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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바알 숭배의 정체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이선희 교수
1. 바알 숭배 현상에 대한 일반적 관찰
[1] “바알”(Baal)의 사전적 의미: 단어 자체의 뜻은 “주”, “주인”(lord)을 의미한다. 가나안에서 섬기던 바람과 풍요의 신의 이름이다. 바알은 특히 농경지에 풍요를 주는 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풍요와 관련된 현상들을 주관하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바알은 바람을 불어서 구름을 운반하고, 구름을 산에 걸리게 하여 물이 되게 하며, 이때 천둥과 번개를 쳐서 농경지에 비가 내리게 한다고 여겨졌다. 그 빗물이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산과 농경지 사이의 지표를 뚫고 나오는 샘물 또는 우물도 바알이 주관한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바알은 산에 사는 신으로서 바람과 구름과 천둥 번개와 비와 샘물(우물)을 주관하여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바알은 이러한 천기를 주관하는 신이기 때문에 때로는 하늘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2] 바알을 숭배한 지역: 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팔레스타인의 서부 지중해 연안지역(불레셋족, 가나안족, 페니키아족의 지역)을 거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지금의 시리아 지역을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거쳐서,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는 소위 ‘비옥한 반달형 지역’에서 주로 바알을 섬겼다.
[3] 바알을 섬긴 시기:
(1) 페니키아(팔레스타인 서북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지역)에서 포도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재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BC 5000년, 더 확실하게는 BC 4000년경이라 한다. 그 지역에서 포도가 바알이 준 생명의 풍요로운 생산(풍요)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을 볼 때, 넓은 의미의 바알숭배는 이미 포도재배 시작 무렵부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페르시아만과 접경 지역에 있는 (과거에는 혹시 항구였으리라고 추측되는바) 우르(Ur)라는 도시에서 발굴된 BC 2500년경의 유물 가운데 금으로 도색하고 구슬로 장식한 황소 머리 조형물이 바알신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 본격적인 바알 숭배는 BC 2500년 전후하여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때는 황소를 농산물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산력이 강한 짐승으로 인식하여 바알신, 즉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산력이 강한 신을 상징하기에 적절하다고 본 듯하다.
(3) 우가릿 도시(지금의 시리아 서부 지중해 연안)에서 발굴된 BC 1500년경의 돌판에 새겨진 남자 모양이 바알신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볼 때, 바알 숭배는 황소로부터 사람(남자)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 남자 모양의 바알은(원래 황소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 천둥 방망이를 쥐고, 왼손에 번개 기구를 들고, 구름을 상징하는 물결 모양의 선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바알은 번개의 신이요, 구름을 타는 신으로 묘사된다. 바알 숭배는 생명의 생산과 증산 및 풍요를 추구하기 위하여 더욱 효과적인 상징과 표상과 방법을 향해 그 숭배방식이 발전해 간다는 특징을 보인다. ‘생산의 증대와 풍요’라는 핵심만이 상수이고, 이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시대와 장소를 따라 다양하며, 시대에 따라 발전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예컨대, 몰렉신(그모스)도 바알신의 일종인데, 풍요의 신 몰렉이 준 생명 가운데 제일 값진 것이라 여겨진 자녀 가운데 하나를 그 신에게 바쳐드리면, 신이 이를 열납하고 더 많은 생명을 생산하게 하는 생명력을 부여하므로, 각 분야에 생산의 증대와 풍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은 말하자면, 진일보한 바알 숭배 방식이다.
[4] 바알숭배의 신화: 우가릿 또는 라스 샤므라에서 1929년 이래로 발굴되고 해독된 쐐기문자 토판의 바알 신화에 의하면 바알 숭배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나안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4월~9월)에는 동쪽의 아라비아 지역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 때문에 산천초목이 시들어 죽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고, 우기(10월-3월)에는 서풍, 즉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 가나안을 지배하게 되므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산천초목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이 우기의 초엽 ‘이른 비’ 때 파종하고, 우기가 끝나는 늦봄에 내린 ‘늦은 비’로 곡식이 영글어 추수하게 된다.
(2) 가나안인들은 이러한 자연현상이 신들의 세계인 대우주에서의 죽음의 신(Mot)과 생명의 신(Baal) 사이의 반복적인 승패가 인간 세상인 소우주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3) 죽음의 신 Mot에게 생명의 신 바알이 패배하여 죽으면 지상에서는 건기(죽음의 계절)가 시작된다. 이 건기 때 바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아낫(바알의 여동생이자 배우자인 여신. 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예컨대 아스다롯, 아세라, 아데미, 다이아나 등)이 통곡하면, 지상에서도 바알 신도들이 통곡한다(겔 8:14, 슥 12:11). 이것이 통곡제다.
(4) 통곡제 후에 아낫은 죽음의 신을 패배시키고, 바알을 소생시킨다. 소생한 바알은 다시 우주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때 바알과 아낫은 왕궁(신전)으로 들어가 소위 ‘거룩한 결혼(sacred marriage)을 거행한 후 신혼생활에 들어가고, 이때부터 우기가 시작된다. 비가 내리고, 만물은 소생하고, 질서는 회복된다.
