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어와 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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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아홉 시경, 빙판 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서울3라 5862 흰색 쏘나타 승용차가 커브 길에서 미끄러지며 남한강 아래로 추락, 이 사고로 김○○(48)씨와… 건성건성 신문을 훑어 가던 남자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남자가 무릎에서 신문을 들어올린다. 이 사고로 김○○(48)씨와 유○○(48)씨 부부가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전국 폭설 빙판 길 사고 곳곳이라는 굵은 활자체 하단으로 흰색 쏘나타 승용차가 보인다. 차는 지금 막 크레인 줄에 걸려 두꺼운 빙판 속에서 인양되고 있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남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간밤에 내린 폭설로 버스들은 줄줄이 연착되고 있었다. 대합실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은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모여들었다. 수상기에서는 밖의 날씨와는 전혀 무관한 남미 어느 나라의 축구중계가 방송되고 있었다. 골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연신 미드필드에서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느라 남자는 스포츠신문을 샀다. 그리고 사회면을 보다 다시 매표소로 간다. 겨울낚시에 걸린 월척처럼 구멍 난 빙판 속에서 꺼내지던 승용차와 사망자 중의 한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강릉행 우등고속 차표를 사고가 난 곳으로 바꾼다. 오천 백 원을 거슬러 받는다. 시간표대로라면 출발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차표를 바꾼 남자는 다시 대합실 의자에 앉아 검정 모나미 펜을 꺼내들고, 신문에 실린 '알쏭달쏭 낱말 퀴즈' 의 퍼즐을 맞춰 간다.
가로 18번. 공법상의 의무 이행이나 질서 유지를 위해 위반자에게 과하는 벌금.
과징금인가? 남자는 실제로 몇 번의 과징금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답이 확실치 않은지 세로 16번을 찾아간다. 가로로 놓인 단어의 첫 음절이 세로 16번, 네 칸의 빈 공간 중 두 번째 칸과 겹쳐 있기 때문이다. 퍼즐은 결코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퍼즐에서 단어를 쉽게 알아맞히는 방법은 겹쳐진 또 다른 빈칸의 단어를 확인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테면 '글을 깨치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는 네 음절의 가로 칸 단어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내 마음의 풍금'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세로 칸의 남자 배우와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퍼즐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찾아내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자는 계속해서 가로와 세로 칸을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퍼즐을 맞춰 간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의 퍼즐이 풀리지 않는다. 가로 몇 번. 부부가 아닌 두 중년 남녀가 한 차를 타고 가면,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남자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세상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엉뚱한 답들이 즐비하다. 퍼즐은 역시 다른 세로의 빈칸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채널이 기상예보로 바뀌자 남자는 수상기로 시선을 돌린다. 긴 꼬리가 매서운 눈보라에 걸려 있는 듯, 눈길 위로 옴짝달싹못하고 서 있는 차량들이 화면을 꽉 메우고 있다. 이 궂은 날 어딜 가려고 저들은 집을 나섰을까. '미시령'이라고 쓰여진 이정표가 길가에 서 있다.
장의차가 멈춰 섰다. 매서운 눈보라가 앞유리창에 세차게 부딪친다. 수증기가 낀 유리창에 남자가 손바닥으로 투명한 페인트를 쓱쓱 칠하자 금세 낯선 호수의 풍경이 그려진다.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로 어둠이 성깃성깃 내리고 있다. 작은 회오리바람이 미끄러져 가다 유선장(遊船場) 빙판 위에 얹혀 있던 놀잇배들 위로 올라타는 게 보인다. 창 밖을 내다보던 남자는 유리창에 겨울 바다와 영하의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배 한 척을 그린다. 반달 모양의 선체를 그리고, 돛대를 우뚝 솟구쳐 올린다. 일이 터지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남자는 강릉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거친 파도와 작은 배가 유리창 위로 주르륵 녹아 내린다.
"뭔 놈의 날씨가 이 지랄인지. 체인이라도 둘러야겠네."
운전기사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려간다. 겨울 호수만큼이나 장의차 안은 휑뎅그렁하다. 차 안은 남자와 운전기사 그리고 여자, 셋뿐이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선다. 삼베로 짠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 하얀 빛깔의, 시린 눈꽃 같은 여자다. 흰 빛깔의 보자기로 싼 함이 여자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다. 여자가 내려가다 말고 뒤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돌아본다. 남자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 밖, 길 건너엔 호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스물 여덟 해, 여자를 잡아놓았던, 둥그런 호수가 이젠 쇠고랑처럼 느껴지는.
출발하려는지 타이어에 체인을 두른 기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여자를 돌아본다. 여자가 차 안에 앉아 있는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호수에 박혀 떠날 줄을 모르고 있다. 여자가 유리창에 손을 올려 얼어버린 창을 탁 탁 두드린다. 얇은 얼음에 잔금이 가듯, 바스락대는 남자의 어깨. 얼어버린 고개가 천천히 부서져 내리며 여자에게 향한다. 호수에서 갓 건져낸 듯 차가운 눈빛이다. 매운 바람이 둘 사이를 빠르게 스쳐간다. 독한 년이여… 독한 년이여… 어젯밤, 빈소에서 속닥거리던 사람들의 말이 여자의 귓불을 빨갛게 때리고 지나간다. 귀가 떨어질 듯 아프다.
