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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께 피하오니
시 31:1-8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시 31:1-8 / [여호와여, 주께 기대옵니다; 다윗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주님이여, 지켜 주소서. 주께 눈물로 간청하오니 더 이상 쓰러지지 않게 하소서. 바르신 주님의 뜻으로 이 몸 건져 주소서. 2) 내 말에 귀기울여 빨리 도와주소서. 이 몸 막아 주시는 든든한 바위가 되어 주시고 어떤 어려움도 막아 주시는 산성 되시어 살려 주소서. 3) 주님은 든든한 나의 바위, 그 무엇 하나 무서워할 것 없는 안전한 나의 산성이시니 주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이것을 이끄소서. 인도하소서. 4) 저들이 나를 잡으려 몰래 쳐놓은 그 덫에 걸려 들지 말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5) 주님의 손에 이 몸을 맡기오니 진실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저를 건져 주소서. 6) 거짓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역겨워하시는 주님의 뜻을 지켜 이 몸은 여호와 우리 주님만을 굳건히 믿고 의지합니다. 7)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에 이 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넘칩니다. 주께서는 나의 고통 지켜 보시고 고난받는 이 몸을 보살피셨습니다. 8) 원수들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게 하시어 내가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가게 하셨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환난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을 간구함(1-5) 다윗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바위이자 산성이며, 그를 인도하시고 지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는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안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그물(4)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당시 사냥이나 전쟁에서 사용되던 무기로, 은유적으로는 다윗을 해하려는 원수들의 음모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니다(5). 이는 고대 근동의 왕들이 종종 자신의 생명을 신들의 손에 맡기는 관행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방 신들이 아닌, 오직 진리의 하나님(5)께 자신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신뢰함(6-8) 다윗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배격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들의 우상 숭배와 구별되는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한 다윗의 발을 넓은 곳에 서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원수들의 위협에서 보호하시고, 좁고 위험한 곳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자유와 안전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선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험과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자유와 평안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당신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힘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십시오.
19세기, 중국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졌을 때 이야깁니다. 황제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반란군의 세력에 계속 지고 있었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라는 글이 포함된 보고서가 올라올 때마다 황제는 토벌군의 장수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관료인 '증국번'이 토벌군 장수로 임명되어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연전연패가 아니라 ‘연패연전’(連敗連戰)이라고 순서를 바꿔 보고했습니다. 즉 자신은 비록 계속 패배하고 있지만, 패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황제는 '증국번'에게 벌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증원군을 보냈습니다.
< 설 교 >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시 31장 8-11절 / 김경형목사
31편 8절-11절: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8절: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이룰구원에는 소유구원도 있고, 건설구원도 있고, 인인관계 연관구원도 있고, 성화구원도 있다. 이런 등등의 다양한 구원들이 있는데, 이 구원들이 이루어진 만큼 자기의 영능의 실력이 되어서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누릴 구원으로 이 실력대로 존귀 영광으로 살게 되는 거다.
사단 마귀는 이런 것을 못 이루도록 예수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교인들이 진리를 대적하게 만든다. 그 수단 방법은 비진리적, 육적, 비신앙적, 옛사람이 주격이 된 부패성적, 일반개념으로, 일반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서도 진리대적의 수단들이 교회 안에서 교훈을 통해 일어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일반세상도 나름대로 옳은 것을 부르짖지만 그것은 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것들이라서 하나님의 옳은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옳은 것을 기준으로 세우고 세상의 옳은 것은 세상살이에 이용물로 쓰는 거다. 성도의 주격적 지식은 진리요, 세상의 지식은 진리를 세우기 위한 이용물인데 성도가 세상지식을 진리지식보다 더 앞서서 세워놓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대적이 돼버린다. 물질세계의 지식은 전부가 생활에 이용물이다. 생활의 이용물은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자꾸 변해지는 것으로 자기가 세상이 있는 동안에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이용되는 것뿐이지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다.
진리성도들을 대적하는 세력이 없는 곳이 없다. 특히 유형교회 안에 많이 있다. 따라서 각 교회에서 부르짖는 주장이 어디에 속해있는 것인지를 잘 분별을 해서 생명과 먹은 지식으로 전하는 곳에서 설교를 들어야지 세상을 주장하거나 신비체험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비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들으면 안 된다.
비진리에는 성령님이 역사를 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역사를 한다면 목사님의 교훈이 교인들로 하여금 분별을 시켜주는 교훈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비진리의 교훈은 교훈의 분별이 없고, 정신에, 사상에, 방향에, 질에 분별이 없기 때문에 악령이 들어서 발작을 일으켜도 그게 성령의 역사인 줄로만 안다. 그러니 이건 예수님을 안 믿는, 이방 신을 섬기는 정신이 그대로 든 거다.
이방 신이 자기 속에 지배치 않게 하려면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면서 신앙의 정신 사상 마음 생각 소원 목적의 모든 사고방식이 거룩성으로 되어있어야 한다. 이러면 먼저 분별이 들어가니까 악령의 모든 미혹들이 들어오지를 않는다.
악령의 역사가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안에 있고, 또 이런 요소가 자기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지 않고, 나는 모른 채, 나는 무시한 채, 자기는 똑똑한 척하면서 이방인들을 말을 한다거나 다른 교인들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거다. 신앙인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한다. 목사님 같으면 목사 먼저 자기 속을 살피고, 그 다음에 성도들의 신앙의 걸음을 살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렇게나 믿어도 되는 게 아니다. 진리로 인도를 하는 교회에서 진리의 종의 인도를 받고 순종을 해 나갈 때 영육 간에 평안이 깃들게 된다. 그렇지 않고 늘 육신을 우선적으로 생각을 하면 항상 시험이고 고통이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만물을 붙잡고 자기에게 시험거리로 만들어 버리면 자기는 고통일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 모두 각자가 ‘내가 지금 원수 대적의 수중에 감금이 되어있는 건은 아닌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무슨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가?’를 생각을 하면 된다. 돈 잘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믿느냐? 교회에서 직책을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느냐? 교회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인정정실 때문에, 또는 부모형제가 거기로 나가기 때문에 그 교회에 나가는 거냐? 아니면 구원을 받았으니 주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거냐? 아니면 교회의 조직이나 단체에서 주는 명예 영광 때문에 예수를 믿는 거냐?
그리고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으려고 믿는 거냐? 아니면 그냥 집에 혼자 있자니 심심해서 교회에 나오는 거냐? 아니면 교회에는 사장들이 많으니까 취직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거냐? 아니면 장사목적으로 교인이 많은 곳으로 나가는 거냐? 아니면 정치목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거냐? 아니면 종교적 업적을 남기기 위해 믿는 거냐? 아니면 병 나을 목적이냐? 아니면 주님을 닮기 위한 목적이냐?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리 동네 할머니는 아들하고 같은 교회에 나가는데, 그 교회에는 며느리 감이 없다고 하며 아들에게 다른 교회로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도 있더라.
이유야 어쨌든 정말 옳은 곳으로 나간다면 아무렴 그 교회 교인들이 옳은 사람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니 그런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 아니겠느냐? 예를 들면 토끼가 시집장가를 가려면 고양이가 사는 곳으로 가야 하겠느냐, 토끼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겠느냐?
나는 이치를 생각하며 이런 말을 하는 건데 자칫 잘못하면 이 말을 육 목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일례로 대구에 한 청년이 있는데, 이 청년이 나가는 교회가 순 자유주의 교회라. 그런데 이 청년이 내가 전하는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뜻을 알아 들으려니’ 하고 ‘그 교회에 나가지 말고 신앙의 질이 맞는 교회로 나가라’ 라고 했다.
자기가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바로 가르치는 교회로 나가서 주일학생들도 가르치고 하다보면 그곳에서 신앙도 좋고 마음에 맞는 처녀를 만날 수도 있을 게 아니냐는 뜻에서 내가 그렇게 말을 한 거다. 왜냐하면 그런 눈을 가진 총각은 그런 처녀를 만나게 되고, 저런 눈을 가진 처녀는 저런 총각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로 가르치는 교회의 처녀가 이 총각과 살려고 하겠느냐? 내가 여러 번 말을 했는데도 내 말을 영 안 들어서 마음이 안타깝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청년이 그러는 게 이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아직까지 성화구원의 사상을 잘 모르는구나. 옳은 것을 알고 옳다고 고집은 하는데 ‘자기가 어디에 가서 일을 해야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면에서는 감을 잘 못 잡는 것 같다. 안타깝다.
죄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이룰구원이 무엇인지, 악령운동이 무엇인지, 성령운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이것은 대적에게 감금상태의 신앙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악한 대적들에게 감금이 된 신앙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감금상태의 신앙이냐? 교회 인도자가 충성봉사로만 일관하는 것. 이건 일만 죽도록 시키는 거다. 진리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을 해서 자기가 있을 곳인지, 떠나야 할 곳인지 잘 판단을 해서 옳게 움직여야 자기의 신앙이 부쩍부쩍 늘고, 눈치도 나오고, 부지런해지고 하면서 인격 면이 다각적으로 다듬어지는 것인데 이게 아닌 사망적인 신앙노선에서는 아무리 충성봉사를 해도, 하나를 해도 사망성공이요, 열 개를 해도 사망성공이요, 목숨을 바쳐서 해도 사망성공일 뿐이다. 이게 감금상태의 신앙이다.
이런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면 다 이용당하고 죽는 거다. 이런 곳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충성봉사를 해도 그것으로 인한 효력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일을 할수록 먹는 것이 나와야 하고, 힘이 오르고, 일을 할수록 깨닫는 것이 나오고, 성장이 되어야 하는데 일은 죽도록 해서 칭찬은 받는데 이게 없다면 이건 틀린 거다. 신앙의 이치가 그렇게 들어가면 벌써 틀린 거다.
짧은 시간이라도 우리교회에서 그만큼 말씀을 들었으면 자기가 성경대로는 못 살지라도 조금이나마 귀문이 열리는 거다. 그 다음에 영의 눈이 열리면 성경을 알게 되는 거다. 그런데 귀문마저 막혀있다면 어떻게 깨달을 거냐? 귀문이라도 열리면 들을 수 있게 되고, 들으면 들은 대로 말을 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귀문이라도 열리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신앙 면에서 나름대로 어느 정도 분별력이 들어간다. 옳은 것을 주장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지는 않는다 그 말이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의 말은 듣지만 이럴 때 심부름을 보내면 제대로 심부름을 못하는 것과 같다.
대적자들에게 감금이 된 상태란 신앙 사상적으로 허탄한 거짓이 뭔지 모르고, 가치판단과 평가성도 내리지 못하고, 영과 육의 곤란과 환난이 왜 오는 건지 민감하게 깨닫지도 못하고, 영적인 환난도 보지 못한다면 원수 대적의 역사에, 그 가르침에, 그 세력에 감금이 되어있구나. 옥에 갇혀버렸구나.
옳은 종이라면 성도를 이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게 인도자다. 쉽게 말하면 애굽세력에 가두어진 이스라엘을 하나님 쪽으로 밀착이 되게 끄집어내야 한다. 그냥 모여서 ‘행동 활동합시다’ 이런 게 교회가 아니다.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진리로 자유하는 신앙상태는 영과 육에 있어서 즉각적인 분별하고 옳은 것을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 이렇게 되면 세상과 죄에 매이지 않고, 어떤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오직 진리의 신앙노선으로만 걸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신앙에서 마음이 흔들림이 없다 그 말이다. 예를 들면 자기가 어려울 때 예수 믿는 누군가 와서 물질적인 어떤 바람을 자꾸 집어넣으면 자기가 그만 그리로 슥 넘어가기 쉽지만 진리신앙의 성도는 그 결과를 미리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 말이다. 흔들림이 없다. 이런 신앙은 넓은 곳에 선 신앙이다.
‘넓은 곳에 선 신앙’이라 할 때에 세상 넓은 길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넓은 곳에 서 있으니 사방이 훤하게 보인다는 뜻으로 넓은 곳에 섰다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훤하게 다 보이니 ‘저건 뭐다. 저건 뭐다’ 하고 구별하고 분별을 할 수 있으니 참 자유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 표현이 ‘높은 곳에 선 신앙’이 있고, ‘넓은 곳에 선 신앙’이 있는데, 이 둘은 그 신앙사상은 같지만 문맥상 표현을 다르게 하는 거다.
9절: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성도다윗이 무슨 근심 걱정을 하느라고 고통으로 눈도 정신도 몸도 쇠하여져 버린 거냐?
일반 세상 사람들도 근심 걱정도 하고 고통도 많이 겪는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겪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로 해서 자기가 고통을 겪기도 한다. 어쨌든 고통이 심한 사람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눈도 십리나 쑥 들어가고, 그리고 몸이 축이 나서 늘어지고, 그러니 정신도 희미해지고 사람 꼴이 안 돼져 버린다.
