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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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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 절대 금지)
우린 인간 세상에 소동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아!
무겁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앞 뒤 사방에서 전해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집 거실에 유령처럼 나타났던 그녀의 모습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녀는 내 방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칠 층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리라.
"됐어! 이제 일어나."
그녀가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희선을 보았다. 희선은 그 고혹적인 눈매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카페를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지금까지 네가 했던 말- 어디까지 믿으면 되는 거야?"
"믿고 싶은 만큼만 믿으면 돼.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잖아-."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우리를 비추었다.
"그런 게 전설이니까."
"하지만, 전설이 아니라 실재하는 거잖아."
"사회학적으로 볼 때 악의 실체란 그런 거야."
희선이 어려운 말을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나는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한다.
"도시를 지배하는 악이 사실은 친근한 이웃의 한 명이라는 것보다 미지의 괴물이기를 바라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전설이 되는 거야. 도시에는 그렇게 악과 전설이 공존하는 거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야. 그들 모두에게 악이란 '살인마 잭'과 같은 거지. 어느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 그래서 전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두려울 때마다 기댈 수 있는 기담. 하지만 악은 그리 아득한 존재가 아냐. 실은 자신의 마음속에 악은 똬리를 틀고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흡혈귀에 그렇게 철학적인 배경이 있는 줄은 몰랐어."
나는 다만 그렇게 대꾸했고 그녀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마스크는 뭐야?"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며 물었다.
"바이러스의 분출을 막기 위함이야."
"그런 거였어? 난 또- 입 찢어진 귀신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무거운 짐짝처럼 내 어깨를 짓눌렀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침묵을 깨고 내가 물었다.
"우선 날 따라와."
그녀는 앞장서서 나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미로 같은 골목을 돌고 돌았다. 이 도시에 이런 미로 골목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허름한 건물들이 양옆으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우리는 한참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막힌 골목 너머로는 가시덤불이 우거진 산기슭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대신 기이한 행동을 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골목 끝에 위치하고 있는 맨홀 뚜껑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맨홀 뚜껑이 몹시 성가시다는 듯 그르렁 소리를 냈다.
"자- 따라 들어와."
그녀가 말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숙련된 동작으로 몸을 움츠리며 맨홀 속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하수구에는 뭐 하러 들어가는 거야?"
내가 구멍을 향해 소리쳤지만 더 이상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홀로 남은 그 골목이 무척 적막해졌다. 나는 문득 내 인생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 탈출구는 저 맨홀 구멍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꽤 경이로운 생각이었다.
어둠의 구멍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시큼한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생각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 안은 사람이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야- 너 어디 있는 거야?"
어둠 속에 갇혀버린 나는 지하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답답한 공포에 몸을 움츠렸다.
"여기야-."
저만치에서 소리가 들렸다.
언뜻 불빛 같은 것도 일렁였다. 그 불빛을 향해 성큼성큼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악! 너……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빨리 따라와."
그녀는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며 '으악'하고 소리쳐 놀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으악'하고 놀랄 것까지는 없었는데.
잠시 후 '관리실'이라고 씌어진 갈색의 작은 문이 나왔다.
희선은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스위치를 올리자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실내를 밝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붉고 커다란 거미가 거미줄과 함께 뒷목에 엉겨왔다. 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불쾌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희선은 그런 거미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보였다.
"뭐야? 여기가 네 집이야?"
그렇게 물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역시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한 쪽에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없는 탱크와 파이프 관이 가득했고 또 한 쪽에는 무슨 전자판 같은 것이 늘려 있고 그 위에는 알록달록한 스위치와 버튼이 있었다. 꼭 우주선 조종실 같았고 저 미스터리한 소녀는 이곳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보였다. 이런 곳에서 그녀는 저런 것들을 조작하며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겠지. 이 어둠 속에서 세상의 모든 어둠을 조종하고 있으리라.
"도대체 이것들은 다 뭐니?"
"나도 몰라. 여기 올 때부터 방치되어 있던 것들이야."
"여기 올 때부터라니? 그때가 언젠데?"
"작년- 지금 학교로 전학 왔을 당시."
그녀의 말에서 나는 어떤 궁금증 하나가 증폭되었다.
"그럼 네가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온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구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좀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조금 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분홍색의 작은 소파가 있었고 그 뒤로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은 학교 책상이었다. 아마도 우리 학교에서 하나 가져다 놓은 듯했다. 책상 위에는 그녀의 파란 코트가 있었고 서랍 안에는 마스크가 있었다. 책상 밑에는 그녀의 그 '가방'도 있었다. 한 쪽 벽에는 하수도 도면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이 도시 전체의 하수도 도면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 도시의 밑바닥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자, 이걸 가져가."
실내를 좀더 둘러보려는데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녀가 이상한 무기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총이었다.
"뭐지 이게?"
"보우건이야. 화살촉에 '특수한 물질'이 묻어 있어."