이제 내려야 해요. 벙긋벙긋 입 모양으로 말하며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장의차가 눈길 위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사라지고 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휩쓸린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켠다. 바람에 불이 붙지 않는다. 찰칵, 찰칵. 섬광처럼 불똥만 튄다. 담배를 던져버린 남자가 사방을 둘러본다. 수증기 낀 유리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놀이공원이 남자의 앞에 놓여 있다. 남자는 자신이 호수와 놀이공원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 내린 것을 깨닫는다. 멀리 호숫가를 따라 포장마차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남자는 이곳이 작은 호수를 낀 유원지라는 것을 알아챈다.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작은 등을 본다. 여자는 놀이공원을 보고 있다.
"큰 놀이공원 같은 곳에 대면 꽤 작지만, 회전목마에 바이킹, 없는 게 없어요."
여자의 입에서 담배연기 같은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연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녹슨 정문 안으로 눈에 덮여 하얀 고깔모자가 된 지붕의 회전목마가 눈에 띈다. 둥글게 맴을 돌았을 빨강, 노랑, 파랑, 갈색 목마들의 머리와 안장에 눈이 수북하다. 고개를 수그린 채 깊은 잠을 자는, 그런 모습이다. 옆으로 회전그네와 찻잔, 다람쥐 통들이 작은 짐승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바람에 쓸린 과자봉지와 낙엽 부스러기들이 그들 사이를 쓸쓸히 배회하고 있다.
"꼭 악한 마법사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지 않아요? 오즈의 마법사 본 적 있죠? 도로시랑 토토,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양철인간 들이 나오는 동화. 이곳을 지날 때면 오즈에 온 기분이 들곤 해요. 특히 이런 겨울에는 더 하죠. 커다란 찻잔들이나 줄에 묶여 결국엔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는 그네, 떠나버린 다람쥐를 기다리는 버려진 다람쥐 통들. 마법에라도 걸려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는 것 같아요."
여자는 처음 놀이공원으로 싣고 오던 목마와 회전그네, 찻잔들을 기억한다. 며칠 동안이나 큰 이사를 했었다. 잘 닦인 터에 울타리가 세워지고 바리바리 이삿짐을 실은 차들이 한적한 호숫가를 요란스레 점령했었다. 여자는 구경 나온 아이들 사이에서 구경을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새것이 아닌 헌, 꼭 재활용쓰레기장에서 쓸 만한 것들을 주워와 호숫가에 주욱 펼쳐놓는 것 같던 모습들. 잔뜩 때가 낀 찻잔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었다. 녹슨 그네들은 전부 줄이 끊어져 있었고, 목마들은 갈기에 메마른 모래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래도 바이킹을 옮겨올 땐 굉장했어요. 큰 기둥이 두 개 세워지고, 그만큼 큰 트레일러가 왔죠. 트레일러 위에는 아주아주 커다란 천으로 가려진 바이킹이 있었어요. 그런 것 있잖아요. 마술 쇼에서 검은 보자기 안에 귀여운 토끼를 넣었는데, 보자기를 확 펼치니까 빨간 장미꽃이 나오는 거. 잔뜩 신이 나서 기다렸죠. 뭐, 딴 게 나올 거라는 상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기대가 되잖아요. 그런데 확 펼쳐진 보자기 속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꼭 오래 전에 바다에서 끌어낸 난파선이지 뭐예요."
웃음을 참는지 여자의 목에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난다. 커다란 바이킹이 남자의 눈에 가득 찬다. 기우듬히 철탑에 걸려 있는 모습. 여자의 말대로 바다에서 오래 전에 끌어낸 난파선 같다. 노란 페인트 칠이 벗겨진 작은 생채기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짙은 귤색으로 대충 덧칠을 해놔서 눈에 쉽게 띈다. 고물 쪽은 뭔가에 호되게 부딪혔는지 움푹 꺼져 있다. 끼이이. 바람에 흔들리며 녹슨 쇳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바이킹은 거센 파도를 타던 모습 그대로 얼어 있을 뿐이다. 저 바이킹은 무엇을 잃고, 아니 무엇을 꿈꾸며 철탑에 걸려 있는 걸까. 용기? 심장? 그도 아니면, 도로시의 집과 같은 심연의 바다? 남자는 궁금해진다. 함이 무거웠을까. 여자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휘우뚱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여자의 어깨에서도 녹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길 건너 얼어버린 호수를 바라본다. 유선장 근처를 서성이던 바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배는 떠났을까. 남자는 강릉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배를 떠올린다. 오늘 아침이 출항예정이었다. 용역회사에서 소개를 받은 배였다. 서울에서 떠나올 때 받아놓은 연락처로 전화를 넣었지만 통화중이었다. 그 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배는 남자를 남겨두고 떠났을 것이다. 빙판 위로 띄엄띄엄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겨울낚시꾼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낚시를 간다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어젯밤, 시경 교통과 소속의 중년 경사와 함께 남자는 병원 주차장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가족들에게는 낚시하러 간다고 하셨다지만 가방에는 릴낚시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 엄동설한에 참. 꼭지도 안 떨어진 기자 놈이 신문엔 부부라고 올렸던데, 신원 조회하니 그것도 아니고, 이럴 때는 정정 보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은근히 비웃는 투로 경사가 비아냥댔다.
