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아파서 죽을 맛입니다. 다각도로 원인 분석을 하다가 슬라이드 플랭크를 무리해서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장 자크 루소를 소환해서 미팅 중입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장 자크 루소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면서 부모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왔습니다. 16세에 스위스를 떠난 뒤 프랑스에 정착하였으며 철학, 문학,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당대 개혁적 마인드를 지닌 사상가, 철학가들과 동등하게 사상적으로 교류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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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이 있으며, 진보적인 정치사상으로 당대의 지식인, 철학가들과 날선 공방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교육철학을 담은 책 '에밀'이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소르본 대학 신학부의 고발로 유죄를 받게 되면서 프랑스를 떠나 여러 나라를 전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후로도 '고백론', '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등의 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을 여러 권 출간하였으며, 1778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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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가상의 인물 '에밀'의 교사가 되었다는 가정하에 시기별로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를 다루던데 나는 왜 진작에 이 책을 보지 않았을까요? 책은 크게 5장으로 나누어지며 성장의 단계별로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루소는 성장 단계별로 알맞은 교육방식을 논하면서 특히 자연상태에 맞는 교육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야만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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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닐진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던 원조 바바리맨 루소가 자신의 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린 부분(지식인의 두 얼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유'에만 방점을 찍고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을 보면 루소의 '인간불평등론'은 자유로운 영혼인 나 같은 개인주의자(=지식인)가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자크 루소님! 처음부터 지식인들의 언행 일치는 요원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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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봄 제1교시 국어 시험입니다. 중오가 커닝을 하느라고 끙끙 앓고 있고, 준석이가 24311333으로 답안지를 채웠는데 시험 감독이 한심한가 봅니다. 한심하겠지요. 나도 대부분의 시험을 준석이처럼 치렀지만 국어만큼은 죽기 살기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작년에 광주 항쟁을 겪은 우리들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2학년이 되었습니다. 박달나무 지휘봉은 헌병대 경봉과 같은 소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픈 지를 맞아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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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너를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전남 담양이 고향인 분들은 대뿌리 맛을 잘 알 것이고 군사시절 수방사 헌병단에 근무한 군바리들은 경봉으로 맞는 배 (body) 맞을 정확히 기억할 것입니다. 시험 날이 좋은 이유는 10분 내에 답안지를 쓰고 짤짤이를 50분 동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전 50개를 16번 재끼고 2개가 남으면 '니(Ni)'입니다. 짤짤이 친구 중에 황석, 상준, 대중이 녀석이 보고 싶네요. 시험 치는 날은 4교시가 땡입니다. 야호, 시험이 끝났으니 우리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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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오보다 먼저 아지트에 모인 건아들이 있습니다. "큐대처럼 곧게, 다마처럼 둥글게, 다이처럼 푸르게, 우리 1학군 최강 조직 모닥불을 위하여!" 준석이가 동네 서클 모닥불의 왕초입니다. 고교 때 대빵을 한다는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 이름이 나야 가능합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친구 일도 덕을 보았어요. 준석과 삼총사들은 동수를 위로하기 위해, 챔프 박 찬 희와 1학년 후배들까지 총궐기 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 요놈이 누구여?" 중오 동생 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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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가 서클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당시 불량서클은 나름대로 학생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준석의 가오에 밀려 퇴장하긴 했지만 나중에 중기는 강력계 형사가 되고 준석이가 중기에게 은 팔찌를 차고 달려갑니다. 내 동생 진호는 저랑 2년 차가 났는데 단 한 번도 형에게 들이 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때 소맥 대신 소콜이나 맥 소롱을 타서 마셨을 것입니다. 술맛 좋고 분위기 좋고 만, 야구장에서 한 판 했던 부산 고 '통'들이 건달들까지 동원해 쳐들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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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에서는 테이블에 놓인 콜라병만큼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중오까지 콜라병을 들었는데 달 건이 한 명이 준석을 알아보고는 싱겁게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준석이네 아버지 인지도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통지표 받는 날입니다. 나는 고교 시절 내내 통지 표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기가 뭣 땜에 그랬는지 통지표 받는 날이라고 이른 모양입니다. 중기 너 뒤졌어. 동수가 트로피와 상장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인자, 권투는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만 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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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택이가 1등 했다고 박수를 받았고 평균 28점을 맞은 준석이부터 박달나무 매를 제공한 놈까지 사랑의 매를 반항하지 않고 맞았습니다. 