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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에서
군인의 길을 가고자 한 것 뿐인데
마치 독립군을 사냥 한 것처럼 호도하고 왜곡하고
욕해대는 미친개떼들을 보면 화가 치밉니다.
박사모님들이 아래 기사들을 여기저기 많이 퍼트려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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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와 朴正熙 대통령
[간도를 되찾자]
박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안목과 비젼에 있어서
차원이 전혀 다른 지도자이셨읍니다.
간도를 찾기위해서 중국과의 전쟁까지도 염두에 두셨을 겁니다.
위대한 박정희대통령
"30년 전 국회의 간도자료집 발간은
통일 이후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에 대비한 첫 국책사업이었다."
1975년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자료집의 정식명칭은 '간도영유권관계문서발췌'다.
1867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작성된 일제의 기밀문서 가운데
간도영유권 관련 문서들의 번역본과 원문 영인본이 함께 수록돼 있다.
자료집 뒷부분에는 제한된 분량 때문에 미처 싣지 못한 기밀문서 목록도 들어 있다.
이 자료집 한쪽에는 '일본 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일제 수뇌부의 핵심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의 목차만 봐도
당시 일제의 식민지 경영과 대륙 침략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통감부서기관이 외무성정무국장에게 보낸 공문에는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보관하던 문서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다.
아울러 국회의 간도자료집은
대한제국의 간도 정책이 어떠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아직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대한제국의 공문서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도자료집 발간 사업은 당시 국회도서관장이던 강주진 박사의 제안에 따라 시작됐다.
일제의 기밀문서 복사본이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음을 알게 된 강 박사는
미국 국회도서관의 협조를 얻으면 필름을 입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 의장은 다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필요한 예산을 배정받고 발간 사업을 추진한다.
일제 기밀문서에서 발췌 수록 국회도서관에 입수된 마이크로 필름은
모두 51책 분량으로 상당한 양이었다.
할당된 예산으로는 전체를 책으로 엮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자료의 발췌작업이 시작됐다.
발췌작업은 당시 통일원 기획관리실장이자 간도연구가로 알려져 있던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이 맡았다.
노 전 총장은 3개월 남짓 자료를 선별했다.
공문과 각종 자료에 제목을 달고 연대별-종류별로 분류해서 국회도서관에 다시 이관했다.
이런 정황은 정 의장이 쓴 자료집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정 의장은 자료집 발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예산을 배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김용태 국회운영위원장도 "정부의 예비비에서 예산이 할애됐다"고 적고 있다.
노 전 총장은 "박 대통령이나 정 의장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
누구보다 간도 문제에 관심이 컸을 것"이라며
"하지만 단순히 최고통치권자의 관심 때문에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고 국회 산하기관인 국회도서관이 발간 주체였다는 것은
이 사업이 국책 사업으로 추진됐음을 말해준다.
"통일되면 국경 문제가 이슈로 부상"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도
자료집 발간 사업에 크게 작용했다.
국민들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희망이 가득했다.
이런 분위기는 곧바로 통일 이후 닥칠 문제에 대한
전면 검토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노 전 총장의 기억에 의하면 자료의 입수에서 문서 발췌까지 걸린 시간은 2년 정도다.
시기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사회 분위기가
자료집 ?煞@? 어느 정도 견인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산이 정부의 예비비에서 책정됐다는 점도 필요성을 느껴
급박하게 추진한 사업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첫 국책사업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자료집 서문에는 "우리의 당면 과업은 조국의 통일이지만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국경문제가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간도 문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철저히 연구하는 것은
국가적인 중대사"라는 내용이 나온다.
국제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간도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준비가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부분이다.
남북한의 화해 무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있었지만
통일 이후 직면하게 될 영토와 국경문제를 고민하고 자료집 발간을 통해
그때를 대비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국회자료집 5개년 계획으로 추진 〈간도영유권관계문서발췌〉는
비매품으로 한정된 수량만 발간돼 간도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도 소수만 소장하고 있다.