그녀는 그 특수한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흡혈귀를 잡는 물질이겠거니, 정도로 나는 이해했다. 그녀는 커다란 상자에서 보우건을 몇 개 더 꺼냈다. 그리고 보우건의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여기 이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돼."
그녀가 시험삼아 벽을 향해 하나를 쐈다.
화살은 단단한 시멘트벽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절대- 사람한테 쏘면 안돼!"
"그런 정도는 나도 알아."
나는 그녀에게서 보우건 두 개를 받아 책가방에 넣었다.
"난 저녁 여덟 시쯤에 네 아파트로 갈 거야. 그때까지 넌 네 누나를 잘 감시해."
"누나는 왜?"
"흡혈귀에 물린 이들은 흡혈귀에게 쉽게 조종당하거든. 최면에 이끌려서 흡혈귀를 찾아갈 수도 있고, 흡혈귀가 네 누나를 찾아올 수도 있어. 그러니 잘 지키란 말야."
"하지만- 누나는 워낙 귀가가 늦는 편이라……."
"뭐 어째됐든- 자, 이제부터 나는 좀 자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교복을 입은 채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런데 너- 혹시 배는 안 고프니?"
"많이 고파."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너- 정말로 흡혈귀라면- 너도 누군가의 피를 마셔야겠구나?"
내가 용기를 내어 간신히 물었다. 정말로 이런 공간에서 흡혈귀와 마주하고 묻기에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난 피는 마시지 않아."
잠시 후 그녀는 그렇게 답했다.
"그럼 동물의 피를 마시니?"
"아니- 피는 안 마셔."
"하지만- 흡혈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 거 아냐?"
그녀가 인터벌을 두고 답했다.
"사실 죽지는 않아. 죽을 만큼 괴롭기는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계속 말했다.
"피를 마시면 기운이 나고 기분도 좋아져. 그래서 흡혈귀들은 피를 마시지. 그들은 인간의 피맛에 중독이 된 거야. 난 피를 마시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버텨왔어. 하루 중 어떤 시간이 되면 몸 속에서 피를 원할 때가 있어. 그럴 때는 미칠 듯이 괴로워. 하지만 그 괴로움도 이제는 익숙해졌어. 그저 하루에 한 번씩 앓는 신경증 편두통 같은 게 되어버렸지."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 꿈꾸는 듯한 목소리는 의외로 듣기 좋았다.
"흡혈귀는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괴물 같은 존재가 아냐. 그냥 사악함을 받아들인 인간 정도로 이해하면 돼. 그들은 자신의 사악함을 채우기 위해 인간의 피를 원하는 거지. 그들에게 있어 피는 그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수단의 범위를 이미 넘어선 거야. 어떤 희열을 만끽하기 위해서, 어떤 파괴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살상을 하는 거지. 나는 그런 이들을 찾아내어 처단하는 거야. 언제부턴가 그것이- 내 운명이 되어버렸어- 우린 인간 세상에 소동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거든-."
그녀는 말을 마치고 몹시 피곤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잠자는 그녀의 몸을 훑어보다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우연히도 보우건이 들어 있는 상자 안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보우건 외에 내가 모르는 이상한 무기들이 많았지만 내 눈길이 머문 곳은 그런 무기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낡고 작은 흑백 사진이었다. 희선의 눈치를 살피며 사진을 집어들었다. 가족 사진이었다. 다섯 식구였다. 엄마와 아빠, 큰아들과 작은아들, 그리고 막내딸. 사진 속의 그들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몸짓,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온화한 분위기에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화목한 가족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가 입고 있는 옷에 예의 주시를 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텔레비전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옷이었다. 그리고 나는 막내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머리에 리본을 달고 활짝 웃고 있었다. 이 귀여운 아이가 어쩌다가- 흡혈귀 같은 것이 되었을까-!
문득 돌아보니 희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급히 사진을 상자 속에 떨어뜨렸다.
"왜 아직 안가고 있는 거니? 혹시 가는 길을 모르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정말- 가는 길을 모르겠는데."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참! 배고프다 그랬지. 자 이거라도 마셔."
나는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가방을 뒤져 아까 매점에서 구입해 두었던 소이밀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어쩐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없이 소이밀크를 받아 챙겼다.
"몸에 좋은 거야. 단백질 및 아스파라긴산 등이 함유되어 있어 영양에 좋대."
좀 머쓱해진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왔던 길과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가끔씩 머리 위에서 자동차나 화물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끌시끌하게 싸우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세상의 중심부를 걸으며 세상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머리 위에는 저토록 생생한 도시의 단면들이 펼쳐지고 있건만 그 밑에는 이토록 적막한 어둠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다는 것이. 결국 저것들을 지탱하는 것은 이 어둠이란 말인가!
우리는 십 분쯤 걸었고 마침내 지상으로 향하는 사다리 앞에 도착했다.
"자-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기가 어딘데?"
"올라가 보면 알아. 난 이제 돌아가서 잘 테니- 나중에 보자."
