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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탄을 떠나 쿠처로 향합니다. 쿠처는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도시입니다.
쿠처까지 이동거리는 대략 700km. 실크로드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최소한 10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호탄에서 쿠처로 가는 길은 민펑을 거쳐 타크라마칸 사막을 관통합니다. 민펑은 자그마한 읍에 불과한 도시였으나 주변에 니야유적지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니야유적은 제가 예전에 보았던 일본 NHK의 실크로드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입니다.
니야 유적은 BC 3세기부터 AD 4세기까지의 취락유적지입니다. 곤륜산맥에서 발원한 니야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서 7km, 남북 22km 크기로 20세기 초 영국의 도굴꾼 스타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집니다. 다양한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값진 것은 목간이나 가죽에 카로슈티 문자로 쓰여 있는 800점의 '카로슈티'문서라고 합니다. 이 문서에 의해 서역남로의 나라들의 실태가 밝혀지게 됩니다.
민펑을 지나 312번 사막공로로 들어섭니다. 이 길이 없을 때는 서역남로에서 천산남로로 혹은 반대로 가는길은 타크라마칸 사막을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누구도 세상에서 가장 큰 모래사막 중에 하나이며 이름조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을 감히 관통하려 하지 못했으니까요. 거의 대부분이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으로 모래의 80%가 강한 돌풍에 수시로 옮겨 다닌다고 합니다. 대낮기온은 70도를 웃돌며 열풍이 붑니다. 영화 트위스터를 터올리게 하는 갑작스럽게 몰라닥치는 회오리 돌풍'카리부탄' 황금을 먹는 개미떼 같은 전설속에 나올법한 것들이 인간의 접근을 불허합니다.
1993년 뚫린 이 길은 도로 관리를 위해 도로 양편에 풀들을 심고 관리합니다. 4,5km 마다 수정방이라는 물 관리소를 두어 사람이 살면서 물과 도로를 관리합니다. 근무자는 보통 부부가 같이 있는데, 8개월씩 근무를 한다고합니다. 한낮에 70도를 웃돌며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이 곳에 사람이 살며서 일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이 수정방은 모두 140여개 정도 되며,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의 휴게소 역할을 대신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이 사는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하나요^^
타크라마칸 사막의 북쪽에서 만나게 되는 타림강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이런 규모의 강이 흐른다는 것이 좀 신기합니다만, 이 타림강은 파미르고원에서발원하여 2719km를 흘러 호수로 합쳐지는 내륙강입니다.
밤이 늦어서야 쿠처에 도착합니다. 쿠처는 우리에게 구자(龜玆)왕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구자왕국은 중국 사서에 기원전 1,2세기부터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고대부터 일정한 국가체계를 갖추고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국력도 강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한나라 때 만해도 인구8만1천명에 군사 2만을 보유한 서역 36개국 중 9대국의 하나였습니다. 한나라와 관계를 중시하여 한나라 공주와 정략결혼한 구자왕은 후한 혼란기를 틈타 다시 일어난 흉노에 기대어 한을 배반합니다. 이에 후한의 화제는 서기 73년 반초를 파견하여 서역전역을 평정하고 구자를 복속시킵니다.
