두 번째 단계를 성장의 단계로 일컫고 싶습니다. 사람의 성장 단계도 그렇습니다. 사람들도 평생 어느 정도씩 성장해 갑니다. 몸도 그렇고 인격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동기와 청소년 시기까지를 성장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 시기가 가장 큰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성장이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모든 삶의 전반이 성장하는 시기이지만 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놀랄 만큼 성장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는 사람마다 그 시기가 약간 다르고 그 기간도 사람마다 다 제각각입니다만 나름대로 그 신앙이 깊어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거듭난 후에 급격하게 성장해 가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는 자라가라” 즉 “성장해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장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왜 성장해야 하며,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벧후 3:1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라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기는 했지만 그 신앙이 초보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직도 영적인 어린 아이로 머무는 것을 많이 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라가야 합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육체와 생각이 자라가듯이, 모든 동물과 식물이 성장을 경험하듯이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기가 태어났는데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성장이 곧바로 멈추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제가 서울에서 사역할 때에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문화전도부의 뮤지컬 팀을 이끌고 “우성원”이라는 곳엘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뮤지컬 공연을 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온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체는 다 자랐는데, 신체는 모두 어른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인데 정신연령이 마치 유치원 어린이 수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면 몰려와서 반가워하고, 과자를 얻어먹으려고 하고,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얘들아”하면서 부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서 수용한 곳이 “우성원”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저러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보면서 괜히 속상해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는 했는데, 구원 받고 영생을 얻은 것은 분명한데 구원 받았을 때의 감격만 잠깐 있을 뿐 자라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우성원”같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미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이 성장해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필수적인 것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려고만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마 바울 사도가 볼 때에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거듭나기는 했는데 성장하는 것에 게을리 했기에,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주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 헐뜯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거듭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거듭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믿음이 자라가야 하는데 늘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조금 깊이 있는 말씀도 이해할 수 있고, 기도 생활도 깊어지고, 성도들의 교제도 깊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이 보이면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주님께서 원하는 바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거듭났으면 자라가야 합니다. 반드시 자라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한 번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우리가 볼 때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앙생활의 본을 보인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내가 온전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아직도 달음질해야 한다. 나는 더 성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생활을 조금 오래했다고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교회생활 연수의 순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교회생활을 조금 오래했다고 생각되면 집사로 임명하고, 안수집사로도 임명하는데 교회생활의 연수로 따지면 안 됩니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나, 바나바는 바울보다 훨씬 더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동일한 동역자로 손색이 없이 대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중에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부각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 교회 나온 지 오래되었다고,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었다고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신앙이 성숙해져서 오히려 더 겸손해 져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 한다.”
2. 하나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자라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신앙이 성장해 갈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자라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남이 없이 성장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그 은혜로 우리는 거듭났고 그 은혜로 인하여 성장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라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물론 성장을 향한 갈망은 우리 안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해서 자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라가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恩惠)라는 말은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성장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주 갓 난 어린아이였을 대 우리가 뭐가 잘나서 부모가 젖 먹여 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켜 주고 합니까? 그저 은혜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돌보아 주시는, 그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는 자라난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성장시켜 주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단번에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 하나님은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서도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자들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훈련받고, 성경공부 몇 권을 수료했고, 제자훈련단계를 어디까지 마쳤다고 해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자라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잘 공부를 해도 그것이 깨달아지지 않고,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너무 간단한 것 같지만 이 간단한 것을 게을리 해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란 말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여러분, 식사를 제 때에 많은 영양소를 골고루 해서 먹는 것만 해도 우리의 건강에는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옛말에 “밥이 보약”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때에 식사를 안 하지요, 편식하지요, 몸에 안 좋은 음식도 입맛에 맞는다고 해서 그냥 먹지요. 그러니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자라게 하는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를 잘 시킬 때 잘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그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영적인 영양소를 잘 섭취하고 소화시킬 때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공부를 개인적으로든, 작은 그룹으로든 할 때 영적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대일 양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학교를 통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훈련과정을 통해 훈련받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우리가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숨을 쉬어 생명을 유지하듯이 기도는 우리의 영적인 호흡입니다. 아무리 제 때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지 않으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도시의 공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호흡기 장애 등 건강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맑은 공기를 제 때에 공급해 주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쉬지 않고 숨을 쉬듯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깊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찾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깊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는 자입니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성장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에서 제공하는 각종 교회학교와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십시오. 일대일 성경공부에 참여하십시오. 열심을 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무릎 꿇어 기도하는 시간을 확장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자라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으십시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말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성장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밥을 찾고 목마른 자가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축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심각한 문제가 또 여기에 있습니다. 성장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가 되었으니, 안수집사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고 스스로 반문합니다. 어느 정도의 훈련단계를 마쳤다고 해서 “이미 다 안다”며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왜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세미나가 있다 해서 가보면 개척교회 목회자나 작은 교회 목회자, 또 젊은 목회자는 많이들 옵니다. 그런데 큰 교회 목회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별로 오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성도들의 성장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큰 교회 목회자와 연세 드신 분들 중에서도 열심히 배우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어떤 목사님이 계시는데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하지만 참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단의 무슨 세미나가 있을 경우 그 분은 늘 맨 앞자리에 와서 앉으셔서 젊은 목회자가 강의하는 것을 열심히 듣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시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정도의 분이시지만 배우는 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배우려는 갈망이, 성장을 향한 갈망이 그 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사슴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이 마르면 어디서 물소리가 들리고 물 냄새가 나면 뿔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가시나무에 몸이 찢겨도 쏜살같이 물을 향해 달음질한답니다. 이것이 갈급함입니다.