음식을 안 먹는 사람치고 얼굴이 제대로 반반한 사람이 있느냐? 안 먹으면 살이 빠지고 흉해진다. 그러나 잘 먹으면 얼굴에 윤기가 나고 보들보들해지고 환해진다. 이치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먹으면 자기의 영모의 미모성이 잘 가꾸어지고, 못 먹으면 사람이 추해진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많은데, 몸에 상처가 나거나 몸에 병이 걸려서 오는 고통에 근심 걱정을 하기도 하고, 세상을 사는 것이 물질 면으로 어려워서 그 면에 근심 걱정을 하면서 고통을 겪기도 하고, 신앙인은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오는 면에서 고통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진리신앙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외부로부터 그리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핍박이 있다. 이것도 고통이다. 그 다음에 세상적 비진리적 외식운동이 팽창해서 진리신앙의 노선을 찾기 어렵게 만드니 그것 때문에 근심 걱정이 되기도 한다.
또 자기의 옛사람 육이 강해서 진리신앙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또 죄악에 안 빠지려고 몸부림을 치는 고통도 있다. 자기 주위가 죄를 짓는 장소라면 거기에 안 빠지려고 할 때 상당히 고통이다. 결국 그곳에 있으면서 자기 신앙으로 못 이기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는 거다. 또 죄를 저질러 놓고 후회하고 깨닫고 거기서 올라오려고 신앙의 마음을 가지고 힘을 쓰는 고통도 있다. 이건 건설적 고통이다. 그리고 현재 진리신앙의 노선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근심 걱정도 있다.
그런데 성도다윗은 세상 물질 면에 대한 근심 걱정이 아니라 신앙정신과 신앙사상 면에 대한 근심 걱정에 몸으로 고통을 겪더라. 그러면 예수 믿는 자기는 신앙 때문에 자기 몸이 축나는 일이 있었느냐?
내가 믿음이 별로 없지만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보면 상당히 염려 근심 걱정이 되는 사람이 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우리교회 교인이라 그런 게 아니라 진리로 나간다고 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얼굴이 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얼굴이 있다. 그래서 우리교인들은 자기가 어떤 환경에 처해졌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바로 살려고 하는 신앙심을 가지고 지혜도 구하고 기도를 하라. 그 마음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다.
10절: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다윗이 엄청난 지경에 빠져 들어간 거다.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얼마나 후회스러운 죄를 크게 지었기에 이토록 슬퍼하고, 탄식을 하며, 약해지며,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을까?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두고 두고 생각을 해도 감당 못할 만큼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마음 아파할까?
우리가 다윗의 죄를 보면 어떤 죄가 있느냐? 우리야의 아내 사건이 있다. 다윗이 계획적으로 고의적으로 자기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겁간하고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전쟁터로 보내서 죽게 했다. 이방 불신세상에서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있느냐? 대장 자기가 전쟁터에 나가기 싫어서 졸병을 내보낼 수는 있을 거다. 그런데 다윗의 경우는 자기가 죄를 짓고 그것을 덮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충성된 부하를 전쟁터에 나가게 해서 죽게 했다. 이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을 하셨다.
그 후로 다윗의 눈앞에서 얼마나 뼈를 깎는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가정에 일들이 막 일어난다. 아들이 죽어나갔고, 배다른 형제끼리 강간이 일어났고 살인이 일어났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영적인 면에서나 육적인 면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먼저 죄를 지었고, 또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을 순서적으로 볼 것 같으면, 첫째는 하나님을 버렸지,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지, 세 번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치 않았고, 네 번째는 타락된 주관성을 가지고 행동으로 죄를 지었다. 그래서 이 죄를 회개하여 바로 잡는 것도, 첫째는 하나님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찾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고, 그 다음에 깨달은 대로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회개가 됨과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져 나가게 된다. 일거양득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면 일거양득이 된다. 이것이 없는 회개는 자기 주관성에서 나온 하나의 반성에 불과한 것이니 또 죄를 짓게 된다.
일반적으로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또 죄를 짓고 하는데, 이렇게 죄를 자꾸 또 짓지 않으려면 그 순서가 먼저는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에는 말씀의 계명을 찾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삼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일반 양심적 회개는 하나님 앞에 정확하게 회개가 안 된 상태다. 회개가 안 된 상태에서는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되면 그 행동 죄 이전에 마음 죄, 마음 죄 이전에 진리이탈 죄를 지은 것이니, 바로 회개를 하려면 진리의 말씀의 뜻에 맞추려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의 정신 사상이 진리본질에서 이탈이 되어있는 것을 모른다면 일반적인 양심 죄, 일반적인 행동 죄밖에 모를 터이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에 또 그 죄를 짓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인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선한 사람이라고 하고, 일반적인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한다. 지식의 기준이 그렇게 돌아간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먹지 말고 일반과와 생명과를 먹어라’ 했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사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선악과 먹고 나온 타락된 지식을 기준으로 살면 이건 기준이 달라진 것이니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다.
성도가 일반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앙적인 면의 악인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우상종교를 믿는 이종교인들과 방향과 질이 똑같은 차원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방 종교인들을 만나서 의논을 하는 게 다 이런 차원이다.
믿는 우리가 일반적인 선행을, 의행을 못해서 탄식을 하는 것이라면 이건 이미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 된 선악과를 따먹은 차원이니 이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탄식을 할진대 생명과를 먹고 탄식을 해야 회개가 바로 된다. 아닌 말로 죄를 지은 다윗에게 이방 왕이 와서 ‘다윗 당신 회개하시오’ 라고 했다면 이게 다윗에게 먹혀 들어가겠느냐?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기준을 놓고 회개가 들어간 거다.
사도바울은 이룰구원에서 날마다 탄식을 했다. 죄를 지어서 탄식을 한 게 아니라 이룰구원 차원에서 탄식을 했다. 진리를 붙잡지 않은 채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탄식을 하게 되면 사람이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고 힘이 없어진다. 그러나 진리를 붙잡고 하는 자기 죄의 탄식은 사람이 바로 서게 되고, 힘이 생기고, 성령님께서 도우시게 된다.
11절: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다윗이 왜 욕을 당할까? 무엇 때문에 욕을 당할까? 누구 때문에 욕을 당할까? 욕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가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잘 하고 있지만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하여 진리 대적자들에게 덜미가 잡혀서 욕을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 잘못한 것을 이미 회개를 했는데 자꾸 그 때 일을 걸고 ‘옛날에 너 이런 죄를 지었지? 나쁜 놈’ 하면서 헐뜯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욕을 먹는 거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욕을 먹었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욕을 먹었고, 천국복음 때문에 욕을 먹고 십자가에 달렸고, 우리를 위한 신령세계에 해당되는 의와 선을 이루려다 욕을 먹었다. 그런데 본문의 다윗도 그렇지만 우리는 왜 욕을 먹느냐? 우리가 자타의 이룰구원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냐, 아니면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대적자들에게 흠을 잡힐 짓을 해서 욕을 먹는 것이냐?
우리가 잘못된 것은 누가 무엇이라고 하던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하나님 앞에 생각해서 잘못된 게 있다면 애고 어른이고 누가 말을 해도 하나님을 기준해서 고쳐야지 ‘네가 무슨 간섭이냐?’ 이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람을 보내서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라면 ‘네가 무슨 간섭이냐?’ 이런다면 나는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셈이다. 다윗이 도망갈 때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가 다윗이 다시 돌아올 때 다시 나타나서 목숨을 구할 때 다윗의 부하가 ‘가서 목을 치리이까?’ 하니까 다윗이 ‘가만 둬라. 하나님이 시켰다면 어떻게 할 거냐?’ 라고 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그래, 내가 네 말대로 그렇게 되면 안 되겠다’ 해야 할 것이고, 그 말대로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더 마음을 모아야 할 거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참 묘해서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누가 말을 하면 자기의 그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가지고 와서 자기 울타리를 친다. 그 참 묘한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스럽고 야비하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 마음 속에 이상한 것이 들어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현재 잘 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나의 과거의 죄를 자꾸 들춰내서 말을 하면 자기 속에서 뭔가 용용거리면서 올라온다. 그래도 참고 있는데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이 폭발이 되어서 싸움이 돼버린다.
그러면 나는 꾹 참고 있는데 상대가 또 말을 하고 또 말을 하고 할 때 내 속에서 왈칵 하고 치밀어 올라오는 그 놈이 뭐냐? 과거의 죄를 다 회개했는데 상대가 자꾸 그 일을 들춰서 말을 할 때 내 속에서 뭔가 자꾸 올라온다면 내가 진정 하나님 앞에 회개가 된 것이냐? 안 된 거다. 회개가 됐다고 하면 상대가 아무리 쿡쿡 쑤셔도 그런 게 안 올라와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잡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리 쑤셔도 그런 게 안 올라와야 하는데 대부분 보면 그렇지 못하다.
현재 자기는 바로 가고 있는데 누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갖고 헐뜯는다면 이건 마귀의 시험으로 온 거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에 안 넘어가야 한다.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헐뜯게 하는 건데, 그 사람이 잠도 안 자고, 자기 집에도 안 가고 평생 동안 밤낮으로 옆에서 헐뜯겠느냐? 그렇게 헐뜯는 사람은 마귀의 이용물일 뿐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언젠가는 가버릴 사람이니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내 할 일만 바로 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를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실수가 있다면 있느니 만큼 불행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하든 사단 마귀가 헐뜯는 미끼를 남기면 안 된다. 그러려면 얼마나 조심을 해야 되겠느냐? 그리고 그런 실수를 통해서 바른 것을 깨닫고 자기를 고치지 않는다면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우리가 남의 이룰구원에 방해노릇을 하지 않고 남의 구원에 동참을 하면 내 구원도 이루어진다. 그러니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잘못 되었으면 고쳐 나가야지 고치지는 않고 ‘미워라’ 한다거나 그 사람이 보기 싫다고 다른 교회로 가 버린다면 그곳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느냐? 또 있다. 오히려 더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언제 고쳐지겠느냐? 이렇게 되면 이 사람 위에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신령한 그 세계를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못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세상에서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몰아붙여서 당신의 속 성품을 닮은 자로 만들려고 애를 쓰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 애쓰심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쳐다보면서 고쳐가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마음가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런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고 저희들의 마음 속에서 진리를 거두어가지 마시고, 진리를 붙잡는 마음을 주시고, 그 진리를 붙잡고 나를 잘 다듬고, 어떤 사건 환경 속에서도 다 승리하고 나올 수 있는 당신의 지혜롭고 영특한 자녀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시 31장 07~9절 / 김경형목사
31편 7절-8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7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다윗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즐거워했다. 인자하심은 주님의 사랑이고 자비이고 긍휼이다. 그러면 다윗은 왜 주님의 인자를 즐거워했느냐?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의 신앙상태, 영혼상태, 그러니까 육신생활 상태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상태, 자기의 신앙상태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인간 자기는 자기의 신앙상태가 어떻게 놓여져 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었을 때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가치판단을 하는 기준과 지식이 영적인 면은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영적인 신앙 믿음상태는 잘 알지를 못하고 육신이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 정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육신이 돌아가는 상태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잘 안다. 어떻게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잘 안다. 그런데 본문의 진리성도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이 다윗 자기의 어떤 상태를 살펴서 아시는가?’ 하는 그 면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다윗이 주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더라.
다윗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그 첫째 이유는 다윗 자기를 악한 자들에게 구금되지 않게 자유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거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악한 자들에게 쌓여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악한 자들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와서 그들을 때려 눕혀야 그들에게 쌓인 자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신앙성도의 영혼상태, 신앙 믿음상태, 쉽게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상태, 정신상태가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정신 사상으로 쌓여져 있다면 이건 포로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푹 쌓여져 있어서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거다. 예를 들면 사람이 늘 ‘돈 돈’ 하고 돌아가면 이 사람은 어디에 쌓여진 포로냐? 돈에 쌓여진 포로다. 자고 일어나면 늘 세상만사 걱정을 한다면 세상을 걱정하는 그 정신은, 그 사람은 거기에 포로가 된 거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정신을 좇아가고 있다. 자기는 싫다고 하는데 세상정신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잡혀가고, 잡으러 가고 한다. 스스로 잡혀가는 거다. 그러니 세상이라고 하는 그 환경에 포로가 되고, 그 환경에 잡혀진 사람이 돼버리기 때문에 거기에서 탈출을 못하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말씀으로 무장을 해서 그런 것에서 탈출을 해서 그것을 자유자제로 이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못 믿겠다’ 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그것에 자기가 포로가 돼 있는 거다. 예수 믿는 자유, 교회에 나오는 자유, 말씀을 듣는 자유, 이건 굉장히 자유로운 거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고,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세상에 잡혀간 사람은 세상에 포로가 된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와서 ‘울어라’ 하면 울고, ‘웃어라’ 하면 웃는 식이 돼버린다. 이러면 세상환경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된다. 자유가 없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고통스러워진다.
