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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 31:19-24
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19-24 / 주님의 은총이 어찌 그리도 큰지요? 주님 모시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베푸시려고 아껴 두신 은총을 모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주께 의지하여 피한 이들에게 베푸시니 그 은총 어찌 그리도 큰지요? 20) 주께서 이들을 은밀한 곳에 숨겨 못된 음모나 꾸미는 자들 손에서 보호하시고 은밀히 장막에 숨겨 원수들에게 조롱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 아껴 주시네요. 21)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심한 공격받고 있을 때에 나에게 베푸신 사랑 놀라워라. 22) 주께서 아예 나를 멸하시는 줄 알아 무서워 떨었으나 살려 달라고 울부짖자 주께서는 내 목소리 알아보셨어라. 23) 믿음 깊은 이들아, 여호와를 사랑하여라. 주께서는 믿음 깊은 이들을 지켜 주신다. 그렇지만 오만하여 남 우습게 여기는 것들은 제가 저지른 행실대로 벌 내리신다. 24) 무서워 말아라. 힘을 내어라. 우리의 온갖 희망이 오직 우리 주님 여호와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묵상하며,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쌓아두신 은혜(19-20)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피하는 자들을 위해 쌓아두신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고백합니다(19). 이 선하심은 인생의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이들에게 견고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분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숨기시고 지켜주십니다(20). 하나님 안에 숨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전과 평안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감사의 고백(21-22) 다윗은 견고한 성에서 그를 보호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합니다(21). 견고한 성은 문자적으로는 요새화된 도시를 가리키지만, 은유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는 절망 중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고 도와주신 주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의 순간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솔직히 아뢰며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보호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권면(23-24)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다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과 연결됩니다(신 6:5). 또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과 유혹이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으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적용: 과거에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되새기며 감사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바탕으로, 현재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훌륭한 공예가가 애용하는 칼은, 날카롭게 날을 갈아 돌도 자를 것 같은 칼이 아니라 날이 살짝 무뎌져 조금 잘 들지 않는 칼이라고 합니다. 너무 잘 드는 칼은 오히려 걸작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야구에서 투수들도 몸에 힘을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탄력과 유연성 없이 단단하기만 한 몸으로는 결코 빠른 공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분의 색이나 선을 덜어낸 넉넉함을 만들어야 그 간격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나 여백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 설 교 >
행복을 택배하는 사람들
시 31장 19~24절 / 이규왕목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제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비록 짧은 한 평생이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던 연인이 언제가 부터 등을 돌리고 미워하는 사이가 되고, 행복하다고 말하던 부자가 언젠가부터 빚에 쪼들려 도피행각을 벌리고, 행복하다고 말하던 권세가가 언젠가부터 죄가 드러나 감옥을 가는 세상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행복은 학식이나 돈이나 권력으로 사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공허한 꿈일까요? 아니면 어딘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요즈음 인터넷이 발달하여 무엇이 필요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검색 사이트에 가서 찾아보면 어디서, 어느 나라에서 제일 싸게 살 수 있는지 즉시 알 수 있고, 그 중에 제일 싼 금액을 골라 PC 뱅킹을 통해 송금을 하고 기다리면 택배원이 내가 원하는 장소까지 친절하게 배달을 해 주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원하는 행복은 어디서 팔며 그 값은 얼마이며 어떻게 택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행복 사이트가 바로 이 성경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신 사이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행복을 검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송금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행복을 택배 받아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행복한 택배원들이 되기 바랍니다.
1. 천재지변 보다 더 무서운 인재
해마다 여름이면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바닷가나 계곡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해마다 여름이면 불청객인 태풍과 홍수가 한 두 차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같은 천재지변으로 피해가 크게 되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려 성금을 하여 돕고, 국가에서도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복구를 해 줍니다.
