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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20050913 피히테, 셸링,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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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3 부산강의-피히테, 셸링, 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번에 피히테에 대해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시간에는 피히테와 셸링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나는지 그것을 좀 생각해 봅시다. 이 피히테라는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고 철학자인데, 이 철학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이유가 뭐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한 것이 너무 오래되어서 피히테가 무슨 소리했는지 다 잊어버렸잖아요.
피히테 말은, 피히테의 주장은 쉽게 이야기해서 이런 겁니다.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자아밖에 없다. 확실한 것이 자아 밖에 없다는 그런 뜻보다는 그것도 비슷한 뜻인데. 모든 것은 절대자아. 그러니까 나죠. 나에서부터 파생된 그러한 관념들이다. 세상이. 모든 것은 나로부터 하나님이든, 뭐든, 모든 것이 내가 나에서 나온 관념들이다. 하는 것이 피히테의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나라는 것이 가만히 있는 나가 아니고 자꾸 활동을 하거든요. 그래서 활동이라 하는 것은 그냥 신체를 움직이는 것도 활동이지만 생각하는 것도 활동이죠. 나라는 것이 계속 활동해서 뭘 이렇게 남기게 되니까. 내가 만약에 교회 간다. 그러면 교회인지, 공장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건 내가 교회라고 판단하니까 교회가 되죠. 만약에 내가 약간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교회로 안 보이고 공장으로 보인다면, 그거는 때려 죽여도 누가 뭐래도 나는 공장으로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이 세상에서는 절대자아인데. 그러면 절대자아를 주장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왜 성경공부 하는데 신학공부 하는데 이 사람을 등장시키게 되는가? 그것은 절대적인 자아성은 절대성은 무엇과 연관되는가 하면, 절대자 되신 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에 연관되어서 여기 160페이지, 거기에 나옵니다만.
아까 절대적인 절대자아.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것이 돌아가 봐야 나한테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에서부터 출발해서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겁니다. 이 말을 우리가 좀 거부하고 싶어도 따져보면 거부할 수 없지요. 왜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느냐 하면, 나에게서 나왔거든요.
이거 선풍기다. 이것은 선풍기다. 누가 말해요? 내가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선풍기로 보는 것은 내가 말했기 때문에 도로 나에게로 나의 선풍기, 내가 이해된 선풍기가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나로 시작된 일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이해되는 쪽으로 다 돌아오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다 그렇다 이 말이죠.
내가 이해 안 되는 것, 바깥에 있는 걸 가지고 자꾸 이해하라 하면,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내가 이해 안 되는데 뭘 또 우기냐 말이죠. 그건 말이 안 되죠.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날아오는데.
이렇게 되면 뭐가? 나라 하는 게 절대자가 되죠. 하나의 신이 되죠. 그럼 네가 신이냐? 라고 달려들게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물론 내가 신은 아니라는 걸 본인은 알죠. 신이라 하는 것은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해야 신인데 분명히 나는 안 그렇다는 걸 본인은 아니까. 그렇다면 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나 중심의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은 뭔가 절대적인 신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나라는 이런 인식이 생긴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제 신과 인간이 여기서 서로 접선이 되고 접촉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볼 때 나를 중심으로 해서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이거는 나쁜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나쁜 일이 아니고, 이거는 절대적인 자아를 깨우치게 한 하나님이 있어서 그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은 니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그러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같은 절대 신들, 절대, 절대 어떤 공통점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식으로 이것이 연관이 되느냐 하면, 당신은 왜 헌금을 그것밖에 안 내느냐? 하면 내 돈 내 마음대로 내는데 니가 왜 이러냐? 당신 돈, 하나님 돈 아닙니까? 이러면 그래, 하나님의 돈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원대로 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니가 왜 말이 많으냐?
흔히들 대답하는 그러한 작은 우리의 태도 같은 것을 이런 피히테라든지, 셸링이라든지, 헤겔이라는 철학자들은 칸트나 이 사람들은 아주 그게 앞뒤가 맞도록 잘 정리를 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 피히테의 생각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무심코 툭툭 던지는 그 근본, 그 기반의 어떤 다른 생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우리가 무심코 그러한 태도나 그런 단어나 그런 문장을 쓴다든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이걸 밝혀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럼 피히테가 이게 복음입니까? 복음 아니죠. 피히테의 말이, 여기서 여러분들이 하나 유념해야 될 것은, 틀렸다, 안 틀렸다. 에서 안 틀린 것을 한다고 해서 그게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2+3=5 맞잖아요. 맞는데 5가 복음입니까? 복음은 아니란 말이죠.
기생 라합이 거짓말해서 정탐꾼을 돌려보냈지요. 그게 복음입니까, 복음 아닙니까? 복음이잖아요. 복음인데 거짓말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거짓말했잖아요.
사람들이 절대자아에서 나와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면, 절대자아를 강하게 더 하면, 특히 이런 경우에 예술가들이 그런 경향이 많아요. 너, 수염 왜 길렀어? 그러면 내 수염, 내가 길렀는데 니가 왜 그러냐? 다른 사람은 안 기르는데 너는 왜 기르느냐? 다른 사람이란 생각보다도 절대적인 나가 우선이고, 내가 절대적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 드는 그렇게 생각이 들게 하는 그 주인공은 누구란 말이에요? 절대적인 나다 말이죠. 그럼 너는 수염 기르지만 나는 수염 기르겠어. 라고 절대적인 자아가 절대적인 폼을 내고 절대적인 행세를 하는데 왜 니가 시비를 거느냐 말이죠.
열아홉 살, 스무 살 먹은 남녀가 동거 생활한다. 집안에서 발칵 뒤집어지죠. 니, 와 결혼도 안하고 동거 생활하느냐? 저도 어른입니다. 이거 뭐, 아주 철학적인 이야기 안 해도, 피히테 이야기 안 해도 흔히 나오는 게 어른입니다. 니가 뭐 어른이고? 니가 세상을 뭐 안다고? 내가 판단해서 내가 옳다하면 나는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자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니는 그것 잘못됐다. 잘되고, 잘못되고 하는 것이 절대자아를 취소시키지 못하잖아요.
열명이 있는데 아홉 명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배 안 고픈 나마저 배고파야 됩니까? 아니지요. 배 안고프면 배 안고픈 거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장례식이 있는데 자식이 아홉 명 있는데 여덟 명이 울더라. 한 명도 따라 울어야 됩니까? 예의상 울어야 되지요. 그러면 울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신 분에게 원한 관계있으면 분통해서 울지만 슬퍼서 울지는 안거든요. 잘 죽었다고 기뻐하지 울진 안거든요.
