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시 30:1-12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이 고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내용의 시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1-5)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장소인 스올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합니다(3). 이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죽음과 같은 절망 가운데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질병과 고통에서 치유해 주셨음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지만 그의 은총은 평생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음(6-10) 다윗은 자신이 평안할 때 교만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낯을 숨기시자 큰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을 고백합니다(7). 이는 잠언 16장 18절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제 다윗은 고난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합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10) 이처럼 우리도 인생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결단(11-12) 하나님은 다윗의 슬픔을 춤으로 바꾸시고, 그를 베옷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옷 입히셨습니다. 베옷을 입는 것은 슬픔과 애도의 표시였고, 기쁨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은 새로운 시작과 회복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광, 즉 카보드가 잠잠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2). 카보드는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다윗 자신의 존재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것을 보여줍니다.
적용: 당신 삶에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나아가 당신의 상황을 솔직히 아뢰고 도움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을 위로하시며, 당신의 상황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18세기 미국의 정치가, 사상가, 발명가이며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지인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실패와 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전념할 수 있었습니까?" "석공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으십니까? 석공은 큰 돌을 깨기 위해 똑같은 자리를 백 번 정도 두드릴 것입니다. 돌은 갈라질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백한 번째 망치로 내리치면 돌은 갑자기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큰 돌을 두 조각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두들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변질입니까? 변화입니까?
시 30장 10~12절 / 배진기목사(안디옥교회)
하나님의 섭리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과 연단을 통해 변화시켜 더 한
단계 오르게 하거나 새로운 자리로 인도하셔서 새로운 도전을 주십니다. 마귀 사탄도
하나님을 흉내 내어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는 것 처럼하지만 마귀 사탄의 섭리는 변
화를 위장한 변질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19로 인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삶의 패턴이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이 위기의 때를 타고 사탄은 모든
면에서 변질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삶을 혼돈으로 몰아 넣습니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인정, 이것은 분명히 가치관의 변질이지 새로운 변화는 절대 아닙니다. 차별금지법,
변화로 보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깨트리는 변질입니다. 차별을 없게 하자고
하면서 마귀는 구별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차별을 해서는 안되지만
위 아래구별도 없고, 좌우도 구별도 없고, 남녀도 구별도 없고, 노소도 구별이 없는
사회는 변질된 사회가 됩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차별이 없어야 하지만 구별조차 없어지면 이 사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변질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를 기대합시다. 오늘 본문11절에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를 말씀 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 나이다” 본질이 변질되게 하시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합시다. 코로나19를 통하면서 하나
님이 주시는 새로운 변화를 잘 받아 나가야지 사탄이 주는 변질로 주저 앉으면 안됩
니다. 우리는 이 위기의 상황에서 주의 깊게 살피며 항상 질문을 던져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변질입니까? 변화입니까?”
1. 변질이 아니라 변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가 모이지 못하게
하고, 예배도 방해하고, 기도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기도함으로써 하
나님의 변화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탄은 모이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
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예고하시며 여기에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10:23-25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말씀 하였습니다. 마귀 사탄의 변질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변화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10절 상반절에 제일 먼저
“여호와여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은혜를 얻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슬픔을 변하여 춤으로 변화시키
시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위기가 왔을 때 기도는
새로운 것을 얻고 변화를 얻어 우리를 한 단계 오르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예례미야 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변화를 얻는 기도의 사람은 알지 못했던 크고 은밀한 일을 보게 됩니다. 슬픔이 변하
여 춤이 되고 베옷이 벗겨지고 기쁨의 띠를 띄게 됩니다.
시편 118:5-6에 “(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기도하는 사람은 넓은 곳으로 올려짐을 받는 변화를 얻게 됩니다. 개역 성경에는
“크고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코로나19를 두고 마귀 사탄은 자꾸 변질을 말합니다. “위기가 온다. 더 어려워진다.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바뀐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약속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사람의 일의 결과 때문에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변화를 주시면 사
람이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2. 기도의 사람은 변질에 대한 면역 항체가 넘쳐 자신 스스로가 변화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하는 부활신앙인은 환경과 조건의 변질에 넘어가지 않고 먼저 자신 스스로가 변
화의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강해지고 담대함을 얻어 환경의 변질을 극복하는 것입니
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변질에 대한 면역 항체가 넘쳐 환경과 조건에 매이
거나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다윗의 어린시절 다윗은
그 아버지 이새도 인정하지 않는 미약한 존재였지만 다윗 스스로 믿음의 사람으로 서
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
의 지시를 받아 이새의 집안에 왕으로 기름부을 자를 찾아 갔을 때 이새는 큰 기쁨으
로 자신의 아들들을 사무엘 앞에 세웠지만 8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은 그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았던 미약한 존재였으나
그는 한번도 자신을 열등감을 가지고 소외되고 무시당한 변질된 모습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형제들에게서도 무시당했고, 장인이 되었던 사울에게서도 핍
박을 받았으며 피할 곳이 없어 이웃나라로 도망해야 하는 상황들을 만났어도 자신이
변화를 얻은 반전(反轉)의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전(反轉)의 자세가 고
백되어진 것이 오늘 우리가 나누는 본문의 고백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계속 마귀 사
탄이 변질을 가져왔지만 다윗은 스스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그의 삶은 언제나
반전(反轉)의 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부활신앙인의 믿음의
자세를 보여 주는 믿음의 본이 됩니다. 또 한 사람 성경에서 변질의 위기 속에 빠졌
으나 가장 극적인 변화의 복을 받은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노예요 풀려날 수 없
는 죄수의 자리에서 변질되지 아니하고 기도의 힘으로 하루 아침에 애굽의 국무총리
가 되는 변화의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변화의 반전(反轉)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변화의 반전(反轉)의 섭리로 해석하고 살았습니다. 그래
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하든지 변질의 오염에 물들지 아니하고 변질의 바이
러스에 대한 항체 면역력이 왕성하여 형통의 복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창세기 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환경과 조건은 변질의
위기로 치달았지만 요셉은 변질되지 않고 요셉 자신이 먼저 스스로 형통한 자가 되었
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변화의 반전(反轉)신앙의 비결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
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 우리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
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았습니까? 우리도 다윗과, 요셉과
같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자로서 형통한 자가 됩시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고 말씀하심과 같이 임마누엘을 확신하고,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소유하고 사는, 환경과 조건이 변질되기 전에 스스로 면역 항체가 넘쳐 먼저
스스로 변화하여 형통한 자가 됩시다.
3. 기도의 사람은 변질된 인간관계로 타협하지 않고 상대방을 변화 시키는 삶을 삽니다.
다윗은 어떤 무시와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그리고 어떤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
서도 스스로 먼저 변화의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임마누엘의 힘으로 변화하
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보여 주었습니다. 어린 소년이었던 다윗
이 비교도 할 수 없는 블레셋의 용장 골리앗과 벌렸던 싸움에서 우리는 어린 소년 다
윗의 담대하게 변화된 신앙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7:
45-47에서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
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
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라고 믿음을 드러내고 선포하였고
결국은 자신의 물맷돌로 골리앗을 한 방에 쓰러트리는 승리를 거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골리앗과의 싸움 이후 다윗은 어디에 가나, 누구를 대하나 위기에 타협하여 변
질로 전락하지 아니하고 사탄과 위기에 대적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인간관계를 이루었
습니다. 다윗은 무시 당하고, 소외당하고, 핍박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살았지만 한
번도 자신이 당한대로 갚는 분노로 변질된 삶을 살지 아니하고 먼저 스스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인내하여 상대를 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았
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요한 공격과 핍박 속에서도 한번도 사울을 대적하여 맞서지
않았습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십황무지에서 마음만 먹으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
를 만났어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변화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
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 왕이 되었으나 다윗의 지파인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
외한 열지파는 다윗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으로 왕권을 얻으려
고 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헤브론에서 7년을 다스린 후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을
변화 시키는 인간관계를 이루어 대적하던 열지파가 찾아와 굴복하므로 통일왕국의 왕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변질된 모습으로 타협하지 아니하고 변화의 삶을 드러내어
상대방을 자기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인간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창세기 39:3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셉의 대인관계도 항상 변질되지 아
니하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인간관계를 이루었음을 봅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분함 속에서도 요셉은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아침에 부잣집 귀공자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떨어졌으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주인에게 인정받아 가정총무
가 될 만큼 성실하고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는 유혹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 변질되지
아니하고 주인 보디발을 변화 시키는 관계를 이루었고 나올 수 없는 감옥에 들어가서
도 변함없이 상대방을 변화 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39:20-23에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
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
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
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변화의 복은 환경과 조건에서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자신 속에서 이루어져 이웃과 바
른 인간관계를 이루므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내가 이웃과 먼저 분노와 원망으로 변질
된 인간관계를 맺지 아니하고 이해와 관용과 용서의 인간관계를 맺으면 하나님이 모
든 환경과 조건에서 변화와 반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인간
관계를 분노와 원망으로 변질되게 하지 말고 상대를 변화 시키는 화목을 이루는 승리
의 삶을 삽시다.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의 축복을 보여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분명하게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따
라가 변질되는 삶을 삽니다. 노예 되어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따라오
게 하는 삶을 삽니다. 주인 되어 정복하고 다스리는 변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4. 기도의 사람은 변화된 예배자의 입술과 고백을 가지고 승리를 이루며 삽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의 입술과 고백을 변질 시켜 불평 원망하게 만들고 탄식하며 절망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그 입술과 고백이 예배자의 입술과 고백으로
변화됩니다. 본문12절에서 다윗은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
하리이다 라고 예배자로 변화된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슬픔을 가져와 베옷을 입히는 사탄에게 넘어가 불평 원망하지 아니하고 감사
와 찬양의 입술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예배를 막았어도 우리는 변질되지 아니하고 예배자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을 감
사드립시다. 다윗은 언제나 극심한 환란과 역경 속에서 변질되지 아니하고 변화된 반
전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다윗의 변화를 이룬 반전의 신앙고백이
시편3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31편에서
자신의 상황이 깨어진 그릇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
모하며 도전을 결단하며 변화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시편31:9-16에
기록된 다윗의 신앙고백을 보겠습니다.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
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
이다 (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 여호와여 그러
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
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
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깨어져 박살난 그릇처럼 되어버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절망과 탄식으로 변
질되지 아니하고 변화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14절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다윗의 신앙은 “그러하여도”의 신앙고백 속에서 그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다
윗과 같이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러하여도"의 강한 도전으로 일어나 나아갑
시다. 다윗에게서 "그러하여도"의 강한 변화의 신앙고백으로 코로나19가 가져오는 변
질의 위협을 물리치고 변화된 예배자의 승리를 이룹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부활신앙인들입니다. 부활 신앙인 답게 변질의 위기에 넘어가지 말
고 변화된 승리의 신앙인으로 삽시다. 모이기에 힘쓰며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변질
에 대한 사탄의 공격에 면역항체가 넘쳐 스스로 변화를 이루는 삶을 삽시다. 변질된
인간관계로 타협하지 않고 상대방을 변화 시킵시다. 변화된 입술과 고백으로 예배자
의 승리를 이룹시다.