그러나 인생살이에는 천재지변보다 더 무서운 재난이 바로 친구나 이웃이나 동족으로부터 배신과 모함을 당하는 인재의 피해를 당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도움 받을 길이 없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시편을 기록한 기자가 살던 시대는 천재보다 더 무서운 인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장본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비밀히 친 그물
(시 31:4)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마치 야생동물을 밀렵하는 사냥꾼이 쳐놓은 미끼와 올가미처럼 다른 사람의 약점과 치부를 이용하여 한 몫을 챙기려는 파렴치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우상숭배의 만연
(시 31: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시편 기자가 살던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몹시 미워하셨으며 시편 기자도 그것을 몹시 죄송하게 생각하고 미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거짓의 난무
(시 31: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 31: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지금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협박을 당하고 오만 불손하고 경멸하는 태도로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모든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법이 있고, 법관이 있고, 감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인이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이는 해 아래서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대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교육과 경제 수준이 높아지지만 갈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누가 무엇으로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이 없고 정의와 평화만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디를 가면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2. 고통당하는 의인
시대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시편 기자가 그 악한 사람들과 한 패거리만 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옳고 바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니까 악한 자들이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시편 기자가 당하는 고통이 매우 극심하였음을 오늘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 31:11)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그로 인해 영육 간에 겪고 있는 고통이 오늘 성경 전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고통과 근심
(시 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그로 인한 시편 기자의 고통은 단순히 심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육체적 고통으로 전이되어 시력과 기력까지 상실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2) 슬픔과 탄식
(시 31:10)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수 많은 날들을 슬픔과 탄식으로 보내는 동안 뼈가 녹고 그로 인해 기력이 쇠약해질 정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트레스로 인한 합병증입니다. 스트레스는 만병통치약을 찾는 이들에게 만병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에게 정도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외가 없는 스트레스가 가져다주는 질병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볼까요?
가) 신체적 증상-피로럿壙酉불면증런牡거育犬?경직(특히 목, 어깨, 허리), 심계항진(맥박이 빠름), 흉부통증, 복부통증, 구토, 전율, 사지냉감, 안면홍조, 땀, 자주 감기에 걸리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나) 정신적 증상-집중력이나 기억력 감소, 우유부단, 마음이 텅빈 느낌, 혼동이 오고 유머감각이 없어지고,
다) 감정적 증상-불안, 신경과민, 우울증, 분노, 좌절감, 근심, 걱정, 불안, 성급함, 인내부족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라) 행동적 증상-안절부절함, 손톱깨물기레渗낢?등의 신경질적인 습관, 먹는 것, 마시는 것, 흡연, 울거나 욕설, 비난이나 물건을 던지거나 때리는 행동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마) 기타-피로 및 무기력, 각종 암, 손상, 돌발적인 사망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이 같은 스트레스가 전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디를 가면 스트레스가 없는 천국이 있으며 무슨 약을 먹으면 이와 같은 스트레스가 치료될 수 있습니까?
3. 최상의 피난처
오늘 성경은 주전 1060- 971에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오늘 우리와 삼천여년 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상이나 인간상은 오늘과 조금도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알고 보면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상이고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와 고통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마치 종합병원과 같아서 진찰과 더불어 치료와 수술을 하여 병을 제거하는 것처럼 문제점을 깨닫게 하며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시대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였는지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시 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그것은 마치 맹수를 만난 어린 양이 목자를 의지하듯이 원수들의 추격을 받고 있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만이 자기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시 31: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을 도피처로 삼고 주께 피하였다고 해서 원수들이 두려워하고 겁먹은 것이 아니라 더욱 비웃고 조롱하고 위협적이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시 31: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잠간 영화 한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목은 “버티칼 리미트”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수직 한계점이란 뜻입니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 로이스는 어느 날, 아들 피터와 딸 애니, 그리고 자신의 대원들과 함께 정상을 향한 모험을 즐기던 이들은 한 대원의 실수로 팀 모두가 아래쪽에 있던 애니의 자일에 매달리게 된다. 결국 대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마지막으로 피터, 로이스, 그리고 애니만이 자일 하나에 몸을 지탱하게 된다. 아버지 로이스는 침착한 어조로 피터에게 자신에게 묶인 자일을 자르라고 강요한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찰나의 순간... 동생 애니의 만류하는 비명 속에 피터는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든다. 아버지 로이스는 천길 만길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3년 후... 