"마침 뒤에 다른 차가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그 쪽이 워낙 한가한데다 가드레일도 없겠다, 하마터면 날 풀려도 실종자 명단에 계속 오르내릴 뻔했어요. 남한강 바닥 샅샅이 뒤지면, 아마 이런 주차장 하나는 거뜬히 채우고도 남을 게요."
깜깜한 주차장을 손으로 쓰윽 훑는 시늉을 하며 경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남자의 고개는 자꾸만 빈소 쪽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에 섞여 따뜻하고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부침개 냄새 같았다. 점심을 거른 빈속이 싸아하게 쓰려왔다.
저녁 일곱 시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곧바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오후에 서울로 옮겨지고 난 뒤였다. 집으로 먼저 연락을 할 걸 그랬나. 잠깐 후회를 했다. 자신은 내려오고, 아버지는 올라가고……. 항상 그렇더니 결국 마지막도 어긋나버렸다. 어쩌면 길 어디쯤에서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어디쯤이었을까.
"그럼."
경사에게 대충 인사를 한 남자는 빈소로 걸어갔다. 속이 쓰려왔다. 맥이 쑥 빠지고 발걸음이 허청거렸다. 어이, 잠깐만요. 경사가 손짓으로 남자를 불러 세웠다.
"잊을 뻔했네. 다 인계된 줄 알았는데 하나가 빠졌지 뭐요."
경사가 파카 속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건네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짙은 어둠이 금세 경사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쥐어진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비닐봉투였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지갑이었다. 지갑을 꺼내는 남자의 손에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났다. 비닐봉투 속에 채집된 단서를 꺼내드는 형사처럼 남자는 긴장을 했다. 지갑에는 물에 젖은 얼마의 현금과 신용카드가 여러 장 꽂혀 있었다. 투명한 비닐 칸으로 형체가 흐릿한 사람들의 윤곽이 보였다.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남자는 가로등 빛이 반사되게끔 지갑의 한쪽을 기울였다.
"겨울만 되면 저래요. 저 사람들, 일년 내내 호수가 얼기만 기다리거든요."
여자의 왼쪽 어깨가 아래로 기울어진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함을 바꿔 잡은 탓이다. 여자가 호수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저 사람들 뭘 잡고 있는 줄 아세요? 재미난 고긴데… 아, 그러지 말고, 날도 추운데 떠나시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하고 가세요. 가더라도 속이나 따끈하게 덥히고 가야죠. 실은 저 사람들 잡고 있는 게 술안주로 그만이거든요."
여자가 남자를 보며 빙긋 웃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의 눈이 짓궂은 개구쟁이 같다. 기울어진 여자의 어깨를 보고 있던 남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시침이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대로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러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대답도 듣지 않고 벌써 여자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남자가 머뭇머뭇 뒤를 쫓아 걸어가기 시작한다. 호수 주변으로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는 포장마차들 속에서 불빛이 새나온다. 유행가의 경쾌한 리듬이 지붕 위 연통에서 흘러나온 연기에 섞여 뿔뿔이 흩어져 가는 게 보인다.
남자와 여자는 낡고 허름한 포장마차 앞에 서 있다. 주황색 천막에 적힌 '진천댁'이라는 상호가 큼지막하다. 문을 따고 들어섰을 때는 이미 온몸이 얼어 있다. 며칠 동안이나 문을 닫았을까. 어두컴컴한 가게 안은 밖과 별다를 게 없다. 되려 갇혀 있던 한기가 왈칵 밀려든다.
여자가 스위치를 켜자 알전구가 오랫동안 깜박거리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명이 다해가나 보다. 벽의 모서리마다 빙 둘러친 색전구들에도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켜진다. 노랗고, 붉고, 푸른 빛깔들 사이로 가게 안이 드러난다. 기역자로 꺾여 밖으로 나 있는 연통을 달고 가운데에 난로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난로 주위로 다섯 개의 둥근 스테인리스 식탁과 서너 개의 플라스틱 간이의자들이 따다만 꽃잎처럼 흩어져 있다. 나머지 의자들은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 여자가 함을 의자에 올려놓는다.
"아휴 추워. 불 좀 지펴 주세요."
널찍한 판자로 엮어 짠 주방으로 여자가 몸을 움츠리며 들어간다. 주방엔 커다란 냉장고와 조리대가 있고 냄비며 프라이팬, 조리기구들이 판자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다. 찬장에는 플라스틱 접시들이 가득하다. 구석에 쌓여 있는 장작과 기름통을 가지고 남자가 난로에 불을 지피는 사이, 여자는 깻잎을 씻고 흰 파빅스 통에서 미리 껍질을 벗겨 놓은 마늘과 몇 줌의 고추를 꺼내 식칼로 숭덩숭덩 썰어 나간다. 함을 들던 손이 얼었는지 입김을 쐬지만, 여자의 손놀림은 꽤 익숙하다.
타닥타닥. 마른 껍질이 터지며 장작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연통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들이 알큰한 냄새를 풍기며 가게 안으로 퍼진다. 허공 중에서 색전구의 불빛들이 얽혀든다. 의자 위에 올려진 함 위로 연기가 아른거린다. 함이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놀이공원, 화장터, 호수… 불꽃을 보며 남자가 중얼거린다. 남자가 보았던 이질적인 풍경들이 매캐한 연기와 형형색색의 빛들에 섞여 머리 속을 떠돈다. 결코 섞이지 않을 것 같은 풍경들. 하지만 상이한 풍경들 사이에는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겹쳐진 부분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여자가 고추장에 식초를 풀어 초고추장을 만들고 있다. 난로의 뜨거운 열기에 남자의 두 눈이 빨갛게 익어간다.
