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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31:9-18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시 31:9-18 / 여호와여, 이 몸을 어여삐 여기소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고통이 하도 심하여 눈에서는 진물이 나고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정말 탈진한 상태입니다. 10) 마음이 너무나도 쓰라려 이 목숨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싶습니다. 하도 많이 울고 또 울어 이 목숨이 잦아질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괴로워 이제는 힘이 다빠져 나간 듯하고 고통이 하도 심하여 뼈 마디마디가 녹아내린 듯 싶습니다. 11) 내 모든 원수들 아니,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까지도 이 몸을 경멸합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만날까 두려워합니다. 길거리에서 혹시 부딪치기라도 하면 비실비실 피해서 도망갑니다. 12) 이 몸은 죽은 거나 매 한가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습니다. 폐물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13) 원수들이 수군거리며 음모를 꾸미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아 옵니다. 원수들이 나를 쓰러뜨릴 궁리를 짜고 나를 잡아먹으려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14) 여호와여, 그러나 이 몸은 여호와 주님만을 굳게 굳게 의지하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15) 하여 이 몸을 주님의 손에 맡기오니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저 원수들 손아귀에서 건져 주소서. 16) 주님이여, 주님의 종인 이 몸을 바라보소서. 한결같은 주님의 그 애틋한 사랑으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7) 여호와여, 주께 부르짖사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이 몸을 건져 주시고 못된 짓만 일삼는 저들이 대신 수치를 당하게 해주소서. 아예 저것들을 스올에 떨어뜨려 다시는 입 하나 벙긋하지 못하게 해주소서. 18) 입을 벌렸다하면 거짓말이요 남 우습게나 여기고 목에 힘이나 주며 젠체나 하는 것들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비방하기에나 바쁜 저들이 이제는 입다물게 해주소서.
우리는 때로 인생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 낙심하고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힘을 줍니다.
고난의 현실과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9-13) 다윗은 자신의 전인격적인 고통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는 눈과 영혼, 몸이 근심으로 쇠약해졌다고 고백합니다(9). 이는 그의 고난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영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인간의 내면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으로 다윗의 절망이 그의 존재 전반에 미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슬픔으로, 연수가 탄식으로 소진되고 있다고 말합니다(10). 자신이 잊힌 죽은 자 같고, 깨어진 그릇 같다고 표현합니다(12). 깨어진 그릇이 쓸모없게 여겨지고 버려지듯이 다윗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과 고통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14-16) 그러나 다윗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그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때가 주의 손에 있음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때’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의 생애와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사”(16)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제사장의 축복 선언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민 6:24-26).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드리는 기도(17-18) 다윗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신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고 스올에서 잠잠하게 되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스올은 죽음의 장소를 가리키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악인들의 최후 심판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시 9:17; 49:14). 다윗은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 의인을 대적하며 속임과 멸시로 말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시기를 구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의 모든 삶은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 베푸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구원을 바라보십시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거릿 미첼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다리를 다쳐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회복 기간엔 집에서만 지내야 했습니다. 자기 일에 큰 자부심이 있던 그녀는 이 사실에 낙심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책을 쓰기 시작했고 10년간의 집필 끝에 책이 나왔지만 어느 출판사에서도 선뜻 무명작가의 책을 내겠다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 뉴욕에서 제일 큰 맥밀런 출판사의 사장 레이슨이 애틀랜타에 온다는 소식에 기차역으로 찾아가 그를 붙잡았습니다. 처음 사장은 관심이 없었지만 미첼의 계속된 끈질김에 결국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회는 어느 날 자연히 찾아오는 행운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것이 기회입니다.
< 설 교 >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 31장 17~19절 / 김경형목사
17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어떤 사람들을? 악인을. 음부는 무덤이다. 무덤에 들어간 자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의인이 무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그 의인을 기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바울은 죽었으나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그의 신앙사상을 성경이 말을 하고 있다. 많은 기독자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신령천국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찬송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념될만한 것이 없다. 자타를 해롭게만 하고 살았으니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도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누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소리를 들었느냐? 가룟유다가 예수님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향해서 ‘차라리 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뻔 했다’ 라고 하신 이 말씀이 ‘차라리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를 안 만들었으면 좋을 뻔했다’ 그런 뜻인지, 아니면 가룟유다를 하나님이 아닌 마귀가 만들었다는 그 말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로 하여금 구원을 잘 이루라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는데도 이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평생 동안 마음 속에 돈만 생각하며 예수를 팔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가룟유다에게 닥칠 형벌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네가 차라리 안 났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하신 것인지?
사람을 누가 만드는 거냐? 하나님이다. 그러면 가룟유다는 누가 만들었느냐? 마귀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느냐?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룟유다에게 ‘아차, 내가 실수로 너를 만들었구나’ 라고 한다거나 ‘나도 모르게 마귀가 가룟유다를 만들어 놓으니 가룟유다가 마귀 짓만 하는구나’ 이건 아니다. ‘돈 욕심내는 그 마음을 뿌리 뽑고 참 사람이 되라고 너를 불러서 예수를 따르도록 했는데 네가 3년 동안을 따라다녀도 어찌 그러냐?’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의 영원한 미래가 염려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룟유다를 마귀가 만든 것처럼 생각을 해서 가룟유다는 날 때부터 아예 지옥에 갈 자로 태어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들을 한다. 이건 이단적인 말이니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목사님들도 보면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느냐, 천국에 갔느냐?’ 하고 물으면 다 지옥에 갔다고 하지 천국에 갔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가룟유다가 천국에 간 것으로 본다. 왜냐? 가룟유다가 아무리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였고 사도였다. 그리고 성경에 이 가룟유다를 사도로 기록을 해 놨다. 성경을 기록케 하신 성령님께서 이걸 잘 몰라서 지옥 갈 자를 사도라고 기록을 하게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정신없는 성령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을 해야 한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부모님들로부터 책망을 받고, 그래도 워낙 말을 안 들으면 ‘너 이놈,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하면 그 자식이 그 말을 그대로 듣고 진짜 부모가 아닌 것으로 알고 밖으로 나가버리느냐? ‘내가 말을 안 들으니 부모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저런 말씀을 하실까?’ 이런 게 있는 거다. 더 심하게는 말을 안 듣는 자식에게 ‘너는 사람도 아니다. 개만도 못한 놈아’ 라고 하면 그 즉시 ‘나는 사람이 아니다. 개 엄마를 찾아가야지’ 하느냐?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게 있는 거다.
우리교인들은 확실히 알기 전에는 ‘가룟유다가 천국에 갔다. 지옥에 갔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가룟유다가 천국에 갔다고 말을 하려면 거기에 대한 증거를 대주어야 하는데, 성경도 많이 안 읽고, 왜 천국에 갔는지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섣불리 말을 하면 안 먹혀 들어간다.
