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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술 이야기, 증류주의 탄생 예로부터 문명 간의 충돌이나 정복 전쟁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전파되거나 문화가 창조돼 왔다.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으로 인해 그리스와 서남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돼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났다. 9세기 중엽에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동진을 하던 이슬람 아바스왕조가 탈라스 강 유역에서 충돌하며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로 퍼졌다. 술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으로 여겨지는 증류법의 전파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만 보아도 지역에 따라 위스키, 브랜디, 진, 보드카 등의 대표적인 증류주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아시아권을 보면 중국의 백주, 한국의 증류식 소주, 일본식 소주 등이 대표적인 증류주로 손꼽을 수 있다.
증류기를 통해 추출되고 있는 알코올
기초적인 증류법은 기원전 2000년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됐다. 그곳의 바빌로니아인들은 증류의 원리를 탐구하고 원시적인 증류 장치를 개발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주로 선원들이 바닷물로 식수를 얻거나 향수를 만드는 데 이런 증류법을 사용했다. 현재 사용하는 증류기법의 원형과 우리가 술이라 부르는 ‘알코올’이란 이름이 나온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인 서기 8세기께 중세 이슬람 화학자들에 의해서다. 화학자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와인을 증류해 얻어진 물질에 알코올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랍어 정관사인 알(Al)에 속눈썹을 더욱 길고 윤기 있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이용했던 일종의 숯(Kuhul)이란 단어를 붙여 알코올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술을 금하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알코올을 술로 사용하기보다는 향수나 다른 화학물질의 원료로 사용했다.
위스키, 진 등 다양한 종류의 증류주
11세기 말 유럽 사회는 영토 확장에 대한 영주들의 욕구가 높았다. 장남과 달리 상속권이 전혀 없던 차남들은 자신들의 봉토 확보가 필요했고, 로마 가톨릭 교황의 성전 참여 독려로 유럽 전역에 걸쳐 불에 기름을 붓듯 맹렬한 기세로 십자군 결성운동이 일어났다. 연금술사, 새 물질 만드는 데 증류법 사용 무려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최고의 과학집단이라 할 수 있는 연금술사들이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 이 증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가, 13세기 프랑스 의학자였던 빌뇌브(Villeneuve) 교수가 이슬람 화학자 자비르가 발견한 알코올, 즉 증류주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빠르게 퍼지게 됐다.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들처럼 당시 의사들은 만병통치약을 찾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했는데, 빌뇌브 교수도 새로운 약을 찾기 위해 시도하던 도중, 증류법을 통해 알코올을 추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증류주에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의 ‘생명의 물(Aqua Vitae : 아쿠아 비떼)’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14세기 중반 창궐해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의 공포는 알코올의 확산을 부추겼다. 페스트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알코올이 이 불가사의한 질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알코올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때까지 알코올은 약용이 목적이었다. 15세기가 되어 독일의 연금술사 브라운 쉬바이그는 <증류 기술>을 저술했다. 이 책은 증류만을 독자적으로 다룬 증류법을 알렸으며 이를 통해 증류주의 생산을 촉진시켰고 거대한 증류기를 이용한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 등의 생산이 이어지게 됐다.