주여, 우리를 고쳐주옵소서
시 30장 1~5절 / 이상호목사
(유머) 부부의 일곱 고개
일단 결혼한 부부들은 싫든 좋든 다음과 같은 일곱 고개를 넘어야 한답니다.
첫째 고개는 환상의 고개 : 신혼부터 3년쯤 걸려 넘는 고개로 갖가지 어려움을 비몽사몽간에 웃고 울며 넘는 눈물고개.
둘째 고개는 타협의 고개 : 결혼 후 3-7년 동안에 서로에게 드러난 단점들을 타협하는 마음으로 위험한 권태기를 넘는 진땀 고개.
셋째 고개는 투쟁의 고개 : 결혼 후 5-10년을 사는 동안 진짜 상대방을 알고 난 다음 피차가 자신과 투쟁하며 상대를 포용하는 현기증 나는 비몽 고개.
넷째 고개는 결단의 고개 : 결혼 후 10-15년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장, 단점을 현실로 인정하고 보조를 맞춰 가는 돌고 도는 헛 바퀴 고개.
다섯째 고개는 따로 고개 : 결혼 후 15-20년 후에 생기는 병으로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는 별거나 이혼한 것처럼 따로따로 자기 삶을 체념하며 넘는 아리랑 고개.
여섯째 고개는 통일 고개 : 있었던 모든 것을 서로 덮고 새로운 헌신과 책임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며 사는 내리막 고개.
일곱째 고개는 자유의 고개 : 결혼 후 20년이 지난 후에 나타나는 완숙의 단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눈치로 이해하며 행복을 나누는 천당고개. 아무쪼록 모두 천당고개를 넘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 시간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여, 우리를 고쳐주옵소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한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예화) 너무 어려서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하루는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기를 달래 주며 과자와 장난감을 주었지만 도무지 그치지를 않고 자꾸만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침내 화를 내고 아이를 때려 주었습니다. 아이는 더욱 세차게 울어댔습니다. 나중에 어머니의 눈에 보인 것은 아이의 발바닥에 가시가 찔려 있었던 것입니다. 아기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가시를 뽑아주자 잠시 후 웃으며 어머니 품에 꼭 안겨 잠이 들었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고통을 당하고 울음으로 호소하는 이 아이의 모습이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도 주님은 나를 이해하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인 것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주님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절) 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끌어내사" 라는 이 동사는 ①매달리다. ②양동이를 내려놓다. ③건져내다. ④끌어내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이끌림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1) 곤란에서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환란도 많고 곤란한 일도 많고 난처한 일도 많이 생깁니다. 곤란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시 116:1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곤란을 당하였습니다. 요셉이 곤란을 당하였습니다. 삼손이 곤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곤란을 당하였을 때에는 주께서 피할 길을 주셨고 인도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심판의 자리에서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러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① 노아가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날로 더욱 타락하는 인류를 심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시고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에는 노아가 의롭고 경건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고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② 롯이 바로 이러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소돔성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의인 열명이 없을 만큼 타락되어있었습니다. 소돔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천사를 소돔성에 보내어 살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롯의 손을 잡아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창19:16)고 하셨습니다. 주께 이끌림을 받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기도하므로써 치료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주시는 큰 은혜가 있습니다.
1) 부르짖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 육체적인 노동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도 부르짖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응답하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부르짖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르짖었고, 모세가 광야에서 부르짖었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신비한 능력으로 역사하기도 하셨습니다. 환란을 당하여도, 고난을 당하여도, 실패를 하였어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라는 말씀을 약속하셨습니다.
2) 나의 진실을 통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① 소경바디매오가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10:47-48)는 말씀을 봅니다. 이 바디메오의 부르짖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누가 무슨 소리를 하여도 자신은 계속해서 예수를 불렀고 그래도 응답이 없자 더욱 소리질렀다고 하였습니다. 부끄러운 모르고 챙피한 줄 모르고 부르짖는 이 모습이 그에게는 진실의 모습이요. 참모습입니다. 이 부르짖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고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② 문등병자들이 부르짖었습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눅17:12-13) 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들이 멀리서서 부르짖는 이유는 자신들이 문등병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자신들이지만 소리만큼은 높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3. 절망보다 소망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본문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 할렐루야! 참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소망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살아야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비록 움막집에 살망정 소망이 있어야 하고 점심먹고 저녁꺼리가 없어도 소망은 있어야 하고 비록 병원에서 "당신은 앞으로 3개월밖에는 더 못삽니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소망은 있어야 합니다. 죽는 사람이 무슨 소망이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도 소망을 가지고 죽어야 합니다. 죽는 사람이라고 해서 소망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소망 때문에 죽어도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그에게 있습니다.
예화) 한비야씨가 아프리카에 씨앗을 나누어주었는데 모자라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답니다. 씨앗이기 때문에 먹지 못한 것은 똑같은데 씨앗을 받은 사람들은 희망이 있었고, 받지 못한 사람들은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낳은 최고의 전도자인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첩인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본처의 집에서 말할 수 없는 구박과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지고 어두웠습니다. 소년시절 어느 날 양지 바른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워 기침을 했더니 붉은 피가 올라왔습니다. 진단결과 몹쓸 전염병인 폐병 3기로 치료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오후 햇빛을 받고 앉아 있었는데 북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면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고 전도지를 줍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도자를 붙들고 “나 같이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기생의 자식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럼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됩니다”. 도요히꼬는 그때부터 예수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기생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세계의 전도자로 빈민들의 아버지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5절)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서운 얼굴로 책망을 하고 야단을 쳤다고 해서 그 모습이 죽을 때까지 가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버지가 무서워서 밖으로 도망을 갔어도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찾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없으며 밤잠을 설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언약을 어기고 죄악으로 타락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백성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하셨습니다. 나의 허다한 죄를 덮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작은 사랑이 아니라 큰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고 하셨는데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죄를 탓하지 아니하고 덮어주고 가려주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허물이 많고 죄가 많아도 가려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 오늘 우리는 '우리를 고쳐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람이 고쳐져야 되는 것이 무슨 병만이 아닙니다. 습관도 고쳐져야 하고 행실도 고쳐져야 하고 마음도 고쳐져야 합니다. 교만도 고쳐야 할 일이요. 거짓도 고쳐져야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땅도, 물도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 여신도들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들이 고침받고 가정과 교회와 지역이 고침받기를 바랍니다. 본인이 아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여러분의 모성애와 헌신이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잠깐의 진노 영원한 은총
시 30장 1~12절 / 성홍모목사
구약의 시편은 유대인의 찬송가였습니다. 동시에 유대인의 신앙고백서이며, 기도의 책이었습니다. 시편이 150개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은 5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1권: 1-41편, 2권: 42-72편, 3권: 73-89편, 4권: 90-106편, 5권: 107-150편입니다. 각권의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절은 “찬송하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제1권의 마지막 시가 시41편입니다. 1권 마지막 절 말씀이 시41:1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송축하라고 하였는데, 예전의 개역성경에는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제2권의 마지막 시가 시72편입니다. 시72:18-19이 시72편의 마지막 절입니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찬송하며,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제3권의 마지막 시가 시89편입니다. 마지막 절 말씀이 시89:52입니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었습니다. 3권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제4권의 마지막 시가 106편입니다. 마지막 절 말씀이 시106:48절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시고,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제5권 마지막 시는 시150편입니다. 마지막 절 말씀이 시150:6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입니다.
이렇게 시편이 제5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 시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43:21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는데,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찬송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사야42:8에서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찬송을 어떤 사람에게 바친다든지, 우상에서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릴 찬송을 우상에게 돌리면 그것은 가증한 일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입니다.
우리는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은총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평생의 은총이요, 영원한 은총입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시30:5을 정해보았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이 시편에는 세심한 관찰로 서로 반대되는 단어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노염과 은총, 잠깐-평생(영원), 저녁과 아침, 울음과 기쁨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슬픔과 춤, 베옷과 기쁨의 띠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큰 위험에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 두 가지를 들어보라고 하면 감사와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가려내보라고 하면 같은 상황에서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사람은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성숙한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 찬송의 사람이었으며, 감사의 사람이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가 비록 간사하여 악독한 죄를 지었고, 책망을 받았어도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하면서 또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을 빼놓고 다윗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일생은 감사와 찬송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감사와 찬송이 여러분의 신앙을 지탱해야 합니다. 한 집이 튼튼하려면 기둥이 건실해야 합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의 신앙의 집을 지탱해주는 두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이 말이 우리의 입에서 떠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이며, 성전낙성가로 불려진 노래였습니다. 이 시는 전형적인 감사의 시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부르고 성전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이 시편이 가장 전형적인 감사시이기 때문에 성전낙성식에 헌정되어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1. 죽음에서 고치시고 살리신 것을 감사합니다.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정적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아들 압살롬까지 대적이 되었습니다. 사울왕가가 무너지면서 다윗이 새로운 왕조를 일으켰으니, 그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대적과 원수들이 있었을 것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새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가 대적들에게 조롱당하지 않고,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도록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시고, 회복될 수 없는 불치의 질병에서도 건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영혼을 죽음에서 끌어내어 살려주시고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스올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극한 상황이요,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올무였습니다. 사울왕의 추적은 피할 수 없는 스올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주변의 여러 나라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것도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국이 안정된다고 싶었는데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힘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운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자기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에 다윗의 가문이 처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아버지의 후처들을 차지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까?
이런 피난의 길, 죽음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건져주시고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셨습니다.
다윗이 처한 어려움을 말하는 단어들이 모두 다 어둡고 암울하고 딱딱합니다. 원수, 스올, 무덤, 노염, 저녁, 울음, 근심, 슬픔, 베옷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은 내다버리고 싶고, 우리 집에서 사라졌으면 좋은 단어들입니다. 정말 일상에서 사용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인데, 그런 단어들이 나의 하루를 어지럽힐 때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고쳐주시고, 우리를 끌어올려주시고,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였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로 기뻐하지 못하게 해주셨다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고 있습니다.
2. 평생의 은총과 아침의 기쁨을 감사합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순간, 잠깐이요,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요 영원합니다. 11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나에게 유익이 되게 하셨지, 나에게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잠깐 고통 받는 것이 일생이라는 인생길에서 보면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욥기를 보면 엘리후라는 제4의 친구가 나오는데, 그가 욥에게 권면한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엘리후가 감히 욥에게 말합니다. 그동안 욥이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하나님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지고 불평하거나 대드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침상에 있을 때 꿈으로,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경고하시지만 그것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욥33:17-18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욥이 의로운 사람인데 그가 고통에 빠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바른 행실을 가지고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며, 의롭게 살고 잘 믿는다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잘 믿는 교만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주시려고 잠시 잠깐의 고난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엘리후의 결론입니다.
고대인들은 곡식을 추수하여 잘 말리고 껍질을 벗기는데 ‘트리뷸룸(tribulum)’이라는 도구로 때려서 탈곡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도리깨와 같은 것입니다. 영어의 고난을 뜻하는 ‘트리뷰레이션’(tribulation)란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실제로 고난은 껍질을 벗기듯 우리의 인격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알곡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난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119:71의 말씀과 같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잠시 노여워하시지만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덧입혀주시고 있습니다.
3.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감사합니다.