성장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teachable, learning heart)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라가기 위한 열망이 있습니까? 우리 새비전교회 성도들의 눈초리에서 배우고자 하는,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보여지길 바랍니다. 성장에 대한 갈망으로 모두가 매일, 끊임없이,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이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새비전교회는 꾸준히, 계속해서 자라가는 교회, 계속하여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것은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성장을 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개개인에게 늘 성장이 경험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제 자라가십시오
벧후 3장 18절 / 이동원목사
아주 아름다운 찬양 감사드립니다.
에~저가 알고있는 성도가운데 아~영어로 표기하면 ‘P’로 시작되는 P씨, P사장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잠시동안 그분의 익명을 좀 사용하겠습니다. 그는 20대 초에 예수를 믿고 아주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에 너무 감격했고, 아~, 그는 신앙을 기쁨으로 시작 했습니다. 기도 응답의 기적도 체험 했습니다. 아~이분은 수산업을 운영 했는데요,사업이 어려울 때 마다 주 앞에 매달려 기도 했습니다.그때마다 하나님의 그 특별한 간섭과 도우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아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그런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요새말로 말하면 아주 잘 나가는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업이 좀 어려워지고 흔들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기 사업을 구제 하기 위해서 아~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든 사람을 만나서 타협을 시도 합니다. 아~그분과 만나서 여러가지 대화를 하다가 문득 그분이 아~ 이 P사장에게, P씨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그래요. ‘자네 예수 믿나?’ 순간적으로 이 사람의 머리 속에 ‘아~저분은 아~다른 종교를 갖고있는 분이구나 내가 만약 예수 믿는다고 하면 혹시 이 결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교회 좀 나가본 일이 있지마는 지금은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얼결에 이런 대답을 해 버렸다고 그래요.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서 계속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의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훗날 회복하고 다시 이분은 쓰임을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그것이 늘 자기의 삶에 결정적인 오점으로,아픔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세상을 아~떠나갈 무렵이 되었을 때,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친구들에게 편지 한 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처럼 이런 신앙의 실족이 없도록,또 자기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 이유가 그의 삶 속에 훈련이 없었고, 일관성 있는 안정적인 신앙의 성숙을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기 신앙의 기초가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자기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나처럼 신앙생활 해서는 안된다는 편지 한 장을 쓰게 됩니다.
이 편지가 바로 본문입니다. 베드로후서 입니다. 그게 베드로후서, 사장 이름 P씨는 바로 ‘피터’ 씨, 베드로 씨 입니다. 하하~ 아~ 제가 수산업을 했다고 그랬는데 그분이 본래 어부가 아니였습니까? 하하~녜녜, 그 물위를 걸어갔으니까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죠.녜, 자기의 삶이 흔들렸을 때 세번씩 이나 예수님을 부인 하고 또 저주까지 했든 사람이죠. 이것이 자기마음속에 늘 평생에 후회로 남았든 것도 사실이였을 것입니다.
자, 오늘 베드로 후서를 펼쳐놓으시고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이런 자기 일생의 어떤 오점에 관해서 잊을 수 없는, 마음속에 기억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베드로후서 1장 10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다같이 시작,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베드로가 실족이라는 단어를 쓰죠? 실족,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견고한 신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실족할 수 있다 라고 편지를 쓰면서 아마 뼈아픈 자기자신의 실족의 경험을 반추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계속 읽어보시면요, 14절 보세요.14절 베드로후서 1장 14절에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베드로가 지금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육체의 장막을 벗어날 때가 나에게 가까워 오고있다.
그 다음절 보세요. 15절에 보시면 베드로 후서 1장 15절에 보시면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내가 떠나간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 편지를 쓴다.그래서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의 유언 같은 마지막 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강조한 것이 뭔 줄 아세요? 그것이 본문인데요? 베드로후서 3장 마지막 절 18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어떻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자라가라!”그랬어요. “자라가라” 그 신앙의 성장이 자라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는 여기서 부탁하고 있습니다. 일관성 있는 신앙의 성숙, 성장,이것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베드로가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일까지 우리교회 일년 중에 가장 크다란 잔치인 이웃초청 잔치를 했습니다. 많은 불신자 이웃들이 다녀갔고요, 그리고 나 예수 꼭 믿겠다, 나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싶다. 이런 진지한 신앙생활의 결단, 최초의 결단,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고 자기
손으로 결심하고 카드를 써낸 사람만 453명 입니다. 453명, 그러니까 아마 카드 접수되지 않는 카드까지 합하면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아름다운 출발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에게는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과제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 분들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신앙이 성장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매우 일관성 있게 그리고 건강하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우리가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사도 베드로는 자기 일생의 경험에 반추하여 신앙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첫째로 은혜란 단어를 씁니다. 그레이스, 은혜, 은혜와 그 다음에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은혜와 지식’ 두개의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은혜, 즉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본질적 메세지가 바로 ‘은혜’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제가 언젠가 그 얘기를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영국에서 한번 세계적이 종교학회가 종교회의가 열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종교를 연구한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가지 종교들을 비교하고 포럼을 갖고 페너를 갖고 토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기독교 차례가 왔을 때,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이냐?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이냐? 한 학자가 말하기를 아마도 그것은 ‘성육신’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성육신이야 말로 기독교의 가장 독특성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반론을 제시하기를 물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들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마는,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났다, 이런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없지 않아 있다고, 또 누군가 말하기를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에 있지 않겠느냐? 부활신앙, 부활신앙도 기독교의 독특성이죠. 그러나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종종 있다고,