얼마나 만들어 어떻게 배포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 파악이 쉽지 않다.
백산학회 육낙현 총무는
"백산학회가 소장하고 있는 간도자료집은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것"이라며
"그래도 국회에서 발간한 것이니 500부 이상은 배포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자료집 발간에 참여했던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은
"간도자료집 발간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는 모른다"면서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예산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 자료를 담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자료를 발췌할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과
자료집이 소량으로 발간됐음을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다.
국회자료집 발간 사업은 1974년 9월,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됐다.
1집은 간도영유권과 관련한 문서를 모으고,
2집은 독립운동사 자료를 정리해 발간한다는 계획이었다.
간도자료집의 발간에 관여한 학자는
김용덕-이기백-노계현-윤병석 박사와 지도를 제공한 이종학 박사 등 5명이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신기석 박사는 원고의 해제와 교열을 맡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노계현-윤병석 박사 두 명이다.
이 가운데 간도자료집 작업에 참여한 것은 노 전 총장이 유일하다.
윤병석 박사는 간도자료집 이후에 만들어진 독립운동자료집 발간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생시절 박정희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전경숙(全慶淑)의 말
박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모친"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주셨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였다. 5학년 20명과 2학년40명을 한교실에서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 천정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완비하여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한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너희들도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노래와 나팔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악대와 합창반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을운동회 때는 박 선생이 기마전, 기둥 넘기기, 공바구니 터뜨리기, 텀블링을 지도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소풍 때 문경새재를 갔을 적에는 제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생님의 별명은<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박정희 교사는 사랑과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 항상 조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울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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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작년에 노무현이 공산주의자 여운형에게 서품하였을 때 이것은 그의 사상을 의심케 하거나 적어도 한국사에 대한 그의 지식을 의심케 한다. 조선 청년은 황군에 입대하라고 여운형이 연설한 것이 독립운동이었는가? 그리고 해방 직후 건준의 이름으로 상해임정의 귀국을 막은 것이 독립운동이었는가? 상해임정에 정통성을 두는 대한민국 정부의 시각에서 상해임정을 대적하였던 여운형은 독립운동 방해자였다고 보는 시각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해방 직후 왜 여운형은 김구 선생을 거세하려 하였을까? 여운형이 김구 선생을 대권 경쟁자로 여겼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러나, 건준은 상해임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여운형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에 상해임정의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작년에 독립운동가로 서품한 여운형은 상해임정을 독립운동 단체로서 인정치 아니하고, 귀국 및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였으며 그러한 주장이 대세로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해방정국의 대세는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논리였는데, 바로 이 논리가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을 인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중국에서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내전은 독립군끼리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은 중공군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상해임정의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동맹군은 쟝개석 총통의 국민당 군대였으며, 여운형의 공산당 당론에서는 중공군이 동맹군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부가 대만을 배신할 때마다 대만은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한 국민당 노력을 떠올리며 섭섭해 한다. 