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蒙古) 화림(和林)으로 가는 길?
○ 요즈음 T. V에서 방영되고 있는 “무신(武神)”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로 『“영 녕 공(永 寧 公) 준(綧)”이 ‘독로 화’【禿 魯 花 : 본인 주(注) - 곧 ‘볼 모’를 뜻하며, 질자(質子)라고도 한다.】가 되어 몽고(蒙古 : 달단)로 갔다.』고 전하는데, 당시 몽고(蒙古 : 달단)의 도읍지(都邑地)는 어디였을까?
이때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고종(高宗) 28년(1241)에 왕자(王子)라 하고는, 종실(宗室)의 “평양(平壤)공 왕기(王 基)”의 후손(後孫) “왕 준(王綧)”【용모(容貌)가 아름답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대의(大義)에 통달(通達)하였다고 전해진다.】을 비롯해서 대신(大臣)들의 자제(子弟) 십여(十餘)명과 함께 몽고(蒙古)로 가 독로 화(禿魯花)가 되었다. 이때 추밀원사 최린(崔 璘)과 장군 김보정(金寶鼎), 좌사간 김 겸(金 謙)도 함께 했다.』고 역사서【歷史書 : 동사강목(東史綱目) 10 / 下】는 전하고 있다.
○ <원사(元史) 본기(本紀) 태종(太宗) 13년> 조 기록(記錄)을 보면, 『秋, 高 麗 國 王, 王 綧 以 族 子 綧 入 質. : 가을, 고려국왕의 왕자인 준(綧)이 질자(質子)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 그렇다면 이때의 몽고(蒙古)의 도읍지(都邑地)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때는 원(元)이라는 나라이름이 없었으며, 몽고(蒙古) 또는 달단(韃靼)이라 하였다. 위에서 말하는 때가 1,241년이므로, 이때는 ‘징기스칸’의 후계자(後繼者)인 오고타이 곧 태종(太宗) (태종 : 1229~41 재위) 시절이며, 1241년 11월에 죽었다.【 1234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1241)는 중국의 금(金)나라를 정복했으며, 원(元)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 칸의 손자(孫子)인 “쿠빌라이 칸”(1259~94 재위)이었다.】
○ 화림【和林 : 외몽고(外蒙古) 중심부에 있다.】은 외몽고(外蒙古) 고륜(庫倫)서남에 있으며, 원(元)의 구도(舊都)라 하였으며, 일명 객 라 (喀 喇) 화림(和林)이다. 화 녕 로(和寧路)이며, 본명(本名)은 화림(和林)이며, 태조(太祖)가 이곳에 도읍(都邑)했다.
《청장관전서 제23권 / 송사(宋史)전 몽고열전(蒙古列傳) / 『화림(和林)』은 『오환(烏桓) 이북 내만(乃 蠻)ㆍ외라(畏 羅)ㆍ구성(九姓)ㆍ회골(回鶻)의 고성(故城) 화림(和林) 부근에 흩어져 살며, 대(代)마다 요(遼)ㆍ금(金)에게 조공(朝貢)하다가, 다시 달단(韃靼)에게 붙었다.』고 하였으며, 『와 활 태(窩 闊 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하였다.》
○ 이렇게 보면, 당시의 몽고(蒙古 : 달단)의 도읍지(都邑地)는 사막(沙漠)의 서(西)쪽 지방에 있었던 “화림(和林)”이란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막(沙漠)의 서(西)쪽 “화림(和林)”은 대략 어느 지방을 말하는 것일까?
㉠ “고비사막”의 서(西)쪽은 알타이산맥(금산 산맥)과 신강 성(新疆省) 이오(伊吾)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동쪽지방이다. 이곳에 “화림(和林)”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없는 것은 위에서 말하는 “회골(回鶻)의 옛 성(城)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곳은 오환(烏丸)의 동남(東南)쪽이지 북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 “준갈이(準喝爾)사막(沙漠)”의 서쪽지방은 “화림(和林)”이 위치해 있을 수 있는 가장 근접(近接)한 곳이다. 왜냐하면, 『오환(烏丸)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북쪽과 준갈이(準喝爾)사막(沙漠)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서쪽지방은 신강 성(新疆省) 서북(西北)지대와 카자흐스탄 동북(東北)지방으로 “아스타나”의 동쪽지방이다.