구석구석에 피히테의 사상이 우리 속에 다 자리 잡고 있습니다. 뭔가 점잔을 떨고 남 들어주는 것 같지만 자기가 궁색할 때 난처한 상황에 있을 때는 내 몸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니가 왜 그러냐? 절대자아를 주장할 수밖에 없고, 그것마저 뭐와 연관되어 있다? 절대 신이 시킨 것이기 때문에 니가 간섭하지 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니가 뭔데? 니가 뭔데 그렇게 하느냐? 왜? 나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주님께 낳았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니가 주님께 났으면 나도 주님께 낳았다. 그럼 니 마음대로 해라. 니가 주님께 나든 나는 내 할 일 다 한다.
이러한 절대를 할 때 거기에 대해서 틀리다, 옳다가 아니라,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은 이러한 철학적인 바탕 위에서 복음이 상관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상관없는 걸 왜 이야기하느냐? 상관없는데 자꾸 상관을 지으니까 문제거든요. 자기가 복음적으로 행동했다. 복음적으로 행동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복음적인 행동이지, 내가 한 행동은 복음적인 행동이라고 우기는 것이 복음적인 행동이 아닌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모든 세상, 피히테 이야기 들어보면 참, 동의 안할 수 없어요. 피히테는 아주 심사숙고, 여기 어렵게 했어요. 여기 몇 페이지에 나오느냐 하면, 159 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보면,
[피히테는 자아의 자기 직관을 자기를 정립하는 자로 정립하는 것]
그 다음에 열 번째 줄에 보면,
[자아의 절대적인, 내적인, 생성적인 발생사는 그 원리를 전제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빛을 가리키는데 이 빛으로부터 자아는 빛이 되고 또한 이 빛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의 계시와 언설인 빛이 현상적으로 견인된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 계시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복음이에요. 세상적으로 봐서는. 내가 절대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이것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요구하는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나도 이걸 거부할 수 없어요. 이거는 당연한 거야. 날 건드리지 마.
세상의 바깥에 있는 아무리 많은 것들이 있더라도 저 많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역시 나지, 저 사람들이 날 알아달라고 요청해서 내 알아주는 게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을 저기 있구나. 하고 알아주면, 저기 개가 있네. 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건 나잖아요. 예수 믿는다 하면, 예수 믿는다고 믿는 주체는 누굽니까? 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최고잖아요.
피히테 이전까지는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고, 자신은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거잖아요. 피히테는 그것을 반대해서 나에게 절대적인 세상만사를 내 중심으로 생각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에 빛이라 하는 것은,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태초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이 사람들을 비취는 빛이 있으니라.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4절에 의해서 내가 빛이기 때문에 나에게 얼마든지 예수 믿을 수 있는 나의 능력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전제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절대적인 자아가 절대적인 믿음을 믿고, 그로서 우리는 원래부터 그때부터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음을 통해서 그 다음 재삼 후차적으로 확인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피히테는.
이런 것을 161페이지에 보면, 자아의 자기 조정 명제.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있는데 그 어려운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160페이지 보면, 도덕적인 것이 나오는데. 제가 아까 말했듯이 피히테가 말한 도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속에 있는 신성을 알아차리는 그것이 도덕이다. 내 안에 신의 빛이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 채는 그것이 도덕이다. 그게 절대 선이다.
피히테의 이런 주장을 젊은 사람이 듣고 사람들이 들으면, 세상에 복음이라는 것은 구태여 성경을 볼 필요 없이 내가 살아있는 계시니까. 그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인해서 새생명 된 사람은 극도의 성화에 다가선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성경을 볼 필요도 없다 하지요. 누고? 이 뭐시기 그런 파들 있잖아요.
성경이 말씀인데 이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제 성경 필요 없다는 겁니다. 이게 그 사람들이 피히테를 공부 안 해서 그래요. 이게 저거들이 특허 낸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피히테가 이미 그전에 200년, 300년 전에 그런 아이디어가 다 나왔어요. 그전에 또 스피노자 나왔지만 스피노자는 그것마저 극복한 사람이지만.
도덕이라는 더 이상 하나님을, 그러니까 피히테가 내가 하는 것이 도덕이라 한 이유가, 더 이상 하나님의 도덕을 따로 찾지 마라.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책 펼쳐서 어떻게 살면 될까요? 하고 성경책한테 물을 게 없다 말이죠. 교회 가서 목사님한테 묻지 마라. 내 스스로 신성에 입각해서 살면 그것이 도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삶과 굉장히 유사해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지요. 극도의 성령의 삶으로 나가 버리니까.
극도의 성화의 삶이라 하는 것은, 성화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결별이거든요. 성화론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성화론 들어가면 예수님의 복음과는 결별입니다. 그거는 단독, 예수님과 따로 떨어져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게 성화론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과 결부되어 버리면 그거는 자기 성화론이 아니고, 누구 성화론이냐? 예수님 성화론 되기 때문에 성화론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화 될 필요 없이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안 되고. 만약에 예수님과 결부되면 예수님 성화론되기 때문에 인간 성화론은 어차피 없고. 만약에 예수님과 결별되면 피히테처럼 절대적인 이제는 성령이 있기 때문에 이 성령 받은 성령 가지고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영광 돌리느냐 하는 절대적인 자아로 나가야 돼요.
생각해 보세요. 자아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아직도 성령한테 허점이 있다면, 계속 이 허점을 위해서 자아를 포기하고 또 주님한테 의지하기 때문에 이러면 성령론이 아니잖아요. 그들이 말하는 성령론을 제대로 알려면 이 자아에게 완벽한 뭘 줘야 하느냐 하면, 완벽한 자유를 줘야 되고, 자유와 자율을 줘야 돼요. 자유와 자율을 완전히 100% 해줘야 돼요. 이게 감리교에서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줬는데 잘못 사용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때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제대로 사용하란 뜻이다. 저절로 준 자유를 자율로 사용하면 영광 돌리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유와 자율에 어떤 허점이 있고 미흡한 자유를 주면 안 되거든요. 미흡한 자유를 주면 해봐라 하는 것이 해봐라 하는 게 명령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니, 완전한 자유를 가졌어. 성령의 완전한 자유를 가졌어. 바르게 해봐. 이렇게 돼야 될 건데. 니, 자유 전에 아담하고 똑같을 걸.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성화론 성립 안 되잖아요. 성화론이 성립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성령에 의해 주어진 자유고 완벽해야 돼요. 완벽한 자유와 결합되면 이 자유는 뭐냐 하면, 절대자아가 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린 피히테를 공부해야 되는 거예요.
