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속초문단이 한국의 지방문학을 대표하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서울에서도 몇 안 되는 ‘문학동인지’가 변방 시골마을인 속초에서 발간되었으며, 1980년대 초에 시작된 ‘시 낭송회’는 무려 20년 동안 ‘한국 시 낭송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들은 초창기 속초예술계 또한 견인했으니, 오늘날 속초예술의 성장 토대는 전적으로 이 시기 이들의 눈부신 활약에 의해 구축되었다 할 수 있다. 이때 속초문단을 구성하고 이를 키운 이들은, 윤홍렬 이성선 박명자 강호삼 김종영 이상국 고형렬 김춘만 등이었다. 그 중심에 최명길도 있었다. 그 이래 최명길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속초에서 창작활동과 문학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인 최명길이야말로 속초예술의 근원이라 할 만 하다. 66년 천진초 부임…‘설악문우회’ 활동 최명길이 설악산 자락에 둥지를 튼 것은, 1966년 천진초등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꿈 많은 청년시절 5년간을 이곳 바닷가 시골에서 보내며, 시인의 삶을 선택하고 그 동반자인 아내와 친구를 얻었다. 부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한 교육잡지에 최치림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인 최명길’의 존재를 인근에 알린다. 그리하여 고성교육청 장학사와 고성관내 교사들로 구성된 ‘금강문학동인회’에 참여하게 된다. 금강문학동인회는 영동북부의 최초 ‘문학동인’인 셈인데, 5년 동안 활발하게 유지되었으나, 구성원들이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최명길은 그 무렵 태동된 ‘설악문우회’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설악문우회는 지금도 속초를 대표하는 문학단체로 존속하고 있다. 이 단체는, 그의 나이 서른 살이던 1969년에 창립되었다. 윤홍렬 선생의 주도로, 속초의 초중등교사들을 끌어 모아 모두 22명으로 출발하였다. 1970년 첫 동인지 <갈뫼>가 발간되었을 때의 감회를 최명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던 조연현 선생을 비롯해, 문단 거장 몇 분이 <갈뫼> 창간호 기념식에 참석했는데, 수복지구 최변방의 작은 도시에서, 등사본도 아닌 인쇄본 문학동인지가 나왔으니 무척이나 경이로운 일이라며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갈뫼>는 우리 문단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창립연도나 존속기간으로 보아 이보다 오래된 동인지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학단체 ‘설악문우회’와 그 동인지 <갈뫼>는, 이렇듯 속초의 문학수준을 과시함과 동시에, 문학청년들에게 문단 진출의 텃밭이 되어 주었다. 최명길 역시 이곳에서 문학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 기량을 확장했다.

1992년 3월 28일 제88회 물소리 시낭송회가 끝난 뒤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 네번째가 시인 최명길, 오른쪽 네번째가 평생친구 고 이성선 시인. 평생 친구 고 이성선 만나 고향행 포기더욱이 그는 이 모임에서 평생 친구인 이성선을 만난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읽고 밤을 새워 토론하던 어느 날, “어디 가지 말고 우리 여기서 한 평생 시나 쓰자”는 제안을 받고 최명길은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했다. 서른여섯 살 때인 1975년 최명길은 ‘현대문학’ 추천으로 중앙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후, 지체하지 않고 1978년 첫 시집 ‘화접사’를 출간했다. 이때 이미 그의 시에선 불가(佛家)적 색채가 농후하게 드러났다. 1981년 최명길은 이성선과 더불어, ‘물소리 시 낭송회’를 창립한다. 시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카페에 모여 낭송도 하고 토론도 하는 모임이었다. 이 또한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한다. 중앙의 저명한 시인들이 수시로 초대되어, 문학을 애호하는 속초의 젊은이들과 어울렸으니, 오늘날 속초에서 시 창작이나 낭송으로 그 명성을 드높이는 중년 여인들 중 상당수는 다 이곳에서 그 능력을 키웠다. 삶의 가치를 논하고 지성의 역할을 이해하며 문학적 기량을 쌓는 수련처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물소리 시 낭송회’는 20년 동안 150회나 열려, 속초가 ‘문학의 메카’임을 입증했다. 이후에도 최명길은 ‘목요 문예’와 같은 문학 강원을 개설하여 속초의 문학도들에게 문학이론과 실기를 익힐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왔다. 최명길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윽고 1991년 ‘해운거사’라는 법명과 함께, 한국불교연구원에서 ‘금장법사’ 인증을 받는다. 그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심오한 종교적 관점은, 이미 1989년 그의 석사학위청구논문에서 확인된 바 있다. <영랑 시에 나타난 마음 연구>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마음의 본질과 깨달음의 의미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때 “‘心生滅 心眞如’의 과정이 내 작품의 출발이자 결론”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기록하는 것이 곧 시(詩)며, 그래서 ‘시(詩)는 도(道)’라고 말한다. 가끔 신흥사불교대학에서 경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예순 셋에 백두대간 1240km 종주 최명길은 2000년 상평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조기에 퇴직한다. 친구 이성선과 더불어, 여행도 다니며 좀더 심도 있는 문학세계를 탐구하자 약속했으나, 막상 그가 퇴직했을 때 이성선은 홀연히 세상을 하직했다. 홀로 남은 듯한 절망감에서 그는 ‘산 사람’이 되었다. 사실은 1968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걸핏하면 산을 헤맸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산과 명상과 문학’을 합일시키는 능력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02년 예순 셋의 나이에,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40여 일 동안 쉬지 않고 1240km를 걸으며, 봉우리마다 시 한 편씩 총 143편의 작품을 써댔다. 그 다음 해에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홀로 올랐다. 나이 칠십에 이른 지금도, 그는 20대를 능가하는 체력으로 산을 탄다. 산악회에 정식으로 가입한 적은 없지만, 때로 산악인 행사에 초대되어 ‘축사’를 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냈다. <화접사>, <풀피리 하나만으로>, <바람 속의 작은 집>, <반만 울리는 피리>, <隱者, 물을 건너다>, <콧구멍 없는 소> 등이 그것이다. “코가 없으니 콧구멍도 없고, 콧구멍이 없으니 코뚜레도 꿸 수 없다”며, “그 무엇도 더 이상 나를 속박할 수 없다”고 그는 외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이들 시집을 통해 선언한 것이다. 그의 시 중 몇 편은 가곡으로 만들어져 ‘노래’가 되었다. 많은 연구가들은 그의 문학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저명 문학잡지에 그의 작품이 꾸준히 실린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그의 전성시대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최명길은 한 평생 교직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고, 문학에 매진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불교적 관점으로 깨달음을 추구했고, 산(山)을 경전 삼아 그 도(道)를 깨우치려 애썼다. 기실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우뚝한 업적을 세웠다. 속초 문단이나 속초 예술계는 그로 인해 그 격(格)이 한층 높아졌으니, 진실로 최명길은 설악이 배출한 최고의 문인이다. 최재도극작가·시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