사업가인 엘리엇은 자신의 항공사의 이벤트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등반코스인 K2등정을 계획한다. 사고 이후, 사진작가로 살고 있는 피터는 다큐멘터리 방송 팀으로 등반대에 합류하게 된 애니와 만나게 된다. 애니는 등정을 만류하는 오빠 피터를 차갑게 외면하고 아버지 루이스가 묻혀있는 K2를 도전 한다. 무모한 등정을 산악 전문가 몽고메리 윅이 비난하지만 계획대로 등반은 시작된다. 등반이 시작되고 기상이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던 이들에게 급기야 거대한 눈 폭풍이 덮친다. 속수무책인 등반대는 하나 둘씩 죽어가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인생행로가 마치 행복이라는 정상을 등정하는 산악회원들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을 원하는 우리의 여정에 눈사태보다 더 무서운 재난들로 인해 사업이 부도가 나고 아프고 이혼하고 자살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있다구요. 언젠가 죽음이 눈사태처럼 몰려 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어디로 피할 수 있으며 누가 구원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그 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여 도우심을 구하며 참고 기다리는 시편 기자를 어여삐 보시고 마침내 상황을 역전시켜 악한 무리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시 31:8)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후일에 역대 왕들 가운데 최고로 존경받는 성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만일 시편 기자 원수들에게 항복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했다면 오히려 더 힘들게 되었을 것이고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시편 기자는 잠잠히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입을 넓게 열고 당당하게 여호아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시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감격과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자기처럼 고통을 겪으면서 번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면서 고통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것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 것을 촉구하며 행복을 배달하는 택배원이 되었습니다.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시 31: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결 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와 죄악의 정도가 덜할까요? 더할까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는 시편 기자와 같은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의 도피처는 어디일까요?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의 자일을 스스로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쏟아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그리스도가 나의 죄의 짐을 대신지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나를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주님을 믿는 나도 주님처럼 부활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도피처로 삼고 피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같은 도피처로 삼는 것만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시편 기자처럼 믿음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장20절)
도피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스도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중심에 들어오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는 말보다는 중심의 태도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과 눈사태와 같이 천재와 인재가 많은 세상에서 행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고후 6:9) 이름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고후 6:10)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이지 않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이 오늘 이 교회로 초청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 같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나와 같이 피난처와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가서 내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 그들도 나와 같이 피난처되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용기와 희망과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행복을 배달하는 택배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시 31장 20~23절 / 김경형목사
20절: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은밀한 곳에 숨기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특별보호다. 영적인 의미다. 은밀한 곳에 숨겨지는 것은 아무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숨겨놓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아닌 말로 찾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겨놓으면 어떻게 잡겠느냐?
하나님께서 은밀한 곳에 숨겨놓으면 인생들의 수단 방법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은밀한 곳에 숨긴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적으로 최고의 높은 곳, 신령한 천국의 성질에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은밀한 곳은 세상 땅의 차원이니 낮은 땅의 차원에서는 높은 하늘의 차원에 숨은 것을 알 리가 없다.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성도가 보호를 받을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막이다. 장막은 인간이 보기에는 볼품이 없는데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설계로 되어있고, 진리이치의 교훈이 있는 곳이다. 진리이치의 교훈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로 교훈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런 장막 안에 살면 하나님의 특별보호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서 사람의 인격이 다치지를 않는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교훈을 떠나면 사람이 손상을 입게 된다. 사람의 꾀에 빠져버린다.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구설’이란 시비하고 비방하는 말들을 말한다. 타락된 이 세상은 서로 시기하고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구설에는 절대 정확한 기준이 없다. 모두가 타락된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지방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국가마다 다 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법이 통일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싸우더라.