만일에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왜 지옥에 간 거냐? 예수를 죽였기 때문이냐, 돈을 좋아했기 때문이냐? 가룟유다가 무엇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었느냐? 돈 때문이다.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돈 때문에 예수 팔고, 돈 때문에 친구 팔고, 돈 때문에 부모 팔고, 돈 때문에 자식 팔고 하는 일이 있는데, 그러면 예수를 믿는 이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는 거냐? 이런 게 다 뭐냐? 인신매매다. 다른 게 인신매매가 아니다. 가룟유다가 인신매매 짓을 한 거다. 팔 때는 그냥 파는 게 아니라 돈을 받고 파는 거다.
세상에 인신매매가 많은데,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교회 안에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정신 사상적으로 교인을 팔아먹는 목사도 있다. 이건 인신매매 목사다. 성경은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는 거고, 또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고 해석을 하는 거다. 그래야 자타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세상에는 선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악하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악하게 사는 것은 인명과 재산에 해를 주는 거고, 의인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하니 시간도 들어가고 물질도 들어간다. 그런가 하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쁜 짓도 아니고 좋은 짓도 아니고, 그러니까 자기 혼자 벌어서 자기 혼자 먹고 자기 혼자 산다면 보통 이런 사람을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선하게 사는 것으로 보지만 아니다.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이고 악을 행해야 악인인데,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도 악인에 속하는 거다.
믿는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는데, 일반적인 선 그 이상인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너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는 이게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선하게 사는 사람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선한 사람으로 살게 하려면 내가 상대에게 하나님의 선한 말을 내어서 상대가 그 선한 말을 들으면 상대도 선한 사람으로 바꿔지고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이 일에는 교훈이 들어가고, 대화가 들어가고, 깨우침이 들어가고, 행동이 들어가는 거다. 이게 선한 사람이요 선행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선이 아닌 예수님을 안 믿는 세상에서 막 퍼 주는 걸 선으로 많이 안다. 물론 막 퍼 주면 받는 사람은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걸 탁 끊으면 무슨 소리를 하느냐? 마음이 변했다고 한다. 믿는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에 있어서 물질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고, 가다가 끊기도 하고, 책망도 하고, 칭찬도 하는 거다. 그래야 사람이 만들어진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의인이다. 이렇게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살게 되면 이 의인의 삶은 영원히 자랑이다. 죽음 저 넘어가서 신령천국에서도 자랑이다. 계:에 이 자랑이 나온다.
좋은 연장을 만들려면 쇳덩어리를 풀무불 속에 푹 집어넣어서 빨갛게 달군다. 그 쇠가 완전히 달궈지면 그 쇠에서 빛이 난다. 이럴 때 그 쇠를 꺼내서 막 두들기는 거다. 그러다 또 식으면 또 풀무 속에 집어놓고 달군 후에 다시 꺼내서 두들기다가 물속에 집어넣었다 빼고 한다. 이럴 때 이 쇠를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을 한다면 ‘아이고, 나 좀 그냥 놔둬라. 왜 자꾸 집어넣었다 빼서 두들기고, 또 다시 달궜다 빼서 두들기고 하느냐?’ 라고 할 거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좋은 연장이 되어 나오는 거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은 거다.
사람은 마음으로 느끼는 게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부드러운 게 있고, 강한 게 있고,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고생을 안 해 봐서 그런지 완전히 이기주의다. 공부는 많이 했는데 사람이 정말로 까칠하다. 인간미가 안 난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희로애락의 느낌이라든지, 오각의 오감성 이런 면에서 하나님처럼 다듬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진리와 함께 성령의 기름칠이 자꾸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세상에서 남에게 줄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르면서 자기만을 위해서 그저 평범하게 산다면 이 사람의 인격이 별 가치가 없다. 사람은 사람 가운데 살면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며 사람이 만들어져 가는 면에 잘 다듬어져 가는 거다. 그래서 다 그럴까마는 자식이 혼자 있는 집의 자식은 다듬어지기가 참 힘들다. 그러니 자녀를 낳을 수 있으면 많이 낳아라.
우리교인들은 자식을 많이 낳아서 진리의 말씀으로 훈련과 교육을 잘 시켜서 외국에도 나가서 진리의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하라. 예수를 믿는다면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지 자기 혼자 벌어서 자기 혼자 먹고, 자기 혼자 살고, 자기 혼자 교회에 다니고 한다면 이게 무슨 맛으로 사는 거냐? 좋은 일에는 달라붙어서 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시고 짜고 맵고 한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뜨거우려면 뜨겁든지 차거우려면 차든지 해야 하는데 미지근한 사람은 맛이 없다. 우리는 정신은 칼날 같고 생각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얼마든지 이해도 하고 아량을 베풀 줄도 알되,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에는 아주 칼날 같아야 한다. 정신이 발라야 된다.
18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위치와 분수를 알지 못하면서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가 나서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을 말한다. 위아래도 모르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완악한 사람이란 성질이 거칠고 고집이 센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다 싫어한다. 성격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왈가닥 거리고, 남을 두들겨 패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다 싫어한다.
신앙적인 면에서 교만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무시하며 자기 주관성이 강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옳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말만 냅다 해 댄다.
다른 사람의 말이 옳은 말인지 그른 말인지를 알려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딱 세워놓고 그 사람의 말을 다 들어보고 난 후에 하나님의 기준에 입각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말을 해야 한다. 무턱대고 ‘잘못이다. 아니다’ 이러면 못 알아듣는다. 이건 지혜롭지 못한 거다.
교회 안에서 이게 아닌 사람의 행동 자체를 놓고 ‘잘 됐네. 못 됐네’ 한다면 이건 일반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의 말이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은 뭘 보신다? 중심을 보신다. ‘중심이, 마음이 어떻기에 저런 행동을 하는 건가?’ 이게 있는 거다. 그러니 그 중심을 염두에 두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잘 분해를 시켜주면 듣는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이 되는 거다. 이게 참 좋은 교훈이다.
다른 사람의 옳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니다. 이런 사람과는 싸우지 말고 가만 내버려둬라. 왜냐? 그러다 실수를 할 것이니까. 자꾸 실수를 하게 되면 내려가게 되고 그 고집이 쑥 들어가 버린다. 그래도 그 고집이 안 죽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래도 네가 그 고집을 못 꺾겠느냐?’ 하는 사건이 오게 된다. 교회 안에서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사와 뜻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잘 안 듣는데, 소위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게 많다. 잘 새겨 들어라.