잔 얼음이 송송 떠다니는 얼음물이 담긴 양재기에 젓가락이 푹 꽂힌다. 연해 들려올 아득 아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 뭉툭한 골이 팬 단단한 석회질의 어금니에 자근자근 바스러질 뼈의 비명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입술을 달싹거린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심하게 부르튼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남자의 아래로 기울어진 시선은 온통 여자의 젓가락에 쏠려 있다. 얼음물 속을 천천히 맴돌고 있는 한 쌍의 젓가락에 박혀 있다. 으스름한 저녁 하늘의 어느 냇가. 말라죽은 삭정이를 꺾어 냇물을 휘젓는 계집아이의 기다림 같다.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빠와 엄마를 기다리는, 혹은 봉긋이 부풀어 오른 가슴의 작은 멍울에서 느껴지는 먹먹함을 보드랍게, 혼자 있다는, 혼자서 텅, 빈, 집까지 가야 한다는 아픔을 보듬어줄 사내아이를 내심 기다리는 것일지도. 그런 휘저음일지도. 석양의 냇물과 발갛게 물든 마음 속 냇물의 물살을 때로는 역행하고, 때로는 순행하는 것일지도. 남자는 한 쌍의 젓가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번뜩이는 여자의 젓가락. 여자는 보기 좋게 남자의 상상을 배신한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건전지를 뺀 초침처럼 탁 정지하고, 여자의 젓가락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잡았다. 이 녀석. 월척을 낚아채는 낚시꾼 같다. 한 쌍의 낚시대에는 어느새 작은 물고기가 잡혀 있다. 파다닥, 파다닥. 젓가락 사이에서 물고기가 요동친다. 온몸을 비틀어댄다.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것만 같다. 여자가 재빨리 깻잎에 물고기를 올려놓고 초고추장으로 쌈을 싼다.
아득, 아드득. 여자의 가칠한 입술에 빨간 고추장이 묻어난다. 하얀 삼베옷에 빨간 고추장이 떨어져 붉게 물든다. 눈언저리에 질끈 힘을 주며 소주잔을 입술에 갔다대던 남자가 물끄러미 잔 속을 들여다본다. 물고기가 혹시 잔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만드는 너울 속으로 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두려워진다.
"드셔 보세요. 쌉쌀하면서도 담백한 게 맛이 기막혀요."
허리께가 으스러진 속살이 이빨 사이에서 미끄러지나 보다. 여자의 볼이 올강볼강 실룩거린다.
"공어라고 해요. 빌 공(空)에 고기 어(魚). 그러니까 몸이 텅 빈 고기라는 뜻이죠. 물론 진짜로 텅 빈 건 아니에요. 보세요. 뼈랑 내장이 죄다 보이잖아요. 전국에서도 특히 이곳 공어가 최고예요."
여자가 소주를 쭈욱 들이켜며 입가심을 한다. 작은 물고기들이 차가운 얼음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 여자의 말대로 뼈와 내장이 고스란히 보인다. 공어라고? 신기하다. 하지만 추워 보인다.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여자의 젓가락이 녀석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선다. 여자가 입맛을 다시며 침을 삼키고 있다. 모르게 남자도 침을 삼킨다. 여자의 입가에 묻은 초고추장이 계속 신경을 자극한다. 하필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이미 아버지는 땅 속에 묻혀 있을 텐데, 마지막이라도 아버지를 봤어야 하지 않았을까. 남자는 애써 여자의 입술에서 시선을 돌린다.
"저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죠? 그 사람들처럼, 아 죄송해요. 하여튼 머리채라도 쥐어뜯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은 아니던데."
아드득, 아드득. 여자는 다시 한 마리를 입 속에 넣고 씹으며 남자를 본다. 주황색 천막 사이 비닐창 너머로 남자의 눈길이 걸어가고 있다. 하얀 눈보라가 소나무 사이를 스쳐가고 있다. 남자의 눈길이 가로등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경사가 떠나고도 남자는 한참을 서성이다가 빈소로 향했다. 발길을 돌려 서울이나 강릉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밤차를 타면 집이나 강릉에 새벽까지 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랬으면 염습을 했을 수도, 배를 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이 계속 쓰려왔다. 아버지와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 저 눈꽃 같았다. 창 밖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꽃처럼, 영정 앞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던 여자가 생각난다. 여자의 몸에서 흘러 넘치던 서슬퍼런 냉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년이라고 구석에서 쑤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는 여자……. 그랬다. 남자는 대번에 여자가 누군지 알아챘었다. 어머니와 동생들도 단박에 알아봤을 거다. 제기랄. 남자의 텅 빈 속에서 욕지기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시큼한 현기증이었다.
"오늘은 꼭 소풍가기 전날 같아요. 학교를 다니던 내내 제가 제일 싫어했던 날이 언제인줄 아세요."
여자는 뼈를 잘게 씹으면서도 전혀 끊어짐 없는 말로 얘기한다.