이때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 평신도 신학자요 문학가였든 유명한 씨에스 루이스 교수가 벌떡 일어 섰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대답은 의외로 쉽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은혜입니다. ‘은혜’ 이 말 앞에 모두가 다 동의했다는 거죠. ‘은혜’ 은혜가 뭡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사랑, 자격이 없는데,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죄를 범한 인간,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납하고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 이것이 은혜, 그레이스, 은혜!.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뭐에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다음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 우리의 행동을 들고 창조주 앞에, 심판자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의 행위를 들고? 아무도 최선의 행위도, 나의 몸부림치는 나의 의를 추구하는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행위로 보면 주 앞에 설수도 없는 이 죄인들, 주께서 받아주시고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라고 여러분 믿습니까? 은혜! 놀라우신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션, 놀라운 은혜, 이것이 바로 은혜란 말이죠. 그런데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 만이 은혜가 아니에요. 구원 받은 것만이 은혜가 아니고,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들을 우리는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구원받을 때만,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만, 용서 받을 때만 이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 교회에서 일어났든 일이라고 그러는데요 이 얘기도, 아~그 구라파 같은데 가면 여름철이 되면 아~그 동네에 있는 교회 중에 몇 교회가 문을 닫아요. 백케이션 가요. 네,그래서 다같이 한 교회에 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도 교인도 백케이션, 이번 여름에는 당신 교회에서 책임을 지십시요, 그래서 아마 몇 교회들이 같이 모이는 그런 오케이죤, 그런 아마 계기가 아니였는가 싶어요. 그래서 이제 이웃 사람들과 같이 모였는데 그날 예배는 마침 성찬식이였습니다. 성찬식,그래서 이제 아~집례를 하고 어떤 목사님이, 또 성찬위원들이 있는데 성찬위원으로 그날 봉사하시는 장로님 한 분이 판사로 지내신 분입니다. 재판관이였는데 성찬기를 들고 이렇게 돌다가 한 분 앞에 딱 가서 깜짝 놀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아주 유명한 그런 살안사건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때 그 사건을 맡아서 이 판사였든 장로님이 처리를 하신 겁니다. 녜, 하, 그 사람이 와있네.자기가 판결을 내렸고, 형을 살았고, 그리고 나오셨던 그분이 딱 서있으니까 아, 이분이 살인을 했든 그런 분인데, 아, 이 분이 예수 믿고 성찬식에 참여해서 성찬을 받는다,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그래 깜짝 놀란 거죠.녜, 그 광경을 보고 집례하든 목사님도 알아차렸어요. 워낙 유명했든 사건이였으니까,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나서 목사님이 장로님 만나서 ‘장로님,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지요?’ 그랬더니 이 장로님이 의외의 얘기를 하시드래요. 그게 뭐냐하면 ‘아, 목사님은 아마 그분이 저런 삶을 살던 분인데 이제 예수 믿고 나와서 성찬까지 참예한다 그래서 놀라셨겠죠?’ ‘아, 물론이죠’ ‘녜, 저도 놀랬어요. 저도 놀랬는데요 제가 그분을 만나고 조금 있다가 성찬에 저도 참여하면서 저는 다른, 다른 것을 생각했습니다.’ ‘무얼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그 케이스를 잘 아는데 사실은 그분의 입장에 제가 섰다면 저도 아마 살인을 했었을 꺼에요. 그런데 내가 살인자가 안되고 이렇게 주님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생각해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더라구요, 그것이 은혜더라구요’ 이런 의외의 얘기를 하는 거에요. 여러분!우리가 용서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우리가 죄 짓지않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축복된 삶을 날마다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 이것도 은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기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시점에서 살아왔든 자기 인생을 쭉 돌이켜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나에 나된 것은’ 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나에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구나, 그 은혜를 깨달을 때,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는 신앙은 절대로 자라나지 않아요. 여러분 교회에 아무리 나와도 응? 교회 나오는 회수가 아무리 많아도, 아니 한 오백년! 하하~,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도 이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는 신앙은 결코 자라나지 않습니다.
아,그래서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시면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자, 골로새 성도들에게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따라서 하세요. ‘참으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자, 우리 신앙이 열매를 맺고 자란다, 언제부터 자란다로 그랬습니까? 복음 듣고 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순간부터, 무슨 얘기에요? 아, 하나님 사랑이 놀랍구나,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다니, 참 놀랍구나! 이 은혜를 깨달은 순간부터 열매를 맺고 내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울사도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깨달음,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또 더욱 은혜를 사모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유명한 여자 룻을 생각해 보세오 이 여인도 본래는 신앙인이 아니였는데 시집가서 아마 남편 또 시부모님을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겠죠. 자, 남편은 불행이도 일찍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시어머니 따라, 나오미 따라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찾아오죠. 앞길이 막연했어요. 앞에 뭣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몰라요. 녜,이런 시점에서 구약성경에는 이런 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람들을 세우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기업 무를 자, 기업을 회복시켜줄 자 라고 부르는, ‘고 엘’ 이라고 불렀는데요, 이것은 신약시대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구원자에 대한 그림자에요. 그런데 이런 외로운 땅, 앞길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룻이 구속자의 역할을 할 보아스를 만나잖아요.그때 룻이 보아스 앞에 엎드리면서, 구원자 앞에 엎드리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내 주여!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아주 유명한 고백이죠. 다같이 한번 ‘내 주여,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녜, 이 구원자 앞에 엎드리면서 고백하는 이 말,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이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의 마음의 토양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여러분 어떤 마음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일까요? 한 설교가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속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그랬어요.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 이미 베풀어진 은혜에 대해서 아, 감사하구나 감사한 마음, 둘째는 의지하는 마음, 은혜를 주신 그분을 의뢰하는 마음, 그 다음에 세 번째는 기대하는 마음, 그분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 이것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의 토양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좋아하는 한 찬송가의 가사는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있는 케이스 라고 생각해요. 잘 아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소위 ‘어메이징 그레이스’ 이 찬송가에 보시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뭐에요? 주님의 은혜 고마워, 놀라와, 이것은 과거에 베풀어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분 때문임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이 찬송가에 보면은 또 나를 장차 뭐에요?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녜, 내 앞길도 그분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잘 나타나요.