완악한 사람은 진리의 신앙노선으로 가는 의인들을 훼방하고, 악한 말로 모함하고, 의인들을 치고, 고통을 준다. 한 마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주관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전부가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고집이 없는 사람이 있느냐? 다 고집이 있지만 다만 그 고집이 좀 덜하고 강하고 그 차이밖에 없다. 그 고집이 진리로 인한 고집이라면 그 고집은 포괄적이고 넓어야 한다.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알고, 기다림도 있고, 인내심도 있어야 한다. 이런 정신은 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않은 고집은 자기의 마음 문을 닫아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게 있다. 이러면 외톨이가 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사람 가운데 살겠느냐?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거짓 입술이란 어떤 입술이냐? 거짓말을 하는 입술이다. 그러면 뭐가 거짓말이냐? 세상 불타질 것을 자랑하는 말이 거짓 입술이다. 거짓 교훈이다. 그러니까 거짓 입술은 하나님 앞에 의인의 말을 반대로 뒤집는 말이 된다. 의인은 하나님의 기준을 자꾸 제시를 하고 그 기준의 사람이 되게 만드는데 거짓된 사람의 가르침은 이걸 완전히 세상 쪽으로 뒤집어 놓는다. 그러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향해져 버린다.
바다에서 돛단배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바람이 그 배 앞에서 분다면 이 배는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로 가진다. 이럴 때 앞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돛으로 앞에서 부는 바람을 역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배 뒤의 키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바람이 배 앞에서 불 때 돛의 각도를 바람 비스듬히 잡으면 바람이 그 돛을 치게 되고, 이러면 배가 앞으로 비스듬히 나가게 된다. 이럴 때 키로 방향을 잡아가며 앞으로 가면 된다. 배가 앞쪽의 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나가려면 돛과 키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세상풍랑을 딛고 앞으로 나가려면 제일 기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나가야 한다.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라고 했는데, 의인을 친다는 말은 의인들이 증거하는 말을 뒤집고 그 의인들의 인격을 깎아내려서 의인들의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말을 말한다. 곧 세상과 세상 것을 전하고 가지라고 하는 말이다.
‘벙어리 되게 하소서.’ 그러니까 현재적으로 벙어리가 되어있다는 말이냐, 안 돼 있다는 말이냐? 벙어리가 안 돼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육적으로는 벙어리가 아닌데 영적으로는 벙어리가 있을 수 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본다고 하는데 영적으로 보면 소경도 있고, 육신으로는 옷을 잘 입은 부자인데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벌거벗은 사람도 있다.
영적인 면에서 분명히 벙어리인데도 육신의 입술로 제 마음대로 말을 하니까 영적인 면에서 벙어리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영적인 면에서의 벙어리는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말을 못한다. 이게 벙어리다. 이런 벙어리라도 옳은 것을 자꾸 배우다 보면 더듬더듬 말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커가면서 점차적으로 말을 하게 되듯이 우리교회 교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못 알아 들었는데 계속 듣다보니 이제는 말씀을 알아듣고 옹알거리는 사람도 있고, 능숙하게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귀가 먹으면 이 사람은 말을 못한다. 왜냐? 사람의 말을 못 들었으니까 입으로 사람의 말이 안 나오는 거다. 우리가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해도 그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맨 세상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전도를 하게 되면 맨 세상 말밖에 안 한다. 이거는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말을 잘 한다고 해도 벙어리다.
하나님의 옳은 이치를 많이 듣고 깨달아야 그것이 자기 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그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그 옳은 이치가 입으로 나가게 된다.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분명히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이다. 이게 아닌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면 이것은 악한 자요,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의인을 치는 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 영원히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은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입술이니, 계속 그렇게 나가다가는 영적인 벙어리로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된다. 그래서 성도다윗이 악인들의 입술은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을 ‘벙어리 되게 하소서’ 라고 하는 말로 깨닫게 해주는 거다. 그런 자들을 향해서 ‘벙어리 되게 하소서’ 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런 신앙정신을 가지면 이미 벙어리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가 입술로 말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얼버무리는 건지, 아니면 몰라서 말조차 못하고 있는 벙어리 상태인지, 아니면 말을 하는 시늉만 내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사전달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건지 자기의 영적 상태를 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저주와 축복이 사람의 입술에 달린 게 아니라 자기 할 탓이다.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거짓과 모순투성이요, 악한 것이 많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사람을 해롭게 하는 요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하다. 따라서 인간을 하나님처럼 믿을 존재가 안 된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처럼 믿으면 이 사람은 반드시 슬픔과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지 않다. 천지만물의 창조의 주시요, 우리 인간의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지으셨다. 또한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아닌 주께 피하는 자에게 주시려고 쌓아놓은 은혜가 많다. 그걸 누구에게 주려고 쌓아 놓은 거다? 인간들 앞에서 주님께 피하는 자에게 주려고 쌓아 놨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할 줄 알아야지 사람이 무서워서 주님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들어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게 없어진다.
그러면 주께 피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예배당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 이게 주께 피하는 거냐? 인생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 진리생명의 말씀을 찾는 사람, 인격적으로 주님처럼 온전하게 만들어지고자 하는 정신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 주님께 피하는 거다. 이런 사람은 쌓아 놓은 하늘의 보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지푸라기 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더 무서워하고, 보잘 것 없는 지푸라기 같은 인생을 더 의식하고, 더 기대고, 더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복은 없어진다. 인생들의 하잘 것 없는 가르침을 따라간 결과는 자기 고통으로 돌아오고 만다.
성경에는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고 간 믿음의 선진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역사적으로 그 증거를 보여준 인물들이 많이 있다. 다니엘은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 왕의 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켰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부러워할 줄 알고, 그런 감화성, 그런 신앙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을 해 봐라.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장 9절 / 이준행목사
서론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 그들을 섬기다가 대장암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영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이런 감동을 느꼈고, 이 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이태석상’을 만들어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태석상’을 받은 분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외과의사로 선교의 일을 하는 부시맨 닥터의 별명을 가진 이재훈 선교사입니다.
이재훈 선교사를 비롯한 그 친구들을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시절에 전주침례교회에서 제자훈련하며 가르쳤습니다. “세계를 품고, 선교를 꿈꾸자”며 양육했는데, 그 친구들이 중국 선교사로, 캠퍼스의 교수로, 의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3년 전에도 그 친구들이 저희 교회를 찾아와서 함께 저녁식사하며 사역의 은혜들을 나누며 더욱 충성할 것을 다짐했었습니다. ‘이태석상’은 이재훈 선교사가 받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괜히 제 마음이 뿌듯하고 벅찬 감동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구촌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화요일 저녁에는 선교위원들과 함께 선교사 안식관을 방문하여 여러 나라에서 섬기시는 선교사님들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현지에서 충성을 다하여 섬기다가 잠시 안식년을 맞아하여 회복과 충전을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교제하는 중에 사모님들이 심각한 병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백혈병으로, 뇌경색으로, 혹은 산부인과 계통의 질병들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되는대로 선교현장으로 떠나갈 준비를 서두르며 사랑을 준비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며칠 전에는 참담한 고통의 소식이 자녀를 둔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전국 1등해라. 서울대 법대를 가라. 너는 의지가 약하다.”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며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때리기까지 한 어머니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고등학생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해서 안방에 8개월이 넘도록 시신을 유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는 부모님들은 패륜을 저지른 몹쓸 아들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공부의 스트레스를 받는 자녀들은 무관심한 아버지와 자녀를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해도해도 너무한 부모님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가장 사랑해야할 관계가 깨져갈 때 고통을 받습니다. 저도 이 뉴스를 보며 가슴이 꽉 막혀오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이와 비슷한 고통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부딪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분노, 억울함, 적대감, 열등감 등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치료하지 못하고, 자녀를 지원해주지 못하는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겪는 고통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한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장인이었던 사울왕에게 쫒기기도 하고, 아내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아들의 반역도 경험했습니다. 적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침을 흘리며 미친 짓을 하기도 했고, 배고파서 광야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한 순간의 유혹에 무너져서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와 간통하는 죄를 짓기도 하고, 그 죄를 감추려다가 충직한 신하를 살해하라는 살인 교사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 죄들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서 부끄러움으로 고통 받아야 했고, 죄책감으로 뼈가 삭아가는 아픔도 느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그 고통을 극복해나가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래가 시편 31편입니다.