(5) 이러한 신들 간의 승패는 매년 또는 7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믿었다.
(6) 보통 신년축제라고 하는 바알 축제는 추분에 거행되는데, 이때는 가나안 달력으로는 에다님월(7월)에 해당한다. 이때가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다. 이스라엘도 에다님월을 새해로 지켰으며, 이것은 초막절에 해당한다. 바알 숭배자들은 이 신년축제 때 바알과 아낫이 신혼생활에 들어갔다고 믿었으며, 하늘을 상징하는 바알과 땅을 상징하는 아낫이 결합함로써 풍성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과 아낫의 성적 결합을 더욱 강렬하게 하여 더 큰 풍요를 내리도록 하기 위하여 소위 감응(모방) 마법을 통하여 바알과 아낫을 자극한다. 이것이 바로 신년축제 시 성교의 축제다. 일상적으로 바알 신전에는 전속 남제사장과 여사제가 이었으나, 신년축제 시에는 수많은 바알 숭배자들과 성적 관계를 하기 위하여 여성 성창과 남성 미동이 동원되었다(신 23:17, 왕하 23:7).
[5] 바알 숭배류의 다른 신화들:
(1) 그리스의 제우스 신화: Zeus라는 단어는 고대 인도어인 Dyaus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의 뜻은 ‘밝은 하늘, 빛나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즉, 제우스는 하늘의 신으로서 빛의 신이요, 천기를 주관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구름을 조성하는 자”, “번개를 사랑하는 자”, “천둥을 치는 자”로 묘사된다. 남신(男神)인 그는 신들의 세계를 평정한 후에 여러 여신 및 여러 인간의 딸과 혼인하여 신들을 다산하여 인간사를 다스리게 한다. 그래서 그는 생산력이 가장 강한 생명의 신이다. 그는 인간에게도 풍요를 줄 수 있는 ‘풍요의 신’이다. 그는 또한 도덕과 법의 수호신이다. 그리하여 인간 세상의 풍요를 돕고 보장하는 신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 올림포스 산에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우스를 기쁘게 하여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생겨난 제의 경기가 올림픽 경기다. 사람들이 올림포스 산 아래 모여서 달리기를 하여 일등한 자가 생명력이 가장 강한 자이므로, 그가 생명의 신 제우스를 가장 기쁘게 해드리고 풍요를 기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우스와 바알의 상호 동일한 표상: 바람과 구름과 천둥 번개와 비를 주관하고, 그래서 천기를 주관하는 하늘의 신이요, 빛의 신이고, 인간에게 풍요(생명의 지속적이고 풍요로운 생산)를 보장하는 신이다. 이를 위하여 이들 자신이 생명력이 강대한 신들이며, 인간은 이에 상응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력(제의 경기) 내지 생산력(성교 제의)을 동원하여 그 신들을 감응해야 한다.
(2) 단군신화: 하늘의 신인 환인이 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함으로 허락한다. 환웅은 풍백(風佰), 운사(雲師), 우사(雨師) 등 신하들을 데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그는 360가지 인간사를 다스리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이 곡(穀)과 명(命)과 형벌(刑罰)이다. 범과 곰이 인간이 되기를 원하므로, 약쑥과 마늘을 주고 100일 동안 먹으며 빛을 보지 말라 한 즉, 곰이 21일을 견디므로 웅녀가 된다.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므로 단군을 낳았다.
(a) 환웅은 하늘의 신이다. 바알도 제우스도 하늘의 신이다.
(b) 환웅은 바람과 구름과 비를 다스리는 신, 천기를 다스리는 신이다. 바알 및 제우스와 동일하다.
(c) 환웅은 곡식(풍요)과 명(생명의 생산)과 형벌(도덕과 법)을 주관하는 신이다. 바알 및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환웅도 생명의 생산과 풍요와 인간사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이다.
(d) 약쑥과 마늘은 생명력이 특별히 강한 식물로 여겨졌다. 이것을 생명력이 강한 존재
로 여겨진 곰이 먹고 여인이 되었으므로, 그 웅녀는 생산력이 강한 존재, 다산력의
존재로 여겨졌다.
(e)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변하여 이 땅에 생명의 생산력을 부여하기 위하여(=단군을 나아 그 자손이 퍼지도록 하기 위하여) 웅녀와 혼인한다는 모티브는 바알이 이 땅에 생산력 을 주기 위하여 여신 아낫(아세라)와 혼인하는 것이나 제우스가 여러 여신들 및 여 인들과 혼인하여 신들을 낳는다는 소위 ‘거룩한 결혼’(sacred marriage)의 모 티브와 동일하다.