이 찬송가를 작사한 분이 ‘쟌 유턴’ 이라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본래 목사님이 아니라 노예 상인 이였어요. 노예상인, 노예를 사고 파는, 그런 노예 장사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하다가 장사가 잘못되어서 자기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주 기구한 운명이죠. 그래서 배에서 종 노릇 하는 노예의 일을 얼마동안 했는데 그가 노예의 자리에 있었을 때, 어느날 그 작은 신앙 책자 하나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 책자를 읽다가 큰 깨달음이 왔어요. 자기가 지금 노예 일을 하고 있지만 육체적인 노예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자기가 죄악의 노예다. 죄에 얽매여 가지고 죄에 끌려다니는 내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자기자신의 죄의 사슬에 매여있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자기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이 사람이 깨닫습니다. 그래 그 책을 읽다 말고 기도를 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복음이 깨달아집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결단으로 풀어버릴 수 없는 죄악의 사슬, 하나님이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시고 내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시고 예수를 믿는 자 죄사함을 받는다! 이 복음이 깨달아지는 그 순간 자기 마음속엔 놀라운 자유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그가 붓을 들어 작사한 것이 바로 이 찬송가에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든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그분이 전도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잘 증거하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은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이미 은혜를 깨달은 자, 내 인생의 앞길도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사랑하시는 여러분, 누가 신앙이 자라갈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그래서 어떻게 신앙이 자라갈 수가 있어요?
첫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자, ‘우리 주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녜,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가 은혜를 주실, 베드로 사도가,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가 은혜를 주시는 분을 어떤 단어로 이 구절에서 묘사했습니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자, 예수님에 대해서 두가지 명칭를 썼어요. 뭡니까? ‘주님과 구주’ 녜,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신 구주일뿐만 아니라,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우리의 고백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지마는 구주 이지만, 그래서 십자기에서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부활하신 이유, 나의 주님이 될려고 현제 여기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치하고 다스려주시는 놀라운 분 그분의 은혜, 이 은혜가 없이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다음 두번째는 뭡니까? 저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가라 두번째는 지식이에요. 그래서 우리 신앙이 자라 갈려면,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저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가라, 그래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부 관계가 성숙한다 라고 말할 때, 부부관계가 성숙한다는 것이 무었을 뜻 할까요? 부부 관계가 참 아름다운 사랑 가운데 성숙해 간다.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에요. 남편이 아내를 알아가고, 아내가 남편을 깊이 알아갑니다. 알아 가면서 더 이해하게 되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고, 이해 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저는 결혼하기 전에도 제 아내를 무척 잘 알았습니다. 언제부터 알았느냐 하면, 중학교 3학년때부터 알았습니다. 제 아내를 중학교 3학년, 제 아내가 중학교 3학년이였을 때 부터 제가 알았어요. 또 저와 같이 성경공부도 하고,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잘 알았겠어요? 그래서 결혼할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뭐 우리는 이런 대로 사는 거다 너무 잘 아는 상대였기 때문에, 그런데 결혼 딱, 하고 신혼 여행 갔다 와서 한달 되기 전에 제가 제 아내보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 했을 것 같아요? 제 아내를 쳐다보면서 그랬습니다. ‘당신은 알다가도 모를 여자다’ 하하~ 아, 그냥 모르는 것들이 막 나타나더라구요. 몰랐든 부분들이, 제가 제 아내를 많이 몰랐더라구요. 알았다고 착각을 했어요 제가, 그런데 너무 몰랐어요.
저는 아마도 베드로의 체험이 그러하지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았잖아요. 수제자,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 앞에서 아마 어깨에 힘을 주었을 거예요. “야, 예수님? 내가 잘 알아 예수님은 내 말대로만 한다” 자기가 예수님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서 주님을 가장 격렬한 언어로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또 그가 이렇게 실족하고 타락 후에는 애써 예수님을 외면하고 피해서 도망다녔잖아요. 예수님을 알았을까요? 베드로가 내 실수 내 상처 내 실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든지 나를 용납해주신다. 이해하신다. 이런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도망다닐 필요가 없었는데 그걸 나중에 베드로가 나중에 깨닫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후서를 쓰면서 베드로 후서 1장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서 베드로 후서 1장2절에 베드로의 마지막 편지 첫번째 부분에서 베드로가 어떤 단어를 애써 강조하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 후서 1장2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자, 어떤 단어가 강조되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뭐예요? 앎으로.
하나님 알아야되요.예수님 알아야 되요.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계속 읽어보시면 그 다음에 8절, 베드로후서 1장 8절 또 읽어요. 시작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열매 맺는 신앙이 될려면 예수님을 알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십시오. 베드로가 힘써 무슨 단어를 강조해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 갈수가 있습니까? 이건 기초예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베이직이예요. 예수님을 알아가는 방편,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말씀으로, 하나는 기도로, 말씀과 기도예요.
첫째는 말씀으로, 말씀으로 예수님을 알 수가 있지요.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성경이 두껍지만 성경책 전체의 메시지의 초점이 바로 뭡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바로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의 단일초점 성경의 유일한 주제 성경의 대주제 핵심 결국은 누구예요? 예수님이예요. 그러니까 성경알면 누구 알아요? 예수님 알아요.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것은 주님의 주님의 객관적 정보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객관적 정보를 주어요. 그런 성경 안 읽고 어떻게 예수님을 알수가 있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성경과 나의 거리는 나와 예수님 사이의 거리다. 교회에 왔다 갔다 하시는 분은 예수님 몰라요.성경공부 하셔야 되요. 이제부터 그리고 성경 읽으셔야 되요. 성경 알아야 되요. 그래야 초점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예수님을 아는 방법이 대체로 두 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체험으로 예수님을 알수 가 있어요. 그러나 체험이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흔들릴 수가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체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뭐냐? 말씀입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 말합니다. 계시란 말은 이상한 계시란 말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수가 있는 거예요.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들을 많이 했지만 체험했다고 해서 베드로가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했습니까? 아니예요. 그걸 나중에 베드로가 깨달은 거예요.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우리가 계속 다시 좀 읽어 보시면요 베드로후서 1장 다시 돌아와보세요. 그리고 16절부터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다”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위엄을 눈으로 목격하는 체험을 했다. 17절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하늘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다.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18절에 보시면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친히 이 소리를 들었다” 여러분,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이 나타나고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는 체험.
