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한줄기 하얀 선으로 다가왔다.
10일 아침 10시 30분 방콕을 떠난 타이항공 여객기가 미얀마 영토에 들어섰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 직후 오른편 창가 쪽에 앉아있던 내 눈에 한 가닥 하얀 선의 이어짐이 들어왔다. 처음엔 구름,
인가 싶었다. 일행 중 누구도 내가 발견한 것은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0분,20분 지나자 앞 쪽 좌석에 앉아있던 다른 외국인들도 창 쪽으로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한 줄기 선은 조금씩 두터워졌다.
히말라야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감격스러웠다.
선으로 처음 대한 히말라야가 시간이 흐를수록 두터워지며 구름을 항상 발 아래 거느린 실체로 확인되는 과정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직사각형 앵글을 통해 세상을 축소해 바라보는 데 익숙해 있는 우리의 눈이 실제로는 얼마나 더 넓은 세상, 더 넓은 앵글을 담을 수 있는지를 황홀하게 깨닫게 만든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비행하자 카트만두가 가까워왔고 구름 아래 하강한 비행기가 카트만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스모그에 짓눌린 시내의 전경이 들어왔다.
날씨는 그리 좋지 않군.
공항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입국 수속에 1시간이 넘게 걸렸고 사방에 공항 직원들은 노는 놈 천지였는데 누구 하나 관광객들을 빨리 입국시킬 요량을 내지 않았다. 포카라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은 괜찮은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이드는 공항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히말라야를 조금 더 빨리 보고 싶다는 조바심과 설렘을 달래며 어렵사리 공항을 빠져나오자 가이드 카트만이 꽃술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걸어주며 반갑게 맞아준다. 충북 진천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는 카트만은 큰 체구에 큰 눈망울, 두툼한 아랫 입술을 갖고 있어 첫 눈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또박또박 한국말도 잘 구사하는 편이어서 일행들은 그가 산까지 안내했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아쉽게도 그는 ABC를 빠져나오는 팀을 포카라에서 만나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역할을 해야 한단다.
마오이스트 게릴라와 준 내전 상황이어서 그런지 공항 밖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군인과 경찰이 구분되지 않았다.
카트만은 시간이 없단다. 무조건 뛰자고 했다. 미니버스에 짐과 몸을 싣고 국제선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국내선으로 가는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창고 같은 큼직한 공간에 옛날 추곡수매때 볼 수 있던 커다란 저울에 우리의 80리터짜리 카고백 다섯 개를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것이었다.
여기 국내선 터미널에서 정말 패기만만한 한국 아가씨를 만났다. 우리 눈에는 20살 중반으로 보였는데 뜻밖에 38살이라는 그 아가씨는 호주에서 만난 네팔과 인도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했다. 포카라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끌면 비행기 요금이 내려간다며 싼 값에 포카라까지 가게 됐다고 좋아 했다. 씩씩해 좋아 보였다.
왜 그렇게 뛰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30분 동안 터미널 안에 앉아 있다 경비행기에 올랐다. 손님은 우리 일행과 네팔인 가족 셋 등 모두 9명. 전통 의상을 입은 스튜어디스가 나마스떼를 하면서 우리를 맞았고 문이 활짝 열린 틈으로 조종석이 훤히 비췄다. 사실 방콕에서 오면서 이 비행기에 대한 공포를 우스갯소리로 했었다. 역시나 공포를 충족시킬 정도의? 비행기였다.
기내 서비스도 있었다. 처음엔 귀마개를 할 수 있는 솜뭉치와 사탕을 줍도록 했고 조금 있다 플라스틱 컵에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비행기는 부러 히말라야 산군을 구경시키려는 듯 산군 쪽으로 바짝 붙어 운행했다.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랴 스튜어디스의 기내 서비스에 응하랴 정신이 없었다. 뜻밖에 스튜어디스의 외모도 괜찮았고 영어 발음도 시원스럽고 좋았다.
