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이야기
나는 의령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다. 진주에서 흘러온 남강이 고향을 휘감아 돌아가 들판이 있기도 하지만 산골이 더 많다. 들판도 남강댐이 축조되기 전엔 홍수가 범람해 흉년이 들기 예사였다. 산간은 산간대로 천수답이 많아 쌀이 귀해 보리나 콩이 섞인 잡곡밥을 많이 먹었다. 겨우내 무나 고구마를 썰어 섞어 넣은 밥을 먹었다. 점심 한 끼는 아예 고구마로 때운 적 많다.
고향마을은 집성촌이라 온 동네가 같은 성씨였다. 잔치나 초상이 나면 이웃에서 음식 품앗이를 하던 기억이 아슴푸레 난다. 주로 두부나 묵을 빚어서 보내거나 되갚았다. 그런 음식들은 손님 상차림에 올랐다. 두부야 콩으로 빚는다만 묵은 달랐다. 당시 빚던 묵은 메밀묵과 도토리묵이었다. 메밀은 농사로 지었고 도토리묵은 가을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말려두었다가 묵으로 빚었다.
명절이거나 어른 생신이면 집에서 역시 두부나 묵을 빚어 대가족이 나누어 먹었다. 요즘 와서도 두 음식을 맛볼 수 있으나 예전에 어머니가 손수 빚던 그 두부와 묵 맛이 아님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 향토 음식을 떠올리면 두부보다 묵을 빠트릴 수 없다. 메밀묵보다 도토리묵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남아 도토리를 주워 고향집 큰형수님에게 보내 묵을 맛보기도 했다.
십여 년 전 문학 동인들이 북부경북으로 문학기행을 떠난 적 있었다. 봉정사를 둘러 회룡포를 거쳐 금당실로 둘렀던 여정이었다. 점심자리로 예천 읍내 예약된 식당에 들었더니 청포묵이 나왔다. 어릴 적 녹두로 빚었던 청포묵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전분에서 녹말을 추출하는 원리야 같은 방식이지만 메밀묵이나 도토리묵보다 희소성이 있어선지 묵 맛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는 가을이 이슥해지거나 날씨가 추우면 낙동강 강변으로 트레킹을 나선다. 삼랑진에서 물금까지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삼랑진 송지에는 삼십 년 째 묵밥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송지 장터 안에 유가네식당이다. 강변 기차역이 명맥을 유지하는 양산 원동은 면소재지임에도 한적한 시골인데 기름집은 세 군데나 되었다. 배내골서 나오는 산물로 기름을 짜고 가루를 빻는다고 바빴다.
어느 해 가을날 원동에 들렸다가 기름집 앞을 지나니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겼다. 김장을 앞둔 때라 빻으려는 건고추도 넉넉했다. 그보다 놀란 것은 도토리를 펼쳐 말리는 광경이었다. 누군가 도토리를 일로 삼고 주워 모아 공급하는 이가 있는 듯했다. 골목 가득 가을볕에 말리는 도토리가 엄청 많았더랬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썰렁한 포장마차에 들어 도토리묵을 맛보고 나왔다.
몇 해 전까지는 근교 산행에서 도토리를 주우면 시골 형수님에게 보냈다. 일철이 끝나고 한가할 때 묵을 빚으면 우리 집에서도 맛 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형수님 나이가 연만해져 묵을 빚기가 힘들어져 보내질 못하고 있다. 대신 같은 생활권에서 사는 두 친구에게 도토리를 안겨준다. 한 곳은 같은 아파트단지 초등 친구네고 다른 한 곳은 상남동 대학 동기네 집이다.
우리 집에서는 도토리로 묵을 빚을 줄 모르는데 두 친구의 아내는 묵을 빚을 줄 알아 덕분에 나도 몇 차례 도토리묵 맛을 봤다. 전통적 방식은 도토리를 말려 껍질을 까 방앗간에서 갈아 전분으로 묵을 만들었다. 근래 말리지 않은 도토리를 바로 가정용 분쇄기로 갈아 추출한 전분을 물에 담가 떫은맛은 우려내 반죽을 끓여 묵을 빚는 모양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덜 번거로운 듯했다.
추석 전날 양미재에서 작대산 트레킹길로 들었다. 산세가 험한 바위더미와 길바닥에 떨어진 도토리가 발목을 잡았다. 허리를 굽혀 주웠더니 보조가방까지 채워졌다. 무거운 도토리를 짊어지고 손에 든 채 양목이고개에서 중방마을 내려가니 힘에 부쳤다. 같은 아파트단지 친구네에게 보냈더니 갈색 묵을 빚어 왔다. 도토리묵은 연사 와실까지도 가져가 묵밥으로 몇 끼 비벼 먹을 참이다. 21.09.26
첫댓글 도토리 주워 갖다 드리고
묵을 건네 받으셨으니
상부상조 맞지예?
도토리묵 참 잘 됐네요 선생님!
어울렁 더울렁 최고이십니다~
여정 선생님! 회신 반갑습니다. 맛깔스럽게 빚은 도토리묵을 함께 나누지 못해 아쉽습니다. 님을 비롯해 주변 분들 모두 잘 계시지요? 늘 건안하시고 무탈한 날들이길 바랍니다.^^
선생님!
자작나무TV 주인공이시군요
와~~
낭독하시는 분 조금 신경 쓰셔야 할
부분이 드러 보이더군요.
잘 보고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