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동굴 옆 나무에 매달려 있다. 밑에서는 굶주린 맹수들이 으르렁거리고, 위에서는 무시무시한 새떼가 먹이를 찾아 날아다닌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춰 미끄러지거나 새의 발톱에 걸려드는 날이면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저 아래서는 쥐들이 나무 밑동을 갉아대고 있다. 오래지 않아 나무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나뭇가지 위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 사내는 어쩌다가 떨어지는 꿀을 핥아먹으며 그 단맛에 즐거워한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했다. 가혹한 사고사와 피할 수 없는 자연사의 가능성에 끼여 있으면서도 한순간의 욕망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우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지만 이미 늦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은 톨스토이가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고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고 난 뒤 9년 만에 발표한 것인데, 마치 작가 자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실감나는 작품이다. 길지 않은 중편 분량의 이 소설은 나이 마흔다섯의 중견 판사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와 친했던 동료 법조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의 승진이나 자리 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데 대해 안도한다. 냉정하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아내마저도 똑같으니까. 그녀는 추도 미사에 참석한 고인의 법학교 동창에게 연금을 비롯해 국가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지원금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톨스토이는 곧이어 주인공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한다.
이반 일리치는 명문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순조롭게 법조인이 되어 평생 안락하고 편안한 길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새집으로 이사해 벽을 꾸미던 중 옆구리를 다치고 그다음부터 자꾸만 이상한 통증을 느낀다. 하지만 의사들은 맹장이니 신장이니 하면서 진통제만 줄 뿐이다. 또다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맹장 문제도 신장 문제도 아니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있었는데 지금은 떠나가고 있는 거야. 떠나는 중이라고. 근데 나는 그걸 붙들 수 없어. 그래 문제는 몇 주일 후냐, 며칠 후냐, 아니면 지금 당장이냐야. 한때 빛이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어. 나 또한 이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저곳으로 가야 해!”
병세가 악화돼 결국 직장도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고통과 씨름하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본다. 그동안 기쁨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고 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상류층에 진입하면 뭔가 좋은 게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즐거움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뜻하지 않게 찾아왔고 이어진 실망,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그리고 이 생명 없는 직무, 돈 걱정, 그렇게 보낸 일 년, 이 년, 그리고 십 년, 이십 년, 항상 똑같았던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내 발 아래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마침내 그는 자신이 추구해왔던 쉽고 편안한 삶이 실은 위선으로 가득한 삶, 물질적인 행복을 정신적인 행복으로 착각한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동료 판사와 의사들은 물론 아내와 딸까지도 자신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고 거짓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살아있는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도록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그 묘한 전환점은 어린 아들이 만들어 주었는데,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휘젓던 그의 손을 아들이 붙잡아 입술에 갖다 대고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는 아들이 가여워졌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해.”
그러자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바로 이거야! 이렇게 좋을 수가!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셨고,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가을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가을이 느껴진다. 그래, 곧 겨울이 닥치겠구나, 죽음도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겠지. 하지만 이건 거역할 수 없는 냉엄한 진실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이 라틴어는 사실 죽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인 것처럼 말이다.
하퍼 수상님께,
수상님께 제가 보내는 첫 책은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처음에는 캐나다 작가의 작품을 첫 책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상님과 저, 우리 둘 모두 캐나다 사람이니 상징적인 의미도 있을 테고요. 그러나 저는 어떤 형태로도 정치적인 이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위대한 문학의 힘과 깊이를 이 소설만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다른 짤막한 작품을 제 머리로는 생각해낼 수 없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걸작입니다. 이 소설에는 허세도 없고 천박함도 없으며 가식도 없고 거짓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표현도 없고 지루하다고 느낄 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줄거리가 싸구려처럼 빨리 진행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남자와 그의 평범한 죽음을 꾸밈없이, 그러나 무척 설득력 있게 써내려간 중편소설입니다.