피히테가 자기반성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반성 하지만 항상 자기반성의 기준이 뭐냐? 아하, 내 안에 신성이 들어있지. 내가 하나님의 빛이지. 그런데 내가 왜 세상에 내 절대자아를 포기하고 남의 의견, 남이 뭐라 하는데 남이 모르는 지배, 남의 압력, 거기에 왜 남의 시선에 신경 썼을까? 내가 절대자아인데 그래 다시 돌아가야지. 이게 피히테가 말하는 자기반성이고 또다시 절대자아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 나타나 없어지는 것, 이게 전부다 절대자아를 현혹시키는 것들이다 말이죠.
앞에 아름다운 꽃이 있고, 앞에 넓은 아파트가 있더라도 그런 것은 절대자아가 눈 떠 봤자 안 보였던 거였거든요. 눈 떴으니까 보였거든요. 그러면 내 절대자아가 한 50평 아파트가 좋다 했는데 살 여력이 안 되면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면 자기한테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달성한 욕망을 제대로 제때 욕망을 달성 못하면 그 욕망의 결핍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를 추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못난 놈아. 자꾸 자기를 때려요. 뭐 했노? 그동안. 다른 사람 벌 때 놀았냐? 교회에다 바쳤지? 이런 식으로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럴 때 피히테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눈만 한번 질근 감아라. 절대자아가 눈 감으면 아파트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거든요. 안 보이고 눈을 15평짜리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이게 뭐냐? 모든 보는 것은 다 누구 마음? 내 마음. 딴 것은 절대가 아니에요. 딴 것은 상대적이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 사라지고, 있다가 나타나고 이런 거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은 나에요. 왜냐하면 신께서 그런 절대적인 요소를 나한테 부어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우리가 양보가 없어야 된다 하는 것이 피히테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피히테의 주장이 오늘날 성령의 삶과 결부가 돼버리면, 그야말로 성령의 도덕적 삶이 우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여러분, 이 피히테에 대해서 오류를 한번 지적해 보세요. 우리의 [50여명의 신학자들] 공부하면서 제가 오류를 지적해 보라 했는데 할 때마다 지적할 게 없지요. 누구한테든지. 그러니까 이게 뽑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게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동안 무수한 공부를 했고 무수한 공부 가운데서 새롭게 무슨 주장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없는 플러스알파를 담아서 했기 때문에 기존의 것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사람이 셸링. 오늘은 셸링 해봅시다. 이러한 완벽한 셸링에 대해서 162페이지입니다. 1798년. 셸링은 그 피히테에 대해서 다 알고 거기서 반박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허점이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반박이 돼요.
그 반박하는 게 뭐냐 하면, 162페이지 중간에 보면,
[1798년에 셸링의 주장의 요점은, 자아가 아니라 절대관념, 절대지식의 관념인데 절대지식은 절대관념과 절대 실체에 일치를 뜻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셸링은 이렇게 물어요. 절대자아가 자연세계를 보면서 저 별이고 달이라 하는 것은 내가 달이라고 생각할 때만 달이고, 내가 별이라고 할 때만 별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셸링은 묻습니다. 저 별과 달을 누가 만들었느냐? 니가 만들었나? 네가 만들었어?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피히테는 절대자아가 누구입니까? 신이죠. 절대자아가 누구와 연관되어 있다고? 절대자아와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자아가 신이에요. 신이 준 신의 빛이 누구냐? 빛의 자녀가 자기에요.
그렇다면 셸링이 반박합니다. 절대자아가 절대자아와 연관되어 있다 하는데 그럼 중간에 있는 자연세계가 있잖아요. 자연세계는 왜 절대자아를 통해서 이걸 안 만들었느냐 이 말입니다. 별이 있다. 저건 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절대자아가 맞아요. 내가 별이라고 하면 별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는. 그런 신성을 신이 줬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그 별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왜 니가 관여 안 하느냐 말이죠. 어, 저거 내가 만들었는데. 왜 이런 소리를 안 하느냐 이 말입니다.
결국은 셸링은 뭐냐 하면, 절대자아라 하는 것은 절대세계의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반박하는 것 보니까 뻔하지요. 막상 피히테 이야기 보니까 반박이 안 되는데 막상 셸링 들어보니까 그 말이 맞지요. 셸링 이야기 들어보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요.
162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인간은 자기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사다리를 제작하는데 있어 질료의 간과성, 대상체와 형상의 추상성, 곧 대상과 분리된 자아성을 구분지어 놓은 것을 결합시킴을 통해서 그 자체 안의 신을 향하여 추동적인 지향성을 담으려고 한다.]
굉장히 말이 어려운데 간단히 이렇습니다. 사람이 절대자아를 통해서 아까 절대 신과 연관시켰지요. 여러분, 또 잊어버렸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피히테에 있어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볼 때 절대 자기중심으로 보는 것처럼 이런 자기중심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심성을 준 것은 누구다? 뭔가 나같이 절대자아가 있기 때문에 줬다. 했는데 셸링은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절대자아로부터 사다리를 걸쳐서 절대 신에게 나아가는 것 밖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야곱의 사다리를 위에서 내려오잖아요.
그런데 피히테의 사다리는 뭡니까? 밑에서부터 위로 절대자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갈 때 피히테는 말하기를 자꾸 절대자아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절대자아로 되돌아오더라도 반드시 대상체를 만들지요. 저게 나일까, 저게 내 모습일까? 자꾸 대상체를 만들지요. 대상과 자아가 자꾸 분리되잖아요. 이 말은 동의하지요. 이 말은 아주 어려운 말이 아니고 사실 쉬운 말 아닙니까? 대상과 분리된 자아다 말이죠.
그렇다면 대상과 항상 뭘 할 때 그냥 깜깜한데서 답을 몰라요. 누굴 만날 때 오, 반갑다. 친구야.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고. 판단을 하잖아요. 그건 대상이 있을 자신을 아는데 대상과 자아를 이렇게 하나로 결합을 시키는, 피히테는 이걸 대상을 인정해요. 대상을 통해서 되돌아오고, 셸링은 대상과 절대자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누구냐? 이 말이에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약간 다르죠.
피히테는 대상이 있더라도 그게 절대자아로 돌아오지만 셸링은 대상과 절대자아로 자연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그걸 되돌아오도록 하던 뭐든 결합을 하던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입니다.
피히테는 하나님은 자기 절대를 통해서 하나님을 그냥 뽑아 자기를 집어넣었지만 스스로 힘으로 스스로 잡아당겼지만 이거는 스스로 당기는 것이 아니고 대상과 자기를 결합시켜서 점차점차 신에게 나아가게 하는 그거는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말이지요. 이렇게 되니 성화론이 풍성해지네.