베드로가 어디서 했습니까? 변화산에서, 야고보 요한과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올라갔다가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나타났어요? 모세와 엘리야와 나타나고 변화되고, 하늘에서 음성이 나와서 내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다. 얼마나 놀라운 체험했어요. 그러나 이 놀라운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절을 주목해보세요. 그 다음절입니다. 19절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다같이 앍어요. 시작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에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네, 내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고 놀라운 소리를 들었지만 19절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이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뭘 말해요? 성경을 얘기 합니다. 그 다음에 보시면 성경, 체험이 중요하지만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뭡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흔들림 없는 말씀, 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정말 주님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처음 신앙생활 하신분들이 이 말씀이 어렵죠. 성경이 네, 어려워요. 사실, 쉬운게 아니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읽다가 어려운게 나오면 그냥 지나가세요.고민하지 말아요. 절대로 고민하지 말아요. 억지로 이해할려고 하지마세요. 이 베드로후서 전체가 뭐냐 하며는 성경 얘기를 계속하면서 베드로가 이제 1장 마지막에 성경 얘기를 하면서 그 다음에 그런데 성경 읽다가 해석할 때 억지로 하지 말아라, 이게 계속 강조하는 내용이예요. 억지로 하게 되면 잘못하면 이단에 빠져요.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마지막부분 보세요. 마지막부분에 16절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장 16절, 시작.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니까 억지로 풀지는 말아라 모르면 그냥 지나가라는 말, 여러분 어린아이들에게 딱딱한 음식 주면 소화합니까?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억지로 먹이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기다려요. 자라나면 딱딱한 음식도 먹게 되요. 음식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씹혀요. 어떻게 해요 그거 씹지 말아요. 그냥 뱉어요.그냥 지나가시면 되요.성장하면 나중에 다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런 것들을 주의하면서, 그러나 성경에서 알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은혜를 받아요. 그 말씀을 취해요. 그 말씀을 붙들어요.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시면 되는거예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신앙이 자라갈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을 알아가는 놀라운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두번째는 뭐예요. 말씀으로, 또하나는 기도함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알아야한다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알아야되요. 그 알아보는 방법중에 하나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젊은 부부들은 내가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잘 안다고 전제하지 말아요. 알아보세요.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 아내가 어린시절에 어떻게 자랐는지 성장과정도 한번 자세히 알아보시고 어렸을 때 인간관계, 어렸을때 받았던 상처들 그런것들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거든요.
그런것들을 잘 연구하면 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지금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어떻게 됩니까? 이해가 되요.이해가 됩니다. 또 기질을 연구해보세요. 요즘은 뭐 상대방을 알아보는 심리적 도구들이 많이 발전해 있단 말이죠.
MBTI해보던지, 기질연구. 아, 우리 아내가 남편이 기질이 이렇구나 이래서 저 여자가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뭐가 되요? 이해가 되요, 이해가. 굉장히 필요한 것이예요.너무 전제하지 말고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연구를 해야 되요.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연구에 의한 정보만으로 부부관계가 또 성숙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화하는 일입니다. 부부가 함께 대화를 해야 해요. 깊이 있는 대화, 내마음속의 고통이나 아픔도 털어놓고 대화하면 아, 내 아내가 이런 아픔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을 정확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또 객관적 정보가 필요하지만 정보못지 않게 주관적으로 내가 스스로 겪는 체험이 중요해요. 기도는 바로 이 체험을 제공합니다. 기도하면 주님의 인도를 체험합니다. 기도하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제가 최근에 그 기독교 카운슬링, 크리스챤 카운슬링 잡지, 외국에서 온 잡지를 읽다가, 한기사를 읽고 감동을 받았어요. 은혜를 받았어요. 뭐 책이 온다고 해서 다 앍는 것은 아니예요, 저두요. 그런데 그중에 한 제목이, 아티클의 기사의 제목이 제눈을 확 끌었어요.하나님의 전화, 하나님의 전화. 재밌지 않아요? 하나님의 전화 이게 뭐야, 그래서 그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켄 가웁, 켄 카웁이라는 크리스챤 카운슬러가, GAUB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운슬러가 쓴 간증이었습니다. 일종의, 이 사람은 워 카운슬링 오피스를 사무실을 갖고 사람들을 상담도 해주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대답도 해주는 카운슬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직업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스트레스가 느끼고 정말 내가 내 직업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허탈감도 생기고 내가 아무리 도와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이러한 어떤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허무감을 가지고 씨름하던 어느날 전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이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기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내 직업을 쓰셔서 내가 보람 있는 인생을 살수가 있을까? 이런 회의가 자꾸만 생겨요. 그런데 자기가 초신자니까 교회에 나갈 때마다 성경공부 할 때마다 기도하라고 그러니까 “아! 내가 직업에 대해 기도 안했구나.” 그래서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 정말 이 직업 계속해야 해요? 이 직업 정말 보람 있어요? 하나님 내 직업을 쓰실 수 있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던 차였어요. 어느날 자기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습니다. 데이리 퀸이라는 아이스크림 팔러에 가서. 그런데 자기는 좀 들어가고 싶지 않았대요, 그날. 그래서 애들 돈 주고 “너희들 가서 아이스크림 사먹고 있어. 아빠는 좀 있다 들어 갈게” 그리고 먼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여보내고 이 켄 가웁이라는 카운슬러는 그 주차장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주차장에 차 세워 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인생 생각이 나서 또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 이 직업 계속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내 직업을 통해서 이웃들을 정말 도울수 있는 보람 있는 직업 일까요? 제 마음은 확신이 없어요.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 제가 이 직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싸인좀 보여주세요, 어떤 증거를 좀 보여주세요.”