[6] 단군신화 이후 고구려에 있어서 (넓은 의미의) 바알 숭배: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면, 사냥 장면과 가무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생명력의 과시와 풍요의 구가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그 고분의 천정에는 평양 위를 지나는 위도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천기를 정확히 읽어서 씨뿌릴 때를 정확히 맞추어 파종하고 농사하여 추수하는 것이다. 천기를 읽기 위하여 바알 숭배에서 발달시킨 것이 바로 천문학과 점성술이다. 파종의 시기가 정확해야, 바람과 구름과 비의 운행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신이 왕을 열납해야 이런 일이 순조로운 것이므로, 왕의 운명은 생명의 생산과 풍요에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별자리를 통하여 왕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 바알 숭배에서는 발달한다. 고구려에서는 한동안 무당(여자 제사장)이 다산을 주관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일종의 아세라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도 넓은 의미의 바알 숭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7] 단군신화 이후 신라에서의 (넓은 의미의) 바알 숭배:
(1)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나타난 바알 숭배 사상: 천마가 우물 옆에 알을 놓고 가매,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탄생한다. 여기서 ‘박’은 원래 밝음, 빛을 의미하는 ‘ᄇᆞᆰ’이라고 하는바, 이것은 바알이 번개의 신으로서 빛의 신이요, 제우스가 밝은 하늘의 신으로서 빛의 신인 것과 동일한 모티브로 보인다. 즉, 하늘의 천기를 주관하고 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주관하는 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물’ 곁에 알을 두고 갔다는 것은 바로 물(우물, 샘물)이 생산과 풍요를 위하여는 필수 불가결하고 생명력을 지닌 무슨 신비한 무엇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즉, 박혁거세를 생명의 생산과 풍요의 열쇠를 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어떤 사학자의 해석처럼 여기서 우물은 하늘과 땅을 잇는 터널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정보통신적 표상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이기 때문에 고대인들의 자연종교(바알 종교)의 세계를 간과한 해석이다. 박혁거세의 부인도 또 다른 우물에서 나온 용의 옆구리(성기의 완곡한 표현)에서 나왔다는 것도 바로 다산의 생산력을 가진 여인이요, 그 후손을 다산하는 강력한 생명력과 생산력을 가진 존재, 달리 말하여 일종의 아세라(생산력의 여신, 다산의 여신)로 이해했다.
(2)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경우에 나타난 바알 숭배 사상:
(a)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다산의 생산력을 주관하는 무당(여제사장)의 기능이 일찍이 후퇴하는 데 반하여, 신라에서는 지속하므로, 이것 때문에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여왕 현상이 있었다고 사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은 자신을 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주관하는 여신이라는 표상으로서 이해했을 것이다.
(b) 선덕여왕의 아버지가 되는 왕은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그 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 둘 사이에서 나오는 아이는 바로 석가모니와 같은 기능의 존재이기를 의도한 것이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자신을 여자 부처로 이해했다. 첨성대 근처 산의 암벽에 새겨진 좌상의 부처가 여인을 모델로 한바, 그 모델은 바로 선덕여왕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바, 이것이 그 증거 중에 하나다. 신라 시대의 불교를 호국불교라 하는데, 여기서 호국은 전쟁 시에 나라를 지킨다는 뜻보다 더 큰 의미, 즉 국가의 생명력과 생산력과 풍요를 보장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바알 종교다.
(c)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짓는다. 첨성대의 특이한 외양은 신라 시대의 우물 모양이라 한다. 우물 모티브는 바알 숭배에 있어서 구름과 비와 우물을 주관하는 생명의 바알의 생산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첨성대는 하늘로부터 생산력을 끌어내 풍요를 초래하기 위한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바알 숭배적 구조물이다. 첨성대에서 또한 천문학적 및 점성학적 관찰을 한 즉, 선덕여왕은 자신을 천기를 주관하는 하늘의 신과 교통하는 여자 부처(여신, 일종의 아세라=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주관하는 여신)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첨성대의 창문은 왕궁과 직선으로 통하도록 건축되었다. 첨성대의 쌓은 돌의 층수도 춘하추동의 순환을 상징한다. 바알종교 역시 춘하추동의 순환을 생명 생산의 기본으로 보는 종교다.
[8] 바알 숭배의 본질:
(1) 바알 숭배는 자연의 본질을 생명의 생산으로 파악한다.
(2) 바알 숭배는 생명의 생산에 있어서 증산과 풍요를 목적한다.
(3) 바알 숭배는 생명 생산의 원리를 자연에 나타나는 현상 그대로 (식물이나 가축이나 사
람에게 있어서 공히) 암수, 남녀, 음양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본다.
(4) 바알 숭배는 증산과 풍요를 얻기 위한 암수, 남녀, 음양의 결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 기 위하여 시대와 장소를 따라 개념과 방법을 발전 시켜 나간다. 그래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연 종교적인 개념과 방법의 바알 숭배로부터 오늘날의 무신론적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왔다. 자연과학이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자연 속의 암수 결합과 음양의 조화를 이상화하여 생명의 증대와 풍요를 추구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알 숭배의 핵심사상이다. (성경의 하나님, 즉 창조주요 섭리주 요 마지막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이 하나님에 맞추어진 자연과학이라면 지 극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경외요 하나님의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을 이루시는 방 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5) 바알 숭배는 그러나 그 추구하는 생명의 증산과 풍요에 있어서 사실은 의도한 것과는 반대 현상, 즉 죽음의 현상을 초래한다.