몸의 마음의 변화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 톨스토이의 눈은 섬뜩할 정도입니다. 슈바르츠를 보십시오. 그는 죽은 이반 일리치의 집에 방문해서 이반 일리치의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날 밤에 있을 카드놀이를 생각합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어떻습니까? 그는 이반 일리치의 아내와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낮은 의자와, 그 의자의 고장 난 스프링과 씨름합니다. 또 남편 이반 일리치를 잃은 아내, 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조차 우리 눈앞에서는 눈물짓고 슬퍼하지만, 사리사욕에 젖어 남편의 연금을 세세하게 따지고 정부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반 일리치가 처음 의사를 찾아갔을 때를 보십시오. 의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냉담하게 이반 일리치를 진료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의사의 그런 태도가 자신이 법정에서 피고를 대하던 태도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반 일리치와 그의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보십시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또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모두는 단단한 둑에 서 있는데, 어리석게도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는 쪽을 선택한 사람인 양 이반 일리치를 대하지 않습니까. 끝으로 이반 일리치와 그의 서럽고 외로운 몸부림을 눈여겨보십시오.
덧없는 것에 열중하고, 매정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명쾌하고도 간결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톨스토이는 삶의 천박한 외면만이 아니라 은밀한 내면까지도 파헤칩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사악함과 시대에 뒤떨어진 지혜를 늘어놓은 듯하지만, 그렇다고 따분한 도덕교과서처럼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어둠과 빛을 생생하게 표현한 듯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등장인물인 양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는 날, 우리 눈에 이반 일리치의 잘못들이 분명하게 보일 겁니다. 잘못들이 우리 눈에 너무나 명확히 들어와서,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될 겁니다.
여기에 문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읽어갈 때 우리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것입니다. 이런 부지불식간의 자기점검에서 때때로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짓게 됩니다. 이 소설의 경우에서 그렇듯이, 때로는 불안감에 싸여 부인하고 싶은 마음에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존재론적으로 더 단단해집니다.
수상님도 틀림없이 눈치 채셨겠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1882년과 오늘날의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또 고루하던 전제군주 시대의 러시아와 현대 캐나다 사이의 거대한 문화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우리에게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그 시대에 살면서 뼛속까지 러시아인이던 사람이 지역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보편적인 울림을 이루어낸 다른 소설을 제 머리로는 생각해낼 수 없습니다. 중국의 농부, 쿠웨이트의 이민 노동자, 아프리카의 목동, 플로리다의 엔지니어, 오타와의 수상 등 누구라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을 때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수상님께 게라심이란 인물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모습이라고 여기기는 힘들지만 우리 모두가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바로 게라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게라심 같은 사람이 옆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수상님이 무척 바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서 묵상하는 수사들도 바쁩니다. 천장까지 해야 할 일로 채워진 삶이 바로 어른의 삶입니다. (어린아이와 노인만이 시간의 부족에 시달리지 않는 듯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책을 읽고, 그들의 눈 속에는 어떤 삶이 채워져 있는지 눈여겨보십시오.) 그러나 노숙자든 부자든 누구에게나 잠자리 옆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서 밤이면 책이 빛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내려놓기 시작하며 마음이 차분해지는, 잠들기 전에 책을 집어 들고 잠시 몇 쪽이라도 읽는 그 순간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곳에 있기에 가장 완벽한 시간입니다. 물론 다른 시간에도 가능합니다. 단편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로 유명한 미국 작가, 셔우드 앤더슨은 기차로 출퇴근하는 시간에 단편소설들을 썼다고 합니다. 스티븐 킹은 좋아하는 야구 경기장에 가서도 쉬는 시간에 책을 읽었습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수상님께 하루에 몇 분이라도 짬을 내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얀 마텔
답장: 2007년 5월 8일 - 마텔 씨에게,
수상님을 대신해서 제가 선생의 편지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 소설에 대한 선생의 견해와 의견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선생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런 편지를 보내주신 것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수전 I. 로스 수상 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