9절,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8절에서는 원수들의 압제로 인한 억울함과 분노를 이겨내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래지만, 9절부터는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일어난 고통의 문제를 극복해나가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래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출발할 때부터 약했습니다. 형들보다 약해서 전쟁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군인으로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 있는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려고 나갔다가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약함과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골리앗의 오만함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나간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나갈 때 다윗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약하다고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믿음이 그 약함을 지지해주면 약할 때도 강해집니다. 능히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는 담대한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을 믿음이 지지해주지 못하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약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패배하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습니다. 두려움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돌아가시는 전날 밤에 베드로가 약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도 더 약한 여종이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다.”라는 말 한 마디에 무너진 것은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약했지만 그 약함을 지지해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런 믿음이 약함을 지지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약할 때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런 다윗이 왕이 된 어느 날 두려움이 그 마음속을 파고 들어옴을 느꼈습니다.
13절,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골리앗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다윗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이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자신의 신하인 우리야 장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가? 어떻게 밧세바와 간통할 수 있는가? 이런 자를 어떻게 왕으로 섬기겠는가?” 이런 비방이 들려왔습니다. 남편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남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만방에 비방하는 길입니다. 목사를 무너뜨릴 가장 빠른 길도 목사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모일 때마다 비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무너뜨리지 않고 세우기를 원하신다면 비방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왔던 하이도벨이라는 모사는 밧세바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들은 압살롬과 함께 밧세바 사건에 대해서 복수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과 반역이 다윗 자신의 내부에 있는 죄책감에 불을 질렀습니다. 죄가 있는 마음에 믿음이 설 수 없습니다. 믿음을 세워가지 못할 때 두려움이 싹터옵니다.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나를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하나님, 두렵습니다.”
죄책감이 있을 때는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을 때가지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을 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디어집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죄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일으킵니다. 결국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 죄를 책망하고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 뼈가 삭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두렵습니다.” 약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22절,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합니다.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 주님도 다윗을 포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깜작 놀랐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내용이 시편 51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여 주세요. 나의 죄를 씻어 주세요.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세요.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져주세요.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세요.” 침상을 적시면서 뼛속 깊게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죄는 독약과 같습니다. 온 몸에 퍼지면서 영혼의 눈도 멀게 합니다. 죄는 믿음으로 사는 일들을 방해합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심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죄책감이 그를 지배하면서 죄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설교도 듣기 싫어지고, 기도하기도 싫어집니다. 형제들과 교제하며 마음을 여는 일도 두려워집니다. “옛날에는 은혜가 넘치더니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너무 멀리 떨어져 사는 것 같다” 이런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약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용서함을 받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죄를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살아서 넘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방하기 전에 이미 제가 제 자신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제가 범죄 했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시지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두려워서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에 빠져서 울고 울며 통곡했습니다. 말은 하지 않을지라도 함께했던 다른 제자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러나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강한 시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통로입니다. 주님은 “네가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맞아도 예수님께 가서 맞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잘못해서 부모님께 회초리로 맞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도망가면서 회초리의 끝으로 맞으면 엄청 아픕니다. 그러나 “엄마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며 품으로 파고들면서 맞으면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단하는 손으로 다윗을 안아주셨습니다. 이것이 회복의 길입니다.
24절,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다윗의 노래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던 다윗이 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서 다시 일어서며 외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골리앗 앞으로 나갈 때의 모습을 회복했습니다. 그의 약함 속으로 믿음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가슴에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새겨졌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움이 떠나는 소리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치는 신앙고백의 소리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이란 주님께 매달리는 손입니다. 믿음이란 능력의 주님을 소유함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는 승리의 나팔소리입니다.
약하십니까? 지혜가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육체적으로도 병들어서 약하십니까? 관계로 고통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으로 고통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분은 자신이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디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고통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약해서 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패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시 31장 9~16절 / 김광일목사
충북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드릭 밀러(Frederick S. Miller), 한국명 민노아(閔老雅)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1892년 부인 안나 리네이크(Anna Reinecke)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그는 1902년부터 청주에서 37년을 활동하면서 경기 남부와 중부권 복음화를 위해 온 생애를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청주에 살던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이 경기도 죽산으로 행상을 갔다가 사경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돌아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충북 최초 교회인 신대리 교회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선교본부에서 민노아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년 뒤 1903년에 아내마저 3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선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까? 사람들은 수군대었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가 복음이라면서, 예수가 사랑하신다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밀러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바로 찬송가 96장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함께 부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되고 우리 영광되시네.” 그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계속 신뢰하려고 눈물을 삼키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 가운데 있었으나 이것들이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믿으며 또 이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실 일을 알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의 무덤이 서울 양화진에 있음에도 그는 청주를 떠나지 않고 1937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위한 작은 흉상 하나 없으며 기념관도 없고 그저 초라하게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 꾸미지 않은 기념비 하나가 고작인 사람이지만 그는 신앙의 거장이었습니다. 오롯이 믿음 안에서 고통을 이겨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본 시는 대적들의 공격으로 일생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다윗이 고통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는 비탄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고통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다윗의 간구입니다.
본문 9절에 나오는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는 원어로 ‘리 자르 키’인데 ‘삶의 상황이 좁은 상태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안전하고 평안한 넒은 곳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괴로운 좁은 곳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의 현실에 당당히 맞서며 하나님의 손길이 찾아올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고통 중에서 다윗은 어떠한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까?