타락된 세상에는 하나님의 옳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제각기 아무리 자기들의 법을 가지고 싸워도 이 나라 저 나라의 법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고받고 싸우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끼리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해서 적당한 선에서 일을 해결한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옳음을 말씀해 주시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고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비방하는 말을 했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구약 때에 선지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하나님의 옳은 종들에게 그러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의 옳은 말씀에, 진리의 옳은 종들에게 시비를 걸고 대적하는 하나의 예를 들면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교회가 부흥을 하려면 인간의 수단 방법을 써야 된다’ 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데, 이걸 돌려서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는 교회가 안 되니 인간의 생각을 좀 보태야 된다’ 라는 말이고, ‘영생이 되는 지식에 선악과 따먹은 사망적인 지식을 좀 섞어야 교회가 된다’ 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주장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시비를 하는 말들이다. 이런 주장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소원 목적을 무시하는 거다. ‘아이고 하나님,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안 됩니다. 인간의 방법을 좀 써야 빨리 부흥이 되지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격이다.
어떤 것을 놓고 인간끼리 말을 할 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에이, 그거 안 좋다’ 라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께 갖다 대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마귀새끼로 만들어 놓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거다. 분별 구별을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할 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라고 하겠지만 교훈성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그런 정도가 아니라 깜짝 놀라서 넘어질 정도의 말이 되는 거다.
잠을 잘 때 옷 속에서 뭐가 스물거려서 ‘가렵구나’ 하며 별 게 아닌 것으로 생각하다가 ‘뭐가 그러는 건가?’ 하고 불을 켜고 옷을 벗어보니 옷 안에서 바퀴벌레가 기어 나온다면 그만 기겁을 한다. 자기 몸에 기겁할 만한 게 기어 다녀도 컴컴할 때는 잘 모르지만 불을 켜 놓고 보면 그 모습이 확 드러나기 때문에 깜짝 놀라는 거다.
우리가 가르침에 있어서, 특히 성경을 가지고 가르침에 있어서 그 가르침이 옳은 건지 아닌지를 분별하려면 인간차원에서 분별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 쪽으로 가지고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딱 놓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을 해야 한다. 분별을 해서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아니라면 이건 ‘좋다. 나쁘다’ 차원이 아니라 아예 들으면 안 되는 거다. 분별이 딱 되면 그걸로 끝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자꾸 인간수준에서 말을 하려니 얘기가 길어지는 거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이것저것을 구해서 응답을 받아야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주님을 인간 자기의 종으로 삼은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주격이 바꾸어진 신앙인 줄도 모르고 그런 교훈을 좇는다면 사단 마귀와 그의 종들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 셈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의사성이나 신앙의 성질적인 면으로 볼 때 매사에 인간의 수단 방법이 앞서 나가면 이건 예수님을 인간 자기의 종으로 만드는 격이 돼버린다. 신앙의 이치가 그렇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그 기도를 들어준 게 아니다.
공부하는 데(김경형 목사님이 포도원제일교회와 궁극교회에서 신학생 및 목회자를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서 목사님들을 그렇게 가르쳤건만 한 여자목사가 하는 말이 자기가 꿈을 꾸니까 어디의 땅이 싸다고 땅의 번지까지 가르쳐 주더란다. 그럴 바에야 아예 복덕방을 차리는 게 낫지 그게 목사가 할 말이냐? 그 여자목사가 도대체 어떻게 예수를 믿었기에 남편과 헤어진 거냐? 그래서 난 그 여자목사에게 대놓고 말하기를 ‘도대체 어느 신학교에서 누가 안수를 주었느냐? 그건 다 도둑놈들이다’ 라고 했다. 도둑놈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사람에게 목사안수를 줄 리가 없다.
우리는 세상도 좋고 천국도 좋고, 둘 다 사랑할 수는 없다. 성경에 있듯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신앙을 비방하고 헐뜯고 깎아내리는 구설임을 알아야 한다. 좀 전에 말했듯이 되지 못한 사람이 목사가 돼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올리는 게 아니라 깎아내리는 거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다 구설이다.
진리의 신앙자들은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의 종들로부터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의 말씀을 받아나가면 자기 인격에 손상을 입지 않는 거다. 손상을 입는 것은 잘못된 것들에게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수치를 당하는 거다. 수치를 당하면 인격의 손상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얼굴을 못 든다.
