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겪었던 베트남전의 "전선야곡"
예부터 우리 노래엔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트로트도 마찬가지.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나훈아의 ‘홍시', 금잔디의 ‘엄마의 노래’ 등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래들이 ‘어머니’를 소재로 했다.
‘내일은 미스트롯2’에서도 ‘어머니’를 향한 노래가 쏟아졌다.
호리호리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첫 소절부터 ‘반전'을 불러일으킨
홍지윤의 ‘엄마아리랑’(원곡 송가인)은 올하트를 받았고,
김은비는 꺾기와 흔들기의 현란한 기교를 한껏 과시하며
‘울 엄마’(원곡 진성)를 불렀다. 눈물로 부른 사모곡인 이재은의
‘친정어머니’(원곡 이미자)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3명의 가수로 이뤄진 ‘재도전부-간절한 소원’의 팀 미션곡이었던
‘전선야곡’은 6·25 당시 전장에 나간 어린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다.
이 "전선야곡"은 군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전쟁 상황에서 어머니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6·25전쟁 발발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우리 국민의 정서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거의 전부”라고 했던 소설가 박완서의 말처럼,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을수록 가족에 대한 애착은 강해졌다.
특히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낼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자 힘이었다.
‘전선야곡’이 가슴 절절하게 와 닿는 이유다.
전장에 있는 군인이 화자가 되어 부르는 ‘전선야곡’의 1절부터 가슴 저릿하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장에서 추위와 허기와 공포와 싸워야 하는
병사들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심신 안정제’다.
포화 소리가 잠시 멈춘 밤, 잠 못 드는 적막한 밤에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리는
어머니 목소리에 기대어 얼마나 많은 군인이 두려움을 달랬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2절에서 더욱 고조된다.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정화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총소리를 자장가 삼았다”는 데서 전쟁터가 얼마나 불안하고도
위험한지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베트남전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외딴 고지의 어느 보병중대 관측병으로 파견을나가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산 아랫마을 주변 근처에 야간 매복을
나가는데 관측병이 모두 3명인데 서로 매복근무를 하지 않으려 한다
필자는 월남에 와서도 어릴적 동네 꼬맹이들과 전쟁놀이 한 기분이였던지
보병들의 야간 매복때면 함께 따라 나가 참으로 즐기면서 따라 다녔다
보병부대 관측병으로 파견나가서의 1년간 많은 보병 작전에 참여하면서
말못할 여러가지의 일들을 목격했지만 유난히 이 매복이 기억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는걸 보니 완전 코메듸 같으면서도 웃고 싶어도 웃지도
못할 전쟁터에서 인간의 존엄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으며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이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저수지 앞에다 돗자리를 깔고
뚝방을 방패삼아 크래모아 격발기 그리고 수류탄 뷰비트렙등을 설치하고
간식겸 저녁 대용으로 C-레이션을 까먹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덮쳐오기
시작한다 수없이 매복작전을 따라 나갔는데 그때 마다 아무일 없이 돌아
왔으니 그날도 어느날과 똑같이 레이션 까서 요리 해먹는 재미가 작난이
아니라 그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십자성별자리를
찾게되니 스르르 잠이들고 말았다
이역만리 멀리 나와 있으니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던 장병들은 꿈에서
어머니를 찾아 고향 집으로 달려간다.
꿈에서 마주친 것은 ‘정화수를 떠 놓고 아들의 공을 비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전쟁은 어쩌면 우리들을 더 빨리 철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 마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부시도록 흰 머리카락’을 보며 우리들은 눈물부터 흘린다.
그럴때 였다 갑자기 천둥을 진동하며 주위가 환해지면서
어느 병사의 VC [베트콩의 약자]다 하는 절규석인 외마듸에 어느방향에
적이있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클레모아 격발기를 누르며 앞 저수지를 향해
무조건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발사한다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M60자동 소총수는 이성을 잃은듯 발사하고 우리의
M16 개인화기도 전 대원이 자동발사 하니 매복인원 이라야 모두합쳐
12명이였지만 그들이 뿜어낸 화력은 참으로 엄청나다
교전이랄것도 없이 일방적 사격이었지만 옆에서 들어보면 아마 몇백명정도가
난사 한것처럼 대단한 화력 시위였으리라
나 또한 105미리 곡사포 지원사격을 유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가 있는 지점의
주위의 모든 화지점 좌표는 모두 무전으로 설렵하여 좌로 우로 줄이기를 연발 하면서
마침내 포대 효력사까지 [포 6문이 한곳에 집중사격하는것] 유도해냈던 것이다.
잠깐 동안의 일이다 약 30분도 안되는 순간이였지만 유독 그때 그순간 만큼은 지금도
섬세하니 기억이 된다. 새벽이 밝아오자 요란스러웠던 전장터는 그야 말로 폭풍이
힙쓸고 간 고요와 침묵이였고 다행이 아군 피해는 없었고 선임하사의 인솔하에 주변
정찰을 시작 하였고 VC 시신 두구를 발견하여 소지품과 무기를 회수하여 무사히 부대로
귀가 하여 중대장을 비롯 모든 부대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게 되였지만
이렇듯 인간은 언제나 남의 죽음을 보고도 자신의 죽음은 모르고 살고 있는것 같다
필자는 결국 어머니 곁에 가보지도 못하고 매복전을 펼치게됨이 지나고 나니 많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 노래가 절실하게 들리는 이유는 또 있다. 원곡 가수 신세영은
녹음 당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슬픔에 목이 메인 상태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어머니를 잃은 가수의 사연이 사모곡과 만나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본명이 정정수인 신세영은
신카나리아의 ‘신’과 장세정의 ‘세’, 이난영의 ‘영’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예명으로도 유명하다. 군예대원으로 활동하며 6·25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다닌 그는,
생전 면담에서 가는 곳마다 군인들이 ‘전선야곡'을 불러달라 청했고,
심지어 어떤 부대에서는 이 노래를 모르면 부대장이 군인들에게
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단다. ‘군번 없는 용사’로 통하던 군예대원들이
전쟁이라는 비극적이고도 위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노래로 대중을 위로했음을 알 수 있다.
‘전선야곡’은 국내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은 아마도 다 불러 봤을것이다
그러나 ‘담담함 속의 슬픔’으로 불러야
두드러지는 이 노래의 진가는 원곡 가수 신세영이 부를 때 가장 빛난다.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2′에서 재도전부가 팀 미션곡으로 노래한
‘전선야곡’을 두고 마스터들이 “기교가 과하다”고 지적한 것은 일리가 있다.
신세영의 원곡을 들어보면 과도한 기교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슬픔이란 절제 속에서 더 진하게 묻어나는 법. 오히려 TV조선
‘사랑의 콜센터’(1월 8일 방송)에서 정동원이 노래한 ‘전선야곡’에서
그 아련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기에 덧붙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노래를 만들었다고.
이 재 술 한잔 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