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스토리
복음 : 마르 6,14-29
저는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촌스럽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은
이야기 내내 가슴 졸인 제 마음에 주어지는 보상처럼 여겨져 흐뭇합니다.
또 그런 결말이 있어야 주인공이 겪는 그 많은 우여곡절과 시련이 의미 있는 과정 같아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책을 잡으면 슬쩍 끝장을 들추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마지막 얼굴을 미리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속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해피엔딩이 아닌 듯합니다.
먼지만 한 불의도 거부하던 그가 결국 교활한 이들의 불의함에 희롱당하듯 죽고,
그 제자들은 항변 한마디 못하고 목 없는 그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어디에도 해피엔딩의 그림자는 없어 보입니다.
예전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인상적인 몇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일 아들이면 왜 주셨냐고,
당신이 하신 약속은 어디 있냐고 울부짖는 엘리사벳의 모습과
예수님을 잃은 성모님을 다시 만난 엘리사벳을 담은 장면입니다.
약속의 아들을 잉태한 채 만났던 두 여인이 그 아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 다시 만나 나누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을 만난 엘리사벳은 깨닫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 약속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결국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태에 담고 노래했듯이 찬미노래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쓰시는 믿는 이의 이야기는 늘 해피엔딩에 이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간이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이야기가 진행 중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신명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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