목사는 죄를 짓는 것이 목사가 되기 이전,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얘기지 목사가 된 후부터는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 나는 몰랐는데 공부하러 오시는 목사님들이 그러는데 필리핀에서 한국의 목사님들이 가정주부고 어린 아이고 필리핀 여자를 건드려서 뉴스에도 나오고, 그래서 한국으로 쫓겨 오고 했다는데 왜 그렇게 된 거냐? 단순히 나쁘다고만 하지 말고 왜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냐?
우리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진리를 붙들고 살아도 자기의 마음이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리이치를 붙잡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에 밝지 못하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세상성이다. 세상성은 항상 인간이 앞서는 거고, 이건 편리주의요 자기 합리화로 되어있다.
이런 상태로 마음 속에 영웅성 허풍성만 가득해서 ‘해외 선교 합네’ 하고 나갔으니,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는 다른 쪽으로 믿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죄에 노출이 된 상태다. 항상 진리를 붙잡고 자기를 쳐다보며 자기를 다스리며 자기를 단속하는 게 아니라 항상 죄에 노출이 된 상태라서 그런 상황을 만나면 얼마든지 범죄가 돼 나오는 거다. 그걸 알아라.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사님들의 교훈이 굉장히 중요한 거다.
21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견고한 성은 무너지지 않는 성이요 공격을 해도 당하지 않는 성이다. 그러니까 그 기초석과 성벽의 재질이 아주 튼튼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견고한 성을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말을 하자면 소원과 목적이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으로, 성격과 성질과 성분이 진리로서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로 무장이 된 거룩한 성도를 말한다. 이런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유혹과 미혹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비진리적 육적 세상사상적 공격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는 견고한 성이다. 신앙의 견고한 성을 지키는 자는 그 신앙정신이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누가 가까이 와서 침투를 하는지 구별을 잘 한다. 진리의 신앙에는 망대가 있다 그 말이다. ‘적이 어디만큼 오나? 뭘 둘러쓰고 오나? 예수 옷을 둘러쓰고 오나? 누구의 모자를 둘러쓰고 오나?’ 이런 걸 본다 그 말이다.
수단 방법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 섭리에서 온 것이다. 이 기이한 것을 견고한 성 안에서 보여주신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것을 보여준다는 거다. 그러면 그게 뭘까? 아마도 천국에 있는 것, 또는 주 하나님께서 하실 일, 또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신약성경 계:에 보면 하나님께서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기이한 것을 보여줬다.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여주셨다. 교회가 미래적으로 어떻게 될 것을 보여주셨다. 사도요한이 미래의 성도들이 환난 핍박을 받고 짐승들에게 먹히고 하는 것을 봤을 때 그걸 보고 그냥 웃었겠느냐? 기뻤겠느냐? 아니면 말세교회들이 미래적으로 세상에게, 비진리에게 먹히는 것을 볼 때 사도요한의 입장에서 그들을 자기 형제들로 생각을 하며 통곡을 하고 울었겠는지?
진리의 영감의 감화에 사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세상에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볼 때 마음 아파라 하며 속으로 통곡을 하고 기도를 한다. 이건 선지자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다.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으로 보면 그런 것을 보고 마음 아파라 하는 사람이 우리의 동족이요 자기 부모형제들이다. 이런 마음의 감화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나가신다. ‘자기 교회를 어떻게 하면 키워볼까? 어떻게 하면 노후대책을 세워볼까?’ 이건 이미 틀렸다. 하나님의 종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에 보면 선지 사도들과 신실한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이한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성경 성문계시 완성 이후인 오늘날 악령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거다. 오늘날은 성도가 인격적 단일성으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면, 의중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신다. 이게 기이한 것을 보여주시는 거다. 깨달음의 기이함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기이한 것들을 많이 보여줄 것이다. 목사님들은 성경을 열어서 그 속에 들어있는 기이한 이치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경겁’이란 겁이 나서 놀란 것인데, 주의 장막 속에서 기이한 것을 보여주시까 그걸 보고 놀라서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라고 했다. 기이한 것을 봤을 때 놀랐다는 거다.