"시험 날도, 성적표에 도장 받아오던 날도 아니었어요. 바로 소풍 날이었어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일년에 두 번이니 스무 번이 넘는 그 짓을 항상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여자는 하얀 성에가 눈꽃처럼 핀, 창 너머로 어둠 속을 바라본다. 하얀 눈꽃들이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를 떠돌고 있다.
"솔밭 공원. 항상 우리는 저 솔밭 공원으로 소풍을 왔죠. 봄, 가을, 우거진 소나무 숲이 만드는 시원한 그늘과 보송보송한 흙바닥에서 피어오르던 구수하고 달콤한 흙 냄새……. 둥글게 둘러앉아 장기자랑을 하고 놀았죠. 참 좋은 곳이죠. 그런데 웃기지 않아요? 소풍을 집 앞으로만 가야 하는 가련한 처지가. 한번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시시했어요. 아이들은 제자리에 앉아 가운데로 나간 아이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면 발그레한 흥분을 삭이며 생각하죠. 저 아이는 나를 뽑아줄까. 아니, 나는 잘하는 것도 없는데 날 뽑으면 어떡하지. 두려움과 설렘을 적당히 얼버무린 얼굴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거예요. 두근두근 심장의 피돌기가 빨라지죠. 그러곤 장기자랑이 끝난 아이의 눈이 주위를 한번 쓰윽 휘둘러보면, 아이들 대부분은 고개를 숙여버려요. 그러곤 마음 속으로 외치는 거예요. 나를 뽑아. 나를 택해. 뽑지마. 안 돼."
여자가 거푸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남자는 둥근 원의 한 고리였을, 아마도 별로 뽑혀본 적이 없을, 둥근 원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여자를 바라본다. 언제나 제자리에 앉아 손뼉을 치고 있었겠지. 저 여자는.
"그래도 그건 참을 수 있었어요. 제가 제일 싫어했던 건 바로……"남자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손수건돌리기였다. 어디를 가도 언제나 손수건돌리기를 했던 소풍. 남자는 너무 헐거웠다. 바투 앉아 있던, 이제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 몸만큼의 무게로 앉아 있던 아이들. 그 아이들 사이로 남자는 바짝 붙어 앉아 자신의 몸이 떠오르지 않기를 원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노래가 시작되고 손수건을 손에 감춘 아이가 천천히 원의 바깥을 맴돌기 시작했다. 둘러앉은 아이들은 술래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두 눈을 흡뜨고는 뒤를 힐끗거렸다. 누군가의 뒤에 몰래 떨어질 손수건. 내게 떨어뜨려. 나를 뽑아. 아니, 안 돼. 제발… 이상했다. 남자는 어김없이 걸려들곤 했다. 술래는 왜 내 뒤에 손수건을 떨어뜨릴까. 아이들의 중력에서 툭 끊긴 자리. 술래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은 그 중력의 빈 자리에서 허공으로 빙그르르 떠오른 걸까. 그래서 아이는 깜짝 놀라 그러쥔 손을 푸는 것일까.
남자는 손수건을 쥐고 일어나 빙글빙글 사라져 가는 술래 뒤를 쫓아갔다.
[2002신춘문예]공어와 빙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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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계수나무 한 그루와 토끼 한 마리가 외로이 있을 남자의 자리를 향해. 그 자리를 향해 뛰어가는 술래. 가지마. 가지마. 그곳으로 가면 안 돼.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하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자꾸만 허청거렸다. 남자의 바램은 돛대도 달지 않은 나뭇잎 배처럼 방향을 잃고, 어느새 술래는 남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달싹거렸다. 이제 네 자리는 없어. 한 뼘의 공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단히 엉킨 중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손수건을 손에 쥔 남자는 술래가 됐다.
"이 고기, 빙어라고도 해요. 얼음 빙(氷)자를 써서. 재미있지 않아요? 겨울에 수면 가까이 산란하러 나오는데, 그 때 사람들에게 잡힌다고 빙어라고 하죠. 난 꼭, 요 텅 빈 뱃속에 겨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을 하곤 해요. 작은 몸뚱이 속에다가 겨울을 품고 있다가 토해내면 바깥 세상이 겨울이 되고, 몸뚱이는 텅 비어버린 채, 사람들 손에 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 작은 고기의 몸 속으로 겨울이 들락날락하는 거죠,"
"그게 무슨……"
그때, 천막 문이 들춰지며 가게 안으로 한 사내가 불쑥 들어선다. 남자의 물음이 저절로 끊긴다. 청재킷에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짧은 머리의 사내. 눈에 익은 얼굴이다. 어제 빈소에서 잠깐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잔뜩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 어제도 그랬다. 술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내는 앉지도 않고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고만 있다. 시뻘건 눈빛이 꽤 매섭다고 남자는 느낀다. 잘못하면 한 대 후려칠 기세다. 여자가 사내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 마지못해 끌려가듯 사내의 눈빛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밖으로 나간 그들 사이에서 이내 고성이 오간다. 갈 수 있어. 나두 갈 수 있다구. 술에 취한 사내의 고함이 들려온다. 사내는 어딜 갈 수 있다는 것일까.