이것 가지고 성화론 적용시키면, 아까 피히테보다도 더 완벽한 성화론 되는데 뭐냐 하면, 내가 뭔가 성화롭게 하려 하는데, 예를 들어서 원수가 있는데 성경에 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요. 도저히 사랑이 안 되는 거예요. 철천지원수기 때문에 안 죽이고 안 패고 그냥 놔두는 것만 다행이다 말이지요. 내가 패고 싶은데.
갑자기 주님께서 원수와 나를 하나로 묶어서 사랑하게 만들더라. 그건 외부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더라. 그런 식으로 인간은 성화. 대상과 신의 뜻을 결합시키면서 신에게 점차 나아간다. 라는 것이 셸링입니다. 그 사람들 신학자 아닙니다. 철학자들이에요.
163페이지 봅시다. 그렇다면 묻지요. 셸링 당신, 그걸 당신은 결합시킨 게 신이라 하는데 신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느냐? 나는 신이다 해서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게 바로 나중에 헤겔에 나오는데 그게 뭐냐? 이성, 절대이성.
헤겔에 대해서 약간은 아는 사람들은 이제 아아, 헤겔의 절대이성이 지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셸링에게서 바통 받아서 릴레이해서 400미터 릴레이 할 때 바통 받아서 나온 사상이구나. 제가 헤겔의 절대이성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헤겔의 절대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철학적 표현으로 보면 됩니다.
절대이성이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논리가 있지만 원리가 있지만 그 원리는 결국은 하나로 뭉쳐진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리스도로 하나로 뭉쳐지고 그리스도가 절대이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절대이성이라 하느냐? 그리스도라 하면 기독교에서나 통하는 용어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되고. 모든 불교니 모든 이방 민족이든 모든 걸 통합했을 때는 인간들 속에 공통점이 있어요. 이방인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지만 신이 주신 절대정신은 있잖아요. 그 정신이 뭐냐? 절대이성이라는 겁니다. 또 헤겔에 대해서 반박이 안돼. 그렇지요?
이걸 우리는 신학교 때 그걸 뭘 배웠습니까? 양심이라고 했고,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잖아요. 그걸 지금 헤겔이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인간 속에 신의 품성이 한 묶음씩은 다 들어있다 이 말이지요. 그걸 하이데거는 존재자체로 보죠. 존재로 보고 존재에서 발현된 것을 존재자로 봅니다. 그 존재자의 특징은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 할 때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철학을 보게 되면, 모든 철학은 자기 혼자 다 꿰뚫은 것이 아니고, 앞에 선 선배들 어깨 위에 한 높이 올라서면 그만 이에요. 뭔가 부족한 게 있으면 메우면 된다 말이죠. 그걸 다시 한번 해봅시다. 헤겔은 그림으로 그려야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될 것인데.
의존교회 할 때 첫째 시간이 녹음이 안 되서 확인을 해봐야 돼.
녹음기를 바라볼 때 녹음기가 대상입니다. 바라보는 나는 자아지요. 방금 생각나서 들여다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고. 이걸 성화론. 이게 셸링입니다. 쉽지요. 셸링 쉽지요. 아까 피히테는 뭔 줄 알아요? 이 녹음기 들여다보고 녹음기 남아있으면 되지. 이게 피히테입니다. 녹음 안 되면 어때? 남아있으면 되니까. 이게 피히테에요. 왜? 난 절대자아니까.
녹음기가 절대자아가 아니고, 그러니까 셸링에 보면 절대자아가 깨지지요. 녹음기하고 절대자아가 합쳐야 그게 신의 것인데, 피히테는 자기만 절대자아로 보는 거예요. 근데 녹음기하고 나하고 합쳐서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성으로 보는 거예요. 합치게 하는 것을 이성이라 보는 겁니다. 이 셸링의 이러한 아이디어를 끄집어서 절대 이성화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 헤겔입니다.
헤겔 그림으로 그려 볼게요. 헤겔은, 헤겔을 여러분이 들어보면 완전히 신학자 중의 신학자로 들릴 것입니다. 심지어 김균진 교수 같은 경우에는 모든 신학이 다 들어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연세대학 교수는.
세상의 역사는 마지막에 끝나요. 그런데 역사가 지금 진행되잖아요. 세상에 끝이 있더란 말이죠. 끝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뭔가 다리가 떨어지듯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완성됨으로 끝이 있다는 말이죠. 완성도 안 보고 힘이 없어서 아이고, 주저앉듯이 끝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차이 나는 완성으로, 차이 나는 승리로 끝내는 그 완성단계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완성단계로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역사라는 그러한 통로를 통해서 신과 만나게 되어 있어요. 헤겔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세상 끝이 아니니까 여기 있겠지요. 여기 있는데 우리가 여기 잇다는 말은 뚝 떨어진 게 아니고 그전에 또 누가 있었잖아요. 그전에 우리 선배들이 있었잖아요. 선배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역사를 더 발전시키고 우리를 낳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장차 완성할 절대이성이, 이성이란 이름으로 이 선배들에게 개입해서 선배들이 완성한 것을 '정'이라하고, 그 정은 아직 역사는 안 끝났으니까 아직 미흡할 것 아니냐. 그 미흡한 것을 '반'이라 해요. 반대한다. 이거는 바르다. 자기는 누가 뭐래도 바른데 그 반대에요.
그 다음에 시대에서 후배들에 의해서 정, 반이 뭐가 되냐? 이게 합해서 발전된 '합'이 됩니다. 정반합이 되어서 역사는 더욱더 더 나은 쪽으로 마지막에 완성이니까. 마지막에 꼴아 박는 인생이 아니고 완성이니까. 꼴아 박는다면 점점 더 못해지겠지요. 그러나 완성이니까 점점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서 정과 거기에 대한 반대와 합으로써 역사는 완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역사를 헤겔이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박이 안 되는 것은,
왜 반박이 안 되느냐 하면, 과학뿐만 아니고 예수님도 심지어 어떤 교회 움직이고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 따져보니까 분명히 어제만 해도 야, 참 이런 성경해석은 왔따다. 더 이상 좋은 설교 없을 걸. 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설교해보면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반이 나오고, 반을 알았으니까 그 다음에 제대로 했다. 이제는 끝이야. 그 다음에 또 미흡한 거예요.
얼굴이 좀 문제가 있어서 쌍꺼풀하면 분명히 좋을 거라 했는데 쌍꺼풀하고 나니까 반이 생깁니다. 턱 좀 깎아야겠다. 턱 깎고 난 뒤에 눈하고, 코 하고 견적내서 하고 해놓고 완전하다 했는데 또 완전한 게 아니에요. 또 주름살 펴야겠네. 또 생기는 거예요.