우리가 이렇게도 봐라. 자기 몸이 건강했을 때는 자유롭다. 그런데 몸에 병이 들면, 병이 와서 자기를 포로로 만들면 마음은 어디로도 가고 싶고 어디로도 가고 싶고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그 병 때문에 꼼짝달싹을 못한다. 이건 병에 포로가 된 거다. 이 포로에서 헤쳐 나오려면 건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어떤 정신에 포로로 되어있는데 이 정신에서 헤쳐 나오려면 자기를 포로로 하고 있는 정신보다 더 강한 정신을 가져야 그 정신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거다. 그 강한 정신은 하나님의 진리말씀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통치 지배하신다. 이 하나님의 정신을 배우는 사람은 만물을 통치 지배할 수 있는 실력이 들어간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 그 말이다. 예수 믿는 게 뭐냐? 예수님께서 우리로 죄에서 자유케 해 주셨고, 죄가 뭔지 알게 하셨고, 죄를 안 짓게 하는 방법을 알게 하셨고, 죄를 안 지으니 죄에서 멀리 도망갈 수 있는 거고, 또한 죄를 짓지 않도록 미리 수단 방법을 쓸 수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은 것에서 산 것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날마다 죽을 정신에서 산 정신으로, 저질적인 지식에서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지식으로 살 수가 있는 거다.
우리가 차원적으로 하나님처럼 높이 올라간다면 아래로 쳐다 볼 때 아래의 상황을 훤하게 아는 거다. 모른다면 자기는 밑에 있는 거다. 밑에 있게 되면 자기보다 높이 있는 자들에게 이용물이 돼버린다. 사단 마귀는 밑에 있는 자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보통 사람은 이 사단 마귀를 못 이긴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사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기꾼에게 거의가 속아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틀어져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기꾼은 상대를 좋게 해 주겠다고 하느냐, 나쁘게 해 주겠다고 하느냐? 노력하지 않아도 떼돈을 벌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 조건으로 ‘어떻게 하라’ 이런다. 신앙의 세계에도 사기꾼이 있는데, 신앙 면의 사기꾼은 일반 사기꾼처럼 놀지를 않는다. 신앙 면의 사기꾼은 일반 사기꾼보다 나쁜 쪽으로 더 고차원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사기꾼에게 넘어간다면 이건 신앙 면이 둔팅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 사기꾼에게 많이 넘어가는데, 그 이유는 첫째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교인들이 제일 알아주는 목사간판을 달고 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성경을 읽어놓고 예수 믿는 목적을 천국 쪽이 아닌 세상 쪽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성경을 들고 하는 건 의례히 ‘하나님 뜻이거니’ 하고 속는다.
아무리 목사간판을 걸고 말을 해도, 아무리 성경을 들고 말을 해도, 아무리 그 말이 유창해도 성도들의 정신을 세상 쪽으로 돌려놓는 것은 신앙 사기꾼이다. 사단 마귀가 보낸 종이다. 이걸 꼭 알아라. 목사가 아무리 등을 토닥거려 주고, 업어주고, 아무리 칭찬을 하고, 사랑해 줘도 세상을 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눈으로 볼 때 신앙 사기꾼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게 되면 신앙 사기꾼들에게 반드시 속아 넘어가게 되어있고, 그런 사고방식으로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깨닫고 아는 것은 없다. 죽을 때까지 믿어도 너는 둔팅이다. 이런 종들은 물질봉사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사랑해 주고, 직분을 주고, 믿음 좋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신앙 사기꾼이다.
뭐가 사랑이냐? 사랑은 첫째가 진리가 들어간다. 진리로써 사람을 영원히 존귀 영광스럽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랑은 뭘 어떻게 하겠느냐? 자기를 진리로 영능의 능력자로, 존귀 영광자로, 실력자로 높이 올려주려는 것이 진리사랑이고, 이게 아가페 사랑인데, 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사랑이라고 느끼겠느냐? 보자마자 달려가서 입을 맞춰주면 사랑이라고 할 거다. 이런 사람은 신앙 사기꾼들에게 속게 되어있다. 이용당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물질욕심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쓰는 것에는 인색하다. 더욱 더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목삽네’ 하고 있다는 거다.
하게 보시는지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보실 때 어떤 면을 더 귀중히 보시느냐?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실 때 어떤 면의 자기를 보시는 거냐? ‘몸이 어디에 가서 있나?’ 하는 몸 신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상태, 영적 상태, 그 마음상태를 보시고 귀중히 보신다. 그러니까 성도 자기도 그 면에 대해 염려 걱정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임하는 거다.
쉬운 예를 들면 비록 공부는 못하지만 늘 염려 걱정하는 것이 ‘내가 왜 이렇게 실력이 안 오르지?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 이런 자식이 있고, 또 한 자식은 ‘빨리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해야지’ 하는 자식이 있다면 부모가 누구에게 사랑이 더 갈까? 누구에게 신경을 더 쓸까?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이치를 보면 금방 신앙이 뭔지 알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이치를 볼 줄 모른다는 게 문제라. 그래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고 거의가 세상 쪽에 마음이 간다.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한다. 이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직결이 된 후에 그 다음에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면 이건 사랑으로 사람을 정복하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그 면은 끊고 마음이 인간 쪽으로 가서 뭘 하겠다고 하니 신앙적으로는 절대로 안 올라간다. 백날 믿어도 그 모양 그 꼴이다. 이런 식으로 살게 되면 결국은 사람과 원수가 되기 쉽다. 왜 그러냐? 온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성도 자기의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사람도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과 원수가 안 되겠느냐? 어쨌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으면 자기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 예를 들면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된다면 아버지로부터 무슨 국물이라도 있을까? 매밖에 없다. 미움밖에 없다. 배고픈 것밖에 없다. 무슨 사랑을 받겠느냐? 아버지의 사랑을 물리쳐 놓고 이웃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으면 인간끼리의 사랑도 할 줄 모른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거다. 부모가 그 위의 부모로부터 교육을 못 받으면 자기가 부모가 되어서 자녀에게 교육이 되느냐? 안 된다. 그 이치가 배우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것으로 받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줄 수 있겠느냐? 못 주는 거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의 것을 못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는 거고, 구원이 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줬고, 주고 있고, 또 받으라고 하신다. 이것을 받은 우리는 나만 받는 게 아니라 ‘너도 받아라. 너도 같이 받자’ 해야 하는데 이게 전도고, 가르침이고, 권고다.
자기의 심령상태, 신앙상태, 마음생태, 신앙의 심령상태를 자기가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늘 말씀을 받고 있으면서 마음이 말씀으로 살이 찌고 있는 건지? 말하자면 깨달아 가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과 만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상하게 올라가는 건지를 웬만하면 자기가 느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알고 느끼고 깨달아 가면서 죽을 때까지 고쳐가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안 고칠 바에야 뭐 하러 믿느냐?
그 다음에 ‘곤란’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일들이 어려운 것. 사람이 살아갈 때 어려운 일이 많다. 이런 걸 다 곤란하다고 하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면의 곤란과 환난을 더욱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그 면에 대한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는 거다. 반드시 들어주신다.
안 믿는 사람들은 생활의 곤란, ‘육신이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살까?’ 이 면에 대한 곤란을 생각하면서 점쟁이도 찾아가고, 무당도 찾아가고, 큰 나무 밑이나 바위 밑에 가서 복을 달라고 두 손을 비비면서 기도를 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자기의 곤란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생활도 곤란하다. 신앙 믿음도 곤란하다. 못 깨달아서 곤란하다. 못 배워서 곤란하다. 가르침을 못 받아서 곤란하다 할 때 신앙 면이 곤란하면 그 사람은 지혜가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면 가둬져 버린다. 정신이 가두어지지, 마음이 가두어지지, 이렇게 되면 몸이 이용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거다.
이럴 때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려고 밤새도록 걱정을 하면 아침에 눈알이 쑥 들어가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결국은 병들어 죽는다. 자연목숨마저도 결국은 죽는다. 예수 믿는 사회에 다니다가 이상한 교회에 붙들려 가서 재산 잃고, 몸 잃고 하는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이게 다 환난을 당하는 거다.
우리 성도들은 자기의 곤란과 환난을 영적인 차원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며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며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도 모르고, 깨닫는 것도 모른 채 기도를 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를 하겠느냐? 온통 세상 것을 달라는 것,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이건 안 믿는 사람이나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수준이 똑같은 거다. 그러니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화가 되겠느냐? 참으로 미련하고 둔탁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몽둥이찜질이 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무서운 줄을 알고 일어나되 신앙이 살아나는 면으로 일어날 수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영적인 면에서 곤란과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력을 갖게 해 주려고 육적인 곤란과 환난도 주더라. 육적인 것에서 마음이 빠져나오는 그 면을 알게 해 주려고 육신에 곤란과 환난도 훈련으로 주는 거다.
군대에서 왜 훈련을 받는 거냐? 왜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거냐? 아닌 말로 원수가 오면 ‘가만있어라. 내가 배가 아파 죽겠는데 다 낫거든 싸우자’ 그러느냐? 왜 훈련을 시키는 거냐? 적군을 이기고 또 적군에게 붙잡히지 않게, 즉 생명을 잃지 않게 하려고 그 훈련을 시키는 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왜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하느냐? 앞으로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듣기 어려워지고 참 교회를 찾기 어려워진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거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거냐? 내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어려운 때다.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는 데가 많지 않다. 평소에 진리말씀으로 무장을 하지 않고 있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거냐?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육적인 환난만 아는 자는 영적인 환난을 모르는 거고, 영적인 환난을 모르는 자는 육적인 환난을 고스란히 당하게 된다. 그러니까 육적으로 오는 환난을 이기려면 정신적인 면에서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깨닫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는 육적인 환난을 이기겠느냐? 머리가 어두운데 어떻게 이길 거냐? 못 이긴다.
그리고 영적인 환난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면에 부자고 육적으로 편안하지만 영적인 신앙 면으로 자라지 못해서 영적인 면으로 곤란을 겪고 있을지라도 이것을 자기의 환난으로 보지도 못하고 환난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영적인 면을 모르니 육적인 것이 편안하면 그것을 축복받은 것으로 알지 어떻게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알겠느냐?
육적인 면에서 먹고 마실 것도 충분하고 살기 편할 때 영적인 면의 훈련을 받아놓지를 않으면 물질적인 것이 없어졌을 때 훈련을 하자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니 나이가 젊었을 때 부지런히 배워라. 늙어지면 안 들어간다.
자기가 현재적으로 육신이 편안한 것만 신경을 쓰고 있느냐? 그러면 자기는 영적인 신앙 면에서 곤란에 빠지게 된다. 곤란에 접어들었다. 마음이 늘 육신이 사는 면에만 기울어져 있고, 마음이 거기에만 붙어있다면 자기의 영적인 면은 곤란한 상태인 줄 알아라.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이치를 깨달으려고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어? 이상하다. 왜 축복 축복 안 하지?’ 라고 하느냐? 마음과 정신이 말씀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영적인 곤란에 처해져 있는 거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인간 자기의 기쁜 뜻으로 삼고자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두 번째로 치고, 몰라도 되고, 그 대신 세상의 뜻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고 있느냐? 세상의 뜻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고 있다면 이 사람도 영적인 곤란에 처해져 있는 사람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신앙양심에 자극이 있느냐, 없느냐? 즉 아멘으로 받아들여서 ‘아, 그렇다. 내가 그렇게 못 살았구나’ 하는 자극이 있느냐, 아니면 아무런 자극이 없느냐? 자극이 없다면 이 사람은 영적인 곤란을 당하고 있는 상태다. 또 신앙양심에 자극은 없고 자기 마음이 세상을 향한 목적으로만 강하게 나가고 있다면 이 사람도 역시 영적인 곤란한 상태에 있는 거다.
그 다음에 얻어맞으면서도 마음이 자꾸 세상 쪽으로 나간다면 이 사람은 결국은 쓰레기로 취급을 당해서 이 세상에서 지옥 맛을 톡톡히 볼 날이 오게 된다. 얻어맞으면서도 자극은 없고 마음이 자꾸 세상 쪽으로 간다면 이 사람은 한없이 얻어맞는다. 얻어맞으면 깨달음이 와야 되는데 얻어맞으면서도 깨달음이 안 온다면 이 사람은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지를 않는다. 돈이 있을 때 먹고, 마시고, 담배 사서 피우고, 술 사서 먹고 하다 보면 몸에 병이 든다. ‘간이 나빠졌네. 콩팥이 나빠졌네’ 하면서도 계속해서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한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약을 써도 소용이 없고, 결국은 일어나지 못하고 그 병으로 죽는 길밖에 없다.
육적인 환난을 보게 하고 이로 인해 영적인 환난을 깨닫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애정권 안의 치리 속에 있는 것이니 이럴 때 마음이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 영적인 면에서의 곤란성과 환난성을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그 면에서 피할 줄을 알아야 한다. 쓰레기 취급을 당하면 좋겠느냐 그 말이다.
8절: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적의 수중에 가두어 둔 채 내버려두지 않고 다윗의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다는 거다.
나 한 사람의 대적이라 할지라도 신앙 면에서의 대적은 진리 길, 생명 길로 가는 성도 전체의 대적이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저 자는 너의 대적이다’ 라고 하면 이 대적은 성도 전체의 대적인 줄 알아야 한다. 같은 이치로 내가 ‘너는 내 대적이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래, 맞다. 그건 네 대적이다’ 라고 하셔야 한다. 내가 ‘저건 내 대적이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건 내 대적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내가 대적을 보는 눈이 잘못된 거다.