첫째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지선 자매는 교통사고로 중화상을 입은 후, 10년 만에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얼굴과 몸은 화상으로 일그러졌지만 자신이 지금 누리는 행복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재처럼 타버린 나에게 하나님께서 화관을 씌워주셨다”고 간증합니다.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인생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저도 사람이고 저도 여자입니다. 여자들 마음은 그렇거든요. 미용실에서 앞머리가 조금이라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짧게 잘리면, 거울을 볼 때마다 앞머리를 잡아당기면서 그 미용실 갔던 것 후회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이 여자 마음입니다. 한 달이면 다시 길어질 머리카락인데도 말이지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변할 가망이 없는 얼굴을 보면서 제 마음 안에 평안함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 것,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은혜만 있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고통을 아름답게 바꾸는 위력이 있습니다. 더 이상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라고 말하지 말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 중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여기의 ‘은혜를 베푸소서’는 원어로 ‘흔네니’인데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허물과 연약함을 가진 다윗은 구원을 기대할 공로나 업적이 자신에게 없었으나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히스기야 역시 이사야 38장 17절을 통해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통을 통해 평안을 주신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까? ‘고통’과 ‘평안’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고통은 신앙의 정결함을 빚어내는 개념입니다. 세상이 주는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허무하게 끝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은 말할 수 없는 평안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고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내게 구원을 베푸소서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교수에게 학생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 길로 걷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광야와 사막이 없다면, 또 인생의 그런 고통이 없다면 교만한 인생이 얼마나 더 교만해지겠느냐? 그들이 어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겠느냐? 광야와 사막을 만났기에, 그 고통을 겪고 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된 것이 아닌가.” 광야 길은 혼자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기도하였을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면서 고통 중에 경배드렸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여기의 ‘나를 건져주소서’는 원어로 ‘핫칠레니’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고통받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믿는 섭리 신앙입니다. 원수의 손에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때로 소망이 없는 것 같은 고통 중에 처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도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셋째로 내게 사랑을 베푸소서
1920년에 세상을 떠난 핸들리 모올(Handley C. G. Moule) 박사는 영국의 탁월한 성경 교사요 작가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영국 탄광에서 일어난 참사 현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갱에서 사고를 당한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올 박사가 할 일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런 끔찍한 재난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옳은 쪽으로 귀결되리란 것도 압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신 오래된 책갈피를 갖고 있습니다. 이 책갈피는 비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책갈피 뒷면을 보았더니 실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더군요. 얼핏 보면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책갈피를 뒤집어 반대쪽을 보니 거기에는 아름답게 수가 놓여 있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책갈피에서 실들이 얽혀 있는 쪽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대쪽을 보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날이 되면 책갈피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가끔 비극에 부딪히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는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 뒤에 숨어야 합니다. 설령 겉으로 나타나는 현실이 진리와 정반대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기의 ‘사랑하심으로’는 원어로 ‘베하쓰떼카’인데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으로’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시고’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랑이 뚜렷하게 나타난 시기입니다. 이스라옐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체험하고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닥쳐오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백성들에게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려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셨고 배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기에 우리는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캐서린 마셜(Catherine Marshall)의 ‘다시 살다 (To Live Again)’라는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상원의 채플린이었던 남편 피터 마샬 목사의 급작스런 죽음은 캐서린에게 짙은 슬픔과 산더미 같은 문제들, 막막하기만 한 살림과 아버지를 여윈 어린 아들만 남겨 놓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캐서린은 악몽 같은 사간을 발버둥치며 헤쳐 나갔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나는 피터가 종종 사용했던 기술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성경에서 다급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특별한 약속을 찾아낸 다음 거기에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적용하고 그 약속을 개인과 하나님이 맺은 분명한 거래라고 주장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피터가 즐겨 인용하던 말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자기 성경에 적어 놓았다. 그것은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 말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고 명예로운 한 신사가 한 말이다. 그 말에는 목적이 있다.’ 바로 그런 정신으로 나는 나 자신, 그리고 피터와 나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아들을 위하여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였다. 리빙스턴이 믿었던 그 약속은 바로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우리가 이해하는 일과 이해하지 못하는 일, 즐거운 일과 비극적인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었다. 슬픔과 고통 중에 있던 캐서린에게 이 성경 구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캐서린은 20세기 가장 훌륭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캐서린이 ‘모든’을 ‘우리가 이해하는 일과 이해하지 못하는 일, 즐거운 일과 비극적인 일’이라고 해석한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통은 은총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 버리면 안 됩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신뢰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소망이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해도 소망의 끈을 놓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부디 고통 중에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고통 중에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통 중에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 31장 9~16절 / 안효관목사
마가복음 5:1-5
한 젊은이가 서울 노량진의 한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던 학원생들 중에는 가난해서 신문 배달이나 칠판 닦기를 해서 학원비를 벌어야 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하는 고액 과외비에 비하면 학원비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벌려고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찬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로 그런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서울 달동네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려 7년을 투자해서 한 권의 책을 엮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과로한 나머지 글을 쓰다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귀가 울리는 이명 현상 때문에 예배당 밖에서 주일 설교를 들어야 했고, 심한 어지럼증 때문에 딸아이의 킥보드를 지팡이처럼 끌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는 골방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그가 쓴 책에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졸랐습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제가 TV에 나가서 한 시간만 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물론 그는 그런 제안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쓴 「연탄길」이란 책이 KBS TV프로인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영됐습니다. 그 결과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50만 권 이상 팔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역대상 29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에 우리의 일생이 좌지우지됩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에 손에 있나이다"하는 다윗의 고백은 우리 모든 사람의 가장 정직한 고백이어야 하고, 또 정직한 양심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건대 우리는 그렇게 고백할 수에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1편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다윗이 이 시를 쓸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곤경 중에 있었습니다. 9-10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탄식하며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지금 다윗은 쇠약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온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습니다. 근심 때문에 눈과 혼과 몸이 다 쇠해졌습니다. 구약 시대에 '눈'은 건강의 척도였습니다. 그러기에 9절에서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말은 지금 건강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내 기력이 나의 죄악(고통)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너무 극심한 고통 때문에 기력이 약해졌습니다. 뼈가 쇠해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지금 극심한 고통과 근심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기진맥진하여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그런 약한 몸을 이끌고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온 몸에 기력이 쇠진하여 비틀거리며 겨우 몇 발자국 걸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몸을 이끌고 밖을 나가보면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것같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일수입니다. 다윗은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배척당하여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상태였습니다. 11-13절에서 그걸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대적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러니'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들까지도 자기를 외면하고 모욕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자 아무도 자기 곁에 있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절친했던 친구들조차도 자기를 외면합니다. 한참 명성을 날릴 때에는 주변에 몰려들던 그 친구들조차 - 자신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줄 것만 같던 그 친한 친구들조차 다 떠나가버렸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도 모두들 피하기 바쁩니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래서 가까이 하면 자기들도 전염병에 감염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윗을 피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 옆에 있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느 곳 하나 자신의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뉘어놓고 쉴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백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몇 발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고, 주위에 절친했던 친구들도 모두 외면하고 사람들은 나를 볼 때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 대하듯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같으면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뭘 하겠나' 하는 자괴감에 사로 잡혀 심한 우울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저주하고, 욥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비통함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절망의 기운을 단칼에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 신앙인들이 가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간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택하신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자녀가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계시기에 그분께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를 의지합니다." 