계속해서 인간은 정반합의 쪽으로 역사의 완성 쪽으로 가고 있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추동, 잡아당기는 이끄는 힘은 절대로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절대이성이 이성적으로 개입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헤겔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이미 칸트에서부터 나왔던 거예요. 칸트는 역사 전체를 정반합으로 보지 않았지만 칸트는 항상 인간을 무슨 이성으로 보냐? 반성하는 이성으로 봤어요. 반성 알지요. 반성. 일기장 쓰듯이. 오늘은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꼬? 사람은 반성하고 반추함으로써 약점은 줄여나가고 장점은 키워나가는 거예요.
피곤하시지만 좀 참으세요. 중요한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서울에서도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요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사람 속에 두 개의 창고가 있어요. 선을 넣는 창고와 악을 넣는 창고. 이 두 개의 창고밖에 없어요. 제3의 창고 없습니다. 선 아니면 악이에요. 왜?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법에 의하면, '하라'하는 게 있고 '하지마라' 있지요. 하라하는 것은 선을 채우고, 하지 마라하는 것은 악에 있는 것을 선으로 옮기라 이 말이죠. 하라하는 것은 선을 점점 높이고, 악이라 하는 것은 악이 있기 때문에 뭐뭐 하지 마라 하잖아요. 멍청하니 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지마라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잖아요. 뭔가 악한 게 있기 때문에 그 악은 하지마라 이렇게 되니까 납득이 되는 식으로 벌려왔다 보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라하는 것은 꼭 안하고 싶고, 하지 마라하는 것은 꼭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것은 선과 악이 선이 우세고 악이 열세고 싶은데, 이거는 우리 마음이고. 사실은 악이 우세고, 선이 열세가 돼요. 이렇게 된 것을 사람은 제2의 자아를 통해서 또 이걸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림하나 그리겠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가 여기 있고 나를 독립체로 보고, 나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이것이 전체가 뭐냐? 구원받은 구조라고 보지요. 이게 문제였단 말이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보는 게 아니고, 이 나를 어떻게 그리느냐 하면, 이렇게 그립니다. 나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난 죄인이면서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믿는 이것도 들어있지만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뭐도 들어 있느냐 하면, 나가 도로 나만 신봉하는 나가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은 죄인이 되어서 의인되신 주님을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여기서는 이미 내가 의인이기 때문에. 왜 의인일까요? 내 창고 속에 뭐가 강하기 때문에? 선이 우선이고 악이 열세기 때문에 나는 의인이어야 돼요. 선이 더 많기보다 항상 선을 추구하니까. 의인이기 때문에 계속 의를 추구하는 나가 이 두 개의 나가 다 들어있는데 이런 나란 말이죠. 이걸 가지고 라캉은 분열된 자아라고 합니다.
외부에서 어떤 외부가 오면, 이 나는 그 외부에 있는 그 의를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도전하게 됩니다. 도전하는데 수단이 뭐냐 하면, 법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가끔가다가 내가 죄인이 어떤 법을 통해서 의인되는 이게 아니라 나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만 이미 의인되었음을 인정하는 게 나와요.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불신자는 이게 빠져있지요.
불신자는 이것만 있어요. 난 지금 의인이다. 왜 의인이라 했지요? 내 안에 창고가 있는데 어느 것이 우선이었다고? 선이 우선이고 악은 뒷전이기 때문에 그 의인 되잖아요. 아무리 봐도 나는 착한 일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는 테레사 수녀 되고 싶어. 지금 돈이 없어 못하지만. 언젠가는 되고 싶어. 난 양심껏 살고 싶어. 살고 싶다고 선을 기대하는 자체로서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화론자들이 그런 걸 주장 많이 안 합니까? 좋은 일을 추구한다는 자체가 이미 난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일을 추구하지, 나쁜 놈 같으면 나쁜 일을 추구한다는 그 주장입니다. 그거는 내 속에 두 개의 자아가 들어있다는 걸 몰라요. 아마 그 사람은 분명히 두 개의 자아가 없어요. 이것만 들어있을 거예요. 결국 나는 나가 의인되기 위해서 내가 그냥 살아가는. 이걸 아까 누구라고 했습니까? 피히테. 자꾸 물어야 돼요. 피히테의 절대자아죠.
성도는 물론 전부다 이게 있어요. 한 5분 동안 주님 생각하다가 5분 지나면 다시 예수 믿었으니까 내가 얼마나 잘났노? 예수 믿는 나, 이걸 자리에 집어넣어버려요. 예수 믿으니까 ks는 얼마나 훌륭하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어떤 짓을 하던 묻지도 않고 한번 집어넣은 이것대로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해 내십니다. 이거는 기적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 자기가 죄인이면 예수님만으로 구원 받는다 이런 생각이 자기가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이거는 외부에서 선물로 주어야 돼요. 기적을 받아야 번개 치듯이 벼락을 된 통으로 뒤통수를 맞아야 정당한 겁니다. 오함마로 진짜 때려야. 이게 하나님나라의 임함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주님은 이건 아예 보지도 않아요.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살아요. 주께선 자기 집어넣은 자기의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만 하는 겁니다.
이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베드로에요. 베드로가 백날 부인을 하고 해도 닭 우는 소리되면 회개하게 되어 있어요. 닭 운다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알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고 닭 이라고 예언할 수 있는 주님의 인생이라는 걸 알고 크게 울었잖아요. 그때까지 예수님이 저주한다 할 때는 지 인생이 자기 건 줄 알았는데 닭 울 때는 그때는 놀래 자빠졌어요. 울었어요. 통곡했어요.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께서는 이런 인간인 줄 미리 아시는데 나는 모를 줄 알았잖아. 통곡하지요.
한번 집어넣은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여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고, 성화론자들은 이것 때문에 고민해요. 왜? 이게 없으니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이 자체가 완성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 다가가려고 애를 쓰고 고민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이게 보이고, 피히테가 보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피히테가 이것은 가벼운 짐이 되고. 있기는 있지만 가벼운 짐이 돼요. 아주 가볍게 살아야 되죠.
그래서 법이라 하는 것은, 나가 더 훌륭한 나가 되기 위한 핑계거리로 등장한 것이 법인데 그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라캉의 분열된 자아. 분열 자아를 좀 더 설명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뭐냐 하면, 이미 죽었던 주체가 예수님입니다. 이미 죽었지만 죽음조차 이겨낸 주님이고. 우리는 뭐냐? 아직 죽지도 않고 죽음으로 끌려가는 주체에요. 이 주체에 우리 속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죽어도 다시 살아.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시고. 나 죽으면 곤란합니다. 왜? 나는 절대자아니까. 내가 죽으면 신도 필요 없고, 예수도 소용없고, 아름다운 태양도 소용없다. 내가 죽어버리면. 내가 죽으면 소용없잖아요. 이 두 가지가 우리 속에 평생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돼요.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만 있다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20년 잘 믿어도 그 다음에 죽을 때 되서 부인해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두 개가 같이 있어요.