청재킷의 고함을 들으며 남자는 젓가락을 냄비에 슬쩍 담가본다. 하나, 둘. 냄비 속에는 이제 두 마리의 고기만이 남아있다. 그 많던 고기는 모두 여자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공어라고 했던가. 빙어라고도 했지. 손가락 세 마디도 안 되는, 투명한 몸 속으로 뼈가 훤히 보인다. 한 마리가 젓가락 근처를 헤엄치다 주둥이로 젓가락을 툭 건드린다. 입질이 손끝에 느껴진다. 갑자기 가슴이 저릿하다. 또 한번 툭 건드린다. 저릿저릿 가슴이 저려온다.
왜 이러지. 가슴이 저린 남자가 왼손을 가슴에 얹고 꾹 누른다. 남자의 손바닥에 불룩한 감이 느껴진다. 지갑이다. 아버지의 지갑이다. 남자는 어젯밤에 보았던 사진이 떠오른다. 또 다시 시큰한 아픔이 찾아온다. 물고기의 자그만 입술이 남자의 가슴을, 아버지의 지갑을, 지갑 속에 들어있던 사진을 쪼아대고 있는 것 같다.
가로등 빛에 드러난 사진 속의 윤곽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어머니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들 뒤로 중학생인 현과 민, 두 동생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은 남자 앞에서 별로 웃은 적이 없었다. 배가 다르다는 것은 그들에게나 남자에게나 극복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틈새였다. 하지만 남자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라고 불렀다. 동생들에게도 친근히 이름을 불러줬다. 대신 아버지와의 사이는 갈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아버지의 결혼식 날, 남자는 지금 현과 민의 나이였다. 남자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집을 나왔다.
왜 그랬을까. 왜 아버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낚시를 간다는 핑계로 항상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말마다 혼자 낚시를 가곤 했던 아버지. 정말 그랬을까.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애써 저으며 사진 속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는 사진이었다. 혹 작은 꽃병 하나라도 멋모르고 끼어 들면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꼭 서울로 가야만 할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신문을 읽던 그 순간 이미 품었던 생각인지도 몰랐다. 남자가 끼여들면 금세 구도가 깨어질 게 뻔한 사진. 멋모르는 꽃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가 천막을 들추며 들어서자 남자는 재빨리 젓가락을 초고추장으로 가져간다. 여자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있다. 청재킷의 사내는 들어오지 않는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다시 몇 병이 따졌다. 청재킷의 사내가 떠난지도 이미 오래다. 여자는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생긋생긋 웃으며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낯빛이 해쓱해지며 여자의 말은 한층 수선스러워진다. 빈소에서 남자가 느꼈던 여자의 냉기. 그 시린 기운은 거짓이었나. 남자는 궁금해진다. 화장터에서 돌아와 장의차에서 내리던 순간 여자는 돌변했다. 왜일까. 여자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냉기는 어디로 갔을까. 술을 따르고, 마시고, 파닥이는 공어의 몸부림을 입으로, 혀로 느끼던 여자가 남자에게 불쑥 묻는다.
"왜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거죠? 궁금한 게 있어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남자는 술에 취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의 풀어진 눈빛이 게슴츠레하다. 그래, 무엇을 물어볼까, 생각을 해보지만 정작 뭘 물어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계속 영정 속의 그 여인을 만나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왜 남자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해야할까.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이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대합실에서 맞추던 퍼즐이 떠오른다. 답을 모르던 가로 칸. 남자는 세로 칸이 알고 싶었다. 궁금했다. 그렇지만 퍼즐은 맥없이 풀려버렸다. 세로 칸의 단서는 여자였다. 여자를 처음 본 순간 퍼즐의 빈칸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을까.
남자가 젓가락을 집어 양재기에 푹 꽂는다. 금세 젓가락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들어선다. 남자의 젓가락이 물고기를 확 잡아챈다. 남자의 입 속으로 물고기가 사라진다. 이빨 사이로 고무공처럼 탄력이 느껴지는 몸뚱이가 걸린다. 여자가 남자를 유심히 쳐다본다.
"우리, 참 많이 닮았어요. 그죠?"
우드득. 남자는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
울긋불긋 희부연 빛을 뿜어내던 색전구들이 꺼졌다. 세차게 몰아치던 눈보라는 이미 온데간데없다. 한바탕 짓궂은 소나기라도 내린 것 같다. 새까만 밤하늘에 눈꽃이 흐드러지게 달려 빛나고 있다. 달빛에 아슴푸레 물든 호수가 보인다. 남자와 여자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달빛이 하얀 빙판 위에서 몰래 미끄럼을 타다 노송들의 가지 사이로 후다닥 숨어버린다.
여자가 눈길 위로 몇 발짝을 떼다가 휘청거린다. 기울어지는 몸을 남자가 잡아챈다. 여자가 뿌리치고 다시 걷는다. 뽀드득 뽀드득. 그리고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훔쳐보던 달빛이 깜짝 놀라 기척을 낸다. 가지 위에 쌓여있던 눈들이 놀라 후드득 떨어진다.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려 숲 속을 노려본다. 달빛이 숲을 지나 놀이공원으로 숨어들어 가고 있다. 순간 회전목마와 찻잔이 작은 달처럼 투명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달이 거기 있다. 갈기를 휘날리며 목마의 달이 고삐를 끊고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만 같다. 커다란 배 모양의 반달이 돛대를 펴고 힘차게 노를 저어올 것만 같다.
벌겋게 녹이 슨 곳이 부대끼며 쇳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물고기의 입질처럼, 녹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달빛이 남자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다. 달빛이 낚시 바늘처럼 꼬부라져 시커먼 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낚시바늘 끝에 달린 미늘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무엇이 걸려들까. 텅 비어버린 몸뚱이 속에서 무엇이 건져 올려질까.