몸은 고통으로 인해서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만큼 쇠약해졌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심지어 나를 해치려고 하는 음모가 있다 하더라도 - "그러하여도 여호와여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앞뒤 좌우를 둘러보아도 어느 곳 하나 나를 위로해 줄 곳이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이런 고백이 절망의 기운을 끊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다윗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15절)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하는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해석들 모두가 나름대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모든 때가 주님 손에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는 말에서 "시대"라는 단어는 "때"(정한 시기)를 말합니다. '내 삶의 모든 때가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 지혜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맞는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여러분, 그런데 문제는 그 때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모든 삶의 때는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고,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미워하고 친구들조차 나를 떠나버렸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때가 찾아오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울 왕에게 미움을 사서 도망 다니기를 한 두 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손에 잡혀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를 영원히 도망자로 살게 하지 않으실 것이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실 때가 올 것이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왕궁을 떠나 피난자 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그런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때가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지금 너무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고 계신 분 혹 계시지 않습니까?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데, 왜 이미 내 인생에 문제들이 많은지, 하루도 문제 없는 날이 없는 것같고, 힘들지 않는 때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분도 혹 계시지 않습니까? 사업이 잘 풀려지지 않아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하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괜한 오해 때문에 너무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가정과 자식의 문제가 풀려질 것만 같은데, 여전히 풀려지지 않아 지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나 아픔이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 -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 모든 문제와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의 얼굴에 기쁨과 행복의 꽃이 피어나는 그 때를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희망과 행복, 치유와 회복의 때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내 생명이 주의 손에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는 말은 "내 생명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건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러 차례 생명에 위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골리앗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의 나이는 채 스물도 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입는 갑옷을 입기에 아직도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 훈련된 장수들도 두려워하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말렸습니다. 너 같은 어린 소년이 골리앗과 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형들은 다윗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손꼽 장난처럼 생각한다고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37)
양을 치면서 수많은 맹수들을 만났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맹수의 이빨과 발톱에서 나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 장수 골리앗 - 하나님을 모독하는 저 원수 앞에서도 나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의 칼날 앞에서 다윗의 생명을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에게 오히려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때에도 - 수많은 군사를 풀어서 자신의 생명을 찾을 때에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명을 보호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윗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서 보호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찌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한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비밀히 감추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3> 매일 매일의 순간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는 말은 '매일 매일의 순간이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 순간은 모두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주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작은 삶 하나 하나가 모두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삶 전부를 맡기고 살아가면 우리는 평안을 누리를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있는 우리의 생명과 삶을 마치 내 것인양 내 마음대로 고집하며 살려고 하면 거기에는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전부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확고한 계획을 세워 놓아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의 삶 전부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주님 손에 있습니다"하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주어집니다.
여러분, 매일 이런 찬양을 부르며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4> 내 앞날이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는 말은 '내 앞날이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 그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지금의 모든 삶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순간들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도 "나의 앞날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시대'라는 말을 '운명'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내 운명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다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쳐보아도 내 인생이 내 손아귀에 주어져있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손아귀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 어찌 자신의 앞날을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앞날은 절대로 운명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사주팔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걱정스러운 앞날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갈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앞날,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앞날이 나보다 힘이 센 어떤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앞날을 위해서 힘있고 빽 있는 어떤 사람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뇌물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직장에서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상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권력가의 손이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손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의사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생애가 마귀의 손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신약에서 읽은 말씀을 보세요. 마귀의 손아귀에 붙잡힌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는지 모릅니다. 마귀의 손에 붙잡히니까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귀신의 손에 붙잡혀서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쇠사슬로 매어 놓아도 다 풀어버립니다. 사람들이 말려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구별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도 합니다. 자기 몸을 스스로 자해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쌍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마귀의 손에 붙잡히면 그렇게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손에 붙잡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운명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은 자비의 손길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늘 그 자비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손은 병든 자를 만지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는 손입니다. 그 손은 두려움과 고민 가운데 있는 우리의 심령을 어루만지시고 평강으로 채워주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그 손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거룩한 사랑의 손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바로 그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절대로 악한 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를 꼭 붙잡고 계십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손길입니다.
여러분! 그 능력의 손에 우리의 모든 삶과 생애 전부를 맡기십시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병든 몸과 모든 삶의 문제를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축복의 손길로 우리를 안으시고 가장 좋은 것들로 우리의 삶에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시 31장 11~15절 / 안양준목사
인생을 살아 가면서 어떤 큰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읽은 시 31: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이 인생의 많은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후에 자신이 곤고한 날에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들을 소개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돌리면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길 것을 권면하기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본 시편의 배경은 삼상 23: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이 사울을 피해 마온 황무지로 은신했을 때 쓰여진 글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받은 자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보면 고난의 세월이 많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니 우리가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도 역경의 날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모든 삶이 순풍에 돛단 듯이 편안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겪는 시련과 고통을 똑같이 겪을 수 있고 아니면 그 이상으로 겪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마 5:4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도 내리우심이니라”
여러분들도 살면서 자주 느끼시겠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악인과 선인의 구별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삶을 누리는가 하면 선한 사람이 더 심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이것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리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선한 사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누릴 수 있게 주셨고, 고난도 불의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에게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최소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남들보다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적인 기준이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들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그런 어려움을 당한다면 왜 어렵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다윗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고 할 정도로 믿음 좋은 다윗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다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믿음 좋은 다윗은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어떤 때는 주어진 현실에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참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바라보며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늘을 향해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절규를 통해 인간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1. 믿음의 사람도 환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로 인해 쫓겨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굶주림에 지쳐 있을 때 놉 땅에 있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드리는 진설병을 얻어먹고는 원기를 되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얼마 후에 다윗을 도와주었던 아히멜렉이 사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어떤 때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자신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인데 블레셋 땅으로 피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형편으로는 사울의 권력이 어느 곳에나 뻗쳐 있는 이스라엘보다 차라리 사울의 적국이었던 블레셋에 숨어 지내는 것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며 창화하던 예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창화하던 소리가 이제는 다윗의 목숨을 도리어 위협하는 소리가 되었고 그 위기의 순간을 다윗은 대문짝에 그적거리면서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시늉을 하면서 겨우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님은 IMF로 인해서 자신이 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는 바람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고소를 당해 도망을 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빚쟁이들과 자신의 집에 세를 들어살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남아있는 식구들을 괴롭힙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서 도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다윗의 어려움이 어떠했는가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자신을 가까이 할 가치조차 없는 자로 보거나, 아니면 다윗의 불행이 자신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윗과 친하다는 것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커다란 손해와 불명예를 자초하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것입니다.
성경 잠 19장에 보면 기가 막힌 말씀이 있습니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사람이 힘들면 옆에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가는 곳마다 자기를 헤치려 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모습은 9절에 기록된 것처럼 눈과 혼과 몸이 근심으로 인하여 쇠하여졌습니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하루하루를 슬픔으로 보냅니다. 한해 두해 탄식 속에 지나갑니다. 환경으로 인해 마음 속까지 지쳐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되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이쯤되면 좌절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윗의 패배는 절대적이지 않습니까?
