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그보다 먼저 나와 있는 의자가 보였다. 날마다 앉아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건
좋아서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의자와 그 뒤의 건물과 그 옆의 나무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의 고요가 좋아서다.
무엇보다 좋은 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 있다는 것이다.
〈임승유 시인〉
-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 청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 2011년 《문학과 사회》신인문학상 당선
-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그 밖의 어떤 것','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사진 〈Bing Image〉
여성시 읽기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 찾아 온 늙은 여자
임 승 유
둘이 뭐하는지 다 봤어.
나갔다 들어왔을 때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놀려댔지. 응? 이런 거? 나는 그녀를 한 번 더 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여러분도 아셔야 할 텐데!
아셔야 할 텐데… 우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짠… 짠…웃고 떠들어서 배가 아프다. 입이 아프다. 입이 아픈데 재미있어도 될까. 다음에 또 만나도 될까.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담배 피우려는 사람들이 나가고
솨아 솨아 빗소리가 들린 것도 아닌데 비 냄새를 몰고 그게 왔다. 엄마는 그게 그건 줄 어떻게 알았어?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고
나는 엄마의 엄마라고 부르다가 끝을 몰라서 끝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한 번 더 만지고 싶어 쳐다본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구불거리는 능선을 타고 솨아 솨아 비바람을 몰고 오면서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고
슬픔에 빠뜨렸다가 끄집어내기도 하며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해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급기야 기다림이 뭔지 알아버리는 저녁처럼
비 오기 전에 서두르느라 푸릇한 게 뒤섞인 비료 푸대를 짊어지고 도착한
달면서도 시고 시면서도 단
지나온 날들과 남은 날들을 다 합친 것처럼
늙은 여자. 보여줘! 보여줘! 한 사람이 추기 시작해 다 같이 일어나 추는 춤처럼
사진 〈Bing Image〉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임 승 유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 놓은 것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 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사진 〈Bing Image〉
충북대학교
임 승 유
그녀는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이제 막 열여섯이 되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지만 티셔츠를 입었다는 건 알 수 있다. 청바지를 입었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피가 흘러서 다시 들어왔으며 피가 흐르기 시작한 지는 몇 달 되었다. 나는 오이를 베어 먹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서랍을 열었다. 그녀는 오버나이트를 반으로 잘랐다. 반으로 자른 그것을 속옷에 붙일 때 싹둑 가위 소리가 지나가는
두 다리는 힘이 세다. 그녀는 충북대학교 가는 버스를 탔다. 반장이 충북대학교 정문으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탄 버스는 그녀를 충북대학교 후문에 내려놓았다. 버스를 잘못 탔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다 먹은 오이 꼭지를 창밖으로 던졌다.
매미가 울었다. 매미가 울면 소리가 나고 소리는 어느 순간 멈추겠지. 하지만 매미가 한 번만 울지 않고 여러 번 울어서 소리가 어디까지 가서 끝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람도 별로 없었다. 땀이 흘렀다. 피가 흘렀다.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가위가 지나간 자리로 솜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솜이 삐져나오듯 그녀가 충북대학교 정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진 〈Bing Image〉
여 인 숙
임 승 유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극지에서는 오줌과 함께 얼어붙지 않기 위해 망치가 필요하다는데 자신이 꾸고 있는 꿈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두드려 깨고 있는 여자들
복숭아는 제 몸의 껍질을 벗어놓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저 흘러내리는 속살을 다 견디려면 제 몸을 먹어치워야 한다
하룻밤 묵어가야지 했던 일이다 세상의 모든 단추를 불러들여 단추를 세고 단추를 달고 단추를 뜯어내야지 살과 살을 잇대고 여며야지 추운 줄도 몰랐다 나에겐 손이 없고 입이 없었다
아침에 여인숙이라는 말은 여기라서 포기할 수가 없다 몸은 거기에 있다 살을 만지면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렵기만 하고 작약의 성질은 시고 차다는데
작약을 끓여줄까 모란을 끓여줄까
하룻밤을 뜬 눈으로 보낸다는 건 남은 밤을 눈 감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나라고만 할 수 없는 향기가 스멀스멀 빠져나오고 그게 꼭 너라고만 할 수 없을 불빛이 야금야금 내 살을 갉아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