2절 말씀이 기도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8절 말씀도 역시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10절 말씀도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오늘 다윗은 인생의 난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람에게 해명하고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사람의 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다보면 문제는 점점 더 꼬이고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피곤하여 눕기라도 하면 대적자들과 원수들이 고소해하고 조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저주하고 나옵니다.
다윗은 헤쳐 나가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로 풀어나갑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난제를 풀어나갔습니다. 그가 인생길에서 복병을 만났습니다. 어려운 질병, 헤쳐 나올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부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50:15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블레즈 파스칼이 쓴 팡세라는 책이 있습니다. 팡세라는 말은 “생각”이라는 프랑스어입니다. 파스칼이 죽은 후에 그의 유족과 친척들이 파스칼의 단편적인 글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기독교를 설명하고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쓰고 있었으나 완성된 책이 아닙니다. 그의 짧은 생각들을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팡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말도 팡세에 나오는 말입니다.
파스칼이 39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인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남은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여동생이 불치의 안질에 걸려 고생하며 실명의 위기에 있었습니다. 후에 그 여동생은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파스칼은 진심으로 여동생의 안질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동생이었습니다. 돈도 없었지만, 의료시설이 전무하던 당시에 파스칼은 정말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동생의 안질이 낫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그 십자가가 여동생의 눈을 만지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환상이었습니다. 파스칼은 기도를 마치고 동생을 찾아가서 눈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동생이 말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눈이 방금 나았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때 파스칼은 혼자 말했습니다.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파스칼이 죽은 후에 옷에서 이상한 가죽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죽에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엡3:20-21에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꼭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더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4. 찬송과 감사하여야 합니다.
4절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다윗은 자기 혼자만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로 함께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혼자만 잘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의 성도들로 하여금 다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혼자서 부르는 것보다는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도 두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더욱 힘이 나는 것처럼, 찬송도 그렇습니다. 주일예배의 찬송이 가장 힘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부르는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먼저 감사와 찬송에 힘쓴 결과 하나님은 또 다시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하시고, 힘을 실어주시고, 다시 더 큰 감사와 더 감격적인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격려의 말씀은 우리로 움직이게 하고 다윗의 신앙에 참여하게 합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 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잠잠할 수 없습니다.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춤을 추게 하시는데, 어떻게 잠잠할 것이며, 베옷을 벗겨버리고 기쁨의 띠를 띠우시고 보니, 이대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노염을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요 영원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우리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소리 높여 찬양하고 마음 깊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하라
시 30장 1~6절 / 김광일목사(벧엘교회)
로랜드 헤이스(Roland Hayes)는 미국의 유명한 흑인 음악가였습니다. 1923년 유럽에서 명성이 알려졌을 때 독일 음악계에서 그를 초청하여 베토벤 홀에서 콘서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우월감을 가진 독일인들은 흑인 헤이스가 베토벤 홀에 입장하는 것은 베토벤에 대한 모욕이요 독일인의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반대하는 독일인들이 표를 구입하여 극장 객석이 가득 찼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고 콘서트를 훼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헤이스는 신앙인이었지만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져 심한 번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한 시간에 베토벤 홀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내려가라! 노예의 자식인 주제에 감히 우리 앞에 서느냐?”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헤이스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피아노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10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잠시 후 장내가 조용해지자 그는 눈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를 비추는 조명이 두 뺨에 흐르는 눈물로 반사되었습니다. 그때 헤이스는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피부를 어둡게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과 영혼은 이 시간 어둡지 않게 하소서. 이 시간 검은 피부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흰 피부의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감동하게 하옵소서.” 피아노의 소리와 함께 헤이스의 음성이 극장 홀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부른 곡은 ‘당신은 평화시오’ 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반대하던 독일인들은 영혼에 스며드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노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베토벤 홀에 모인 관객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찬양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 후 베토벤 홀에 흑인은 안 된다는 어둠이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말년에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핵심적인 모티브는 찬양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높이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자신의 온갖 위험과 시련 혹은 정신적 고통까지 치유해 주시고, 위험에서 이끌어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찬송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악한 죄를 지어 책망을 받았어도 회개하면서 용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였습니다. 찬송을 빼놓고는 다윗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의 일생은 찬송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영혼을 살려 주시니
김춘근 장로의 ‘와이 미(Why me)?’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단돈 2백 달러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간 김춘근은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4년 만에 최우수 교수로 뽑히는 영예를 안았지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간경화 진단을 받고 모든 일에서 쉬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바로 ‘Why me?’ 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왔느냐’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고, 수고도 했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했는데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면서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만했던 것, 아내와 자녀들에게 잘못한 것들을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치유의 응답을 받고 완치된 김춘근 장로는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청년들의 신앙과 도덕 회복운동을 일으켜 청년들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그의 영혼을 살리시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 김춘근 장로는 다시 ‘Why me?’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왜 나 같은 죄인, 부족한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까? 왜 하나님 일에 써주십니까?’라는 감격적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는 영혼으로 살려 주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대적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아들 압살롬까지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스올 즉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올무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겨내기 어려운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끌어올려주셨습니다.
다윗이 구원 받은 까닭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며 송축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찬송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수금과 비파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탁월한 영성을 지니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에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은총을 깨달은 다윗은 더욱 더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기쁨이 오게 하시니
주님과 함께 어떤 사람이 모래 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자국은 보폭이 일정한 반면에 자신의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던 자신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주님 발자국 옆에 나란히 가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란히 가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시 얼마쯤 가다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 발자국 안에 찍히던 조그만 발자국이 점점 커지면서 주님의 발자국과 같아졌습니다. 그러더니 하나의 발자국만 모래 위에 찍히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자국이 뒤쳐지더니 처음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지그재그로 출발했다가 멈추고 발뒤꿈치로 모래를 꽉꽉 찍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그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처음 발자국이 어지럽게 났던 것은 이해합니다. 주님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그리스도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지러운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함께 걷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랬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조그맣던 저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 안에 들어가 주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래, 제대로 이해하고 있구나.” “조그만 발자국이 커져 주님의 발자국과 같아진 것은 주님을 닮아가게 되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거다.” “그런데 주님! 왜 갑자기 퇴보하였습니까? 왜 주님 발자국에서 떨어져 처음보다 더 어지러운 발자국이 되었습니까?” 그러자 주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십니다. “그건 우리가 함께 춤을 춘 것이다!” 예수께서 슬픔 속에 들어오셔서 손을 잡아 춤을 청하신 것입니다. 기쁨의 춤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손잡아 일으켜 주시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순간이요,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요 영원하기에 우리가 찬송해야 합니다. 11절의 고백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은 고난도 유익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되게 하지 않으시고 기쁨이 오게 하신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곡식을 추수하여 말리고 껍질을 벗기는데 ‘트리뷸룸(tribulum)’이라는 도구로 탈곡을 하였습니다. 도리깨와 같은 것입니다. 영어의 고난을 뜻하는 ‘트리뷰레이션’(tribulation)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난은 껍질을 벗기듯이 인격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알곡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녁에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하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요동치 않게 하시니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중보기도 사역자 체리 힐(Cherie Hill)은 ‘흔들리지 마’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중대한 시기는 언제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이다. 왜 그럴까?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위만 바라볼 때가 바로 절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오직 그분께만 매달릴 사람들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이 땅을 감찰하고 계신다. 그러니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끝까지 가져가겠다고 결단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가만히 있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찬송하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고 둘러싼 환경도 수시로 변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물질이나 명예, 권세를 좇아가며 방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물질, 명예, 권세에 결코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질 것을 믿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찬송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항상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뿌리를 내리면 어려움을 당해도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따라서 눈앞에 놓인 현실이 힘들다 해도 하나님으로 인해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프로농구 선수 제레미 린(Jeremy Lin)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기까지 농구인생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NBA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팀에서 방출된 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빅리거로 잠시나마 화려했던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를 다시 돌아본다. 삶의 모든 중심은 ‘내가 얼마나 농구를 잘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우상은 바로 ‘농구’였다. 이것을 부숴야 한다.” 린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나’에서 ‘나를 쓰시는 하나님’으로 바꾸어지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기할 때마다 이런 문구가 적힌 팔찌를 차고 뛰었습니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뛴다 (In Jesus Name I Play).” 린은 경기를 할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미국 프로농구 최고의 스타로 올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혼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함께 찬송하여야 합니다. 찬양대원과 성도 여러분! 영혼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높이며 찬송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망을 극복함
김종택목사(동토마햇빛교회) / 시30편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자는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자기 수입보다 갚아야 할 원금의 이자가 더 큰 자도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매일 같이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나보다 더 힘센 자들일 때 사람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요즘은 대학 나와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0번 20번 이력서를 제출해도 아무런 결과도 없을 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을 떨쳐버리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절).” 여러분께서는 절망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하나님 아버지, 제 병을 고쳐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저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제발 직장 좀 구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제 원수가 저보다 힘이 셉니다. 저를 보호하여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제발 빚 좀 갚고 살게 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여러분을 그냥 깊은 구덩이에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절대 수치를 당치 않고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있든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피하면 절대 부끄러움을 당치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그분께 피하기만 하면 100% 승리하게 됩니다.
왜 다윗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찾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보기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정말로 신뢰해도 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허풍을 떠는 자들이 있습니다. 능력도 없는 자에게 무슨 신뢰감이 생깁니까? 세상에는 무자비한 자들도 있습니다. 윤리와 법보다는 자기 주먹을 주로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남의 유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배만 채웁니다. 이런 자들에게 무슨 신뢰감이 생깁니까? 배반하기 좋아하는 자들도 전혀 신뢰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렇게 능력 없고, 무자비하고, 배반하기 좋아하는 자들과 전혀 다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존귀케 하시기 위해 그분께 피하는 자들을 돌보십니다. 피조물을 괴롭히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귀한 이름을 한층 더 존귀케 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의(義)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의 자랑이고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분께 도움을 구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그분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개는 다른 자들을 통하여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자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돕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사들의 손길을 통해 자녀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하셔서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불쌍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남의 도움 요청을 묵살하고서 어떻게 하나님께 도움을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먹칠하면 안됩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 제사장의 딸이 결혼도 하기 전에 재미삼아 아무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거룩한 제사장인데 그 간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제사장의 명예에 큰 흠집을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거룩한 것들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여 의로운 삶을 살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의 기도를 속히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거룩한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거룩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찬송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 그분을 높이며, 그분께 감사드리며, 그분께 찬양을 드립니다.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아시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을 제거하시고, 의인에게 넓은 삶의 터전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은 자들은 다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찬양드립니다. 우리는 타인이 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찬양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형제가 일이 잘 풀렸을 때 그를 시기하고 은근히 미워하면 안됩니다. 형제들 간의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을 헛것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큰 도움을 받고도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우리는 기쁨이라는 선물을 덤으로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내 이름은 하나님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귀한 때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고 그분의 은총은 평생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잘 아시고 계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있고, 능력있다고 하나 까딱 잘못하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인간들을 돕지 않으시면 인간답게 살 자들이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염보다 은총을 훨씬 크게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녀들이 범죄할 때 잠시 노엽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노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반성하고 성숙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노염은 예리한 칼이 되어 우리의 죄 덩어리들을 잘라내 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실 때에도 절대로 낙심하면 안됩니다. 자식이 조금 잘못했다고 아버지가 그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잠시 징계를 하시겠지만 우리가 그분의 사랑스런 자녀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은 잘 하든 못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그러나 자기 자식은 잘못하면 채찍을 드는 게 정상적인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징계하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니, 징계를 받더라도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태도를 보일 때 하나님의 노염은 기간이 더욱 짧아지고 그분의 은총은 영원 영원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얼마간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식지 않을 때 그 자는 비로소 성숙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그 자에게 큰 일을 맡기십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물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면 죄인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세상에는 살길이 막막한 약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미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그 아기는 죽고 맙니다. 어미가 자기 몸에서 나온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필히 망하게 될 자들이 그분께 도와달라며 기도를 드릴 때 그분께서는 무한한 긍휼함으로 그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께서 위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정할 때 소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위와 같은 믿음을 가질 때 절망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께 기도드리지 않고 그분을 떠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들은 절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죽은 자의 침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승리한 자가 드리는 찬송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헛되지 않은 참된 소망이 있게 하고, 하나님과 자신간의 사랑을 무르익게 만듭니다.