우리나라의 정통 안동소주
서양의 증류주가 십자군 전쟁을 통한 증류기술 전파로 인해 탄생했다면, 동양의 증류주는 몽골의 정복 활동으로 이뤄졌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칸은 동방정복과 함께 서쪽으로도 눈을 돌려 폴란드, 키예프, 이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이 세워졌다. 몽골은 끝까지 저항하는 국가에 대해선 무자비할 정도로 파괴하고 말살시키는 정책을 펼쳤지만 교역과 조공관계를 수용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개방 정책을 사용했다. 능력에 따라 타 민족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새로운 문물이나 문화, 종교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는 안전하게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런 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와 기술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레이카 보드카
폴란드와 북쪽으로 키예프까지 정복한 몽골은 남쪽으로 눈을 돌려 서남아시아로 진출하게 된다. 제4대 칸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이란과 이라크를 정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증류법을 습득하게 됐을 것이라 전해진다. 그 전까지는 양젖을 발효시킨 술을 마셨으나 보관성이 떨어지고 그 부피로 인해 장거리 운송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빠른 기동력이 장점인 몽골에게 보관과 운송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증류주는 거의 천상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 증류법은 중동에서 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중국에 빠르게 전파돼 황주를 중심으로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백주가 등장하게 됐으며, 우리나라까지 전해지며 안동소주와 같은 쌀로 빚은 증류식 소주가 탄생하게 됐다. 서쪽으로는 킵차크한국의 영토였던 폴란드와 키예프 지역을 중심으로 감자를 주원료로 만든 증류주가 만들어 지고, 이후 발트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는데 그 증류주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러시아의 대표 술인 보드카다. 일본으로의 전파는 태국을 통해 유구국이었던 오키나와를 거쳐 16세기 초 규슈지역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라키(あらき)라 불렸던 기록으로 보아 그 기원은 역시 몽골을 통해 태국에 전파됐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듯 몽고리안 루트를 통해 수천㎞가 넘는 머나먼 중동지역의 증류법이 짧은 시간에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타 문화에 배타적이지 않고 빠른 교역이 가능하도록 인프라를 구축한 몽골로 인해 각 나라마다 특성에 맞는 다양한 증류주가 계승 발전됐다. 명품주로 꼽히는 중국의 8대 명주, 우리나라의 안동소주 등도 8세기 전 비록 침략은 당했지만 몽골에게서 얻어진 큰 결실로 볼 수 있다.
역사속의 술 이야기 '소주'
1231년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칸은 살리타이로 하여금 고려를 정복하라고 명령한다. 동쪽의 숙적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먼저 복속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빠른 기동력으로 개성을 포위한 몽골의 기세에 놀란 최씨 무신정권은 서둘러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몽골 항쟁기’를 다룬 MBC 주말 사극 ‘무신’의 이야기다. 연기파 배우 정보석·김주혁·박상민씨 등이 출연하고 있는 ‘무신’에서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최씨 정권 2대 수장인 최우(정보석 분)가 명문가 자제인 김약선(이주현 분)을 자신의 딸인 최송이(김규리 분)와 혼인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몽골에 대한 강경 무신들 사이에서 김약선은 괴로워하고 낮부터 소주를 찾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 장면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틀렸다. 몽골 초기 침략 시기인 1230년대 고려에는 술을 증류하는 기술이 전래되지 않아 소주라는 증류수가 없었기 때문. 술을 마셨다면 쌀로 빚은 ‘청주’였을 것이다. 소주는 1260년대 이후 몽골군이 고려에 장기 주둔하면서 증류법이 전해졌고, 이를 통해 개발됐기에 약 30년 이상의 역사적 차이가 있다. 개성, 안동 등 몽골군 주둔지에서 소주 탄생 과거 술은 전쟁 시 피로함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군대 필수 보급품이었다. 수메르 지방에서 연금술사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증류법은 몽골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서남아시아 등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1260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래됐다. 소주의 명산지로 유명한 개성, 안동, 진도, 제주 등은 몽골군의 주둔지였거나 몽골과 전투가 치러졌던 지역이었다. 몽골로부터 기본 증류 원리를 배운 고려는 청주를 이용해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소주를 만들어냈고, 현재까지 전해오는 개성소주와 안동소주, 진도홍주와 제주민속주 등이 대표적이다. 소주의 옛 이름을 찾아보면 소주의 원류도 알 수 있다. 평안도의 심마니들은 지금도 소주를 ‘아랑주’라고 부르며,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 부른다. 안동소주의 원래 이름 ‘아래기’는 아랍어로 ‘아라그(Araq)’였던 것이 몽골로 전해지면서 ‘아르히’(Araki·13세기어로 아라키)가 됐고, 한반도에 전해지면서 몽골어 ‘아라키’의 한국식 표기가 된 것이다. 일반 서민들이 아닌 양반만이 마실 수 있는 아주 귀하고 고급스러운 술이었다.
오늘날 쉽게 만날 수 있는 희석식 소주의 종류는 다양하다.