내가 뭐라고 더 묻기 전에 그녀는 돌아서서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맨홀 뚜껑을 여니 지상의 빛이 공격적으로 시야에 침투했다. 하지만 지상으로 완전히 오르고 보니 그리 맑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고 주위는 초저녁이라도 된 것처럼 어둑했다. 나는 무인도에 불시착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삐쭉 솟은 무언가를 보고 내가 있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삐쭉 솟은 그것은- 내가 사는 '하늘 아파트'였다. 내가 있는 그곳은 소나무와 잣나무 등 침엽이 우거진 작은 정글 마당이었다. 언젠가 마스크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정글 마당을 관통해서 아파트 앞에 섰다.
아파트의 위층이 옅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며 누나 방의 문을 두드려보았다. 누나는 없었다.
내방으로 들어와 희선에게서 받은 보우건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탁상 시계는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우건 하나를 손에 들고 침대에 누웠다. 보우건을 천장에 겨냥하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과연 누가 흡혈귀일까!
천장에는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무늬처럼 그려졌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재차 확인을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이- 이민혁!"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상민이었다. 이어서 엄청난 양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욕설과 함께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그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왜 싸우러 나오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오늘은 바쁘니까, 내일로 하자! 네 떨거지들도 오늘은 그만 일당 줘서 퇴근시켜라. 그리고 내일 다시 다 불러모아라. 기왕이면 네 엄마 아빠, 이모 고모, 삼촌 숙모, 할아버지 할머니, 너희 집에서 키우는 개까지 다 불러라. 그래야 네가 더 안심될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녀석이 뜻밖의 얘기를 했다.
"지금 너희 집 근처니까 빨리 나와, 이 새끼야!"
일당들이 우리 마을로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보우건으로 녀석의 심장을 꿰뚫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잠재적 파괴 성향이 있는 정서 불안자!
희선이 나에게 내린 결론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누구라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건방진 녀석은 나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그것도 모자라 떨거지들을 잔뜩 불러서는 내가 사는 집 앞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파괴적 성향을 버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발병할 소지가 있다는 거지.
다시 희선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울분을 참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네 마음대로 해봐, 이 구더기 같은 자식아!"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녀석이 정말로 일당들을 이끌고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 마을까지 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엄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녀석들의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엄포에 살고 엄포에 죽으며 엄포를 늘 신앙으로 여기며 산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엄포를 다 빼버리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멍청한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낮잠을 청했다.
천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잠깐 잔 것 같았는데 눈을 떠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 희선은 지금쯤 이 아파트에 와 있을까. 침대 옆에는 안전장치가 풀린 보우건이 위험천만하게 놓여 있었다. 보우건을 집어들어 안전장치를 걸려고 했다.
그때 천장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슈슉-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나는 천장을 바라보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슈슉-
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렸다. 무언가가 천장 위를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보우건을 들어 천장을 겨냥했다.
소리가 멈추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나는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천장의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 의자를 화장실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한 손에 보우건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환풍구 문을 들어올렸다. 그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화장실에서 새어든 불빛에 의지해서 우리 집 천장 위의 그 공간을 어렴풋이 살폈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아파트의 층과 층 사이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슈슉-
근거리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누구야?"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어둠을 향해 보우건을 겨냥했다. 그 순간!
슈슉- 슈슉- 슈슉-!
무언가 급히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나는 금방이라도 쫓아갈 것처럼 소리쳤지만 손전등이 없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기에 일단은 후퇴해야 했다.
화장실로 내려와 의자를 들고 거실로 나오는데 누나 방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누나? 언제 온 거야?"
누나는 하얀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말을 전혀 못들은 것처럼 그대로 현관으로 나갔다. 누나의 발은 맨발이었다.
"잠깐!"
나는 서둘러 의자를 내려놓고 누나의 뒤를 좇았다. 그러나 누나는 순식간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보우건을 든 채로 현관문을 열고 뒤따라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에서 소리가 났다. 그쪽으로 뛰어갔다.
먼저 엘리베이터가 보였고, 그리고- 무언가 중력의 법칙에 위배되는 듯한 일이 시야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나의 몸이 허공에 둥둥 뜬 상태로 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 끝, 환풍구에서 허연 얼굴이 거꾸로 매달려 상체를 드러낸 채 손을 뻗어 누나의 어깨를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 허연 얼굴은- 정혁이었다.
<계속>
첫댓글 오홋...재밌는 제이슨 친구님의 글에 제가 1등리플...ㅋㅋ 잼나요~!!!
와~ 넘 좋아요...ㅋ
드뎌 올라왔군요 ㅋㅋ 이글은 몇편에서 끝나는 걸까요?
우웅..ㅡㅜ 드디어 올라왔어여 진짜 몇 편에서 끝날까여? 아니다..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올까여?
웁스, 그럼 정혁이 흡혈귀였던 건가요, 아, 정말 다음편 기다리느라 죽겠습니다 ㅎㅎ 너무 재밌어요~
답글 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흡혈귀 야녀는 8회에서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