2. 이제 다윗의 회복을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다가온 환란은 다윗을 넘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전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살아갑니다. 언제 이 어둠이 걷힐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이러다가 완전히 쓰러져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희망이 사라져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이 몰려들면 좌절합니다.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14절에 다윗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내게 어떤 상황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나는 주께 의지합니다. 모든 소망이 끊겨져 버릴 상황에서도 오히려 다윗의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실망시키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망의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곤고한 날들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다가오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신앙이 자라납니다. 다윗의 신앙은 물론 어릴적부터 믿음이 있었지만 사울을 피해다니던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평안할 때 자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신 데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평안할 때보다 고난의 시기에 깊어집니다.
성도는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윗도 고통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무리의 비방과 사망의 두려움” 가운데서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들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근거는 “주는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3. 다윗의 위대한 고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역사가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속에도 이 우주는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원칙에 근거하여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렘 18:의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인간사를 주관하십니다.
다윗이 자신이 살던 그 시대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었다고 했지만 모든 시대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원수와 핍박자의 손에서 건지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시고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신다는 기도의 근거를 보여준다.
본 시의 마지막은 우리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내 인생 주의 손 안에
시 31장 14~24절 / 홍문수목사(신반포교회)
흔히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Age of Anxiety)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옛날에 비해 많이 풍요로워지고, 사회 안전망도 상당히 갖춰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불안해합니다. 이러한 불안심리는 남녀노소 간에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연금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세대별 숫자 중 가장 많은 게 놀랍게도 20대였습니다. 퇴직을 하면서 노후를 걱정하는 50대나 60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입하는 게 상식인데, 20대가 제일 많이 구입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취직도 안 되고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창 꿈을 꾸고 진취적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 다수가 연금복권에 당첨되어 안일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겁니다.
며칠 전에는 수능시험 100일전이었는데, 고3 수험생들이 100일주를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모습이 속출했습니다. 술 한 잔에 수능 10점이 올라간다는 둥,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면 100점이 상승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미신에 사로잡혀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술집에서도 그 날은 미성년자들을 들여보내주고,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게 불안하니까 집에서 마시라며 술상을 차려주기도 한답니다. 수능이 뭐라고 불안에 사로잡혀 이런 미신에 빠져 헤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불안 심리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유신론적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안은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마치 이런 겁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와 멀리 떨어지면 불안해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있어도 불안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당연히 불안합니다. 그런데 죄로 무지해져서 그런 줄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엉뚱한 짓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누구라도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믿는 신자들 중에도 신앙이 아직 미성숙하거나, 신앙이 성숙해도 일시적으로 다운(down)되면 역시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불안감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굳센 신앙을 키워야 합니다. 불안요소가 많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굳센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비탄시와 감사시가 합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탄시는 슬픔이나 고통을 토로한 시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감사하는 구절도 여럿 있습니다. 그래서 비탄시와 감사시가 합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시가 언제 기록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귀영화도 누렸지만 전 생애에 걸쳐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에게 정적으로 찍혀 피신해 다녔고, 왕이 된 이후에도 많은 원수들이 대적했고, 노년에는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이 시가 그 중에 어떤 때에 기록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1] 다윗이 처한 상황 : 사면초가
다윗은 먼저 자신이 당면한 고통을 토로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무너진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감사하며 승리의 찬양을 부릅니다. 이 시를 보면서 우리는 고난이 가득한 이 세상, 불안 심리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불안했는지 살펴보시죠. 한 마디로 사면초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시31:4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 ... ” 원수들이 그물을 쳐놓고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치 사냥꾼이 먹잇감을 잡으려고 그물을 쳐 놓듯이 말입니다. 시31: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얼마나 고통 중에 스트레스를 받고 힘든지 육체도 영혼도 곤죽이 된 상태입니다. 마치 강펀치를 맞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로기 상태가 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시31: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죽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잊혀집니다. 자기 존재가 마치 산송장 같아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완전히 버림받은 극도의 소외감입니다. 그리고 깨진 그릇과 같다는 것은 이제는 완전히 쓸데없고 하찮은 존재처럼 버려졌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은 사면초가 혹은 고립무원 같은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사방팔방 다 막혀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너무 참담합니다.
[2] 다윗의 신앙 고백 :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
다윗은 이런 극한상황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방팔방 막혀 있어도 하늘이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영적인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자라는 신앙입니다. 14절~15절.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아무리 고통과 슬픔의 극한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인생만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의인법적 표현이죠. 하나님이 영이신데 우리 인간처럼 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 남은 생애도 하나님이 주권 가운데 그 능력과 권세로 보살펴 주실 것을 믿노라 고백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이 내 것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게 아닙니까?
태어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거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잖아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참 이상해요. 인간이 애쓰고 힘쓰는데도 매사가 꼬이고 안 됩니다. 그런데 또 이런 말이 있어요. 넘어져도 돈을 줍는다! 되려니까 길을 가다 넘어졌는데 세종대왕이 웃고 있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인생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인생을 컨트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의 고백이죠. 그녀는 다산이 축복의 척도였던 고대에 자식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불가항력이죠.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기도함으로 사무엘을 낳게 됩니다. 한나는 인생만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잘 나가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솔로몬! 인생 4관왕! 재물, 권세, 명예, 쾌락에서 1인자였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갖고 싶은 대로 가 가졌던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쓴 시를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시127:1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 주체가 ‘여호와’입니다. 인간은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잘 나가던 솔로몬이라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던 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안 될 것도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해 주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착은 무지무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식을 향해 갖는 애착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지켜주시고 결국 승리케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에 골인하기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요10:28~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꽉 잡아 주십니다. 결국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천국 확약(confirmation), 승리 확약입니다. 취소도 변경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당당한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롬8:31~32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이 보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담보물입니다. 0.0001%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다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운동경기를 볼 때 실황중계를 시청할 때와 녹화중계를 시청할 때 기분이 영 딴판입니다. 이미 승리한 경기의 녹화중계를 볼 때는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편이 지고 있는 상황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결과를 알고 있거든요. 지금 당장은 지고 있어도 잠시 후 이길 거니까! 그런 사실을 아니까 불안을 떨쳐버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의 결과가 승리와 천국임을 알기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힘들 때가 있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똑똑하고 인지능력이 높을수록 걱정과 염려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보는 둔해서 뭘 몰라요. 대책이 하나도 없는데도 천하태평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가요? 우리도 천하태평입니다. 바보라서 그런가요? 아뇨. 대책이 있거든요. 하나님 자신이 대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대책입니다! 바보가 아니라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대책까지 갖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똑똑해서 걱정하지만, 하나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대책까지 갖고 있는 진짜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힘들어도, 매래가 암담해 보이고 불안해도 하나님의 승리를 내다보는 신앙이 있기에 담대할 수 있고 침착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 ‘선취적 신앙’(先取的信仰preemptive faith)이라 부릅니다. 믿음으로 미리 승리를 확보해 놓는 신앙입니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줌(zoom) 카메라 있잖아요. 멀리 있는 피사체를 가까이 당겨 확대해서 보고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죠? 줌인(zoom in)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미래를 앞당겨 보고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선취적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직 현실은 사면초가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고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미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3] 다윗의 승리 : 기도, 감사, 증거
다윗은 선취적 신앙으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당당히 승리합니다. 그 신앙으로 기도했고, 감사했고, 결국 승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① 간구 :
다윗은 사방이 막히고 캄캄했지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15절~16절.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주의 얼굴’은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 등의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원수보다 더 강하 하나님의 손을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얼굴로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간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탄식이나 호소가 아닙니다. 확신에 찬 간구입니다.