(6) 바알 숭배 자신은 이 자가당착적 사실의 표면만을 땨에 따라 의식할 뿐, 그 근본 원 인,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원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2. 성경은 바알 숭배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9]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복 주시되 생육, 번성, 충만 하라고 하신다. 여기서 ‘복 주시다’라는 단어는 ‘바라크’()라는 단어다. 바라크는 크게 (1) 복을 약속하시다는 뜻과 (2) 약속하신 복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 복의 내용은 생육, 번성, 충만인바, 곧 생명의 생산과 증산과 풍요다. 그러므로 ‘바라크’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요 섭리주요 심판주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므로 이 개념은 바알이 생산, 증산, 풍요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의 생산 및 풍요의 섭리주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바라크’(축복 및 강복) 개념은 Anti-Baalism의 핵심 개념이다.
축복하는 언어 행동으로서의 ‘바라크’는 그 축복하는 언어 속에 약속된 생명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생명력(온전케 하는 힘)이 이미 들어 있다고 보는 개념이다. 동식물이나 자연현상에 대하여는 그 생명력이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실현되는 것이나(시 147:15-18), 인간에 대하여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말씀을 순종할 때, “명을 발하시는 그 말씀이 속히 달리면서” 일하므로 복(생명의 생산과 풍요)이 실현된다(시 147:19-20)고 성경은 가르친다.
[10]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여기서 “선”은 생육, 번성, 충만이 잘 된다는 뜻이고, “악”은 그 반대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생육, 번성, 충만을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요, 그래서 이것은 죄의 본질이요, 사형으로써 다스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즉, 바알리즘에 대한 경고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생명의 왕으로 경외하고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이다.
[11] 창세기 3:1-21= “뱀”은, 계12:7-12의 말씀에 의하면, 즉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12:9)에 의하면, 사단이다. 사단이 인간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라고 한 말에서 다음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 “선악을 안다”고 함은 ‘생육, 번성, 충만을 주관할 줄 안다’고 함이니, 사단은 그 자신이 생육, 번성, 충만을 주관하는 신이 되기를 원하였다가 하나님에 의하여 저주를 받고 이 땅에 쫓겨 내려온 존재요, 그래서 생명의 왕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인간들에 대하여는 자칭 생명의 왕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여 군림하며, 실제로는 사망의 왕으로서 군림하는 존재이다. (2)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의 핵심은 인간 자신이 생육, 번성, 충만을 주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가운데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3) 사단은 이렇게 하여 인간이 생명의 왕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하며, 사망으로 가게 한다. (4) 성경에서 바알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알을 생명의 신으로 착각하고 섬겼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것이요, 바알숭배의 결과는 “칼과 기근과 염병”, 즉 사망인 즉, 그렇다면, 창 3:1-12에서 말하는 뱀은 바로 사단=마귀=바알를 의미하는 것이요, 이 지구상의 바알 숭배의 원인과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바알숭배의 시작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인간의 생육, 번성, 충만을 오히려 어렵게 만드신 것이다: 잉태와 해산의 고통. 땅이 저주를 받아(=생명의 생산이 잘 안 되는 상태가 되게 하시므로) 노동의 고통이 있게 하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생명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과 더불어 생명의 증산과 풍요를 추구하나, 겉으로만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할 뿐, 실제로는 사망으로 가고 있다. 이것이 바알 숭배의 기본 構造다.
[12] 창 4:1-7= 하나님이 양 치는 자 아벨의 제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열납하시고, 농사짓는 자 가인의 제물, 땅의 소산은 열납하지 않으신 이유: 양이 새끼를 낳은 원리는 오로지 하나님이 창 1:22에서 동물들에 생육, 번성, 충만을 축복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셨기 때문이다. 축복을 이루시는 방법은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면서”(시 147:15)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실현되도록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양이 새끼를 낳는 일에 본질적으로 공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아벨이 드린 제물의 뜻은 생명을 축복하시고 이루신 유일한 생명의 왕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찬양과 감사를 성경은 ‘하나님을 바라크 한다’라고 표현한다(창 9:26, 창 14:19-20, 시 145:1, 눅 24:50-53). 직역하면 ‘하나님을 축복한다’며, 그 뜻은 하나님을 생명의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라크’라는 것이 생명력을 담은 언어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크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고 하나님 마음속에 생명력을 더욱 강화하여 그 하나님을 바라크 하는 자에게 그 강화된 생명력을 더욱 풍부하게 내리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그 반면에 가인의 제물인 땅의 소산은, 이미 땅이 저주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가인의 경작하는 노력이 불모의 땅에서 소산을 생산하는데 결정적 내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가인이 착각하게 하는 원인이 됐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농산물이라도 하나님을 생육, 번성, 충만을 축복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경작하고 제물로 드렸으면, 가인에게 죄를 묻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노력이 자연의 생산력을 자극하여 생명의 생산을 가져왔다고 본 것이다. 즉, 가인은 바알 숭배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13] 창4:20-24= 가인의 후손들이 다음과 같이 바알 숭배의 원조로서 소개되고 있다:
(1)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 여기서 육축이라는 단어는 소유, 재산, 부로서의 가축을 의미한다. 즉, 생명의 증산, 풍요가 축적되어 부를 이루는바, 바알 숭배의 중요한 목적을 묘사하는 단어다. 부의 축적에 근거하여 성읍과 도읍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바알 숭배는 성읍, 도시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이에 반하여 창4:2의 아벨이 양치는 자라 할 때의 ‘양’이라는 단어는 ‘이동한다’라는 어근에서 온 단어로서 정착, 농사, 낙농업, 성읍, 도시 등과 대립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즉, 바알 숭배에 대한 대립개념이다. 물론 정착을 반대하고 이동한다고 하는 것만으로 바알 숭배의 반대는 아니다. 오로지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전체 분야에 있어서 생명의 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이 신앙을 고수하는 것만이 Anti-Baalism이다.