그리고, 쟝개석 총통의 도움 없이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였음이 사실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끈질긴 대미 외교의 성과로 우리 민족 독립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거론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승만 박사가 제출한 안건을 정상회담 탁자에 제출하여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쟝개석 총통이 함께 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다른 민족의 경우 독립운동의 증거가 분명한데 우리 민족에는 그런 증거가 없었다. 오늘날 북한과 남한 좌익은 중국인의 부하였던 김일성이 소속한 마적단이 시골 경찰 습격하여 4명 살해한 것을 가지고 과대 광고하였으나, 마적단이 조선인 동포에게 끼친 해악은 그보다 엄청나게 더 큰 것이었기에 엄밀한 의미의 독립운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4명의 숫자는 1980년 5월 15일 유시민이 선동한 과격시위대가 오후 1시 30분에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남대문 앞에서 희생시킨 순경들의 숫자보다도 적으며, 역시 김대중계 인물이었던 윤상원이 광주에서 선동한 폭력 시위대가 동년 5월 19일 버스로 깔아 희생시킨 경찰의 숫자를 밑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당시 한국 민족은 영국 처칠 수상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민족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쟝개석 총통이 우리 민족 독립은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면 우리 민족과 쟝개석 총통은 어떤 관계였는가? 당시 3명의 정상 중에서는 쟝개석 총통이 아시아 역사에 가장 정통하였으며, 광복군과 국민당 군대와의 동맹군 관계는 쟝개석 총통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에 대한 보증을 설 근거가 되었다. 광복군은 약한 군대였기에 우리 민족 해방과 독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병력도 1943년에 100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 본토에서 오는 군자금이 없어서 국민당 군대와의 동맹군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이 쟝개석 총통에게는 상해임정의 역할을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확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2차대전 종전은 중국에서는 내전의 시작을 의미하였으며, 공산진영과 자유진영간의 내전이었던 동족 상잔은 중국의 동포간에 먼저 시작될 뻔하였다. 팔로군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명령을 따랐으며, 팔로군의 적군 국민당 군대의 동맹군 광복군은 팔로군에게 적군으로 간주되었다. 본토에서 여운형의 건준이 세우려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였는데, 건준이 중국 공산당의 적군인 광복군을 승인하는 것은 그가 중국 공산당 동지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세계는 좌우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 세계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 초창기에 모 인사가 광복군 박정희의 활약상을 저술한 책을 대통령께 선사하였는데, 박대통령은 몹시 역정을 내며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독립운동 경력이 출세의 프레미엄이었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평소의 과학도의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던 박대통령이 그 책의 과장된 내용에 화를 내셨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일로 박정희의 광복군 활동상은 감히 아무도 언급할 수 없었으며 역사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또 다른 비밀 때문에 우리는 광복군 박정희를 다시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자마자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이 땅을 치며 한탄하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미스테리이다. 평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어른이 조국 해방 소식에 기뻐 춤을 추신 것이 아니라, 땅을 치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이 그의 눈물의 이유이다. 이것은 미스테리이다. 해방의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상해임정은 초상집처럼 슬픈 분위기에 쌓였다. 그리고 바로 이 미스테리의 한 가운데 박정희라는 인물이 있다.
여태껏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6월 29일에 처음으로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또 하나의 상륙작전 준비가 1945년 8월에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 천황 항복 선언 소식에 많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이것은 일본 군부에는 뜻밖의 천황의 리더십이었다. 1946년 동경전범재판 때 천황측의 논리는 2차대전 당시 일본 왕실은 괴뢰정부 왕실이었으며, 실권은 군부에 있었고, 천황은 군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황이 괴뢰정부 왕실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었으며, 연합국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일본이 쉽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군부가 항복할 가능성은 없었으나, 일단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945년 4월 하순 독일의 항복 직후 연합국 지휘관들은 태평양 전쟁은 아직 그 끝이 먼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지상군의 위력을 일본과 연합국 모두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전과 달리 지상전에서는 미국이 몹시 불리하였다. 