이렇게 막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공중전화 부스에 있던 그 퍼블릭 폰이 공중전화가 막 울리는 거예요.계속 울리는 거예요. 받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전화대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없고, 기도할 수 없으니까, 자기 기도를 전화 소리가 방해하니까 신경질이 나가지고 차에서 내려와 갖고, 공중전화에 가서 전화를 딱 받았어요. 받자마자 여자 목소리인데, “혹시 켄 가웁 선생님이십니까?” “켄 가웁? 아니 어떻게 나를 아십니가? 여기 있는 것을?” “아니 켄 가웁 선생님의 사무실 카운슬링 사무실 아닙니까?” “사무실이 아니라 여기는 아이스크림 옆에 있는 공중전화 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이상하네요.” “어떻게 된겁니까” 그러니까 “ 제 이름은 밀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인데 제가 인생이 너무 비관스러워서 저는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내 자살하는 것이 좀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자살할 수 밖에 없는 내 처지였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자살하기 전에 갑자기 텔레비전에 서 늘 보았던 선생님, 나와서 카운슬링 했잖아요. 그리고 선생님 카운슬링 오피스가 텔레비 스크린에 떴는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 생각이 나서 제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마지막으로 켄 가웁 카운슬러에게 상담 한번 받아보고 죽겠습니다.” 그런데 스크린에 지나 갔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더래요. 갑자기 전화가, 그래서 그 전화를 돌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화번호가 아니예요. 잘못 돌린 거예요, 잘못 돌린 거예요. 그런데 정확하게 켄 가웁이 주차장에서 기도 하고 있던 그 앞의 공중 전화로 전화가 걸려 온 거란 말이죠. 전율하죠, 소름치도록 놀라운 거예요. 아 그러냐고 하면서 이 카운슬로가 자기 얘기를 했대요. 자기도 직업에 확신이 없어서, 이런 소리 하면 안돼잖아요, 카운슬러는. 그런데 자기 얘기를 막 하는 거예요. 간증을 한거 예요. 그 소릴 듣더니 또 이 여자분은 “아유 선생님 저는요 제가 이 전화를 걸고 선생님이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확실하네요.” 두사람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뭐, 더 상담 안 해도 되요. 해결된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렇게 간섭하시는데 두 사람 인생을 바꿨고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돌보신다, 지키신다, 그리고 내 직업을 쓰신다 이것을 확신 했다는 놀라운 간증이예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가 엎드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리고 내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얼마나 찾고 있느냐 말이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여기서 안다는 말이 객관적 정보의 차원이 아니예요. 여기에서 아는 지식이란 말은 희랍어의 체험적 지식이라는 말이예요. 체험적 지식, 네, 그노세이라는 희랍어 단어가 쓰였어요. 기도하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관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객관적으로 알았던 나는 이 말씀을 붙들고 엎드려 기도 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주님의 인도하심을 주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 가십시오, 마지막에 약속 그리하면 영광이 이제와 영원까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이예요. 예수님이 영광의 주님이예요.그런데 기도하는 자 말씀을 보는 자 엎드려 주님을 만나는 자 주님과 교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엎드려서 말씀을 붙들고 그리고 기도하면 주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이, 영광이 주님의 영광이 이제와 영원까지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영과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주님과 교제하며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의 터치를 통해서 그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엎드려 주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 할 수 있다면 영광이 이제와 영원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 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베드로처럼 우리가 약해지고 흔들리고 때로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날 정도로 때로는 인생은 잔인한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길 수가 있어요? 어떻게 승리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아 갈 수가 있어요? 제대로 신앙이 성장해야 되요. 교회만 왔다 갔다 해서는 안돼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셨다면 이제 말씀을 좀 보세요.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더 큰 은혜를 입고 싶습니다.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겠습니다. 주님, 주님 자신의 영광을 저에게 보여주시고 그래서 제가 이 삭막한 바람부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당당하게 주님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를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벧후 3장 18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벧후3장18절 주를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어느 교회에 담임목사가 부임을 하자 행정목사와 음악목사가 담임목사를 모시고 달밤에 낚시를 갔다합니다. 비가 많이 온 터라 강둑까지 강물로 가득 찼는데 그날따라 고기가 잘 잡혔다고 합니다. 행정목사가 낚싯대를 더 갖고 오겠다며 강물 위를 걸어서 갔다 왔다합니다. 뒤이어 음악목사도 낚싯밥을 갖고 오겠다며 물 위를 걸어서 갔다 왔다합니다. 이어 담임목사가 저녁 간식을 가져오겠다며 강을 건너려 하다 마치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합니다. 담임목사는 ‘어떻게 저 두 목사처럼 물 위를 걷는다는 말인가 고민하다 믿습니다’하고 물 위로 걷다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합니다. 물에 빠진 담임목사님을 구조해낸 두 목사가 담임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합니다. 물에 덮여 눈에 안 보이는 돌다리가 있다는 것을 미처 안 가르쳐 드린 것을 사죄했다 합니다. 그들은 돌다리를 걸어갔다 온 것이고 담임목사는 진짜 물 위를 걸으려고 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처음 민원실에 발령 받았는데 사암 신고를 하려왔다고 하자 본인 이세요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애교라 하겠으나 정작 몰라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고 하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증거를 소유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본래적으로 무지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렸다는 행위는 무관심에서, 불신앙에서 비롯된 망각의 행위입니다.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거부요, 하나님의 자비를 거부한 고의적인 죄입니다. 이런 무지에 대한 대가로 명예로운 직책에서 버림을 당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나도 너를 버린다'고 경고하신 하나님은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선고하셨습니다. 참으로 슬픈 몰락입니다. 또한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가르침이 없으면 그 자손들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장래 멸망을 예고하는 슬픈 선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을 아는 길뿐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8)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번역 할 수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주를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 합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자신을 알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약에서 메시아의 삶을 기록한 대로 사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고전 15:3-6)라고 합니다.