② 감사 :
다윗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으니까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결국은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리 앞당겨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편 31편은 비탄시이면서 동시에 감사시인 겁니다. 19절~20절. “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이 우리 일생을 책임져 주시는 방식이 무엇인가요? 미래의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준비해 두십니다. 이걸 가리켜 ‘쌓아두신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들을 키울 때 어떻게 합니까? 고등학교 들어갈 때, 대학에 들어갈 때 미리 들어갈 때 맞춰서 등록금을 장만해 놓습니다. 미리 교육보험을 들어놓든지 절약해서 저축해 놓든지 그럽니다. 자식은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하라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인류 차원에서도 하나님이 쌓아두신 은혜가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에너지를 위해 나무를 땠잖아요. 만일 계속 나무만 땠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삼림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미리 땅 속에 마련해 두신 석탄을 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석탄이 고갈되기 전에 석유를 발견했고, 그 후로는 태양광, 조력, 풍력 등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가 있어야 되겠지만 분명 종말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것들을 발견해서 사용하도록 섭리해 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③ 증거 :
다윗은 선취적 신앙을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증거합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 그분의 손으로 승리했노라! 다윗은 이제 성도들도 함께 찬양할 것을 권면합니다.
21절~22절. “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그도 한 때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신앙을 가다듬고 기도했더니 승리했다는 간증입니다. 23절~24절 보면, 성도들에게 심지어 독려합니다. “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여러분,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고통 가운데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 그러나 선취적 신앙으로 주의 손을 의지하고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입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 크리스천 선수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죠. 그 중에 이미 금메달 딴 선수 중에 유도의 김재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신실한 믿음의 청년입니다. 출전 전 평소에 훈련하면서 계속 기도해왔습니다. 오후 11시 11분에 하다 너무 늦어 오후10:04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기도하면 감독도 그 시간에는 방해하지 못합니다. 런던으로 출발하기 전 결단식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선수단과 임원단 앞에서 공약을 했습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지만 승리하면 크리스천으로 하나님께 영공을 돌리겠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사회자도 장난스럽게 한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라고 말했습니다. 쑥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진지하게 기도 세레모니를 해 보였는데, 정말 그대로 됐습니다. 실제 우승 후 인터뷰를 하는데, 그 첫 마디가 이랬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제일 큰 은인이십니다. 몸 왼쪽을 거의 쓰지 못했는데, 제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신 것 같습니다.” 선취적 신앙으로 당당히 승리한 그리스도인의 멋진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맡기면 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리고 혹시 걱정 되면 기도하면 됩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무쪼록 다윗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일생을 맡기고 선취적 신앙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앞날을 누구에게 맡기는가?
시 31장 14~24절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들어가는 글
오늘은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기록한 시입니다. 그가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생활을 하면서 고통 받았던 마음을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시편을 어떻게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한다”고 합니다(6절). 이 고백이 압살롬의 반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근거는 압살롬이 거짓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쳐서” 반란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삼하15:6). 그러므로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18절). 이처럼 세상은 진실을 따르기 보다는 허탄한 거짓에 더 많은 사람들이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어떻게 주님을 찾는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였나이다”의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나 다윗의 인생은 거짓된 모함으로 인하여 가장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자신의 마음을 거짓 없이 솔직하게 오늘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낸다”고 합니다(10절). 또한 그는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큰 고난으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슬픔과 탄식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정죄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슬픔과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슬픔과 탄식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11절). 길에서 보는 자가 다윗을 피하는 이유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대적으로 부터 받는 모욕보다도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처럼 가까운 이웃에게 모역당하는 것을 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길에서 다윗을 피하는 자들은 진실보다는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에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웃들을 피하면서 상처 주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라고 합니다(12절). 그가 깨진 그릇 같다고 하는 이유는 그릇이 깨지면 밖에다 버리듯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깨진 그릇처럼 그가 받은 고통과 아픔을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깨진 그릇들을 더 이상 쓸모없다고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처럼 깨진 그릇과 같은 인생들도 버리지 않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깨진 그릇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는가?
다윗처럼 자신의 영을 주님의 손에 부탁하면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5절). 그러나 오히려 그의 인생은 거짓된 모함으로 인하여 인생의 슬픔과 사람들의 외면과 깨진 그릇처럼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미끄러지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습니까?
첫째로 다윗은 “그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고 합니다(14절). 여기서 ‘그리하여도’가 다윗이 인생의 슬픔과 사람들의 외면과 깨진 그릇과 같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주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도 주님을 의지했습니다(6절). 그때는 아직 고난을 받기 이전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여도’는 다윗이 모든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어떤 고난을 받을지라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14절). 이것이 진짜로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인생의 어떤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리하여도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조금도 변함없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다”고 합니다(15절).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닥치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다윗에게도 견딜 수 없는 인생의 슬픔과 사람들의 외면과 깨진 그릇과 같은 상처가 밀려왔을 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견디지 못하면 정신적인 고통이나 잘못된 중독이나 현실의 도피적인 방법에 빠지게 됩니다. 사울 왕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습니다(삼상28:7). 그러나 다윗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두려움과 불안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앞날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주께 피하는 자는 위하여 준비하신 것은?
다윗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피할 때 무엇을 쌓아두고 있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합니다(19절).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는 무엇입니까? 다윗을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20절). 그가 하나님께 피할 때 은혜를 베푸심으로 압살롬의 거짓된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힘으로는 사람의 꾀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 피할 때에 놀라운 은혜로 벗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오직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22절). 만약 다윗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부르짖으면 간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졌던 것이 다시 연결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진 것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고난을 받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끊어짐으로 더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부르짖으면 기도할 때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고 연결이 되어서 다시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고난을 받을 지라도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고 연결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합니다(21절). 대부분 다윗처럼 인생의 슬픔과 사람들이 외면과 깨어진 그릇처럼 상처를 받으면 자신의 삶은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인생이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으면서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16절). 다윗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아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슬픔의 인생이 찬송의 인생으로 변화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1절).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받음으로 인생의 슬픔이 찬송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