지상전을 위해 지상군을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수송할 방법이 없었으며, 또 그런 느린 병력 수송으로 막강한 일본군 사단들과 전투를 치룬다는 것은 몹시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병대 상륙 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중국 본토 상륙을 위한 파트너로 광복군은 선택하였었다. 그리고 8월 중에 광복군과 미해병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은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된 것을 원통해 하였으며, 그 날의 상해임정의 초상집 분위기처럼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은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된 것을 원통해 하였으며, 그 날의 상해임정의 초상집 분위기처럼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즈음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광복군 중대장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상해임정은 외교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는 광복군의 활동에 김구 선생이 정치 생명을 걸었었다. 그래서 그 해에는 광복군이 상해임정의 전부였다. 해방 조국에서 상해임정이 건국의 꿈을 실현할 것이냐 아니면 국내파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몰락하느냐가 광복군에 달려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에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략하여 만주 사회가 급격히 붕괴되자 상해임정은 만주 인근 지역으로 모병단을 보내었다. 중국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도 병력 규모를 늘리기 위한 모병을 하였으므로 만주의 조선인들, 특히 조선인 장교들이나 군인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박정희의 리더십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전까지 박정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주국 군관 박정희의 광복군 입대는 그곳 조선인들의 광복군 지지와 더불어 조선의용군이 광복군을 공격하는 것을 예방하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가 해방 전에도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항간의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설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들은 만주의 동포들은 1945년 8월 중순부터서야 광복군 명칭을 처음으로 들었으므로 그 이전에 광복군과 박정희 사이에 연락이 있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복군 비밀요원 설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가 유망함을 보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실제로 박정희가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여행한 시점, 그리고 김구 선생이 광복군을 창군을 창군과 시점과 일치하기에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작전장교였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높인다. 박정희는 만주국 보병8단 작전참모였던 박정희는 유능한 작전장교였다. 국군 하급장교 시절에 북한군 남침 예정을 그 시기와 침투 경로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경제 전쟁에서의 박정희의 전략 때문에 미국 학계는 박정희를 우러러본다. 한국의 포항이 미국의 디트로이트를 일거에 점령하였다. 국제시장에서 철강 수요가 줄어들 것을 모두가 예측하고 있었던 때에 박정희는 철강, 전자, 조선산업의 붐을 정확히 예측하였으며, 한국인도 국산품을 안 쓰던 시대에 한국산은 만드는 대로 세계시장에서 날개돋힌 듯 팔리게 하였다.
박정희의 이런 전략에 자기 인생을 던진 이가 바로 박태준이었다. 만약 박정희 비판 세력으로 초등학교 출신이었던 정승화가 한국군 최고 지휘관이 될 수 있었으며, 일본 학도병 출신이었던 김재규가 권력 2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면 명문대 출신 박태준의 군부 내 출세는 보장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박태준더러 군복을 벗고 포항 모래사장에 가라고 하였다. 돈 한 푼 안주고 필요한 것은 미국에 가서 빌려다가 제철소를 지으라고 하였다. 미국 가니 정계와 재계가 한결같이 철강산업은 전망이 없으니 하지 말라고 막았다. 미국 정계와 재계 전문가들이 모두 이렇게 말하는 데도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략에 자기 몸을 던졌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수학 천재 박태준의 수학 스승은 박정희였다. 해방 조국 육사에서 박태준의 수학 교관은 박정희였으며, 박정희는 생도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미분, 적분 문제들을 척척 푸는 박태준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박태준은 박정희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셨다. 그래서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포항 모래사장으로 가서 포항제철을 지으라고, 그것도 돈 한 푼 안 주고 지으라고 했을 때 박태준은 자신의 영원한 스승 박정희의 명령에 자기 목숨을 내던졌다. 이것은 자기편 출세시키기 위해 쓸데없는 위원회들을 만들어 국가 예산을 허랑방탕 탕진시키고, 유전비리, 행담도 비리를 일으키는 노무현 식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패러다임이었다.