● 당시 몽고(蒙古)의 도읍지(都邑地)를 가려 한다면 기필코 통과(通過)해야 했던 곳이 곧 “사막(沙漠)”지대(地帶)다. 이것을 말해주는 시 한편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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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東文選) 第 1 8 卷. 북 행 (北 行) 이 수년(李 守 年)
오직 나라 생각 뿐 집을 잊은 열다섯 사람 / 國 耳 忘 家 十 五 人
음산 만 리 길에 황도로 향하누나. / 陰 山 萬 里 指 中 宸
탑 가의 낡은 집은 한(漢)대를 지내온 것 / 塔 邊 古 屋 曾 經 漢
하늘(구름) 끝 장성에선 진(秦)을 회상하겠지 / 雲 末 長 城 暗 想 秦
달빛 차가운 모래 벌에 소와 짝이 되고 / 月 苦 沙 場 牛 作 伴
바람 찬 가죽장막에 개와 이웃하면서 / 風 寒 毳 幕 犬 爲 隣
전 휘감고 잠자니 이불보다 따스하고 / 擁 氈 夜 臥 溫 於 被
쇠똥 주어 아침 취사 장작을 대신하리. / 拾 糞 朝 炊 當 却 薪
<중략>
이들은 지금 《 조국(祖國)에 있는 부모형제(父母兄弟)들의 걱정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오직 조국(祖國)만을 생각하며 몽고(蒙古)의 대궐(宸)로 향해 가고 있는데,『음산(陰山) 만 리(萬里) 사막(沙漠)지대를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여정(旅情)에 낡은 집은 한(漢)나라 때, 지은 것이며, 아득히 멀리 보이는 장성(長城)은 진(秦) 때 축조한 것이며, 차가운 날씨에 달빛도 차가운 모래벌판은 곧 『사막(沙漠)의 추운 밤』을, 가죽으로 만든 장막(帳幕) 속에서 개와 함께 잠을 자며, 또 아침밥을 먹으려 하면 쇠똥이나 말똥을 주어 취사(炊事)를 해야 한다.』는 답답한,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질자(質子)들이었기 때문이다. 》【질자(質子)는 인질(人質)을 뜻한다.】
○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臺木)은, 당시 몽고(蒙古) 서울인 “화림(和林)”이었으며, 이곳을 가려면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며, 이곳에서 말하는 사막(沙漠)은 “고비사막”일 수 없다. 이곳의 서쪽에 “화림(和林)”이란 곳은 없기 때문이다. 몽고(蒙古)의 본래 인종(人種)의 형상(形相)을 생각해 보면, 왜 이들이 ‘중앙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 몽고(蒙古)는 과연 어디에서 시원(始原)하며, 이들의 진짜 인종(人種)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2012년 08월 23일 <글쓴이 : 문 무>
첫댓글 몽골의 시원을 추적할 땐...그 최초부터 해야지 구한말기 이전쯤의 연행사들 기록에만 의존하면,,,엄청난 오차가 발생한다 염려됍니다.
몽골=달단(타타르)...이것도 구한말 근처 연행사들의 말이지 그 시원을 정확히 말한게 아닙니다.
한 시대의 고전만을 절대적인 지명과 민족명 유래로 인용하면 그 이전부터의 력학관계에 의한 영토와 민족병합 변천을 다 무시하게돼는 오차가 발생합니다.
몽골사에 수 없이 나오는 달단(타타르)은...요나라와 금나라의 주구로서 몽골인들을 대리통치하며 괴롭힌 몽골의 최대 원수들로 나옵니다,
그러기에 징기스한은...마차바퀴보다 큰 타타르 남아들은 모조리 죽이라 했는데...타타르계 첩실 자매의 간곡한 설득으로 이를 접고...타타르인들을 서정(西征)군대의 용병으로 사용하게 되면선...유럽인들이 목격한 몽골군대엔 타타르가 많아 몽골군=타타르란 착오가 생기게 됀 겁니다.
북원(北元)인 현 외몽골지역에서 타타르를 몰아내고...다시 타타르의 본거지인 신장성 북부 알타이남부와 카자흐스탄지역을 공략하는 과정이 거란의 잔당들이 고려로 도피하며 침공하는 서요(카라키타이)의 말기때 현상이고...