히말라야에 정신 없이 고개를 처박고 있을 때 비행기는 왼쪽으로 고개를 트는가 싶더니 곧장 포카라를 향해 처박기 시작했다. 카트만두보다 훨씬 시계가 말갛다.아 저게 마차구나. 마차는 물고기꼬리라는 뜻을 지닌 마차푸츠레를 일컫는다.하늘에서 본 포카라는 나름의 질서를 갖춘 아름다운 소도시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마차를 배경으로 그냥 형과 나만 서로 한방씩 눌러줬다. 돌아올 때 날씨는 카트만두와 비슷했기에 이날 눌러주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그렇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환전소 들러 120달러를 환전했다. 8000 얼마였는데 엄청나게 두꺼운 지폐뭉치가 됐다. 이제 나야풀을 향해 출발이다. 공항을 빠져나와 5분쯤 달렸을까. 솔직히 나는 깜짝 놀랐다. 포카라 시내의 풍경은 우리네 50년대로 돌아간 듯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행색이며 자동차의 움직임, 소가 시내를 걸어다니거나 차로 한 가운데 우뚝 서있는 모습, 길가에 개들이 엎드려 누워 자는 모습 등은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길거리에서 서로 상대방 차가 양보하기 전까지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운전 습성이었다. 시내에선 속도가 붙지 않아 그런대로 보아넘길만 했는데 나야풀로 향하는 란드룽 자동차 도로로 나오자 그게 아니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 이어졌다. 나중에 기사 옆 좌석에 앉았던 그냥 형이 불쌍해지기까지 했다. 나중에 보니 왼쪽에 손잡이를 꼭 쥐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1시간이 조금 못 됐을 거다. 마주 오던 미니버스가 섰는데 첫 눈에 한국인 트레커들이다.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아 왜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우리가 돌아올 때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달리자 몽골족으로 보이는 한 젊은 친구가 손을 들었고 카트만은 자기 임무가 끝났다며 내리고 대신 그 친구가 올라탔다. 가이드라고 소개했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순간 아찔, 그러나 곧 자신은 보조 가이드라고 정정했다.
마차가 바로 치어다보이는 곳에서 산길이 다시 시작됐다. 그렇게 마차를 담기 위한 숨바꼭질이 시작됐고 어느새 도로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내렸다.
도중에 운전기사의 누이와 그 아들을 태워주는 친절 끝에 오후 5시 30분 나야풀에 이르렀다.짐을 부리고 있는데 중키에 체구가 듬직한 친구가 다가와 자신이 가이드라고 소개했다. 너빈이었다. 한국 말을 떠듬떠듬 하는 게 오히려 믿음이 가는 친구였다. 하지만 어두워진 상태여서 해드랜턴을 켜고 우리 먼저 출발했다. 25분이 안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문라이트 릿지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30분이 다 됐을 것이다. 2층에 방을 잡고 그냥 형은 빨래줄까지 준비해왔다. 침낭을 꺼내 잠자리를 꾸며보고 씻고 하니까 어느새 저녁을 준비했단다.
마당에 내려가니 그럴듯한 저녁 상이 차려져 있다. 소주팩 세 개로 반주를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점심은 기내식으로 때웠던 터이고 히말라야 산군에 들어와 있다는 감격에 겨워 술맛이 그리 달 수가 없었다.
간단히 너빈으로부터 내일 일정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간단치 않을 것 같았다. 일찍 자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조금 안 됐다. 사실 고단한 하루였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 조금 걸었으니 말이다. 이날 제대로 산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감격스러운 장면들을 행복하게 떠올리며 잠을 청했다.
팁스.