성경의 단일초점 성경의 유일한 주제, 대 주제, 핵심, 결국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알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주님의 객관적 정보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객관적 정보를 줍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1600년간에 걸쳐 쓰여진 책이나 한 결 같이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조화와 연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며, 그리고 결론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보게 하며 만나게 하고 그리고 심령 속에 거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빌니는 트리니티 칼리지 신학생으로 있을 때, 아무런 위안을 가져다 주지 않는 고행으로 인하여 쇠약해진 몸 안에 무겁게 짓눌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합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들이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그 책을 갖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지된 책이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합니다. 하지만 그 책속에서 그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줄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한 권을 구입했다합니다. 방문을 잠그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읽던 그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합니다. 그가 펼친 곳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는 소리 질렸다합니다. '뭐라고!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그렇지만 바울은 분명히 구원받지 않았던가?' 그는 그것을 거듭해서 읽고는 환희에 사로잡혔다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합니다. '오 진리이신 주여, 제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자신도 죄 많았던 사람이 쓴 방법으로, 죄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비로소 빌니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합니다.
은혜와 지식의 근원되시는 주를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이란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이십니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인류는 각 민족과 계층마다 하나님을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그래서 미개인의 나무 조각으로부터 유대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 헬라의 철학적 경험의 유추로 인식되어온 로고스, 동양의 도, 하늘 사상, 그리고 현대인이 섬기는 돈과 이성과 마르크스주의까지 인류는 다양한 하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잔인하고 냉혹하며,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합니다. 섬길수록 조롱하고 요구하며, 두려움과 갈증을 더하여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2:23)고 바울은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세계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자신들이 섬기던 것들이 '우상'인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그분의 인격에 나타나신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압니까? 구약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계시들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환상을 통해서(창 15:1), 예언을 통해서(겔 11:24),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출 28:30)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희미한 통로가 아닌 성령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선명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리고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계시된 하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수많은 참된 성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7-29)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특별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신실성으로 그분을 의심 없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루신 말씀의 사역, 권능의 사역을 통하여 그를 구세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벨마 바필드'라는 여인은 자기 어머니와 약혼자를 죽여 사형이 집행된 여 죄수였다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했다합니다. 사형 집행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에게는 용서의 확신이 필요했다합니다. 그때 가까운 친구가 '벨마'에게 물었다합니다. '바닷가에서 게들이 들락날락하는 구멍을 본 적이 있지?' '그럼, 본 적이 있지.' 그녀는 대답했다합니다. 그러자 친구는 밀물이 밀려오면 그 구멍들이 다 없어지는 원리를 설명하며 그것은예수의 보혈이 죄인을 덮을 때에 모든 죄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박힌 못 자국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해야 되는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히 5:8-9)십니다. 이 주님을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구주이신 주를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 합시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고 합니다.
예수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뜻이므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관심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마다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남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믿게 되는 것은 기적이요, 성령님의 역사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삶이 체험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외아들이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말씀이며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함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시기에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우리에게 생명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속죄의 은총을 허락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장사 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하시었습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부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우리 위해 기도 하고 계십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다시 오시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어느 분의 간증의 글이라 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엘 다녔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라는 노래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목이 찢어지도록 부르고 다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를 노래하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분이 내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우선 자신이 죽었어야만 했는데 지금 살아 있다는 말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죽었어야만 했다면 지금 죽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더군다나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분이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사람이 남을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걸까? 마음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리둥절하고 뭐가 뭔지 모르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라고 하시니까 나가서는 목이 찢어지도록 "속죄함, 속죄함"을 외쳐댔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되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속죄에 대함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수수께끼의 답답함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와 그가 주신 지식 안에서 자라 가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아 말씀 가운데서 자라 가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그리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곧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를 바른 진리 위에 굳게 세워 줍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교회설립 8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해를 살며 성경 말씀을 통해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 되시며 구주이신 주를 알게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자라 가라(성장하라)
벧후 3장 18절 / 박덕기목사
지난 3월 한 달 동안은 하나님께서 우리 송정 중앙 교회와 성도들에게 참으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달이었습니다. 3월 11일 밤부터 시작된 심령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고, 같은 기간에 실시된 홍해 작전 특별 기도회를 통하여 또 경건 훈련을 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난 주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은혜의 방편인 성찬 예식을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고난 주간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묵상하며 은혜를 받았고, 특별히 지난 성금요일 밤에는 구순연 집사님의 간증 집회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지난 부활 주일에는 100명의 성도들이 자리가 없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보고와 함께, 입추의 여지없이 성도들로 가득찬 예배당에서 부활절 메시지와 부활절 칸타타를 통하여 굉장한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참으로 고마운 장마비일지라도 항아리를 뒤집어 두면 한 방울의 물도 고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아무리 은혜로운 행사들이 있을지라도 참여를 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부탁의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또 여러분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꼭 교회에서 정한 공식 집회들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을 하시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번 교회의 여러 행사들을 통하여 큰 은혜를 받으신 성도들은 반드시 이후로 믿음이 더욱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전혀 성장하지를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믿음이 자라 가라' 또는 '성장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라 가라'는 말씀은 곧 믿음이 자라 가기를 바라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권면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 가라면 먼저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말씀대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 주실 구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직책명인 것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예를 들면 제 이름이 박덕기이고 직책명은 목사이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의 본명이고, 그리스도는 직책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 시대에는 1)왕 2)선지자) 3)제사장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들에게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예수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많은 왕들, 대통령 수상들, 고관 대작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왕중의 왕이십니다. 