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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ssion and Commissioning of the Twelve Apostles by Jesus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매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잡혔습니다.
사냥꾼은 마당 한가운데 말뚝을 박아 매를 매어두었지요.
매는 하늘로 날아가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의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밧줄의 길이 이상으로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땅으로 곤두박질치곤 했지요.
오랜 시간이 흘러서 밧줄은 저절로 끊어졌지요.
하지만 매는 이제 날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날아봐야 또 떨어질 텐데 뭐….’ 라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 한 가지가 떠올려집니다.
제가 중학생 때에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종목 중에서 제일 자신 없는 것이 바로 ‘턱걸이’였지요.
이상하게도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턱걸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거 너니까 가르쳐주는 거다. 배치기라는 것을 하면 턱걸이를 많이 할 수 있어.”라면서 소위 배치기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힘을 주어 턱을 철봉 위로 끌어올릴 때 배를 ‘탕’치면서 탄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 저는 20번 이상을 해서 만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제가 불과 일주일 만에 20번 이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배치기라는 요령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배치기’ 역시 팔 힘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요령을 통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할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만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의 약간의 자극만 있을 수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무기력감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아서 스스로 할 수 없다며 주님의 길을 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 자극을 받고 변화되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제자들을 파견할 때에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 세상의 힘듦으로 무기력감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이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이제는 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만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약속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권한과 권능을 주신 일은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신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더러운 영들(마귀들)을 쫓아내야 하고, 사람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 일들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면서 함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복음 선포 활동에 속한 일이기도 한데,
그 일들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기도 합니다.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줌으로써 사람들이 얻게 되는 ‘기쁨’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복음 선포는 단순히 신자 수를 늘리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일이고, 그 나라의 기쁨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임무는 교회의 임무이고, 신앙인들의 임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고,
마귀들(악의 세력들)을 물리쳐야 하고,
사랑 실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선교 활동을 신자 수를 늘리는 활동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이익 집단이 세력을 확장하는 활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구원 사업의 순서를 말씀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안 믿고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그 다음에 전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유대인들에게 약속되었던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이방인들에게는 지금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 라는 뜻이 됩니다.
‘나중’은 예수님 부활 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28,19).
2)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먼저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은 그 다음에 할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로 먼저 간다면,
그들은 “너희부터 회개하고,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라.”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교 활동을 하기 전에 교회 공동체가(신앙인들이) 회개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서, 즉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안 믿는 사람들은 “너희나 잘해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의 은총은 완전히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을 포기하신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3)
범위를 완전히 좁혀서, “가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식구들은 안 믿거나, 회개하지 않고 있는데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1티모 3,4-5)
‘수신제가’ 후에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 즉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가 이 세상 근처 어디쯤에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곧 종말이 되고 심판의 날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선포를 믿고 회개한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멸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한 뒤로 이천 년이나 지났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인간들의 시간으로는 확실히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 많다는 것은 종말이 더욱 가까워졌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속상함을 풀고 주님의 너그러움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음에 두셨던 열 두 사도를 뽑으시어
그들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능을 부여하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격이나 성장 배경, 학식 정도 등 모든 면에서 큰 차이와 한계가 있는 이들을 받아들이시어
하느님이 당신께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어가십니다.
또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방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구원받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을 먼저 구원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에도 이런 한계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속이 상하게 되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그 주된 원인은 자신의 기준과 기대치가 주변 사람들이나 여건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행하는 일들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속상한 마음의 뿌리에는 ‘자신의 뜻’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상해 하고 갈등을 겪는 것은 자꾸만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얼마나 합리적으로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정한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을까 등등을 먼저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과 자기애와 행동방식이 바로 마음을 어둡게 하고 사랑의 삶을 살기 어렵게 합니다.
이런 늪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듯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을 더 중요한 삶의 방향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마음의 어두움을 늘 겪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상처를 만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는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봉사 자체보다도 순수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모습과 말마디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무엇을 하든 그 지향이 중요합니다.
무작정 ‘무엇을 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해야겠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되고, 자신과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란 말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속상해 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추스렸으면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하고 연약한 한계에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뽑아주신 주님의 그 사랑을 떠올리며,
우리도 다른 이들을 넓은 마음과 사랑으로 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속상함과 짜증과 분노, 그리고 싫어하고 배척하는 감정의 뿌리가
바로 자기애와 내 기준에서 나온 기대, 나의 뜻을 앞세우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새기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 나라의 비전 - 비전의 사람, 전통의 사람>
오늘 7.5일 새벽 역시 7.5일 어제를 회상하며 7.6일 내일 강론을 씁니다.
1독서의 주인공 아모스 예언자와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의 특징이 일치합니다.
두 분 다 ‘비전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느님 비전을, 하늘나라 비전을 지녔기에 참으로 역동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독일은 참으로 부요한 나라요 안정된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되이 갖추어졌고 정리되어 있으니 부족한 것이 없어보입니다.
어제는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에 앞서 아이슈테트 도시를 순례했습니다.
아이슈테트는 뭰헨에서 북쪽으로 100여km 떨어진 국립공원 알트밀 계곡에 위치한 도시로
중세 도시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도시에 도착한 후 11시 미사를 봉헌한 발부르가 베네딕도 수녀원을 소개합니다.