고려 후기 들어온 높은 도수의 소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중인층까지 급속도로 퍼지면서 과음으로 인해 많은 폐해가 발생하고 목숨을 잃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소주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지역 민속소주인 안동소주(왼쪽)와 제주민속주
금주의 어려움을 이해한 세종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의 폐해를 조목조목 논한다. 하지만 세종은 난색을 표한다. “엄금한다고 무슨 소용이냐. 막지 못할 것이다. 대신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주겠다.” - 세종15년(1433)
·소주를 금하는 글을 내린 성종 소주 과음으로 인한 폐해가 이어지자 성종은 “소주를 매우 숭상하는 풍습이 있다. 소주를 지나치게 마시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이치가 있는지라, 앞으로는 늙거나 병이 들어 약으로 복용하는 것을 빼고는 마시지 말도록 해라”라는 훈시를 내렸다. 이는 소주를 원기를 돋우는 약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성종21년(1491)
전통 소주의 쇠퇴와 희석식 소주의 등장 민간에서 널리 퍼졌던 전통 소주는 일제 강점기와 1960~70년대 경제 부흥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오늘날 즐겨 마시는 대부분의 소주는 전통 소주에서 많이 벗어난 일종의 변종 소주다. 희석식으로 만드는 오늘날의 소주는 연속 증류법을 이용해 만든 고농도의 주정(에틸알코올)에 물을 넣어 희석시켜 만든다. 일제 강점기 주세법으로 인해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진 수많은 전통 소주들의 맥이 끊어졌고,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연속 증류기를 도입해 대량 생산한 저가의 술들이 출시되면서 ‘신식 소주’라고 불렸다. 하지만 95도 이상의 에틸알코올에 물을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는 그 자체로는 그윽한 향과 풍미가 거의 없어 감미료를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희석식 소주가 국민주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960년대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값싼 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65년 양곡관리법 공표로 인해 술 제조 시 쌀 사용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증류식 소주의 전통은 단절되고, 희석식 소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그후 1960년대 말과 1970년 초 희석식 소주회사들의 건전성 확보 및 투명한 세원확보를 위해 수차례 통·폐합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10개 소주회사로 정착했다. 현재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가 넘는다. 소득 수준의 향상과 동시에 문화와 일상생활에 있어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해외에서도 소위 한류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술에 관해선 선뜻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전통주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의 경우 4500여개 백주 중 4대 명주 또는 8대 명주라 하여 등급을 매기며 국가가 품질을 관리하고 있으며, 각종 국가적인 행사에 국격을 상징하는 만찬주나 국빈 선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통주 품질 관리에 대한 체계나 등급은 고사하고 국제행사 시 만찬주로 사용할 마땅한 전통주조차 찾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우리 전통술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나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최근 전통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옛 것을 복원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역사속의 술 이야기 - ③ 명예혁명과 진 ‘진’, 치료약으로 탄생…칵테일 베이스로 진화 1688년 11월15일,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과 메리 부인은 1만5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영국 서남부에 상륙하는 데 성공한다.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 의회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권리선언’과 ‘권리장전’ 승인을 통해 공동 왕위에 오른다. 많은 병사들의 대규모 희생이 따르는 내전을 피하고 철저한 사전 준비 끝에 승리해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 부른다.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의 의회 중심의 정치 체계가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증류주 역사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스카치위스키와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진(Gin)’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 헨드릭스 진(왼쪽)과 국내 첫 진 브랜드인 해태주조의 런던 드라이진