성도가 대적이라고 할 때는 개인감정으로 사사로운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리의 원수를 두고 말하는 거다. 자기가 진리를 가졌으면 비진리를 가진 교인은 자기의 대적이다. 왜 그러냐? 진리생명 길, 옳은 길로 못 가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생명 길, 바른 길로 못 가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비진리로 가는 사람이다. 그러면 비진리라고 해서 가서 두들겨 패라는 거냐? 그게 아니라 경계를 하라 그 말이다. 경계를 하며 따라가지 말아라 그 말이다. 따라가면 네가 죽는다 그 말이다.
이단자에게 홀려가면 어떻게 되느냐? 이단자들이나 거짓 종들이 기독교 안에 있는데, 이런 자들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느냐? 신앙사기 다 당한다. 이룰구원 면에서 성장이 없다. 신앙사기 다 당하고, 이용 다 당하고, 하나님 앞에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 우리가 경계를 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단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그들의 결과를 빤히 알면서 그들을 따라갈 거냐?
진리 길, 생명 길로 가면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성장이 되고, 영능의 실력이 있고, 자기 환경을 다스려 나가고, 무장이 되고, 아니 가르칠 수 있고, 그 다음에 주님과 같이 심판권을 행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고. 이게 이단자들과 비교가 되느냐? 학교선생을 따라가면 공부를 배울 거고, 깡패를 따라가면 깡패 짓을 배운다. 이치가 빤한 거다. 예수 믿는 거는 이치를 바로 아는 거다. 그래야 자기가 이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게 되는 거다.
다윗의 원수는 신앙 면의 대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원수가 되는 거다. 따라서 전 인류에게도 원수가 되는 거다. 왜 그러냐? 신앙의 원수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해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그 면을 없이 하고, 안 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을 입으려고 하는 소원 목적을 가진 진리성도에게 방해꾼 노릇을 하게 되면 대적이 되는 거다. 따라서 진리로 바로 나가는 성도를 비진리로 나가게 하면 안 된다. 진리로 나가는 성도를 진리의 실력이 더 커지도록 돕는 것은 큰 복이고, 은혜고, 이 일을 방해하면 대적이고 진노를 받는 거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고, 인간 앞에 좋은 것으로 주고 갈 줄 아는 자로 살아야지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고, 이웃에게는 고통을 주며 남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되겠느냐? 아닌 말로 비교급으로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까지 영원히 기념될 만한 사람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을 향해서 똑바로 못 살 바에야 안 믿는 세상에서 좋은 소리라도 들어야 하게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돌멩이로 만들지 않고, 나무로 만들지 않고, 버러지로 만들지 않고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참 사람으로 살아가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야 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시31장 05-6절 / 김경형목사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다윗이 자기의 육이 아닌 영을 주의 손, 즉 주님의 주권에 부탁을 했다. 인간 자기의 영은 인간의 지식과 수단 방법으로 보호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영은 인격의 주체성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말씀을 귀로 먹으면 생기를 얻고 자기 인격에 반영이 되어서 자기 몸이 생명운동 영생적인 정신을 갖게 되고 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결국은 영의 활동이 죽게 되고, 이러면 그냥 밥만 먹고 돈 벌고 사는 하나의 인간밖에 안 된다.
사람들은 사람의 성질에 따라 말로 그 사람을 표현을 한다. 게으르게 사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곰 같다고 하느냐? 곰이 게으르냐? 왜 게으른 사람을 보면 곰으로 생각을 할까? 아마 곰의 활동이 느릿느릿하게 보여져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또 사람이 사는 것을 보고 ‘아이고, 저 사람은 여우 같이 산다. 고양이 같이 산다’ 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갖는 정신을 보고, 사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한다.
인간을 만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으니 우리는 성경에서 깨닫고 바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이 깨닫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밥만 먹고 돈만 보고 산다면 이건 인간이 사는 삶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없이 미래가 없게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처음에 만든 그 인간도 그렇고, 어머니의 태를 빌려서 나온 현재의 인간 자기도 그렇고,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를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이 있는 거다. 무슨 목적이냐? ‘너는 그 어떤 만물과는 다르다.’ 원숭이가 인간 자기처럼 생겼느냐? 호랑이가 인간 자기처럼 생겼느냐? 창조물 중에 하나님을 닮은 것은 인간 너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이렇게 당신을 닮은 도덕성을 가진 인격자로 만들었느냐? 그 이유는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인가?’ 라고 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나그네로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는 속에는 신앙실력 믿음실력이 들어있으니 이 실력을 가지고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살게 되는 거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죽어가고 있고, 죽는다. 그러나 또한 인간에게는 죽음 저 너머 영원히 사는 세계가 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으로 통해서 알게 해 줬다. 우리는 이걸 믿을 수밖에 없는 거고 믿어야 한다. 이걸 부정할 재간이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예수를 믿고 보니 옛날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또한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줬으니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자기가 죽음 저 너머 사랑의 세계에서 존귀 영광중에 극치의 행복으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소원 목적이 없다면 사람이 사는 가치가 없어진다.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왜냐? 짐승은 하루 세 끼 먹는 걸 걱정을 안 한다. 짐승들이 농사 짓는 걸 봤느냐? 곰이나 사자가 괭이를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 걸 봤느냐?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는 게 널려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하고,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인간이 사는 게 이것만이라고 한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거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 채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게 편하지 않겠느냐? 인간 자기는 현재적으로 가치판단 평가성을 따지는 도덕성이 있고 지혜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사는 거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거다.
인간 나는 죽음 저 너머 영원한 미래가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으니 이 세상에서 헛 살면 안 된다. 그러면 헛 사는 게 뭐냐?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수준에서 살면 안 된다. 선악과 따먹은 수준은 죄 아래다. 생명적 수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수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인간 자기가 생명적으로 생기 있게 살게 된다. 세상을 쳐다보며 ‘아이고, 못 살겠구나’ 이게 아니라 세상이 아무리 오르락내리락 할지라도 죽음 저 너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얼마든지 힘을 내서 살 수 있다.
생각을 해 봐라. 인간이 한 세상 살면서 길게 사는 사람도 있고, 짧게 사는 사람도 있고,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내가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싶다’ 하면 다 부자로 살아지더냐? 그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부자로 살기도 하고 가난하게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다 잠깐이더라. 그런가 하면 부자를 목적하며 살아서 부자가 됐지만 그 부자 때문에 더 빨리 죽는 사람도 있고, 부자가 안 됐으면 감옥 속에 안 들어갈 텐데 부자가 됐기 때문에 감옥 속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더라. 이런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소원과 목적이 있는 건데, 성경에서 이 소원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은 짐승처럼 살게 된다. 죄 아래 살게 된다. 설령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안 한다고 할지라도 매일 매일 사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면으로 살지를 않는다면 그 자체가 죄다.
사람은 콧구멍으로 숨을 쉬며 산다. 숨을 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면 실속이 있게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실속 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의 속 성품이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만들어져 가는 거다. 닮아지는 거다. 그렇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는 것은 죄 아래 사는 거고 사망 아래 사는 거다. 성경이 이걸 밝혀주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기본구원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많이 닮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거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펴서 우리들에게 진리이치, 하나님의 말씀이치, 하나님의 생명이치, 하나님의 도덕이치로 역사를 하신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윗이 자기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을 했는데, ‘손’ 하면 역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에 자기를 부탁한다는 거다. 하나님께 자기를 부탁할 때 말로만 ‘부탁합니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정신이 자기를 하나님께 부탁을 하는 거다.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나를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실속이 없는 것이고, 이 말을 안 해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그 정신이 ‘주님의 손에 내 영을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였나이다.’ 다윗이 자기의 영을 주님의 손에 부탁을 하니까 진리의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를 구속하셨다는 거다. 자기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원죄와 자범죄에서 풀어내서 하나님께로, 영생 쪽으로 옮겼다 그 말이다. 자유로 풀어내줬다 그 말이다. 죄에 포로로 되어있었는데 죄를 사해주니 죄어서 풀어내졌다 그 말이다.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못 깨닫고 몰라서 부패될 수밖에 없는 비진리적, 육적, 세상 물질성적, 이질적, 옛사람의 정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런 것에서 탈출을 시켜서 하나님 쪽으로, 생명 쪽으로 구원을 이뤄갈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다.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유익이냐? 천국에까지 유익이다.
안 믿는 사람은 이런 걸 모른다.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른다. ‘맛있는 게 있으니 먹으러 오너라’ 하면 이건 빠삭하게 알아듣지만 사람이 깨닫고 만들어지고 지혜적으로 되는 면에는 관심도 없고 전혀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똑똑하다고 할지라도 사망적인 안에서 살고 있는 거다. 어리석다. 미련하다.
사람이 깨닫고 만들어지는 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건데 이런 건 전혀 관심 밖이고 돈밖에 모르고, 먹는 것밖에 모르고, 의식주에 관한 것밖에 모르는 사람은 사람을 위할 줄도 모르고, 사람을 알아볼 줄도 모른 채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하는 수준에서 살다가 죽는다. 이게 죄라 그 말이다. 예수 믿는 건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좋도록만 해 달라고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은 거짓 것들이다. 사기꾼들이다. 그렇게 예수 믿지 말아라. 예수는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6절: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허탄하다는 것은 허망하다는 말인데, 허망한 것을 예를 들면 부모형제나 친구나 정들었던 사람이 죽어서 그림자마저 없어졌을 때 참으로 허망하다. 인생처럼 허망한 게 없다. 주인이 나갔다 들어오면 꼬리치고 반겨주던 개도 안 보이면 마음이 허전한데 정들었던 사람이 죽었거나 보이지 않으면 참으로 허망하다. 왜 이런 허망함을 느끼는 거냐?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이 안 들었으면 허망한 감을 별로 못 느끼는데 인간은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던 사람이 그림자마저 안 보이면 참으로 허망하다. 허망한 게 인생이다.
그런가 하면 해가 뜨기 전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는데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해가 뜨기 전에 풀잎에 이슬방울이 은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는데 해가 뜨면 흔적이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런 걸 보면 참 허망하다. 그리고 지난 밤 꿈에 그리운 사람을 만났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온 데 간 데 없으면 참으로 허망하다. 어릴 때 워낙 못 살 때 꿈속에서 잔칫상을 잘 받아먹었는데 일어나 보니 꿈이라. 이럴 때는 ‘언제 부자로 살아서 실컷 먹어볼까?’ 하면서 참 허망하다.
또한 종교적으로 보면 실지로는 없는 것을 생각으로 추상을 해서 있는 것처럼 믿는 것도 참으로 허망한 거다. 이방 우상종교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 거짓 종들이 교인들에게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 가서 상급을 많이 탄다’ 라고 해서 돈으로, 노력으로, 봉사로 많이 충성을 했는데 천국에 가 보니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겠느냐? 신령세계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은 전부가 허망하고 허탄한 거다. 자기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을 잔뜩 가지고 부귀와 영화를 누렸는데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면 잘 살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하구나’ 이런 탄식이 나오게 된다. 이런 게 다 허탄하고 허망한 거다.
세상은 전부 두고 간다. 세상 것을 다 가지고 있을지라도 전부는 불에 타고 없어질 거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니 예수를 믿고 있고, 이걸 아는 우리는 그런 것에 소원 목적을 두지 말아라. 평생을 부자로 살려고 부자만 쳐다보고 살았는데 늙어 죽도록까지 한 번도 부자로 못 살고 그대로 죽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허탄할까?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숭상은 뭐냐 하면 높이 올려다보며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신처럼 여기는 거다. 이런 마음이 숭상이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니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전부가 허탄한 것을 숭상하는 거다. 바위 아래에 촛불을 켜놓고 손을 비비거나 집안 곳곳에 귀신이 있다고 하며 섬기는 것 등등이 다 귀신을 숭상하는 거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부모들은 어린아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라. 그 아기는 죽는다. 왜 죽느냐? 우상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 버린다. 자식을 그렇게 길러놓으면 그 아이가 자라서 부모를 잘 섬기겠느냐? 그렇지도 않다. 다 커서도 계속해서 자기만 떠받들어 달라고 한다. 세상에 자기만 떠받들어 줄 사람이 있느냐? 그러니 사람이 안 된다. 그러니 왜 이런 허망하고 허탄하고 미련한 짓을 하겠느냐?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처럼 높이는 건 참으로 어리석다. 허탄하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을 사람을 만들려면 절대로 떠받들지 말아라. 물론 귀하고 중하지만 우상처럼 떠받들면 안 된다. 신앙으로 교육을 잘 시켜야 사람노릇을 할 수 있다. 떠받들림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버릇이 나빠진다. 공동생활을 하는 데도 버릇이 나쁘다. 이러면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허탄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미련한 사람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생활에 활용물이요 이용물이요 교육에 이용물이요, 성도의 경우 자타의 이룰구원에 이용물이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만들어 놓은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사람이 우매해져서, 미련해져서 만물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돌부처에게나 나무에게나 짐승에게나 항아리 속에 뱀을 넣어놓고 이런 것을 숭상하는 허탄한 사람으로 돼버린다. 이건 미개인이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미련해진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도 그렇게 살고, 남도 또 그렇게 살도록 만드니 인간 전체가 쓸모없는 인간이 돼버린다. 인간쓰레기가 돼버린다.