이런 식의 밧다는 순서 기다리는 것이 고름입니다. 나는 이 짓거리를 고1 때까지 끝냈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외국 여자랑 사귀라"라고 잉글리시 티처가 알려준 말에 동의합니다. 필자는 잘되지 않습디다. 집 나간 동수 엄마가 들어와 아버지에게 땡깡을 치더니 다방에서 어떤 놈 씨랑 눈이 맞아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제가 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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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동수 초등학교 때로 타이머 시 되었습니다. 장학사가 수업 참관을 하였는데 동수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바람난 엄마가 동수에게 스케치북 사라며 몇 푼 쥐여주고 집을 나갔습니다. 한두 번 나가야 신경을 쓰지 걸핏하면 나가는 엄마를 동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칩니다. 다시 1981년 부산고 2학년 교실입니다. 학생주임이 소지품 검사를 합니다. 컴퍼스, 완전정복, 해법수학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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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오가 불심검문에 간신히 통과했는데 화장실 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딱 걸렸습니다. "폈지" "아닙니다" "폈지" "안 폈습니다" 웬일로 학 종이 그냥 갑니다. 나는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걸로 혼난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들은 학주가 포기한 것 같습니다 담배 얘기가 나와서 말하는데 그땐 왜 손목에 담배 빵을 지져댔는지 아시나요? 중오가 친구들을 꼬드겨 혜화여고 밴드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7인조 레인보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보컬인 진숙의 노래 노래가 흘러나오자 난리 블루스를 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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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뻑 갔습니다. 80년대에는 스낵코너와 함께 그룹사운드가 유행하였습니다. 필자가 준석이랑 갑 장(1964)입니다. 고2 때 친구 기승이 놈이랑 어느 클럽에 갔다가 진숙이 같은 보컬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연예인 이거나 서울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니까 부산 촌놈들이나 우리들이 노는 것은 비슷비슷한 것 같습니다. 고2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삼양 백화점 앞 다방(우체국)까지 순찰을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도연을 찍었는데 진숙이 더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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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난 뒤'는 그룹 샤프가 부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교에 들어와서 패션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앞머리는 짧고 뒷머리가 긴 펑크스타일을 고집했으며 교련복 바지에 체크 와이셔츠를 목숨 걸고 장만해야 했습니다. 5.18 때 제일 합섬 하복을 양복 기지로 맞춰 찾아온 생각이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순전히 단복을 입으려고 보이 스카우트를 한 놈이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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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인동 가서 3만 원을 주고 맞춘 회색 단복을 뽕뺄 때까지 입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공방첩 표어, 포스터를 무지하게 쓰고 그렸습니다. '북괴는 노린다 우리의 빈틈을', '땅굴 파는 두더지 몽둥이로 때려잡자',아, 어찌 잊으라 6.25. 그날을' 군사정권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용해 빨갱이 프레임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했습니다. 고3까지 교련 집체교육을 받았으니 초6 년, 중3, 고3 도합 12년을 '이승복'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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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는 충효사상 같은 규율로 억압하던 어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상대로 벌인 최초의 대모는 고2 때 이었어요. 겨우 두발과 교복자율화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교복 형태를 부수고 불법 가요를 들으며 펑크스타일을 고집스럽게 하면서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80년 5월 17일부턴가 하복을 입는다고 해서 녹색 교복을 찾아왔습니다. 교복값은 2-3만 원이었을 것입니다. 규정은 스마트 학생복 기지에 흰색 카라가 있는 교복인데 나는 상의는 긴팔로 만들고 7부처럼 걷고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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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4개를 쌍으로 달아 카라를 빼버리면 정은이가 입는 사복이 됩니다. 하의는 배꼽 바지에 주머니 각도 15도 12인치 통을 히프 선에서 뚝 떨어지도록 했습니다. 뒤주 머니는 후-다라고 하는 뚜껑을 왜 고집했을까요? 검정 스파이크 대신 흰색 BB 운동화를 꺾어 신으면서 바지 밑단의 브랜드 면 40% 폴리에스테르 60%가 꼭 드러나게 했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이유는 없습니다. 고2 가을 무렵 학교를 평정하고 서방으로, 충장로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자칭 전국구이었습니다. 학생 깡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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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다방(우체국)은 전라도 권 건달들의 성지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해진 금남로나 충장로 길은 이미 40년 전에 차 없는 거리로 핫 플레이스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껄렁거리거나 '해태 (기아) 야구' 신화는 다 억압과 누르기에 대한 반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레드콤플렉스 같은 것 말입니다. 운동권 대학생이 된 아들을 향해 친구 아버지는 "왜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고 있느냐"라고 혼쭐을 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대항을 했지요. 이데올로기와 시대의 상흔을 그대로 떠안고 살았던 우리 세대는(7080) 시대의 불운아 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리운 80년대여 응답하라!
2025.2.28.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