751/752년에 빌리발트의 동생인 부니발트가 하이덴하임에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761년에는 여동생 발부르가가 하이덴하임에 수녀원을 시작했다 합니다.
발부르가 성녀가 돌아가신 지 100년이 지나 성녀의 유해를 아이히슈테트로 모셔왔고,
1035년 아이히슈테트의 주교인 헤리베르트와 영주인 레오데가르는 성녀 발부르가의 무덤에 베네딕도 수녀원을 설립했으며
이 베네딕도 수녀원은 오늘날까지 1000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최초로 베네딕도 수녀들을 파견한 것도 여기며
역사상 천년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곳도 여기 수녀원 하나뿐이라 합니다.
많은 전란과 혁명, 세속화를 겪으면서 수없이 명멸(明滅), 부침(浮沈)한 수도원들의 역사였지만
여기만은 그대로 천년 전통과 역사를 유지해왔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바로 어제 우리 순례자들은 발부르가 베네딕도 수녀원 곁에 있는 발부르가 순례성당에서의 감격스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1300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고도 아이히슈테트에는 고풍스런 수백년 역사의 건물도 수두룩합니다.
가장 오래되었다는 카페로 이용되는 건물도 무려 600년 역사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도 1000년 역사와 전통을 숨쉬며 살아가는, 거의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중세의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어 대성당을 순례했고,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독일 종합대학교 가운데 유일한 사립인 아이히슈테트대학교 대학성당을 순례했고, 150만 권의 장서를 갖춘 대학 도서관도 잠시 들렸습니다.
아이히슈테트대학교는 트리엔트공의회 직후인 1564년 독일 최초의 신학교로 개교한 후
예수회의 관할하에 철학등 인문학과가 개설되어 종합대학교로 승격했으며,
신학, 교육학, 사회학 분야는 유럽에서도 명문학과로 인정받고 있다 합니다.
무려 500년 역사를 지닌 대학교입니다.
독일의 축적된 장구한 역사와 전통에 비해 너무나 대조적인 우리나라의 현실이 많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변화무쌍한 변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지요.
작은 국토를 이리저리 손대다 보니 온전한 데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아이히슈테트에서 뮌스터쉬발작수도원으로 가는 길옆 풍경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이 닿은 지평선의 평원이었습니다.
옛 마을 그대로의 풍광이요 고층 건물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뮌스터쉬발작 수도원에 도착하여 저녁 성무일도와 끝기도에 참석했고,
4년째 머물면서 기술을 배우고 있는 왜관수도원의 야곱수사와 오랫동안 왜관수도원에서 건축일을 하며 선교사로 일해왔던 강안셀모 수사님도 만났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안셀모 수사님은 피정집 주방에서 봉사하는 소임을 맡고 계시다 했습니다.
같은 독일내 수도원인데도 슈바이클베르코, 오틸리엔 수도원과는 너무 판이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들 수도원이 소박하고 편안한 시골집의 분위기라면, 여기 수도원은 너무나 완벽하게 갖춰진 부유한 귀족적인 분위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지니고 있기에 경솔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장단점을 잘 알아서 보완하는 끊임없는 노력뿐입니다.
결코 우리의 현실을 비관할 것도 없습니다.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장구한 전통과 역사도 잘못되면 우리를 제약하고 질식시키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고 변화에 둔감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비전과 꿈을, 역동성을 잃고 무기력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제가 독일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현실에 안주하다 보니 타락이요 아모스 예언자의 호된 질책이 뒤 따릅니다.
하느님 비전을 잃어 버릴 때 세상 우상들의 유혹에 빠짐은 필연입니다.
예언자들은 전통의 사람들이자 동시에 꿈의 사람들,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전통과 비전, 양면을 다 갖춘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죄악인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하느님 비전을 잃었을 때 이런 타락의 현실입니다.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은 위태한 삶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다음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고무적이고 희망찬 말씀으로 우리의 무딘 마음을 새롭게 일깨웁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 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바로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나태로 묵혀 둔 우리 마음의 땅을 갈아 엎어 역동적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열두 제자처럼 파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이들을 쫓아내 주시고, 우리의 병과 허약함을 고쳐 주십니다.
이어 주변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꿈이 하늘나라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비전이 우리를 ‘전통의 사람’이자 ‘비전의 사람’으로 만들고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나라 비전을 선물하시고 우리의 병과 허약함을 말끔히 치유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마치 들판에 처음 나가는 아기 사슴들처럼
예수님의 보호 아래 복음 선포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들의 첫 발걸음은 비록 미약했지만,
지금의 교회의 모습을 있게 한 첫걸음이요,
또한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이 백성을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할 도구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이스라엘이 충실하거나 강직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끝까지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열두 제자의 모습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족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
백성들의 세금을 수탈하던 마태오,
그와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던 열혈당원 시몬,
어머니의 도움으로 첫째와 둘째 자리를 탐냈던 야고보와 요한 등
든든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 부르심에 응답했기에
열두 사도로 교회의 기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부르시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시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 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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