우리는 9일 밤 9시 인천을 출발해 현지시간 12시 35분에 방콕에 도착했다. 출국할 때 다른 분은 문제가 없었지만 내가 깜박 잊고 비행기에 들고 타는 배낭 안에 아이젠을 넣은 것이 문제가 됐다.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신원 사항을 적고 다시 출국장 바깓으로 나가 타이항공 데스크에 가서 아이젠을 넣어 등산 배낭을 부쳐버렸다. 이 바람에 히말라야 산군이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전혀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런 경우의 승객을 아라이 승객이라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종의 수하물 금지 품목 소지 승객이란 뜻인데 어감으로도 그렇게 좋지 않은 단어이니 아무튼 미리 꼼꼼이 점검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이때 만약 방콕 호텔 바우처(숙박 예약권)을 넣은 서류 가방을 배낭 안에서 꺼내 따로 들고 탑승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방콕에 도착해 호텔 바우처를 찾기 위해 카트만두까지 부친 화물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워낙 새벽에 도착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방콕으로 오는 도중 이 서류 가방을 나중에 따로 부친 배낭안에 뒀다고 잠깐 착각하는 바람에 일행 전체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내가 갖고 탄 것으로 확인돼 안도했지만 큰일 날뻔 한 순간이었다. 서류 가방을 가진 분은 각별히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혜초여행사를 통해 트레킹 상품을 구입한 이들은 대개 방콕에 심야에 도착할 경우 공항 옆 아마리 호텔에 묵게 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므로 까무룩한 정신에 입국장에 들어서고 보니 한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트랜스퍼 승객이라 별도의 데스크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무조건 입국 승객으로 공항 밖에 나가 아마리 호텔을 찾아가게 돼 있었다. 따라서 일단 많은 승객들을 따라 입국 수속을 받은 뒤 아마리 호텔을 물어보면 될 것이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일행 중 최연장자인 김봉규 님의 판단에 따라 미리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밸런타인 17년산 한병을 사들고 가 호텔 객실에서 나눠 마시고 잠을 청했다. 상당히 괜찮았다.
다음 날 아침 방콕 공항에는 출발 2시간 전 출국장에 들어오도록 돼있다. 출국장 들어서기 전 공항 이용세 12달러를 바트로 환전해 구입해야 했다. 방콕 공항의 면세점은 동남아 허브 공항의 명성에 어울리게 다양한 상품과 마사지 점,상당히 다채로운 책을 진열한 서점 등 매력을 상당히 갖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
방콕에서 카트만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웬 베트남 사람 같은 이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였다.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었다. 북한 사람 7명이었다.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아 공항에 도착해서야 작성하는 등 촌티를 드러냈는데 나중에 이들은 현지 공관원을 통해서 우리보다 먼저 입국장을 떠나는 수완(?)을 보여줬다.
카트만두나 포카라에서 환전할 경우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계산기가 있기는 한데 이곳 사람들 셈이 상당히 느리다. 더욱이 지폐를 세는 기계가 없는 관계로 일일이 손으로 하나둘셋 하면서 세기 때문에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 포카라에서 120달러를 환전해 소액권으로 달랬더니 한 손으로 못 잡을 만큼 많은 양의 지폐를 건네줬다. 영수증 조차 없었다. 환전 즉시 수수료와 환전한 금액을 메모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묵었던 문라이트 릿지의 방에는 전기 소킷이 있었는데 꽂아보니 충전되지는 않았다. 다음날 릿지 데스크에 가서 충전해달랬더니 나중에 50루피(750원)를 달라고 하더라. 10일 이상 산에서 생활하니 카메라 충전기는 가져가는 게 좋겠다.
첫댓글 네팔 접하지않은 나로선 소설 읽는 기분이다. 책으로내도 괜찮을듯 내 수준에서, pl님 수준에선 제 생각이 어떠하온지? 이투는 자칭 공주할~매한테 어울리는데....
한번 대충 읽고 지금 꼼꼼이 읽어보니 마치 내가 네팔 여행을 간 기분이다. 경비행기도 무서웠을거고..촌사람들의 과속운전도 아찔했을 것 같다. 군인들도 무섭고..ㅋㅋㅋ. 아주 재밌게 잘 읽었다.
그런데 꽃술로 된 목걸이가 그냥 형은 없고 왜 알 형만 있나요? 별 거이 다 궁금하다구요?^^글고 파리 형, 나도 20년도 훨씬 전에 부정맥 진단 받았었는데 여태 끄떡없이 잘 살고 있어요. ㅎㅎ 그거 별거 아니라구요.
그건 인간성의 차이지. 그냥 형은 받은 즉시 그 꽃을 마음 속에 담아둔 거고 내는 미련해서 카트만두에서 걸어준 목걸이를 벗어버리면 걸어준 사람들이 속상해할까봐 계속 걸치고 있었던 거지. 너야풀이란 데까지 나는 매고 갔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