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하율이 태어난 지 9개월로 접어들고 있다. 의자에 잘 앉아 있고 음식점에서도 울거나 보채지 않아 여행을 데리고 다닐만 하단다. 딸과 사위는 하율을 데리고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계획하였다. 두 달 전이었다. 아이들이 어리니 여행은 아이들 위주로 움직일 게 뻔한 일. 바깥사돈은 직설적으로 질문했단다. 우리를 위해서 가는 여행이냐 아니면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냐? 아버지의 질문에 아들은 솔직하게 말했단다. 아이들을 위한 여행입니다. 솔직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남편과 나는 손자와 손녀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찬성이다. 손주들이 귀여운 것도 있지만 우리가 손주를 봐주는 시간만이라도 딸과 사위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서였다. 딸과 사위는 어미와 아비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눈에 보인다. 도와주고 싶어진다. 제 밥은 챙겨 먹지 못하면서 자식의 밥은 꼭꼭 챙겨 먹이는 딸이다.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주는 사위다. 휴일이면 아이들과 놀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서 다녀온다. 도대체 언제 쉬냐? 너희들은.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다.
사돈댁과는 네 번째 여행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 끼리니 그냥 편하다. 딸과 사위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지혜롭게 해낸다. 양쪽 바깥 사돈들이 청각에 문제가 있어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만만치 않겠지만 안사돈들이 건강하니 문제 될 것은 없다. 순조롭게 여행 날이 내일로 다가오는데.
종자골에 다녀온 남편이 그만 탈이 났다. 더위에 일을 많이 해서 피곤이 누적된 데다가 이틀 전 먹고 남은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게 화근이었다. 삼겹살이 맛이 없더란다. 복통이 있고 설사를 했다. 병원에 다녀왔다. 장염이란다. 며칠 굶으면 낫는 병이라지만 서너 번의 설사로 몸피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여행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죽을 먹고 약을 먹고 설사는 멈추었다. 여행 첫날 점심으로 먹은 순두부찌개까지는 괜찮았다. 저녁까지도 아무런 징조가 없어서 좋아졌구나 싶었다. 대게와 문어숙회를 배불리 먹었다. 화근이 될 줄 몰랐다. 한밤중이 되서야 배가 부글부글 끓는다고 급하게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의 얼굴이 반쪽이었다.
남편도 나도 잠을 설쳤다. 걱정이 많은 나는 늘 부풀려서 걱정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침에 먹으려고 챙겨온 누룽지가 있어서 아침을 먹었다. 설악산에 가서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을 구경하기로 한 날인데, 손녀 하율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기로 한 날인데, 어쩔 것인가. 결국 그는 혼자 숙소에 남기로 하였다. 여행이 여행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다는 것, 입맛이 좋다는 것, 그것 외에 더 바란다는 것은 욕심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설악에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누룽지를 끓여서 점심으로 먹었다. 오이지와 장조림과 갓김치를 챙겨왔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딸네는 사돈댁을 모시고 한정식집에 다녀왔다.
저녁은 화덕 구이 고깃집에 갔다. 스테이크부터 양고기와 돼지고기 등 여러 종류의 고기와 대게까지 나왔다. 남편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으니 뛰어노느라 바쁜 손자와 유모차를 타고 있는 손녀를 봐 주는 일을 맡았다. 고기 한 점 먹을 때마다 창문 밖 남편을 바라보았다. 사돈댁은 또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여행길에서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할 사돈이 아프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남편과 함께 여러 번 누룽지를 먹었더니 나도 배가 허전하고 기운이 없어, 이것저것 열심히 먹었는데 먹은 것 같지 않은 이 허허로운 기분은 무엇인가. 다행하게도 남편은 숙소로 돌아와서 딸이 사 준 밤팥죽을 맛있게 먹었다.
하루 푹 쉬어서일 것이다.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잘 자서일 것이다. 남편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누룽지를 끓여서 남편이 아침을 먹는 것을 본 뒤 나는 조식 뷔페를 먹으러 갔다. 음식이 다양하고 맛깔스럽고 고급스러웠다. 에구에구 맛있는 이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다니. 배불리 먹고 나니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누룽지만 먹은 남편이 마음에 걸려 고기죽을 사서 방으로 갔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어머니 손에 들려있던 사탕이나 빵을 보듯 내가 들고 있는 음식을 남편은 은근히 반가워했다. 얼마나 속이 헛헛했을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갔다. 도율은 바다를 여러 번 보았지만 하율은 처음이다. 하율에게 바다를 꼭 보여주고 싶어. 딸은 누누이 말하였다.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는 하율, 어땠니? 하율아! 설악산은 어마어마했지? 케이블카는 두근두근했지? 동해 바다는 넓고 넓었지? 네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까? 궁금하네. 네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네 어미와 아비의 사랑 덕분이지. 너는 훗날 깨닫게 되겠지. 도율과 하율이 함께여서 이 할미와 할아버지는 행복했단다. 외할아버지가 여행 내내 아프셨지만 이제 좋아지셨잖아. 너희들 재롱 덕분이지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해 준 덕분이지. 다음번에는 즐겁고 신나게 여행 함께 가자.
이번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이 맛있지도 않았고, 멋진 풍경이 멋지지도 않았지만 손자와 손녀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두 번째 밤을 무사히 보낸 남편은 말하였다. 이제 속이 편해졌어 좋아진 거 같아.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점심으로 먹고 무사히 집에 도착! 무얼 바라랴 무얼 욕심내랴. 그의 몸무게는 정상으로 돌아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