기다림의 지루함이 우리의 믿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즉시 그 기도가 응답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려서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인정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오랜 기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내가 클수록 여러분은 더 성숙한 의인이 됩니다. 기다림의 기간이 길다고 투덜거리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장래의 복을 잘 지킬 수 있는 자들이 되십시오. 큰 일을 할 자질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복을 지킬 능력도 없이 복을 받으면 그 복을 영원히 잃는 수가 있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 딴 과일은 아무 짝에도 못씁니다. 때에 맞지 않는 기도응답도 그와 같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띠우셨나이다(11절).” 여러분들의 삶에 이런 반전(反轉)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녁에 눈물자국을 남긴 채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나의 모든 문제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기뻐해야 할 일이 내게 닥칩니다. 여러분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세주 예수께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믿는 자가 모든 문제와 슬픔을 극복하고 기뻐하며 춤을 추게 됩니다. 절망은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엄습했으나 바울은 그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여러분 절망은 불신앙입니다. 소망과 인내는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게 소망과 인내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 아버지시여, 믿음이 부족하여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속히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주를 높이니
시 30장 1~12절 / 김광일목사
미국 조지아주 아덴스의 조지아 대학교 강당에서 3만여명이 참석한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전체 수석을 차지한 한국인 여학생 ‘Sharon Sion (장시온)’의 이름을 호명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치자 학생들과 축하객들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장시온은 학사모에 'To God Be The Glory (영광을 하나님께)'라는 글귀를 적어 입장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인천 달동네 지하에서 살았습니다. 직업군인이었던 어머니는 매일 일을 나가셨고 목사인 아버지는 전도를 나가 혼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부흥회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떠난 미국 해외 집회, 아버지는 더 큰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딸을 데리고 갔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그녀는 “아버지, 저 여기 남게 해 주세요.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홀로 남을 딸의 걱정에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결국 눈물을 숨기며 딸을 두고 귀국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철저하게 홀로서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갔습니다. 10년 뒤 노력 끝에 대학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조지아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학업을 계속하며 교회에서 반주자로, 유치부 교사로, 청년부 부회장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꼭 출세하고 돈을 벌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높이는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 믿음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본 시는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영혼을 음부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찬양시입니다. 시인 다윗은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일 것은’으로 시작합니다. 원어로 ‘아로미므카 예흐와’인데 ‘하나님을 드러내다’라는 뜻입니다. 낮은 하나님을 자신이 높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다짐입니다.
다윗은 찬송의 사람이었습니다. 기쁨의 때, 평탄할 때뿐만 아니라 슬픔과 환난의 때에도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다윗은 본시에서도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마무리하며 오직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왜 하나님을 높이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주를 높이는 것처럼 우리도 주를 높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주를 높이는 까닭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를 고치셨기에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손인경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필리핀 선교와 미자립 교회 지원사업과 함께 실직자와 노숙자들에게 무료 진료와 시술을 해주는 1인 다역으로 바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난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8년도에 삼손 한의원을 개업한 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하나님을 뒤로한 채 세상에 눈을 돌렸습니다. 손박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가혹했다. 빚보증을 섰다가 잘못돼 물질적 풍요는 하루아침에 빈곤해졌고 아들이 사고로 얼굴과 목에 3도 화상을 입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서야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회개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아들의 상처 치유로 나타났는데 흉칙한 상처를 본 의사들이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눈물의 기도를 시작한 후부터 새살이 돋아나면서 흉칙한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그 후 손박사는 '성경과 건강이야기'를 국민일보에 연재하고 할렐루야 건강법 강사로 활동하면서 “주어진 달란트만큼 열심히 일하고 능력이 허락하는 동안 하나님을 높이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높이는 믿음의 태도를 분명히 할 때 하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기의 ‘고치셨나이다’는 원어로 ‘왓티르파에니’인데 ‘치료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질병의 상황이 자신을 짓누른다고 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으로 괴로움 당하고 있습니까? 왜 이러한 위기를 주셨느냐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위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상황을 역전시키며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를 높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둘째로 나를 세우셨기에
작곡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노년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가 되었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바하는 처절한 고통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 불후의 명작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음악을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사용하여야 한다.” 바하는 황무지 같은 인생속에서도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바하는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언제나 S.D.G 라는 글자를 적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Sola Deo Gloria)'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단어입니다. 또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고 적었습니다. 바하의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은 황무지 같은 환경에도 굳게 서도록 만들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기의 ‘세우셨더니’는 원어로 ‘헤에마드타’인데 ‘형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형통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고백하였습니다. 형통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은혜의 주체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삶이 형통합니까?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의 원천은 주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시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신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그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나를 도우셨기에
6.25 당시 고아였던 소년이 미국의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이 되었던 임종덕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를 공산군이 반동분자로 총살하여 장작 위에 시체를 놓고 기름을 부어 불사르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탈출한 29명의 고아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숫자가 늘어나 129명이 되었습니다. 그 중 24명이 먹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습니다. 결국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 고아들을 먹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미군 장군의 자동차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가방을 훔쳐 달아나다가 미군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서툰 영어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장군이 그를 하우스 보이로 삼고 숙소의 일을 시켰습니다. 그 장군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중장이었습니다. 임종덕을 1년 동안 관찰하여 보았던 장군은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시켰습니다. 그리고 믿음도 물려 주었습니다. 그 후 임종덕은 예수를 믿고 하바드 대학교에서 박사가 되었습니다. 학위식에 참석한 양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였습니다.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고아를 자신들에게 맡겨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석한 화이트의 동료 장성들이 임종덕을 껴안고 축하하였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최고의 별들의 잔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임종덕 장로는 말합니다. “고아인 자신을 도우신 손이 하나님의 손이었고 안아 준 양아버지의 포옹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을 높이는 믿음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여기의 ‘돕는 자’는 원어로 ‘오제르’인데 여호와의 긍휼에 온전히 맡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기도 그 자체는 응답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면 전적으로 그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여호와의 성품에 근거하며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우시는 행동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라는 기도는 자신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자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며 도우셨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슬픔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셨습니다. 이러한 도우심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채워 주심’의 저자 이상혁 목사는 미국 애리조나주 사막에 사는 인디언 호피 부족을 섬기는 선교사입니다. 소외되고 척박한 인디언 마을에서 한국인 선교사가 사역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깊은 인디언들의 가슴속에 복음을 심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은 높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인디언들을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선교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실을 보지 못한 후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이선교사는 인디언들을 무시했던 교만을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역하려던 생각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오랜 헌신 끝에 하나님의 채워 주시는 은혜로 부족 선교 역사 320년 만에 처음으로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고 인디언 선교센터까지 건립했습니다. 이상혁 선교사는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10%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10%만 책임져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50%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50%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100%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3,000%, 6,000%, 10,000%로 채워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가 소유한 황금이 아닌, 자기가 추구하는 권력도 아닌 오직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100% 헌신하면서 하나님을 높일 때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실수하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징계를 받고 회개하느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회복시켜 주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고쳐주시는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노염은 잠깐 은총은 평생
시 30장 1~12절 / 이종철목사
이 시는 질병으로 인하여 거의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난 사람이 부르는 감사시이다.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의 위기를 겪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만한 시이다. 6-7절은 병에 걸리기 전의 형편이고, 8-10절은 그 때 드렸던 기도의 내용이며, 1-5, 11-12절은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표제에 ‘성전낙성가’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파괴를 죽음으로, 성전 회복을 다시 살아남으로 해석했던 것 같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한 인간의 운명과 일치시킨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치 한 사람을 부르듯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사41:14)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의미하는 것과 같은 개인성을 알지 못한다. 개인은 공동체와 철저히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의 탄식은 전 공동체의 탄식이다. 한 사람의 넘어짐 때문에 전 공동체가 함께 고통을 당한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시편 30편처럼 극히 개인주의적으로 보이는 시가 실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할 것이다.