진리성도 다윗은 거짓을 숭상하는 허탄한 자들을 미워했다. 개인감정으로 무조건 미워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가치판단 평가를 해 보니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우리도 미신을 섬기는 사람이 미운 거다. 왜냐?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자자손손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자기가 돌을 깎아 만들어서 세워놓고 그 앞에서 빌고 있으니 이게 무슨 짓이냐? 인간이 깨닫지를 못하면 짐승처럼 돼버린다. 인간은 만물 위의 존재임에도 만물 아래로 떨어지니 우리로서는 만물 아래로 떨어지는 그 인간이 불쌍한 게 아니라 미운 거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거고, 미련하게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위할 줄을 모르고 무조건 선하게만 살자고 한다. 그러나 참 사람으로 되는 교육은 없다. 예를 들면 중의 경우에 도를 닦는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이게 무슨 교육이냐? 성경이 사람을 깨닫게 해주는 거다. 머리를 열어주고, 눈을 열어주고, 귀를 열어주고, 사람의 가치를 알게 하고, 세상의 가치를 알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고 영특하게 만든다. 얼마나 좋으냐?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의지’란 기대는 건데,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영원히 후회가 없는 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면 바른 선택이 나오게 되어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성경을 봤다면 바른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부자가 되겠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선택이 바로 된 거냐, 바로 못 된 거냐? 이것은 미신을 섬기는 것과 똑같은 차원의 머리수준이다. 그러니 미련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이 미운 거다. 왜냐? 자기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서 미련하게 만드니 미운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든 원인 동기 목적을 가르쳐 줬는데도 여기에서 떠나 짐승처럼 살게 하니 짐승보다도 더 밉다.
남편에게 시장을 봐오라고 돈을 주면 그 돈으로 술을 받아먹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잘 듣는 개는 바구니를 목에 걸어주고 장을 봐오라고 하면 잘 봐온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스러우냐? 개를 훈련을 잘 시키면 소경을 인도하기도 한다. 이런 개는 신호등도 잘 지킨다. 이게 우리에게 뭘 깨닫게 해주는 거냐? 인간은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걸 가르쳐 준다.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함께 불에 다 태워버린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허망하고 허탄한 거다. 사람이 값어치가 없다 그 말이다. 우리교인들은 불에 타질 사람으로 되면 안 된다. 아닌 말로 우리교회 교인들이 혹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일등교인이 되어야지 게으르고, 자기는 안 하고 남만 시키고, 말만 만들고 하면 못 쓴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시 31장 02~24절 / 한대근목사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무게로 힘겨워합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인생의 무게로 힘겨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피하였습니다(1절). 여기에는 다윗의 놀라운 신앙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편을 아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7,8절).
다윗은 세 가지의 표현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편을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①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직접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②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③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을 원수들의 수중이 아니라 구원의 반석위에 세우시고 든든히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형편과 처지를 정확하게 살피시고, 아시고,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는 친히 개입하셔서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어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삶의 위기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피곤한 일상에서 낙심과 절망하고 있음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형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발을 넓은 곳에 세워주실 것입니다.
2. 다윗은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았습니다(15,6).
다윗의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내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살았기 때문에 극심한 절망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중에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면서도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인생은 결코 망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가 있음을 믿었습니다(19절).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즉 고난 뒤에 숨겨 놓으신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 하나만 붙잡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의 순간에 고난 뒤에 숨겨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난 뒤에는 하나님이 숨겨놓은 축복이 반드시 있습니다.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고통당하는 나를 위해 숨겨놓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피하여 영적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고 하나님이 쌓아두신 은혜를 헤아리며 삶의 새로운 희망을 열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로 준비하라
시 31장 1~5절 / 김태환목사
오늘 읽은 시편 31편 역시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쉬운 성경에는 “어려울 때에 하는 믿음의 기도”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NKJV에는 “To the Chief Musician”이라는 이 시편에 대한 instruction이 붙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영장”이라는 말은 “chief musician”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Instruction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만, 제 생각엔 이 시편은 chief musician을 따라 불렀던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chief musician은 또 이 노래를 어떻게 불렀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만, 이것도 제 생각엔 chief musician이 그 때 그때 영감으로 불렀지 않았을까 합니다. Chief musician이 노래를 부르면 회중은 그 노래를 따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chief musician은 대단한 존재이지요. 미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music director라고 하면 교회의 모든 예배에 대한 일에 관여합니다. 계획하는데 참여하고, 결정과정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chief musician에 대한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교회 음악이라는 개념이 없고, 성가대를 예배를 구성하는 하나의 part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이 말씀에 “어려움”이라는 말이 나오고 2절에는 “나의 애원하는 소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4절에는 “내 앞에 놓여 있는 덫에 걸리지 않도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자기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쳐 놓은 덫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웬일인지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하고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고, 다윗은 사울을 위해서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시기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다” 이런 노래들이 시중에 떠돌았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인생을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인생의 위기는 정작 내가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성공했을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는 내 주변에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공했을 때, 내 주변에는 이것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덫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는 말씀이 있지요?
다윗은 이렇게 인생의 어려운 때를 맞이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저께도 같은 말을 드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간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결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가면 이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약속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로마서 8:28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윗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다른 것을 다 잃어 버려도, 내 삶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은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고 해도 염려 되지 않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급박한 상황이 전개가 되어도 염려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어려움을 주심으로, 위기 상황을 겪게 하심으로 다윗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려움이 하나님이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주께 피한다”는 말이 NLT 성경에는 “Lord, I have come to you for protection”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NKJV에는 “In You, O LORD, I put my trust”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인생의 refuge가 어디에 있는지, 네 인생의 shelter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위기의 때에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다윗이 한 나라를 경영하게 될 때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이렇게 큰 그림에서 한번 보세요. 당장에 그 상황만 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큰 그림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시각에서 자기 인생을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내 문제를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위기적인 상황도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위기를 대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강인한 품성이 길러집니다. 이것이 로마서 5:3-4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한가지 더 볼 1절 말씀에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refuge로 삼습니다. 자기의 피할 바위로 삼습니다. 자기의 든든한 요새(fortress)로 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같은 말씀이 5절에 “주님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오니 오 주님,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해 주소서” 라고 나옵니다. NLT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Save me, for you do what is right.”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redeem me, O LORD, the God of truth” 이렇게 나옵니다. “Deliver me in Your righteousness”이렇게 나옵니다. 어저께 아침에 읽었던 시편 5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의 곧은 길을 보여 주소서(Lead me in the right path).” (8절)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바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편법을 쓰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정도를 걷지 않고 옳지 않는 길을 걷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려우니까 모두 excuse가 될 줄로 생각하는지 몰라요. “그 사람이 왜 그랬지요?” 그러면 “워낙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어렵다고 해서 사술을 썼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술을 써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사울을 죽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섬기는 최고의 지도자의 모델로 삼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사울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윗의 인생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기도로 준비하라”입니다. 기도로 무엇을 준비합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시도록, 내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길러지도록,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어떤 위기 속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 속에서 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나를 하나님의 강인한 품성을 가진 자녀로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윗의 기도를 한번 따라 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압니다.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이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당신의 강인한 자녀로 만들고 계십니다. 당신의 나의 희망입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술을 부리지 않고 당신의 의로운 길을 걷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두고 계셨던 계획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도 같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의로운 정도(God’s right path)”를 찾도록 하십시오.
나를 인도하소서
시 31장 1~20절 / 박조준목사
우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범합니다. 이 말은 의식적으로 죄 를 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로 인한 범죄입니다. 실수한다 는 말의 의미는 잘못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내리는 것 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언급하는 실수는 거짓이 없는 선의의 실수를 말하는데,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실수가 결과적 으로는 죄를 범하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실수를 다루고 있습니 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두려움 때문에 오는 실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서 혹은 다급해서, 근심하는 가운데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게 되어 해야 할 것을 안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실수가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는 땅에는 기근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 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귓전에 울려 퍼지는데 그 마음 가운데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땅에는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물론 마실 물도 넉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스 스로 생각하기를 이 기근이 심한 땅에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그대로 앉아 있다 죽기보다는 양식 이 넉넉한 애굽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 하 셨지만 기근이 심해지자 아브라함은 죽을까 두려워서 벧엘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 데 이것 보세요. 두려운 마음 때문에 한 가지 실수를 하고 나니까 그에 이어서 두 번째, 세 번 째 실수가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 하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 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사 문제가 사 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의 생명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 하신 그대로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하면 떨어지는 법이 없습 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오게 되면 초점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보다는 인간의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민수기 13, 14장을 보면 좋은 예가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첩자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이스 라엘 민족이 가데스 마을을 떠나 그 땅을 취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 여부를 염탐하고 돌아왔습 니다. 정탐꾼 중에 열 사람은 그 땅에 거인이 살고 있으며 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아 도저히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키 큰 사람들을 볼 때 두려운 생각이 들 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그 당에 들어가 취하자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당이라 고 말했습니다. 저희들이 키가 크다고 하지만 저희는 우리의 밥입니다. 저희들의 신이 저희를 떠난 지는 이미 오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수많은 이스라엘 민 족은 두려운 마음에서 열 사람의 보고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두려운 생각이 앞서면 판단을 그릇되게 하고 판단이 잘못되면 잘못된 선택 을 하게 되어 그만 실수하고 맙니다. 둘째로, 선의로 인한 실수가 있습니다. 매우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이 된 것이지마는 그 방법 이나 계획이 잘못되어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애굽의 궁궐에서 장 성한 모세를 봅니다. 그는 40세가 되었습니다. 중년기에 접어든 모세가 자기는 애굽의 멍에 속 에서 시달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12절에 보 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억압하는 자에게 복수하려는 선한 동기에서 사람을 죽였습 니다. 모세는 애굽의 문명 속에서 살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의로 운 일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 니다.그런데 이것 보세요. 모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선의 에 의한 실수의 한 가지 특색입니다.
실수를 범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을 보십시오. 모세에 관한 같은 이야기인데 1500년 후에는 이런 관점에서 기록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 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 하더라 (행 7 : 23-25) 사실은 이것이 오늘 우리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팔 소매를 걷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 결과는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 을 우리 마음대로 행하려는 때가 종종 있는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합니다. 그러나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우리가 부주의함으로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부주의로 인한 실수는 우리의 무관심, 부조리, 태만 또는 절제의 부족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장 5-6절을 한번 읽 어 보세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 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라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더라 여기에 나오는 학깃은 다윗의 아내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족보를 보세요. 연구해 보시면 다 윗은 일부 다처의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18명인데 그 외에도 더 있 을 는지 모릅니다. 수동적인 부주의입니다. 아도니야는 날 때부터 반역자요, 자라면서 계속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스스로 책임질 나이가 되었어도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그는 내가 왕이 되리라 하며 반역하였습니다. 이렇게 되 기까지 단 한 번도 아들을 징계하지 않은 아버지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번도 아 들에게 내 아들아, 네가 나를 거역하려 하느냐? 나는 네 아비요, 너를 징계할 책임을 하나님께 로부터 받았어. 너 그러면 안된다 이런 말 한번 못했습니다. 다윗은 너무 바빴습니다.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일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보통 세상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실수입니다. 전에 엘리 선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라 실로에 있는 성막을 책임지고 있으면서 혼자 일을 보려니까 매우 바빠서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성막에서 감히 할 수 없는 일도 서슴없이 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아들들에게 한 마디도 훈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했으며, 에 리 자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주의로 인한 실수가 큽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고치거나 바로 잡으면 그만입니다.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가 범하는 실수를 합리화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실수를 행한 자신은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31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기분이 매우 울적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본문을 읽는 중에 다윗이 매우 실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 같습 니다. 아마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맹점을 발견할 후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 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셔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 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내가 나의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시 31 : 1-3, 5) 사람이 실수를 저지른 후에 오는 절망 속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 한 일입니까? 우리가 온갖 실수를 범했을 때 우리의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누구도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 주는 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 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범한 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수치와 굴욕을 주님께 맡깁니 다. 우리의 수치와 굴욕을 안위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 이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수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십니까? 본문 6-7절을 보세요. 내가 허 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 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실적인 안목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십니 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모습은 서로 참으려고 갖가지 신경을 다 동원합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사람은 달과 같아서 남에게 절대로 보여 주지 아니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인간이 보여 주지 아니하려고 애쓰는 어두운 면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환하게 들여다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결점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못된 습관을 아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두려 움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자라 온 과정을 아십니다. 지나온 일생을 아십니다. 주님 은 나의 행동을 아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의도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곤란을 감 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겉으로는 곤 란을 받고 안으로는 환난을 당하며 실수만 하는 우리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시고 이해하십 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큰 힘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보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대해 주십니 까? 본문 8절을 보세요. 나를 대적의 손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되었다고 해서 멀리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범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 다 이 말은 다윗의 발이 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설 수 있는 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주십니다. 주님에게는 넓은 쉴 곳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은 우리에게 주십니다.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조급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은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좀더 쉽게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 1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그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주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 하십니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놓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따를 때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왜 이런 곳으로 인도하시는 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 위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의 전반에 걸쳐서 인도하십니다. 볼지어 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 을 꼭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 때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고 슬플 때도 우리 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내 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 6)그리고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인도하 십니다. 본문 19, 20절을 보세요. 주를 두려워 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 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우리가 실수를 범해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이시 며 사랑과 이해로써 우리를 감싸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죄사함 받은 사람일 뿐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불완전한 요소가 모두 없어지 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알고 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일입 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 많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내내 인도하여 주셔서 이 험악한 인생 행로 를 성공적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로 부끄럽게 마옵소서
시 31장 1~14절 / 박조준목사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실수하게 되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 말은 고의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적인 사기 행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거짓이 없는 선의의 실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잘 못이 죄악의 행위로 유도되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통해 우리 는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몇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다급해서 실수를 했습니다. 사람이 두려 워지면 판단을 잘못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의 실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 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 에 기근이 있으므로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물론 물도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사가 각박 해져 갔습니다. 그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 하셨지만 기근이 심해지자 그는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벧엘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 가지 실수를 하면 두 번째, 세 번째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두 번째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 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창 12:11∼13). 아브라함은 애굽에 이르렀을 때 그 의 생사가 사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성으로 일단 들어서면 우리는 초점을 잃고 하나님의 말 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둘째로, 모세의 경우입니다. 뜻은 좋았지만 계획이나 방법이 잘못된, 선의에 의한 실수가 있 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을 보세요. 그 당시 모세는 사십이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실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중년기에 접어든 모세는 애굽의 멍에 아래서 시달리 는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자기에게 이 백성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애굽기 2 장 11∼12절에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 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구원하고, 억압하는 자에게 복수하려는 올바른 동기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는 애굽 문명 속에서 자랐지만 히브 리 조상의 피를 받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의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살 인이라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 또한 선의에 의한 실수를 범한 사람의 한 가지 특성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십시오. 같은 이야기를 1,500년 뒤에 다소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글입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 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더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의를 가지고, 팔소매를 걷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만 그 결과는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 해야 할 사실은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한 일은 결코 악의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실수를 범했습니다. 셋째로, 다윗의 경우입니다. 다윗은 부주의로 인해서 실수를 범했습니다. 열왕기상 1장 5∼6 절에 보면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 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 었더라 했습니다. 학깃은 다윗의 아내 중의 하나였습니다.