이런 주체의 분열은 나중에 쟈크 라캉 이야기할 때 제가 이야기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셸링에 돌아와서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오늘 좀 어렵습니까? 이해는 되지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헤겔 이야기했지요. 자, 헤겔 정리해 봅시다. 헤겔이라는 것은, 누가 헤겔이 무슨 주장했느냐? 이렇게 물으면, 헤겔은 이 자연세계는 신이 만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신이 만든 것을 완성시킨다. 지금은 완성단계가 아니다. 하지만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철도 위에 있는데 철도 위에 달려가는 방법이 뭐냐? 정반합이다.
정반합의 그 논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명한 변증법이라고 합니다. 변증법이라 하면 그냥 변호하는 쪽이냐 하지만, 변증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정과 반과 합을 통해서 점차 역사가 발전하는 걸 가지고 변증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물질이 그렇다고 본 것이 유물론적 변증법이라고 해서 누가 주장했느냐 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 거예요.
그전에 마르크스 주장하기 전에 유물론적으로 이런 걸 주장한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믿을 것은 손에 잡히는 감각밖에 없지, 물질 밖에 없지,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이 쌓이면 정신이 나오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돈이 있으면, 돈이 있고 난 뒤에 종교니, 상부구조라 하는 정치니 문화라든지 즐길 수 있지, 배가 꼬르륵 배고파하는데 무슨 거기에 사물놀이를 하며, 배가 고픈데 무슨 오천 원, 육천 원 주고 영화구경 갈 수가 있느냐 말이죠.
근본적으로 이 세포, 세포를 밥 먹일 수 있는 돈이 있어야 돼요. 경제활동이 있어야 돼요. 노동은 문화활동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게 마르크스입니다. 물론 예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예술 하는 사람 있지만 예술 하는 사람도 밥 안 먹고 살 수 있느냐?
이런 마르크스의 주장이 나오고 난 뒤에 비로소 광야생활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좋고, 불기둥 있는데 불기둥 뜯어먹고 삽니까? 불기둥 있어요. 그게 양식은 아니지 않습니까? 구름 기둥이 있는데 그게 양식이 아니란 말이죠. 불평한 게 뭡니까? 물이 있어야 되고, 양식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인간은 뭐냐 하면, 물질로 되어 있다.
인간은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피히테나 셸링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인간은 물질이라 하는 질료로 되어있다. 그러나 질료와 형상을 결합시키는 것이 셸링은 누구라 보았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게 뭐냐? 이성이다. 이게 관념이죠. 이게 셸링의 주장입니다.
셸링은 물질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고, 그냥 물질이지만 그 물질을 가만 두면 그게 양식이 안 되잖아요. 물질을 어떻게 벼를 어떻게 어느 품종을 심으면 더 많은 양식이 나오느냐고 따지는 것은 뭐냐? 이게 이성이에요. 그 이성은 누구한테 왔다? 신으로부터 왔다. 신으로부터 왔는데 더 나은 이성을 발휘시키도록 운동력을 허락한 것은 누구다? 헤겔에서는 누굽니까? 장차 오실 절대이성이다. 반박해 보세요. 반박됩니까? 또 반박 안 되네. 미치겠어. 또 반박이 안 되지요.
종교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그것이 파생된 어떤 환상 같은 거죠. 지금 뭔가 배가 부르니까 배가 부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주를 찬양하니까 주를 찬양한다는 말은 일단 배부릅니다. 하는 고백이죠. 배부릅니다. 라는 표현이 다른 표현으로 할렐루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라는 종교적인 표현이 지금 배는 안 고픕니다. 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이고 유물론적인 것에 대한 어떤 고상한 관념에 대한 차기 후차적인 이성적인 표현력에 불과한 것이 그런 종교라면, 근본 이성은 인간의 물질에 관여해서 인간은 밥 먹고 살도록 하는 게 급선무이다.
사실은 이런 마르크스를 공부하고 헤겔과 셸링을 공부해야만 이 사람이 인간이잖아요. 원숭이가 아니고 인간이죠. 그 인간이 바로 이스라엘 광야 때 행했던 인간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께 원망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셸링이 들어있고 헤겔이 들어있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이 원망 안 하고 배기겠습니까? 나라도 원망하겠다. 물 없으면 물 달라고 그런데.
나도 물 먹고 싶네. 지금 비가 오려고 날씨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덥습니다. 조금 참으세요. 보세요. 우리가 물질이잖아요. 아무리 좋은 말씀도 날씨 찌뿌듯하고 습기 차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맞잖아요. 포이에르 바하 말이 맞아요. 헤겔 말이 맞고, 마르크스 말이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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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이성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걸 전에 이야기한 사람이 스피노자가 그렇게 이야기했고. 나중에 스피노자하고 셸링하고, 셸링이 스피노자를 반대한 대목이 나와요. 일단은 스피노자 편입니다.
[동일성 인식인 이성의 스피노자이다.]
그러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그걸 했는데 또 몇 주 지나니까 다 잊어버린 것이지요. 잊어버려도 절대이성은 또 끌려가기 때문에 생각하지 마시고. 헤겔할 때 빠진 게 있는데 헤겔 다시 해 봅시다.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빠졌는데 지금은 깼기 때문에 다시 해봅시다.
역사는 흐른다 했습니까, 발전한다 했습니까? 흐른다가 아닙니다. 역사는 흐른다 하는 것은 대지에서 나온 것이고. 역사는 발전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곧 차이점이 차이가, 아까 헤겔이 역사는 흐른다 했는데 흐르는 게 아니고 발전이에요. 발전하니까 미래는 뭐보다 낫다? 현재보다 낫다.
우리가 원했습니까, 신께서 그렇게 절대정신이 이끄니까 그렇습니까? 신이 이끄니까 미래는 현재보다 나아요. 낫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지금은 이걸 반대합니다. 미래가 현재보다 나은 것은 나아서 나은 것이 아니고, 나을 걸 하고 일을 하니까 뭔가 노력하니까 그런 거예요.
30등 하던 애가 10등하면 기쁘지요. 10등에 만족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음에 5등으로 끌어 당기래이?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정신이 어디서 나온 거냐 하면, 신이 내려주신 정신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헤겔 정신이에요. 헤겔 쉽지요. 뭐든지 더 나온 것, 뭐든지 더 새로운 것, 뭐든지 아주 자극적인 것.