병에 걸리기 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모든 사람이 그렇다. 잘 나갈 때는 그 행복이나 번영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 사업은 영원히 망하지 않고 평탄할 것이며, 자기 몸은 건강하고 자신에게는 불행이 도무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이 착각한다. 형통할 때일수록 겸손해야 한다. 그 성공이나 축복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 마냥 교만해서는 안 된다. 내 산을 태산처럼 굳게 세우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7a). 만약 그 분이 얼굴을 돌이키시면 순식간에 근심이 우리를 덮친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7b).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당장 코앞에 닥칠 일도 예견하지 못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처럼 믿음의 말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 일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녀오겠습니다.”란 말은 대단한 믿음의 말이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은혜이다. 우리 힘과 기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들고 나가며 우리 출입을 지키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어려움의 때에 시인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문제가 생기면 부르짖어야 한다. 부르짖되 시인은 하나님을 설득하며 기도한다. 이런 식의 설득이다. “하나님 제가 만약 죽어 무덤에 내려가면 내 죽음이 당신에게 무슨 유익 되겠습니까? 어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한 줌의 흙이 주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9). ‘제가 죽으면 주님 손해입니다’ 식의 기도이다. 그러나 그 동기는 자신의 목숨 연명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찬양과 복음 전파에 있다. 나 죽는 것은 괜찮지만 그러면 누가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허무하게 죽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시인의 기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는데 죽어 한 줌의 티끌이 되면 어찌 더 이상 찬양할 수 있겠는가고 하소연한다. 시인은 또한 주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사역을 하여왔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표현하고 있다. 갑작스런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도 그런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면전에서 더 위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바로 인생의 존재 이유이다. 시인은 인생의 존재 이유가 찬양과 진리의 전파임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겠으니 나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시인을 죽음의 골짜기에서 끌어내셨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 그가 부르짖으매 고쳐주셨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사회에서 그들은 삶과 죽음의 길은 오직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였다. 히스기야 왕의 경우를 보라.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38:16)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15년을 더 연장시켜 주셨다(사38:5).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의사의 손을 빌려서 우리를 치료하고 계신다.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치료할 때 그 상처 부위에 한 뭉치 무화과를 붙임으로 낫게 하였다(사38:21).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우리를 낫게 하실 수도 있고, 사람의 손을 통하여서도 낫게 해 주실 수도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시인이 깨닫는 진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주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을 간다는 점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주님이 잠깐 노여워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그래서 잠깐이다.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생각은 저주가 아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명과 평안이다(렘29:11).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명령하셨던 우리 주님은 당신 스스로 오래 동안 분을 품지 않는 모범을 보이신다. 주님은 죄지은 자를 3, 4대까지 저주하시지만 그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복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분은 3,4대까지도 가지 않으신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금방이라도 잊으신다. 3,4대는 단지 우리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상징하는 숫자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천 대의 복은 진실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복을 주시기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시는 그런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저녁에는 울음이 머물다 가지만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오늘밤을 넘길 수 있을까?’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곧 아침이 밝고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치유하심으로 새날을 맞게 하신다. 성 프란시스도 열병으로 죽음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 깨끗이 낫고 새 날 아침을 맞았을 때 프란시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감사와 신비로 바뀌었다. 살아서 숨쉬는 사실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들에 핀 백합화가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성 프란시스의 생애를 그린 영화에서는 새 생명의 아침을 맞은 프란시스가 새 소리가 너무 신기해 그 소리를 좇아 지붕 위를 위태롭게 걷는 장면이 나온다. 하루 종일 들의 꽃들에 취해 바라보는 장면도 있다. 이것이 기쁨의 아침을 맞은 사람의 모습이다. 생명의 신비를 깨닫고 그 감동에 취한 사람의 모습이다. 잠깐의 노여움과 슬픔의 날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내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 바꾸시고, 내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신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고통은 짧았지만 우리 인생은 춤추는 인생이 되었다. 우리 입에서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고 영영토록 감사가 넘친다(12).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 30장 1~12절 / 김광일목사
아프리카에 살고있는 《맛지족》들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내 머리가 흙 속에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표할 때, 자기 머리를 땅에 닿기까지 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머리가 흙 속에 들어갈 만큼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주둥이를 닦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입을 싹 씻는다' 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시치미를 뗀다든지 혹은 모르는 척 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감사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현대의학이 발달되어 머잖아 암 정복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기를 가져오는 바이러스만큼은 현대의학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만해도 200여종이 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발견되는 바이러스는 정체도 알 수 없습니다. 에이즈도 바이러스입니다. 그리고 에볼라 바이러스는 더 무섭습니다. 바이러스가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지 컴퓨터에 들어오는 방해꾼도 컴퓨터 바이러스라 부릅니다. 그런데 세상에 제일 무서운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불평 바이러스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옮기기 때문입니다. 이 불평 바이러스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뿐만이 아니라 단체나 기업이 망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불평 바이러스가 침범하지 아니했습니까? 이 불평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망합니다. 그런데 이 불평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이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적극적으로 감사하는 생활만이 불평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입니다. 다윗은 끝도 없이 영영히 감사하며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다윗이 영영히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파멸에서 생명을 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은혜 중의 은혜요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사망과 죄악에서 건져 주신 은혜입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고 보니 수많은 죽음의 고비 고비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신 것을 너무나 실감나게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일은 뭐니 뭐니해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즉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찾았다"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맙시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 은혜만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를 잊어버립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인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가 없습니다. 빼앗기고 잃어버려 봐야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 주시고, 건강 주시고, 좋은 환경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살다가 그 생명에 손상을 입고 그 좋은 환경 빼앗겨 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주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이 주인이 될 때 삶은 더 혼란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처럼 자신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룩하신 이름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조지 에버렛 로스 선교사는 31년간 선교활동을 하고서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 이라면" 이라고 말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고 할지라도" 라고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라면"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내 인생이 번성하면, 내가 성공한다면 그 때 나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라고 할지라도" 라고 하는 사람은 비록 악한 자들이 번창한다고 해도, 갈보리에서 나의 잔을 마신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죽어도 믿고, 죽여도 믿고, 죽어가도 믿고, 죽어서도 믿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사는 승리의 믿음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991년, 세계적인 패션잡지 <엘르>의 편집장이 된 장 도미니크 보비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이며, 두 아이의 자상한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 자유를 좋아하는 멋진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1995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예기치 못했던 병마는 그의 모든 걸 바꿔 놓았습니다. 뇌와 신체를 잇는 신경망이 끊어져 말할 수도, 먹을 수도, 혼자 힘으로 숨을 쉴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오로지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눈꺼풀이 전부였습니다. 캄캄한 병실에 혼자 누워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볼 때 아무리 의지 강한 보비도 어쩔 수 없이 눈물짓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들이 눈을 깜빡여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는 드디어 자신의 슬픈 마음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해 보자!' 프랑스어의 알파벳을 눈 깜빡거리는 횟수로 표시하기로 했습니다. E나 S처럼 자주 사용하는 문자는 가능하면 눈을 적게 깜빡이도록 순서를 재배열했고, 마침표는 눈을 아예 감아 버리는 것으로 약속했습니다. 하루에 원고지 반 쪽, 한 문장을 만드는 데 꼬박 하룻밤을 새는 기나긴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에게 20만 번 이상이나 눈을 깜빡거려야 했습니다. 그가 오로지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가는 동안, 마음만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잊어버리고 훨훨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예전의 일터로, 한 번쯤 다시 가보고 싶은 곳으로... 그리하여 드디어 1년 3개월만에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이 탄생했습니다. 이 책은 불과 열흘만에 17만 부가 팔리는 프랑스 출판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1997년 3월 9일, 보비는 그를 가두고 있던 잠수복을 벗어 던지고 나비가 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투병생활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송됐고, 그의'희망과 사랑을 지켜본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는 믿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사는 승리의 신앙입니다.
4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래도 계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현재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지켜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고생도 해보고 영광도 누려본 인물입니다. 그런 다윗이 자신의 삶을 체험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바로 하나님 백성의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평생을 은총으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큼 비참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눈물을 속상해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 하는 신앙의 눈물로 변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을 씻겨 주시고 그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나는 믿노라, 나는 믿노라 나는 지상의 영원한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을 믿노라.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린다해도 태양 빛이 있다는 것을 믿듯이 그 시대가 비록 늦어지더라도 그 시대가 올 것을 나는 믿노라” 나치 독일의 아이슈비츠 강제수용소 독가스 실에서 죽어가면서도 유대인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어릴 때부터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가르쳐 왔습니다. 배운 것이 감사니까 죽어가면서도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지만 자취는 감사의 자취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감사를 잃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울음이 기숙하는 저녁때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아침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다가오는 아침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아침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침이 되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릅니다. 만물의 모습이 분명히 밝혀 보여 집니다. 그때야 모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캄캄한 밤중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감사할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다윗은 일찍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근심 속에서도 근심을 품지 아니하고 그 근심을 감사로 승화시킬 때 슬픔이 춤이 되고 눈물이 기쁨으로 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슬플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슬픔이 춤으로 변할 것입니다. 눈물 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눈물이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 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인도의 간디가 한번은 막 출발하려는 기차를 타다가 신발이 한쪽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도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이 놀라며 그 이유를 묻자 간디는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한쪽 신발을 줏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머지 한 짝 신발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감사에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윗이 이런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그는 순간의 감사아닌 영원의 감사를 말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됩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는 생명을 파멸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살게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현실이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걸 내다보고 감사하며 사는 미래적인 감사가 있는 자들이 되어 남은 바 삶가운데서 영영히 감사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전천후 감사(全天候 感謝)
시 30장 1~12절 / 홍문수목사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모작을 했습니다. 그 중에 첫번째 추수를 하면서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지난 반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기에 동일한 마음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매년 7월 첫 주일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깊이 감사함으로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큰 축복이 임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일생 네 번째 시간입니다. 특별히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다윗의 감사 생활’에 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을 가리켜 훌륭하다고 평가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감사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고난이 참 많았던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서 막내였지만 귀염둥이가 아니라 천덕꾸러기로 양떼를 돌보며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차기 왕에 예비되었지만 왕이 되는 과정에서 10년 이상 핍박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때때로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굳세게 지켰고, 특별히 감사하는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신앙이 약화되고 감사치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생 전체를 두고 볼 때, 그는 분명 감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난의 때에나 형통의 때에나 그는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고난의 때에는 낙심하거나 원망하기 쉽고, 형통의 때에는 교만하거나 방자하기 쉽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이게 잘 안됐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앙의 수련을 통해 환경이나 조건을 초월해서 항상 감사하는 신앙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신앙을 이렇게 명명해 봅니다. 전천후 감사 신앙!(All-Weather Thanksgiving Faith)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 행복했던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왕이 됐고 부자였기 때문에 행복했으리라 지레 짐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왕이라고 무조건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죠. 환경 조건이 화려하다고 당연히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행복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이 했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몫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해서 아우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행복이 멀리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감사하면 어느덧 행복이 바로 내 앞에, 내 곁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풍요로워도 감사할 수 없으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곧 감사 불감증이다."
이 시간 다윗의 ‘전천후 감사 신앙’에 관해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그런 신앙을 터득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환경 조건이 더 좋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행복해지고, 일생토록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의 시행착오 : 낙심과 교만에서 전천후 감사로 ...
다윗도 처음부터 늘 감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는 다른 이들처럼 환경 조건에 따라 휘둘리고, 그의 마음이 흐렸다 갰다 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낙심했습니다. 그리고 형통할 때는 교만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수련하고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늘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편인데 그런 과정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는 형통할 때에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교만했죠. 그러다가 고난을 당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은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신앙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6절~7절 보면, 그는 과거 형통할 때에 영원히 그 인생이 요동치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장담했습니다.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금세 넘어집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잘 나갈 때 자기 능력과 지혜로 되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늘 그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잠시 얼굴을 돌려버리니까 큰 환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고민하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8절~10절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1절~3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감사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는 독자들과 성도들에게 간증하며 함께 감사하는 신앙을 갖도록 권면합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이제 다윗은 고난의 때에도 형통할 때에도 영원히 감사하리라고 결단합니다. 12절. “ ...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약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감사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신앙의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천후 감사 신앙은 이렇듯 고난의 과정을 통해 연단된 아름다운 신앙이었습니다.