다윗의 족보를 자세히 연구해 보시면 다윗은 일부다처의 죄를 범한 사람인 것을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제가 계산해 본 것만도 다윗 의 아내는 열 여덟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더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학깃은 다윗의 아내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학깃은 아도니야의 모친입니다. 아도니야는 날 때부터 반항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자라면서도 계속 그랬고, 스스로 책임을 질 나이가 되어서도 책임을 지지 못했습니다. 종래는 내가 왕이 되리라 하며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 여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버지 다윗이 아들을 훈계하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무 바빴습니다. 그는 왕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가족에 대해서 부주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큰 일을 하고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 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벤쟈민 프랭클린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소홀한 부주의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못 하나를 얻으려고 신을 버리고, 신을 얻으려고 말을 잃으며, 말을 얻으려고 기수를 희생하는 경 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주의는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갑니다. 엘리도 제사장으로 하나님 을 섬겼고, 그에게는 아들 형제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형제가 성소에 서 하지 못할 일을 하였습니다. 아마 그런 말이 엘리의 귀에도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들 에게 책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는지도 모릅니다. 그 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모로서의 불찰이요, 무관심이요, 무성의입니다. 종래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하고 말았고 이 소식을 들은 나이 많은 엘리는 의자에서 떨어 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부주의로 인한 실수의 영향이 이렇게까지 큽니다. 넷째로, 무절제한 호기심 때문에 생기는 실수입니다. 이것은 젊은 세대와 특별히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젊은 세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무절제한 호기심은 대개 감각적인 것이나 마귀의 일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호기심이 창조적인 면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입 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호기심을 절제하지 못할 때 어려운 일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신뢰와 권위를 잃어버린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 사무엘 이 죽은 후 사울 왕은 사무엘과 이야기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두 부하를 데리고 밤중에 신접한 여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은 지옥과의 만남을 구하였고 머지 않아 전혀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무절제한 호기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 니다. 역대상 10장 13∼1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 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했습니다. 호기심이란 귀한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절제하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를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호기심이 작용하여 성경이 말씀한 것 이외의 것을 알고 싶고, 듣고 싶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타락한 경우를 우리 주변 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기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진리에 눈이 어두워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종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이 나타납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던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바로 전 전도 여행의 도중 그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다음 번 전도 여행의 준비를 할 때 바나바는 그들에 게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요청해서 바울은 이 일을 바나바와 의논하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 바울은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마음속에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그에게 득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파선된 배와 같고 거짓말 하며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는 데 한 가지 어두운 점이 있 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보면 나중에 바울은 마가가 그에게 필요하다고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맹점이 있어서 그러한 실수를 범 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5절을 보게 되면 더욱 뚜렷한 예가 나타납니다. 그저 한 번 읽어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은총의 문제에 있어서, 특히 음식과 관계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에 하나의 맹점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함께 있을 때에는 유대인의 음식을 먹었습니 다. 그는 은혜의 온전한 덕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나쁜 것은 위선적인 생활양식 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자유와 규칙을 자기에게 맞게 변형하여 사용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실수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베드로의 실수를 책망했습니다. 베 드로의 반응이 어떠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필경 베드로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눈이 어두 워 범하는 실수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분명히 드러나지만 본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 입니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 가운데 이런 형태의 실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솔직히 시인하 고 고치면 그만인데 대개의 경우 이것을 합리화시키려고 변명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인 간은 이렇게 다 부족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실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 은 실수가 많은 인간을 향해서 오늘 본문이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다윗은 그의 실수를 발견했을 때 기분이 울적하고 매우 낙심하고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두려 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수를 한 후에 오늘 주신 말씀 시편 31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하신 말 씀입니다. 이 순간은 메시야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처참한 순간입니다. 우리도 실수 뒤에 오는 부끄러움과 절망 속에서 이 말을 인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잘못을 했을 때 우리의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현실적인 안목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진 짜 모습을 감추려고 갖가지 신경을 다 동원합니다.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 간은 달과 같아서 남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아니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어 두운 면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훤히 아시고 들여다보십니다. 다 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님이 현실을 그대로 보시는 분이 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이 나를 보실 때 나의 결점을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습관을 아시 며 나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나의 자라 온 과정을 내 몸에 밴 나쁜 버릇, 지나온 나의 일생을 다 아십니다.주님은 나의 행동을 아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의도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곤란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보십니다.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곤란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요소와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환난은 내적인 요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주님은 내가 외부의 관계에서 곤란을 받으며 마음속에 환난을 받고 있음을 알 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한없이 동정하십니다. 저는 이 말 씀을 읽을 때마다 큰 힘을 얻곤 합니다. 겉으로 곤란을 받고, 안으로 환난을 당하며 실수를 하 는 우리지만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 습을 온전히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여 주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 8절에 나를 대 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큰 실 수를 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시 31:8). 하나님 께서 그를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그가 설 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1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라 하였 나이다. 그는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그를 치러 일어나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때 그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우리 를 어떻게 지도하십니까?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내가 주 께 의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 때뿐만 아니라 생의 전반에 걸쳐서 우리를 지도하 십니다. 우리는 수치를 당하여 당황해 하고 실패와 손해를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쁠 때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우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지도하십니 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더구나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 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 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 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 31:19∼20). 우리가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은밀한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서 그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그의 사랑과 이해로써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요, 죄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불완전한 요소가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매우 터무니없는 실수를 많이 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죄사함을 얻은 사실을 알고 새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이 여 나로 부끄럽게 마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실수가 많고 부 족한 것이 많지만 우리로 부끄럽게 아니하시고 은밀한 곳에서 지도함을 받는 축복을 다 받기를 바랍니다.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시 31장 1~11절 / 조상호목사
21세기에 가장 영향을 끼친 전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킴 윅스’라는 여성이 나와서 찬양을 하고 간증을 합니다. 그 여성은 한국에서 태어난 후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파견 나온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는데, 그녀는 찬양을 한 후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이 여성은 비록 맹인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육체의 눈은 멀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영혼의 눈이 뜨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킴 윅스자매님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시편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2절과 3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했고, 또 사무엘하 22장 33절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완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장 합당한 곳, 가장 완전한 곳으로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니면서도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완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다윗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되 가장 완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다윗의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합당한 길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주십니다. 오늘 본문 8절에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코치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코칭해주시기 원하시고 인도해주시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생님이 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코치가 되시는 하나님의 코칭을 받을 수도 있고 코칭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코칭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1) 장애물이 없는 사람
첫째로, 장애물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언제든지 원하시면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친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친밀한 관계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는 순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59장 1절과 2절에 보면, “야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응답을 막고, 하나님의 인도를 방해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고, 오직 회개기도를 통해서만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과의 사이에 들어있는 장애물이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야훼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허물을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여기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다윗이 앞에서 언급한, 즉 진실로 회개함으로 사죄의 은총을 얻으므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은 홍수와 같은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애물이 사라진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의 인기 걸그룹인 원더걸스의 “Tell Me"를 수 백번 불러도 하나님과의 사귐에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좋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코칭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자복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2)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
둘째로,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콩팥(신장) 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찰 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누가 신장을 기증하느냐‘ 였습니다. 어느 주일, 지방회에서 파견 나온 목사님이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되어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 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한 후, 고통 받는 주의 종을 위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또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이식이 되는 것이라 아니라,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정밀 검사를 해야 된다고 설명까지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의 성도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의 것이면 되기 때문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기증자를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안주머니에서 오리 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었습니다. “여러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기증자로 선정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그날 따라 여기저기에서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나는 곳에는 오리털이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면 그곳에서도 여지없이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국 그 오리털은 어느 누구의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싫어하시되, 행동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인도해주십니다. 다같이 7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셀라)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무지한 말이나 노새’는 좋은 말로 해서는 순종하지 않는 완고한 동물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동물들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하고, 목에 무거운 ‘굴레’를 씌워야 합니다. 그래야 입과 목이 아파서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집이 센 사람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일러 준다 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아무리 잘 지도해주려고 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려고 해도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학생을 지도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열심히 가르치는데도 학생이 따르지 않는다면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계속해서 학생이 지도와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선생님은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접습니다. 그러나 학생이 가르치는 대로 따르고,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면 선생님은 아무리 피곤해도 열심을 다해 교육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성도를 인도해주시고,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는 성도에게 복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반응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두 배에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는 성도에게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목에 무거운 굴레를 씌워야 순종하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던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르치는 대로 따르고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을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3)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셋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같이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야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야훼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이 말씀에는 ‘악인‘과 ‘야훼를 신뢰하는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각각 다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악인은 많은 슬픔 가운데 살게 되지만, 야훼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인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과의 전쟁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이 단 6일 만에 끝났다고 해서 ‘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 전쟁을 앞두고 전 세계의 언론들은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의 군사력이나 전쟁에 참여한 군인의 숫자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력, 등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랍 연합국은 오일머니로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어마어마한 군사장비들을 보유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6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스라엘군은 이렇게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최신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전 세계 군사 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극비리에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섰지만, 어떠한 최신 무기도 밝히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 비밀의 병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군은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를 거둔 후 그 비밀 병기를 밝혔습니다. 그 비밀병기는 바로 그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국민들은 극도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랍비 하바드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시켜 주실 것이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전쟁 발발 5일전에 이스라엘의 일간신문인 <예디옷 아하로놋>은 랍비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땅을 지켜보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 그러자 그 다음날 이스라엘의 모든 신문들이 동일한 기사의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국영방송인 <콜 이스로엘>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번 전쟁에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큰 승리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라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매스컴의 보도를 이스라엘 국민들이 철저하게 신뢰했습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지키시며 함께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이 발발한지 6일 만에 이스라엘군은 아랍연합군을 당당하게 물리치고 성지인 예루살렘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책임져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북섬 New Plymouth에서 있었던 NZ AOG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매우 귀한 체험을 했습니다. 주일 오후에 도착한 후 다음 날 평소처럼 새벽 4시에 눈이 떠졌지만, Fijian, Samoan 등 다른 세 분의 목사님들과 함께 한 Unit에 머물렀기 때문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조용히 침대에서 새벽기도를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인 화요일 새벽 또 같은 시각에 눈이 떠졌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침대에서 조용히 기도하는데, 제 마음 속에 주님께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묵고 있는 모텔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문뜩 가지고 간 <크리스챤 라이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신문 광고에 나오는 뉴플리머스 순복음교회 주소를 모텔 Reception에서 구해온 New Plymouth 시내 지도에서 찾아보니까 모텔에서 40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창립예배와 목사임직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3번이나 그 도시를 방문했지만, 저녁에 도착하여 다음 날 새벽에 그곳을 떠나왔기 때문에 New Plymouth 시내는 초행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편 마음 속으로는 ’알지도 못하는 시내를 걸어서 교회를 찾아갈 수 있을까, 꼭 교회에 가야 하나, 광고에 나온 대로 새벽기도회 시간이 5시30분이 맞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제 마음에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도에 나와 있는 주소와 방향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4시40분 경에 모텔에서 나와 성경책을 한 손에 들고 무작정 교회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한 25분 쯤 걸었을 때 사거리를 가로질러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도로 저 멀리에서 자동차 하나가 서서히 접근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제가 먼저 건너가면 되는데, 오른쪽에서 접근해오는 자동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멈췄지만, 저는 그 자동차 앞으로 지나가지 않고 뒤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OOO목사님의 사모님이신 OOO전도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이 운전을 하고 계셨고, 사모님이 조수석에 앉아 계시다가 저를 본 것입니다. 