왜 놀랐을까? 주님께서 기이한 것을 보여줄 때 자기의 모습이 다 드러난다. 그래서 기이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 자기의 신앙상태를 본 거다. 그러니까 기이한 것을 보고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된 거다. 인간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수록,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수록 이 소리밖에 안 나오는 거다. 이게 참 옳은 신앙자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수록 무슨 소리가 나왔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이게 드러나는 거다. 자기가 진짜 말씀으로 통해서 주님을 만났다면 이 소리밖에 안 나오는 거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발견이 되면 발견이 된 그 자기는 말씀 앞에서 깜짝 놀라며 케오가 되는 거다.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이런 걸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하겠다고 건방지게 날뛴다. 그러다가 한 방 얻어맞고 푹 고꾸라지고, 또 하려다가 두 방 얻어맞고 푹 고꾸라지고 하면서 살림살이도 다 말아먹게 되면 이제는 뭔가를 하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만 아직도 뭔가를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걸 못하니 속에서 단내가 나는 거다. 속은 타는데 손에 가진 것도 없고 엄두도 안 나기 때문에 기가 탁 막히는 거다.
이럴 때 두 가지 생각이 나오게 되는데, 하나는 인간 쪽으로 붙는다. 어떤 방법론을 자꾸 쓴다 그 말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말씀으로 자꾸 깊이 들어간다. 말씀으로 깊이 들어가서 자기를 깨달고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고 ‘일이 안 되니 나는 아무 것도 못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시오’ 이런 상태가 아니라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된 후에야 말씀의 힘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게 하나님의 손이다.
이렇게 차츰차츰 일어나져야 그 다음에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옳게 바르게 활용이 돼 나간다. 이게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거냐?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희한한 것을 보여주셨으니 나는 능력자다. 이 시대의 참 종이다. 내 안수를 받아라. 내 말대로 하면 세상에서 성공한다. 다 잘 된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희한한 것이라는 게 뭘까? 그건 볼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게 아니다. 사단 마귀의 품속에 있는 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성경에 보면 남의 눈도 있고, 자기가 한 말도 있고 해서 사울이 변장을 하고 박수무당을 찾아가서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올리라고 해서 땅속에서 사무엘이 올라왔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희한한 걸 본 거다. 그런데 영으로 올라온 사무엘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내일 이맘 때에 네 아들과 같이 있겠다’ 라고 했다. 내일 이맘 때가 언제냐? 전쟁에서 졸병들도 다 죽고 아들과 사울 왕이 같이 죽는 때다. 이게 이맘 때다.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볼 때 그게 사무엘이겠느냐? 마귀의 종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거다.
우리교인 중에 혹시 희한한 걸 보여 달라고 기도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인 없는 땅, 국가가 모르는 땅을 좀 보여 달라고 하라. 그렇게 해서 자기 이름으로 팔아먹으면 돈을 많이 벌 게 아니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물질을 주신다면 하나님의 일에 투자를 하라는 건데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 세상만을 위해 살더라. 그러니 내가 앞으로 그런 목사나 그런 성도를 보면 ‘하나님 저 자를 가만 두시렵니까? 바로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걸 처분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참이다. 말하자면 뺏어서라도 사람이 바로 서게 해 달라는 거다. 움켜쥐고만 있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건 뺏어야 한다.
그런데 공부하러 오시는 목사님 중에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런 식으로 나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할 수 없다. 말을 해도 안 들을 때는 사건이 와야 한다. 사건을 겪어야 만이 바로 서게 될 사람이라면 이 사람에는 사건이 와야 한다. 와도 빨리 와야 한다. 가만 보면 그런 목사들은 덩치가 큰 사람 뒤에 앉아서 내 얼굴을 잘 안 보려고 한다. 평신도라면 모르겠지만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그러고 있으니 큰 문제다.