[2] 전천후 감사의 비결 :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
구체적으로 전천후 감사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윗이 연단되었듯 성숙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이 없으면 환경 조건을 초월해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입니다.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이란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감사 신앙과 관련해서 중요한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는 신앙 :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비로소 주제 파악이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이만큼 축복하시고 세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내 인생의 모습은 전적인 하나님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와야 참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감사하게 되고, 그게 성숙한 신앙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된 줄로 착각하고 방자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심스럽게 경고한 것도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광야에서는 차라리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기 쉬웠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나가 내려오고 물이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안정된 환경 가운데 혹시라도 백성들이 착각할까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 ”
다윗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인생만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 겁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의 이런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12개 절 가운데 하나님의 칭호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10회, ‘주’라는 칭호는 13회나 나옵니다. 그만큼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된 후 고백한 내용을 보면 그의 이런 신앙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삼하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자기는 비천한 집안 출신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주셨다는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서 감사가 우러나올 수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리차드 백스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친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훌륭한 저서들을 남겨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고 치하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니올시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펜(pen)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바울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미국에서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 중인 최희섭 선수를 아실 겁니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에 앞서 개회식을 할 때면 고개 숙여 겸손히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경기 중 안타가 치거나 홈런을 치면 특유의 세
리머니를 합니다. 양쪽 주먹에 키스를 하고, 양쪽 검지를 하늘로 향합니다. 기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주먹에 키스를 한 것은 기쁨의 표시이고, 검지를 하늘로 향한 것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키스한 겁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을 때 감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는 신앙 :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때때로 고난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 자칫 잘못하면 왜 이런 고난이 오는지 의심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고자 때로는 고난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시고자 부단히 일하십니다. 이게 곧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바울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대로 고난도 형ㅌ오함도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뤄지며,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느 음악 평론가가 악성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해설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천재성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시대의 무미건조함이나 범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귀머거리가 된 것이 순전히 비참한 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난을 통해 베토벤을 연단하시고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앙이 있으면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3] 전천후 감사의 축복 : 영원히 행복한 인생
전천후 감사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동행해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시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어 함께 해 주시면 언제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행복한 인생입니다. 푸른 초장을 지날 때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나 만족할 수 있고, 영원한 천국 집에 들어갈 소망으로 감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수준이 문제입니다. 환경 조건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비행기가 지상에서 이륙할 때 액 300미터 상공을 통과하면서 가장 심하게 요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높이 올라가면 오히려 고요해진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신앙이 미숙할 때 요동합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무슨 일을 만나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고도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을 소원합니까? 그러실 겁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무쪼록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다윗처럼 감사 신앙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조건을 좀더 낫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인생에는 늘 환란과 고통이 찾아옵니다. 좋았다가다 나빠지고 나빴다가도 좋아지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닙니까? 우리 신앙이 그럴 때마다 요동하는 수준이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늘 흐렸다 갰다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환경 조건이 변화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감사로 바꾸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환경 조건에서도 인생이 확 달라집니다. 김치 한 가지에 식음 밥 한 덩이라도 감사하면 잔치 상이 됩니다. 누추한 초막이라도 감사하면 궁궐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이 상태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로에서 생각을 시작해 보십시오. 적신으로 왔을진대 뭐가 있네 없네 해도 있는 만큼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영 죽을 인생이었기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영혼 아닙니까? 죽어도 천국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금 당장 감사하고 지금 당장 행복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감사하며 살다보면, 때때로 하나님이 기적의 역사를 보여 주실 수도 있습니다. 리더즈 다이제스트에 실렸던 실화입니다. 트레일러 운전기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낙심이 됐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씨름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40일간 매일 감사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겁니다. 40일째 되는 날 그분은 시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닥쳐올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감사로 정면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다윗의 전천후 감사 신앙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행복하시고 주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한 길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행하여도
시 30장 1~2절 / 엄기호목사
다윗은 시골 목동으로 자라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날마다 강해졌습니다. 이쪽에서 쳐들어가지 않아도 원수들이 자진해서 찾아와 예물을 바치고 화목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궁궐도 지었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안과 밖이 부흥 발전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한 생각이 들자 “내 백성 가운데 군인으로 갈 사람이 얼마나 될꼬 한 번 조사를 세밀히 해보아야지” 하고 요압 장군에게 인구조사를 시켰습니다. 요압 장군이 “왕이여 이런 일을 하지 마옵소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고 백성을 괴롭히려고 합니까”라고 간절히 충고했지만, 왕은 강제로 인구조사를 시키고 총 600만 인구 중 130만 명의 전투 요원을 뽑았습니다. 국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싶었거나 그 군사력으로 외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죄값으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기로 하셨는데 세 가지 벌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바로 7년 동안의 흉년과 3개월 동안의 전쟁, 그리고 3일 동안의 전염병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죄값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 앞에서 매 맞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직접 맞겠습니다. 전염병을 주옵소서”라고 하자, 그 날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무서운 전염병의 칼을 뽑아 치시는데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앓아 누운 사람이 수없이 많은 때에 다윗 임금이 보니까 칼을 뽑아 든 천사가 공중에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죽을까봐 도망치겠지만 다윗 임금은 그 천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죄는 제가 지었습니다. 나와 내 애비의 집에 벌주시고 죄없는 백성은 살려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 갓 선지자가 “임금님은 빨리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는 멈추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은 그 타작마당을 비싼 값으로 사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더니 천사가 칼을 칼집에 꽂으므로 전염병이 끝났습니다. 이 전염병이 끝나고 나서 다윗이 지은 시가 바로 시편 30편입니다.
우리에게 늘 행복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행은 어느 누구에게나 순간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때로 육체의 한 부분이 마비가 되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을 때도 있고, 억울하게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가족이 예고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날 때도 있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눈 덮인 황량한 들판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겨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극도로 어려워 도저히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고, 앞길이 너무 깜깜하여 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불행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극한 상황 중에서도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보내 주십니다. 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깜깜한 밤중에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햇빛 뿐 아니라 소나기도 필요하듯이, 비가 온 뒤 땅이 더 굳어지고 옥토가 되듯이, 불행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다윗을 통하여 그에게 다가온 불행 속에서 그가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갔는지 교훈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불행이 닥쳐왔을지라도 감사했다
먼저, 원수의 훼방에서 놓여남을 감사했습니다(1절). “야웨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끌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문제에서 끌어내시고, 근심에서 끌어내시고, 질병에서 끌어내시고, 멸망의 웅덩이에서 끌어내십니다. 내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셔서 원수들이 조롱할 수 없게 해 주신 하나님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에서 놓여남을 감사했습니다(2절). “야웨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히브리어로 ‘라파’는 질병에서의 고침, 문제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 응답을 말합니다. 다윗은 직접 병은 안 들었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백성들이 병들어 앓다가 죽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내 하나님” 하고 찾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 하나님으로만 믿는 사람이 아니고, 내 하나님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다윗 임금은 하나님에게 매를 두들겨 맞고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질병을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영혼이 살게 된 것은 감사했습니다(3절). “야웨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내 육신만 살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내 영혼도 용서해 주셔서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인도 속담에 “호랑이를 왜 만들었나 하고 하나님께 투정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미를 보고 왜 가시가 있느냐고 불평을 하지만 어떤 이는 가시 중에도 장미가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미국 청교도들은 초막을 하나 지으면 무덤을 7개나 파야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감사했는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즐겁고 행복할 때, 상황이 우리의 비위에 맞을 때는 수천 수만 번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없을 때 드리는 한 번의 감사가 더 값진 것입니다.
환난 때 기도했다(4~5절)
다윗은 환난 때 기도하고 응답 받은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권면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올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노여움을 받는 시간은 저녁이고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시간은 아침입니다. 태양 빛이 안 비추는 때가 밤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운 시간이 저녁입니다. 그때는 눈물이 나옵니다. 한숨이 나옵니다. 슬픔이 가리웁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녁은 반드시 아침으로 바뀝니다. 불행의 저녁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어도 겸손하게 정직하게 철저하게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아침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가 적어도 교만하고 거짓말하고 외식하면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죄가 크고 작은 것도 문제지만 죄를 회개하느냐 않느냐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회개하고 하지 않고는 천국과 지옥이 걸린 문제입니다. 죄인들이 어려움을 만나면 사람을 찾아가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낙망하여 쓰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담에 둘려 싸여 숨막히는 절망감 속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풀무에 던지실 때는 하나님도 그 안에 같이 들어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춤추고 찬송하자(6~12절)
목동이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고 임금이 되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게 되었습니다. 찬송도 부를 수 없게 되고 무덤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 주셨을 때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백성이 칠만 명이 죽었을 때, 그는 왕의 옷을 못 입고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 베옷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뜻으로 입는 옷입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너무 아파서 베옷을 입고 회개하고 기도 드렸더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셔서 슬픔은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천사가 칼을 칼집에 꽂으니 모든 백성들의 병이 다 나았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울음이 변하여 춤이 되고 베옷이 변하여 영광의 옷으로 띠 띠우게 됩니다. 어려움을 만났다고 낙심하면 영육이 함께 죽고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하고 응답 받으면 영육이 찬송하고 춤을 추게 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달려 있습니다.
날씨가 변하기 쉬운 것같이 우리도 슬프고 괴로워하고 환난을 당하고 불행하여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모든 것을 맡깁시다. 하나님께 맡기면 큰 불행이 엄청난 행운이 됩니다. 우리의 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 주신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거울 속에 태양이 비취는 것같이 한 개인에게도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되었다는 사실로 고난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적인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불신자와 똑같은 골짜기와 바다와 계곡을 통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와 다른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생 한 평생에도 슬픈 날보다는 기쁜 날이 사실 더 많습니다. 질병의 날보다는 건강한 날이 더 많으며, 재앙의 날보다도 평안한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앙은 잘 기억하고 행복은 잘 잊어버립니다. 장미의 냄새는 기억하지 못하나 그 가시에 찔린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녁이 반드시 아침으로 바뀌듯 불행하여도 반드시 행복해 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삶 속에 승리와 축복이 항상 넘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꼬부라진 인생을 펴라
시 30장 1~6절 / 박병욱목사
누가복음 13:10-17
해외의 한인교회들에서 공통적으로 있는 현상은 법인장이나 상사가 출석하는 교회에 직급이 낮은 사람들이 출석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까지 뒷자리를 차지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도리어 뒷자리를 좋아하시는 분도 있지만 단순히 위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뒷자리의 상징성을 말합니다. 뒷자리는 중요성에서 뒤떨어지고 부끄러움, 열등감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 신약 본문 누가복음 13장에는 회당의 뒤에 앉은 한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회당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꼬부라진 여자
한 여인이 안식일 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모릅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녀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라고 불렀는지, 안나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나이가 얼마인지 결혼은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이 여인은 18년 동안 귀신들려서 앓으며 허리가 굽어서 등을 조금도 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은 남자들의 장소이고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입장이 안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님이 회당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자리에서 이 여인을 만난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여인이 회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외적으로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입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자들은 앞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이 여인은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도 맨 뒷자리에 다른 사람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인의 허리는 굽었고 등뼈는 휘어 있었습니다. 머리는 아래로 쳐저 있었고 시선은 땅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이제 사람들 한가운데 자리로 불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남자들의 뒤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자에게 안수를 함.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며 안수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여자는 병들게 하는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몸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몸을 곧게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식일 법을 어김
이 광경을 본 회당장은 당장 화를 내면서 예수님의 행동에 불만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 예수님을 향하여 직접 말하지 않고, 만만한 여인을 향하여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일할 날이 엿새나 있는데 하필이면 율법을 어기면서 안식일날 고치십니까?” 하는 예수님을 향한 항의인 것입니다.
회당장에게 치유는 노동이었습니다. 의료활동이었습니다. 노동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무조건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의 노동은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는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당장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 위선자들아” 라는 질책을 하십니다. “만약 안식일일지라도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서 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물로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이 허락이 되는데, 이 아브라함의 딸을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서 치유를 하는 것은 허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사람이 동물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꼬부라진 원인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볼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은 이 여인이 18년 동안 병든 원인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말로 ‘귀신’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원어에는 ‘영’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어나 독일어 성경은 ‘병의 영’ 때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나쁜 영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영이 원인이 되어 병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즉 병의 원인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이 여인의 굽혀진 허리는 굽혀진 마음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굽혀진 마음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굽혀진 마음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
혹시 우리의 인생의 짐이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서 우리의 허리를 굽게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인생의 짐을 졌기에 등이 휘어져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당신의 허리를 휘게 했습니까? 모든 수입을 다 빚을 갚는데 써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절망하고 계십니까?