명나라는 후대 이 달단지역과 오고타이한의 직할지인 티벳과 동남아를 인수한 투글룩티무르왕조인 무굴리스탄을 말하며...후대 명(무굴)이 달단(타타르)여진에 복속돼니...서쪽 몽골인 사한국 지대는 타타르(청나라)의 통치에 들어와 이전의 지배족 몽골이란 명칭과 원래의 원주민인 타타르란 명칭으로 혼칭되게 됀게...청나라 집권후의 당연한 현상입니다.
현재의 외몽골인 북원(北元)은...이미 명(무굴)과 고려&조선에 토벌됀 기황후세력이니...
몽골의 시원지인 현 몽골초원은...무굴제국 이후엔 몽골의 중심지가 아니며...조선의 함경북도가 됐을게 뻔하다 전 봅니다.
잔존 세력들이 서북쪽 사한국으로 도망하고...다시 몽골의 원수들였던 타타르(달단)여진들의 청나라가 들어서곤...
영원히 지들을 몽골족이라 할 수 없었던게 조선 함경북도(외몽골)의 처지였기에...
당대 자신들을 몽골족이라 자칭할 수 있었던 지역은...킾착크한국 지역인 러시아지역뿐인 것이며...
킾차크(카삭크=코사크)몽골인들이 백러시아와 연계해 현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와 외몽골을 다시 치면선...
타타르(달단)여진중 건주여진인 나르친(날진=여진=친=청)...이들을 광의적 동족으로 볼 땐 타타르(달단,달자,달달)이라하고...이민족으로 볼 땐..몽골이라 혼칭했을것 역시 뻔하다 하겠습니다.
고로 구한말 전기쯤인 연행사들의 기록들에 청나라(날친=녀진)인들의 서북에 몽골와 달자들이 있다 기록됍은...그 시대 기준인 것이지...그 시원인 징기스칸의 고향이 동쪽 현 외몽골임을 감안치 않은 기록이니...
연행사들의 기록만으로 몽골의 시원지를 유추함은 큰 오차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은 제가 너무 자주 떠들었으니 이쯤하고...
오고타이(우구태)몽골의 본거지인 화림(和林)여...카라코름(하라호름)의 호름(코름)을 한자로음차한 글일겁입니다.
객라(喀 喇)화림(和林)이라 할 땐...하라호름(카라코름)...하라(카라)란 발음은...현재에도 k2봉 근처 파키스탄으로 가는 길쪽의 지명으로...현재도 객라곤륜(카라쿤룬=喀 喇崑崙)이라 명명돼니...
오고타이(오구태)한국의 직접통치영역인 오일라트(중가르)의 영지인 신장성 중서부와 카자흐스탄동부 티벳과 인도북부중에 카라코름(하라코름)이 위치했을건 뻔하고...현재도 객라곤륜이라 명명됀 지역이 있으니...그곳 어디가 오구태(위그루)한국의 황도인 객라화림 자리라고 전 봅니다.
징기스한의 아들들 본체 이름이 주치,차가태,오구태,훌레그등이라하는데...전 아니라고 봅니다.
이름이 아니라...그들이 분봉지로 받은 지역의 전통적인 지역명인 것이고...
오구태한국의 경우는...옛 우태백제(위구르=위나라)의 통지지명이요...현 신장성 서부와 티벳 인도북부와 동남아를 이르고...차가태한국이라 할 땐...우태(백제)가 서남쪽으로 이주한...페르샤지역(비류,백제)을 이른 것으로...후일 사한국인들이 건주여진 청나라와 쟁패할 때의 오일라트 제국을 준가르라고도 했다 함은...오일라트(와랄)는 우랄 남부 차가태지역인 서쪽(오론죽,바론죽)고려...중가르는 동쪽(준죽)고려이기에 준가르(준고려=동고려)란 뜻이라봅니다.
글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은 나름대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글의 요점을 오해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몽고의 시원지를 근세기의 기록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원지를 반대로 추적해 보는 역발상입니다.