하나님의 종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자기가 인식이 되니 그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까봐, 끊어지는 이것 때문에 놀라서 기도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에 잘 놀라느냐? 전쟁소문에 잘 놀라고, ‘물가가 올라간다. 기름 값이 올라간다. 하는 소문에 잘 놀라고, IMF 소문에 잘 놀라고, 큰 것을 보고 잘 놀라고, 많은 것을 보고 잘 놀라고, 사람을 보고 잘 놀라고, 그래서 기도를 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잡아 돌리는 것이니 우리가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는 없는 거고, 문제는 그런 것이 올 때 그런 것으로 인해 내 마음이 흔들려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까봐 기도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하나님 앞에 끊어질까봐 기도를 하는 자기, 그 염려 때문에 기도를 하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성실한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다.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말씀 속에 있는 정신 사상을 자기 인격화 시키는 사람이다. 이런 성도가 성실한 사람이요 옳은 성도다. 이런 성실한 사람은, 이런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다. 무겁고, 인격이 고상하고, 사람에게 속지 않고, 자기 길을 바로 갈 줄 아는 참으로 옳은 성도다. 사람 중의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성실한 성도의 신앙정신을 보호해 주신다는 말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보호해 주신다는 말이다. 나아가서 그 사람의 육신까지 보호해 주신다는 거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걸 한 번 생각해 봐라. 이런 분이 여기 계시기도 하지만, 자기가 이곳에 와서 이 진리를 받은 후로부터 바로 살려고 노력을 하니 자기 마음이 편하고, 근심 걱정이 별로 없고 하니까 잔병이 서서히 없어지고 하지 않더냐? 이걸 가만 생각해 봐라. 이게 하나님의 보호다. 이게 아닌 자기 마음이 오그라져 버리면 그만 병이 찾아온다.
진리로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린다면 이 사람은 참 옳은 성도고 자기 평안이다. 그러나 진리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오만 것들이 자기에게 대립이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몸속에 병이 들어오는 건 당연한 거고. 이렇게 되면 아무리 돈을 벌어봐야 소용이 없다. 깨진 독에 물 붓기이고, 자루에 구멍이 나서 돈이 새는 격이 된다.
자기를 진리로 잘 다스리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면을 잘 다스려 나간다. 그러니 말하자면 그 전에는 자기 몸에 잡병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잘 다스려 나가니 서서히 건강이 찾아오게 되는 거다. 왜 이렇게 되는 거냐? 말씀의 사람이 되어 들어가니 자기를 다스리게 되고 생활이 건전해지니 그런 거다.
성도가 다른 그 무엇보다 자기의 신앙정신이 보호를 받으면 이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보통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정신 면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가 많다. 왜 그런가 하니 사람이 성실하지 못해서 그렇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한데 어떻게 그 사람이 잘 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복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병든 몸이 나으려고 안수기도를 받는 것보다 더 복된 거다. 그 가치력을 알아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면 될 터인데 이방 불신자들처럼 돈을 보고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해서, 사람이 더 무서워서 진리생명 길을 버린다면 이는 사람이 성실하지 못한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과 세상 것을 주장하게 되니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이런 사람을 보호해 주느냐? 아니다. 못한다. 그러니 결국은 그 신앙정신이 밟히고, 마음도 밟히고, 육신까지도 밟히는 거다. 즉 불성실한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다.
강하고 담대하라
김중곤목사 / 시 31:23-24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보면 평상시와 비상시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사회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지만, 비상시는 어려운 상황과 사태가 일어나서 여러 가지 일이 위기와 난관에 부닥칩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정상시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고, 비상시에는 비상시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의 무장이 필요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비상상황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해 나아갑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용기와 신념으로 위기를 극복합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했고,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시련과 위기가 닥쳐올 때, 주님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으로 시련과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당면한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꿈을 꾸고 꿈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합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꿈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나중에는 꿈이 그 사람을 이끌어서 결국 꿈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인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지므로, 노예에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태동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후4:16-18절에서‘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고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날로 새로워지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까지 바라볼 수 있는 꿈과 믿음과 소망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닭과 독수리는 위험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폭풍이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지만,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고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올라 안전지대로 향합니다.