집안의 일이 과중해서 당신의 등이 휘었습니까? 자식들의 짐이 무거워서 여러분의 등이 휘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무조건 굽혀야 해서 짐이 되었습니까? 말 한마디 못하는 굴종을 해야만 합니까?
시부모님과의 관계가 당신을 무겁게 합니까? 시댁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나의 처지를 피곤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자식의 성격과 성적 때문에 마음의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집니까? 자식의 장애 때문에 잠시도 쉴 사이가 없고, 잠시도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까? 무덤에 가서도 휴식이 없을 것 같은 긴장이 나를 누르고 있습니까? 내 아이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린 것이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렸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까? 이 이별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의 짐을 지고 힘겨워하지는 않습니까? 그 상처가 되살아 날 때마다 절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의 감정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너무 높은 목표를 정해서 감당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너무 많은 가능성을 추구하다가 짐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좁은 한계 때문에 답답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실패한 여러분의 실패가 여러분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공부의 짐, 시험 준비의 짐에 짓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의 모든 에너지를 공부하는데, 오직 성적 올리는 데 쏟아붓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죄짐을 지고서 그 짐을 감당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의 죄의 결과를 감당할 수가 없고, 그 죄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봐 염려하며, 양심을 찌르는 사탄의 고발의 음성을 들으며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개역개정판 시 38:1-5).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덜어 줄 수 없는 죄책의 무거운 짐이 당신의 마음을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짐들이 우리 영혼을 내리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내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 모습 중의 어느 한 모습이 나의 모습입니까? 전 세계에, 이 사회 가득히, 흩어져 있는 이런 사람들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까?
약하게 만드는 영에 사로잡혀 있는 나, 병들게 만드는 영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습니까? 이 짐은 수십년에 걸쳐서 나를 괴롭게 하고, 성가시게 했고, 나를 불안의 노예가 되게 했고, 무능의 종이 되게 했으며,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한 명의 등이 굽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굽혀진 허리의 원인이 굽혀진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짐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펴지지 않고 있습니까? 꼬부라진 마음은 우리의 삶과 몸을 꼬부라지게 하고, 우리의 관계를 꼬부라지게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모두는 사실 허리 꼬부라진 사람의 모습으로 교회에 왔습니다. 허리 꼬부라진 여인이 회당을 찾듯이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자리에 굽은 허리로 찾아왔습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옵니다”(시 38:6-8, 17).
여러분은 이 교회에서 무엇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무슨 기대가 여러분을 이 교회로 인도했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당신과 같이 허리가 굽은 사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병상린을 나눌 친구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짐을 지고 고생을 하며, 넘어지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는 위로를 받기 위해 나왔습니까? 아 아득한 옛날에도 이미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 무거운 짐을 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를 고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시 38:21-22).
주님의 오심
우리의 기도하는 장소에, 이 자리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장소에 하나님은 오십니다.
우리가 짐이 무거워서 꼬부라져서 숨어 있는 그 곳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부끄러워서, 죄책감으로 사람들의 뒤에 있는 우리를 사람들 앞으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등이 굽은 우리를 사람들 앞에서 세우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두려워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어떻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나? 이것은 도저히 내 마음 허락지 않아” 이것이 바로 병든 영혼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여, 나도 너의 두려움을 잘 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예수님 앞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
18년간 꼬부라진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는 병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한번도 예수님께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고쳐달라고 소리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먼저 보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불러내시고 안수하여 고쳐주셨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아픈 곳을 만져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그 손이 우리를 만집니다. 나를 만집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바로 나의 결정적인 약점을 만집니다. 그의 손이 나의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나의 장애있는 곳을 만집니다. 불편하지만 이제 내 삶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등이 굽은 장애와 벗을 수 없는 죄악의 짐과 악습의 짐을 예수님은 어루만져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크고 깊은 상처를 만지십니다.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꾸부러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내 인격이 꾸부러져 살아가고 있는데 바로 그 마음을 예수님은 만지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만짐 가운데 그 분의 능력이 우리를 감싸게 됩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이 우리의 원래의 키를 되찾게 합니다. 우리는 허리가 펴진 사람이 됩니다. 꽂꽂이 서게 됩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님의 손길이 닿게합시다. 주님과 접촉하게 합시다.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믿었던 모든 나의 삶의 현장이 주님의 손길이 닿는 자리로 변하고 변화의 현장이 되게 합시다.
주님이 나를 만져 주시면 나의 탄식이 변하여 춤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슬픔의 보따리를 던져버리고, 주님의 짐을 지고 허리를 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내 삶의 짐의 의미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습니다(마 11:29-30).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4-5).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꼬부라진 마음을 펴자.
주님 앞에 마음과 몸이 꼬부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꼬부라진 마음과 생활과 몸을 주님께 맡깁시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의 짐 속에 있는 꼬부라진 삶의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만져 주심에 우리를 맡깁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넓혀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능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우울과 좌절과 실망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가난을 아노라. 나는 버림받은 고독을 아노라. 나는 벌거벗은 수치를 아노라. 나는 매맞는 고통을 아노라.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아노라. 나는 결단의 고통을 아노라. 나는 죄짐을 아노라. 나는 죽기까지 너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였노라. 나는 너의 무거운 삶의 짐을 아노라. 나는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기를 수없이 하였노라.”
이 예수님의 손길이 우리의 꼬부라진 인생을 곧게 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실 때 허리를 굽히고 오셨습니까? 무거운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꼬부라진 삶을 괴로워하면 나왔습니까?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여러분을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고치노라. 내가 원하노니, 나음을 입을 지어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능력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시 30장 7~12절 / 최종천목사(분당중앙교회)
금요일부터 시작해서 많은 분들이 먼 길을 오고 가는 중에 오늘 추석을 맞이해서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님의 한없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하고 한 번 같이 인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예배드리는 것이 최우선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요. 이 시간도 우리는 각각의 가정에서 제례를 드리는 이와 같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조상을 향한 제례 대신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끼쳤던 조상들을 위하여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예배를 드려 우리가 축복을 받아 조상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추석을 맞이하면서 왜 이렇게 마음이 좀 더 푸근하고 풍성한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작년 추석과 비교해 보면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이전에 있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처음 주어졌을 때보다 오히려 더 사무치게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평생 하나님 앞에 한 주간도 빠짐없이 주일 마 다 은혜로운 예배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통증 가운데 너무 아파 예배 참석하지 못하는 일 없고 또 삶에 지치고 지쳐서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한 힘에 겨운 때가 없고 언제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이 가득 차서 주일마다 주의 전을 향할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시편은 성전을 낙성한 때 부른 다윗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 길어서 7절에서 12절까지 하반부만 보았지만, 시편 30편 전체를 살펴보면서 무엇인가 좀 범상치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삶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이와 같은 노심초사한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구하여 응답받은 자의 기쁨이 기술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많은 원수들과 더불어 싸우던 이와 같은 다윗이 마침내 그에게 큰 위기가 왔으니 수많은 원수들이 다윗의 몰락과 목숨을 노리는 상황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죽을 것 같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그 목숨의 구조를 위해서 간곡하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간절한 소원 즉, 그가 병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를 것 같은 초조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 올리셔서 그 원수들이 그의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감격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올립니다. 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눈물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띄우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으로 찬송하리로다 하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우리는 조금 더 살펴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음의 지경에서 우리를 끌어 올리셔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생각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혼자서 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지경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일 때도 있고 우리는 인간사에서 실망일 때도 있고 그야말로 한없이 추락하여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내가 떨어진 곳이 이 지구상에 가장 깊은 구덩이라고 생각되는 이와 같은 삶의 구덩이 가운데 빠져 우리를 끌어 올릴 수 없는 이와 같은 암흑의 최 심층 가운데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은 이와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어쩔 수 없이 행할 때가 있는 겁니다.
오늘 <30편 1절> 중간을 보면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정말 내 원수가 나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와 같은 상태를 보고 오히려 그가 깔깔거리며 웃으며 나의 몰락과 나의 죽음에 대해서 조소하고 웃는 이와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소서 하는 절박한 지경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어느 한순간 나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이미 놓여 있고 내가 그 죽음의 계곡에 도울 자 없이 홀로 놓여 죽음의 시계가 욱죄이며 마지막 때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우리 인생에는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왜 떨어지는가에 대해서 우리 성도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 나뭇잎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으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이제 모두 물기 마르고 힘이 떨어져서 더 이상 그 나뭇가지에 붙어있을 힘이 없어서 이제 그 힘이 다하여 뚝 하고 떨어져 어디론가 휘날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 역시 이제는 더는 인생에 붙어있을 힘이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만 쉬라고 하는 때 우리는 더는 세상에 붙어있을 기력도 없고 세상에 더 붙어있을 이유도 없어서 힘 빠지고 손을 탁 놓으면 우리 호흡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기자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말미암아 그의 목숨이 경각 중에 있으며 인간적인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원수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그 어떤 것 중에서도 그와 같은 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인해 내 원수들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조차를 능멸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구하소서. 야곱의 얍복나루의 처절한 기도처럼, 한나의 애끓는 슬픔의 기도처럼, 히스기야의 목메는 눈물의 기도처럼 오늘 다윗은 하나님께 그 목숨의 구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칼날을 피해왔고 수많은 광야의 위협 속에 삶의 위기를 거쳐 왔던 그였는데 그는 육신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는 하나님께 이제까지 구해주신 하나님께 또다시 한 번 생명의 구조를 원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오늘 다윗의 병처럼 병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 때 있고 우리 삶의 너무 다양한 어려움으로 인해 내 앞에 눈물의 골짜기 슬픔의 골짜기를 넘어 마침내 죽음의 골짜기가 어른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내가 그 어떤 경우도 내가 무너짐으로 나를 비웃던 그 원수 사탄의 무리에게 결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영적인 의지가 작동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애절한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소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연약하고 가엾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도래함이며 하나님의 손이 우리에게 내밀어 주시는 때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애절한 때, 우리 인생에 가장 조급한 순간, 우리 인생에 그야말로 숨도 쉴 수 없는 가느다란 죽음의 길을 향하여 걷고 있는 그 순간 하나님께선 우리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절박하고 애절한 소원을 간구하고 있는 때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극한의 어려움 중에서 구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내사 원수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였도다. 여기서 끌어내신다는 이와 같은 언어적 표현은 ‘우물이 있는데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것과 같은’ 이라는 내용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지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 올리듯이 나를 퍼서 끌어 올리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 올리셔서 나를 그 죽음의 상태에서 구조하여 탈출하게 하시는 거죠.
그 죽을 영을, 그 죽을 인생, 그 영혼을 죽음의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끌어 올리셔서 구해주시는 것으로 우리를 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살리심으로 병에서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될 때 그가 죽기를 바랐던 원수의 목전에서 오히려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부어 그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당당히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삶의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원수들이 결코 기뻐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는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때로 이와 같은 어려움을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왜 구조하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셔서 왜 이렇게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가 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 잘 되고 형통하기만 하면 마음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0편 6절>을 보면 내가 형통한 때에 말하기를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다윗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조차도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고 그는 말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무슨 일이든지 잘 되면 우리는 죄악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인생의 처사입니다. 처음에는 겸손하다가도 그 잘됨이 반복되면 <6절>말씀처럼 내가 영원하리라, 내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내가 견고하리라, 나 자신을 대견해하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할 수 있는 좋은 상태는 없습니다. 햇볕이 좋다고 24시간 햇볕만 쬔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온 맘으로는 쉴 틈을 얻지 못하고 또한 모든 수분을 증발시킬 것이며 지구상의 만물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므로 그 힘을 상실할 것입니다.