사모님은 자동차 문을 열어주시면서 저에게 일단 자동차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왔던 길로 다시 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크리스챤 라이프>에 나와 있는 주소는 교회 주소가 아니라 사택 주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사택으로 향하다가 목사님 부부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다시 한 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실 New Plymouth는 5만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큰 도시입니다. 그리고 제가 묵고 있는 모텔에서 사택으로 가는 도로가 무수히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목사님 부부가 교회로 가는 노선을 모르고 있었고, 사택에서 출발하는 시간도 몰랐습니다. 그냥 모텔을 출발했는데 그 넓은 도시에서 정확하게 두 분을 만난 것입니다. 제가 10초만 늦게 그 도로를 건너갔든지, 아니면 제가 10초만 빨리 도로를 건넜더라면, 제가 그 도로가 아닌 다른 도로로 갔더라면, 제가 그 도로의 건너편 길로 갔더라면 저는 목사님 부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은 강렬한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따라 아무 것도 모른 채 모텔을 출발했지만, 정확한 장소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이 목사님 부부를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 날 새벽 뉴플리머스순복음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개인기도시간이 되었을 때 주로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꼭 하나님게서 저에게 '조목사야! 그래 내가 너의 마음을 보았다. 나를 사랑하고,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는 너의 마음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특별한 방법으로 오늘 너를 인도해준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그리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난 후,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어느 젊은 엄마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의 유치원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옮긴 유치원도 마음에 들지 않아 또 다시 옮기다보니 세 번씩이나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세 번째 옮긴 유치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네 번째로 옮기려고 하자,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또 다른 유치원으로 가는 거야?” “응~” “그럼 선생님도 또 바뀌는 거야?” “응~” 그러자 아이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엄마는 언제 바뀌는 거야?” 엄마는 잠시 당황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건 아빠한테 물어봐.” 현대인들은 쉽게 결정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이의 유치원도 쉽게 바꾸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구도 쉽게 바꾸고,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집도 쉽게 바꿉니다. 실용주의가 판을 치고 치다보니 배우자도 쉽게 바꿉니다. 그러나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90%가 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90% 이상이 현재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고 싶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조사 결과를 듣고 어떤 목사님이 예배도중 교인들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세요?”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데 어떤 할머니 한분이 손을 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할머니, 할머니는 그렇게 할아버지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한지 아십니까? “다… 그놈이 그놈이여… 길들여진 놈이 아무래도 낫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또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속으로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잘못하면 제가 괜한 질문을 해서 오늘 저녁 굶는 남편들이 많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꾼다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학교를 바꾸고, 가구를 바꾸고, 집을 바꾸고, 남편과 아내를 바꾸었다 할지라도 다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바꾸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는 기준을 ‘내 마음에 맞는가, 내 마음에 맞지 않는가’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인가’를 그 어떠한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우리를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돈 모엔(Don Moen)’이라는 찬양 사역자의 간증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는 어느 늦은 밤, 처제 부부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차에는 네 명의 어린 조카들이 타고 있었는데, 곧 9살이 될 제레미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다른 세 아이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동서인 ‘Craig’에게 어떠한 위안의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Craig은 교회학교 선생님이었고 말씀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던 돈 모엔은 비행기 안에서 이사야서 43장을 읽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읽다가 주님께서 어떻게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들어 가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기초로 한 노랫말을 썼는데, 그것이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라는 찬양입니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주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사랑과 힘 베푸시며 인도하시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주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사랑과 힘 베푸시며 인도하시네, 인도하시네.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날 인도해. 사막에 강 만드신 것 보라. 하늘과 땅 변해도 주의 말씀 영원히 내 삶 속에 새 일을 행하리.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주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사랑과 힘 베푸시며 인도하시네, 인도하시네.“ 이 찬양 가사에서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라는 부분과 '항상 함께 하시네'라는 이 두 부분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코칭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은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대로 따르고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과 가사를 깊이 생각하며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라는 찬양을 부르겠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 31장 1~24절 / 이종철목사
이 시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5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최후의 고백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은 죽음을 앞둔 성도들의 모범적인 고백이 되어 KJV, NIV, RSV 등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으로 번역하고 있다. 스데반도 동일한 고백을 하며 숨을 거두었다(행7:59). 루터도 이 고백을 하며 숨을 거두었으며, 종교개혁자 후스도 화형대에서 마지막 고백으로 이 구절을 낭송하며 순교하였다.
당신이 생을 마칠 때의 마지막 고백은 무엇인가? 우리의 마지막 고백도 이 고백이 되도록 하자. 잘 사는 것도 문제지만 잘 죽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well-dying 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모두들 건강하게 살다가 홀연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잠자듯이 죽는 것을 소원한다. 그러나 어디 우리 뜻하는 대로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좀 일찍 부르실 때도 있고, 고통 가운데 부르심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든지 간에 최후의 고백은 이 말씀이 되도록 하자.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죽음을 의연히 맞는 것도 필요하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암이며 여러 염려 중 건강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될수록 삶에 대한 애착도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평온한 임종을 보기가 힘들다. 죽기 싫고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을 만드신 분도 여호와시요, 마지막 다시 우리 영혼을 취하실 분도 여호와시다. 그분이 취하시겠다고 하면 기꺼이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고백이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최후에 이 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15절과 같은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이는 곧 “내 운명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는 고백이다. 내가 살고 죽으며 내 생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오직 주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뜻이다. 주께서 보호하시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우리의 시대에 수행해야 될 주님의 사명이 있다면 어떤 위협이나 장애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성취하기 전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내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면 그 또한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겨진 숙제가 많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산적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고 떠나야 한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 감독자이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의 역할만 맡았을 뿐이다. 그 역할이 다하면 우리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평안히 죽을 수 있다.
시인은 심한 질병이나 문둥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 권좌에서 물러나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비참한 운명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적들의 포위망에 갇혀 전혀 무기력한 신세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절박한 심정을 9-13절에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9). 하도 신경 쓰다 보니 시력이 약화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상하고 몸은 연약해졌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햇수)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근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약해졌으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10). 매일매일이 슬픔과 탄식의 세월이다.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병을 죄에 대한 심판이라 생각하였고, 시인은 이 죄 때문에 근육과 뼈마저 부슬부슬 쇠약해졌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혐오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11) 이웃은 혐오하고 친구마저 피한다. 이 시인은 얼마나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가? 그는 문둥병에 걸렸나? 채무에 시달리는 빚쟁이가 되었나? 아니면 가인처럼 살인자의 표를 받고 유리방황하고 있나?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깨진 그릇)와 같으니이다”(12) 자기가 마치 죽은 자처럼 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13) 사방에 적들로 둘러 쌓여 있다. 어디에도 자신이 의지할 곳이 없는 형편이다.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시인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 충분히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운명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 여기 ‘그러하여도’가 중요하다. 내가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갈지라도, 내가 아주 비참한 형편에 처했을지라도, 내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외면을 당한다하여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결의이다. 시인이 이런 환난 중에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고통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7)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면 되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이 내 고통을 알고 계신데 염려할 게 무엇인가? 이 시인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포위당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놀라운 은총)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21-22)
시인은 주님의 은혜를 미리 쌓아두신 은혜라고 표현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19) 쌓아두신 은혜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 주님은 우리에게 주실 복을 미리 쌓아두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다.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잠시 낮추시고 연단시키시는 것뿐이다. 한 쪽 손에 들린 주님의 막대기만 바라보지 말고 다른 쪽 손으로 한 아름 안고 있는 은혜의 보따리를 바라보라. 둘째, 주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자가 다시 정상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은혜의 깊이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병상에 매여 있던 자가 자기 발로 걷고 자기 손으로 음식을 먹을 때의 기쁨을 정상인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죄인 중 괴수였다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자다가도 깨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던고 하며 감격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기막힌 은혜를 받은 시인은 세상을 향하여 외친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3) 동일한 연약함 가운데 빠져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시인은 이렇게 격려한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나의 영을 주의 손에
시 31장 1~8절 / 이삼규목사(낙양교회)
본 시편의 저자는 표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다윗’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받아 광야를 전전하며 도망 다니던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몇몇 귀절들은 그가 마온 광야에
있는 그일라로 도망했던 사건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삼상 23: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그때 사울이 그곳으로 추격해 왔고 그는 다시 십 광야로 피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 시편이 그 당시에 쓰여 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본시편이 다윗이 박해
받던 시절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했고 기도하게 했으며 더욱더 굳건한 신앙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1. 견고한 바위, 구원하는 산성(1-3)
1)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1절)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께 피한다’는 표현은 다윗의 시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사상입니다.
시 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대개 어디로 피합니까? 가장 믿을 수 있고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되는 곳으로 피할 것입니다. 대개는 친구의 집이나 부모님의 집으로 피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께 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 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여기에서 ‘피하였다’라는 말은 ‘하사’라는 말인데 ‘도피하다, 피신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사’라는 말은 폭풍우나 산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하는 것에 사용된 말입니다.
사 4:6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사 25: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욥 24:8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시 104:18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주께 피하오니’라는 말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 중에는 피할 곳에 없어서 하나님께 피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패배의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의로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환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삼하 22:3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히 건지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분 정도입니다. 그 시간
이 지나면 건져내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마시거나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약 보름 정도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많은 양
식을 가져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열이 펄펄 날 때 바로 그 시간에 열을 떨어뜨려야지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아이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병원 응급실이 필요한 것
입니다.
시편 저자는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실 뿐만 아니라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라는 말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넘볼 수 없는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택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유일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
리니
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3절)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시련과 고통의 오랜 기간을 통하여 시인은 인간의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였습
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더욱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을 절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
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23:2), 죽는 순간 까지도 우리를 인
도하십니다.
시 48: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기 위해 우리를 지도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출 18: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2. 나의 산성(4-5)
1)그들이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4절)
지금 우리는 악한 자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악한 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때 이 올무를 풀어달라고 비밀스럽게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
다. 그러면 원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결국 원수들은 다 잡은 먹이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붙잡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계략을 꾸밉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원수들이 벌이는 음모로 인하여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한 비밀의 책략에서 벗어날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의 책사였던 아히도벨의 계략이 무서웠습니다. 압살롬이 그 책략대로만 했더라면 다윗은 꼼짝 못하고 아들에게 잡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은 다윗의 친구인 후새를 통해서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력화시키고 말았습니다. 후새의 설득을 듣고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말을 따랐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인간들이 아무리 좋은 계략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다가와도 그들은 결국 무력화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궤계
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2)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
이 구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시편 저자인 다윗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였습니다. 신실한 자들은 자신의 삶 즉 몸과 영혼을 여호와께서 돌보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손’입
니다. ‘손’은 ‘야드’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부탁한다’는 말은 ‘맡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의 참된 근원이 하나님이신 만큼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
께 맡길 때에만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성도들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신앙인의 바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생명을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요 거두어 가시는 분
도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음은 두렵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두렵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또한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
나 신실한 분이신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죽을 수 있을 만한 분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끝에는 “죽을 것인가? 목숨을 지킬 것인가?”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
다. 그때 우리가 비굴하게 살려고 하면 너무나도 신앙이 비참하고 보잘것없어집니다. 그때 ‘종아, 내 생명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님을 의지할 것이며 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
긴다.’라고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5절).
우리가 하나님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속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6-8)
1)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6절)
우리의 싸움은 우상숭배자들과의 싸움입니다. ‘허탄한 거짓’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번 부흥회 때 가니까 강사님이 1번, 2번, 3번으로 사람들을 나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번은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입니다. 2번은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즉 교인입니다. 3번은 성령 충만
함을 받은 자들도 즉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상’을 ‘아이돌’이라고 합니다. 십대들 가수 가운데 잘 나가는 가수들을 아이돌이라고 부릅니다. 십대들의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의 표현
입니다. 돈을 숭배하는 자는 돈의 신을 만들고, 성을 숭배하는 사람은 성의 신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욕망들이 우리를 즐겁게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우상은 점점 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이런 욕망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욕망을 미화하는지 모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장 두려워합니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우상들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부수기 때문입니다.