사람도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두 유형으로 나뉩니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는 ‘닭 형 인간’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대처하는 ‘독수리 형 인간’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항상 ‘독수리 형 인간’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잠시 문제에서 피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 졌습니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나무는 좋은 목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나약한 닭에서 강한 독수리와 같이 고난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줄 믿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며,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고, 겨울에는 추위와 싸웁니다. 더구나 우리는 모든 악과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적과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온갖 병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승리하는 민족이 되어야 하고, 역사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패배자의 운명입니다. 승리는 결코 우연이나 요행의 산물이 아닙니다. 승리는 지혜와 신념의 산물이요, 도전과 인내의 산물입니다. 게으른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위기가 있습니다. 위기에는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에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기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만은 아닙니다. 위기는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해결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절망과 소망의 만남이요, 부정과 긍정의 대결이요, 죽음과 삶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위기에 패배하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망가운데에서도 소망의 길을 열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여러 가지 위기와 고난이 닥쳐왔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심으로 언제나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이나 위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시련과 위기를 도전하고 극복하려는 결심과 용기가 없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의 위기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위기를 극복한 바울사도는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의 사람도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과 시련의 위기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도우심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어려운 상황가운데에서도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엡6:13절에서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우리 앞에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이 가로막힐 때가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 주시는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인 요셉은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욥도 다윗도 모두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이렇게 고난 속에서 믿음의 꽃을 꽃피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성패를 순경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패는 순경 속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힘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고난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고난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삶의 용기를 주시고 고난의 바다를 기쁘고 당당하게 항해하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고후7:4절에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 모든 환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하였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울사도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릴 때 신자의 정서 안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주시는 기쁨은 주님 안에서(빌3:1) 나타나는 믿음의 결과이며(빌1:4), 성령의 열매이고(갈5: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안(요16:33)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의 식구들이나 형제자매들이 함께 기뻐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로 조심하고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하고 함께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서로 준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자기 욕심 보다는 서로의 유익을 위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B.C.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며 사상가 노자(老子)는 인간 관계론의 5가지 법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진실함이 없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을 추켜세우거나 머지않아 밝혀질 사실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회유하면서 재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는데, 신뢰받지 못하는 거짓은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금방 밝혀지는 것입니다.
둘째, 말 많음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말은 적은 편이 좋습니다. 말보다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보다 진실한 삶으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셋째, 아는 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너무 아는 체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편이 낫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지식이 있더라도 이를 남에게 나타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돈에 집착한 채 돈의 노예가 되거나, 너무 자신의 욕심만 나타내는 것은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다섯째,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과 다툰다는 것은 손해입니다. 어떠한 일에나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려는 사람은 이익보다 손해를 보게 됩니다. 다투어서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열사람의 친구 보다 한 사람의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이자 처세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못지않게 인간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신뢰하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고 성도들이 함께 시련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주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만 관철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아이에게 쏟는 관심이 아이에겐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질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과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연인에겐 구속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관심이나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관심, 이런 것들은 모두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관심 입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와 같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 아이들이나 상대방이 그것을 친절과 배려, 사랑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간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관심은 나의 기준이나 잣대를 버리고, 우리아이들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을 고유의 인격체로서 존중해 주어야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조차도 자신을 존중하는지 아닌지를 100% 직감할 수 있습니다. 잘한 일에 대해 칭찬에 그치지 말고. 힘들어하고 지쳐 있을 때, 실패하고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 있을 때, 아프고 병들었을 때, 갈등을 겪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때 격려해 주고,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어야합니다.
2.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의 마음을 전달하기 전에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을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한두 번 이해하고 배려해 주다가 참지 못해 포기하거나 관심을 꺼버리는 것은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3.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하는 만큼 배려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이야기를 경청하므로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거나 무엇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그 사람 자체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30초만 소중한 사람을 지켜보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든, 그 사람을 생각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의 관심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배려로 표현될 것이며, 그것은 감사의 마음을 넘어 더 큰 감동으로 세상에 확산될 것입니다.(하우석의 ‘뜨거운 관심’ 중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시련과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실망하고 포기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어떤 고난도 어려움도 주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겨냄으로, 끝내는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며, 온 가족과 형제자매, 그리고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이해하며, 아름답고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므로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주님 주시는 지혜로 강하고 담대하게 모든 일에 승리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