인생의 때는 잘 됨과 잘 되지 못함, 일함과 쉼, 은혜의 때와 곤고한 때가 교차되므로 겸손과 하나님께 간구와 하나님 은혜의 체험적 습득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알고 거쳐야 할 고통의 행로를 미리 파악하여 우리의 겸손으로 그것을 거치면 고통이 그만큼 작아지고 적어지며 그 고통의 강을 반드시 헤엄쳐 건너지 않고 겸손이란 징검다리 외나무다리를 건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이와 같은 추석이 되었어요. 오늘도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삶의 모든 일을 거쳐 오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며 안위하심이 우리에게 가장 큰 감격이요 영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형적인 예는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생에 은혜를 주셔서 그를 세우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그 축복을 받은 평범한 백성은 특별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낮아지며 겸손하며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합니다. 최고 영광의 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그 인생은 죄악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듭되는 승리 가운데 필연적인 인생의 죄악의 싹 즉, 교만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자만심이 싹트고 자기 공로에 대한 인정이 가슴을 적십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픔과 고통을 준비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프로그램을 발동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의 어떤 인물도 예외가 없었어요. 고통 속에 그가 누리던 그 모든 것이 결코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낮아져 인정하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인생의 모습과 하나님의 참모습을 그다음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인생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어려움을 겪는다고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는 은혜의 축복입니다. 내 몸이 아파도 낙심할 필요 없고 우리 인생의 어떤 극한의 사정이 다가와도 우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만인이 그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를 통하여 오히려 견고케 하여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심지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마지막 병의 상태에서 이제까지 내 삶에 나를 괴롭혔던 원수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상태에서도 결코 내 인생 끝났다고 단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결코 자신 스스로 판단하여 이제 스스로 시한이 다 됐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그 그릇이 망가졌어요. 그러면 그 진흙을 뭉쳐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진흙을 다시 주물러서 물레 위에 다시 올려놓고 이전에 망가졌으니 이제는 내가 다시 정성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요.
여러분 인생의 걸작은 수많은 실패를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실패가 그렇게 큰 어려움은 아니에요.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 단계, 한 단계 만들어져 갈 뿐입니다. 내 인생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그것으로 영원히 죽는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와 같은 단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 단언하겠습니까. 이것은 죽을병이다. 이것은 내가 망할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끝이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누가 하나님의 결정을 마음대로 알기에 누가 감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내가 나 자신 인생을 단언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지혜가 있는 자도 그와 같은 능력이 있는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소원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사모할 때 오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자신의 스스로의 판단으로 인하여 내 시한이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결정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인생의 결정적인 큰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먼저 미리 실패해서 그 실패를 극복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삶의 전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빛내게 하기 위하여 인생의 실패, 육신의 고통, 우리 삶의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고 연단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삼으셨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단 한 번 사용되는 그 인생 최고 정점의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연단시키고 기쁨을 주고 과정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견고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 불 시험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방황하거나 혹은 인생의 죽을 병 앞에도 우리 마음을 꺾지 말고 그 순간부터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 합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일어납니다.” 다시 한 번이요.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얼굴을 가리우실 때가 있어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위해서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름 가운데 그 얼굴을 가리시는 거예요. 오늘 <7절>을 보니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심에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산 같이 견고하게 세우시더니 하나님 왜 어느 순간 내게 그 얼굴을 가리시나이까 내가 너무 근심되나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시면 우리에게는 그 순간 암흑의 때요, 하나님으로부터 방치의 때요, 오직 우리 힘만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우리 인생의 제한된 힘만으로는 마귀, 사탄의 힘을 대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 사탄은 힘이 세서가 아니에요.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고 망가뜨리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하려고 순식간에 뭉쳐서 그 악한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기 때문에 힘센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엄청난 힘으로 보이고 또한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 전력하여 순간의 힘으로 위세를 떨치나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백성은 주춤하며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어떤 순간도 하나님 의지 못하고 하나님 은혜를 힘입지 못하면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께조차 시험을 걸어왔던 마귀, 사탄에게 큰 시험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하는 것은 이 마귀, 사탄은 결코 제한된 힘이며 허상일 뿐이지 마귀, 사탄의 힘이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릴 만큼 견고하거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철장 안에서 우는 맹수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여 그들이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든든히 선다면 그들에게 다가와서 그들을 넘어뜨릴 힘도 여건도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 마귀가 떠나면 그 자리에 천사가 수종들게 되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광야의 시험 끝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떠난 것 같은 마치 우리가 병에 노출되어, 내 인생에 가장 큰 고통에 노출되어, 우리 인생의 실수와 실패에 노출되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것이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깊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잠시 구름 속에 그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때를 믿음으로 헤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잠시 얼굴을 가리신다고 우리를 버리심이 아님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구름이 흘러가면 해는 또다시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깨달음과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의뢰케 하여 우리를 큰 믿음의 백성 삼으시려고 잠시 얼굴을 가리울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이때 준동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더욱더 의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해야 합니다. 어려움의 때,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결코 창피하게 하시거나 그 백성이 고통 속에 망하게 하시는 것이 속 시원한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우리의 어려움을 가슴 아파하시며 그 시간이 속히 지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시라면 당해야합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면 주님 곁에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삶에 대한 의지가 있고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내 삶의 완성해야 할 꿈이 있고 아직 베풀고 나누어야 할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나 하나님 내 마음의 애절함은 하나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로 우리는 인생의 험한 구덩이에서 마치 하나님이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 올리듯이 우리를 저 구덩이에서 퍼 올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심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마지막으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띄우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띄우게 하십니다.”
만물에는 때가 있습니다. 만물의 때가 운행되는 섭리의 원칙은 순환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시거나 참을 수 없어 포기하실 때까지 두지 않는 그와 같은 은혜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에는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순환입니다. 추위가 있고 더위가 있고 밤이 있고 낮이 있고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순환합니다.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원칙, 그 원칙은 순환입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원칙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에 잘 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교만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진실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끼리 부딪혀서 결코 이 세상이 주님의 은혜의 세계가 된다 해도 또다시 분쟁과 고통과 아픔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좋으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가운데 서로 다투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겸손과 사랑과 배려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순환의 법칙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환의 법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법칙을 알고 인정하면 우리는 대처할 줄 알게 되고 그 가운데 또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쁘다 하지 않습니다. 겨울은 추우니까 나빠. 여름은 더우니까 나빠 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준비하고 그 가운데 누릴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이 더워서 싫어서 내 인생에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겠습니까?
겨울은 추워서 싫으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겨울이라는 것은 내 나라에 있어서 겨울은 없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는 사람 있습니까. 겨울만 되면 동남아 사람들 우리나라로 눈 구경 오는 것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여름 되면 더운 가운데 우리는 오히려 계곡이나 바다의 시원함을 누릴 수 있는 특권도 싫어하지만은 않습니다. 내가 여름에 휴가나 피서 갈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여름은 무조건 나쁘니 내 나라에서, 내 인생에서 여름은 없어지거라 하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우리 인생은 참 지루할 것 같아요. 발전도 없을 것 같아요. 산업의 발전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패션의 발달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여름옷만 입고 사는 나라에 정말 패션이 뭐 그리 발달 되겠습니까.
가전제품도 발달이 안 될 것 같아요. 여름이면 여름만, 겨울이면 겨울만.
여러분, 가을이면 봄이면 그와 같은 계절만 있으면 뭐가 그렇게 발달되겠습니까.
자동차도 여름만 있다면 겨울을 대처하지 못할 것이고 기술이 발달되지 않을 거예요. 또 마찬가지예요. 겨울만 있다면 여름에 대처할 만한 기술이 발달되지 않겠죠. 이 세상에서 천국은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대처할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 능력은 우리 하나님의 힘과 은혜입니다. 변화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권태에 빠져서 이 세상 다 등지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슬픔을 주셨던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아픔을 주셨던 하나님, 우리를 위해 아직도 해야 될 일이 있고 우리의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 어떤 어려움의 지경에서도 죽음을 방불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를 살려 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사명이 끝났다면 그때는 영광스런 부르심을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아무 미련 없이 주님 앞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훨훨 주님 앞에 날아갈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소망의 꿈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한 아직도 나를 기대하고 있고 내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를 결코 외면치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순환의 원칙은 그 근본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자비와 사랑과 은총의 바탕에 근거하여 운행됩니다. 순환이 이루어지되 그 백성을 사랑하고 그 백성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바탕에 근거해서 운행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편일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의 편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녀의 편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알죠.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탈취해가서 다 잃어버리고 돌아왔어요. 정의로 말하면 내 쫓아야 해요. 다시 와도 거절해야 해요. 그런데 그 아버지는 정의의 법칙 위에 사랑의 법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오히려 날마다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정의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포함되지 않은 정의는 외식이요. 사랑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교만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불공평한 분일까요. 하나님은 더 큰 시야에 공평을 베풀어 주시고 더 큰 시야의 정의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의를 주장했지만 주장할 만큼 그는 의롭지 못했던 것을 압니다.
그는 남을 사랑하지 못할 만큼 그는 자비가 없었고 자비하지 못할 만큼 그의 마음에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소멸한 인생은 자기도취와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은 의롭지도 못하고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아무리 어려울 것 같아도 아무리 육신의 고통과 통증으로 숨쉬기 고통스러워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하는 나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하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바꾸실 수도 있어요.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러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나 하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바꾸실 수 있어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입니다. 내게도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춤이 되게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실제로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에요. 다윗은 그 오랫동안 고통의 세월을 그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광야를 헤매며 그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적국에 미치광이 노릇을 하며 그 목숨 부지했던 처참했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를 왕으로 세워 주시고 마침내 법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오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춤을 추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어요. “하나님, 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미사여구가 아니에요. 다윗이 실제 이렇게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되게 하고 애곡의 베옷이 변하여 애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띠를 띠게 하실 것입니다. 마침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심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큰 잔칫상을 베푸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께서 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내 원수들이 나를 둘러 바라보고 있는 그 상황에서 큰 잔칫상을 베풀어 주시고 내 잔이 가득 차고 흘러넘칠 만큼 내게 하나님의 축복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고통 중에도 고난 중에도 죽을병의 통증 가운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주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참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님, 감격 속에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시다. 날마다 내게 생명의 호흡을 주셔서 이 예배당에 나와서 가파른 계단 올라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한 시간 집중하고 어떤 말인지 그 말을 해독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사물을 분별할 수 있고 내 사고가 정상적으로 움직여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순간의 축복이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온전히 지속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작년 이맘때 이 순간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우리에게 어떤 가슴 아픔과 슬픔이 있었는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우리는 하나님을 이 자리에서 찬양하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원대하신 역사가 우리 삶의 세미한 부분까지 적용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