여기서 중요한 것 제가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누구 역사한다 했습니까? 절대이성이 이성의 이름으로 여기 관여해서 일하지요. 사람이 스스로 정반합이 아니고, 누가 이끈다? 신의 정신이 신의 영이. 그러니까 성령이지요. 김균진은 헤겔을 가지고 삼위일체 역사라고 해요. 성령이 우리 속에 이성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마지막에 예수님의 재림, 역사의 완성을 내다 볼 수 있는 마음을 줬다 이 말이지요. 종교를 초월해서.
그런데 이 개입된 이성이 누구냐 하면,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역사하느냐 하면, 이 점이 헤겔이 위대한 점인데. 뭐냐 하면, 고난의 모습이에요. 이걸 철학에서 끄집어냅니다. 왜냐하면, 일단 정이라고 완성이라고 주장한 놈이 호락호락 반에 대해서 굴복할까요, 굴복 안할까요? 턱도 없는 소리. 일제 시대 때 협력한 사람, 친일파들 숙청하자. 그거 호락호락 보수파들이 그냥 가만있을까요? 턱도 없는 소리. 보수는 그야말로 끝까지 보수입니다. 절대로 양보 안합니다.
그러면 누가 고난 받습니까? 바로 반을 외치는 사람이 고난 받잖아요. 그 고난이 뭐냐? 장차 역사를 완성시킬 그 절대이성이 지금은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십자가의 모습, 고난의 모습으로 개입한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이게 헤겔이에요.
단 헤겔이 복음과 다른 점이, 이것이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고, 불교든 모든 인간들은 인간이라 생겨 먹은 것은 전부다 그런 정신을 다 접촉하게 되어 있고 접촉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경 믿어야 구원받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인간은 그냥 가만있어도 이미 그들은 신의 자녀다.
그런데 그 고난이라 하는 것은 무효로 돌아가는 고난, 그러니까 아이고, 고난 받아도 소용없구나. 이런 고난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마지막 절대 이성자가 개입했기 때문에 더욱더 장차에 절대이성에 가까운 쪽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이 고난은 허사로 끝나는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희생과 그 아픔은 반드시 그 값을 치러서 그 다음에는 정반 다음에 뭡니까? '합'이라는 그야말로 새로운 예상 밖의 도출된 발전된, 이 발전이라는 것은 이성에 가까운 참된 진리에 가까운 결과를 낳지요. 낳으면 끝입니까? 세상 안 끝났잖아요.
그러면 또 그게 정이라면 또 반이 튀어나오는데 그 반은 어떻게 나옵니까? 고난의 모습으로 또 반이 나오겠지요. 나오면 또 뭡니까? 한편에선 정이 나오겠지요. 이게 바로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칼빈주의신학. 그래서 칼빈주의는 역사에게 물어봐. 앞으로 신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이러한 헤겔의 사상들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헤겔의 혼자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고, 그전에 피히테, 셸링이 있었어요. 피히테의 절대자아를 통해서 신과 인간 속에 신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안 했더라면, 셸링이 거기서 대상체와 결합시키는 신이라는 새로운 이성이라는 것을 안 끄집어냈을 것이고, 이성이라는 것을 안 끄집어냈으면 헤겔이 절대이성, 이성들의 원천, 절대이성을 마지막 역사 끝에다 두지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따져보면, 그런 피히테에서 셸링, 셸링에서 헤겔로 나가는 그 자체도 헤겔 말이 맞잖아요. 정. 반. 합. 아닙니까? 그것도 정반합이죠. 이 헤겔의 정반합을 부인하는 과학이나 철학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반드시 선배 교수가 위대하지만 언젠가는 반이 있을 것이고, 그 반이 있을 때 또 새로운 선배 교수보다 뛰어난 후배 교수들이 뛰어나서 우리에게 더 진리에 가까운 더 진리에 접근한 또 새로운 진리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죠.
그런데 요즘 철학은 헤겔을 반대합니다. 라캉 같은 경우는 반대하는데. 뭐냐 하면, 그렇게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는 헤겔은 분열된 자아에서, 아까 분열된 자아 이야기했지요. 또 다 잊어버렸지요. 분열된 자아가 뭐라고요? 나는 없고, 엉뚱한 나가 나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라캉에 대해서 아까 제가 성도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라캉에서는 내가 상상한 나, 아까 피히테의 절대자아죠. 내가 상상한 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 나는 타인을 보고 결핍을 느끼는 나와 절대 주체와 결핍 주체 사이의 분열, 이것이 분열된 자아. 아까 이야기했듯이 정반합이 잘못된 것이고, 정반합처럼 발전한다고 느끼는 것은, 현재 내가 상상한 상상이 타인의 욕망보고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꾸며낸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라캉의 철학입니다.
이거 또 어렵네. 실컷 정반합이 다 인줄 알았더니만 정반합이란 논리 자체에 대해서 반이 나와 버린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이만하면 됐다고 여기는데. 예를 들어서 50평짜리 아파트 산다. 너는? 39평. 50평보다 못하고. 너는? 20평. 나보다 못하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5년 지난 뒤에 어떤 친구가 가는데, 몇 평? 75평. 갑자기 여기서 결핍을 느끼죠.
그때부터 살맛이 납니다. 왜? 목표가 생겼어요. 타인의 욕망이, 너는 마, 짜식아, 75평 못 살아? 따가운 시선. 그 시선을 타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그렇게 요청해요. 자아가 결핍을 느끼면서 그래, 니가 나에게 75평 못산다고 봤지? 나는 살 수 있어. 라고 목표를. 남이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그렇게 볼까봐 싶어서 미래에 점쳐 놓고 그게 미래의 뭐냐? 정반합이 되고, 그 합이 있을 때 새롭게 사업을 벌일 수 있는 또 욕구가 자극을 받아서 활동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교인수 10명, 됐다. 이러는 사람 없습니다. 열명이면 열다섯 명, 열다섯 명이면 스무 명, 스무 명이면 스물다섯 명. 스물다섯 명에서 이십 명 되면, 다시 이십 명만으로. 다시 열다섯 명 돌아오면, 열 명만으로. 열 명 되면, 다섯 명이라도 하다가 다시 맨 날 이런 식으로 가지요.
그러니까 이런 피히테, 셸링, 헤겔 공부는 결국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줍니까? 현재 우리 속에 있는 나가 나를 쳐다보는 이 구조가 철학적으로 어떻게 밟았느냐를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도움돼지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철학자 중에서 어느 철학도 우리는 현재 이미 죄인이며 십자가만으로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는 제가 한 적 없지요. 이 철학하면서. 철학하면서 그거 안 나옵니다.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성도가 되는 것은, 제가 이 공부를 하자는 이유가 성도라고 백날 우겨봤자, 결국은 나가 나만을 위한 나. 나, 영원불멸. 나의 구원 그런 쪽으로 나가버린다면, 그거는 죄인이 아니며 나는 구원을 요청할 정도로 의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피히테가 이야기했고, 헤겔이 다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은 절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의 타인의 욕망입니다. 신이시여, 어떻게 될까요? 신될까요? 신되지요. 예수여,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 되지요. 예수는 타인의 욕망이에요. 나는 그 타인의 욕망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겁니다. 이게 오늘날 성화론이잖아요. 예수를 본받자. 성화론이잖아요. 그것이 바로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결국.