"조금만 업어줄래요."
여자의 날카로운 미늘이 남자의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무겁지 않아요? "
여자가 남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인다. 여자를 업고 걸은 지가 꽤 지났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이상스레 침착하다. 가로등 끊긴 길 위로 쌓인 눈이 형광색 도료처럼 빛나며 남자를 인도하고 있다.
"보세요. 달이 밝아요. 아침엔 날씨가 참 좋을 것 같아요. 소풍가기 딱 알맞은 그런 날씨 말이죠. 휴, 다 와가네요. 그만 내려줘요."
뒷목에 와 닿는 입김에 오슬오슬 한기가 돋는다. 여자의 두 팔이 남자의 목을 꽉 조인다. 내려달라는 말과 달리 여자는 남자의 등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여자가 말한 파란대문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남자의 눈앞에 하얀 보자기로 싼 함이 대롱거리고 있다. 함의 모서리가 남자의 가슴을 툭툭 쳐댄다.
남자의 몸이 푹신한 소파 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남자를 비추고 있다. 여자가 들어간 방은 고요하다. 남자는 소파 위로 다리를 뻗고 드러눕는다. 뻥 뚫린 가슴이 보인다. 달빛이 아직도 낚시를 하고 있나 보다. 가슴속으로 작은 호수가 보인다. 이상한 호수다. 이상한 호수에 와 있다는 것을 남자는 깨닫는다. 떠날 수 있을까. 남자는 자신이 없어진다. 졸음이 몰려온다. 감겨드는 눈에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낚시 바늘이 보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작은 포구다. 멀리 배 위에서 누군가 손짓으로 남자를 부르고 있다. 어서 타요. 곧 배가 떠날 겁니다. 어서. 남자가 뛰어가 배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이윽고 배가 포구를 떠난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하얀 포말이 이는 바다가 남자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다. 남자는 그 망망함에 눈을 감는다. 순간 누군가 몸을 확 잡아채듯 남자의 몸이 뒤로 부웅 떠오른다. 솟구쳐 오른 배가 빠르게 떨어진다. 우욱. 속이 울렁거린다.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그때 잔뜩 몸을 웅크린 남자의 손을 누군가 잡아준다. 시큼한 눈물 속에 바람에 헝클어진 긴 머리칼과 한 쌍의 눈이 있다. 너로구나. 너.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여자다, 이런, 바이킹 타본 적 없어요?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바이킹이라고? 다시 배의 이물이 크게 솟구쳐 오른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앞으로 쏜살같이 떠오른다. 배가 허공의 정점에 다다른 순간 남자와 여자의 몸이 배 위로 튀어 오른다. 어느새 배는 아래로 푹 꺼져들고 있다. 손을 꽉 잡은 남조와 여자의 몸이 허공을 날아 차가운 겨울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가라앉아 가는 남자의 눈에 일렁이는 수면이 아른거린다. 점점 시야가 깜깜해진다. 배가 보이지 않는다. 숨이 막혀온다. 귀가 먹먹해진다. 고무공처럼 부풀어오른 폐가 뻥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 같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남자는 눈을 흡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그 때다. 멀리서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는 것들이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작은 불빛들이 남자에게 다가온다. 작은 물고기들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남자의 곁을 헤엄치고 있다. 물고기의 몸 속에서 투명한 빛이 빛나고 있다. 차가운 빛이 물고기들의 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남자의 손을 누군가 톡톡 건드린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에 여자가 있다. 아니 작은 물고기가 있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뿜어내며 여자가 있다. 아니 물고기가 있다.
*
창 밖으로 싱그러운 소나무 숲과 놀이공원,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자의 말처럼 날이 화창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따뜻한 볕이 남자를 깨운다. 여자의 방은 여전히 고요하다. 소파 위에서 일어난 남자가 한껏 기지개를 켜며 창 밖을 내다본다. 호수 위로 작은 인형들 같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창 얼음 낚시에 열중인 포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지치고 있다. 남자의 시선이 아이들의 썰매를 타고 빙판 위를 미끄러지다 한 곳에 툭 걸려 넘어진다.
호수 위에 여자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앉아있다. 호숫가 도로에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서있다. 차 옆으로 한 사내의 푸른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낯이 익다. 어젯밤에 본 청재킷이 틀림없다. 남자는 힐끗 여자의 방을 돌아본다. 여자의 방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여자의 손이 옆에 놓인 함에 들어갔다 위로 들려지기를 반복한다. 손끝에서 하얀 눈보라가 만들어진다. 남자는 바짝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댄다. 여자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하얀 눈보라를 뿜어내고 있다. 여자의 몸 속에서 눈보라가 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가 얼음 구멍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잘 있어요. 엄마.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깜깜한 호수 속으로 천천히 퍼져간다. 연신 담배를 물고 안절부절못하던 청재킷이 여자를 재촉한다. 여자가 이내 청재킷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기다려."
남자가 황급히 여자를 불러 세운다.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린다.
