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이른 아침,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주인아주머니는 고맙게도 샌드위치와 과일, 그리고 음료수를 싸 주시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차를 빌려 타고 그라나다로 향해 달려갔다. 1인당 200유로씩 걷었다. 마드리드를 벗어나자 도로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음악이 흐르고 창밖으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흠뻑 취했다. 가는 도중 미경은 인터넷으로 숙소를 검색하고 세영과 나 경민은 올리브 나무를 어떻게 재배하고 수확을 할까 하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걸 가지고 우리는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 한 것이었다.
세 시간 남짓 달려 마침내 우리는 그라나다 숙소에 도착하였다. 정말 운이 좋았다. 정원에 바비큐 시설까지 갖춘 곳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알람브라 궁전에 가려는데 주인아저씨가 미리 예매를 하지 않으면 입장이 힘들다고 하였다. 낭패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 수없이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가려는데 주인아저씨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단체 관람객이 취소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단, 내일 아침 9시 입장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입장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지 않았던가. 대신 오늘은 시내 구경과 알바이신 지구에 올라가 맞은편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 외관을 보기로 하였다. 친절하게도 주인아저씨가 시내까지 차를 태워다주었다. 나는 저녁에 정원에서 바비큐파티를 할 수 있고 물어봤다. 그는 준비를 해놓겠다고 했고 저렴한 슈퍼마켓을 가리켜 주었다. 알바이신 지구를 올라가며 좁은 골목 사이로 상점들 안에 울긋불긋한 각종 의상들과 조각품을 보니 톨레도와는 또 다른 묘미가 느껴졌다. 알바이신 지구에 거의 올라왔을 때 해가 조금씩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그때 알람브라 궁전에서도 하나 둘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석양에 반사된 궁전도 노오란 색감과 붉은 구름의 색감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탁자위에 놓여 있던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잡는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날아가던 새들도 날개 짓을 멈추고 주저앉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에 푹 빠져 버렸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뒤돌아섰다. 마침 택시가 보여 올라탔다. 굉장히 젊고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표정도 굉장히 밝아보였다. 우리는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슈퍼마켓이 있는 쇼핑센터로 가자고 했다. 운전사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우리가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앞좌석에 탄 경민이 미심쩍었던지 스마트폰에 있는 맵(지도)을 가리키며 연신 이 길이 맞느냐고 물어봤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운전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해 보였다. 우리는 혹시 납치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우리는 네 사람이 아니던가. 만약 허튼 수작을 부리면 운전사를 때려눕히자고 했다. 어느덧 시내 중심가로 들어섰다. 퇴근시간이어서인지 도로가 꽉 막혀 버렸다. 더군다나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운전사가 알 수 없는 말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그때 운전사에게 전화가 왔다. 상대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자 친구가 화가 난 듯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할로윈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분명 오늘 운전사는 여자 친구에게 사랑고백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여자 친구는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길이 막혀 운전사가 늦게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경민, 세영, 미경이 맞을 거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갑자기 운전사가 우리에게 휴대폰을 들이대며 뭐라고 해명 좀 해달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미경이 큰소리로 말했다.
"I Love you!"
운전사가 화들짝 놀랐다. 우린 그 모습이 너무 웃겨 더 큰소리로 외쳤다
"I Love you so much!!!"
운전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클라션을 빵하고 울리더니 창문을 열고 끼어든 차량에 뭐라 지껄여 대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나는데 우리한테는 뭐라 하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에게 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침묵했다. 적막감이 밀려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창밖을 응시했다. 도로가 계속해서 막힘에도 불구하고 차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 경기장 앞을 지나가자 그때부터 막힌 도로가 뻥 뚫리기 시작하였다. 운전사가 웃으며 오늘 축구 경기가 있어서 더 막힌다고 설명해 주었다. 역시 축구의 나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사가 또 다시 안절부절 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드디어 쇼핑센터에 도착하였다. 조수석 앞에 앉아있던 경민이 내리고 뒷좌석 창가에 앉아 있던 내가 내리자 운전사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때 뒷좌석에 가운데 앉아 있던 미경이 택시요금을 내자 그때서야 방긋 웃어보였다. 아마도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줄 알았나보다. 우리가 다 내렸는데 갑자기 운전사가 황급히 쇼핑센타로 뛰어갔다. 나는 아마도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나보다 생각했다. 쇼핑센타로 들어간 경민과 미경은 슈퍼마켓으로 먹을 것을 사러 갔고 세영은 런던행 비행기 시간을 바꾸기 위해 여행사를 찾으러 갔다. 나는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운전사를 마주쳤다. 안절부절 못한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순간 나는 빵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바지에 표시까지 났을까... <다음회에 계속>
첫댓글 상상을 하며 제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감상 했습니다.선생님.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