어떻게 강도가 그런 결핍을 느끼고 천당 갔겠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은 더 이상 이제 끝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강도는 불쌍히 여기소서. 했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혀 죽었나니” 했어요. 주님과 같이 못을 박았다. 자기는 못 박힌 자기가 되는 거예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했어요. 그걸로 끝이에요. 내가 아니요로 끝나면 괜찮아요. 지금 철학적으로 말해서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라고 철학에서는 모든 해답이, 내가 아니요. 라고 끝나버려요.
이것은 내가 아니요. 란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수작부리는 것이 아니고, 왜 내가 아니냐 하면, 내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내가 죄인 되었다. 하는 것은 나의 육체적 ( ) 지고 같이 죽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받았잖아요. 율법에 의해서. 그렇다면 저주받음은 나의 저주받음이니까 내가 어떻게 법을 지켜서 하라, 하지 마라를 지켜서 어떻게 저주받은 놈이 내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기대치도 말아야지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나가 나를 추구하게 되면, 기대치는 반드시 있게 되어 있어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나. 이거다 말이죠. 이러한 나가 추구하는 나가 성도한테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평생 갑니다.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그건 한 5초. 길면, 한 8분.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갑니다. 정반합, 평생가요.
그러니까 피히테 이야기, 헤겔 이야기, 셸링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에 대한 조명이란 말입니다. 이걸 어렵지만 놓칠 수가 없지요. 다 알아야 됩니다.
16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이런 과정에서 절대적 토대는 우선 신성이 되었다.]
셸링이 피히테를 전적으로 거부한 게 아니고, 이건 일단 인정해요.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신성. 하나님이 들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셸링이 점차적으로 스스로 뭐하는 계시다? 노출하는 계시다.]
이게 바로 이어서 그 다음 나오는 헤겔이 이어받은 겁니다. 헤겔이 그걸 더 크게 구축시킨 거예요.
[그리고 그 마지막에 하나님도 역시 존재하게 된다.]
164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실재는 이중적인 어두운 힘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악도 악마도 절대적인 정신 속에 악도 들어 있을 수 있지요. 이것이 나중에 헤겔 들어가면, 정반이 됩니다. 반이 나타나면 정이라고 우긴 놈이 자기 속에 뭘 발견합니까? 야, 반을 보니까 나한테 뭐가 문제 있었네. 자기 속에 뭘 발견하느냐 하면, 악을 발견하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악을 신께서 집어넣어 주시는 거예요.
이건 칼빈주의 예정론보다 더한 예정론이죠. 이걸 헤겔이 이야기했고, 이미 셸링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셸링은 피히테의 절대자아를 뭐로 확대시켰다? 역사로 확대시켰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절대역사로, 절대우주로.
셸링은, 164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도 힘들고 여러분들도 힘드니까.
[절대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가리켜 철학의 핵심 논저라고 하는데, 실제로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 전이시키는 체계는 없다.]
셸링은 무한에서부터 유한으로 전해지는 체계는 없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현재 유한, 유한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우리, 말입니다. 뭔가 따질 때 무한에서부터 유한으로 바로 들어가 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종교가 되니까. 그런 종교는 우리가 철학에선 거부하자. 그건 왜냐하면 다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철학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가는 것은 우리 철학 몫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철학 몫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 몫이에요. 인간의 행함의 몫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행함을 거부한 거예요. 자꾸 행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있는 나로부터 없는 신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것 봅시다. 이런 셸링이 스피노자와의 차이점이 어떤 거냐 하면, 방금 이겁니다. 절대자유를 스피노자는 절대개념과 동일시했다. 참, 이 말은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기가 어려운데.
[절대필요성과 동일시했다.]
그 밑에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스피노자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데. 스피노자는 뭐냐 하면, 완전히 자아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움직이는 우주의 변동만 인정한 게 스피노자입니다.
셸링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유한적인 자유의 몫을 따로 만들어놔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도덕이 가치가 있고 윤리가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던 뭐 하던 내 자유다. 이러면 곤란하지 않느냐? '내 자유다.' 하죠. 스피노자는. 이것도 전부 '신의 자유다. 하죠.' 이러면 너무 곤란하다 말이죠.
모든 게 절대 안에 가둬두는 건 인정하는데, 셸링의 말입니다. 하지만 유한에서 무한으로 점차 나아가는 쪽으로 하려면 일단 무한의 제한된 자유만은 인정해줘야 된다. 그래야 거기서 하라, 하지 마라가 성립될 게 아니냐? 그건 나쁜 것이야. 감옥소도 필요하고, 경찰관도 필요하고, 군인도 필요하고, 그래야 사회질서가 잡힌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셸링의 인간의 유한한, 무한한이 아니고 유한한 자유가 점차 절대정신에 어떻게 나아가는 중간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뭐로 보느냐? 국가로 본 것이 이게 나중에 헤겔로 나옵니다. 헤겔의 국가가 등장한 이유는 절대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데 제한된 자유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압박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라고 한 것이 셸링의 정신을 이어서 헤겔이 보완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제 한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피히테, 셸링, 헤겔. 헤겔은 다음에 할 것인데. 오늘 참, 여러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뭐가 힘 드느냐 하면, 철학만 하면 힘 안들 수도 있는데 이게 복음과 왜 다른가? 복음과 견주려고 하니까 힘이 드는데. 복음은 우리가 내가 어떤 나로 달라지느냐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은, 나는 이미 죽은 자고, 내 바깥의 어떤 분의행위가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주체가 예수님으로부터 해야지 우리가 되면 안 됩니다.
스가랴에 나오지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까 마귀가 놀리잖아요. 저저저, 여호수아 더러운 거 보이지요. 아이고, 참. 제사장 꼬라지 한번 좋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이, 천사야. 예. 저 옷 벗겨라. 새 옷 입혀라. 악마는 가만있는데, 이제도 더러우냐? 깨끗하거든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면 다른 사람은 말할 누가 고소하리요, 송사하리요? 이게 복음이에요. 항상 주님이 우리한테 뭘 무슨 옷을 입혀주었는가? 피 묻은 옷을 입어서 우리 하얗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신다면, 물론 그것만 입고 또 돌아서봐야 또 나온다 하지만 함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복음 전할 때 복음이 아닌 것을 섞어서 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은혜만 볼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