자,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대륙의 일본군 동향 정보를 광복군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더욱이 8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었던 미해병대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김구 선생은 일본군 정보를 어디서 입수하였을까? 첩보 없는 광복군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첩보는 일본군 주둔 위치 지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는 박정희 뿐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작전참모였기에, 그리고 지리학과 지도와 측량 분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였기에 그의 만주국 보병8단 사무실에는 팔로군, 만주군, 일본군, 러시아군 등 각국 군대의 진 배치도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편지와 증언이 박정희의 독립운동설을 뒷받침한다. 일년 전에 오마이뉴스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보도하기 위해 특집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기자들을 대거 그의 고향에 보냈다. 그러나 증언은 뜻밖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뿐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인들 몰래 학생들에게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으며,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의 긍지를 일깨워주었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면, 일본인 지인들은 박정희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학하였으니 일본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소리이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 있다면 진학안할 이가 누가 있었는가? 조선인이 검사가 되면 조선인이 축하해 주던 시대였기에 김재규 아버지는 김재규를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본에 가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있었다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완전 평등 대우였다. 그러나, 식민지화 초기에 왕족과 귀족에게 일본 육사 진학 특전을 베푼 적은 있었을 뿐 아무에게나 일본 육사 문이 열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왕족이었는가? 아니다. 더구나 황국신민교육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찍혀있던 자였는데.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겠는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만주국 군관요원으로서 만주국 황제의 추천으로 위탁교육을 2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 본 박정희는 누구였는가? 금강산에는 박정희가 대구사범 시절 수학여행 때 돌에 새긴 시조가 있는데, 독립운동을 위한 기개가 담긴 명문이다. 박정희는 작사 작곡을 하는 음악가였으며, 어느 화가 못지 않은 미술 실력을 지녔으며, 그의 서예 작품은 서예가들의 세계에서 일품이다. 그리고 수학에도 천재였던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꼴찌를 유지하였다. 남들은 비웃었겠지만 그 이유를 대구사범 교련 교관이었던 일본이 아리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교과과정이 황국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백지 답안으로 항거하였다.
만주국 군관학교가 본토의 조선인이면 아무나 지원할 수 있었던 학교가 아니라, 박정희의 문경 교사 시절 먼저 관동군 대좌로 부임하였던 아리카와 대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하라는 유언을 편지로 남겼다. 박정희가 만殮별徨閨?예과를 마칠 무렵 아리카와 대좌는 남태평양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로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이 짧은 유언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적 군인은 이런 편지를 쓸 줄 모른다. 이것은 군인 정신에 관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이는 아리카와 대좌였다. 그리고, 만주국이 아닌 조선을 위한 군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에 해방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는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뛰어든 것을 알고 아리카와 대좌는 자기 제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독립운동을 위해 준비할 때임을 유서로 남겼다.
그러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1960년대는 이것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많은 비밀을 묻어 두었다. 본래 한일회담이 기술 이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합의였으므로 일본 기술을 최대한 빼와야 할 시기에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미련한 노무현처럼 반일정서를 권력 장악에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경제 전략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만약 그 시대 대통령이 노무현처럼 나불거렸으면 일본은 전자기술은커녕 제철소 건립 기술조차 한국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할 국가관을 가진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다른 이가 있었을까?
그러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1960년대는 이것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많은 비밀을 묻어 두었다. 본래 한일회담이 기술 이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합의였으므로 일본 기술을 최대한 빼와야 할 시기에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할 국가관을 가진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다른 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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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가르친 일본군 장교 - 박정희
대한민국 건국 이전 해방 2년째 되던 1946년 가을,
장차 건국 때 국군장교 양성을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사 2기생이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
일본군 육군 소위 출신인 이교장은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고 시험을 치렀다.
전원이 백지였는데 딱 한 생도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박정희 생도였다.
이교장이 박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는가 물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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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신중히 옥석 가려야...
[세계일보 2004-07-23 17:51]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길래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소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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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에 나온 혈서기사도 날조입니다. 어떻게 뻔뻔하게 사본을 공개할수 있으며, 원본출처도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죠?
친일인명사전이란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사람, 적극적인 친일파를 넣는곳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을 넣으려고하다니..기가막힐뿐입니다... 어떤사람들은 박정희가 창씨개명했다고 다까끼 마사오라고 미친듯외치며 욕하던데.. 일제시대에 모두 창씨개명했다는것도 모르더군요... 욕하는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창씨개명했다는것도 모르더군요....일제시대에 모두 창씨개명했습니다...
이일 일으킨 그 뒤에는 면박이가 있다는데 천원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