(2)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수금’이라는 단어는 “튕겨서 울리다”라는 어근에서 나온 단어인데, 현을 튕겨 울림으로써 공기를 진동시킬 때, 진동하는 공기를 어떤 대상 속의 생명력을 자극하여 운동시킬 수 있는 무엇으로 파악했다. ‘퉁소’라는 것은 더군다나 ‘숨을 쉬다’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다. 그러므로 퉁소는 숨, 즉 생명력을 불어넣어서 공기를 진동시키고 이것이 어떤 대상 속의 생명력을 자극하여 운동하게 하는 것이다. 즉, 바알 숭배에 있어서는 바알 속의 생명력을 자극하여 더욱 많은 생명력을 쏟아내게 함으로써 생명의 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수금과 퉁소는 일차적으로는 제의 악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바알 숭배를 위한 제사장적 기능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물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수금과 퉁소는 하나님 속의 생명력을 직접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크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바라크(축복과 강복)를 내려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3)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농기구와 무기의 제조를 의미하는바, 생산의 증대와 풍요를 추구하고 지키는 데 있어서 불가피한 도구다. 바알 숭배 문화의 일진보를 의미한다.
(4)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이것은 소위 정당방위 행위는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법의식의 발전을 의미한다. 바알 숭배의 맥락에서 읽을 때, 제우스가 도덕과 법의 수호신이라는 것이나, 환웅이 형벌을 다스렸다고 하는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바알 숭배 사회에 있어서 도덕과 법의 발전을 의미한다.
[14] 창 6:1-4= “하나님의 아들들”(창 6:2)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6:2)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있으나, 바알 종교의 맥락에서 보면, 그 뜻은 비교적 명백하다. 남신 바알과 여신 아세라의 혼인, 제우스와 여러 여신 및 인간 여인들과의 혼인, 환웅과 웅녀의 혼인 등 바알 종교에 있어서는 생명의 생산을 위한 남신과 여신의 結合이나, 신적인 존재와 인간 여인과의 혼인은 생명의 생산에 있어서 극히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테마였다. 이 구절은 바로 바알 종교의 혼인 테마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것도 생명의 왕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대상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들은 사단(=마귀) 및 그의 사자들 곧 신약성경의 용어로 한다면 귀신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토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서 ‘선’(토브)과 같은 단어다. 즉, 생산력 또는 다산의 능력을 의미한다. 마귀는 다산의 능력이 있는 인간의 딸들(=웅녀!)에게 잉태케 하여 네피림(용사)을 낳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산력을 과시하고, 이로써 인간 세상을 자칭 생명의 왕으로서 支配하게 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8)이라는 말씀이나 “마귀의 자녀들”(요일 3:10)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단락에 의하면 바알 숭배는 이제 본격적인 단계로 돌입했다. 사단은 자칭 생명과 생산과 풍요의 왕으로서 인간 세상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15] 창 6:5-8:22= 본격적으로 사단이 支配하며 바알 숭배에 돌입한 지구 위의 인간 세상을 하나님은 홍수로써 쓸어 버리시고 다시 시작하시는데, 이때의 축복도 생육, 번성, 충만이다(창 9:1, 7). 하나님은 지구에 대하여 언제나 생명의 왕이시다. 그래서 땅이 있을 때 춘하추동의 중단없는 반복을 약속하신다(8:22).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지구의 춘하추동에 대한 모든 인간의 관찰과 연구 및 이에 근거한 생명의 생산과 풍요의 추구(자연과학, 陰陽五行설 등)는 모두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자연의 사실에 대한 진술이요 행동인데,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주요 섭리주요 마지막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으로 순종하며 하는 것이면,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바라크가 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는 길이 되는 것이나, 이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하면 동일한 진술을 하고 동일한 행동을 해도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의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바알 숭배가 되는 것이다.
[16] 창 11:1-9=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대한 거역(=하나님에 대한 무시,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 전체의 내용으로 보아 사단의 일, 바알 숭배를 지적한다고 볼 수 있다. 바알 숭배는 이제 도시와 거대 문명(Titanism)의 형성에 이르렀다(본 라트, 창세기 주석, 국제성서주석I 참조).