2)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영혼을 아셨기 때문이다(7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런 영적 전쟁을 치르는 용사들에게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절대로 적에게 내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을 아시며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기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위기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또 어떤 방법
으로 우리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이기게 하실지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3)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8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고 지켜보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은 마치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
셨음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하 22:20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시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견고한 바위이시며 구원하는 산성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인자하신 하나님께 맡기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
시 31장 / 김종택목사(동토마햇빛교회)
사랑하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길을 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맛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께서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인생길을 가게 된다면 여러분은 안전하고도 평화롭고도 기쁨에 겨워 평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손을 잡고 가면 마귀도 접근을 못하고 악인들도 여러분을 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시편 31편을 통하여 다윗은 자기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15절).”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원수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습니다. “내 원수와 나를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15절).”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자들이 되시고 절대 마귀의 수중에 떨어져 비참한 생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마귀의 손에 떨어집니까?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피하지 않는 자가 마귀의 손에 잡히게 됩니다. 마귀는 세상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여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마치 그물을 쳐놓고 물고기를 그물 쪽으로 몰아 잡는 것처럼 마귀는 사람들에게 극한 시련을 주어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마귀의 힘과 권세에 굴복하게 됩니다. 환난과 시련이 닥칠 때 사람들은 귀신들린 점쟁이에게 가서 장래의 일을 물어보기도 하고, 산신령이나 나무에게 도와달라며 절을 하기도 하고, 마귀의 권세하에 있는 불교 중들에게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이러한 짓들을 하는 자들은 다 마귀의 종이 됩니다. 실제로 마귀 혹은 귀신이 사람을 무당으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마귀가 만만하게 보이는 자에게 자꾸 집안에 환난을 주고 병이 들게 만듭니다. 계속 마귀가 어떤 사람을 못살게 굴면 하는 수 없이 그 자는 작두를 타고 신내림 굿을 하여 무당이 됩니다. 그래서 평생 그 마귀와 귀신의 꼭두각시 노릇하다 생을 마치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여러분, 마귀나 귀신이 집안에 환난을 주고 병을 일으켜도 절대 그 마귀에게 굴복하여 그 마귀를 상전으로 모시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험환난이 오면 하나님께 피하여 그분의 도움을 받아 마귀와 귀신을 몰아내고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어려움이 닥치면 여호와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1절).” 환난과 시험 중에 있는 자가 하나님께 피해 도움을 청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자를 책임져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과 악인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십니다. 그분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지면 징계를 하기도 하시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반드시 용서해주시고 그 자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악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연약한 자들을 지켜 보호하십니다. 다윗이 악인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해주시니 다윗의 신앙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는 나의 반석(바위)이시고 산성(山城)이십니다(3절).” 높은 산의 견고한 성은 그 누구도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곳으로 피해 가는 자는 맘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산성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 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대적하여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마귀 할아버지라도 그렇게 못합니다. 하물며 악한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을 공격하여 그분께 피해 있는 자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여러분 환난 시험이 닥치면 절대 마귀에게 가지 마시고 하나님께 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귀가 여러분을 도와 그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이미 당신은 마귀의 종이 되었으니 당신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의인들을 잡아죽이려 그물을 치고(4절), 허탄한 거짓을 말하며(6절), 의인들에게 독설을 내뱉으며(11절), 떼지어 의인을 비방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13절), 의인들을 핍박하고(15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고(18절), 악한 꾀를 내어 의인을 해하려 합니다(20절). 여러분, 마귀의 종이 되어 저렇게 악한 짓을 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자를 저렇게 핍박하는 자는 100% 마귀의 하수인이고, 이 자는 나중에 마귀가 지옥불에 떨어질 때 함께 그곳에 던져지게 됩니다. 마귀와 하나님은 원수지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괜히 미워하며 핍박하는 자는 그 마음에 마귀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어서 그러니 즉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그 더러운 마귀와 귀신들을 다 내쫓고 진리 가운데 살며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며 있겠지요.
과연 하나님께 피하면 귀신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아직도 의심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성경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앞에 귀신들이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잘 나와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자코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막1:23-26)." 지금까지 마귀와 귀신을 상전으로 모시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자들은 뒷일 걱정하지 마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피하면 마귀나 귀신이 여러분을 해꼬지 하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강한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요? 다윗의 말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5절).”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생명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삼은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혹자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을 큰 손해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온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모든 생물들은 원래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그 창조 세계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워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살 때 아름답고 조화를 이룹니다. 인간이 인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가 진정한 기독교인이고, 그러한 진정한 기독교인은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리고, 진리 가운데 살며, 영생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영생까지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삽니다. 능력있고 선한 남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주고 그 남편의 사랑과 돌봄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게 손해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는 절대 손해보지 않습니다. 나보다 강한 악인들이 세상에 많으나 내가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나는 그분의 도구가 되어 악인들과 겨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피해 자신의 영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그분을 의지할 때(6절) 그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의로운 길과 진리의 길을 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고(7절),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16절),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었고(17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절).” 여기서 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어기는 것을 큰 죄로 여기어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각오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높으심과 귀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당신께 경배드리는 자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고, 악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의인들에게 알게 하시고, 의인이 부르짖을 때 그 기도도 들어주시고, 기적도 베풀어주시고, 때로는 은밀한 곳에 숨겨주시고, 의인들의 모든 일을 관심을 가지시고 살피십니다.
다윗은 모든 성도들이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23절).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만과 허탄한 마음을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그분께 드리며, 맡겨주신 일을 성실히 완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공경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죄와 악과 거짓을 멀리하고 악인들과 한 패가 되면 안됩니다. 또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우상을 경쟁관계에 있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할 때 그분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자기 것이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합니다(21절). 악인들의 잔꾀를 다 물리치시고, 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시니 우리는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미천한 인간들에게 인자와 자비를 베푸시고, 강하고 의로운 팔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붙드시니 우리는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셔서 거룩한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의 길을 지도해 주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시니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있으면 안됩니다. 악인들이 패배하여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있을 때 우리는 입을 크게 벌려 큰 소리로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바라는 우리들이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고 합니다(24절). 우리가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담대히 그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악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나 귀신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큰 권세가 있어서 그 이름으로 마귀를 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세주 예수께서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원히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오른팔이 여러분을 굳세게 붙들어 여러분이 범사에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
시 31장 1~23절 / 유기성목사(선한목자교회)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썩어 없어질 우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시니, 나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며, 내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고, 내 발을 평탄한 곳에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나를 비난합니다. 이웃 사람들도 나를 혐오하고, 친구들마저도 나를 끔찍한 것 보듯 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방에서 협박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렸으니, 내 원수에게서, 내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환한 얼굴로 주님의 종을 비추어 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히려 악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서, 잠잠하게 해주십시오. 오만한 자세로, 경멸하는 태도로, 의로운 사람을 거슬러서 함부로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의 입을 막아 주십시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려고 주님께서 마련해 두신 복이 어찌 그리도 큰지요? 주님께서는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복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주님의 날개 그늘에 숨기시어 거짓말을 지어 헐뜯는 무리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을 안전한 곳에 감추시어 말다툼하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당했을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기에,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포위되었을 그 때, 나는 놀란 나머지 "내가 이제 주님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하며 좌절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내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24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과의 전쟁이 단 6일 만에 끝났다고 해서 사람들은‘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세계는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은 오일머니로 엄청난 부를 축척했고 어마어마한 군사 장비들을 보유한 상태여서 군사력이나 군인의 수나 경제력 등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스라엘군은 이렇게 성명을 발표합니다.“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최신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이다.”이 이야기를 듣고 전 세계 군사 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 당국은 극비리에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섰지만, 어떠한 최신 무기도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6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물리치고 성지인 예루살렘을 다시 찾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승리를 거둔 후 그 비밀 병기를 밝혔습니다. 그 비밀 병기는 바로 그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누구나 실제 전쟁에서 이처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 믿는 경우에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이나 직장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담대하게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까?
시편 설교는 얼핏 보면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이 시편을 언제 다 설교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한편 한편 강해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설교자나 철학자나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목동이었고 장군이었고 왕이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은 어느 누구보다도 바쁘고 문제가 많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믿는 것인지 시편 31편에 나옵니다.
시편 31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다윗은 얼마나 울었는지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11절에는 이웃도 친구도 자기를 버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13절에서는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7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7절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커도 하나님 보다 더 크겠습니까? 다윗은 수도원이나 목사의 서재나 학교 도서관에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이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미친 사람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빈정거릴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이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계속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실재로 피난처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시 31:1-4 주님,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 내가 피하여 숨을 수 있는 바위, 나를 구원하실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 ... ... 주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믿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알튼 링크 레터라는 미국의 천재가 있습니다. 그는 박사 학위가 열 개나 되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고문이기도 했고 세계 관광 명소인 디즈니랜드의 모든 설계를 계획한 분입니다. 성공자, 실력자가 된 그는 어릴 때부터 믿던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대통령도 그를 귀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대해 주니, 그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14세 된 딸이 가출하더니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살게요.' 끔찍하게도 이것은 자신의 인생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딸의 시체를 안고 그는 후회했습니다. '내가 교회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내 딸을 데리고 교회만 나갔어도 내 딸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더니, 내 생명 같은 내 딸이 이렇게 자살했구나. 내 인생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그는 그제서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어설프게 믿지 말고, 정말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시편 31편을 한 절 한 절 다 살펴보고 싶지만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이런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라고 고백하십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님 한 분 으로 충분합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결코 극단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 영성디렉터로 오신 한 목사님께서 고백의 간증을 하셨습니다. 성찬식 때,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마음은 무거운데 처음에는 특별한 죄가 생각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한 가지를 드러내시더랍니다. 소박한 욕심이 하나 있었답니다. 담임 목회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는데,“그저 가족들 먹고 살고, 아이들 고등학교까지는 공부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지원만은 받을 수 있는 교회 정도는 허락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소박한 욕심은 욕심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목사도 남편이고 아버지인데, 이 정도야 당연히 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설 때, 주님은 그것 조차 내려놓으라 하셨답니다. 그 때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아직 주님을 온전히 믿고 맡기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눈물로“주여, 백지 위임을 합니다.”고백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너무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아직 하나님을 대면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구할 것이 없어집니다. 정말 다 맡기게 되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믿어집니다.
다윗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4절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속으로 생각하고 웅얼거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하고 선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프랜시스의 기도가 있습니다. 너무 잘 알아서 식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주간 이 기도문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불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에서 저는 성 프랜시스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진실로 행복한 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왕 예수님을 믿었으면 이렇게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6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 주님의 환한 얼굴로 주님의 종을 비추어 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환한 얼굴로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결같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믿음은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움이 크고 대적이 많다 하더라도 다윗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도 휘청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22절 내가 포위되었을 그 때, 나는 놀란 나머지 ‘내가 이제 주님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하며 좌절도 했지만 ...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시는구나’ 하고 생각되는 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순간 다윗의 그 강한 믿음도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22절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내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거나, 마음이 강팍해지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기쁨을 되찾은 것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 영성수련회에서 참석자들의 깊은 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가 다 불 속에 있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통곡소리,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난 후, 정말 모든 이들에게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어린아이 같아졌습니다. 불편한 것이 많은데도 다들 천국에서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말할 수 없는 영적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진정 믿었기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시련 중에도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23절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
24절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
여러분,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고, 병들어 고통을 당하십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져 고통 받는 분들이 있습니까? 실패로 인하여 좌절하신 분이 있습니까? 죄책감으로 무너진 분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우리는 처지도 시대도 사람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윗이 믿은 하나님이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다윗이 믿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믿음으로 살지 못했지만 다윗과 같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무엇 보다도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18세기의 스코틀랜드 제임스 프레이저 목사님의 사모님은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목사님이 저녁에 사택에 돌아오시면 사모님이 있는 방으로 가지 않고 곧장 서재로 갔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모님의 온갖 악담을 고스란히 들어야 하고 저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모님은 그것이 미워서 서재 램프에 기름을 넣지 않고 난로에 석탄을 넣지 않았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깜깜한 서재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움추렸다 하면서 서재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밤에 그가 얼마나 벽을 쳐댔든지 벽 한쪽이 움푹 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프레이저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들과 대화하는 중에 대화의 주제가 아내였는데, 목사님들이 아내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 날 프레이져 목사님도 사모님 자랑을 하였답니다.“제 아내는 여러분들의 아내보다 나에게 훨씬 잘합니다.”사모님이 악처로 소문이 나 있기에 다른 목사님들이 의아해 하였는데, 프레이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제 아내는 제가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거든요. 그것은 아무 아내나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프레이저 목사님이 죠크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 하나님을 믿었으며, 예수님께서 그에게 늘 기쁨을 주셨고,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기가막힌 기쁨을 주십니다.
다윗의 시들을 훝어보면서 처음에는 언제 이 시편을 다 설교하나 했지만 이제는 정말 대단하다는 감동이 옵니다! 우리의 시 한편이 성경에 실려도 말할 수 없이 영광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 많은 시편이 성경에 실렸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한 두 번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환경에 눌리고 사람에게 시달리는 삶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면 어떻게 살까?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