진의 탄생과 개발 ‘진’이란 곡물을 이용해 발효·증류시킨 90도 이상의 주정에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를 비롯한 다양한 허브와 향료를 넣고 재증류시켜 만든 무색의 증류주를 말한다. 숙성과정이 없어 맛이 가볍고 다른 주류와도 잘 어울려 보드카와 더불어 다양한 칵테일의 베이스가 되는 술로 사랑받고 있다. 전 세계인이 즐겨 마시는 진은 치료용 약으로부터 시작됐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의사인 실비우스(Sylvius)는 약효로 인정받던 주니퍼베리와 다른 약용식물을 이용해 이뇨작용과 해열을 돕는 약으로 진을 개발했다. 실비우스는 프랑스어로 주니퍼베리란 뜻의 ‘쥬네브레(Genievre)’라는 이름을 붙였고, 훗날 영국에서 진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돼 불리게 된다. 약용으로 개발된 쥬네브레는 제조가 간단해 빠르게 네덜란드 전역으로 퍼지며 인기를 얻게 됐다. 동시에 명예혁명 당시 영국으로 건너간 약 1만5000명의 네덜란드 병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국에도 소개됐다. 또한 진을 즐겨 마시던 윌리엄 3세가 국왕이 되자마자 수입 술에는 무거운 관세를 부과하고 진에 대한 세금을 내리자 저렴해진 가격으로 인해 큰 인기를 얻게 됐다. 18세기 중반 런던 인구 70만명이 1년에 소비한 진의 양만 무려 5000만ℓ에 이른다. 1인당 소비량이 약 70ℓ에 달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성인 평균 맥주 소비량 50ℓ와 비교해보면 알코올 함유량이 높은 진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부작용도 생겼다. 약용 효과보다 알코올에 취해 가정이 파괴되고 작업 효율이 떨어지는 등 사회적 문제가 대두됐다. 영국의 유명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는 1751년 그림 ‘진 골목(Gin Lane)’과 ‘맥주 거리(Beer Street)’ 두 작품을 통해 그 당시 진의 폐해를 지적했다. 진 골목은 도시가 황폐하고 취객들이 널브러져 암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맥주 거리는 ‘좋은 음료’로 인식돼 밝고 활기가 넘치는 행복한 사회로 묘사돼 있다. 진의 폐해가 너무 커지자 영국 정부는 ‘진 법령’을 만들어 법원의 관리 하에 허가 받은 곳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할 수 있게 규제하면서 1760년대부터 조금씩 소비가 줄어들었다. 그 이후 1831년 연속식 증류법의 개발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품질이 안정돼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진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인도를 비롯해 전 세계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영국에서는 열대 모기로부터 전염되는 치명적인 말라리아는 오래도록 골칫거리였다. 변변한 치료법이 없어 열대지역에 파견된 병사들과 상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은 남미 원주민들이 열을 내리는데 ‘키나(Quina)’ 나무껍질을 먹는 것에 착안해 1820년 ‘퀴닌(Quinine)’이란 성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1. ‘진 골목’ 2. ‘맥주 거리’ 3. 진을 발명한 실비우스 박사
1974년 한국의 첫 ‘진’ 소개
퀴닌은 말라리아 예방 및 열을 내리는 데 효과가 있었지만 맛이 워낙 쓰다 보니 복용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에 퀴닌을 진과 탄산수에 함께 타서 마시는 방법이 고안됐다. 진의 주니퍼베리 향과 탄산이 퀴닌의 쓴맛을 크게 줄여줬고, 동인도회사는 병사들에게 매일 진을 배급하며 말라리아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진토닉(Gin and Tonic)’이란 칵테일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진토닉을 마시면 달콤함과 함께 약간의 쌉쌀함이 느껴지는데 그게 바로 퀴닌의 영향이다. 하지만 현재의 진토닉에는 퀴닌 성분이 극소량만 들어 있거나 아니면 향만 첨가한 수준이다.
1920년대 재즈시대를 지나 1933년 미국의 금주법이 폐지되자 칵테일 문화가 미국 전역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투명한 진과 보드카는 다른 리큐르(Liqueur)류와 잘 어울려 칵테일에 꼭 필요한 술이 됐다.
진을 사용한 대표적인 칵테일로는 시원하고 달콤한 진토닉과 알코올 도수가 높은 남성용 ‘마티니(Martini)’, 오렌지 주스를 섞은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미국의 칵테일 문화가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영국의 진은 세계적인 증류주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진의 발전상을 빗대 ‘진은 네덜란드 사람이 만들었고, 영국인이 꽃을 피웠으며, 미국인이 영광을 주었다’라는 말도 있다. 국내에서 진은 1974년 해태주조에서 ‘런던 드라이진’이란 브랜드로 처음 소개됐다. 색다른 맛과 상대적으로 낮은 주세로 인해 저렴한 가격으로 초기에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통 진이 아닌 주정에 진 원액 일부를 섞어 만든 ‘기타재제주’ 제품으로 품질에서 주당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후 호텔의 바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진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봄베이 사파이어’, ‘비피터’와 같은 대중적인 제품부터 ‘헨드릭스’와 같은 슈퍼 프리미엄 제품까지 다양한 진들이 시장에 나와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앞으로도 진은 주류의 다양화 트렌드 및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꾸준한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만들어 즐길 수 있는 진토닉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이코노미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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