쿠처는 서유기에 서량여국(西梁女國)이라는 여인국으로 등장하는 곳입니다. 여인국의 여왕이 삼장법사를 마음에 두었지만 삼장법사를 이를 뿌리치고 떠납니다. 끝도 없는 사막중간의 오아시스에 나타난 여인국... 그리고 그 여인국 여왕의 프로포즈... 일반인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쿠처는 한반도와 인연이 많은 곳입니다. 혜초와 고선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키질 천불동의 한낙연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혜초 스님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727년 11월 상순, 당시 안서도호부가 자리한 이곳에 도착합니다. “소륵(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대도호부가 있는,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 승려들은 대승법을 행한다.”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왕오천축국전에는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혜초스님의 행적의 시간이 밝혀진 것이 이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쿠처에는 혜초만큼 유명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고선지는 당나라의 안서군 중급장교로 있던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안서군의 주둔지 쿠처에서 어린시절을보내게 됩니다. 20세에 유격장군으로 발탁, 다섯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서역원정을 단행합니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을 비롯한 72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며 사라센제국을 견제하고, 이 지역에 대한 당의 경영권을 확보함으로써 대당건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고선지 성공이 사라센과 관련이 있다면 실패 또한 사라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선지에게 결정적 패배안 안겨준 탈라스 전투도 사라센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에서 탈라스 전투는 어떤 전쟁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바로 당나라의 제지 기술자가 사라센에 포로되어 중국의 제지술이 서방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일행들과 시내로 나와 걸어봅니다. 아마도 여행의 진정한 재미는 이렇게 낮선 곳을 어슬렁거리며 사람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들과의 어울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어슬렁거리다가 한잔 생각이 나면 길거리 꼬치집에 주저 앉습니다. 괜히 얼마냐, 무슨 고기냐 하면서 통하지도 않는 말로 수작을 걸어봅니다. 해보겠다며 장사하는 사람 부채도 빼앗아 부채질도 하면서 시비도 걸어봅니다.
그리고 받은 양꼬치. 이때 먹은 양꼬치 구이의 맛이란, 다른 어느 곳에서 먹은 것과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두툼하면서 커다란 덩어리에 적당량의 살과 비게가 조화를 이루어 무척 부드럽고 감칠맛이 납니다. 이제 어디서도 양꼬치를 못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다음날 무려 네시간을 이동한 끝에 천산신비대협곡에 도착합니다. 거리는 실제 70km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도로 공사중인 관계로 기존의 도로가 아닌 임시도로를 동해서 도착합니다. 아마도 자전거로 가면 이것보다도 휠씬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천산신비대협곡은 쿠차강이 흐르는 지역을 따라 형성 된 기암지대에 있습니다. 위구르어로 케질리아(Kezliya)라 부르는데 유라시아 기판과 인도 기판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천산과 타클라마칸의 뒤틀림에 의해 형성된 자연적인 절경입니다. 위그루족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들어갔다가 발견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붉은산과 떡시루 같은 주름. 물에 갂여 끊어질듯 끊어질 둣 이어지는 계곡의 좁은 길. 천산신비대협곡이라... 독특한 풍광과 다양한 볼거리 제공해줍니다만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있는 것 같아 오히려 그 자연스러운 멋을 반감시키지 않나 싶네요. 천산대협곡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
같이 간 친구 녀석의 인증샷이군요. 글을 쓰면서 많이 들었던 얘기 중에 하나는 '너는 왜 안보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닥 인물이 좋지않아^^ 사진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만, 나중에 여행기를 생각하고 사진을 찍다보니 제가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나중에 보면 여행기도 제대로 못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2000장 가까이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제가 나온사진은 한 20여장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키질 천불동으로 향합니다. 쿠처 근처에는 석굴이 많습니다. 10여개의 석굴이 있으며 그 중 제일로 치는 것이 키질 천불동입니다. 키질석굴은 돈화석굴,운강석굴,용문석굴과 더불어 중국 4개 서굴로 꼽히며 중국의 석굴 중에서 가장 빠른 연대를 자랑합니다.
키질석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돈황의 막고굴에 필적할 만에 예술적 가치를 가진 석굴로서 4대 석굴 중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염수(鹽水)계곡 옆의 흙 절벽산인 밍우타그 산의 절벽을 뚫어서 석굴을 만들었습니다
이 석굴은 3세기부터 9세기까지 여러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의 어느 벽화보다고 서역불교의 요소가 잘 드러납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안타까워습니다만. 이것보다 휠씬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벽화가 상당부분 훼손되고 통째로 없어진 것 입니다.