한 나라의 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예수님은 그 나라의 신민들인 교회와 성도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왕은 나라를 통치하듯이 예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선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시던 주님은, 신약 시대에 그 자신이 친히 오셔서 우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으며, 장차 되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다 알게 해주신, 선지자중의 선지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하여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가져오면, 그것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인간의 죄를 전가한 다음, 그 가져 온 짐승들을 잡아 대신 제사를 드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소나 양이 아닌, 자신의 몸을 직접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도록 해주신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각기 자기들이 들은 대로 '어떤이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주님보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 그럼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하여 그렇게 말한다 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라는 유명한 고백이었습니다. 여기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이 곧 바로 예수님께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삼직을 다 수행하실 그리스도시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강아지는 개의 아들이고, 송아지는 소의 아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이요 사람의 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강아지나 송아지나 곰이나 원숭이와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른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인 공자나 석가모니와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른 신,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였으며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 성도들은 참으로 복된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장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3대 성인이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그 장로의 신앙이 오죽하겠습니까? 그 다음은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자라나려고 하면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으신 분들,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시는 분들은, 꼭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고 또 배워서 예수님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 사랑을 알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님의 은덕을 기리는 노래 가운데 이러한 노래가 있습니다. ♬1)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2)넓고 넓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저 보다도 넓은 것 같아♬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어머님의 사랑도, 푸른 하늘보다 높고, 저 바다 보다 넓은 것이라고 하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1)주님의 사랑의 넓이
주님의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것 같습니까? 계 5:9에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고, 다시 11절을 보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계 7:8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천상의 구원받은 성도들의 광경인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로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 둘 되는 제 자식을 사랑하고 기르는 일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천차만별의 성도들을 양육해야 하는 목사의 힘든 사정을 누가 알아줄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의 넓이는 각 족속, 모든 세대,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까지 미쳐서 그 수를 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넓이 입니다.
2)주님의 사랑의 길이
렘 31:3을 보면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무궁하신 사랑인고로, 앞으로도 영원토록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또는 우리를 잊어버리셨나 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나 문제나 시련이 닥쳐오고, 어려움이나 실망과 마주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변하는 것을 알면 같이 변하고, 상대방이 식어지면 따라 식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랍니다'고 했습니다. 변하는 것을 알면 같이 변하고, 상대방이 식어지면 같이 식어지는 것,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뜨겁다고 하는 연인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히 13:5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고, 요 13:1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길이 입니다.
3)주님의 사랑의 높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엡 5:27에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나,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흠도 주름잡힌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되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4)주님의 사랑의 깊이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죄와 수치로 가득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비천한 탄생을 회상해 보십시오. 인간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오해를 받으시고, 증오와 적대를 당하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체포당하여 조롱과 야유를 당하고 뺨을 맞으시고, 거룩하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두 발에 못 박히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갈증을 이기지 못하여 '내가 목마르다' 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침내 영혼이 떠나서 죽고, 매장되고 무덤 속에 눕혀 지셨던 주님을, 생명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주님께서 죽어 무덤에 묻히셔야 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왜 이 모든 일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러분과 저를 주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이같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던 성도들이 부른 찬송가를 기억하십니까?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와라/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내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없네/나 주님께 몸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주 예수 사랑 몾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내 주만 생각하도다♬ 이렇듯 대부분의 찬송가가,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서 부른 신앙고백들인 것입니다.
자라나지 않는 아이는 병든 아이입니다. 5년이 되고 10년이 되었는데도 일어서지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면, 부모의 심정은 기가 막힐 것입니다. 늘 걱정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은지 5년이 되고 10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그 믿음이 자라지 않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이후 어떤 성도들은 믿음이 놀랍게 성장한 분들도 있지만, 어떤 성도들은 7년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자라나지 않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3월 한 달 동안 받은 그 많은 은혜가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 하려면 몇 가지 실천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1)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혼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고 우리 얼굴의 더러운 곳을 씻어 내듯이,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고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만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가 성경에서 영의 양식을 섭취해야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어떤 여성 그리스도인이 책들을 꺼내서 먼지를 털고 있는데, 성경책의 먼지도 털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어린 딸이 '엄마, 그 책 하나님의 성경책이야?'하고 물으니까, 엄마가 '그렇단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어린 딸이 말하기를 '엄마 그럼 왜 그 책을 하나님께 되돌려 보내지 않는 거야. 우리는 책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지 않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결코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2)매일 기도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호흡을 멈추면 죽게 됩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과도 같습니다. 호흡의 원리는 우리 속에 있는 탄산가스를 밖으로 내보내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하나님께 다 토설하여 고백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더욱 성장하려면 전에 하지 않았던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고, 새벽 기도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3)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신앙 생활의 기본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아니하는 신자 치고 믿음이 잘 자라는 법이 없습니다. 목사가 제일 마음 아프고 속상한 일은 성도들이 주일을 함부로 범하고 결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날을 마구 범하는 성도들을 보면 매우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과 무관하게 생각했던 주일 오후 예배도 출석하고, 수요 밤예배도 출석하시기를 바랍니다.
4)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일조 생활은 제 2의 회심과도 같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십일조 생활을 실천하게 되면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진실성이 증명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는 아직도 탐심에 사로잡힌 가시밭 같은 마음 밭이어서 더 이상 믿음이 아름답게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십일조 생활을 실천하지 못한 성도는 이 달부터 꼭 실천하여 믿음이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자라나는 이 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믿음이 어떤 면에서든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자라나고 성숙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