"어제 네가 물었지. 무겁지 않냐고. 사실……그래, 사실, 난 네가 너무 차갑다고 말하려 했어. 그리고 내 허청거리던 발이 왜 너를 업고 나서야 침착해졌는지도. 그런데 뭔가 뜨거운 게 목에 툭 떨어지는 거야. 너무 놀라 말을 잊었어. 나는 그때 내 텅 빈 몸을 생각하고 있었어. 술기운이 아니라 그래서 허청댔던 거라고. 어릴 적 수건돌리기처럼 내 발이 자꾸만 허청댔던 게 실은 내 몸이 텅 비어서라는 걸. 그래, 너를 업고서야 알았어. 너만큼의 무게가 내 몸에 실리니까 이상스레 내 발이 안정되었어. 꼭 한 사람이 스스로의 무게를 인식하고 걸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말이 여자의 귓가에 아른거린다. 여자는 남자가 있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당신은 공어였어요. 그럼 난 빙어쯤 됐을까요. 아니, 이제는 당신이 빙어겠죠. 그런데……우리는 호수를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를 만든, 그들의 호수를 떠날 수 있을까요?"
옷깃을 여미며 여자는 청재킷 쪽으로 걸어간다. 차 속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던 청재킷이 문을 열어준다. 여자가 옆에 올라탄다.
남자가 떠나가는 차를 향해 입김을 뿜어낸다.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린다. 차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하얀 입김 위에 겨울바다와 배 한 척을 그린다. 반달 같은 배를 그리고, 우뚝 솟은 돛대를 그린다. 남자가 소파에 주저앉는다. 꺼진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낯선 사내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브라운관 속, 아이의 시선이 거실을 한바퀴 돌고 있다. 낯선 집에 홀로 버려진 불안하고 두려운 눈빛이다. 괜찮아, 걱정하지마. 너는 버려진 게 아니야. 금방 다들 돌아오겠지. 남자가 아이를 폭 끌어안으며 다독거린다.
"많이 잡았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중년의 사내가 싱긋 웃으며 한쪽을 가리킨다. 오목하게 파놓은 얼음구덩이 속에 물고기 수십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마치 작은 호수 같군요."
"한 번, 해보시겠소?"
털모자가 새빨갛게 얼은 코에서 콧물을 훔치며 파놓은 얼음 구멍 중, 하나를 가리킨다. 좋죠. 견지를 건네 받은 남자가 얼음구멍 앞에 쪼그려 앉는다. 대여섯 개의 바늘을 단 낚시 줄이 외짝얼레에서 풀리며 얼음구멍 속으로 가라앉아 간다.
사진을 찾은 것은 아침이었다. 낯선 집안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물기가 마르면 잔뜩 울어버릴 사진이 떠올랐다. 불현듯 사진을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사진을 꺼냈을 때, 남자는 사진 뒤에 또 하나의 사진이 숨겨진 채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맞물린 가로 칸과 세로 칸처럼 두 사진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 붙어있었던지. 인화지의 풀기가 배어 나온 모양이었다.
사진은 불량 스티커처럼 귀퉁이가 앞 사진에 붙은 채로 떨어졌다. 꽤 오래된 흑백사진이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품에는 두 갓난아이가 안겨있었다. '축 돌 기념' 이라는 흰 글씨가 사진 하단에 휘갈겨져 있었다. 74. 2. 10 이라는 숫자가 밑에 쓰여있다. 2월 10일. 남자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생일일 것이다. 바짝 얼은 표정이 정말 볼만했다. 사진사가 눈을 크게 뜨라고 했는지 젊은 남자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했다. 매초롬한 여자는 동그란 눈을 토끼처럼 뜨고 있었다. 남자는 사진을 보다 피식 웃었다. 가족사진 뒤에 또 하나의 가족을 붙여놓고 살았을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 어머니가 지갑을 뒤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는지. 아니, 발각되기를 하루하루 고대하며 헐떡였을지도 몰랐다. 하루하루 부러 불안감에 자신을 옭아매고 살았을지도, 그게 자신의 죄과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한참동안 법석을 떤 뒤에야 남자는 다리미를 찾아냈다.
"반은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래야 다음 겨울에 또 올 수가 있거든요."
잡은 고기의 반을 다시 호수로 돌려보낸 털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떠나고 있다. 만선을 이룬 뱃사람 같다. 멀리 놀이공원의 바이킹이 노을에 불그스레하다. 겨울에 얼어버린, 긴긴 잠을 자던 바이킹과 회전목마들. 그들의 잃어버린 꿈들이 불그스레하게 익어 가는 것 같다. 주말에, 날씨가 오늘처럼 좋으면 놀이공원도 개장을 하려나? 내일은 소풍가기에 딱 좋을 것 같아요. 남자의 빨갛게 얼은 귀에 바람이 소곤거리며 스쳐간다. 남자는 얼음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차갑다. 손등이 저릿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남자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언뜻 물고기의 입질이 토도독 손끝에 느껴진다.
이런 벌써 왔어요? 남자의 얼굴이 수면에 닿을 듯 하다. 물고기가 보인다. 깊고 차가운 심연 속, 투명한 빛을 뿜어내며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짝짓기를 끝내고 산란을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이 남자의 손끝을 톡톡 건드리며 맴돌고 있다. 요 몸 속으로 겨울이 들락날락하죠. 다시 바람이 스쳐간다. 남자는 얼음으로 된, 텅 빈 물고기처럼 언제고 저 깊은 호수 속에서 흐르고 있을 공어의, 그리고 빙어의 겨울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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