바로 탐험대라는 이름으로 20세기초에 방문한 서양의 원정대가 대거 벽화와 유물을 약탈해 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문화재 약탈범은 독일인 르콕과 영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미국의 워너 그리고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 일본의 오오타니입니다. 악인열전이라고 해야 하나요.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들의 행적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키질석굴은 독일인 르콕에 의해 커다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몇안 되는 외국인이었던 르콕은 무려 10년동안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전역을 누비며 엄청난 유물을 탈취해 갑니다. 더더욱 어쳐구이 없는 것은 이렇게 가져간 벽화의 상당수가 2차대전 때 폭격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후진국의 유물을 가져와 잘 보호한다는 선진국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은 워너는 막고굴을 벽화를 떼어가기 위해 테이프를 벽화에 붙였다 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여 많은 벽화를 훼손시킨 인물입니다. 막고굴 벽화를 설명하던 막고굴의 연구자이자 고급해설원인 리신선생은 서슴없이 '도둑놈' 이라는 호칭을 쓰며 워너의 행적을 비난합니다.
일본인 오오타니가 약탈한 실크로드의 보물은 일본의 패망 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오오타니컬렉션' 이름으로 전시회까지 개최되었습니다. 도굴범이자 약탈자의 이름까지 붙여진 전시회가 열린다니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키질 천불동 중앙에 위치해 있는 구라마즙의 동상입니다.
구라마즙은 서기 344년 구자국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에 인도로 유학을 간 구라마즙은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와 법사가 됩니다. 구라마즙의 명성이 높자 이웃나라 전진의 왕인 부견이 구라마즙을 데려오라 명령을 내립니다. 서기 388년 부견의 명을 받은 장군 여광은 30여나라를 정복하고 구라마즙을 데리고 개선을 합니다 그런데 일행이 양주에 이르렀을 때 왕 부견이 부하 요장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광은 귀국을 포기하고 양주에 후양국(後凉國)을 세웁니다.
부견을 죽인 요장은 후진을 세운후 후양국에 구라마즙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만 여광은 거절을 합니다. 결국 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흥이 401년 후양국을 쳐 항복을 받고 구라마즙을 장안으로 데리고 옵니다.
이후 한문에도 능통한 구라마즙은 불경번역사업을 진행하며 불교 전파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합니다.
구라마즙이 키질천불동을 조성에 기여했다면,파괴되고 약탈당한 천불동을 보듬고 벽화의 문화적 가치를 다시금 세상에 알린 인물이 바로 조선족 출신의 화가 한낙연입니다.
한낙연은 3.1 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을 시작하여 블라디보스톡,상하이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납니다.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37년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국구투쟁에 헌신합니다. 1940년에는 국민당군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도 치루게 됩니다. 출옥후 난주로 자리를 옮긴 한낙연은 키질천불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석불벽화 복원작업에 착수하고 모사작을 그리고 학술논문까지 발표합니다.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키질 천불동의 가치는 세상에 일찍 알려지고 그 예술가치에 대한 연구도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한낙연의 흔적은 키질천불동 10호굴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키질천불동 탐방을 마치고 다시 쿠처로 행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쿠처 봉화대가 보입니다.
쿠처의 봉화대는 쿠처의 상징입니다. 요즘말로 랜드마크라고 하나요.
쿠처봉화대에는 슬픈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구자국에 어떤왕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음씨 또한 착해서 무척 아끼던 자식이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점술사가 와서 백일안에 공주가 죽을 운명이라고 알려줍니다. 고민고민하던 왕은 궁궐을 피해 봉화대에 공주를 숨겨놓기로 합니다. 백일간 공주에게 나오지 못하게 신신당부를 하고 하루에 한번씩 공주에게 음식을 날라줍니다. 그렇게 99일이 흘러 이제 하루만 넘기면 공주는 무사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안심을 하게된 왕은 마지막 식사를 공주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맛있게 식사를 한 공주는 후식으로 사과를 먹게됩니다. 사과를 베어물은 순간 사과속에 있던 전갈이 공주의 입을 물어버립니다. 그렇게 공주는 세상을 떠나고, 공주의 시신을 안고 울고 통곡하던 왕은 봉화대 위로 올라가 저 멀리 사막을 바라보다가 딸을 따라서 몸을 던지고 맙니다.