[17] 창 12장-50장=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신 생육, 번성, 충만을 이루실 때, 열납하시는 믿음(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보시고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 핵심 테마다.
[18] 모세오경= 모세오경 전체의 핵심 테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다:
(1) 출애굽기=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 이스라엘 백성은 이들을 바라크 하신 하나님을 바라크 해야 하는(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임무 앞에 서서, 일단 먼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단=바알=바알 숭배의 세상과 싸워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의 고집, 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의 칼 앞에서 원망한 일, 목말라 원망한 일, 굶주려 원망한 일, 부추 파 마늘을 먹지 못하여 정력이 쇠하므로 임신시키지 못하므로 원망한 일(민11:5-6) 등 모두 생육, 번성, 충만을 위협하는 일들 앞에서 인간 스스로 생명의 왕이 되려고 하는 바알 숭배의 유혹과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바라크가 열납되게 올라간다.
(2) 레위기= 하나님께 대하여 바라크를 올려 드릴 때 내 속에 죽음의 기운이 있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바라크는 생명력을 지닌 축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의 기운을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속죄를 위하여 제물 드리는 방법이 제시된다. 심지어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지 말 것(18:19). 왜냐하면, 경도는 생명력을 喪失한 죽음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사장은 허락된 경우 이외에 시체를 만지지 말 것(21:1-6).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바라크를 올리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갔으면, 부모의 시체라도 만지는 것이 금지된다. 백성을 대표하여 생명력 있는 바라크를 올려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오는 생명력이 백성에게 풍성하게 임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방법의 핵심은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해진 상태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임하고 거할 수 있다’는 원리다(레 20:26). 이들은 모두 바알 숭배가 제시하는 거짓 생명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의 기운을 피하고자 지키도록 주신 방법이다.
(3) 민수기=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 가득 찬 바알 숭배의 유혹과 위협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민 25:1-15에서는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바알브올(브올山의 바알)에 속한 자들이 생겨나며, 그 반대로 비느하스 같은 사람들도 생겨난다.
(4) 신명기= 가짜 생명의 왕 바알에 대한 숭배를 피하며 진정한 생명의 왕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십계명)을 힘을 다하여 준수하는 것이다. 이를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이 실현되며(생육, 번성, 충만),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저주가 실현된다(칼과 기근과 염병).
[19] 다윗왕이 하나님께 열납된 이유는 바알 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바알숭배로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 된다(왕상11:1-13). 이로 인하여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고, 양국 모두 바알 숭배로 얼룩진 역사를 거쳐 바벨론 포로로 귀결된다.
[20] 욥기의 테마= 욥기의 시작 부분과 마감 부분은 공히 생육, 번성, 충만이 실현된 상태를 묘사한다. 앞에 생육, 번성, 충만이 무너졌을 때, 욥과 그의 친구들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벌, 즉 칼과 기근과 염병이 임한다’는 흔들릴 수 없는 원리에서 욥이 망한 원인을 찾고자 했다. 욥은 이 원리를 십분 인정한다. 그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망할 만한 죄를 범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런 논쟁에 대하여 하나님은 답답하시어 손수 답을 주신다(욥 38장-41장). 하나님의 답은 하나님이 바로 이 우주 만물의 생육, 번성, 충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욥은 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용서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그에게 생육, 번성, 충만을 회복시켜주셨다.
이런 構造의 스토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은 생육, 번성, 충만을 주시는 존재이신가 아니면 죄에 대하여 심판만 하시는 하나님인가 하는 현실적인 질문에 있었다. 더구나 비옥한 반달형 지역에서는 바알을 숭배하며 풍요를 누리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들은 칼과 기근과 염병에 시달릴 때, 더욱 이런 고민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현실적이지만 어리석은 고민에 대하여 욥기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창조주요 섭리주요 심판주되시는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도 하시고 생육, 번성, 충만도 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욥기는 소위 신정론(의로운 자가 당하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이냐는 종교 철학적인 문제)를 논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持續的인 문제인 인간의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이며,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자들에게 대한 위로와 격려의 하나님 말씀이다.
[21] 시편= 시편 1편도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요,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다. 그 증거: 4절에 “바람에 나는 겨”라는 표현은 호세아13:3에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이 호세아의 표현은 명백히 바알숭배자를 냉소적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에브라임이 ...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호 13:1). 타작마당은 바알을 숭배하고 이제 풍요로운 추수를 기대하는 현장이다. 광풍이라는 것은 바알이 풍요를 주기 위해 구름을 운반하는 도구다. 풍요를 가져다줄 바알의 바람 앞에 이제 바알 숭배자들 자신이 쭉정이(하나님이 쭉정이로 정죄한 자들)가 되어 날아간다는 경고다.