오백년, 일천년 시차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이나 댓 글에서 주장하시는 내용이 대동소이한 것 같은데요. 다만 백제의 페르샤 이야기는 전 부정적으로 봅니다. 만약 이들이 페르시아계라면 인종족으로 전혀 다른 계통이며,
고구려 역시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견해는 중앙아시아 삼국설이나 조선설은 부정적입니다. 대개 중앙아사이조선이나 지중해 조선설은,
저도 사실은 문무님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중심이 자꾸 서역으로만 이동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글을 쓴 겁니다.
문무님께서 근세의 확실한 역사증거부터 정확하게 역으로 역사고증을 하시는 것도 아는데...자칫 이 글만으로 자~ 문무님도 몽골의 시원과 중심은 내내 서역였이니 그 동쪽에 있었단 금나라는 신장성 정도가 중심이고...금나라는 고려의 동남쪽에 있었으니...고려와 그를 이은 조선의 중심은 파미르 서쪽 카스피해나 지중해일대다! 란 억측들이 자연스레 태동돽까 걱정되어 궂이 집고 넘어가잔 차원였습니다.
저도 백제의 주 중심지는 황하일대 대소왕의 부여를 중심으로 고구려에 남으로 밀린 한수(양자강 )일대라 보긴하는데...백제가 병합했단 가야는 곧 삼한이요...가야(가락국)은 곧 월지란 말이 있고...월지는 현재의 중국사학계에서도 중원 서부와&페르샤로 비정하고 있으니...백제의 서부영토는 최소 파키스탄 고갯길까진 미쳤을 것이란 생각에서 온조백제에 밀린 별지의 비류백제를 파키스탄 유역과 인도북부로 산정한 비류(페르샤)...백제(白=차가태)의 발상을 한 겁니다...음가의 유사성만을 본건 아니니 미세한 가능성에도 가능성을 두고 싶습니다.
상고사의 토막글들을 보건데...백제가 부여의 적장자요...고구려는 이를 인수한 신흥국(북부여)로 분명 표기됐는데...부여에 대한 글들을 보건데...부여는 백민(白民)이요...그래서 몸도 하얗고 털도 하얗다 했으니...이는 말 글대로 현재의 노랑머리 백인들보다 더 백인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지...현재의 우리와 모습이 다른 역사기록이라 그걸 광명족에 백의민족이라 그렇다느니 억지를 필 이유가 없다 보입니다.
알알해와 알타이근처의 부여인들 상당수가 백민(백인)이란 얘기요...그들이 원조 아리안(아리랑)인 것이고...
이들이 고구려계에 병합당했으니...고구려나 신라는 백인과 황인 혼혈로 봄이 자연스럽고...고구려에 밀린 남부여 백인들은 남으로 파키스탄 고개넘어 인도 북부와 페르샤로 이동해 인도계 아리안의 시원인 사카(석가)족이 돼는...스키타이족(색국)을 이르고...서선비,숙신은...서북으로 밀렸다 북유럽을 휘젖는 북방스키타이&섹슨족을 이른다 봅니다.
현 서역의 백인들은 알타이에서 이동한 부여(비려,비류) 백민(백인)들과 원체의 서역 토인들과의 혼혈이지...서역원주민들이 역사를 지배한 본래의 순수 백인들였다고 전 보질 않습니다.
털이 하얀 백민(부여인)들과 털이 적갈색인 서방인들이 혼형됀게...현재 서역의 주류인종인 노랑머리 백인들이라 전 분석합니다.
타클라마칸 일대에 나오는 순수 백인미라들은 서역에서 사냥온 뭐시기가 아니라...서역으로 진출하기 전의 백민(부여인)들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샤먼 제국>에서 많은 자료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궐한 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적으로 파 들어가면 비판의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대부분의 것이 샤먼과 음차이야기로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사를 연구하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니 침묵하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도 고증될 수 없는 것들은 그저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가버리면 끝이지요. 많은 연구가 반복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샤먼제국 인용 주장들은...일부는 맞으나 그 중심점 비정엔 상당한 억측이 많은 편향적인 역사연구법이라 걱정하고...결국 그게 대륙조선사연구 전체를 국수주의적 환타지 메니아들의 찻잔속의 미미한 발호로 오인돼게 만들수 있다 걱정하긴 마찬가지오니...저도 십분 주의하겠습니다.
요즘 사정상 연구한 건 없어 본문글을 못 쓰고 댓글로 하려니... 너무 댓글란이 번잡하게 돼어 죄송합니다.