물론 저의 상상이기는 하지만 백설공주 이야기의 모태쯤 될까요. 그런데 동화는 해피엔딩인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 안타움을 더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동화의 경우도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백설공주나, 헨젤과 그레텔같은 동화도 원래는 다른 결말이었다고 하네요. 알고나면 조금 무섭습니다.(이 사진은 다음보리소골 카페에서 퍼왔습니다. 허락도 안 받고요. 미안합니다^^)
이제 두편 남았군요. 이번 주에 마무리 지어야 할 텐데요...
첫댓글 제가 양고기를 기피하기 시작한게 다음에 가는 쿠얼러부터 군요. 여기서 지금 글쓴이와 양고기와 빠이주 무지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가요? 내 몸에서 위그로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양의 노른내라고 할까? "아! 먹는것에서 냄새가 오는구나" 전에 유럽에 갔을때 백인들의 노린내, 한족 특유의 냄새, 한국인들의 마늘찌든내.... 처음 신장에 갔을때 조금은 불쾌하다고 생각하던 냄새가 제 몸에서 나는걸 느꼈습니다. 또 양꼬치 무지 좋아하고요. 아! 이런 상태로 한국에 가면 기피대상으로 몰리고.
왜 그 맛난 양고기가 싫어질까? 이상도 해라. 갈 수록 좋아지는 양냄새^^
생각해보니 쿠얼러가 아니라 투르판부터인 것 같은데....
예쁜 딸녀석이 저의 품으로 오지 않는것을 생각하니 이 냄새를 중국에서 없애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맥주 많이 마시고 가능하면 양고기는 먹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맛은 최곱니다. 양의 노린내를 없애고 입을 깔끔이 마무리 할때는 앞에서도 소개한 화미과입니다.
글쓴이의 양꼬치 컨셒은 제가 연출한것입니다. 뒤에있는 친구 액면은 우리와 비슷해 보이던데 20대 초반이라고 하더군요. 소고기와 양고기 두종류의 꼬치를 샀는데 역시 양이더군요. 소고기는 뻑뻑해서리...
소고기 맛은 떡갈비와 똑같습니다만 양이 휠씬 더 맛나지요
나머지 두편도 무척 기다려집니다. 친구분 음악T 님 건강은 (눈) 완전하게 회복되었는지요 우연히 대전, 충청 방에서 소식을 ...
이 참에 술도 안 먹고 조신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방학이 있는 선생님들이 부러워지네요. 아끼고 아낀 연차 1주일 냈습니다. 공부하겠다는 중3 딸래미 꼬셔 상해, 항주나 다녀올랍니다. 운남엔 언제나 가게 될려는지....., 실크로드는 또 어쩌라구......
상해는 아마도 겨울에 다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식구들과요. 운남은.... 다시 가야하는데 언제 가보나....
좋은 계절이네요. 상해 항주를 한여름에 갔었습니다. 상해 39도 조금 높고, 상주는 41도 습도는 거의 우리나라와 비슷하고요. 좋은 날씨에 따님과 좋은 추억 만드세요.
양꼬치 먹고잡다.빠이주에 양꼬치 여기서는 왜 그맛이 안나지요? 두분 다 잘 게시죠? 조만간 다시 뭉치죠(강진최 영우 입니다)
최선생님 그간 격조하셨습니다^^ 조만간 한번 뵈야지요. 양꼬치 먹고잡다.....
안녕하십니까? 강진은 별일 없지요? 제가 몸이 좀 좋아지면 한번 뭉칩니다. 쿠얼러의 양꼬치는 환상이었는데.. 쿠찬가? 맛사지도요.
안녕하셨습니까? 양꼬치에 소주를 먹어야 제맛이 날 것 같습니다. 우루무치 대합실에서 내팽겨쳐지던 소주 대병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다음에 대병 가져오면 빨리 먹어치울것을 제안합니다. 너무 아까워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군요. 가을의 햇살이 참 좋습니다.
그 먼곳까지 아끼고 아껴 간것인데 쿠처 양꼬치에 1잔 씩 돌리려고 하다가 그만 공안들위속으로 빨린 내 소주 아까버라
ㅋㅋㅋ 생각납니다. 그 미사일 아마 공항을 지키던 중국공안의 뱃속으로 들어갔것지요? 고량주 하나는 바닥에 내 동댕이치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가보고싶다,
멋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