그렇다면 시편 1편도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다. “악인의 꾀”라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고 왔어도 기근이 持續될 때, 바알 숭배하며 풍요를 누린다고 하는 지역을 따라 우리도 바알을 섬기고 기근을 극복하자고 하는 이론이요, 이를 위하여 신학적 합리화를 제시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은 사실은 동일한 신인데 부르는 이름만 다르다. 또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은 상호보완한다. 바알 숭배에도 어느 정도 구원이 있다 (이런 논조가 오늘날 포괄주의나 종교다원주의의 논조와 동일한 것은 조금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실 전형적인 Baalism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길”이라는 것은 ‘악인의 꾀’를 따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라는 것은 그렇게 바알을 숭배한 결과 실제로 풍요가 왔기 때문에 그 “악인의 꾀”가 진리다운 이론이라고 자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는 “견딜 수 없는” 심판을 준비하고 계실 뿐이다(시 1:4).
그 이외에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와 바알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시편들이 많다: 2편, 3편, 4편, 5편, 8편, 10편, 11편, 12편, 14편, 16편, 17편, 18편, 19편, 23편, 29편, 51편, 75편, 78편, 91편, 104편, 121편, 127편, 128편, 129편, 147편, 148편, 150편.
[22] 전도서도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요 하나님이 생육, 번성, 충만의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경외하라는 말씀이다.
[23] 예언서들은 예외 없이 명백히 바알 숭배에 대한 극렬한 경고요 생명의 왕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다.
[24] 호세아서에서 고멜은 물론 개인이기 전에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의미한다. 고멜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처녀들이 시집가서 다산하기 위하여 먼저 혼전에 바알에게 몸을 드려 태를 열어야 한다는 바알 숭배가 관습화되어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다산의 생산력을 얻기 위하여 바알 산당에 가서 바알 제사장과 동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생에 한 번은 남편 이외의 남자와 동침하는 것이다. 또는 다산이 안 되면 일생에 여러 번 같은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친혼으로 인하여 우생학적으로 열성이 나오는 狀況에서는 대단히 과학적인 문제해결의 방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한 과학은 필연적으로 바알 숭배로 시작하여 바알 숭배의 파국으로 귀결된다고 필자는 본다.) 호세아서에 전제된 이 바알 숭배의 사실을 알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의 수도, 이런 바알 숭배 풍습의 역사적 현장!) 수가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우물 곁에서 대화하신 이유는 우물이 바로 바알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은 바알 숭배의 허상을 드러내시고, 반면에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왕이심을 나타내시려 한 것이다. 그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 하신 것은 사마리아의 그 바알숭배 풍습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한다는 조상의 말은 바로 바알은 해당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에 거한다는 바알 숭배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하신 것은 인간의 바알 숭배 본능을 지적하시고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라크를 올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바알 숭배에 대한 경고와 예수님이 바로 세상에 임하신 생명의 왕 자신이심을 보이는 경우들 (대표적인 경우들)
[25] 마태복음 10:28에 “지옥”이라는 단어는 게엔나(Υεέννα)이다. 이 단어는 ‘게 헨나’라는 아람어의 헬라어 음역이다. ‘게 헨나’라는 아람어는 ‘게 힌놈’이라는 히브리어의 음역이다. ‘게 힌놈’은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힌놈의 골짜기는 바로 몰렉 신에게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제사하던 곳이다. 이것은 바알 숭배의 일종이다. 마 25:41에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 한 불”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명의 생산과 풍요를 위하여 사단=바알=몰렉에게 제사하던 그 불에 사단과 및 바알 숭배자들을 던져 넣으실 것을 말씀한 것이다. 호세아서의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라는 경고와 동일한 경고다.
[26] 마태 14:13-21=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핵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왕의 임재를 선포하는 복음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축사”이다 이 단어는 유로게오(εὐλοΥέω)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바라크의 헬라어 번역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에 축사하신 것은 인간 예수로서는 식사 감사 기도를 올리신 것이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으로서는 바라크(축복) 하신 것이다. 이 축복은 생육, 번성, 충만을 일으키는 생명력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다. “명을 발하신, 즉 말씀이 속히 달리면서”(시 147:15) 생육, 번성, 충만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왕 자신이 임하신 사실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바알 숭배적(=창조주요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연의 생산 시스템, 즉 춘하추동과 암수의 結合을 통하는 것만이 생명 생산과 풍요의 길이라고 믿는 방식의) 생명 시스템에 묶여 있는 理神論적 바알숭배자이다.
[27] 마태 24:15=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것은 제우스 상을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세웠던 일을 의미한 것이다. 제우스는 바알신의 동등신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단=바알=제우스임을 전제하고 있다.
[28] 요한복음 2:1-11= 포도주는 바알숭배 문화에서는 바알이 준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알이 생명의 신이 아니라, 자신이 생명의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신다. 그래서 어머니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 즉, 예수님은 바알처럼 여신과 結合함으로써 생산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9]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 우주의 그리고 이 지구의 만물에 대한 생명의 왕으로 증언되고 있다. 예수님은 사단이 자칭 생명의 왕처럼 인간을 속이며 그 위에 군림하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생명의 왕이신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예컨대 성령으로 나심으로써 창세기 6장의 육을 결과시킨 사단의 인간 여인들과의 혼인을 무력화하시며, 죽음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자신이 생명의 왕이신 것을 나타내시고, 오병이어 기적에서는 음식물에 대하여도 자신을 생명의 왕으로 나타내시고, 광풍 진압 기적에서는 자신을 바다에서도 생명의 왕이심을 보이시고, 변화산의 변화사건에서는 바알이 산의 신이 아니라 자신이 산의 생명의 왕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 우주의, 지구의, 인생의 모든 차원과 부분에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왕이신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 사함 받고 조용히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만물과 인생의 모든 영역의 생명의 왕에게 結合되어 이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왕의 종으로서 그리고 그분의 신부로서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루터는 신랑 예수와 신부인 우리 죄인 사이의 믿음에 의한 혼인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혼인한 부부는 이제 한 몸이다. 그래서 신랑 예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죄인의 모든 죄와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다 가져가시고 신부된 우리는 신랑 예수의 모든 좋은 것, 의와 거룩과 생명을 가졌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이제 이 세상에서 부족하여 더 채워야 할 것이 없다. 이제로부터 이 세상에 더 사는 것은 받은 사랑을 하나님에 드리고 이웃에게 주기 위해서다.
[30] 로마서 13:13=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기서 방탕이라는 단어는 코모스(κομω)이다. 그 뜻은 동네 축제를 의미한다. 즉, 디오니소스神을 섬기는 제의적 축제를 의미한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서 포도와 포도주를 담당하는 풍요의 신이다. 전형적인 바알신이다. 동네 사람들이 봄에 포도 농사를 시작할 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디오니 소스를 기쁘게 하려는 제의 축제다. 이날에 이들은 작년에 담은 포도주 통을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네 한가운데로 모여서, 포도주 통을 열고 포도주를 마시되, 디오니소스가 기뻐하도록 마시기 위하여, 포도주 마시기 경쟁을 한다. 그런 다음에 이날에 디오니소스신이 여신과 혼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들도 감응 제의를 드리기 위하여 혼음을 실행한다. 그리고 축제가 계속되면서 폭식과 폭음을 하고, 축제의 끝에 가서는 싸움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 가까웠으니, 바알을 섬기며 생명을 생산하고, 증산하고, 풍요를 추구하는 바알 숭배를 그만두라는 경고다. 그리고 바알 숭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편단심 충성하며 진정한 생명의 왕을 바라크 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생명을 누리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31] 오늘날 우리 사회와 심지어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바알(=사단)은 지금도 자칭 생명의 왕으로서 여전히 우리들의 바알 숭배 제사를 받고 있다. 그 증거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숨겨진 사단(바알)의 계략과 술수를 알기에는 우리 자신은 너무도 어리석고 우리 자신의 힘은 너무도 연약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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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의 ᄒᆞᄂᆞᆯ님이라는 개념도 이와 동일한 개념이다.
2) 우리나라의 민속 가운데 포도를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여겨, 포도 추수의 첫 열매를 며느리에게 먹여 자녀의 다산을 기원했다는 사실은
일종의 바알 숭배라고 볼 수 있다.
3) 인도에서는 오늘날에도 소를 신으로 여기는바, 황소를 바알신의 상징으로 여겨 섬겼던 이 시대의 바알 숭배로부터의 모종의 영향과
연속이 아닐까 생각된다.
4) 장영일, “한국교회와 바알종교”, 교회와 신학
5) ibid.
6) ibid.
7) ibid.
8) ibid.
9) ibid.
10) 필자는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신다는 말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라는 말로 표현하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축복이란 단어가 본래 복을 빌어
준다는 뜻이므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쓸 수 없다고 국어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바라크라는 단어도 본래 무릎을 꿇는다 뜻을 가진
바, 신적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복을 달라고 비는 모습을 표현했으리라고 필자는 본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바라크 한다
(1. 복을 약속한다, 2. 복을 이루어준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성경화한 것이다. 그리고 바라크가 때에 따라 하나님이 복을 약속한다는 뜻을 분
명히 지니고 있는데, 이 단어를 구별 없이 ‘복을 주신다, 복 내려 주신다’라고만 번역하면 성경의 의도에 정확히 일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축복이라는 단어 역시 무속의 상황에서 쓰이던 단어이지만(신이 내린 제단 앞에 무릎 꿇고 복을 달라고 비는 행위를 나타냈던 단어이지만),
우리도 이 단어를 성경화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약속한다’는 의미로,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빌어준다’는 의미로 쓰자고 필자는 제안한다.
11) C.A. Keller/G. Wehmeier, "ךרב brk pi segnen", in: Jenni/Westermann, Theologisches Hand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Chr. Kaiser Verlag München, 1978), p.355 참조.
12) Harvey Cox는 모든 고정된 가치체제 및 보수적 세계관을 ‘정착’이라는 이유만으로 바알숭배라고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계관
을 ‘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Anti-Baalism이라고 본다 (그의 책 세속도시 참조).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기존 가치체계와 질서를 공격하
라는 정치 신학적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 증거된 Anti-Baalism은 창조주요 섭리주이며 마지막 심판주이신 하나님만을 생명
의 왕으로 신뢰하며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을 고수하는 삶(=하나님에 대한 정착)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